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화민국의 시련 : 국공 내전, 국민당군의 붕괴
국공 내전(중국어 정체: 國共内戰, 간체: 国共内战, 병음: guógòng neìzhàn)은 중화인민공화국에서는 혁명을 정당화하기 위해 해방전쟁으로도 불리는데, 1927년 4월부터 1950년 5월까지 중국 국민당과 중국 공산당 사이에 일어난 내전을 말한다. 1927년에서 1937년까지를 제1차 국공 내전, 1946년부터 1950년까지를 제2차 국공 내전으로 부르며, 결국 중국 공산당의 홍군(紅軍)의 승리로 끝났다. 전쟁의 결과로 본토에는 마오쩌둥이 이끄는 중국 공산당의 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되었으며 장제스가 이끄는 중국 국민당의 중화민국은 타이완(대만)으로 패주하여 쫓겨났다. 이러한 국민당의 패배는 국민당의 심각한 부정부패와 대부분 농민 출신이라 민폐를 끼치지 않은 홍군의 도덕적인 모습 등에 기인한다. 레닌주의를 계승하여 농민을 혁명의 주체로 본 마오쩌둥의 공산주의 혁명 이론도 중국 공산당이 승리한 이유 중 하나이다.
1936년 시안 사건을 계기로 1937년부터 1946년 사이에는 공동의 적인 일본 제국과의 중일 전쟁 수행을 위해 공산당과 국민당 사이의 휴전과 공동 항일 전선이 이루어졌는데, 이 휴전 기간의 합작은 제2차 국공 합작이라고 부른다.
배경
1911년 청조가 무너진 이후 중국은 위안스카이로 대표되는 군벌의 시대로 돌입하게 된다. 군웅 할거하는 군벌의 지배로부터 중국 북부의 지배권을 되찾기 위해 쑨원은 서구 민주주의 국가들에게 도움을 요청하였으나 서방 국가들은 별다른 관심은 돌리지 않았고 이에 쑨원은 이제 공산주의 혁명이 완수된 신생 공산 국가인 소련으로 눈을 돌려 1921년 소련에 도움을 요청한다. 1923년 소련의 대표단이 상하이를 방문하고 서로 교류하면서 이제 막 탄생한 중국 공산당과 중국 국민당은 군벌 세력으로 분열된 중국을 재통일하고 외세로부터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 제1차 국공 합작을 이루게 된다.
쑨원이 군벌과 대항하기 위해서는 군사력이 절실히 요구되었는데 쑨원은 장제스를 비롯한 몇몇 군인을 소련으로 파견하여 군사 기술을 배워 오도록 하는 한편 광저우 교외에 황푸군관학교를 세우고 자체적으로 현대적 군사력을 키우기 위해 노력하였다. 이시기에는 공산주의자도 국민당에 입당하는 것이 허용되었고 국민당 내 공산당의 영향력이 매우 크게 작용하였다. 이 시기 저우언라이도 황푸군관학교의 정치부 교관이었고 마오쩌둥도 국민당의 요직을 맡고 있었다. 요컨대 공산당은 국민당 내에서 “정당 안의 또 다른 정당”으로 활동하고 세력을 키워가고 있었다.
북벌(北伐, 1926~1927)과 국민-공산당 분열
1925년 쑨원이 죽자 장제스는 국민당의 군대인 국민 혁명군의 총사령관이 되었고, 군벌의 영향력 아래에 있는 중국 북부를 국민당의 영향 아래 두기 위해 북벌을 준비한다. 이 무렵 국민당은 우파와 좌파로 분열되었고 공산당은 계속 세력을 넓혀가고 있었다. 1926년 3월 중산함 사건으로 국민 혁명군 내의 공산당원이 체포되는 사건이 발생하고 장제스와 공산당 및 국민당 내 좌파와 우파의 대립이 격화되었다. 이 와중에도 장제스의 국민 혁명군은 민중의 지지로 후난 성, 후베이 성, 푸젠 성, 저장 성, 장시 성, 안후이 성의 6성을 국민당의 세력 안에 편입시켰으며, 우페이푸(吳佩孚), 쑨추안팡(孫傳芳) 등의 군벌을 격파하고 만주 군벌 장쭤린과 대치하였다.
1927년 3월 상하이의 노동자가 무장봉기하여 장제스 군대를 맞아들였지만, 공산주의 세력이 커지는 것을 싫어하는 상공인과 부유층 및 외세 의존 세력은 장제스에게 중국 공산당과 관계를 끊을 것을 강요하였다. 그해 4월 12일 장제스가 공산당에 대한 대대적인 숙청.학살 작업을 벌인 4.12 사건이 터져, 중국 공산당은 공산당원의 5분의 4가 학살되는 괴멸에 가까운 타격을 입고 지하로 숨어들 수밖에 없었다. 이로서 제1차 국공 합작은 결렬되었고 국민당과 공산당은 분열되어 내전 상태에 들어갔다.
반공산당 토벌전
장제스는 농촌 지역에서 끊임없이 세력을 키우고 자치 정부(소비에트)를 구성하는 공산군을 토벌하기 위해 수차례에 걸쳐 대규모 공격을 개시하였는데 이를 ‘토공전’(討共戰)이라 한다. 공산당의 군사 조직인 홍군은 종종 홍비(紅匪)로 불렸다.
이러한 대규모 토벌 작전에도 불구하고 장제스의 국민당군은 홍군을 완전히 분쇄하지 못했는데 이는 인력과 물자가 부족한 홍군이 철저한 게릴라식 유격 전술을 펼쳤기 때문이다. 그러나 마지막 대규모 토벌전에서 국민 혁명군은 종전의 토벌 방식을 바꾸어 대규모 진지, 토치카를 짓고 지구전적인 진지전을 펼쳤는데, 홍군은 이 전술에 말려들어 주요 근거지인 장시 성 해방구를 잃게 될 위험에 처하였다.
이때 홍군은 필사적인 후퇴 전술을 택해 중국 대륙을 돌아서 산시 성에 이르는 이른바 장정을 감행하고 국민당군의 추격을 뿌리치고 새로운 근거지를 찾게 된다. 공산군의 주력은 무사히 옌안에 도착하고 그곳을 새로운 수도로 정하고 군벌 출신의 장쉐량과 대치하는데, 장쉐량은 공산당에 동조적이고 공산당이 주장하는 항일 정신에 경도되었다. 마침내 1936년 장쉐량은 '시안 사건'을 일으켜 장제스를 설득, 공산당과의 내전을 중지하고 항일 통일 전선인 '2차 국공합작'이 성립하게 된다.
중일 전쟁
1937년 이후 일본 제국의 침략이 본격화되자 공산당과 국민당은 제2차 국공 합작을 결성, 공동으로 일본군과 전쟁을 벌이게 된다. 공산군은 제8로군과 신사군으로 개편되어 국민 혁명군에 소속되지만 사실상 장제스의 통제를 받지 않고 독자적으로 항일전을 벌였다.
이 항일 전쟁 기간 동안 장제스의 국민 혁명군은 일본군에 패하여 세력이 점점 약해져 갔고 공산군(팔로군, 신사군)은 세력이 점차 커졌다.
제2차 국공 내전
일본이 패망한 직후 공동의 적이 사라지자 일본군의 무장 해제와 점령지 정리 등을 둘러싸고 공산당과 국민당 사이의 긴장이 고조되었다. 오랜 전쟁에 지쳐 있던 중국 민중들은 평화와 민주를 외치며 내전 반대 목소리를 높이 부르 짖었다. 이에 양측은 내전을 피하기 위해 협상을 개시했다. 1945년 8월 28일 마오는 장제스의 초청을 받는 형식으로 주중 미국 대사 하레와 함께 약 한 달 반 정도 충칭에서 장제스와 마오쩌둥이 직접 만나 회담을 가졌고 10월에 양측의 협정이 맺어져서 내전을 피하고 정치의 민주화에 대한 합의를 도출했다.
장제스와 마오의 직접 회담 이외에도 국민당측의 장군 왕세걸 등과 공산당측의 저우언라이 사이에도 협상이 진행되었다. 양측은 10월 10일 '회담기록요강'에 서명하였는데 이것이 이른바 '쌍십협정'이다. 이 요강에는 남부의 8개 해방구로부터 홍군 철수, 홍군을 20개 사단으로 축소, 공산당과 중도 세력이 참가하는 정치협상 회의의 개최 등이 규정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 중경협약은 성실히 지켜지지 않았다. 장제스는 10월 13일, 15일에 수원.산서.장가구 등지의 공산당 근거지에 공격을 가하였다.
그래서 양측의 긴장은 계속 고조되었고 미국의 마샬 장군이 중재하여 내전을 피하기 위해 양측을 조율하고 공동 정부를 구성하기 위한 협상이 1946년 1월부터 마샬 주재하에 국민당 정부 대표 장군과 공산당 대표 저우언라이는 정치협상 회의를 개최하여 어느 정도 합의에 성공했다. 이어 10일에는 '군사 충돌 방지에 관한 방법'을 정하고 북경에 군사조처집행부를 설치하기로 합의했다. 정치협상 회의가 끝난 후에도 국공 대표 각 1명과 미국 대표 1명으로 구성된 3인 위원회는 12일간에 걸쳐 회의를 열어 '군대 개편 및 중공군의 국군 편입에 관한 기본방안'을 토의했다. 마샬의 조정에 의해 정전결정의 조인과 함께 국공 쌍방은 휴전 명령을 내렸다. 아울러 쌍방은 모든 부대의 이동을 중지할 것도 동의했다.
같은 날 정치협상 회의 결과 다음 5개 안이 채택되었다.
. 각 정파의 민주적인 참여하의 정부 개편
2. 평화적 건국 계획
3. 군대의 국가화 및 정리 축소
4. 국민대회 소집
5. 민주헌법 기초 및 지방자치 허용
그러나 이를 인준하는 과정에서 국민당은 그 해 3월에 개최된 중국 국민당 2차 전국대표회의 중앙위원회는 다시 합의안을 번복하고 공산당은 이에 항의하여 결국 합의안은 실패로 돌아갔다. 그해 2월에는 소련군의 철수와 함께 다수의 정예부대를 동북지역에 보내 지역을 인계.인수하고 그 지역에서 세력을 확대하려 하였다. 이에 항의한 인민 권력을 조직하던 중국 공산당은 정전협정 위반이라며 항의하여 무력 충돌이 일어났다. 그 해 6월 국민당군은 본격적으로 공산당 지구를 침공하여 전면적인 내전을 개시하였다.
1946년 6월 국민당은 2백만 명에 가까운 병력을 동원하여 화북과 화중에서 대규모 공격에 들어갔다. 그들은 중부 평원과 양자강 하류 지역에서 홍군을 몰아냈다. 8월에는 열하 해방구의 중심지인 숭덕을 , 10월에는 장가구를 점령한 데 이어 1947년 1월 산동 남부해방구의 중심지 임기를 점령하였다. 이어 1947년 3월 19일에는 장정 이후 중국 공산주의 운동의 심장부이자 상징인 연안을 점령했다.
그러나 내전으로 인해 급속히 앙등된 인플레로 인해 국민 정부 지배 지역의 경제 상태는 점점 악화되었다. 근로 노동자의 생활 수준이 급속히 저하하면서 많은 민중이 기아 상태에 빠졌다. 1946년 1월부터 1948년 8월에 이르는 동안 물가는 67배나 폭등하였고 상해에서는 30만 명이 빈민으로 전락해 아사자가 속출하였다. 그 결과 국민정부에 반대하는 기치를 든 통일 전선이 형성되고 국민당을 부정하는 대중 운동이 일어났다.
국민당이 항공기와 중포를 가진 4백만 명의 군대를 가진 것에 비해 공산당은 겨우 120만 명 남짓한 군대만을 확보하고 있었다. 그러나 국민당은 연안에서 시베리아에 걸친 길고 긴 보급로와 미군 장비의 사용으로 인한 재정 부담 및 수송 문제, 그리고 장제스 직계군과 기타 군대 사이의 갈등, 고위층 내부의 권력투쟁, 내부적인 심각한 부정 부패 등으로 인해 심각한 난국에 처해 있었다.
초기에 국민당군은 병력, 장비, 보급 등 모든 면에서 공산 측보다 우세했고, 특히 미국의 지원을 받아 무장하고 있어서 내전은 곧 종식될 듯이 보였다. 특히 1947년에는 후쫑난 장군의 지휘하의 20만 명의 병력이 중국 공산당의 본부가 있던 옌안을 점령하기도 했다. 그러나 무리하게 점령지를 늘린 국민당군은 지나치게 병력이 분산되는 전략적 오류를 범하게 되었다. 게다가 국민당 정부의 총체적 부패, 인플레로 인한 경제 붕괴, 그리고 이미 떠난 민심이 어우러져 1948년부터는 공산당 측에 유리하게 내전이 전개되었다.
공산당은 이같은 국민당 내부의 취약성과 이질 요소를 이용했으며 민중의 정치적 지지에 기반을 두었다. 이 같은 기반은 공산군이 철수한 이후에도 그 믿음을 잃지 않았다. 공산당의 일차적 목표는 지역을 점령하지 않고도 국민당군을 궤멸시키는 것이다. 우세한 힘을 집중하여 적을 하나하나 궤멸시키는 작전으로 수세에서 공세로 전환하려 하고 있었다.
1947년 들어 공세로 전환한 공산당 임표의 군대는 국민당군의 많은 부대를 패배시키고 동북 지방의 장춘.길림.심양 등의 3개 도시를 포위했다. 동시에 중부 평원에서도 공산당의 역공세가 시작되었다. '유백승'과 '진의'의 군대는 각각 산서와 산동으로부터 진격하여 1947년 여름 황하와 농해 철도를 건넜다. 같은 해 홍군은 하북.산동.산서의 대부분을 장악하고 내전 개시 이래 처음으로 '석가장'을 탈취했다. 공산당의 군대는 1947년 2월까지 국민당군 56개 여단, 5월까지 90개 여단, 9월까지 97개 여단을 패배시켰다. 이것은 거의 1백만 명에 달하는 병력으로 국민당군의 1/4에 해당하는 것이엇다. 한편 공산당 군대는 120만 명에서 2백만 명으로 증가하였고 1948년에는 황하 연변의 대도시 낙양과 개봉을 점령했다. 그리고 1947년 국민당군에게 빼앗겼던 연안을 수복했다. 9월에는 산동의 제남을 점령했다.
공산당은 1948년 9월에서 11월에 걸쳐 린뱌오가 지휘하는 동북 인민 해방군이 만주에서 국민당군을 격파하는 것을 시작(요심전투)으로 전세는 역전되어 만주 전투에서 장춘.길림.심양 등 대도시를 함락함으로써 전 동북을 장악하였다. 1948년 11월에서 1949년 1월에 걸쳐 내전 이래 최대 규모의 '회하 대전'이 벌어졌다. 국공 쌍방이 각각 50만 명의 대병력을 투입하여 회하와 농해 철도 지역에서 전투를 벌인 결과 국민당군은 진의와 유백승에게 포위되어 완전히 붕괴되었다. 이어서 1월 15일에는 천진이 함락되고 31일에는 국민당군 사령관 '부작의'가 항복 조건을 협상한 끝에 공산당에 항복했다.
장제스는 1949년 1월 신년사에서 남경 정부의 권력을 그대로 두는 것을 전제로 하여 공산당측에 화평을 제의했다. 이에 마오는 아래 8개항의 조건을 제시했다.
1. 장제스를 포함한전쟁범죄자 처벌
2. 민주주의 원칙에 의거 군대 재편성
3 관료 자본 몰수
4. 토지개혁
5. 매국 조약 파기
6. 반동분자가 참가하지 않는 정치협상 회의 개최
7. 민주 연합정부 수립
8. 남경 국민당 정부 모든 권력 접수
장제스는 1월 화평을 제의하면서 남부에 국민당 세력을 재집결하고 미국의 증원을 받아 정권을 그대로 지탱하려 하였으나 미국은 망설였고 화평 제의는 아무런 성과도 없었다. 1949년 봄 이래 장제스는 정부의 금괴와 최정예부대를 빼돌려 대만으로 이동할 준비를 서둘렀다.
국민당군의 붕괴와 대만 철수
중국의 내전이 국민당군에게 결정적으로 불리하게 작용하여 붕괴 직전에 있었으나 미국은 직접적.대규모적 개입을 망설였다. 미국은 중국 문제의 해결은 중국인 자신에게 부여된 문제이며 자신들은 직접적인 책임은 없다고 발뺌했다. 당시 미국은 유럽에 막대한 원조를 제공하고 있었으며 이미 붕괴 조짐이 역력한 국민당 정부에 대한 원조는 더 이상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판단하고 있었다. 미국은 극동 정책의 중점을 서서히 중국에서 한반도와 일본으로 후퇴하여 이 선을 연하여 공산주의 봉쇄 거점으로 삼으려 하였다. 미국의 이같은 정책이 장제스의 붕괴를 재촉하는 큰 요인이 되었다.
1949년 2월에는 베이징이 함락되었고, 이어 파죽지세로 4월에는 창 강을 건너 국민당 정부의 수도 난징을 함락시켰다. 1949년 4월 공산당은 최후의 일격을 가하기 위해 양자강 남쪽을 진격하였다. 그들은 몇 개월 만에 화북.화동 일대의 대도시를 점령하고 화서.화남.서남 등지에서도 진격하여 대부분의 지역을 점령하였다. 국민당 소속의 지도급 인사 및 군 지휘관들이 싸우지도 않고 대부분 항복을 하였다. 4월 남경 함락, 5월에는 항주.상해.서안.남창.무한.산서가 함락되고 6월과 7월에는 신강.내몽골 등 서북 전체가 점령되었다. 이어서 8월에는 호남.호북.복건이 함락되고 10월에는 광동 등 화남이, 11월에는 다시 사천.귀주, 12월에는 광서의 남녕이 함락되었다.
국민당 정부는 1949년 봄 남경을 포기하고 광동에서 저항하려다 수도를 다시 중경으로 옮겼다가 그 후 성도로 옮겼다. 그리고 1949년 12월 미국의 보호 아래 대만으로 옮기게 되었다.
국민당을 몰아내고 중국 전토를 장악한 공산당은 1949년 10월 1일 북경을 수도로 하여 중화인민 공화국을 수립을 선포하고 마오짜둥은 국가주석에 취임하였다.
국민정부는 공산당이 북경을 점령하기 앞서 고궁의 보물과 도서관의 기증한 각종 서적 및 자료들을 남경으로 운반했다가 다시 구축함에 실어 대만으로 보냈다. 대만으로 이동한 국민정부는 5권 분립의 민주 체제 아래 산업과 경제를 발전시켜 오늘에 이르고 있다.
조선인의 활약
1945년 이후 국공내전 시기에 동북삼성에서 중공측으로 참전한 조선족의 숫자는 6만 3천여명으로 연변에서만 3만 5천여명이 참전하였다. 이는 연변 총참군의 85%에 달하는 숫자로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국공 내전시 조선족 병사는 3,550여 명으로, 길림성에서만 2,262명으로 조선족은 항일전쟁과 마찬가지로 중국혁명에서도 큰 역할을 하였다. 또한 북한도 중국공산혁명을 위하여 기여를 했는데, 직접 병력을 파견하여 전투에 참여하였고, 북한지역에 중공군의 후방기지를 세워, 훈련기지와 병원 등을 제공하였다. 이들은 만포진, 청진, 정주 등에 주둔하였다. 북한에 주둔했든 중공군의 숫자는 47년 당시 5만 ~ 7만 5천에 달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중공군은 국민당군에게 포위되어 어려움을 겪었을 것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장제스 국민당 패망 원인
미국과 청나라는 아편전쟁 직후인 1844년, 양국 최초의 통상조약인 망하(望夏)조약을 체결했다. 1856년 애로호사건 이후 미국은 중국에서의 치외법권 체제의 특혜를 누리게 되고 1901년 의화단의 난 이후 체결된 신축조약으로 철도 이용권 등 이권을 확대해 나가며 배상금으로 칭화(淸華)대학을 건립하여 유학생을 양성하는 등 중국 내에서 미국에 우호적인 분위기를 조성하려 노력한다.
1914년 7월,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면서 영국, 프랑스, 독일 등 서양 열강이 중국에 신경을 쓰지 못하는 사이 일본은 중국에서의 지배권을 크게 강화했으며 중국은 1917년 연합국으로 1차 대전에 참전하고도 독일이 차지하고 있던 산둥(山東) 반도를 일본에게 다시 내주고 만다.
소련의 지원을 받은 공산당이 탄생하여 세력을 넓혀가는 동안 미국은 장제스(蔣介石)가 이끄는 국민당에게 적지 않은 자금과 무기를 지원해 준다. 일본이 1931년 만주사변 이후 만주국을 세우고 1937년 중일전쟁에서 승리하며 점점 세력을 키워가고 있음에도 국민당은 적극적으로 항일에 나서지 않으며 공산당 토벌에만 열을 올렸다.
1941년 12월 일본의 진주만 공격 이후 미국은 중국 국민당에 더욱 적극적인 군사 지원을 해 주면서 중국이 일본에 타격을 가해줄 것을 기대했다. 그러나 국민당이 일본에게 당하는 연이은 패전과 내부 부패, 치정의 실패는 중국 국민당에 대한 미국의 신뢰를 갈수록 떨어뜨렸으며 미국은 1944년 6월 부통령 헨리 왈러스를 충칭(重慶)에 보내고 7월에는 시찰단을 옌안(延安)에 파견하는 등 항일에 적극적이던 공산당에 대한 지원을 검토하기까지 한다.
제2차 세계대전 기간 중국은 본토에 있던 125만 명 가까운 일본군을 잡아두는 역할 이외에는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으며 2차 대전 종전 이후 미국은 조지 마샬 장군을 특사로 보내 국민당과 공산당의 정전을 중재하는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정전협정은 국민당의 파기로 무력화되고 전세는 점점 공산당에게 유리하게 전개되었다. 1946년 8월 트루먼 대통령은 "중국이 통일되지 않고 내전으로 분열된다면 중국은 더 이상 미국의 원조에 적합한 곳이 아니며 평화적 민주주의를 향한 중국 인민의 열망에 대한 중국의 믿음이 완전히 깨져 버리지는 않았지만 흔들리기는 했다"는 말로 장제스에 대한 지원을 중단할 것을 시사했다.
결국 국공내전에서 국민당은 패배하여 타이완으로 패주하고 공산당은 건국을 준비하고 있던 1949년 8월 5일, 미국은 지금까지 자신들이 중국에 대해 취해 왔던 군사적, 경제적 지원의 방향과 결과가 잘못되었음을 스스로 인정하는 <미국과 중국 관계> 중국백서를 발표했다.
애치슨 국무장관이 트루먼 대통령에게 제출한 이 보고서의 1/5은 19세기말부터 20세기 전반까지의 중국 정세와 미국의 대중국정책에 대해 언급하고 있으며 나머지 4/5는 미국 대통령들의 중국관련 연설, 국민당정부와 왕래한 서신, 성명, 조약, 법규, 주중 미국대사의 보고서, 국민당과 공산당의 성명과 문건 등이 총망라되어 있다.
이 보고서에서 미국은 장제스의 국민당 정권의 무능을 냉정하게 평가하면서 중국에서의 내전은 더 이상 미국 정부의 통제범위 안에 있지 않음을, 동시에 미국의 대중국 정책이 실패했음을 인정하고 있다. 사실상 미국이 장제스와 국민당에 대한 포기를 선언한 셈이다.
대중국 정책에 대한 통렬한 자기비판과 변명으로 마무리된 중국백서는 미국이 타이완의 국민당에 대해 군사원조를 더 이상 하지 않을 것이며 타이완은 한국과 함께 미국의 극동 방위선에서 제외된다는 '트루먼 독트린'으로 이어지게 된다. 마오쩌둥은 미국의 국민당 지원을 핑계로 들며 1950년 2월 14일, 중.소우호동맹상호원조조약을 체결하면서 '냉전' 이라는 새로운 세계 질서와 함께 한반도에는 어두운 전쟁의 그림자가 드리워지고 있었다.

▲난창행영 시절인 1934년 10월 21일 장제스 부부(오른쪽에서 첫째・둘째), 장쉐량(가운데)과 함께 무릉(茂陵)에 놀러 나간 양융타이(왼쪽에서 둘째). 김명호 제공
공산당 섬멸의 제갈량 양영태
양융타이(楊永泰)는 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했다. 난세이다 보니 쓸모가 없었다. 서구 정치사상에도 한때 심취했지만 현실과는 동떨어진 소리투성이였다. 쑨원을 지지한 적도 있었다. 보면 볼수록 실속 없는 사람이었다. 국회의원도 해보고, 군벌들 덕에 성장(省長) 노릇도 해봤지만 결국은 쫓겨나 상하이로 도망 나왔다. 되는 일이 없다 보니 칩거하는 것 외에는 뾰족한 수가 없었다.
1927년 군사정변에 성공한 장제스가 난징에 국민정부를 수립했다. 양융타이는 소금장수의 유복자인 이 젊은 장군에게 의지하기로 마음을 굳혔다. 없는 돈에 호텔 스위트룸 한 칸을 임대했다. 고관들을 초청해 먹고 마셨다. 돈도 찔러 주었다. 싫다는 사람이 없었다. 장제스의 생각과 습관을 알아내는 것 외에 다른 목적은 없었다. 왕양명(王陽明)의 학설에 심취하고 증국번(曾國藩)의 가서(家書)를 즐겨 읽는다는 것을 확인했다. 『왕양명집(王陽明集)』과 『증문정공전집(曾文正公全集)』을 구입해 방 속에 틀어박혔다.
장제스의 사관학교 동기생 황푸(黃부)가 상하이 시장으로 부임했다. 황의 눈에 비친 양융타이는 천하의 기재였다. 장제스와의 만남을 주선했다.
양융타이는 장제스가 싫어하는 모든 조건을 완벽하게 구비하고 있었다. 복장이 깔끔하지 못했고 앉는 자세가 단정치 못했다. 세수도 제대로 한 몰골이 아니었고 지독한 근시에 입 안에는 침이 가득했다. 그러나 튀어나오는 말들은 마른 하늘을 가르는 뇌성벽력과 다를 바 없었다. 장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만면에 침 세례를 받은 것만 빼놓고는 유비가 제갈량을 처음 만났을 때의 기분을 만끽했다. ‘당대의 와룡선생’이라며 흥분했다.
장제스는 양융타이의 모략을 실천에 옮겼다. 2년여 만에 제후나 다름없었던 지방 군벌들을 완전히 제압했다. 자신의 백일몽을 현실로 만들어준 양의 모습이 보이지 않으면 주변을 두리번거리기 일쑤였다. 남은 것은 장시(江西)성 일대의 홍군(紅軍)밖에 없었다. 중국 땅 한구석에 들어와 있는 일본군은 다음 문제였다. 양이 제시한 '양외필선안내(攘外必先安內:외세를 쫓아내려면 반드시 내부를 먼저 안정시켜야 한다) 정책'도 그대로 수용했다.
장제스는 세 차례에 걸쳐 중공 근거지 섬멸작전을 펼쳤지만 5만 명에 불과한 홍군에게 연전연패했다.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네 번째 섬멸작전을 지휘할 때 양융타이를 요직에 기용했다. 양은 패배 원인을 분석했다. 홍군은 오합지졸이 아니었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선무공작도 효과가 없었다. 은혜를 베풀어도 시큰둥했다. 수십만 대군의 위엄 앞에서도 주눅이 들지 않았다. 홍군을 북양군벌의 군대 정도로 여긴 게 장제스의 실책이었다. 특단의 책략이 필요했다. 만언서(萬言書)를 작성해 장에게 전달했다. “삼분군사(三分軍事) 칠분정치(七分政治)”가 주 내용이었다. 제갈량의 출사표를 능가하는 천하의 명문을 접한 장은 군사력에만 의존해온 그간의 정책이 실책임을 통감했다. 제4차 섬멸 작전도 패배했지만 동요하지 않고 친정(親征)에 나설 채비를 차렸다. 난창(南昌)에 군사위원회 위원장 행영(行營)을 설치하고 50만 대군을 동원했다.
난창행영의 유일한 설립 목적은 제5차 홍군섬멸작전이었다. 조직도 간단했다. 군사청과 정치청이 전부였다. 그러나 장제스가 버티고 있는 한 전국의 인사권과 행정권을 장악한 중국 최고의 권력기관이었다. 양융타이는 행영의 비서장 겸 정치청장 임명장을 받았다. 2개월간 열린 전국 고급행정인원 회의에서 정치청은 행정원의 역할을 했다. 양융타이는 말이 청장일 뿐 실질적인 행정원 총리였다.
제5차 홍군섬멸작전은 종래의 것들과 성질이 달랐다. 군사 부문의 비중은 30%에 불과했다. 양융타이는 통신사를 설립해 전황에 관한 뉴스를 독점했고 극단과 예술단을 조직해 농촌을 다니며 민심을 다독거렸다. 보갑조직을 강화하고 연좌제를 실시해 소비에트 지역의 민중들을 홍군으로부터 격리시킨 후 엄격한 경제봉쇄정책을 강행했다. 군대와 행정관료, 지역 토호들 사이에 비상연락망도 구축했다.
정치전과 경제전을 곁들인 입체적인 공격은 홍군을 고사 직전까지 몰고 갔다. 근거지를 버리고 퇴각했다. ‘장정(長征)’이라는 멋진 용어를 생각해낼 겨를도 없었다. 중국공산당에 양융타이는 참으로 버거운 상대였다.
양융타이는 제갈량과 방통을 합쳐놓은 것 같은 인물이었지만 1936년 가을 국민당의 다른 계파가 고용한 자객의 손에 암살당했다. “꼭 이럴 줄 알았다”라는 말을 남기고 숨을 거두었다. 자신이 한 일에 비해 과대 포장된 사람이 있는가 하면 잊혀진 인물도 허다하다. 양융타이는 역사 속에 잠복해 있지만 붉은 기운이 퇴색하면 서서히 모습이 드러날 수밖에 없다.
장제스 평가
타이완 시절
타이완으로 건너가 그 후 1950년에 총통으로 취임하고 본토 회복을 위한 몇차례 대륙으로 진출을 시도했으나 실패하고 내치에 전념하여 한때 부패했던 국민당 조직을 개편했고, 공산 중국에 맞서는 자유의 선봉으로 나섰다. 1955년 미국은 국민정부와 타이완 방위를 보장하는 협정을 체결했다. 미국의 방위우산으로 편입하고 그 원조에 힘입어 그후 20년 동안 타이완의 경제발전을 실현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1972년초 미국과 중국 사이에 관계개선이 이루어지면서 타이완은 고립되었고그러던 와중 1975년에 사망하였다. 그가 죽자 아들 장징궈가 국민당 주석 및 타이완 정부 수반으로 그 뒤를 이었다
장제스에 대한 역사적 평가
장제스에 대한 역사적 평가에 관하여는 중화민국의 지도자로서 칭송받는 면과 공산주의자를 탄압한 4·12 쿠테타를 일으킨 독재자로서 비판받는 양면이 존재한다. 장제스는 국공내전에서 패한 이유가 국민당의 부정부패이었기 때문에, 중화민국의 공직자들의 부정부패를 강력한 처벌로 일소하였다. 하지만, 국민당이외의 정당들은 형식적인 정당에 불과한 국민당 1당독재, 백색테러로 불리는 극우테러, 반체제인사들에 대한 탄압으로 중화민국의 민주주의가 늦게 뿌리내리게 한 독재자라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위키백과>
장개석을 기념하기 위해 지어진 중정 기념당(中正紀念堂)
타이페이에서 가장 유명한 관광소로 대만의 영웅 장개석을 위한 기념물이다. 그림같이 조경이 잘 된 광대한 정원 위에 거대한 대리석 건물인 기념관이 서있고, 우아한 정자, 연못 등이 배치되어 있다. 25톤의 장개석 총통 동상이 본관에서 시내를 바라보고 있으며, 1층 전시실에는 사진과 총통의 생애에 관한 기념품 등이 전시되어 있다. 기념당의 높이는 70m이며, 중화 문화의 품격을 잘 반영하고 있는 건축물이다. 외부는 청색과 흰색 두 가지를 주로 하고 있는데, 이 색들은 자유와 평등을 상징한다. 우아한 명나라식의 아치가 정문이며 양측에 두 개의 고전적 건물이 있는데 각각 국립극장과 콘서트 홀이다.
광장에는 매일 아침 5시경부터 태극권, 포크 댄스, 배드민턴을 즐기는 사람들이 많이 찾아 시민들의 쉼터 역할을 한다. 장개석은 1953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대한민국의 독립을 지원한 공로로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받았다. 장개석은 1945년 김구의 귀국시 미화 20만 달러라는 거금을 주었으나, 김구는 미군정의 방해로 이 돈을 국내에 들여오지 못했다. 모택동과 장개석은 영웅 호색답게 여자 관계가 복잡한 사람들이다. 모택동이 세 명의 부인 사이에서 10남매를 두었지만 장개석은 첫 부인 사이에 겨우 아들 한명(장경국 총통) 딸 한명만 두었다.
장개석(蔣介石, 1887-1975)
중화민국 정치가, 군인, 국민정부 주석, 초대 총통으로 5회 당선해, 1943년부터 죽을 때까지 중화민국의 원수였다. 영어로는 "Chiang Kai-shek", 구미의 저널리스트로부터는 대원수를 의미하는 "Generalissimo"로 불렸다. 대만에서는 蔣中正(中正公)의 명칭이 일반적이며, "中正 기념관"이 있다. 천수편의 사상 첫 야당 민진당이 들어서자 "中正 기념관"의 이름을 "자유 공원"으로 바꾸어 버렸으나, 현재 국민당이 재집권에 성공하여 다시 "中正 기념관"으로 복원되었다. 또 지금까지 그의 이름을 붙여 "C.K.S(Chiang Kai-shek) International Airport"로 불리던 공항은, 2006년 민진당에 의해 현재는 "Taiwan Taoyuan International Airport"로 바꾸어 버려 구 시대의 잔재를 청산하려고 했다.
중국 공산당과는, 소위 「상해 쿠데타」 이후 적대관계에 있었으나, 서안사건(西安事件)으로 제2차 국공합작이 이루어져, 미국과 소련의 협력을 얻어 중일 전쟁을 치렀다. 일본이 패전한 1945년 이후에는 또다시 중국 공산당과의 국공내전이 발발했다. 1949년에 공산당에 패배하여 대북으로 환도(대북은 임시 수도)하여, 1950년에 중화민국 총통으로 취임했다.
제1차 국공합작의 무렵에 그는 「붉은 장군」으로서 공산주의를 예찬했었으나, 구미의 압력과 철강재벌(浙江財閥)과의 관계에 의해, 「상해 쿠데타」 이후에는 반 공산주의가 됐다. 중일전쟁 발발 전에는 항일전투보다 공산당을 철저히 탄압하는 정책으로 우선했다. 당시의 스탈린은 모택동보다는 장개석을 높이 평가했었다고 한다.
모택동과 중국 공산당을 희생해서라도 장개석을 통해 중화민국을 적화시키려는 구상이었다고 한다. 실제 서안사건(西安事件) 때는, 모택동은 장개석의 처형을 주장했으나, 스탈린은 허가를 안했다. 장개석의 아들인 장경국(蔣經國)은, 실질적 인질로 모스크바에 유학하고 있었다. 장개석은 「상해 쿠데타」 때에 공산당원의 대량학살을 저질렀다.
.28 사건이란, 1947년2월28일 대북 시에 발생해, 대만 전토로 번진 대규모의, 본성인(本省人, 원래의 대만인)과 외성인(外省人, 장개석이 중국에서 파견한 중국인 혹은 장개석과 같이 중국에서 대만으로 이주해 온 사람)과의 항쟁을 말한다. 약 40년 뒤, 계엄령의 해제와 정부 측의 유족에의 사죄로 종결됐다. 본성인은 이 사건을 "대만 대학살"이라고 부른다. 사건의 발단은 1947년2월27일, 대북 시에서 담배를 불법으로 판매하고 있던 본성인에 대해, 단속하던 공무원이 폭행한 사건이 발생했다. 다음 날 28일에는 본성인에 의해 시청사에서 항의 데모가 이루어졌다. 그러나 헌병대가 여기에 발포, 항쟁은 이것을 신호로 즉시 전국적으로 번졌다. 본성인은 많은 지역을 일시적으로 장악했었으나, 국민당 정부는 대륙에서 원군까지 동원하여 철저히 진압했다. 지금도 본성인(本省人)과 외성인(外省人)과의 알력은, 한국의 영남 지방와 호남 지방의 관계와도 비슷한 웅어리가 남아 있다. 전 총통 천수편(陳水扁)이 본성인(本省人)출신이므로, 외성인(外省人) 출신인 장개석의 업적 등을 철저히 배척하려는 의도를 알 수있다.
손문은 1925년3월12일 사망했다. 국민당은 이때 권력의 공백이 생겼으며, 권력 투쟁은 국민당 우파 측에 있는, 장개석과 손문의 친한 전우이기도 한, 당의 좌파 측에 있던 왕조명(汪兆銘)과의 사이에 중앙 정부 이전 문제로 의견이 벌어져 분열이 일어났다. 장개석의 당내의 지위는 비교적 낮으며, 왕조명(汪兆銘)이 손문의 국민정부 의장을 계승하고 있었으나, 장개석은 군사력과 정치공작으로 승리했다.
1925년 국민 혁명군 최고 사령관에 취임하여, 1926년에는 중국 북부를 지배하는 군벌을 구축해서 국민당의 밑에 국가통일을 이룩하려고 「북벌」(北伐)이라고 불리는 군사행동을 개시했다. 북경으로 진격하기에 앞서 국민 혁명군은 3개의 진로로 나누어, 서쪽으로는 왕조명(汪兆銘)이 일단을 이끌고 무한(武漢)으로, 동쪽으로는 백숭희(白崇禧)가 일당을 이끌고 상해로, 장개석은 직접 일단을 이끌고 중앙인 남경 (南京)의 지배가 각각 할당되었다.
그러나 1927년1월 왕조명(汪兆銘)과 그의 국민당 좌파동지는 중국 공산당과 소비에트 공작원 미하일 마르코비치 보르딘(Mikhail Markovich Borodin)과 손잡고 대중동원의 공작으로, 무한(武漢)을 손에 넣고, 국민정부를 무한(武漢)으로 옮겼다고 선언해 버렸다. 3월에 남경을 공략하여, 상해가 친밀한 관계인 백숭희(白崇禧)의 지배하에 놓이게 되자, 장개석은 그의 군사행동을 중지하지 않으면 안 되었으며, 국민당의 정화운동과 좌파의 대결이 불가피해졌다.
4월12일 장개석은 수천에 이르는 공산주의자의 용의가 있는 자들에 신속한 공격을 개시(상해 쿠데타)했다. 그는 보수 동지의 지지를 받아 국민정부를 남경에 설립했다. 국민당에서 공산주의자를 배제, 소비에트로부터의 고문관들은 추방되었으며, 이것이 국공내전 개시로 이어진다. 한편 상해의 왕조명(汪兆銘)의 국민정부는 대중으로부터 지지를 받지 못했으며, 군사적으로도 약체여서 곧 장개석으로 흡수된다. 결국 왕조명(汪兆銘)과 그의 좌파 그룹은 장개석에 항복하여 남경 정부에 참가했다. 드디어 군벌 거점이기도 했던 북경은 1928년 5월에 국민당 지배하에 놓이게 되며, 더욱이 12월에는 만주 군벌 장학량(張學良)이 장개석 정부에 충성을 서약했다.
장개석은, 손문의 후계자로서 그 자신의 입장을 확보하긴 위한 연출을 시작했다. 1927년12월1일, 장개석은 정치적으로 상당히 중요한 상대인 송미령(宋美齡, 손문의 처 宋慶齡의 동생)과 상해에서 결혼해, 손문의 동서(同壻)가 되었다. 장개석은 이전에 송미령에게 구혼했었으나 거절당했었다. 북경에 도착하자 장개석은 손문에게 경의를 표하고, 손문의 유해를 수도 남경으로 옮겨, 장대한 靈廟(中山陵)에 제사를 지냈다
송미령(宋美齡, 1897-2003)
장개석(蔣介石)의 대변자이며, 로비이스트로 대 활약했다. 1942년11월 루즈벨트 대통령의 초청으로 미국에 체류, 미국 전국를 돌면서 영어로 연설해, 항일전에의 원조를 요청했다. 1943년2월18일 여성으로는 사상 처음, 미국 연방의회에서 보석으로 장식한 중화민국 공군의 뱃지를 단 차이나 드래스의 모습으로 항일전에 필요성을 구하는 연설하여 많은 의원들은 물론, 전 미국으로부터 절찬과 지지를 받았다.
1975년 남편 장개석이 죽자, 스스로 후계자를 기대했었으나 소원은 이루어지지 않았고, 장개석의 전처의 장남 장경국이 당주석겸 중앙위원 상무위원회 주석에 취임, 당내 기반을 확립, 차기 총통취임의 준비가 착착 진행되자, 송은 대만을 버리고 미국으로 이주를 결정, 뉴욕 Long Island에 거대한 주택을 구입했다.
한편, 서구로부터 "Madame Chiang Kai-shek"으로 불린 송미령은 돈이 많이 드는 여자였다. 미국 체제 중에는 백악관이 배려한 경비원을 자기의 쇼핑을 위해 심부름꾼으로 쓰기도 했으며, 백악관의 실크 침대시트를 하루에 4번씩이나 교환시키는 등, 헨리 루스가 설립한 지원단체 "United China Relief"의 기금을 자기의 모피와 보석을 구입하는 데 낭비하고 사치의 물욕에는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이러한 송의 성격을 미국체제 중에 절친하게 교류하고 있었던 루즈벨트 대통령의 부인(Anna Eleanor Roosevelt)은 "냉담하고 소위 애인 타입의 여성이였다.", 또 동 대통령의 차남인 엘리어트 루즈벨트는 "장개석 부인은 남자의 환심을 사는 일에 만 오랫동안 종사해 온 탓으로, 지금은 그것이 제2의 성격과 같이 되어 버린 인상을 받았다. 본래의 성격은 틀림없이 무서운 여자와 같이 보여, 솔직히 무서웠다."
장개석의 뒤를 이어 세습 총통이 된 장경국이 1988년1월 사망했을 때는, 부총통으로 본성인(대만 본토 출신)인 이등휘가 사실상 후계자로 국민당 주석대행에 취임하는 것에 대해서도 강한 반대를 표명하고, 자기의 의향에 맞는 보수적인 인물을 추천했으나, 결국 실패하고 같은 해 이등휘가 차기 총통에 취임했다. 이등휘의 총통취임 뒤에도 집요하게 직접전화를 걸어 압력을 넣기도 했으나, 번번히 무시당했다.
송미령은 중국 광동성(廣東省)에서 재력가인 客家의 宋嘉樹의 3남3녀의 네번째로 1898년 상해에서 태어나, 1908년 미국에 유학했다. 큰언니 송애령 83세, 둘째언니 송경령 88세로 사망했으며, 송미령(宋美齡)은 2003년10월24일 106세의 일기로 미국 맨해턴의 고급 아파트에서 영면했다. 큰언니 애령(靄齡)은 중국 은행재벌 공상희와 결혼했으며, 둘째 언니 경령(慶齡)은 중국의 국부 손문과 결혼했다. 이 때문에 중국 사람들은 "애령은 돈과, 경령은 중국과, 미령은 권력과 결혼했다"고 말하기까지 한다. 실제 세 자매는 중국 근대사를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인물들이다. 각종 영화나 소설의 주인공으로 자주 등장한다. 그러나 사실 송미령은 장개석의 세번째 부인(첩)이다.
중국 공산당 승리 원인
1911년 외세에 의해 억압받고 군벌에 의해 분열된 중국에서 쑨원(孫文)은 민족주의자 개혁파 단체인 국민당을 창당한다. 국민당은 광둥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하면서 정국의 주도권을 장악했다.
쑨원 사망 후 국민당을 장악한 장제스(蔣介石)는 중국 공산당과의 합작을 통해 남중국 전체를 빠르게 장악한다. 1927년 공산당과 결별한 후 그는 보수 진영의 도움으로 1928년 6월 베이징을 점령하는 등 북중국 정벌에도 성공했다.1927년 국민당에 의해 대도시에서 밀려난 중국 공산당은 접근이 어려운 오지 지역에서 거점을 마련했다. 1932년 장제스군에 밀려난 공산당은 서부 산악지역으로 후퇴했다.
더욱 집요해진 장제스군의 공격으로 1934년 10월부터 1년 동안 공산당은 자신들의 거점에서 떠나 산시성 옌안까지 1만2000㎞를 후퇴했다. 중국 공산당은 후퇴라 하지 않고 대장정이라 부른다. 2008년 지진으로 유명한 쓰촨성에서 서부 산악지대의 4000m급의 대설산(大雪山)을 넘어 몽골의 대초원 지역을 거쳐 산시성 옌안까지 천신만고의 고난의 행진이었다. 이 기간에 27만 명이 죽고 3만 명만 겨우 살아남았다.
후퇴 과정과 결과만을 놓고 보면 대장정은 중국 공산당의 처참한 패배 같아 보인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대장정은 패배가 아니라 큰 승리였다.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시 중국의 날씨를 이해해야만 한다. 역사학자인 베르메(E. Vermeer)에 의하면 1920년부터 1936년 사이에 중국에서 공식적으로 1835만 명이 기근으로 사망했다고 보고하고 있다.

대기근에 더욱 각광받은 마오쩌둥의 ‘연안정신’
당시는 왜 이런 대기근이 닥쳤는가에 대해 전혀 알지 못했다. 그러나 기상학의 발달과 함께 1980년대에 이르러 대기근의 원인이 엘니뇨 현상 때문이라는 것이 밝혀졌다. 가장 극심했던 엘니뇨가 발생한 1877년에는 인도에서만 2000만 명 이상, 중국과 동아시아 지역에서 대략 1500만 명이 기아로 죽었다고 보고되고 있다.
엘니뇨로 인한 엄청난 가뭄 - 기근 사태의 와중에서 마오쩌둥이 이끄는 공산당은 민중과 함께하는 군이었다. 마오쩌둥의 ‘연안정신’은 가난한 농민을 대하는 전략으로 그들과 고통과 아픔을 함께하며, 죽어도 같이 죽고 살아도 같이 산다는 정신이었다. 대기근과 만성적 재난과 전쟁을 겪은 가난한 민중들에게 마오쩌둥은 그야말로 어머니와 같은 존재였다.
그러나 장제스가 이끄는 국민당군은 가는 곳마다 민중들을 착취하고 죽이고 고문했다. 민중들에게 국민당군은 부패와 교만으로 상징되는 독재적인 악의 군대였다. 결국 민중들이 장제스의 국민당군에 등을 돌리고 공산당에 협력하면서 중국 대륙은 마오쩌둥이 이끄는 공산당에 의해 통일됐다.
공산당 승리의 원인을 연구한 학자들은 “중국의 대기근은 국민당에 쫓겨 가면서 다 멸망할 수밖에 없었던 공산당에게 새로운 힘을 공급한 사태였다. 수백만 명이 굶어 죽어가는데도 이들을 착취한 국민당군에 대비된 마오쩌둥 동지의 ‘연안정신’은 민중들을 공산당의 깃발 아래로 뭉치게 했다. 만일 대기근이 아닌 풍년이 계속되었다면 민중들은 공산당의 편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국가의 힘은 민중들의 뭉쳐진 지원에서 나오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지도자들이 가슴 깊이 새겨들어야 할 말이 아닌가 싶다.
▲난창행영 시절인 1934년 10월 21일 장제스 부부(오른쪽에서 첫째・둘째), 장쉐량(가운데)과 함께 무릉(茂陵)에 놀러 나간 양융타이(왼쪽에서 둘째). 김명호 제공
양융타이(楊永泰)는 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했다. 난세이다 보니 쓸모가 없었다. 서구 정치사상에도 한때 심취했지만 현실과는 동떨어진 소리투성이였다. 쑨원을 지지한 적도 있었다. 보면 볼수록 실속 없는 사람이었다. 국회의원도 해보고, 군벌들 덕에 성장(省長) 노릇도 해봤지만 결국은 쫓겨나 상하이로 도망 나왔다. 되는 일이 없다 보니 칩거하는 것 외에는 뾰족한 수가 없었다.
1927년 군사정변에 성공한 장제스가 난징에 국민정부를 수립했다. 양융타이는 소금장수의 유복자인 이 젊은 장군에게 의지하기로 마음을 굳혔다. 없는 돈에 호텔 스위트룸 한 칸을 임대했다. 고관들을 초청해 먹고 마셨다. 돈도 찔러 주었다. 싫다는 사람이 없었다. 장제스의 생각과 습관을 알아내는 것 외에 다른 목적은 없었다. 왕양명(王陽明)의 학설에 심취하고 증국번(曾國藩)의 가서(家書)를 즐겨 읽는다는 것을 확인했다. 『왕양명집(王陽明集)』과 『증문정공전집(曾文正公全集)』을 구입해 방 속에 틀어박혔다.
장제스의 사관학교 동기생 황푸(黃부)가 상하이 시장으로 부임했다. 황의 눈에 비친 양융타이는 천하의 기재였다. 장제스와의 만남을 주선했다.
양융타이는 장제스가 싫어하는 모든 조건을 완벽하게 구비하고 있었다. 복장이 깔끔하지 못했고 앉는 자세가 단정치 못했다. 세수도 제대로 한 몰골이 아니었고 지독한 근시에 입 안에는 침이 가득했다. 그러나 튀어나오는 말들은 마른 하늘을 가르는 뇌성벽력과 다를 바 없었다. 장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만면에 침 세례를 받은 것만 빼놓고는 유비가 제갈량을 처음 만났을 때의 기분을 만끽했다. ‘당대의 와룡선생’이라며 흥분했다.
장제스는 양융타이의 모략을 실천에 옮겼다. 2년여 만에 제후나 다름없었던 지방 군벌들을 완전히 제압했다. 자신의 백일몽을 현실로 만들어준 양의 모습이 보이지 않으면 주변을 두리번거리기 일쑤였다. 남은 것은 장시(江西)성 일대의 홍군(紅軍)밖에 없었다. 중국 땅 한구석에 들어와 있는 일본군은 다음 문제였다. 양이 제시한 '양외필선안내(攘外必先安內:외세를 쫓아내려면 반드시 내부를 먼저 안정시켜야 한다) 정책'도 그대로 수용했다.
장제스는 세 차례에 걸쳐 중공 근거지 섬멸작전을 펼쳤지만 5만 명에 불과한 홍군에게 연전연패했다.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네 번째 섬멸작전을 지휘할 때 양융타이를 요직에 기용했다. 양은 패배 원인을 분석했다. 홍군은 오합지졸이 아니었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선무공작도 효과가 없었다. 은혜를 베풀어도 시큰둥했다. 수십만 대군의 위엄 앞에서도 주눅이 들지 않았다. 홍군을 북양군벌의 군대 정도로 여긴 게 장제스의 실책이었다. 특단의 책략이 필요했다. 만언서(萬言書)를 작성해 장에게 전달했다. “삼분군사(三分軍事) 칠분정치(七分政治)”가 주 내용이었다. 제갈량의 출사표를 능가하는 천하의 명문을 접한 장은 군사력에만 의존해온 그간의 정책이 실책임을 통감했다. 제4차 섬멸 작전도 패배했지만 동요하지 않고 친정(親征)에 나설 채비를 차렸다. 난창(南昌)에 군사위원회 위원장 행영(行營)을 설치하고 50만 대군을 동원했다.
난창행영의 유일한 설립 목적은 제5차 홍군섬멸작전이었다. 조직도 간단했다. 군사청과 정치청이 전부였다. 그러나 장제스가 버티고 있는 한 전국의 인사권과 행정권을 장악한 중국 최고의 권력기관이었다. 양융타이는 행영의 비서장 겸 정치청장 임명장을 받았다. 2개월간 열린 전국 고급행정인원 회의에서 정치청은 행정원의 역할을 했다. 양융타이는 말이 청장일 뿐 실질적인 행정원 총리였다.
제5차 홍군섬멸작전은 종래의 것들과 성질이 달랐다. 군사 부문의 비중은 30%에 불과했다. 양융타이는 통신사를 설립해 전황에 관한 뉴스를 독점했고 극단과 예술단을 조직해 농촌을 다니며 민심을 다독거렸다. 보갑조직을 강화하고 연좌제를 실시해 소비에트 지역의 민중들을 홍군으로부터 격리시킨 후 엄격한 경제봉쇄정책을 강행했다. 군대와 행정관료, 지역 토호들 사이에 비상연락망도 구축했다.
정치전과 경제전을 곁들인 입체적인 공격은 홍군을 고사 직전까지 몰고 갔다. 근거지를 버리고 퇴각했다. ‘장정(長征)’이라는 멋진 용어를 생각해낼 겨를도 없었다. 중국공산당에 양융타이는 참으로 버거운 상대였다.
양융타이는 제갈량과 방통을 합쳐놓은 것 같은 인물이었지만 1936년 가을 국민당의 다른 계파가 고용한 자객의 손에 암살당했다. “꼭 이럴 줄 알았다”라는 말을 남기고 숨을 거두었다. 자신이 한 일에 비해 과대 포장된 사람이 있는가 하면 잊혀진 인물도 허다하다. 양융타이는 역사 속에 잠복해 있지만 붉은 기운이 퇴색하면 서서히 모습이 드러날 수밖에 없다.
장제스 평가
타이완 시절
타이완으로 건너가 그 후 1950년에 총통으로 취임하고 본토 회복을 위한 몇차례 대륙으로 진출을 시도했으나 실패하고 내치에 전념하여 한때 부패했던 국민당 조직을 개편했고, 공산 중국에 맞서는 자유의 선봉으로 나섰다. 1955년 미국은 국민정부와 타이완 방위를 보장하는 협정을 체결했다. 미국의 방위우산으로 편입하고 그 원조에 힘입어 그후 20년 동안 타이완의 경제발전을 실현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1972년초 미국과 중국 사이에 관계개선이 이루어지면서 타이완은 고립되었고그러던 와중 1975년에 사망하였다. 그가 죽자 아들 장징궈가 국민당 주석 및 타이완 정부 수반으로 그 뒤를 이었다
장제스에 대한 역사적 평가
장제스에 대한 역사적 평가에 관하여는 중화민국의 지도자로서 칭송받는 면과 공산주의자를 탄압한 4·12 쿠테타를 일으킨 독재자로서 비판받는 양면이 존재한다. 장제스는 국공내전에서 패한 이유가 국민당의 부정부패이었기 때문에, 중화민국의 공직자들의 부정부패를 강력한 처벌로 일소하였다. 하지만, 국민당이외의 정당들은 형식적인 정당에 불과한 국민당 1당독재, 백색테러로 불리는 극우테러, 반체제인사들에 대한 탄압으로 중화민국의 민주주의가 늦게 뿌리내리게 한 독재자라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위키백과>
장개석을 기념하기 위해 지어진 중정 기념당(中正紀念堂)
타이페이에서 가장 유명한 관광소로 대만의 영웅 장개석을 위한 기념물이다. 그림같이 조경이 잘 된 광대한 정원 위에 거대한 대리석 건물인 기념관이 서있고, 우아한 정자, 연못 등이 배치되어 있다. 25톤의 장개석 총통 동상이 본관에서 시내를 바라보고 있으며, 1층 전시실에는 사진과 총통의 생애에 관한 기념품 등이 전시되어 있다. 기념당의 높이는 70m이며, 중화 문화의 품격을 잘 반영하고 있는 건축물이다. 외부는 청색과 흰색 두 가지를 주로 하고 있는데, 이 색들은 자유와 평등을 상징한다. 우아한 명나라식의 아치가 정문이며 양측에 두 개의 고전적 건물이 있는데 각각 국립극장과 콘서트 홀이다.
광장에는 매일 아침 5시경부터 태극권, 포크 댄스, 배드민턴을 즐기는 사람들이 많이 찾아 시민들의 쉼터 역할을 한다. 장개석은 1953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대한민국의 독립을 지원한 공로로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받았다. 장개석은 1945년 김구의 귀국시 미화 20만 달러라는 거금을 주었으나, 김구는 미군정의 방해로 이 돈을 국내에 들여오지 못했다. 모택동과 장개석은 영웅 호색답게 여자 관계가 복잡한 사람들이다. 모택동이 세 명의 부인 사이에서 10남매를 두었지만 장개석은 첫 부인 사이에 겨우 아들 한명(장경국 총통) 딸 한명만 두었다.
중화민국 정치가, 군인, 국민정부 주석, 초대 총통으로 5회 당선해, 1943년부터 죽을 때까지 중화민국의 원수였다. 영어로는 "Chiang Kai-shek", 구미의 저널리스트로부터는 대원수를 의미하는 "Generalissimo"로 불렸다. 대만에서는 蔣中正(中正公)의 명칭이 일반적이며, "中正 기념관"이 있다. 천수편의 사상 첫 야당 민진당이 들어서자 "中正 기념관"의 이름을 "자유 공원"으로 바꾸어 버렸으나, 현재 국민당이 재집권에 성공하여 다시 "中正 기념관"으로 복원되었다. 또 지금까지 그의 이름을 붙여 "C.K.S(Chiang Kai-shek) International Airport"로 불리던 공항은, 2006년 민진당에 의해 현재는 "Taiwan Taoyuan International Airport"로 바꾸어 버려 구 시대의 잔재를 청산하려고 했다.
중국 공산당과는, 소위 「상해 쿠데타」 이후 적대관계에 있었으나, 서안사건(西安事件)으로 제2차 국공합작이 이루어져, 미국과 소련의 협력을 얻어 중일 전쟁을 치렀다. 일본이 패전한 1945년 이후에는 또다시 중국 공산당과의 국공내전이 발발했다. 1949년에 공산당에 패배하여 대북으로 환도(대북은 임시 수도)하여, 1950년에 중화민국 총통으로 취임했다.
제1차 국공합작의 무렵에 그는 「붉은 장군」으로서 공산주의를 예찬했었으나, 구미의 압력과 철강재벌(浙江財閥)과의 관계에 의해, 「상해 쿠데타」 이후에는 반 공산주의가 됐다. 중일전쟁 발발 전에는 항일전투보다 공산당을 철저히 탄압하는 정책으로 우선했다. 당시의 스탈린은 모택동보다는 장개석을 높이 평가했었다고 한다.
모택동과 중국 공산당을 희생해서라도 장개석을 통해 중화민국을 적화시키려는 구상이었다고 한다. 실제 서안사건(西安事件) 때는, 모택동은 장개석의 처형을 주장했으나, 스탈린은 허가를 안했다. 장개석의 아들인 장경국(蔣經國)은, 실질적 인질로 모스크바에 유학하고 있었다. 장개석은 「상해 쿠데타」 때에 공산당원의 대량학살을 저질렀다.
.28 사건이란, 1947년2월28일 대북 시에 발생해, 대만 전토로 번진 대규모의, 본성인(本省人, 원래의 대만인)과 외성인(外省人, 장개석이 중국에서 파견한 중국인 혹은 장개석과 같이 중국에서 대만으로 이주해 온 사람)과의 항쟁을 말한다. 약 40년 뒤, 계엄령의 해제와 정부 측의 유족에의 사죄로 종결됐다. 본성인은 이 사건을 "대만 대학살"이라고 부른다. 사건의 발단은 1947년2월27일, 대북 시에서 담배를 불법으로 판매하고 있던 본성인에 대해, 단속하던 공무원이 폭행한 사건이 발생했다. 다음 날 28일에는 본성인에 의해 시청사에서 항의 데모가 이루어졌다. 그러나 헌병대가 여기에 발포, 항쟁은 이것을 신호로 즉시 전국적으로 번졌다. 본성인은 많은 지역을 일시적으로 장악했었으나, 국민당 정부는 대륙에서 원군까지 동원하여 철저히 진압했다. 지금도 본성인(本省人)과 외성인(外省人)과의 알력은, 한국의 영남 지방와 호남 지방의 관계와도 비슷한 웅어리가 남아 있다. 전 총통 천수편(陳水扁)이 본성인(本省人)출신이므로, 외성인(外省人) 출신인 장개석의 업적 등을 철저히 배척하려는 의도를 알 수있다.
손문은 1925년3월12일 사망했다. 국민당은 이때 권력의 공백이 생겼으며, 권력 투쟁은 국민당 우파 측에 있는, 장개석과 손문의 친한 전우이기도 한, 당의 좌파 측에 있던 왕조명(汪兆銘)과의 사이에 중앙 정부 이전 문제로 의견이 벌어져 분열이 일어났다. 장개석의 당내의 지위는 비교적 낮으며, 왕조명(汪兆銘)이 손문의 국민정부 의장을 계승하고 있었으나, 장개석은 군사력과 정치공작으로 승리했다.
1925년 국민 혁명군 최고 사령관에 취임하여, 1926년에는 중국 북부를 지배하는 군벌을 구축해서 국민당의 밑에 국가통일을 이룩하려고 「북벌」(北伐)이라고 불리는 군사행동을 개시했다. 북경으로 진격하기에 앞서 국민 혁명군은 3개의 진로로 나누어, 서쪽으로는 왕조명(汪兆銘)이 일단을 이끌고 무한(武漢)으로, 동쪽으로는 백숭희(白崇禧)가 일당을 이끌고 상해로, 장개석은 직접 일단을 이끌고 중앙인 남경 (南京)의 지배가 각각 할당되었다.
그러나 1927년1월 왕조명(汪兆銘)과 그의 국민당 좌파동지는 중국 공산당과 소비에트 공작원 미하일 마르코비치 보르딘(Mikhail Markovich Borodin)과 손잡고 대중동원의 공작으로, 무한(武漢)을 손에 넣고, 국민정부를 무한(武漢)으로 옮겼다고 선언해 버렸다. 3월에 남경을 공략하여, 상해가 친밀한 관계인 백숭희(白崇禧)의 지배하에 놓이게 되자, 장개석은 그의 군사행동을 중지하지 않으면 안 되었으며, 국민당의 정화운동과 좌파의 대결이 불가피해졌다.
4월12일 장개석은 수천에 이르는 공산주의자의 용의가 있는 자들에 신속한 공격을 개시(상해 쿠데타)했다. 그는 보수 동지의 지지를 받아 국민정부를 남경에 설립했다. 국민당에서 공산주의자를 배제, 소비에트로부터의 고문관들은 추방되었으며, 이것이 국공내전 개시로 이어진다. 한편 상해의 왕조명(汪兆銘)의 국민정부는 대중으로부터 지지를 받지 못했으며, 군사적으로도 약체여서 곧 장개석으로 흡수된다. 결국 왕조명(汪兆銘)과 그의 좌파 그룹은 장개석에 항복하여 남경 정부에 참가했다. 드디어 군벌 거점이기도 했던 북경은 1928년 5월에 국민당 지배하에 놓이게 되며, 더욱이 12월에는 만주 군벌 장학량(張學良)이 장개석 정부에 충성을 서약했다.
장개석은, 손문의 후계자로서 그 자신의 입장을 확보하긴 위한 연출을 시작했다. 1927년12월1일, 장개석은 정치적으로 상당히 중요한 상대인 송미령(宋美齡, 손문의 처 宋慶齡의 동생)과 상해에서 결혼해, 손문의 동서(同壻)가 되었다. 장개석은 이전에 송미령에게 구혼했었으나 거절당했었다. 북경에 도착하자 장개석은 손문에게 경의를 표하고, 손문의 유해를 수도 남경으로 옮겨, 장대한 靈廟(中山陵)에 제사를 지냈다
송미령(宋美齡, 1897-2003)
장개석(蔣介石)의 대변자이며, 로비이스트로 대 활약했다. 1942년11월 루즈벨트 대통령의 초청으로 미국에 체류, 미국 전국를 돌면서 영어로 연설해, 항일전에의 원조를 요청했다. 1943년2월18일 여성으로는 사상 처음, 미국 연방의회에서 보석으로 장식한 중화민국 공군의 뱃지를 단 차이나 드래스의 모습으로 항일전에 필요성을 구하는 연설하여 많은 의원들은 물론, 전 미국으로부터 절찬과 지지를 받았다.
1975년 남편 장개석이 죽자, 스스로 후계자를 기대했었으나 소원은 이루어지지 않았고, 장개석의 전처의 장남 장경국이 당주석겸 중앙위원 상무위원회 주석에 취임, 당내 기반을 확립, 차기 총통취임의 준비가 착착 진행되자, 송은 대만을 버리고 미국으로 이주를 결정, 뉴욕 Long Island에 거대한 주택을 구입했다.
한편, 서구로부터 "Madame Chiang Kai-shek"으로 불린 송미령은 돈이 많이 드는 여자였다. 미국 체제 중에는 백악관이 배려한 경비원을 자기의 쇼핑을 위해 심부름꾼으로 쓰기도 했으며, 백악관의 실크 침대시트를 하루에 4번씩이나 교환시키는 등, 헨리 루스가 설립한 지원단체 "United China Relief"의 기금을 자기의 모피와 보석을 구입하는 데 낭비하고 사치의 물욕에는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이러한 송의 성격을 미국체제 중에 절친하게 교류하고 있었던 루즈벨트 대통령의 부인(Anna Eleanor Roosevelt)은 "냉담하고 소위 애인 타입의 여성이였다.", 또 동 대통령의 차남인 엘리어트 루즈벨트는 "장개석 부인은 남자의 환심을 사는 일에 만 오랫동안 종사해 온 탓으로, 지금은 그것이 제2의 성격과 같이 되어 버린 인상을 받았다. 본래의 성격은 틀림없이 무서운 여자와 같이 보여, 솔직히 무서웠다."
장개석의 뒤를 이어 세습 총통이 된 장경국이 1988년1월 사망했을 때는, 부총통으로 본성인(대만 본토 출신)인 이등휘가 사실상 후계자로 국민당 주석대행에 취임하는 것에 대해서도 강한 반대를 표명하고, 자기의 의향에 맞는 보수적인 인물을 추천했으나, 결국 실패하고 같은 해 이등휘가 차기 총통에 취임했다. 이등휘의 총통취임 뒤에도 집요하게 직접전화를 걸어 압력을 넣기도 했으나, 번번히 무시당했다.
송미령은 중국 광동성(廣東省)에서 재력가인 客家의 宋嘉樹의 3남3녀의 네번째로 1898년 상해에서 태어나, 1908년 미국에 유학했다. 큰언니 송애령 83세, 둘째언니 송경령 88세로 사망했으며, 송미령(宋美齡)은 2003년10월24일 106세의 일기로 미국 맨해턴의 고급 아파트에서 영면했다. 큰언니 애령(靄齡)은 중국 은행재벌 공상희와 결혼했으며, 둘째 언니 경령(慶齡)은 중국의 국부 손문과 결혼했다. 이 때문에 중국 사람들은 "애령은 돈과, 경령은 중국과, 미령은 권력과 결혼했다"고 말하기까지 한다. 실제 세 자매는 중국 근대사를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인물들이다. 각종 영화나 소설의 주인공으로 자주 등장한다. 그러나 사실 송미령은 장개석의 세번째 부인(첩)이다.
쑨원 사망 후 국민당을 장악한 장제스(蔣介石)는 중국 공산당과의 합작을 통해 남중국 전체를 빠르게 장악한다. 1927년 공산당과 결별한 후 그는 보수 진영의 도움으로 1928년 6월 베이징을 점령하는 등 북중국 정벌에도 성공했다.1927년 국민당에 의해 대도시에서 밀려난 중국 공산당은 접근이 어려운 오지 지역에서 거점을 마련했다. 1932년 장제스군에 밀려난 공산당은 서부 산악지역으로 후퇴했다.
더욱 집요해진 장제스군의 공격으로 1934년 10월부터 1년 동안 공산당은 자신들의 거점에서 떠나 산시성 옌안까지 1만2000㎞를 후퇴했다. 중국 공산당은 후퇴라 하지 않고 대장정이라 부른다. 2008년 지진으로 유명한 쓰촨성에서 서부 산악지대의 4000m급의 대설산(大雪山)을 넘어 몽골의 대초원 지역을 거쳐 산시성 옌안까지 천신만고의 고난의 행진이었다. 이 기간에 27만 명이 죽고 3만 명만 겨우 살아남았다.
후퇴 과정과 결과만을 놓고 보면 대장정은 중국 공산당의 처참한 패배 같아 보인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대장정은 패배가 아니라 큰 승리였다.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시 중국의 날씨를 이해해야만 한다. 역사학자인 베르메(E. Vermeer)에 의하면 1920년부터 1936년 사이에 중국에서 공식적으로 1835만 명이 기근으로 사망했다고 보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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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기근에 더욱 각광받은 마오쩌둥의 ‘연안정신’
당시는 왜 이런 대기근이 닥쳤는가에 대해 전혀 알지 못했다. 그러나 기상학의 발달과 함께 1980년대에 이르러 대기근의 원인이 엘니뇨 현상 때문이라는 것이 밝혀졌다. 가장 극심했던 엘니뇨가 발생한 1877년에는 인도에서만 2000만 명 이상, 중국과 동아시아 지역에서 대략 1500만 명이 기아로 죽었다고 보고되고 있다.
엘니뇨로 인한 엄청난 가뭄 - 기근 사태의 와중에서 마오쩌둥이 이끄는 공산당은 민중과 함께하는 군이었다. 마오쩌둥의 ‘연안정신’은 가난한 농민을 대하는 전략으로 그들과 고통과 아픔을 함께하며, 죽어도 같이 죽고 살아도 같이 산다는 정신이었다. 대기근과 만성적 재난과 전쟁을 겪은 가난한 민중들에게 마오쩌둥은 그야말로 어머니와 같은 존재였다.
그러나 장제스가 이끄는 국민당군은 가는 곳마다 민중들을 착취하고 죽이고 고문했다. 민중들에게 국민당군은 부패와 교만으로 상징되는 독재적인 악의 군대였다. 결국 민중들이 장제스의 국민당군에 등을 돌리고 공산당에 협력하면서 중국 대륙은 마오쩌둥이 이끄는 공산당에 의해 통일됐다.
공산당 승리의 원인을 연구한 학자들은 “중국의 대기근은 국민당에 쫓겨 가면서 다 멸망할 수밖에 없었던 공산당에게 새로운 힘을 공급한 사태였다. 수백만 명이 굶어 죽어가는데도 이들을 착취한 국민당군에 대비된 마오쩌둥 동지의 ‘연안정신’은 민중들을 공산당의 깃발 아래로 뭉치게 했다. 만일 대기근이 아닌 풍년이 계속되었다면 민중들은 공산당의 편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국가의 힘은 민중들의 뭉쳐진 지원에서 나오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지도자들이 가슴 깊이 새겨들어야 할 말이 아닌가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