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세계사/우리 역사 이야기

망국군주 - 고종⑤ 임오군란

구름위 2013. 6. 19. 11:43

공론화 없이 추진한 개화, 척사파 설득 못해 실패

 

 

* 수신사 김홍집의 행차. 온건개화파 김홍집은 1880년 일본에 다녀오면서 황준헌의 조선책략을 가지고 와 척사파의 공격 표적이 되었다

고종은 강화도조약 체결 20일 후인 재위 13년(1876) 2월 수신사(修信使) 김기수(金綺秀)를 일본에 파견했다. 김기수는 견문록 일동기유(日東記游)에서 어떤 사람이 “왜인은 서양의 앞잡이이니 귀신이면서 창귀(<5000>鬼)이고, 적이면서 간첩일 것”이라고 말했다고 적을 정도로 일본에 대한 경계심이 팽배했다. 고종은 귀국한 김기수에게 일본 사정을 자세히 물었으나 시원한 대답을 들을 수 없었다.

일종의 관망세가 계속되던 고종 16년(1879) 7월 청의 북양(北洋)대신 이홍장(李鴻章)이 조선의 영중추부사 이유원(李裕元)에게 보낸 편지가 전세를 뒤집었다. 이홍장은 ‘일본과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해서는 영국·독일·프랑스·미국 등과 통상해야 한다’고 권유했던 것이다. 이를 계기로 고종은 급격히 개화로 방향을 틀었다. 고종은 재위 17년(1880) 6월 수신사 김홍집(金弘集)을 다시 일본에 파견해 실정을 엿보게 했다. 같은 해 12월에는 청나라의 통리아문(統理衙門)을 본받아 통리기무아문(統理機務衙門)을 설치해 내각을 관장하게 하고, 군제도 5영(營)에서 무위영(武衛營)과 장어영(壯禦營)의 2영으로 개편했다. 또한 무위영 산하에 별기군(別技軍)을 설치하고 일본공사관의 호리모토(掘本禮造)를 교관으로 삼아 훈련시켰다.

고종은 개화로 방향을 선회했지만 공론화 과정을 거치지 않은 것이 문제였다. 조정에서 치열하게 토론하는 한편 구언(求言) 등의 방법으로 널리 의견을 구해야 했다. 하지만 고종은 재위 18년(1881) 62명의 신사유람단을 일본에 파견하면서 동래부 암행어사라는 명목으로 비밀리에 서울을 떠나게 하는 식의 비밀주의를 취했다. 고종과 민씨 척족정권에 대한 의구심이 커져간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이런 와중에 고종 17년(1880) 8월 김홍집이 일본에서 귀국하면서 도쿄 주재 청국공사관의 황준헌(黃遵憲)이 쓴 조선책략(朝鮮策略)을 갖고 와 반포하면서 큰 소동이 일었다. 조선책략은 러시아 세력을 막기 위해서는 조선이 중국과 친하게 지내고[親中國], 일본과 결합하고[結日本], 미국과 연합[聯美國]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고종 18년 2월 이만손(李晩孫)이 영남만인소에서 ‘러시아·미국·일본은 모두 같은 오랑캐’라고 반박한 것처럼 척사파(斥邪派) 시각에서는 수긍하기 어려운 논리였다. 이미 고종 17년 10월 병조정랑 유원식(劉元植)이 “(조선책략에) 예수학과 천주학이 우리 성리학[吾敎]에 주자와 육상산이 있는 것과 같다는 구절이 있는 것을 보고 머리털이 서고 간담이 떨리고 가슴이 서늘해지고 뼛골이 오싹했다(고종실록 17년 10월 1일)”고 비판 상소를 한 터였다. 유원식은 “잠복해 있는 흉악한 무리를 찾아내 남김없이 섬멸해서 사람들의 울분을 쾌히 풀어주소서”라고 천주교에 대한 재탄압을 주장했다. 이때도 고종은 유원식을 평안도 철산으로 유배 보냈을 뿐 그 주장에 대한 논쟁은 회피했다.

조선책략에 대한 비난이 들끓자 김홍집은 “이런 일을 당해 얼굴 들고 다니기가 곤란하다”면서 사직 상소를 내야 했다. 유원식 외에도 전 정언(正言) 허원식(許元式), 전 사과(司果) 홍시중(洪時中)·황재현(黃載顯) 등이 귀양 갔다. 국시(國是)는 여전히 성리학이었지만 성리학을 옹호하면 처벌받았다.

드디어 고종에 대한 직접 비판이 등장했다. 고종 18년(1881) 윤7월 소두(疏頭) 홍재학(洪在鶴)을 비롯한 강원도의 유생들이 복합상소(伏閤上疏:대궐문 앞에 꿇어 엎드리는 상소)를 올려 조선책략을 성토하면서 고종이 “바른 의견을 견지하고 사교(邪敎)를 배척한 신하들은 유배 보내거나 형벌을 가하여 죽이기에 있는 힘을 다했다(고종실록 18년 윤7월 6일)”고 비난한 것이다. 고종은 홍재학에게 고문을 가한 후 범상부도(犯上不道)로 단정해 서소문 밖에서 목을 베었다. 서른셋의 홍재학은 팔순 노모가 있었는데도 가산까지 적몰(籍沒)해 빈털터리로 만들었는데 황현은 “길을 가는 사람들도 그의 죽음을 매우 슬퍼했다”고 전하고 있다.

홍재학의 처형은 유생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고종 19년(1882) 5월에는 충청도 유생 백낙관(白樂寬)이 남산에 봉화를 올린 끝에 원정(原情:억울한 일을 소하는 문서)을 올려 “신은 국가를 위해 죽어야 할 의리는 없지만 감히 망언(妄言)을 올려 부월(<9207>鉞)의 베임을 피하지 않겠다”면서 “홍재학의 충성이 해와 달을 꿰뚫고 그의 정성이 귀신을 감동시켰다”고 주장했다. 백낙관은 ‘이 나라는 태조의 나라’라고 주장했는데 이 말은 국시를 위배한 것은 고종이라는 뜻이었다. “지금 전하 한 몸이 태조의 나라를 뒤집어엎는 것은 왕업을 받들어 계승하는 도리에 매우 어긋나며, 자신 한 몸을 지키기 위해서 선왕의 법을 폐하고 생민(生民)의 피를 마르게 하고 있습니다(고종실록 19년 5월 4일).”

‘고종이 자신을 위해 선왕의 법을 폐하고 생민의 피를 마르게 한다’고 주장했으니 목숨을 건 상소였다. 고종은 백낙관을 중죄수를 가두는 의금부 남간(南間)에 가두고 국문했다. 그 역시 죽는 것은 시간 문제로 보였다. 그러나 그해 6월 9일 급변이 발생했다. 군사들이 의금부에 난입해 옥문을 부수고 백낙관을 가마에 태워간 것이다. 임오군란(壬午軍亂)이었다. 임오군란의 표면적 동기는 고종이 별기군만 우대하고 두 군영 소속 군사들을 박대한 데 대한 분노의 폭발이었다. 그러나 그 내면에는 조선 후기 성장한 민중들이 조선의 지배체제를 전면적으로 거부하는 흐름이 내재해 있었다. 크게 성장한 민중들의 의식이 체제 자체를 거부하는 방향으로 흐르고 있었던 것이다.

고종 친정 이후 왕실의 낭비가 심해진 데다 개항 이후 일본으로 미곡이 대량 유출되면서 녹봉이 13개월치나 밀리자 군사들의 분노가 하늘을 찔렀다. 이런 상황에서 호남 세수미(稅收米)로 한 달분의 녹봉을 지급하면서 선혜청 당상 민겸호(閔謙鎬:민비의 오빠)의 하인이 겨와 모래를 섞고 나머지를 빼돌렸다. 군사들이 고지기를 구타하자 민겸호는 주동자 김춘영(金春永)·유복만(柳卜萬) 등을 가둔 후 사형시키겠다고 말했다. 김춘영의 아버지 김장손(金長孫) 등이 사발통문(沙鉢通文)을 돌리자 “왕십리 동리에서 늙고 어린 것 할 것 없이 일제히 입성했다(김장손 등 국안(鞫案))”는 기록처럼 하급 군사와 백성들이 일제히 일어섰다. 군사들은 칼로 땅을 치면서 “굶어 죽으나 법으로 죽으나 마찬가지”라면서 민겸호의 집을 불질렀다.

그나마 군사들이 대원군을 찾아간 것이 고종에게는 다행이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통제되지 않는 군사들에 의해 고종도 어육(魚肉)이 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대원군과 밀담을 나눈 군사들은 무기고를 습격하고 김춘영 등을 석방시키고 백낙관을 데려간 것이다. 겁을 먹은 고종은 다음 날(10일) 백낙관을 방송(放送:석방)하라는 명을 내렸다.

군사들이 영돈녕부사 이최응(李最應)을 죽이고 대궐에 난입하자 다급해진 고종은 대원군의 입궐을 청해 “지금부터 대소의 공무는 모두 대원군에게 품결하라”고 정권을 이양했다. 난병들은 대원군에게 “살려달라”고 빌던 민겸호를 끌어내 난도질하고 민겸호의 손자인 호군(護軍) 민창식(閔昌植)까지 살해했다. 군사들은 “중궁(中宮)이 어디 있느냐”고 외치며 민비를 찾아다녔는데 황현은 “그들의 말은 매우 불손하고 흉측해서 차마 들을 수가 없었다”고 전하고 있다.

민비가 탄 가마는 무예별감 홍재희(洪在羲:훗날 동학을 진압하던 홍계훈)가 “내 여동생 상궁”이라고 속여 겨우 탈출에 성공했다. 민비는 광주와 여주를 거쳐 충주 장호원의 민응식(閔應植)의 향제(鄕第)로 도주했고, 정권을 장악한 대원군은 통리기무아문을 폐지하고 삼군부를 복설했다.

그러나 대원군 정권의 운명은 청나라에 있던 영선사 김윤식(金允植)과 어윤중(魚允中)이 진압을 요청하면서 엉뚱한 방향으로 흘러갔다. 조선으로 온 청의 제독 정여창(丁汝昌)과 오장경(吳長慶)이 7월 13일 운현궁으로 대원군을 예방하자 대원군도 답방했는데 이것이 함정이었다. 청군은 대원군을 납치해 하북성(河北省) 보정부(保定府)에 유폐시켰다.

 


김옥균 묘지. 일본 도쿄 아오야마 공원묘지 외국인 묘역에 있다. 일본인들은 망명한 김옥균을 냉대하다가 그가 홍종우에게 암살당하자 머리카락과 의복 일부를 가지고 묘소를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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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세가 일변해 고종이 재집권했다. 일본이 임오군란 와중에 죽은 호리모토 등에 대한 배상을 요구하자 고종은 배상금 5만원과 일본공사관에 일본군의 주둔을 허용하는 제물포조약을 체결했다. 청군이 광화문에 ‘조선은 중국의 속방(屬邦)이다’라는 큰 깃발을 내건 와중에 일본군도 주둔하게 되었다. 고종과 민비는 군사봉기라는 초유의 사태에 대해 전혀 반성하지 않았다. 고종은 주동자들을 처형하는 한편 유생 백낙관을 ‘임금의 기강이 달려 있는 문제’라면서 다시 체포해 고문을 가한 후 사형시켰다. 민비도 마찬가지였다. 피난길에 광주(廣州)를 지날 때 한 노파가 “중전 때문에 난리가 나 낭자가 이곳까지 피난 온 것”이라고 말했다는 이유로 그 마을을 없애버렸다.


다시 정권을 장악한 고종 부부는 과거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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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명성황후 생가. 경기도 여주군 능현리에 있다. 명성황후는 임오군란 당시 분노한 군사들의 주요한 공격 표적이었으나 겨우 탈출에 성공한 뒤 청나라의 도움으로 복귀했다. <2> 김홍집 영세불망비. 경기도 용인시 마북동에 있다. 경기도 관찰사였던 김홍집의 선정을 기리기 위해 세운 것이다.

 

 

고종, 자기 날개 자르는 줄도 모르고 개화파 제거

 

* 우정총국 건물. 서울 종로구 견지동에 있으며 그 옆에 조계사가 있다. 개화당은 한국 최초의 우편행정기관인 우정총국의 낙성식 연회를 정변의 계기로 삼았다. 사진가 권태균

김옥균(金玉均)은 고종의 명으로 일본 시찰 중에 임오군란(1882) 소식을 듣고 서광범(徐光範) 등과 함께 급거 귀국했다. 김옥균은 사쓰마(薩摩)와 조슈(長州)번 출신의 요시다 쇼인(吉田松陰)과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등이 메이지유신(明治維新)을 일으켜 일본을 근대국가의 길로 이끈 것이 불과 14년 전(1868)이라는 사실에 주목했다. 고종은 임오군란 직후 철종의 부마 금릉위(錦陵尉) 박영효(朴泳孝)를 수신사(修信使)로 삼아 일본에 파견했는데, 김옥균도 동행했고, 민비의 조카로 정권 실세였던 참판 민영익(閔泳翊)도 함께했다.

 

박영효는 기행문 사화기략(使和記略)에서 효고현(兵庫縣)에 도착해 “새로 만든 국기를 묵고 있는 누각에 달았다”고 밝히고 있는데, 태극기를 달았다는 사실은 개화사상의 영향을 받았다는 뜻이었다. 조선 개화파의 비조(鼻祖)는 중인 출신 역관 오경석(吳慶錫)이었다. 오경석은 병인양요(1866) 때 청나라 예부상서 만청려(萬靑藜) 등을 통해 습득한 프랑스군과 청나라의 동태를 대원군에게 밀보(密報)해 큰 신임을 얻었다. 하지만 신미양요(1871) 때 대원군에게 ‘도저히 외교를 열지 않을 수 없는 소이’를 설명했다가 버림을 받고 말았다.

이후 오경석은 “먼저 북촌(北村: 서울의 양반 사대부 거주지)의 양반 자제 중에서 인재를 구하여 혁신의 기운을 일으켜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연암 박지원의 손자 박규수(朴珪壽)를 설득했다. 훗날 박영효가 이광수에게 “그 신사상은 내 일가 박규수 집 사랑에서 나왔소. 김옥균·홍영식·서광범 그리고 내 백형(박영교)하고 재동 박규수 집 사랑에 모였지요(이광수, 박영효 씨를 만난 이야기)”라고 말한 것처럼 박규수의 사랑방은 양반 출신 청년 개화파를 양성하는 정치학교가 되었다. 박규수 사망 후 개화파는 급진 개화파와 온건 개화파로 나뉘는데 온건 개화파는 김홍집(金弘集)·김윤식(金允植)·어윤중(魚允中) 등이고, 급진 개화파는 김옥균·박영효· 홍영식(洪英植)·박영교(朴泳敎)·서광범 등이었다. 온건 개화파는 동양의 정신세계에 서양의 과학기술을 접목시키자는 동도서기론(東道西器論)을 주창했다.

 

그러나 서재필(徐載弼)이 ‘그(김옥균)는 늘 우리에게 일본이 동방의 영국 노릇을 하려 하니 우리는 아시아의 불란서가 되어야 한다고 말했는데 이것이 그의 꿈이었고 유일한 야심이었다(서재필, 회고 갑신정변)”라고 말한 것처럼 김옥균은 조선 체제를 바꾸는 전면적인 개혁을 바랐다. 가장 큰 걸림돌은 청나라와 그를 추종하는 친청 수구파였다. 임오군란 후 청나라는 조선에 “무릇 외우(外憂)에 관한 일은 일체 청국에 문의하라”고 지시했고, 청의 오장경(吳長慶)은 고종에게 “내가 3000 군대를 거느리고 여기에 와 있으니 매사에 황조(皇朝: 청의 조정)를 배신해서는 안 된다”고 협박했다. 청나라는 임오군란 직후인 고종 19년(1882) 8월 조선과 ‘상민수륙(商民水陸)무역장정’을 체결하면서 조선을 ‘속방(屬邦: 속국)’이라고 명기했다. 청나라 군사를 끌어들여 정권을 되찾은 민씨 척족정권은 청의 이런 횡포에 항의 한마디 하지 못했다.

고종 21년(1884) 5월 당초 개화파였던 민영익이 미국과 유럽을 순방하고 돌아온 뒤 친청 수구파로 전향하면서 개화당은 더욱 열세에 놓이게 되었다. 미국 공사관의 무관 포크(George C Foulk)가 “나는 민영익을 방문했는데 두 파 사이의 의견 차이가 너무 심하여 도저히 그들이 한자리에 모여 국사를 논할 수 없음을 알게 되었다”고 말한 대로 두 정파 사이의 충돌이 불가피했다. 박영효는 일본공사관의 서기관 시마무라 히사시(島村久)에게 “우리들은 소수인 데다 국왕은 반신반의(半信半疑) 태도이고, 왕비는 저들(수구파)의 말을 믿고 점차 마음을 돌리게 되어 마침내 우리들의 충언을 듣지 않게 되었다”라고 말한 것처럼 고종 부부의 개화 의지도 퇴화하고 있었다. 윤치호(尹致昊)가 “고우(古愚) 김옥균을 만났는데 여러 민씨들이 고우를 집어삼키려 하여 마지 않는다고 한다”고 전한 것처럼 김옥균은 민씨들의 제거 대상이었다.

민비를 정점으로 민태호·민영목·민영익·민영소·민응식 등 이른바 오민(五閔)이 정권을 독차지했다. 민씨 척족정권은 우영사(右營使)에 민영익을 앉히고 전영사(前營使) 한규직, 후영사 윤태준, 좌영사 이조연 등 자신들을 추종하는 인물들에게 군사지휘권을 주었다. 정치권력과 군사권력이 모두 수구파에게 돌아가자 김옥균은 비상수단을 강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김옥균은 박영효의 집에서 “우리들은 수년 동안 평화적 수단에 의하여 각고진력해 왔으나 그 공효가 없을 뿐 아니라 금일 이미 사지(死地)에 들어가게 되었다. 앉아서 죽음을 기다릴 것이 아니라…… 우리들의 결심에는 하나의 길이 있을 뿐이다(朴泳孝邸ニ洪英植·金玉均·徐光範ト島村久談話筆記要略)”라고 정변을 각오했다. 1884년 봄 안남(베트남)을 둘러싸고 프랑스와 분쟁이 생기자 청은 조선 주둔 3000 병력 중 1500명을 안남으로 이동시켰다. 그해 8월 청불(淸佛)전쟁에서 청나라가 연전연패하자 김옥균은 호기라고 생각했다. 영어 통역을 맡았던 윤치호가, “고우(古愚: 김옥균)가 미국 공사를 방문해서 청불전쟁에 대해 이야기했는데 ‘우리나라가 독립할 기회가 어찌 이때에 있다고 하지 않겠는가’라는 등의 말을 하고 갔다(윤치호 일기, 1884년 8월 3일)”고 적고 있는 것이 이를 말해준다.

개화당은 정변을 위한 무력을 양성했다. 일본에 유학시킨 서재필(徐載弼) 등 14명의 사관생도들은 중요한 무력이었고, 육군도야마학교(陸軍戶山學校)에서 사관교육을 받은 신복모(申福模)가 만든 43명의 충의계(忠義契)도 있었다. 광주 유수 박영효도 500여 명의 군사를 길렀으며, 윤치호의 부친인 함경 남병사(南兵使) 윤웅렬(尹雄烈)도 북청(北靑) 지역의 장정 470여 명을 훈련시켰다. 무력을 사용하기 위해서는 고종의 밀지가 필요했다. 김옥균은 일본의 고토 쇼지로(後藤象二郞)에게 보낸 조선 개혁의견서(改革意見書)에서 ‘조선 정치를 개혁하기 위해서는 과감한 개혁을 강행해야 하는데, 무력을 행사하려면 국왕의 밀지가 있어야 한다’고 말한 바 있다. 김옥균은 갑신일록(甲申日錄)에서 고종에게 밀칙(密勅)을 내려달라고 간청했더니 “(고종이) 즉시 칙서를 쓰셔서 수결하시고 옥새를 찍어서 내려주셨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개화당은 일본의 메이지 유신처럼 수구파를 몰아내고 대개혁정치를 실시하려 한 것이다. 개화당은 독자적인 정변을 구상했으나 일본공사 다케조에(竹添進一郞)가 ‘청국이 장차 망할 것이니 귀국의 개혁지사들은 이 기회를 놓쳐서는 안 된다”고 거들면서 연대하기로 결정했는데, 다케조에는 일본공사관 호위병 150명이면 청국군 1000여 명과 맞설 수 있다고 호언장담했다.

드디어 고종 21년(1884) 10월 17일 개화당 홍영식이 총판으로 있는 우정총국(郵政總局) 낙성식의 날이 밝았다. 김옥균은 망명 후에 쓴 갑신일록에서 고종을 경우궁(景祐宮)으로 모시고 내위(內衛)는 충의계가, 중위(中衛)는 일본군이, 외위(外衛)는 조선군이 담당하는 3중 호위망을 구축하기로 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낙성식 축하연 도중 별궁(別宮)에 불을 지르는 것이 신호였는데, 별궁 방화에 실패해 우정총국 북쪽의 민가를 대신 불질렀다. 신호가 떨어지자 미리 지목한 친청 수구파에 대한 제거작전이 전개되었다. 도주하던 우영사 민영익은 중상을 입었고, 한규직·이조연·조녕하 등 군권을 장악했던 수구파 영사(營使)들은 모두 제거되었다. 민태호·민영목·조녕하 등 민씨·조씨 척족들도 제거했는데, 고종실록은 “임금이 연달아 ‘죽이지 말라’고 말했으나 듣지 않았다”고 전하고 있다.

고종 부부를 경우궁으로 모신 개화당은 이튿날인 10월 18일 신정부를 수립했다. 고종의 종형 이재원(李載元)을 영의정으로 추대하고 병조판서도 그 아우 이재완(李載完)을 추대하는 대신 전후 영사(營使)는 박영효, 좌우 영사는 서광범이 차지해 개화당이 군사지휘권을 장악했다. 김옥균은 판서 없는 호조참판이 되어 재정을 장악했는데, 대체로 대원군 계열의 종친과 개화당의 연립내각이었다. 개화당이 미국·영국·독일 공사 등을 부르자 고종은 외교사절들에게 신정부의 수립과 대개혁정치의 시작을 통지했다. 신정권은 수십개 조의 개혁정강을 발표했는데 김옥균은 갑신일록에서 그중 14개 조에 대해서 적고 있다. ‘①대원군을 귀국시키고 청국에 대한 조공을 폐지한다 ②문벌을 폐지하여 인민평등의 권리를 제정하고 재능에 의해 인재를 등용한다 ⑪사영(四營)을 일영(一營)으로 통합하고 왕세자를 육군 대장으로 정한다 ⑫일체의 국가 재정은 호조에서 관할한다’ 등의 항목이 눈에 띈다. 신분제도를 폐지하고 인민평등의 권리를 제창하고 재능에 의한 인재 발탁을 주창한 것은 가히 혁명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청군의 원세개(袁世凱)는 개화파로 위장한 경기관찰사 심상훈(沈相薰)을 통해 민비의 밥사발 밑에 서찰을 전달하는 데 성공했다. 원세개는 나아가 우의정 심순택(沈舜澤)에게 조선 정부의 대표자격으로 청군 출동을 요청하라고 권고했고 심순택은 동조했다. 임오군란 때 청군을 끌어들였던 판서 김윤식도 청군의 출동을 요청했다. 고종은 10월 19일 오후 3시 ‘대정유신(大政維新)의 조서(詔書)’를 내려서 신정부가 대개혁을 단행할 것이라고 발표했지만 그 마음은 이미 신정권에서 떠나 있었다. 고종은 적은 병력의 신정권이 방어하기 곤란한 창덕궁으로 이어할 것을 거듭 요청해 관철시켰다. 청군 1500명이 일제히 돈화문과 선인문을 공격하자 민비는 창덕궁 북산으로 도주해 고종을 불렀다. 외위(外衛)를 맡은 조선 친군영 500여 명이 응전하다가 수십 명의 전사자를 냈는데 중위(中衛)를 맡은 일본군은 정변에 가담하지 말라는 외무대신의 훈령이 오면서 소극적으로 변했다. 김옥균 등은 고종과 인천을 거쳐 강화도로 가서 청과 계속 항전하려 했으나 고종은 “나는 결코 인천으로 가지 않겠다”고 반대했다.

드디어 10월 19일 밤 김옥균·박영효·서광범·서재필 등이 일본으로 망명하면서 갑신정변 ‘3일 천하’는 끝나고 말았다. 국왕을 호위해 청군에 넘긴 홍영식·박영교·신복모 등과 사관생도들은 모두 사형당했다. 고종은 청군 출동에 공이 컸던 심순택을 영의정으로 임명하고 신정권에서 발표한 일체의 개혁정령은 모두 폐지하고 김옥균·박영효·홍영식·서광범·서재필을 5적(賊)으로 규정했다.

김옥균 등은 조선의 이토 히로부미를 꿈꾸었지만 고종은 이토를 필요로 하지 않았다. 고종은 부국강병한 근대국가 건설에 목숨을 걸었던 개화당을 제거하는 것이 자신의 우익을 제거하는 것이란 인식조차 없었다. 청·일 두 나라는 1885년 1월 천진조약을 맺었는데 그중에 “일국(一國)이 파병을 요할 때는 마땅히 상대방 국가에 문서로 알려야 한다”는 조항이 들어있었다. 청일전쟁의 싹이 트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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