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의 여왕
▶ 엘리자베스 1세 (영국 1558~1603 재위)
이른바 엘리자베스 시대라고 불리는 그의 통치기에 잉글랜드는 유럽 열강으로 올라섰다.
그녀는 심각한 내분에 휩싸인 잉글랜드를 지혜와 용기로써 통합시키며 나라를 반석위에 올려 놓았다.
그녀는 세 살때 어머니가 처형당하는 등 어렸을 때부터 불우한 성장기를 보냈다.
그러다 스코틀랜드 여왕 메리에게 온갖 탄압을 받으며 생명의 위협을 느끼기까지 했다.
이러한 살엄음판에서 인고의 세월을 보냈던 그녀는 정신적으로 매우 단련되었다.
이후 우여곡절끝에 여왕으로 등극한 그녀는 평생을 독신으로 살아가며 연기자처럼 살았다.
그녀는 항상 신중했으며 냉정함을 잃지 않았고 백성들에게는 따뜻하고 위엄있게 행동했다.
또한 나라를 위해 자신을 철저히 혹사시켰으며 외국 왕족들의 구혼까지 모두 물리쳤다.
그녀의 목적은 오직 하나였다. 바로 신교와 구교의 갈등으로부터 나라를 통합하는 것이었다.
그녀의 권좌는 늘 암살과 반역으로 불안했지만, 궁중의 암투를 이용하며 이를 통제했다.
그녀의 가장 큰 정적은 스코틀랜드 여왕인 5촌 메리였다. 결국 메리는 처형되었다.
이후 그녀는 스페인의 무적함대를 궤멸시키고 영국을 세계 최강국으로 발돋음시켰다.
그녀가 없었더라면 지금의 영국은 스코틀랜드와 양분된 나라였을지도 모른다.
▶ 메리 스튜어트 (스코틀랜드 1542~1587)
메리는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여자였다. 스코틀랜의 여왕이자 프랑스의 왕비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행복도 잠시 왕이 사망하자 그녀는 스코틀랜드로 돌아갔다.
그녀는 온갖 불륜을 저지르며 남편까지 살해하고 재혼을 거듭했다.
급기야 분노한 스코틀랜드 귀족들이 반란을 일으켜 그녀를 폐위시켜 버렸다.
그녀는 잉글랜드의 엘리자베스 1세에게 도움을 청하였으나 볼모로 갇히는 신세가 되었다.
그녀는 너무 위험했기 때문에 처형론이 대두되었지만 엘리자베스는 이를 말렸다.
하지만 메리는 겉으로는 엘리자베스를 섬겼지만 속으로는 암살을 꾸몄다.
그녀를 죽이기만 하면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의 왕권이 자기 차지가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19년간의 유폐 생활동안 수 차례의 역모를 꾸미다가 결국은 처형되고 말았다.
스페인과 이탈리아의 강력한 지원을 등에 업었지만 그녀는 끝내 패자가 되었던 것이다.
대신 그녀가 죽음으로써 아들 제임스 1세가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의 왕이 되었다.
결국 그녀의 죽음으로 통일된 영국이 탄생하게 된 것이다.
▶ 이사벨라 (스페인 1451~1504 재위)
이사벨라는 위기를 기회로 돌릴 줄 아는 탁월한 지략과 배짱을 가진 여자였다.
당시 이베리아는 카스티야, 아라곤, 나바르, 포루투갈, 그라나다로 쪼개져 있는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그녀는 아라곤 왕자와 결혼이라는 도박을 통해 카스티야 여왕으로 등극했다.
그녀는 여기서 멈추지 않고 두 나라를 합쳐 에스파냐 왕국을 출범시켰다.
그녀는 남편을 전쟁터로 내 보내 나바르와 그라나다를 에스파냐로 편입시키게 만들고,
자신은 실질적인 에스파냐의 여왕으로서 최고의 권력을 누리게 된다.
그녀는 이웃 포르투갈이 해상 무역으로 번영을 누리자 이에 자극을 받은 나머지
무명의 콜롬부스에게 두 번째 도박을 걸었다. 이것은 200% 잭팟을 터트렸고
이사벨라는 신대륙이라는 황금밭에서 에스파냐가 강국으로 가는 초석을 다졌다.
이후 에스파냐는 그녀의 후대에 세계 최강이라는 지위를 100년 동안 누리게 되었다.
▶ 빅토리아 (영국 1837~1901 재위)
19세기초 왕위 계승과 무관했던 그녀는 우연한 행운을 얻어 권좌에 오른다.
이후 섭정을 노린 어머니와 친척들을 모두 쳐 내고 휘그당(자유당)과 손을 잡는다.
이어서 궁중에서 반대파들을 무리하게 밀어내려다가 국민들로부터 인망을 잃는다.
게다가 토리당(보수당)의 거센 반발에 직면하여 정치적 위기를 겪기도 하지만
독일 귀족인 앨버트공과 결혼하면서부터 국민들로부터 차차 사랑을 받게 된다.
남편은 드러나지 않게 여왕을 외조하면서도 그녀를 매우 훌륭하게 리드해 주었다.
이후 그녀는 '군림하되 통치하지 않는다'라는 원칙을 지켜 훌륭한 군주로 추앙받는다.
그리고 이 시대에 영국은 '해가 지지않는 나라'의 정점이기도 했다.
▶ 마리아 테레지아 (오스트리아 1740~1780 재위)
18세기 초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 왕가는 아들이 없는 관계로 여왕을 제위에 앉혔다.
순진하고 뜨개질 밖에 몰랐던 그녀는 즉위하자마자 주변국들로부터 시달리게 된다.
오스트리아의 왕권을 노린 스페인, 프랑스, 프로이센은 물론 각 영주들까지
그녀의 왕위 계승을 인정할 수 없다며 무력시위를 하며 온갖 협박을 했다.
마리아는 외유내강형의 여성이었다. 그녀는 이 모든 것을 부드러운 외교로 풀었다.
그리고는 등 뒤에 날카로운 비수를 숨기고 필요할 때면 단호하게 휘둘렀다.
그러자 그녀를 우습게 보았던 유럽의 열강들이 차츰 그녀의 존재를 인식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또한 왕권의 정당성을 내세우기 위해 남편을 공동황제로 내세우기까지 했다.
그러는 한편 제국의 확장을 위해 열 명의 자녀들을 각국의 왕가와 결혼시켰다.
그녀는 가정에서는 온화했지만, 권좌에 앉으면 늘 맹수들을 다루는 사자와 같았다.
지금도 오스트리아는 그녀의 치세가 가장 훌륭했다고 평가하고 있다.
▶ 예카테리나 (러시아 1729~1796)
프로이센 출신으로 아무 주목도 받지 못했던 그녀가 러시아의 대제가 되었다.
그녀는 권력다툼과 거리가 먼 사람이라는 이유로 표트르 3세와 결혼하였다.
하지만 표트르 3세가 너무 무능한 나머지 상대적으로 그녀가 부상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진심으로 러시아를 사랑했지만, 표트르는 프로이센을 동경하고 있었다.
양국에서 전쟁이 벌어졌는데, 표트르는 다 이긴 전쟁을 집어치우고 프로이센편을 들었다.
러시아 국민들은 어이가 없었다. 결국 표트르는 반란으로 폐위되어 암살되었다.
이를 계기로 자연스레 권좌에 오른 그녀는 러시아 민중을 위해 헌신하고자 했다.
하지만 러시아 귀족들에 의해 즉위했다는 정치적 채무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때문에 그녀의 이상과는 달리 귀족들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민중착취를 묵인해야만 했다.
그래도 러시아는 그녀의 노력으로 낙후된 국가 이미지를 유럽의 강국으로 부상시켰다.
그녀의 대제라는 칭호는 결국 고통받은 민중을 위한 속울음이었을지도 모른다.
▶ 카트린 드 메디치 (프랑스 1519~1589)
16세기 프랑스를 뒤흔들었던 잔혹한 성 바르톨로뮤 대학살 사건은 너무나 유명하다.
이때 살해당한 신교도의 수는 프랑스 전역에서 무려 10만 명에 이르렀다.
카트린은 이탈리아의 메디치 가문에서 태어나 불행한 성장기를 거쳤다.
이후 메디치 가문과 프랑스 왕가의 정치적 이해관계에 의해 앙리 왕자와 결혼했다.
이후 프랑스 궁정에서 애첩과 귀족들의 천대를 받으며 참을인(忍)자를 팔둑에 새겼다.
1552년 남편이 갑자기 사망하고 아들이 즉위하자 드디어 그녀의 세상이 열렸다.
그녀는 아들의 왕위를 마음대로 교체하며 본격적인 여왕의 권력을 휘둘렀다.
그녀의 꿈은 소모적인 종교분쟁을 잠재우고 강력한 프랑스를 이루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녀의 바램과는 반대로 신교도의 위협은 그녀를 점점 옥죄어 왔다.
결국 그녀는 그들의 수장인 콜리니 제독을 암살하고 신교도 대학살을 명령하게 된다.
1572년 8월, 왕족의 결혼식날밤, 학살이 시작되었고 파리는 붉은 피로 물들었다.
결국, 이 사건으로 프랑스는 구교 국가로 남았고 그녀는 악녀로 기록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