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세계사/중국 이야기

평형관(平型關)의 수수께끼를 찾아서

구름위 2013. 8. 22. 15: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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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빈(高斌)은 항일명장 고계자(高桂滋)의 외아들이다. "서안사변"이 폭발한 후, 장개석이 장학량, 양호성에게 붙잡혀서 고공관(高公館)에 연금되었다. 고공관은 당시 고계자가 막 완공하고 아직 입주하지도 못한 주택이었는데, 장학량이 임시로 빌려서 장개석을 구금하는데 썼다. 현지 이곳은 섬서성작가협회의 소재지이다.

 

1937년, "77사변"이 발발한 후, 고계자는 스스로 출전을 요청했고, 7월 9일 남구 전선으로 갔다. 나중에 제17군 군장(軍長, 군단장) 겸 제84사 사장(師長, 사단장)을 맡았다. 정아구(井兒溝), 희봉채(喜峰砦)의 두 전투에서 후쿠이(藤井) 소장이 이끄는 무기를 제대로 갖춘 친일몽골군 교도단과 악전고투를 벌였고, 280여명을 포로로 잡고, 800여명을 사상시켰으며, 박격포 6문, 경중기관창 13정등 대량의 무기장비와 120여필의 말을 노획했다. 후쿠이는 겨우 몸만 살아나갔다. 나중에 역사학자들은 "평수선 전장터에서의 유일한 승리"라고 평가한다. 9월 14일, 광령화소령에서 일본군 이타가키(坂垣)사단과 악전을 벌인 고계자는 제2전구사령관인 염석산(閻錫山)의 명을 받아 황급히 평형관 북익의 단성구(團城口), 미회촌(迷回村) 일대로 가서는 길이 약 30리에 이르는 많은 산에 방어진을 설치한다.

 

중국인들이 잘 알고 있는 "평형관대첩(平型關大捷)"은 실제로 임표가 이끈 팔로군115사단의 평형관매복습격전투이다. 이것은 전체 평형관전투의 한 구성부분이다. 전체 전투에서 가장 참혹한 피바람은 고계자가 지휘하는 제84사단이 죽어라 사수한 진지를 둘러싸고 일어났다.

 

고빈의 회고에 의하면, 그의 부친이 이끄는 84사단은 "잡패군(雜牌軍)"이었다. 당시 고계자에게 지휘권을 넘겼던 이선주(李仙洲)의 21사단은 장개석의 적계 중앙군이었다. 평형관전투에 참가한 것은 진수군(晋綏軍), 섬군(陝軍), 진군(晋軍), 중앙군(中央軍)과 팔로군(八路軍)에서 십여만명이나 되었다. 그중 고계자가 지휘하는 84사단, 21사단같은 곳이나 진군의 73사단, 독립3여단등의 부대는 전방에서 물러나서 참가한 것이므로 사상자가 많았고, 휴식을 취하고 보충을 받지 못했다; 진군의 곽종분(郭宗汾)의 군대는 후방에서 왔는데, 대일본군작전경험이 없었다; 사투리가 섞이고, 장비차이도 현격하며, 사기와 전력차이도 컸다, 주군과 객군은 서로 생각이 달랐다, 근본적으로 상하좌우로 의사소통이 이루어지지 않았다...방법이 없었다. 일본군은 쉴 틈을 주지 않았고, 유명한 정예부대인 이다가티사단은 친일몽골군을 데리고 쉬지않고 하루에 수십리씩 추격해오고 있었다!

 

임전변괘(臨戰變卦)

 

왕정위는 일찌기 일침견혈(一針見血)의 견해를 밝힌 바 있다: 중국에 진정한 의미의 "국방(國防)"은 없고, "성방(省防)"만 있으며, 기껏해야 "수성연방(數省聯防)"만 있다. 이것은 중국이 일본의 침략을 맞이하는데 가장 핵심문제를 말하고 있다. 산동성주석 한복구(韓復)이든, 찰합이성주석인 유여명(劉汝明)이든, '전국을 하나의 전장터로 인식한다거나' '새집이 뒤집어지만 새알도 안전한 것이 없다'는 개념은 없었다. 그저 자기가 다스리는 지역만 화를 벗어나면 다행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일본사관학교를 졸업한 산서왕(山西王) 염석산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는 각종 수단과 사회관계를 이용하여, 일본의 침략손길이 다른 곳에만 미치도록 하는데 주력했다. 그러나, 일본군은 평수선을 따라 직접 그의 근거지로 밀고 들어왔고, 더이상 피할 방법이 없었다. 할 수 없이 병력을 동원해서 항거해야만 했다. 남경중앙정부는 일본군이 산서를 점령하는 것을 우려했다. 산서를 점령하면 바로 아래로 남하하여 사천까지 밀고 들어올 수 있었다. 그리하여 환급히 지원군을 보내게 된다.

 

1937년 8월말, 염석산은 전선총지휘부를 안문관 아래의 한 요동(洞)에 설치했다. 주은래, 팽덕회와 함께 제2전구전투계획을 상의하는데, 작전방침은 "산지를 이용하여 적군을 섬멸한다"는 것이었다. 염석산은 일본군이 몰려오는 것에 대하여 이렇게 평가했다: 일본군이 산서, 수원을 도모하려면 반드시 태원을 차지해야 한다; 태원을 차지하려면 반드시 먼저 대동(大同)을 빼앗아야 한다, 그러므로 병력을 모아서 전투를 맞이할 진세를 구축해야 한다.

 

생각도 못하였던 것은 일본군이 9월 13일 대동을 점령한 것이다. 주력인 이타가키는 레프트훅을 날려서 강한 곳은 피하고 허한 곳을 노려서, 군대를 이끌고 직접 평형관을 향했다. 이타카기 세이시로(坂垣征四郞)는 1년전에 오대산을 유람한다는 핑계를 대고 친히 노선을 조사해본 바가 있다. 평형관을 넘는다면, 안문관(雁門關)에 있는 중국군대의 후방을 급습할 수 있을 것이다. 염석산의 대동회전계획은 유산되었다. 안문관일대의 병력은 많지만, 쓸 데가 없었다. 그리고 평형관일대는 누란(累卵)의 위기를 맞이했다. 할 수 없이 병력을 빼내서 평형관으로 보내야 했다.

 

염석산의 원래 생각은 우리측 11개군은 10여만명이므로 일본군이 평형관에 진입한 후에 다시 퇴로를 봉쇄하고 평형관 서쪽, 번치(繁峙) 동쪽 사하일대의 개활지에서 전투를 벌이며, 포위전을 하는 것이었다. 이 방안은 리스크가 컸다. 그러나 결심만 내린다면 못할 것도 없었고, 승산이 없는 것도 아니었다. 염석산은 이 방안을 "구대진(口袋陣, 호주머니진법)"이라고 부르면서 자랑했고, 자신의 적계(嫡係)인 진장첩(陳長捷), 곽종분등 두명의 군단장에게 요령을 전수했고, 평형관, 단성구등지로 고위참모를 보내서, 고자계등의 장군들에게 명령을 전달했다.

 

관건적인 순간에, 전선지휘부는 그러나 망설였다.

 

전선지휘관은 제6집단군총사령관인 양애원(楊愛源)이었고, 부총사령관은 손초(孫楚)였다. 손초는 양애원의 신임을 받고 있었고, 양은 그의 말이라는 뭐든지 따랐다. 바로 손초가 돌연 이 일본군에게 평형관 안으로 들어오개 한 다음에 문을 걸어닫고 포위전을 벌인다는 방침에 의심을 품기 시작했다. 그는 먼저 양애원을 설득했다. 그 후에 염석산에게 달려갔고, 이 방침의 폐해를 낯낯이 설명했다. 그리하여 염석산은 적군을 앞에 두고 마지막 순간에 마음를 바꾼다. 일본군을 평형관내로 들이지 않기로 결정한 것이며, 평형관 바깥에서 적을 막아내기로 하였다.

 

군사상황이라는 것은 순식간에도 천변만화하는 것이다. 반드시 적군과 아군의 상황에 맞추어 신축성있게 대응해야 한다. 다만, 이번 변경은 너무 시간이 촉박하게 이루어졌다.

 

만일 진수군만 있었다면, 죽어라 이 곳을 막아냈을 것이고, 염석산은 있는 힘을 다하여 막았을 것이다. 그러나, 3무리의 객군(客軍)이 왔다: 팔로군 115사단, 고계자의 17군, 유무은(柳茂恩)의 15군. 그러다보니 염석산의 머리는 복잡했다. 그는 원래 팔로군과 고계자가 함께 평형관 정면을 막는 것으로 계획했다. 그러나, 주은래와 팽덕회는 이것은 팔로군이 잘하는 분야가 아니라고 하였고, 차라리 115사단을 몰래 일본군이 전진하는 도로의 측면에 집결시켜, 적의 후방에서 습격하는 것이 좋겠다고 하였고, 염석산도 동의했다.

 

중국군이 방어진을 펼칠 때, 비록 일본군의 주공격방향을 확실히 알 수는 없었지만, 지형으로 판단하여, 평형관, 동서포지(東西池)와 단성구가 주전장터가 될 것이었다. 이후의 사실은 84사단이 방어하는 단성구가 일본군으로부터 가장 큰 진공압력을 받는다.

 

영구현과 번치현의 경계지점에 있는 장성상의 단성구는 동남으로 평형관까지 직선거리가 8킬로미터이다. 단성구의 동쪽은 부채형의 대지(臺地)였고, 동서방향으로 마찻길이 있다. 단성구를 지나 서남쪽 약 20킬로미터바깥에는 번치현의 대영진이 있다.

 

고빈은 당시의 많은 전투보고, 전보, 관병회고록등을 뒤져보았다. 어떤 것은 미국에서 중문, 일문사적에서 찾은 것이다. 어떤 것은 그가 서안에서 일하는 여동생 고사결(高士潔)이 여러 해동안 자료관, 도서관과 정협등 기관에서 힘들게 찾아낸 것이다. 이들 자료상, "격전이 심하다" "중상" "사망" "전부순국" "모두 다치거나 죽었다"는 등등의 글자가 나타났고, 행간에서도 포연과 혈화가 묻어났다.

 

70년간 논쟁한 문제

 

9월 22일 밤 11시, 일본군 제5사단 21여단의 4,5천명은 전차를 끌고 중국군 제73사단을 추격하여, 평형관의 앞에까지 도달한다. 평형관앞의 번치, 대현의 도로에서 고계자부대의 왕신요 영(營)에서 파견한 부대와 만나서 격전을 펼친다.

 

84사단의 진지로 진공한 것은 이타가키 기계화부대였고, 장비가 뛰어나고, 하루종일 포병은 포로 공격했다. 전투전에 중앙에서 산서에 국방경비를 내려보냈지만, 이 일대에는 아직 공사를 마무리하지 못했다. 84사단의 관병이 주둔한 후 황금히 파놓은 진지로는 일본군의 맹렬한 포화를 견뎌내기 힘들었다. 돌맹이가 나르고, 중국군의 사상은 가중되었다. 오후 4시가 되어, 일본군은 격퇴되고, 여효도(呂曉韜)는 출격하여 경기관총 4정등 무기를 노획하기도 하였다.

 

23일 새벽 5시, 진수군 제7집단군 총사령관 겸 제35군 군장인 부작의(傅作義)는 제2전구사령관 염석산으로부터 전화명령을 받는다: "적은 우세한 병력으로 우리의 평형관진지를 공격하고, 우리 84사단은 적과 고전을 벌이는 중이다. 이미 71사단 곽종분의 부대를 앞으로 전진시켜 대영(大營)에 배치하였고, 35군소속 보병 2여단을 자동차로 대영부근까지 수송하여 평형관전투를 증원한다" 염석산은 부작의와 양애원에게 공동으로 평형관전투를 지휘하라고 명령한다.

 

부작의는 일본지원군이 도착하지 않은 틈을 타서, 중국군이 예비대를 단성구방향으로 투입하여 전선으로 돌격해나가서, 일본군을 섬멸시키자고 한다. 원래는 24일에 출격하기로 되어 있었는데, 곽종분이 "예비대 71사단이 행군으로 피로"하다는 점을 들어, 9월 25일 새벽에 출격하는 것으로 바꾼다. 부작의는 어쩔 수 없었다. 할 수 없이 팔로군본부의 임표에게 알려준다. 하루를 늦추어 출발한다고. 정말 위험했었다. 임표는 마침 무전기를 닫고 출발하려고 하는 참이었다. 그들은 황금히 통신원을 파견하여 이미 행군에 나선 부대에 알렸다.

 

9월 24일은 고계자의 장병들이 가장 참혹하게 싸운 하루였다. 적군은 5천여명이 증원되었고, 평형관의 동서포지, 단성구 및 강당촌의 각 진지를 맹공했다. 포격이 아주 극심했고, 고계자군의 사상자는 속출했다. 도처에서 위급함을 보고했으나, 보낼 병력이 없었다. 고계자는 급전을 보내어 염석산과 손초에게 증원을 요청한다. 그러나 기다리는 증원군은 오지 않았다.

 

염석산은 부작의로 하여금 대영부근으로 가서 지휘하도록 명령한다. 부작의는 막료를 이끌고 밤 12시에 대영부근의 하남촌에 진주한다. 그리고 곽종분사단이 비가 많이 내려 움직이기 힘들다는 보고를 받는다. 출격이 2시간 다시 연기된다. 작전방안이 변경되었지만, 총지휘관인 부작의는 이를 모르고 있었다.

 

9월 25일 새벽, 84사단의 501단 2영 영장인 소춘기가 다리에 부상을 입고, 근무병에게 구조된다. 2006년 10월, 95세의 고령인 이 노인은 고사결에게 이렇게 말한다: "내가 부상을 입었을 때, 진지에는 이미 작전할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고계자의 84사단은 연일 계속되는 혈전으로 손실이 참중했다. 점차 버티기가 힘들었다. 오전10시경 단성구일대의 진지는 점차 일본군에 의해 돌파된다. 502단의 대리단장인 두문경은 부대를 이끌고 진지돌파를 막아내다가 장렬하게 전사한다.

 

곽종분의 71사단의 다시 연기된 계획에 따르면, 오전8시에 공격위치에 도착해야 했고, 단성구에서 북으로 출격해야 했다. 그러나, 진수군 인원의 회고와 전투기록에 의하면 단성구의 고계자진지를 점령한 일본군의 사격때문에 출격을 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상하다. 오전10시에 고계자사단의 잔병이 일부 산지를 빼앗기기는 하였지만, 곽종분은 8시게 출격하였는데, 어떻게 고계자의 진지에서 일본군의 사격을 받을 수 있는가?

 

이것은 바로 이후 70년간 계속된 논쟁이다.

 

5번 바뀐 출격시간

 

고빈에 따르면, 부작의는 역시 명장이었다. 그는 극력 일본군이 대량의 증원부대를 보내기 전에, 우세한 병력을 집중하여 여러 갈래로 출격하여 평형관앞의 적을 섬멸시키자고 하였다. 그러나, 부작의는 진군의 장문인이 아니었다.

 

2전구는 "24일출격"으로 정해졌다. 그러나, 곽종분의 71사단은 '출격군이 행군에 피로한 이유로, 25일 해뜨기전"으로 바꾸었다.

 

이에 대하여 고빈은 전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고계자등 적지 않은 부대는 하북, 찰합이등에서 계속 저지당하면서 천리를 이동하여 이곳까지 왔고, 전투원의 사상이 엄중하였는데도 2개월동안 작전을 계속하면서 휴식정돈할 시간이 없었다. 명령을 받은 후에는 즉시 간이공사를 마무리하고 전투에 투입되었다. 그런데, 곽종분의 부대는 일본군과 싸우지도 않았지 않은가? 그리고 산서가 원주둔지이므로 쉰다는 것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무슨 '행군피로'로 즉시 싸울 수 없단 말인가? 마찬가지로 진군의 장군인 진장첩은 곽종분의 부대가 '처음으로 항일전장에 나가서 사기가 대단했다"고 말하지 않았던가?

 

출격시간은 나중에 다시 미루어진다. 84사단의 고건백 여장의 회고에 따르면, 출격은 24일 오후 6시에서 저녁 8시로 미루어진다. 다시 저녁 12시로 미루어지고, 다시 25일 새벽 4시로 미루어진다. 그리고 다시 비로 8시이후로 연기된다. '5번이나 바뀌었고, 결과적으로 병사 1명도 출격하지 않았다"

 

출격시간이 계속 연기된 것에 대하여 최전선에서 버티기 힘들어진 84사단의 고건백 여단장등 사람들은 진군 202여단이 여단장인 진광두에게 도대체 언제 출격할 것인지 압박해서 물어보았다. 진광두는 명령서를 내밀어보였다: "곽재양(즉, 곽종분)은 염장관(염석산)의 명령을 전달했는데, '본장관의 전화명령이 없이는 출격하지 말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고빈은 말한다: "전투기회는 조금만 늦어지면 놓치는 것인데, 이렇게 하루를 미룬다는 것은 전투의 승부, 고계자부대에 있어서는 아주 중요한 일이다"

 

그런데 곽종분의 71사단의 전투보고에서는: 9월 25일, 고계자의 84사단이 지키던 단성구진지를 일본군에게 점령당하여 우리에게 사격을 가하므로 71사단이 출격하는데 저지를 받았다고 되어 있다.

 

<<항일전사. 태원회전>>에서는: "평형관 정면의 적은 5천의 증원군을 받은 후, 본일(24일) 새벽부터, 다시 우리 평형관, 단성구 및 강당촌일대의 진지를 공격했고, 전차대는 우리의 동포지이남으로 밀고 들어왔다. 전투는 저녁까지 계속되었고, 적은 성공하지 못했다" "25일에 이르러, 우리 제71사단부대가 막 전진할 때, 적 스즈키(鈴木) 병단 및 친일몽골군도 우리 84사단 단성구부근진지를 공격했다. 84사단은 어쩔 수 없이 퇴각했고, 적은 단성구, 요자간, 육랑성일대의 고지를 점령했다. 우리 71사단의 도로를 따라 전진하던 404단은 2시경에 적과 만난다"

 

여기서 얘기하는 것은, 고계자의 제84사단은 9월 25일 스즈키병단과 친일몽골군의 공격하에 밀려서 퇴각하였다는 것이다. 시간은 명확히 적지 않았지만, 곽종분의 71사단이 2시경에 적과 만났다고 되어 있고, 곽종분의 부대의 출격은 오전 8시이후였으므로, 여기서 말하는 2시는 오후 2시일 것이다.

 

이때 84사단의 영장을 맡고 있던 소춘기는 지금도 건재하다. 그는 당시의 혈전을 글로 남긴바가 있는데, 놀랄만하다:

 

고계자는 비록 여러차례 총지휘관인 양애원 및 염석산에게 증원을 요청했고, 그들은 매번 응락하였지만, 한번도 병사 1명 보내준 적이 없다. 사상이 너무 심하여 진지를 지킬 사알미 없었고, 26일에 적군의 손에 넘어갔다.

 

그가 말하는 것은 진지를 지킬 사람이 없어서, 26일에 적군의 손에 넘어갔다는 것이다.

 

고계자를 "퇴각명령"을 내린 장군으로 공격하는 것은 당시 진군 61군 군단장을 맡은 진장첩이 대표적이다. 진장첩은 1948년 천진경비사령관을 맡았는데, 해방군에 포로로 잡힌다. 그리고 '전범'으로 감옥에 여러해 갇혀 있다가 1959년에 특사로 석방된다. 그의 회고록에는:

 

고계자의 부대의 단성구, 요자간, 서포지간의 전선은 비록 계속 적의 공격을 받았지만, 수비군은 견고한 진지에 의지하여, 장비는 부족하지만, 중대한 사상은 없었다. 평형관을 공격하는 적군이 계속해서 밀려오자, 고계자부대는 공황상태에 빠진다. 곽종분의 부대가 대영에 도착했다는 말을 듣자, 손초에게 지원을 호소하면서, 직접 곽종분의 부대에 전선에 증원하여 방어를 증강시켜달라고 요청한다. 곽종분은 명령에 따라 출격해야 한다며 거절했다. 손초는 쌍방의 다툼에 대하여, 명확히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고계자의 부대가 적을 피하고 싶어한다고 생각했고, 곽종분의 부대가 집결완료후, 출격을 전개하면 즉시 분규는 해결된다고 보았다. ...착각과 원한으로 임의로 단성구, 요자간, 동서포지의 각 부대를 퇴각시켜 미회촌으로 물린다. 그 다음에 다시 항산방면으로 물러난다. 유무은의 부대에 의지하여 실력을 보존하고자 한다. 이는 잡채군의 모습을 그대로 보이는 것이다....손, 곽에게 분을 풀기 위하여, 고의로 단성구, 요자간의 요새를 벗어났고, 출격을 감행하던 곽종분 부대는 의외의 저지를 당한 것이다...

 

진장첩의 글에서, 고계자의 부대는 '중대한 사상이 없었고" 그저 '공황이 발생하여", "적을 피하려는 마음을 가지고" "잡패군의 자태를 재현했다" 더욱 중요한 것은 "손, 곽에게 분을 풀기 위하여, 고의로 단성구, 요자간의 요새를 벗어났고, 출격을 감행했던 곽종분 부대가 의외로 저지를 당한 것이다" 만일, 진지를 '임의로 버리지 않았다면' 자신을 보존할 수 있었을 뿐아니라, 고의로 진지를 버림으로써 곽종분의 부대가 일본군에 막히게 되었으니, 오히려 일본군을 도와서 우군을 해한 혐의가 있는 것이다. 항일군인의 입장에서 이것은 사소한 지적이 아니다.

 

진장첩의 이 주장은 후세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도순이 쓴 <<혈색웅관>>이라는 책이 바로 대표적이다. 문학적인 수법으로 이 과정을 아주 그럴 듯하게 묘사했다.

 

포기인가 함락인가

 

진장첩의 주장은 고빈과 고사결로서는 받아들이기 힘든 일이었다. 고빈은 이런 의문을 제기한다: "진장첩이 61군을 이끌고 200리 떨어진 후방에서 대기하고 있었고, 명령을 받아 평형관으로 지원을 왔으며, 선두부대는 24일 밤에 도착했다. 그는 무엇을 근거로 고계자의 부대가 적군의 "맹공"을 받아 "사상이 참중"하다는 것을 거짓말이라고 하는 것일까? 무엇을 근거로, 고계자가 "적을 피하고자 하는 마음을 가지고" "임의로 진지를 포기하고" 심지어, "고의로 요새를 버리고" 우군에게 해를 입혔다고 하는 것일까?

 

84사단은 퇴각명령을 받은 것일까? 아니면, 궤멸되어 물러난 것일까? 84사단진지는 포기된 것일까 함락된 것일까? 이 두가지의 의미는 전혀 다르다. 섬서성사회과학원 부연구원인 곽윤우가 말하는 바와 같이, 포기는 지킬 수 있는데 안지키는 것이므로 어떤 목적을 위하여 고의로 버리는 것이며, 함락은 적과 아군의 역량차이로 지키고 싶어도 못지켜서 할 수 없이 잃는 것이다.

 

필자는 당시 각계인사의 글을 많이 읽어 보았다. 전범, 종군기자, 현지촌민의 수백만자의 전투보고, 전보, 회고, 진술 및 각지 학자의 분석과 평론을 보았다. 그리고 역사현장을 다시 재현해보고 싶었다. 당시의 포탄비와 피바람속에서 진실의 맥락을 찾고 싶었다.

 

많은 문자기록에서 알 수 있는 당시의 상황은 다음과 같다:

 

23일에서 25일까지, 일본군은 단성구를 집중 공격했고, 고계자의 부대는 30여리의 여러 산머리를 방어하느라 사상이 심각했다. 혈전으로 인하여 예비대도 가장 시급한 곳에 배치되었다. 심지어 수십명의 기병도 고계자에 의하여 보병처럼 전선에 투입되었다. 어떤 산의 관병은 모조리 희생되었고, 한층한층 위로 보고되었다. 고계자에게는 더 이상 투입할 병력이 없었다.

 

고계자는 화급하게 전선총지휘관인 양애원과 부총지휘관인 손초에게 보고했고, 증원을 요청했다. 양애원, 손초는 이 객군장군의 보고를 믿지 않았다. 군벌혼전이 여러해동안 이어진 중국에서 오늘은 악수하지만 내일은 칼을 뽑아야 한다. 그저 헛말로 지원한다고 안심시키기만 했다. 원군을 곧 보낼테니, 견뎌라. 조금만 더 견뎌라.

 

당시 제6집단군 비서장을 맡고 있던 노선랑의 회고에 의하면: "제6집단군본부는 회의를 개최해서 대책을 논의했다. 제7집단군총사령관인 부작의도 자리에 있었다. 여러 사람들이 전선이 더 이상 버티기 힘들다는 의견이었다." 노선랑은 특히 제15군에서 2개단의 병력을 빼내어 고계자를 증원해주어 압력을 감경시켜주자는 건의가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손초는 지원군을 파견하지 않는 입장을 고수한다. "그저 곽종분의 부대를 이미 출격하도록 했다는 공허한 말만 할 뿐, 고계자에게는 함부로 후퇴하지 말라고만 명령했다"

 

명목상으로 고계자의 지휘를 받게 되어 있는 제21사단의 이선주도 상사의 증원명령을 거부한다. 어쩔 수 없어진 고계자는 자기의 진지후방에서 명을 기다리던 예비대 ?종분과 다른 우군에게 지원을 요청한다. 1개단, 1개영이라도 눈앞의 시급한 불은 끌 수 있었다. 곽종분과 그의 부하인 진광두 여단장은 모두 거절한다.

 

옛 동맹회 회원인 속범정은 <<3년불언지언>>이라는 글에서 의분에 가득차서 기술했다. 염석산은 제6집단군 총사령관 양애원의 보고를 받았다: "곽종분 사단장은 총예비대로서 명령에 위배하여 증권하려 하지 않는다, 이미 좋은 시기를 하룻 밤 낮이나 놓쳤다. 가장 좋기로는 염사령관이 직접 내려와서 독전하시는 것이다...운운" 염석산은 밤을 세워 평형관으로 간다. 그날 저녁 제6집단군 사령부에서 "곽종분이 먼저 줄줄이 좋은 말은 다 해가면서 1시간여를 보고했다. 그는 증원하지 않은 이유를 구구절절이 설명했다. 그중 가장 중요한 말은 '우리는 여지를 남겨야 한다. 실력을 보존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역량을 다 써버리게 된다'는 것이었다" 곽종분이 나간 이후, 양애원은 비로소 전쟁상황을 상세히 보고했다. 그리고 곽종분이 전쟁을 회피하고 증원을 하지 않은 사실도 언급했다.

 

고사결은 많은 힘을 쏟아서, 노동개조국으로부터 당시 84사단 502단 3영의 기관총연 연장인 구앙악이 감옥에서 쓴 글을 찾아낸다. 거기에는 그 단의 전투상황을 잘 묘사하고 있다: 두문경 대리단장은 돌파구를 막으려고 하다가 총알을 맞고 순국한다. 삼영은 단성구의 좌익을 방어했다. 9월 25일 오전 10시, 진지에는 전투력을 가진 관병이 이미 얼마 없었다. 대부분이 죽거나 부상을 입었다. 총소리가 점차 줄어들었다. 일본군은 기회를 틈타 벌떼처럼 밀고 올라왔고, 진지는 함락되었다. 남아있던 부상병들은 일본군에 의하여 모두 죽임을 당한다. 고계자는 21사단에 증원을 명령했으나, 21사단은 항명했다. 진군에서 고계자부대의 작전을 지원하러 온 포병 1영은 대포 하나 쏘지 않았다. 목표물이 되어 일본군의 포격을 받을까봐 겁을 낸 것이다.

 

고빈과 고사결은 모두 이렇게 생각한다: 구앙악이 말한 "진지는 25일 오전 10시에 함락되었다"는 것이 가장 믿을만 하다고. 이것은 고계자가 장개석에게 보낸 전보, 이선주가 장개석에게 보낸 전보 및 고건백의 회고록에서의 주장등과 서로 맞아떨어진다.

 

일본방위청방위연구소전사실이 편찬한 <<중국사변육군작전사>>라는 책에서는 "전황이 곤란해졌고, 전투가 격렬했다. 25일, 여단은 마침내 당히 진지부근의 2킬로미터의 장성선의 정면을 점령했다. 그러나 같은 날 우세한 적군이 여단의 후방연락선을 차단하고, 계속 병력을 증가시켜, 당해 여단은 포위되는 곤경에 처한다" 여기서 말하는 일본군이 점령한 '2킬로미터의 정면"은 바로 502ㅇ단이 오전10시경에 함락당한 진지일 것이다.

 

아무도 고계자를 도와주지 않았다. 고계자의 부대는 강적의 계속되는 진공아래, 전투력을 극도로 소모하면서도 증원군을 받지 못했다. 다 흩어지고, 다 죽고, 결국 무너졌다. 서로 돌봐줄 수가 없었고, 아래위가 연락되지 못했으며, 진지는 사상자들로 넘쳐나고, 더 이상 일본군에 총을 쏠 사람이 없었다. 열사들은 죽어서도 눈을 감지 못하고, 호랑이같고 이리같은 일본군들이 산을 하나하나 점령하는 것을 분노한 눈으로 보고 있었다.

 

진장첩의 여러 주장은 모두 친히 겪은 사람, 친히 목격한 사람들이 부정한다.

 

종군기자인 추강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석산의 위에 임시로 동굴을 파서 몸을 숨겼다. 몸은 숨겨도 머리는 숨길 수 없을 정도였다. 적군의 포화가 맞지 않더라도 튀는 돌맹이에 맞아서 쓰러졌다." 서간에 임시로 동굴을 파고 겨우 몸뚱이만 숨겼는데, 무슨 '견고한 진지'인가? 추강이 친히 보고 들은 것은 고계자가 지원병이 오지 않는 것을 보고, 할 수 없이 부하들에게 최저한도의 전투를 지시한다: "다른 곳이 적에게 돌파되더라도 움직이지 말라. 그냥 죽을 때까지 저항하라. 끝까지 싸우는 것이 너희의 임무를 완성하는 것이다" 즉, 사람이 있는 한 진지는 있다는 것이다.

 

84사단의 고건백 여단장의 진술을 다음과 같다: 9월 23일, 진군이 지키는 1886.4고지가 점령되었다. 염석산은 이를 듣고 깜짝 놀란다. 현상금 만원을 걸고 진지를 되찾아오도록 하였다. 고계자부대의 여효도 단장은 분용대를 지휘하여 진군을 대신하여 포화가 난무하는 가운데 이 고지를 빼앗아 와서 진군에 넘겨준다. 그래도 상금을 받지 못했고, 진군은 진지를 접수했다는 영수증을 주었다. 마찬가지의 사정이 25일 새벽 2시에 다시 발생했다. 진군은 다시 1886.4고지를 잃는다. 여효도 단장은 분용대를 뽑아서 다시 빼앗아 온다. 분용대 50여명중 생환자는 겨우 11명이었다. 자기의 희생을 무릅쓰고 우군의 진지를 되찾아 온 것이다. 이것이 '적을 피하려는 뜻이 있다'고 할 수 있는 것인가.

 

진장첩은 고계자부대가 패퇴한 후 '항산에 숨었다'고 되어 있는데, 이것은 더욱 근거가 없다. 9월 26일, 염석산은 장개석에게 전보로 보고하는데, "17군 군부대와 84사단 사단부대는 번치 상대촌에 있다" 그리고 17군의 "250여단과 251여단은 단성구 부근에 배치했다"; 진장첩이 염석산은 고계자를 '죽여버려야 한다'고 하였다는 것인데, 아무런 방증이 없다, 고계자와 같은 뒷배경도 없고, 병력을 많이 잃어 실력도 떨어진 잡패군 장군이 정말 군법을 위반하였다면 염석산이 '죽여야 한다'고 말했다면, 바로 '일벌백계"를 할 수 있는 상황이다. 그런데, 왜 염석산은 장개석에게 처벌해달라고 요구하지 않았을까?

 

염석산이 중앙에 보고한 내용을 보면, 진장첩의 주장이 허망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9월 24일, 염석산은 본부에 밀전을 보낸다: "특급. 남경대본영...영구방면의 적은 우리 평형관, 채가욕의 전진기지로 진공한다. 우리 수비병은 극력 저항한다. 야전에서 대부분 평형관진지를 맹습했고, 우리 군은 용감하게 항적했으며, 육박전이 여러차례있었고, 적군을 격퇴했다. 적 약 1개사단이 두 길로 나누어 평형관과 단성구를 공격한다. 전황이 극렬하고, 적군과 아군이 산머리를 다투어 사상이 심하다. 격전이 정오까지 계속되었고, 마침내 적을 격퇴하고, 20여리를 축겨했다. 단성구의 적도 오후 4시에 아군에 격퇴된다. 이 전투에서 우리 는 단장 1명이 부상을 입고, 영장 3명이 사상되고 사병 약 2천이...."

 

현지에서 이 전투를 목격한 백성도 이런 기록을 남겼다:

 

"비가 꼬박 7일간 내렸다, 전투도 꼬박 7일밤낮 계속되었다. 적과 아군 쌍방의 사상이 아주 컸다. 아군의 첫번째 방어선에서 희생자가 가장 많았다. 희생된 사병은 대부분 남군(고계자부대)이었다. 전호에는 시신이 가득찼다. 당시, 우리는 제2방어선 마을서쪽의 언덕에 엎드려 있었다. 쌍방이 싸우는 것을 확실히 보았다...비록 우리 장병이 전투들 용감하게 하였지만, 우군의 협조지원이 아주 안좋아서, 적군을 더 많이 죽이지 못하였다"

 

장개석 적계의 이선주 21사단은 당시 고계자의 지휘를 받게 되어 있었다. 진지는 고계자의 84사단과 붙어 있었다. 이선주는 9월 25일 장개석에게 밀전을 보낸다. 내용은 비교적 객관적이다: "오늘 정오 84사단의 사상이 비교적 중함. 전부 궤퇴(潰退)됨. 단성구진지는 적에게 돌파당함....이 사이에 작전의 불리한 원인 (1) 지휘관능력박약, (2) 지휘불통일, (3) 상하연락두절, (4) 우군간 상호불신, 상호구원하지 않음으로 인하여 적에게 각개격파당함"

 

그에 따르면, 84사단은 "궤멸되어 퇴각(궤퇴)"당하였다. 이는 철수명령을 내린 것이 아니다. 시간은 '오늘 정오 즉 낮 12시이다. 그가 분석한 바에 의하면 작전불리의 원인에서 "상하간 연락두절"과 "우군간 상호불신, 상호구원하지 않음"을 꼽았다.

 

이 주장은 진장첩의 말을 뒤집는 것이다. 진장첩은 고계자 부대가 싸우는 것을 보지 못했다. 왜 고계자가 마음 속으로 어떻게 생각하는지까지 알 수 있었을까? 섬서성 사회과학원 연구원인 곽윤우의 분석에 의하면, '주로 그의 군벌 파벌관념때문에 그럴 것이다'라고 한다. 그는 진군이고, 진군에 대하여는 칭찬해 마지 않지만, 책임은 모두 고계자의 섬군에 떠넘긴 것이다.

 

많은 역사학자들은 왜 대량의 진실한 기록을 무시하는가? 오히려 진장첩의 친히 겪지도 않은 '친력기'를 쉽게 믿어버리는가? 고사결의 분석에 따르면, 국내역사학자들은 자료를 얻기가 힘들다고 한다. 자료를 모두 장악하지 못한 것이 아마도 역사적사실의 본질을 판단하는데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사람들은 모두 선입견을 가진다. 진장첩의 '친력기'가 발표된 후, 많은 사람들은 이것이 평형관전투의 '알려지지 않은 내막'이라고 생각했다. 진장첩의 파벌관념으로 사실을 왜곡했을 것이라고는 왜 생각하지 않았을까? 먼저 진장첩의 영향을 받은 것은 전국정협의 편찬한 <<진수항전>>이다. 진장첩의 주장과 일치시키기 위하여, 고건백의 회고록에 쓰여 있는 시간까지 고쳐버렸다.

 

출격허실

 

고계자가 지원군을 얻지 못했는데, 손초와 곽종분의 거절이유는 다음과 같다: 예비대는 출격을 위해서 남겨둔 것이다. 고계자와 그의 장병들의 유일한 희망은 그들이 계획대로 출격할 수 있느냐에 걸려 있었다.

 

상해학자인 양규송은 <<평형관전투의 사실재건문제에 관하여(수정)>>에서 하나의 의문을 제시한다: 국민당군은 그날 도대체 출격한 것인가 아닌가? "국민당의 당시 전투보고와 전보에 의하면, 국민당군 71사단등은 당일 고계자사단이 잃은 진지를 회복하는 임무를 완성한 후, 동서포지의 양측에서 대거 출격한 것으로 되어 있다. 기괴한 것은 일본군의 전사자료에는 유사한 상황에 대한 기록이 남아있지 않다는 점이다. 임표의 그날(25일) 저녁의 전보에서는, 국민당측면의 기록을 어느 정도 뒷받침해주고 있다. 임표는 전보에서, "하루 종일 싸웠다. 황혼때부터 진군의 ?격보대가 보였다. 소위 두 길로 나누어 출격하는 것인데, 모두 억지로 했다!"

 

왜 양규송은 일본군 전사자료중에서 곽종분 사단이 출격한 기록을 찾지 못했을까? 고빈은 반복하여 증거를 찾아본 끝에, 내린 결론은 이렇다: "곽종분의 428단이 출동했다. 그러나 출격하지는 않았다!" 그는 <<평형관에서 전투한 428단>>이라는 책을 증거로 내밀었다.

 

행정원은 당시 곽종분의 71사단 428단 1영 3련의 반장이었고, 나중에 단부의 전령반장이 되었다. 그는 "(24일) 야간에 비가 내렸다. 그러나 84사단방어지역의 후방에서는 밤에도 여전히 격렬한 전투가 벌어졌다. 포성과 총성과 죽여라는 소리가 아주 잘 들렸다."

 

제428단은 25일 오전 8시에 출격했다, "84사단은 마음대로 퇴각하여, 428단은 앞뒤로 적을 맞이하게 되었다. 좁고 긴 산골짜기에 갇혔다." "동시에 출격한 것은 제202여단 제403단 중령 시국헌이 이끄는 두개 영이었다. 그들도 428단과 함께 포위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출격시 부대는 모두 경무장을 하고 전투에 나섰다. 당시 단에는 무전기가 없었다. 포위된 후에 사단과 연락이 되지 않았다. 전황에 대하여는 아무 것도 몰랐다. 식량도 문제였다. 어쩔 방법이 없었다. 나중에 돌연 동남방에서 총소리가 들렸다. 보니 골짜기내의 도로에 부서진 자동차들이 보였다. 왕영작(428단장)은 서북으로 단성구내로 물러가기로 결정했다. 이후에 비로소 8로군 제115사단이 일본군을 저격했다는 것을 알았고, 휘황한 승리를 거두었다는 것도 알았다. 428단이 철수한 후, 한밤중에 안전지대로 가서 사단과 연락했다."

 

원래, 115사단이 적을 섬멸할 때, 428단은 "좁고 긴 산골짜기내"에 숨어 있었고, 전투에 참가하지 않았던 것이다. 나중에는 길을 돌아서 물러났다. 양규송이 일본군의 자료에서 출격기록을 찾지 못한 것도 다 이유가 있었다.

 

행정원은 아주 상세하게 기록했다. 다만 산골짜기내와 산위의 일본군의 전투행동, 과정, 사상상황을 언급하지 않았을 뿐이다. 그중에 한 구절을 보면, "428단이 철수한 후, 곽종분은 왕영작에게 사단본부에서 명령을 받으라고 했다. 왕영작은 그의 변목, 마변과 나의 반을 이끌고 밤중에 도보로 사단본부에 갔다. 길을 걷는데, 변목 가국동이 왕영작에게 말했다: 현재 연좌법을 실행하는데, 우리는 출격임무를 완성하지 못했는데다가 손실까지 입었으니, 사단장이 보고할 방법이 없으면, 책임을 당신에게 떠넘기지 않겠는가? 만일 사단본부에 도착하면, 그가 얼굴을 바꿔 문책할 수 있고, 우리는 억울하게 희생양이 될 것이다." 왕은 그 말을 듣고는 사단본부에 가지 않기로 결정했고, 단본부로 돌아갔다. 그리고 신속히 전화선을 가설하라고 지시했다. 전화가 개통된 후 왕은 전선의 상황이 위급하여 몸을 뺄 수가 없다고 거짓말하고 부대의 다음 행동을 지시해달라고 하였다. 왕의 예상과는 달리, 곽종분은 그를 질책하지 않았을 뿐아니라, 그에 대하여 상을 내라고 격려했다.

 

고빈은 이를 근거로, 왕영작이 신속히 전화선을 가설한 후, 사단본부에 전선의 상황이 위급하다고 보고하였는데, 진군의 전투보고 및 회고록은 모두 이에 근거하여 71사단은 출격하다가 저지받았다고 한 것이다. 그는, "이것이 무슨 출격했다가 저지받은 것이냐? 출동은 했지만 습격은 없었다. 책임자는 당연히 단장인 왕영작이다"

 

임표는 평형관전투를 끝내면서 진군에 대하여 이런 평가를 내렸다: "우군은 전투에서 협조가 아주 안좋았다. 그들은 스스로 정한 출격계획을 그들 스스로도 지키지 않았다. 너는 싸워라 나는 구경한다는 식이었다. 그들은 자주 곧 결전(決戰)을 벌일 것이라고 하지만, 결(決)은 하나 전(戰)은 하지 않는다. 적군과 싸울 때도 끝까지 싸우는 것이 아니라, 그들 본래 그다지 충분하지 않은데도, 돌격을 하면서 겨우 8개단으로 병력을 3갈래로 나누고, 다시 총예비대를 남긴다. 그리고 매로는 서로 10여리 내지 20여리 떨어져 있다. 이렇게 하면 출격력이 약화될 뿐아니라, 우리와 싸우다 패퇴하는 병사를 만나도 그들은 섬멸시키지 못하고, 오히려 포위망을 뚫는 적에게 당한다..."

 

진군은 "출격도 하지 않고, 증원도 보내지 않았는가?" 고사결은 부작의는 적의 증원군이 도착하기 전에 모든 전선에서 출격하자는 의견을 누가 거부할 권리가 있는가? 단지 염석산이다. 출격명령을 5번이나 바꾼 것도 염석산 자신이다.

 

고빈은 출격이 무산된 과정에 대한 생각의 변화를 이렇게 설명한다. 처음에 그는 진군이 증원도 거부하고 출격도 지연한 것은 곽종분이 그랬다고 생각했다. 나중에 고건백의 회고록을 보고, 진군202여단의 여단장 진광두가 "우리는 장관의 명령을 집행한다"는 말을 하면서 인쇄된 명령지를 보여주었는데, 붉은 연필로 곽종분이 "염석산의 명령을 전달하는데, 본장관의 명령이 없이는 출격하지 말라"는 내용을 듣고는 원인이 염석산에게 있다고 믿게 되었다.

 

일본의 <<화북치안전>>이라는 책에는 일본군이 한복구, 유여명 및 염석산에 대하여 어떻게 평가하는지를 적어놓았다: "산동 및 찰합이 29군의 일부는 중립을 유지한다. 산서 및 수원군도 일부는 성경계까지 나와서 소극적인 태도를 취하고, 감히 적극적인 태도를 나타내지 못한다"

 

고빈에 따르면, 나중에 염석산의 행동은 이것을 설명해 준다고 한다. 1941년부터 염석산은 갈수록 이상해진다. 일본과 정전의 '분양협정'을 체결하고, 염석산은 친히 친일파를 데리고 일본군의 '안평회의'에 참석한다. 거기서 염석산은 일관되게 친일적인 태도를 나타낸다. 이 회의는 우연한 사건으로 중단된다. 일본군은 진군에 대한 공격을 강화하는데, 그래도 염석산은 일본군에 서신을 보낸다: "너희는 너희를 동정하는 사람을 적으로 만들지 말라" 일본군은 진군을 향한 진격을 멈춘다. 제6집단군사령관인 양애원이 염석산에게 곽종분이 출격도 하지 않고 증원도 하지 않았다고 보고하였음에도, 염석산은 곽종분을 질책하지도 처벌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곽종분을 제2전구 참모장으로 승진시킨다.

 

고빈은 이렇게 강조한다: 고계자의 84사단은 평형관에서 3일낮 4일밤동안 혈전을 벌인다. 사상자가 아주 많았다는 것은 다툼의 여지가 없다; 단성구가 일본군에 돌파된 것은 항전군인으로서 책임을 면할 수 없다. 당연히 부끄러웠을 것이다. 만일 위로는 군단장부터 아래로는 말단병사까지 모두 죽었다면 책임을 면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러나, 진지는 어쨌든 함락되었고, 여전히 일본군을 모조리 섬멸시키지 못했다. 원래는 이런 기회가 있었다. 왜 전멸시키지 못했는지를 추궁하자면, 염석산, 손초와 곽종분이 책임자이다. '출격도 하지 않고, 증원도 해주지 않은' 것은 무엇때문인가? 항전에 소극적이어서인가? 우군을 희생하겠다는 것인가? 실력을 보존하겠다는 것인가? 판단착오인가? 조치실패인가? 어찌되었건 책임을 84사산에 떠넘겨서는 안되었다. '군중무희언'. 출격한다고 했고, 증원한다고 했으면면 말로만 하고 실제 행동으로 나타나지는 않았다. 이선주가 장개석에게 제2전구의 상황을 밀보하고, 이후 중앙에서 급히 인력을 산서에 파견하여 주재하게 한 것도 이해가 된다. 이후 위립황(衛立煌)이 산서로 파견나와 제2전구부사령관, 전선총지휘관을 맡아 염석산을 대신하여 흔구(?口) 전투를 지휘한다.

 

고빈은 항전후기때 이미 10여세였다. 부친의 군영에 여러번 가보았고, 전쟁의 포화를 경험했다. 부친대에서 전투에 관하여 하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많은 아저씨들이 희생되는 것을 보았다. 고사결에 따르면, 군인성격의 부친이 눈물을 흘리는 것을 딱 한번 보았다고 한다. 그것은 1955년 8월 섬서성 정협의 "세계반파시스트승리10주년기념회"상에서였다. 전 국민당군인이었던 정협부주석이 발언하면서, "국민당은 항일하지 않았다"고 했을 때, 고계자는 그 자리에서 그와 다투었다. 고계자는 비분강개하여 눈물을 흘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