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근대사] 국공내전에 대한 이야기 4화 <장개석 총력을 다하다>
31년부터 2년동안 일편단심으로 "때려잡자! 공산당"을 추진했던 장개석이었지만 4번 모두 "쪽"만 팔고 철수합니다. 덧붙여 철수하다 개털리면서 선물까지 한아름 챙겨 주고 나왔으니 이건 목적이 "초공"이 아니라 "조공"이었죠. 물론 사생결단의 싸움은 아니었기에(홍군은 그랬겠지만) 패배 자체는 치명적이지 않았지만 이제는 남자의 오기때문에라도 물러설 수 없게 되었습니다.
게다가 어찌된 것이 대충 때려잡았다 싶으면 잠깐 한눈팔면 그새 두배, 세배로 증식을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무기도, 병력도 빈약한 오합지졸주제에 그 생명력과 적응력만큼은 그 어떤 강력한 군벌들과도 비교가 되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홍군의 가장 무서운 점이었죠.
"오호상장" 진성의 제 4차 초공전도 홍군에게 치명타를 주지 못한채 33년 4월에 작전은 중단되었습니다.
사실 홍군의 반격보다 1월 1일 신년초부터 시작된 일본의 산해관돌파와 열하성침공때문이었죠. 당시 열하를 비롯한 화북은 제가 3화에서 얘기했듯 장학량의 세력지였지만, 중앙의 "결사항전"명령에도 불구하고 장학량과 부하A인 탕옥린(열하성주석)은 싸우지도 않고 도주해 버립니다. 따라서 흔히 알려졌듯 "장학량은 싸우려고 했는데 장개석이 뜯어말려서.."라는 말은 한낱 공산정권이 만들어낸 역사 왜곡에 개구라에 불과합니다.
장개석은 장학량을 파면하고 하응흠을 파견해 병력을 지휘케 합니다. 또 총통 직속의 정예사단을 비롯한 4개사단을 초공전에서 빼돌려 만리장성에서 일본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입니다. 또한 대일무역에 대한 관세인상 등 강력한 무역제재를 진행합니다. 그러나 일본군의 압도적인 제공권과 화력으로 전투는 참담한 패전으로 끝나고 일본군이 계속해서 진격해 5월초에는 북경 코앞까지 전진해 옵니다. 결국 5월 30일 백하구의 당고라는 곳에서 정전협상을 진행하여 다음날 이른바 "당고협정"을 체결합니다.
1. 중국군은 연경, 창평, 고려영, 통주, 향하를 연결하는 선의 이서, 이남으로 철수한다.
2. 일본은 중국군의 이행사항을 확인하기 위해 수시로 항공기와 그밖의 방법으로 관찰하며 중국은 이를 보호하고 편의를 제공한다.
3. 일본은 더이상 진격하지 않고 장성 이북으로 철수한다
4. 장성 이남과 1항의 선 이북, 이동의 지역 치안은 중국 경찰이 맡는다.
협정의 내용은 말그대로 만리장성 이북은 일본의 영역으로 인정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야말로 굴욕적인 것이었으나 사실 당시로서는 북경을 비롯한 화북 전역이 위기에 처하고 상해사변(1.28사변)으로 수도를 남경에서 낙양으로 옮기니 마니하는 절대절명의 상황이었기에 장개석으로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죠. 일단 일본을 진정시킨 다음 홍군부터 때려잡고 국력과 군사력을 비축하여 일본에 맞선다, 라는 생각이었습니다. 사실 애초에 만주사변때 장학량이 제대로 저항했다면 일이 이렇게까지 되지 않았을 것이나 지금에 와서 장학량은 구국의 항일영웅이고, 욕은 장개석이 다 먹게 된 것이죠.
한편, 일본의 만주침략에 대해 중공의 중앙소비에트는 일본과 국민당정권을 비난하고 "항일연합전선"을 외칩니다. 그런데 실상 "항일"은 립서비스에 불과한 것이었고 실상은 "무찌르자! 국민당"이었습니다. "국민당 먼저, 항일은 나중" 한마디로 이런 내용이었으니까요. 장개석보고 "외적보다 같은 민족부터 때려잡으려 했다"라고 비판하는 그들도 전혀 다를바가 없었던 것이 당시 중국의 실상이었습니다. 어쨌든 대중이란 당장 보이는 것만 보는 법이니 중공은 "항일"을 하려고 했고, 장개석은 "친일독재적이었다" 라고 생각하는 것이죠.
어쨌든 "강간하려고" 달려들던 일본을 일단 달래놓고 시간을 번 장개석은 드디어 홍군과의 전면전을 선포합니다. 가용할 수 있는 모든 병력과 자원을 총동원하여 홍군 격파에 나서게 됩니다.
1933년 5월 21일 남창에서 소공전 최고사령부를 발족합니다. 그리고 초비군사위원회에서 "그동안 왜 우리는 쪽만 팔았는가"를 철저하게 연구 검토합니다.
첫째로, 철저한 사전준비없이 상대를 경시하고 성급하게 공격했다. 현지의 지형도 모르고 농민들과 홍군간의 관계도 관심이 없었다. 따라서 적의 유인작전에 말려 깊숙히 쳐들어가 허리가 길어질때 적의 측면 연타를 맞고 아작이 났다.
둘째로, 각 부대간의 개인주의로 협조란게 없었다. 어느 한부대가 적의 공격을 받아 구원을 요청해도 다른 부대들은 생까고 제 갈길만 갔다. 반란공비들은 전면전은 피하면서 꼭 가장 약한 한놈씩만 골라서 다구리를 쳐 전멸시켰다.
결론은 이 싸움은 하루아침에 끝날 것이 아니고 어줍잖은 병력으로 어줍잖게 쳐들어가 조질 수 있는 상대가 아니라는 것이었습니다. 무력만이 아니라 인내심을 가지고 현지 농민에 대한 선무활동과 정치공작을 병행하면서 홍군을 고립시키고 압도적인 병력으로 사면에서 서서히 포위를 좁혀나감으로서 최종승리를 거둔다는 것이었죠. 엄청난 시간과 막대한 인적, 물적 자원이 소요되겠지만 이 방법은 진성이 4차 초공때 프로토버젼으로 써먹음으로서 가장 확실한 방법이었습니다. 이 새삼스러운 결론을 40년후에 미군이 월남에서 깨닫게 되죠.
그래서 나온 전술이 바로 "전진 배럭, 벙커 러쉬"였습니다. 총병력은 65개사단 80만명(100만이라는 설도 있음)이 동원되었고 이를 서,남,북 3개 방면으로 나누어 하건, 진제당, 고축동을 각각 지휘관으로 임명했습니다.
이중에 서로군과 남로군은 홍군이 튀어나오는 것을 막기 위한 방어와 예비전력으로서, 고축동이 지휘하는 북로군 50만명을 주력으로 중앙소비에트 공략의 임무를 맡깁니다. 여기에는 100대의 항공기와 전차, 화포등 장개석이 동원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투입합니다. 또 24천명의 특무부대도 각 농촌마을로 침투해 들어갑니다.
한편, 당시 중공정권 상황은 꽤나 복잡했습니다. 1화에서 언급했던 이립삼이 쫓겨난후 이른바 "28인의 볼세비키"라는 인간들이 당 중앙을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내부에는 다양한 이론과 노선이 있었고 치열한 파벌 대립과 당파싸움은 국민당 못지 않았습니다. "이기면 관군, 지면 숙청"이었죠. 적어도 수천명이상이 숙청되었다는 설도 있습니다.
7인의 사무라이..가 아니라 28인의 볼세비키란, 소련으로 유학갔다 졸업하고 돌아온 유학생들로서 소련의 지원을 받고 스탈린의 지시에 충실히 따르는 친소파들이었습니다. 대학물 좀 먹은 이 28명은 왕명을 중심으로 뭉쳐 이립삼을 실각시켰고 제4차 초공이 시작될 당시에는 모택동을 정치국에서 쫓아내고 당권을 독차지합니다. 또 독일계 러시아인인 오토 브라운(귀화이름 : 이덕)이 군권을 장악합니다.
28인의 볼세비키들과 오토 브라운은 모택동식 유격전은 "남의 뒷통수나 치는" 비겁한 전술이고 "사나이는 정정당당하게 싸워야 한다"라며 정면대결을 고집합니다. 정부군을 되려 과소평가하고 홍군의 전력을 과대평가한 것이죠.
당시 홍군의 병력은 중앙소비에트에서 주덕이 지휘하는 제1방면군(6개 군단), 사천성에 주둔한 서향전의 제4방면군(5개 군단), 호북성의 하룡의 제2, 제6군단등 총 14개군단 30만명정도였습니다. 무장도 90%이상이 국민당한테 노획한 온갖 잡다한 무기들로, 정규군이라기 보다 소말리아 민병대에 가까웠습니다. 이런 오합지졸이 항공기, 전차의 지원을 받는 3배 많은 정부군과 정면에서 붙는다는 것은 단체로 사조성 보며 죽으러 가는 것이었죠.
그럼에도 "우리들은 강하다"라고 착각하던 오토 브라운은 소굴에서 나와 전전선에서 출격해 정부군을 공격합니다. 정부군은 그동안 도배한 벙커에 들어앉아 이들이 나오기를 기다렸다가 공격을 퍼부어 말그대로 섬멸시켜 버립니다. 홍군은 완전히 아작이 나서 수세로 몰리게 되죠. 진성과 마찬가지로 장개석 비장의 "오호상장"중 하나인 고축동의 북로군이 10월 16일부터 공격을 개시하여 진성의 제3로군과 함께 홍군의 전초기지들을 하나씩 아작내며 천천히 밀고 들어갑니다.
한편, 이때 복건사변이 일어납니다. 당시 복건에는 채정개의 제19로군이 주둔하고 있었는데 이들은 상해사변에서 일본군을 상대로 훌륭하게 싸운 부대였습니다.(3화 참조) 상해사변이 끝난후 복건성으로 보내져 초공전에 투입되자, 반일에 열혈을 불태우던 이들은 초공 반대와 반일 반장을 주장하며 반란을 일으킵니다. 11월 20일 복주를 수도로 "중화공화국 인민혁명정부"라는 것을 수립하죠.
그런데 광동, 광서군벌이나 중공같은 다른 반장세력들이 자신들을 지지할 것이라 예상했는데 오히려 뒷통수를 맞습니다. 모두 등을 돌려버리고 반란을 비판합니다. 지원을 약속했던 중공도 "새로운 군벌일뿐"이라며 외면해 버립니다.
장개석은 잽싸게 초공중인 병력중 11개 사단을 차출해 토벌에 나서 2달만인 34년 1월말에 멸망해 버리고 맙니다. 중공으로서는 최대의 호기를 눈뜨고 날려버린 셈이었죠. 장개석은 이 병력으로 동로군을 편성해 자신이 직접 지휘하여 복건성 서쪽에서부터 홍군의 수도 서금을 향해 차근차근 밟아나갑니다.
이런 상황에서 서전에서 아작난 홍군은 오토 브라운의 명령에 따라 진지방어전과 "우라"돌격을 하다 병력만 소모합니다.
더욱이 4월 27일 광창에서 홍군 제1방면군휘하 9개 사단을 동원해 북로군과 결전을 시도하다 18일간의 전투에서 거의 전멸적 타격을 입습니다. 임표의 제1군단과 팽덕회의 제3군단도 대패하여 남창으로 철수하고 5월 1일에는 서금 북쪽의 용강이 함락되는 등 이제는 서금의 방어조차 장담할 수 없게 됩니다. 5월에 이르면 영역이 70현에서 서금 주변의 6개현만 간신히 장악하게 됩니다. 홍군으로서는 그야말로 공전의 위기에 직면하죠.
공산당 긴급 회의에서 모택동은 병력을 넷으로 나누어 복건, 절강, 강서, 호남으로 일단 분산시켜 정부군의 유인한후 병력을 재편하여 근거지를 재건하자고 제안합니다. 그러나 28인의 "닭대가리"들은 여전히 고집을 부렸고 모택동의 안은 거부됩니다.
그 와중에도 장개석의 포위망은 점점 좁혀지고 서금 주변의 거점들이 하나하나 제압됩니다. 8월 28일에는 서금의 관문인 대령격을 점령하고 10월 4일에는 석성까지 점령하여 서금을 눈앞에 두게 됩니다.
10월 14일 결국 홍군은 서금의 중앙소비에트를 포기하고 새로운 근거지를 찾아 떠나기로 결정합니다. 파란만장한 "대장정"의 시작이었죠.
※ 사진출처 : 중화민국과 공산혁명 p. 43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