[중국근대사] 국공내전에 대한 이야기 11화 <태평양전쟁의 발발과 미국의 참전>
1941년 12월 7일 오전 7시 40분(동경 시간 8일 오전 3시 10분)
나구모중장 휘하 연합함대가 진주만을 기습하여 미 태평양함대를 괴멸시킵니다. 그보다 수시간전에 일본군 제18사단 23여단은 영국령 말레이반도의 코타발에 상륙하여 인도군과 교전에 들어갑니다. 같은날 오후 홍콩 역시 전면적인 공격을 받습니다.
유럽과 중일전쟁에 이은, 바로 태평양전쟁의 발발이었죠.
졸작 영화 진주만의 한 장면. 아시다시피 영화 전반부는 지겨운 로맨스지만 후반부의 전쟁신은 그럭저럭...-.-
※ 출처 : http://blog.daum.net/bongraesan/944)
다음날인 8일 루즈벨트는 의회에서 대일선전포고를 요청하고 의회는 1명빼고 만장일치로 가결함으로서 2차대전에 전면적으로 참전합니다. 이전부터 간접적으로는 영국과 중국을 지원하고 있었던 루즈벨트는 정치권, 행정부의 보수관료들과 국민 대다수가 고립주의를 찬성하고 있었기에 대놓고 추축국을 적대하거나 연합군을 지원할 수 없는 입장이었지만 이 날 의회에서 그는 일본의 비열한 공격과 만행을 과장된 제스쳐나 선동적인 구호 없이 차분하고 있는 현실 그대로 국민들에게 전달하여 의회와 국민들의 지지를 얻어내는데 성공합니다.
세계적인 명연설중 하나로 꼽히는 루즈벨트 대통령의 대일선전포고 장면
※ 출처 : http://blog.naver.com/laktaca/60101391057
출처 : http://blog.naver.com/laktaca/60101391057
미국이 일본에 선전포고한 다음날인 12월 9일 중국은 정식으로 대일선전포고를 합니다. 그 전까지 중일 양국은 서로 정식으로 선전포고를 하지 않고 단교도 하지 않은 어정쩡한 관계였습니다. 원래라면 37년 7월 7일 노구교사변으로 사실상 양국은 전면전에 들어간 것이나 다름없었음으니 이때 외교를 단절시키고 선전포고했어야 함에도 말이죠.
이것은 매우 복잡한 이해관계때문이었는데, 양국에게 있어 중일전쟁은 애초에 치밀하게 준비된 전쟁이 아니었고 공식적으로 전쟁상태에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괜히 국제적인 간섭이나 경제제재나 받게 되지 않을까 하는 우려때문이었습니다. 양측끼리도 무역과 물자 교류는 지속적으로 이루어집니다. 중일전쟁은 "전쟁"이 아닌 어디까지나 국지적인 "충돌"이자 "사변"일뿐이라는 논리였죠. 이런 기묘한 관계는 미국, 영국이 정식으로 일본과 맞붙게 되고 중국이 정식으로 연합국의 일원이 되었음을 인정받게 되자 더이상 숨길 필요가 없게 된 것입니다. 덧붙여, 같은 날 김구선생이 이끄는 우리의 임시정부도 덩달아 대일, 대독선전포고를 하죠.(뭐 상대방은 생깠겠지만)
영-미의 대일 참전은 장개석으로서는 그야말로 꿈에서도 그리던 상황이었습니다. 당초 그의 전략 자체가 중국 단독으로 일본을 무찌르는 것이 아니라 중국은 약하니까 시간을 벌면 언젠가는 강한 얘네들이 도와줄 것, 라는 기대감에 있었으니까요. 그러나 이는 얼마나 철없는 환상이었는지 금새 깨닫게 됩니다.
소위 "이이제이의 전략"이라는 것은 중국의 전통적인 전략입니다만, 어디까지나 이들을 콘트롤할 수 있는 외교적 능력을 갖출 수 있을때의 얘기인 것입니다. 그렇지 못한다면 되려 자기가 먹힐 수 있죠. 장개석은 물론이고 중국의 역사에서 이런 전략이 대부분 실패로 끝난 것은 그런 외교술은 없이 무턱대고 외세에만 의존하려 하는 안이한 자세 때문입니다.
장개석 역시 국제 정세나 외교적 감각에는 어리석을만큼 문외한이었습니다. 그는 막연히 외세 강대국들이 알아서 개입할 것이라고 기대했을뿐, 그들을 내편으로 만드려고는 별다른 노력도 하지 않았고 기껏 노력한 것도 별 효과가 없었습니다. 태평양전쟁이 발발하기전 영, 프는 중국에 대해 우호적이기는 고사하고 되려 중국의 전쟁 수행과 물자 확보를 훼방놓는 쪽이었습니다. 버마와 인도차이나, 홍콩등을 경유하여 중국으로 들어가는 무기와 군수 물자를 압류하고 차단시키기 일쑤였죠. 이는 상해와 광주, 해남도 함락으로 해안이 봉쇄된 중국에게는 매우 치명적이었습니다. 이들은 중국과 일본을 놓고 택하라고 했을때 중국을 택하기 위해 일본을 적대해야 할 아무런 이유도 없었습니다.
좀 더 도움이 된 것은 소련이었습니다. 30년대 후반 스탈린은 극동에서 일본을 견제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중국을 지원합니다. 그들이 제공한 T-26전차와 I-15, I-16, SB-2 폭격기는 그야말로 가뭄의 단비라 할만큼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장개석이 만든 잡동사니 기갑사단 "제200사"소속의 전차 절반은 소련제 T-26이었죠. 1천대의 소련제 항공기와 최대 2천명에 달했던 소련인 조종사들은 나중에 미국인 용병대 "플라잉 타이거즈"가 창설되기 전까지 일본의 제공권을 위협했습니다.
41년 4월 일소중립조약에 의해 소련 군사고문단이 전면 철수하고 물자 유입도 거의 중단됩니다. 고작해야 서쪽의 중소국경에서 약간의 물자를 실은 마차들이 간간히 사막을 건너 유입될뿐이었습니다. 장개석은 전쟁에 의해 일본을 고립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냉엄한 국제현실에서 되려 고립된 것은 중국이었죠.
한편, 미국은 반개입 고립주의가 팽배한 상태였습니다. 당시 미국의 군사력은 도무지 전쟁을 할 입장이 아니었습니다.
14만 5천명의 육군과 2만의 해병대는 불가리아, 루마니아 육군보다도 규모가 작았고 해군의 함정은 대부분 1차대전이나 20년대에 건조된 구식이었습니다. 전투기의 성능이나 숫자도 유럽과 일본보다 훨씬 뒤떨어졌죠. 훈련과 전투태세도 매우 형편없었고 국민들의 군대에 대한 인식은 "단지 실업율을 감추기 위한 공공근로"같은 것이었습니다. 여기에 비하면 뭐 지금의 자위대 위상은 양반에 속하지 않을지.
국제 정세에 대한 감각과 안목이 있는 루즈벨트는 돌아가는 상황을 볼때 이렇게 손놓고 있어서 될 일은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이미 37년 10월에 시카고에서 "반독재,반추축 평화연설"을 했던 그는, 그러나 비판적 여론때문에 마음대로 할 수가 없었습니다. 러들로우하원의원이 고립주의 입법을 강력하게 추진하는 등 미국내에는 1차대전때같이 또 한번 전쟁에 개입하는 것을 매우 두려워하는 분위기였습니다.
그럼에도 루즈벨트는 중국과 극동에서 일본의 팽창을 견제하려고 많은 노력을 합니다. 중국에 대한 군수 물자 수출, 석유와 선철의 대일 수출 감축, 대중 차관 제공, 센놀트 비행단 파견 등 말이죠. 이는 단계별로 진행되는데 일본이 인도차이나를 점령하자 41년 7월에는 석유 수출 중지, 미국내 모든 일본 자산 동결을 명령합니다. 또한 태평양함대를 진주만으로 전진배치시킵니다. 이는 일본에게는 치명적인 위협이었고 전쟁을 결심하는 결정적 원인이 되죠.
전후 사정을 전반적으로 보았을때 그가 중국과 장개석에 대해 특별히 우호적으로 생각하고 중국의 주권을 존중해 주었다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지나치게 설치다 굳이 주변 모든 나라를 적으로 만든 일본이 스스로 제 무덤을 판 것이죠. 일본은 중국 한나라에게도 이기지 못하면서 영, 프, 네덜란드를 협박하고 프랑스령 인도차이나를 무단 점령함으로서 미국까지 위협합니다. 외교능력이 부재하고 국제 감각이 결여된 것은 일본도 마찬가지였죠. 일본은 미국에 평화협정을 제안하겠다고 하면서도 그 어떤 양보나 타협도 전혀 고려하지 않은채 미국의 일방적 양보만 강요합니다. 헐이 "우리 미국보고 항복하라는 거냐?"라고 받아들이지 않자 "운을 하늘에 맡긴채" 진주만 기습을 하죠.
41년 12월 31일, 루즈벨트는 장개석을 태국과 베트남을 포함한 중국전구 최고사령관으로 지명합니다. 42년 1월 1일 워싱턴에서 26개국 공동선언이 발표되고 중국은 연합국 4대 주요국으로 인정됩니다. 또한 5억달러의 아무 조건없는 차관이 장개석에게 제공됩니다. 이것은 청말이래 수십년간 약소국으로만 취급받던 중국이 강대국으로 인정받은 것이었고 그 어느 군벌이나 정치가도 해내지 못한 장개석만의 업적이었습니다. 그동안 참아온 인내와 희생의 결과였죠.
그러나 세상에는 공짜가 없다는 것을 곧 깨닫게 됩니다. 공식적으로는 연합국의 일원이 되었지만 영-미는 여전히 그들을 대등한 동맹국으로 보지 않았습니다. 연합참모회의에도 배제되었고 중국은 연합국의 전쟁 지도에 아무런 영향력을 끼치지 못합니다. 또 주요 군사 작전에 대한 어떤 정보나 사전 설명도 제공되지 않죠. 게다가 중국전구 참모장으로 부임한 스틸웰중장의 야심과 간섭은 중국의 주권을 무시하고 장개석의 위신을 철저하게 실추시킵니다.
장개석에게 미국의 지원과 원조는 분명 고마운 것이고 꼭 필요한 것이었지만 장개석의 생각에는 그동안 중국은 충분히 제 역할을 해 왔던 것이고 당연히 받아야 할 것을 받는 것에 불과한 것이었습니다. 적어도 장개석은 철저한 민족주의자에 줏대가 있는 인간이었고, 우리의 선조대왕이나 이승만옹처럼 제 권력만 확보할 수 있다면 남에게 뭐라도 내줄 수 있는 그런 쓸개빠진 인간은 아니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스틸웰과의 불화는 당연한 것이었죠.
조지프 스틸웰(1883. 3. 19 ~ 1946. 10. 12) : 매우 유능한 군인이었으나 개인적 야심도 맥아더만큼이나 큰 인물이었습니다. 장개석의 참모장이었지만 중국군의 모든 것을 원했고 장개석이 그런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자 "개X끼"라며 욕을 하죠. 라이프지 2차대전사에서는 스틸웰의 모든 것을 옹호하고 나쁜 것은 장개석, 라고 서술하지만 그의 요구는 사실 지나친 것이었고 중국의 주권을 철저히 무시하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과연 스틸웰 개인의 독단이었을지는 의문이며 오히려 루즈벨트의 지시와 방침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사진출처 : 위키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