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근대사] 국공내전에 대한 이야기 9화 <국공의 짧았던 밀월과 반목>
1937년 8월 22일.
그 "서안사변"으로부터 9개월, 중일전쟁 발발이후 근 한달후인 이날 제2차 국공합작이 정식으로 합의됩니다.
중국 공산당이 소비에트 정부를 취소하고 "홍군"이라는 이름을 쓰지 않으며 토지의 폭력적 몰수 중지, 삼민주의와 남경정부에 대한 복종을 선언하자, 장개석도 공산당을 합법으로 인정하고 단결구국을 호소하는 담화를 발표하죠. 이에 따라 연안의 홍군은 국민혁명군 제8로군이자 제18집단군으로 개편됩니다. 총사령관은 주덕, 부사령관이 팽덕회, 참모장 섭검영, 정치국장 임필시 등, 총병력 3개사단 2만명은 산서군벌이자 제2전구 사령관 염석산의 지휘에 들어갑니다. 담당구역은 산서 북부지역이었죠.
(출처 : http://www.sundaychina.net/main/bbs/tb.php/ca0/55)
각 사단은 2개 여단 편제(4개 연대)이며 개편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제115사단 : 홍군 제1방면군, 제74사단을 근간, 사단장 임표, 제343여단, 제344여단, 1만 5천명
제120사단 : 홍군 제2방면군, 제27, 제28군을 근간, 사단장 하룡, 제358여단, 제359여단, 1만 4천명
제129사단 : 홍군 제4방면군, 제29, 제30군을 근간, 사단장 유백승, 제385여단, 제386여단, 1만 3천명
이와는 별도로 남쪽의 산악지대에 흩어져 활동하던 빨치산들이 있었는데 인원수는 약 1만 3천명정도였습니다. 10년간이나 정부군의 토벌에 쫓겨다녔던 이들은 장개석과 남경정부에 대한 감정이 매우 좋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당 중앙에서 적극적인 설득끝에 한달이나 지난후에야 통째로 묶어 신편 제4군으로 편성됩니다. 군장은 섭정, 부군장은 항영이었죠.
이들은 연안의 패밀리들과는 별개로 제3전구 사령관 고축동의 지휘에 들어가는데 13개성의 광범위한 지역에 흩어져 있어 정규 편제를 갖출 형편이 되지 못해 총 4개 지구(1개지구당 2개 연대씩)로 나누어 적후방 파괴같은 유격활동 임무를 맡습니다.
8월 22일부터 25일까지 섬북 낙천현에서 중앙 정치국 확대 회의가 개최됩니다. 여기서 중국 공산당의 향후 전략 방침와 노선을 정하고 11명으로 구성된 중앙군위를 편성합니다.
주석 : 모택동, 부주석 : 주덕, 주은래
위원 : 모택동, 주덕, 주은래, 장문천, 팽덕회, 임필시, 임표, 하룡, 유백승, 서향전, 엽검영
이리하여 홍군에서 개칭된 팔로군은 섬북의 연안을 떠나 황화를 건너 산서성으로 들어가 바로 얼마전까지 철천지의 원수였던 중앙군을 비롯한 산서군, 서북군, 동북군과 연합해 일본군과 싸우게 됩니다.
그러나, 모택동을 비롯한 당지도부의 속내는 합작직후 모택동이 비밀리에 각 간부들에게 내린 지시에서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중일전쟁은 우리 당이 발전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이다. 국공합작은 70%가 자기 발전이고, 20%는 타협이며, 10%만이 일본과의 투쟁이다. 이를 위하여 제1단계는 타협이며 표면상으로 국민당정부에 복종하지만 실질적으로는 당의 생존과 발전을 엄호한다. 제2단계는 경쟁단계로서 공산당의 정치와 군사력의 기초를 2~3년내에 완성하여 국민당 정부에 대항할 수 있도록 발전시킨다. 제3단계는 공격단게로서 공산당의 근거지를 확대시키고, 국민당 정부군을 고립시켜 주도권을 장악한다" <중국인민해방군사, 국방군사연구소>
"국민당에 대해서 고도의 경계심을 유지해야 한다. 우리 군의 행동은 우리 자신에 의해서만 결정될 수 있을 뿐 장개석의 명령에 따를 수 없다. 우리 홍군이 언제 어느 전선으로 가서 싸울 것인가는 오로지 우리 사정에 의해서 결정될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조속히 출병할 필요가 없으며 출병해도 한번에 모두 나가서는 안된다. 일부는 남아서 당중앙과 섬북변구를 지켜야 한다"<낙천 중앙정치국회의에서>
"홍군은 본질적으로 분견대다. 홍군은 어떠한 결정적인 역할도 수행하지 않는다" <장제스 일기를 읽다, 레이황>
중국 인민들의 항일에 대한 열망에 편승해 그토록 "단결"과 "항일"을 주장해 왔던 그들이지만, 실상은 오로지 자기들의 이익만을 위한 기회로만 생각했던 것입니다. 이런 이중적인 태도는 장개석에 대한 불신때문이기도 하겠지만 그들의 원래 방식이기도 했습니다. 따라서 곧이어 벌어지는 반목과 갈등에는 그들 자신도 절반의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모스크바로부터 돌아온 왕명이 "항일투쟁을 위해 적극적인 연합과 복종"을 주장했지만 모택동은 우경투항주의라며 묵살합니다.
뭐, 장개석도 이들과 진심으로 화해했다고 생각지는 않았겠지만요.
"공산주의자들의 기회주의와 속임수에 주의해야 한다. 그러나 이들에 대해 지나치게 걱정할 필요는 없다. 나는 그들의 사악함을 정상적인 방법으로 상대하고 그들의 교활함을 솔직함으로 대응해야 한다"<37년 10월 25일, 장제스 일기를 읽다>
아무튼, 전쟁은 화북과 양자강 하류를 중심으로 급속도로 확대되어 갑니다. 7월 30일 북경이 함락되고, 9월 24일 하북의 보정, 10월 10일 석가장이 함락되는 등 전황은 갈수록 악화되어 갑니다. 장개석과 중국군은 모든 것을 쏟아부어 열성적으로 싸웠지만 압도적인 일본군의 공세에 밀려 연전연패를 당합니다. 그럼에도 이 전쟁이 악전고투의 연속인 것인 일본군도 마찬가지로, 중국군은 도처에서 격렬한 저항을 펼칩니다. 상해전역에서는 양군 모두 주력을 투입해 일대 결전을 벌여 3개월이나 처절한 혈투가 벌어졌고, 화북에서는 탕은백의 제13군이 남구에서 20일간 저항하다 퇴각합니다.
개전 초반에는 팔로군은 국민당군과 적극적으로 연합해 정면의 싸움은 국민당군이, 후방의 유격작전은 자신들이 맡아 큰 활약을 합니다.
2개월만에 화북의 대부분을 제압한 일본군은 9월 13일 대동을 점령하고 산서성까지 위협합니다. 제2전구 사령관이자 "산서왕" 염석산은 전군을 집결시키고 중앙군의 지원을 받아 자기 근거지 수비에 나섭니다. 평형관은 산서성의 수도인 태원 북쪽 400km 오대산맥에 펼쳐진 만리장성의 주요 관문중 하나인데 태원 수비의 핵심이었습니다. 이 평형관을 약점으로 본 일본군 제5사단(사단장 이다가키 세이시로)과 관동군 혼성2여단, 혼성15여단이 9월 22일 산서공략을 위해 침공해 옵니다.
중국군 병력은 산서군을 주축으로 팔로군 115사단과 위립황의 중앙군, 서북군 등 11개군 20개사단 15만~20만에 달했고 산서군의 명장인 부작의가 지휘를 맡았습니다. 이들은 일진일퇴를 거듭하여 치열한 항전을 했으나 급조된 연합군이다보니 지휘계통의 혼란과 협조 부족, 화력의 열세로 인해 10일간의 혈전끝에 평형관은 돌파당합니다.
흔히 말하는 "평형관대첩"은 유격전을 맡은 임표의 제115사단이 일본군 제5사단 21여단 휘하 보급부대를 습격해 차량 100여대를 파괴하고 100여명을 사살한 것으로 사실은 평형관 전역의 극히 일부 전투에 불과한 것이나 어쨌든 팔로군의 첫 승리였고 공산당은 "3천명을 섬멸하고 소총 1천정, 대포 2문을 노획했다"라고 대대적으로 선전합니다.
평형관전역은 개전초반 화북에서 가장 치열했던 전투로 일본군도 막대한 피해를 입습니다. 그러나 평형관이 돌파당하고 서쪽에서도 일본군 제20사단이 침공해 오자 태원은 고립되었고 일본군은 중국군이 항복권고를 거부하자 총공격을 개시해 11월 9일 태원을 점령합니다.
>
38년 2월에는 "신두령"전투에서 팔로군은 일본군에게 매복승리를 거두었고, 3월에는 중국군 주력중 하나인 제5전구(사령관 : 이종인)휘하 손연중의 서북군(제2집단군), 탕은백의 중앙군(제20군)이 태아장을 침공한 일본군 2개사단(제5사단, 제10사단)과의 전투에서 일본군을 격파하여 최초의 대승을 거두는데(중국측주장 : 2만이상 살상, 일본측인정 : 전사 2천 2백명, 부상 9천8백명) 여기서도 팔로군이 유격전을 펼쳐 큰 전과를 냅니다. 양자가 협력하고 제 역할을 잘해준다면 얼마든지 우세한 일본군을 상대로 중국군도 이길 수 있음을 보여준 것이었죠.
10월 21일에는 광주가 함락되고, 27일에는 무한이 함락됩니다. 이는 중국의 전쟁수행에서도 치명적이었지만 일본도 전선이 지나치게 길어지고 보급선이 한계에 직면하여 전선은 소강상태가 됩니다. 일본군은 17개 사단 50만명에서 개전직후 24개 사단 100만명으로 급히 증강하고 38년에는 34개 사단 113만으로 증강시킵니다. 이중에 총 32개사단을 중국에 파견했지만 이 것으로도 중국을 이길 수가 없었고 전투는 국지적인 접전의 연속이 됩니다. 더욱이 항구와 대도시만 점령한채 점과 선으로 근근히 이어져 있었고 병력은 중대, 소대 단위로 흩어져 촌락에 배치되어야 했습니다. 따라서 수시로 중국군의 역습을 받아 고립되거나 괴멸되어 슬금슬금 소모되어 갔죠. 개전후 5개월만인 37년 12월 남경함락까지 7만이상의 사상자를 냈고 41년말에는 전사자만 20만에 달하여 러일전쟁의 피해를 완전히 능가하고 있었습니다. 어느 쪽도 상대를 완전히 압도하지 못하고 대치한채 "누가 먼저 쓰러지는가"라는 인내심 대결이 전쟁 마지막순간까지 이어집니다.
이는 단순히 일본의 전쟁수행능력 자체가 부족해서라기 보다(38년초부터 국가총동원법에 의해 일본의 전쟁물자 생산은 폭발적으로 늘어났고 41년 12월에는 37년의 5배이상에 달해, 진주만 기습을 벌이고 곧이어 남방작전을 펼칠만큼 자재와 물자도 비교적 풍부했습니다. 물론 민수의 엄청난 희생과 쥐어짜기덕분이었지만요.) 전략의 부재에서 비롯된 것이었습니다. 막연하게 "속전속결하겠다"는 생각만으로 준비되지 않은채 졸속으로 개전했고 전략 레벨에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전술 레벨에서 현지 부대가 멋대로 작전을 펼치는 식이었기에 자기 힘의 절반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한 것입니다. 또한, 30년대 일본군은 소수정예의 개념이 강했는데 중일전쟁으로 병력이 부족해지자 급작스러운 징집과 양적 팽창은 급격한 질적 저하로 이어집니다.(특히 장교와 하사관에서) 중국전선이나 이후 남방에서 일본군의 약탈, 강간같은 군기이완이 비일비재해 진 것도 이때문이죠.
중일 양국이 팽팽하게 대치한채 힘만 무익하게 소모시키며 시간을 보내고 있을때, 팔로군은 적극적으로 멀티건설과 세불리기에 나섭니다. 제120사단이 수원성으로 진출하고, 제115사단, 제129사단은 하북, 산동에 "변구"를 건설합니다. 화중, 화남일대에도 신4군이 멀티를 치는등, 1년만에 쪽수가 20만명으로 근 10배나 늘어납니다. 40년에는 당원 80만, 병력 50만, 민병 100만, 변구의 인구는 1억에 달하는 어마어마한 세력이 됩니다. 3년도 안되어 이룬 성과이죠. 이들은 소작료 인하와 토지재분배를 내세워 농촌의 민심을 얻습니다.
홍군 기마부대의 퍼레이드, 1940년에 홍군은 14개 기병사단 10만을 보유합니다.
※ 출처 : Men-at-Arms chinese civil war 1911~1949
반면, 주요 근거지를 초반부터 죄다 잃은채 중경의 오지로 쫓겨간 국민당정부는 토지의 1/3, 공업력의 92%, 농업력의 40%를 상실하고 수입도 엄청나게 격감한데다 국민당내 반장세력과 군벌과의 갈등도 점점 심화됩니다. 항일의 열의는 금새 사라졌고 적 일본을 앞에 두고 단결하기보다 자기들끼리의 권력투쟁에만 급급하게 되죠.
공산군의 적극적인 세불리기는 국민정부와의 마찰을 피할 수 없었습니다. 이들의 활동은 똑같은 지역에서 똑같은 일을 추진하던 국민정부소속의 특수요원들과 당연히 충돌했고 그 충돌은 시간이 갈수록 격화되었습니다. 이것은 결국 국공 양측의 반목과 정부군의 봉쇄, 이후 "환남사변"으로 표출되게 되죠.
<출처 : 중공군의 전략전술연구사, 국방군사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