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세계사/중국 이야기

중국역사를 출렁이게 했던 시안사변(西安事變)의 진실

구름위 2013. 5. 2. 1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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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안사변(西安事變,)은 1936년 12월 12일 동북군 총사령관 장쉐량이 국민당 정권의 총통 장제스를 산시성의 성도(省都) 시안(西安) 화청지에서 납치하여 구금한 후 공산당과의 내전을 중지하고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에 맞서 함께 싸울 것을 요구한 것으로 시안사태 혹은 시안사건이라고도 합니다. 이 사건으로 국민당군과 홍군은 국공 내전을 중지하고 제2차 국공합작이 이루어져 함께 일본에 맞서 싸우기로 한 정변으로서 중국역사의 흐름을 크게 출렁이게 한 아주 중대한 변화였던 만큼 그 내막을 소상히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장쉐량(張學良,장학량) 장군>

   젊은 원수로 알려진 장쉐량(張學良,장학량)은 중국 동북지방 즉, 만주의 군벌인 장쭤린(張作霖,장작림)의 장남이었죠. 1928년 일본군의 폭탄테러에 의해 아버지 장쭤린이 죽자 그 위치를 물려받은 장쉐량은 만주의 젊은 독재자이자 군벌로 위세를 떨쳤던 군부세력이었습니다.그러던 1931년 9월 본격적인 일본의 만주 침략으로 인해 근거지를 잃은 장쉐량은 장제스에게 의탁하는 신세로 전락 그에 의해 중국 중부지방에서 동북군(만주군)의 지휘관으로 임명되었고, 홍군과의 국공내전시 한 축을 담당할 부사령관직을 맡았습니다.

 

   당시 중국 공산당은 대장정 이후 예안을 근거지로 삼아 동북군과 대치하고 있었으며,장쉐량 휘하의 동북군은 고향인 만주를 일본에 빼앗긴 상태여서 일본에 대한 적개심이 많았고 홍군과의 의미없는 소모전에 지쳐있었던 무렵이었습니다. 특히 홍군은 동북군 포로들에게 '진짜 적은 같은 중국인인 홍군이 아니라 만주를 침탈한 일본군이라'는 지속적인 "항일선전"을 폈고 이들이 다시 동북군으로 귀대하게 되니,동북군 사이에는 항일에 대한 요구가 점점 커지게 되었던 것이지요. 장쉐량 자신도 홍군과의 접촉을 통해 대 일본 전쟁에 소극적인 장제스가 주도하는 난징정부의 "선 통일,후 저항" 정책에 불만을 갖게 되었습니다.

 

   1936년 초 장쉐량의 동북군은 홍군과 비밀리에 접촉을 갖고 서로 적대적인 행위를 중지하고 일본과 항쟁하는 통일전선을 구축하기로 암묵적인 합의를 도출해냈습니다.이후 장쉐량은 만주시절부터 이어오던 동북군 장교단을 젊고 진보적인 세력으로 대체하는 한편 공산군과의 접촉을 강화하였습니다. 이러한 방침하에 이루어진 공산군과의 접촉사실은 장제스의 난징정부가 모르도록 비밀리에 이루어졌음은 말할 나위 없겠지요. 이로써 중국군 총사령관 및 행정부 주석직을 겸하고 있었던 장제스와 동북군 원수 장쉐량 두 사람 사이의 긴장은 고조되어 가고 있었습니다.

 

   장제스는 반일감정이 고조된 서북지역의 민심을 뒤로한 채 공산군 토벌에만 몰두하였고 이에 소극적인 동북군을 점차 신뢰할 수 없게 되자 직접 난징의 휘하부대를 직접 동원하여 대규모 홍군토벌을 준비하게 되었던 것입니다.1936년 10월 장제스는 직접 시안을 방문하여 동북군으로 하여금 공산군 토벌을 독려하였으나 동북군의 젊은 장교들은 대 일본 통일전선 수립 및 소련과의 동맹 및 내전종식을 요구하였고,이들의 의견을 수렴한 장쉐량이 내전을 중지하고 일본과의 항전을 촉구했으나 장총통은 이를 외면하였지요. 11월 21일 동북군을 대신 공산군 토벌에 나선 후종난(胡宗南, 유능한 전술가로 알려짐)의 제1군이 홍군에게 참패했다는 보고를 받은 장제스는 직접 시안으로 날아가 반드시 홍군을 분쇄하고야 말겠다는 결의를 다졌지요.

 

   12월 7일 마침내 장제스는 공산군 토벌을 독려하기 위해 전용기편으로 직접 시안에 도착하였으며,이에 맞서 동북군 지휘관들도 다시한번 장총통에게 항일전을 촉구하였으나 거절당했고, 양호성(楊虎城) 장군 휘하 4만명의 서북군도 더 이상 홍군과의 소모전은 불필요하다고 판단,동북군과 행동을 같이 하기로 하였던 12월 9일에는 수천명의 학생들이 반일시위를 벌였습니다.

 

   이 시위를 무자비하게 진압하는 과정에서 장제스의 헌병대가 발포, 두명의 동북군 지휘관의 아들이 다치는 자극적인 사건이 발생했으나 장쉐량의 중재로 성난 학생군중을 무마함으로써 더 이상 큰 사건으로 확산되지 않았지요. 이처럼 급변하는 상황에서도 장제스는 제6차 홍군토벌 작전계획을 발표하고 총동원령이 임박하였음을 알렸습니다.뿐만아니라 장쉐량을 경질하고 토벌군사령관을 교체할 계획을 세웠고, 장제스의 친위병력인 남의사(藍衣社)는 항일을 주장하는 동북군 장교에 대한 블랙리스트를 작성,동북군의 핵심세력을 제거하고 공산군 토벌에 동조하는 장군들로 대체하려 했습니다.

 

   장쉐량이 동북군과 서북군의 사단장 합동회의를 소집한 12월11일 밤10시는 바로 이러한 일련의 복잡한 사태가 절정으로 치닫고 있던 때였습니다. 회의 결과 동북군 1개사단과 서북군 1개연대를 시안 외곽으로 이동하라는 비밀명령이 떨어졌고,이 병력으로 하여금 총통과 그 참모진을 '체포'하도록 했던 것이지요. 이로써 17만 대군의 반란이 현실화 되었던 이 사건은 그 동기나 이면에 도사리고 있는 정치세력에 대해서는 비난할 수 있을 지 모르나,시의적절한 타이밍과 눈부신 실행과정에 대하여는 그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주도면밀히 진행되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12월 12일 동북군과 서북군의 반란군은 오전 6시까지 시안을 완전히 장악하는데 성공하였습니다.취침중에 기습을 당한 장제스 친위대는 무장을 해제 당한 채 체포되었으며,참모부 요원 전원이 영빈관 숙소에서 사실상 구금상태에 들어갔습니다.성장(省長)인 소력자와 경찰국장이 사로잡힘에 따라 시안시 경찰은 모두 반란군에 투항했고,난징정부의 폭격기 50대와 조종사들은 비행장에서 억류당해야 했습니다.이 때 장총통은 시안에서 10마일 정도 떨어진 온천휴양지 임동(臨潼)에 투숙중... 새벽 3시 장쉐량의 부하들이 장제스가 묵고 있는 호텔을 급습하니,총통은 잠옷바람이요 맨발인 채 야산으로 도주해야 했습니다.

 

   미국의 유명한 저널리스트 에드가 스노우(Edgar Snow)는 그의 저서 ‘중국의 붉은 별‘에서 장총통 체포에 대한 비화를 다음과 같이 적고 있습니다. 장쉐량의 경호대장인 26세의 손명구(孫銘九)대위는 200여명의 동북군을 인솔하고 한 밤중에 장제스가 묵고있는 임동에 도착,새벽5시에 작전을 개시하였으며,선발대 15명을 태운 트럭이 호텔로 돌진했고,보초들과 총격전을 벌인 끝에, 뒤이어 도착한 증원군의 지원을 받아 초병들을 제압함으로써 장총통의 숙소에 무난히 진입할 수 있었습니다. 장총통은 총격전이 벌어지는 동안 황급히 휴양지 뒤편의 야산으로 도주해야 했지요.

 

   이를 알아챈 손대위의 수색대는 눈덮힌 바위투성이의 산비탈에서 총통의 몸종을 찾아냈고 잠시후 장총통을 발견하는데 성공했습니다.장제스 그는 잠옷 위에 헐렁한 겉옷만을 걸치고 신발도 신지 않은 맨발에다가,양손은 산위로 도주하다 긁힌 상처투성이,혹한에 덜덜 떨면서 틀니조차 빠뜨린 처참한 모습으로 바위 옆에 웅크리고 앉아 있었습니다. 손대위가 총통에게 거수경례를 하자 그의 한마디 “귀관이 내 동지라면 나를 사살하고 모든 것을 끝내게” 하는 짧은 한 마디였다는 것이지요. “우리는 각하를 쏠 생각이 없습니다.우리는 다만 각하가 조국을 이끌고 일본에 대항하기를 바랄 뿐입니다.”

 

   장은 바위에 걸터앉은 채 더듬거리며 “장쉐량원수를 불러오게 그러면 내려 가겠네” “장원수는 이 곳에 안계십니다. 성내(省內)에서 군대가 봉기하여 우리가 각하를 보호하러 왔습니다." ”그렇다면 내가 타고 내려갈 말 한 필을 가져오게“ ”이 곳에는 말이 없으니 그 대신 제가 업어서 산 아래로 모시겠습니다.“ 그렇게 말한 후 손대위는 무릅을 꿇고 앉았으며, 장은 그 제의를 받아들였고,고통스런 표정을 지으며 그 젊은 장교의 등에 업혔다는 것이죠. 삼엄한 호위를 받으며 하산,산기슭에서 차에 올라 시안으로 향할 때까지 장과 손대위간에는 다음과 같은 대화가 오갔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각하 지난 일은 과거로 돌리고 이제부터는 중국이 새로운 정책을 취해야합니다.어떻게 하실 작정이십니까.? 중국에 한 가지 급선무가 있다면 그 것은 곧 일본과 싸우는 것입니다. 동북지역 사람들이 각별히 요구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항일전입니다.그런데 왜 일본과 싸우지 않고 대신 홍군과 싸우라고 명령하십니까.?” “나는 중국인민의 지도자야,내가 국가를 대표하고 있네,나는 내 정책이 옳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야.” 이처럼 약간의 총격전은 있었지만 장총통은 여전히 굴복하지 않은 모습으로 시안에서 장쉐량과 마주하였던 것이지요.

 

   쿠테타를 일으킨 동북군과 서북군 사단장 전원은 중앙정부와 각 성의 지도자,전체 인민에게 보내는 전문(電文)에 서명하고 발표하기를 ‘총통의 각성을 촉구하기 위해‘ 그에게 서안에 체류하도록 요청했다고 해명하였습니다. 이 전문은 또 시안 체류중 총통의 신변에 안전을 보장할 것과 총통에게 제시한 ’구국‘의 요구조건을 공표하였습니다.그러나 국민당 정부의 사전검열을 받아야 하는 언론에는 일체 보도되지 않았었지요. 당시 동북군 등이 총통체포에 성공한 직후 난징정부에 제시한 8개항의 요구조건은 다음과 같습니다.

 

1. 난징정부를 개편하고 모든 정파를 참여시켜서 구국의 공동책임은 분담케 할 것.

2. 내전을 전면적으로 즉각 중지하고 "무력항일 정책"을 채택할 것.

3. 상하이의 애국운동 지도자들을 석방할 것.

4. 모든 정치범을 사면할 것.

5. 인민의 집회의 자유를 보장할 것.

6. 애국적 단체를 조직할 인민의 권리와 정치적 자유를 보장할 것.

7. 쑨원 박사의 유지(遺志)를 이행할 것.

8. 전국구국회의를 즉각 소집할 것.등이었습니다.  

동북군의 요구조건에 대해 중국 공산당과 중화소비에트 정부,홍군은 즉각 찬성을 표시하고 공산당 대표들이 시안으로 날아왔고 공동항일투쟁 의사를 발표하였으며,12월14일에는 동북군 약 13만 명, 서북군 4만 명, 홍군 9만 명으로 구성된 "항일연합군"이 구성되고 장쉐량이 연합군 군사위원회 주석으로 뽑혔습니다.이로써 홍군과의 전투명령은 즉각 중지되었고 항일연합군은 새로운 전열을 가다듬고 일본과 전쟁을 준비하게 되었던 것이지요. 그러나 이 모든 변화는 국민당의 사전검열로 서북지역을 제외한 지역에서는 일체 보도되지 않았고 장쉐량은 그저 반란군으로 묘사되고 있었습니다.

 

   난징의 국민당 정부는 총통의 체포와 구금사실을 철저하게 숨기고 서북지역의 반란군을 응징할 준비를 하였고,이는 난징정부의 내부권력 투쟁양상으로 번지는 계기가 되었습니다.구금되어 있는 동안 장제스는 저우언라이를 비롯한 공산당 지도부와 면담을 가졌으며, 장제스의 부인인 쑹메이링을 비롯한 난징정부의 대표단이 시안으로 날아와 막후협상을 벌였지요. 대다수 동북군 장교들은 장제스를 '인민재판'에 회부하여 처벌해야 한다고 주장하였으나, 공산당 및 다른 온건파들은 장제스가 그의 지위를 유지하고 있어야만 10년간의 국공내전을 종식시킬 수 있기 때문에 총통이 체면을 유지한 채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장제스의 실각이나 죽음은 또 다른 내전의 빌미가 될 것이고,결국 일본만 이득을 본다는 결론이었지요.동북군의 젊은 청년장교단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장제스는 8개 요구항에 대한 문서 서명 확인 없이 12월25일 석방되었습니다. 반란군, 공산당과 난징정부 대표들 사이에 정확하게 어떠한 합의가 도출되었는지는 밝혀지지 않은 상태에서 장제스는 더 이상 내전이 없다는 점을 개인적으로 보장했고,장쉐량이 제공한 비행기 편으로 난징으로 돌아갈 수 있었습니다. 이때 장제스의 체면을 손상시키지 않기 위해 장쉐량 자신의 전용기편으로 장총통과 함께 난징으로 가 처벌을 기다렸다니 그의 인물됨을 짐작할 수 있겠습니다.

                                                          <장제스 총통 부인 쑹메이링(宋美齡.송미령)>

  난징에 도착한 장쉐량은 장총통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제가 마땅히 받아야 할 처벌을 받기 위해 각하와 함께 난징에 온 것은 그래야만 장총통께서 군율을 잡으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에 대해 장제스는 자못 근엄한 표정으로 “내 부덕함과 부하를 제대로 가르치지 못한 소치로 전례에 없었던 반란이 일어났소, 귀관이 회개의 뜻을 밝힌만큼 나는 중앙당국이 사태를 원상회복시키기 위해 적절한 조치를 취하도록 요청하겠소.” 갖가지 격렬한 행동을 타협적인 조치로 전환시키고,처벌과 보상을 적절히 조정하는데 이처럼 뛰어나고 교묘한 표현이 없을 듯 싶습니다.

 

  이후 장제스는 먼저 반란을 저지하지 못한 무능과 수상으로서의 태만행위를 고백하는 장문의 성명서를 발표했으며,산시성에 파견한 정부군 전원이 철수하도록 명령한 후 총통직 사임의사를 표명했지요. 그러나 그의 사의표명은 진정한 뜻의 사임이아니었고,난징정부 또한 참된 의사로 받아들이지 않았지요. 왜냐하면 장제스 그는 12월29일 중앙집행위원회 긴급상임위원회를 소집하고 국민당 최고의결기관에 다음과 같은 4개항을 조치해 줄 것을 요청했기 때문입니다. 즉 장쉐량의 처벌문제를 그가 주석으로 있는 군사위원회에 회부할 것과 서북군 문제해결과 반란군에 대한 군사작전을 중지할 것을 지시했습니다.

 

  장제스는 자신이 부재중에 시안공격을 위해 설치되었던 토벌사령부의 해체,이러한 권고안은 상임위원들에 의해 고분고분 통과되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장쉐량은 12월31일 군사법정(장제스 불참)에서 10년 금고형과 5년간의 공민권 박탈을 선고받았지만 다음날로 사면 되었고,그 이후 장제스의 처남이자 난징정부 특사로 시안에 파견되었던 송자문의 빈객으로 머물게 되었지요.이어서 시안에 설치된 총통의 사령부가 해체되었으며 국민당내 정학파(政學派)의 유력지도자였던 친일파 외교부장 장군(張群)이 해임되었고,구미파(歐美派)인 왕총혜가 임명됨으로써 시안에서의 약조가 암묵적으로 이행되고 있었습니다.

 

  2월초까지 휴가를 얻은 장제스는 장쉐량과 함께 자신의 고향인 저장성(浙江省) 봉화 인근의 총통별장에서 정양하던 중, 첫번째 사의표명이 반려되자 두 번째로 사의를 표명하는 제스츄어를 표했습니다. 그는 표면상 공무에서 벗어난 입장이었음에도 서북지역 문제해결 형태를 완전 좌자우지했을 뿐만 아니라,동북군 서북군 홍군 지휘관들과 진행되었던 회담도 완전히 주도해 나갔던 것이죠. 이 무렵 장쉐량은 사면을 받았다고는 하지만 ‘근신상태’로 장제스 곁에 있어야 했으니 사실상의 포로신세였습니다.1949년에 장제스에 의해 대만으로 끌려가 국민당 정권하에서 1991년까지 자택연금 상태에 있었지요.

 

   사실상 구금상태로 지내던 장쉐량이 완전한 자유의 몸이 된 것은 장제스 사후인 1993년이었습니다.그 해 처음으로 대만으로부터 출국이 허용되어 미국으로 떠날 수 있었으며,1995년부터 2001년 사망할 때까지 하와이에 거주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2001년 10월14일 오후 8시50분, 미국 하와이 자택에서 101세까지 장수를 누리다 파란만장한 일생을 마감했던 그가 세상을 떠난지 10여년이 지났음에도 대만에서 푸대접을 받고 있는 것과는 대조적으로,본토의 중국 공산당 정부로부터는 역사상 누구에 못지않는 영웅 대접을 받을만큼 현대 중국역사를 뒤바꾼 큰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합니다.

  

  시안사변에 대한 남은 얘기를 이어 가도록 하지요. 난징의 국민당 중앙집행위원회에서는 형식적으로는 반란군의 8개항을 거부했으나 국가의 당면한 최대의 문제는 "공산당 축출과 통일"이 아니라 "실지회복"임을 결의했으며,장제스가 오랫동안 연기해온 '국민대표회의'를 소집하여 조속히 민주제도를 도입할 것을 결의하였습니다. 그에 더하여 정치적 발언과 언론의 자유를 선포하였고,일부 정치범을 석방하기 시작함으로써 장제스가 시안에서 약조한 사항을 가시적으로 이행해 나갔다고 볼 수 있습니다.그 일환으로 공산당에 제시했던 것이 4개항의 화평조건이었는데 그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홍군을 해체하고 국가의 단일 군사력(국민당군) 아래 편입할 것.'소비에트 공화국'을 해체할 것.쑨원 박사의 "삼민주의"와 배치되는 공산주의 선전활동을 중지할 것.계급투쟁을 포기할 것.이러한 화평조건을 제시한 난징정부는 반란군의 요구사항과 공산당의 '협력'제안을 거부하는 형식을 취하는 듯하면서도 교묘하게 반란군의 8대 요구사항을 모두 들어주는 책략을 썼던 것이죠. 이 점에 대해 난징정부 내 일부 강경파의 반발이 있었지만,장제스는 대외적인 유화정책을 강행하였고,1937년 2월에는 동북군을 이동시켰으며,서북군을 국민당군으로 편입시킴으로써 서북지역에 대한 영향력을 강화하였던 것입니다.

 

  이후 공산당과 협상을 주도해 나가는 방편으로는 공산당 대표자격인 저우언라이 등과 여러차례 협상하면서 마침내 공산당과의 협력관계를 시작했고,공동으로 항일투쟁을 벌이기로 약조했던 것이죠. 일제가 1937년 7월 노구교 사건(1937년 7월7일에 베이징 서남쪽 루거우지아오[盧溝橋]에서 일어난 발포 사건으로 일본군의 자작극)으로 본격적인 중국 침략을 강행하자 국민당과 공산당은 제2차 국공 합작을 통해 일본과 전쟁에 나섰고, 이 관계는 1945년 일본이 패망할 때까지 지속함으로써 당시 열세에 있던, 공산당이 전열을 정비할 수 있는 여유를 갖게 되었습니다.시안사변은 2차대전 종료 후 벌어진 국공내전에서 공산당이 승리하여 오늘의 중화인민공화국이 탄생하는데 결정적 역할을 한 역사적 사건이었습니다. -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