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근대사] 국공내전에 대한 이야기 5화 <2만6천리의 대장정>
홍군 제1방면군이 강서의 중앙소비에트를 나오는 1934년 10월부터 35년 10월까지 1년간 (여타 잔존부대의 합류까지 합하면 2년이상) 중국 대륙을 유랑하며 횡단하게 됩니다. 그들이 도보로 횡단한 거리는 근 1만km에 달했고, 유례없는 장정이라 하여 이른바 "대장정"이라고 말합니다.
대륙의 공산정권은 대장정을 "위대한 마오주석의 영도하에 홍군 전사들은 가는 곳마다 힘없는 농민을 보호하며 혁명 정신을 전파하고..."따위로 미화합니다. 어떻게 보더라도 승자로서 상투적인 날조에 불과한데도 "홍군은 정의의 용사"로 당연하게 생각합니다.
실제로는 모택동이 최고지도자가 되기 위해 추잡한 권력 암투와 수많은 숙청이 있었습니다. 현지민들을 약탈을 행하고 적대적인 소수민족들을 학살하고 치열한 전투를 벌이며 어렵게 살아남은 것에 불과합니다. 인민복 걸친 색마였던 모택동은 "고난의 행군"중에서도 여색을 밝히며 온갖 스캔들을 저질렀죠. 왠지 중공과 모택동을 판타스틱하게 보던 에드가 스노우란 양반이 그들의 일방적인 말을 그대로 옮겨 적어 쓴 "중국의 별"이 히트를 쳐 소설이 진짜로 둔갑한 것입니다.
34년 연초부터 국민당 정부군이 대규모 토벌작전을 펼침에 따라 현재의 아지트는 버릴 수 밖에 없다, 라는 의견이 극소수의 수뇌부간에 이미 거론되고 있었습니다. 더욱이 4월 광창의 결전에서 결정적 참패를 당하고 정부군이 철조망과 벙커로 둘러싸 물자마저 차단되어 말라죽게 생기자 선택의 여지가 없게 됩니다. 또 6월 25일에는 모스크바에서도 강서의 중앙소비에트를 포기하고 모든 홍군은 탈출하라는 지시가 내립니다.
문제는 탈출하더라도 정부군의 포위망을 어떻게 돌파할 것인가 하는 점이었습니다. 장개석이 홍군의 탈출을 가만히 보고 있을리가 없었죠. 포위망을 돌파할 수 있다면 살 수 있지만 돌파하지 못한다면 말그대로 전멸이었습니다. 생각해낸 것이 기만과 양동작전이었습니다.
34년 7월, 공산당은 "노농홍군 북상항일선언"이라는 것을 발표하여, 북상해서 일본과 싸우겠다라는 선언을 하고 항일선발대를 구성합니다. 이들의 목적은 마치 홍군이 북쪽으로 탈출하는 척하여 정부군의 눈을 그쪽으로 돌리게 하고 그 사이 주력부대는 서쪽으로 잽싸게 빠져나가기 위함이었습니다.
이에 따라 방지민이 이끄는 항일선발대는 복건방면의 포위망을 돌파하였고, 제6군단 역시 포위망을 돌파하여 제2군단과 합류하여 제2방면군을 편성합니다. 또 호북, 하남일대의 제25군단도 탈출하여 섬서성을 향해 이동합니다. 이렇듯 홍군이 분산하여 도주를 시도하는 기미가 보이자 장개석은 이들의 도주를 막기 위해 서금을 포위하던 병력 상당수를 북쪽과 동쪽으로 빼내야 했습니다.
그와중에 서금에서도 탈출 준비가 급박하게 진행됩니다. 준비기간은 겨우 1주일이었습니다. 식량과 물자를 최대한 뽑아낸후 9월말에는 병기창, 피복공장, 인쇄공장 등 중요한 장비와 기계를 분해하고 중요 서류를 상자에 담았습니다. 이것은 모두 말과 사람이 직접 등짐을 지고 산악 등반하며 운반하게 됩니다. 또한 10월 13일부터 야간을 이용해 각 부대는 철수 준비를 마칩니다.
탈출로는 정부군의 포위망이 약한 남서쪽이었습니다. 선봉은 임표의 제1군단과 팽덕회의 제3군단이었고 제5군단이 후위를 맡았습니다. 총 인원수는 간부 15천명, 사병 85천으로 총 10만명, 총사령관 주덕, 참모장은 유백승이었습니다. 또한 본대가 탈출에 성공할때까지 시간벌이용으로 약 28천명이 잔류합니다. 방지민의 부대나 이들 잔류부대는 포위되어 거의 전멸되고 방지민도 포로가 되어 죽지만 이덕분에 주력부대는 그 강력한 생명력으로 살아남을 수 있었죠.(나중에 극소수의 생존자들이 서안사변후 신4군으로 재편됨)
10월 14일 드디어 서금의 중앙근거지 포기 결정과 함께 모든 부대는 서금 서쪽의 관전이라는 동네에 집결하였고 15일 새벽 일제히 탈주합니다. 목적은 단한가지, "생존"이었습니다.
"그들은 각자 5파운드의 쌀과 양쪽에 짐보따리를 매달은 막대기를 어깨에 메고 있었다. 탄약이나 수류탄을 넣은 짐바구니 안에는 석유통과 아끼는 도구가 있었고 담요와 누빈 이불, 솜이 든 겨울 옷가지를 비롯해 면으로 만든 덧신, 바늘, 실 등을 꾸린 배낭을 등짐처럼 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모두 소총을 가지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도 정작 장개석과 정부군은 이들의 탈출러쉬를 알아채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오히려 하룡의 제2방면군(2군단, 6군단)이 영순을 점령하고 상식, 대용을 공격하여 정부군 1개 여단을 격파하는 등 역습을 가하는데 정신이 팔려 유인작전인줄도 모르고 11개 사단을 급파합니다. 홍군은 항공정찰을 피해 낮에는 숨어있다가 밤에만 슬금슬금 나와서 이동합니다.
이들은 강력한 중앙군은 피하고 상대적으로 모랄 낮은 광동군쪽으로 향하여 10월 21일 신풍에서 광동군의 제1방어선을 급습하여 돌파하고 11월 3일에서 제2방어선, 13일에는 의령에서 제3방어선을 돌파합니다.
그제서야 장개석은 홍군의 이동을 깨닫고 광서군을 동원해 광서성 북부에 강력한 바리케이트를 칩니다. 또한 병력을 동원해 이들의 후방과 측면을 강타했고 공산군의 수도 서금은 11월 10일에 점령됩니다. 홍군은 워낙 많은 전투, 비전투 인원에다 마누라, 일가친척, 짐바리까지 싸짊어지고 가다보니 기동성 제로에다 이건 뭐 군사작전이 아니라 개척시대 이주민 행렬이나 다름없었죠. 따라서 도처에서 정신없이 두들겨 맞으며 11월 30일에야 간신히 광서군의 방어선을 돌파하고 12월 1일에는 상강을 건너 호남성 남부로 들어가지만, 막대한 희생으로 출발당시 10만명에서 3만 남짓으로 격감합니다. 이 때문에 "28인의 볼세비키"가 주도하던 당지도부의 무능함에 대한 불만이 극에 달하죠. 이 기회를 노려 그동안 왕따되어 있던 모택동이 반격의 칼을 뽑습니다.
12월 12일 호남성 남부 통도에서 긴급회의가 열립니다.
모택동은 지도부를 정면에서 반박하고 무리하게 호남성 서쪽의 제2방면군과 합류하는 것보다 적이 예상치 못한 귀주성으로 방향을 바꾸자고 주장합니다. 실권을 쥐고 있던 박고, 오토 브라운 등은 모택동을 비난하고 원래 계획을 고집하죠. 끝까지 결론이 나지 않고 14일 귀주성 동남쪽에 있는 촌동네 여평을 급습 점령하지만 18일에 열린 중앙정치국회의에서도 다시 갑론을박이 벌어집니다. 박고는 여전히 호남행을 고집하고 모택동은 계속 서진하여 준의를 점령한후 그곳을 중심으로 사천-귀주 경계의 오지에 새로운 보금자리를 마련하자고 주장합니다.
※ 박고 : 친소파로 구성된 28인의 볼세비키 수장이자 당시 공산당 총 지도자.
http://ko.wikipedia.org/wiki/%EB%B3%B4%EA%B5%AC
이는 홍군 전체 사활의 문제기도 했지만, 실상 당 주도권이 걸린 싸움이었습니다. 그러나 모택동은 장문천(인민위원회 주석), 왕가상 등 쟁쟁한 멤버들을 자기편으로 만들고 결정적으로 회의를 주관했던 주은래가 지도부를 비판하고 모택동의 손을 들어주자 추는 점점 모택동에게 기웁니다. 인텔리출신으로 당서열 2~3위를 다투던 주은래가 박고를 버리고 모택동의 편이 된 것은 모택동에게는 그야말로 천군만마이자 유비가 제갈량을 얻은 것과 같았습니다.
장개석은 홍군이 호남으로 북상할 것이라 예상하고 40만명을 동원해 대규모 포위망을 쳐둡니다만, 홍군은 모택동의 주장대로 서행을 해 귀주성 북쪽의 준의성을 기습 공력합니다. 그리고 1월 15일부터 3일간 준의회의가 열립니다.
회의에는 모택동, 장문천, 주은래, 주덕, 진운, 박고, 유소기, 왕가상, 오토브라운 등 정치국 위원, 총사령부, 각 군단장 들이 모두 참석합니다.
모택동 인생의 전환점이 되게 해준 준의회의가 열렸던 곳. 현재는 박물관이 되었다고 합니다.
※ 사진출처 : http://aljatour.com/bbs/view.php?id=2photo&no=10
박고는 "우리는 잘 못 한 것이 없다. 단지 적이 강했을 뿐이다"라고 변명을 늘어놓지만, 주덕, 장문천, 왕가상 등은 "중국의 현실을 고려하지 않은 유럽식 전술이 문제였다"라고 비난합니다. 모택동은 "우리 홍군의 현실상 치고 빠지는 게릴라 전술만이 살 길인데 1차대전때 경험만으로 유럽에나 통하는 참호전술로 싸우는 것은 자살행위였다"라고 말하며, "니들말대로라면 1~3차 초공때는 우리가 어떻게 이겼겠냐?"라고 반문하자 박고와 오토 브라운은 할 말이 없어집니다. 오토 브라운이 모택동이 삼국지나 손자병법 조금 읽고 군사에 대해 아는 척 한다, 라고 하자 모택동은 손자병법이 몇편짜리이며 1편의 제목이 뭐냐라고 반문합니다. 오토 브라운이 대답을 못하자 "그것도 모르면서 니가 감히 손자병법을 거론하냐?"라고 개쪽을 줍니다.
여기에 주은래가 "모든 책임은 자신과 박고, 오토 브라운 3인에게 있다. 모택동의 말이 전적으로 옳다"라고 자아비판을 합니다. 모택동을 비롯한 절대 다수가 찬성하자 박고는 완전히 궁지에 몰리게 됩니다. 표결을 거쳐 모든 책임은 박고와 당지도부에게 있다는 결론을 내리고 그들의 권한을 중지시킨후 모택동을 정치국 상임위원에다 중앙 서기로 추대합니다. 또한 주은래, 왕가상과 함께 군사지휘소위를 구성합니다. 한마디로 이 회의를 통해 모든 정치, 군사 실권이 모택동에게 집중된 것이죠. 그의 완전한 승리였습니다. 사실 주은래에게도 책임이 있었지만 모택동의 편을 들어준 공으로 그는 끝까지 권력의 핵심으로 남을 수 있었습니다.
또한 생존한 병력을 재편성하고 전투병력을 보충 강화했으며 무거운 짐은 버리고 가볍게 하여 기동성을 최대한 높입니다.
장개석이 150개 여단으로 준의를 포위해 오자 준의를 버리고 사천성 서북으로 향하기로 합니다. 부대를 셋으로 나눈후 정부군의 추격을 피해 양장강상류에 있는 적수를 도강했다가 정부군이 전면에 포진하자 잽싸게 방향을 정반대로 바꾸어 다시 적수를 건너 준의로 도로 돌아갑니다. 준의는 정부군에게 함락된 상태였는데 홍군의 기습을 받습니다. 5일간의 전투에서 정부군은 대패하죠.
장개석이 직접 날라와 준의에서 포위하려고 했으나 홍군은 다시 잽싸게 서쪽으로 이동하여 3월 16일 세번째로 적수를 건넙니다. 정부군이 새로운 방어선을 구축하는 틈을 이용해 다시 동쪽으로 방향을 틀어 3월 22일 네번째로 적수를 도강합니다. 그리고는 남쪽으로 강행군하여 운남성으로 돌입하여 곤명을 위협합니다. 곤명이 위급하다고 판단한 장개석이 병력을 빼서 곤명으로 보낸 사이 다시 북상하여 5월 3일 금사강을 도강합니다. 이것이 대륙이 찬양하는 "적수 네번 건너다"입니다.
이때 홍군 최대의 위기가 대도하에서 벌어집니다. 그들의 눈앞에는 사천성의 험준한 설산이 펼쳐져 있었고 그 앞에는 대도하가 흐르고 있어 감히 도보로 건널 수가 없었죠. 장개석도 여기에서 홍군을 섬멸하기 위해 사천군을 동원해 그들의 앞을 가로막고 있었습니다.
홍군은 강상류에 있는 유일한 다리인 노정교를 주목하고 이곳을 점령해 탈출하기로 합니다. 노정교는 강희제때 만든 것으로, 강 양안을 91m짜리 쇠줄 여러가닥에 나무판자를 얹어 만든 다리였습니다. 맞은편에는 사천군 소속 병사들이 배치되어 경계하고 있었습니다.
현재의 대도하랍니다.
사진출처 : http://blog.naver.com/etien/80025030250
사실 경계병들이 처음부터 다리를 끊어버렸으면 고민할 것도 없었고 홍군은 여기에 완전히 괴멸되었을 것인데, 이들을 시험에 들게 하기 위함인지 무슨 이유에선지 절반만 자르고 남겨둔 상태였습니다. 홍군은 다리를 탈취하기 위해 22명의 결사대를 뽑습니다.
5월 29일 새벽 4시, "북괴군은 일제히 남하..." 가 아니고 22인의 결사대는 야음을 뚫고 노정교에 잠입합니다. 이들은 쇠줄을 타고 건너가 적 초소를 격파하고 다리를 확보하는 것이었습니다. 기관총이 불을 뿜고 이들은 수수다발처럼 쓰러져 가는데 91m의 거리를 좁혀가며 조금씩 앞으로 갑니다. 거의 전멸직전 상황에서 초소 바로 앞까지 간 병사의 수류탄 한방에 초소가 박살납니다. 그리고 대기중이던 홍군 부대가 일제히 다리를 타고 건너감으로서 방어선을 돌파합니다. 이 22명의 결사대는 모두 중국 최고의 훈장인 금성훈장을 받게 됩니다. 이 드라마틱한 시츄에이션을 대륙에서는 영화로도 만들었다는군요..(배달의 기수급일듯..-.-)
※ 사진출처 : http://cafe.daum.net/sajusajucom/dsy/419?docid=R9YN|dsy|419|20070821000248&srchid=IIMye7vK00
이렇게 추격을 피해 6월 드디어 사천성 서부 무공에서 장국도의 제4방면군과의 도킹에 성공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또 한차례의 위기가 모택동에게 찾아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