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세계사/중국 이야기

중국역사를 후퇴시킨 마오(毛)의 문화대혁명

구름위 2013. 5. 2. 1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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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화대혁명(文化大革命)은 1966년부터 1976년까지 약 10년 동안 중화인민공화국에서 진행된 정치적 격동기로서,공식명칭은 프롤레타리아 계급 문화대혁명(無產階級文化大革命.무산계급 문화대혁명)이며,약칭 문혁이라고도 합니다.이 운동으로 인해 전국적인 광란분위기가 조성었고,혼돈시대로의 진입 및 극심한 경제침체기로 이어졌습니다. 그 내용 전체를 자세히 논하기에는 너무 광대한 분량,원인과 결과에 중점을 두도록 하겠습니다.

 

   한 마디로 문혁은 1966년 5월16일 중국공산당 총서기인 마오쩌둥(毛澤東)의 주도하에 시작되었으며, 유산계급인 자본주의적 요소가 당을 지배하고 있으니, 이를 제거해야 한다는 것이었죠. 그의 주장에 의하면 중국 젊은이들이 사상과 행동을 규합해 "혁명후의 계급투쟁"을 통해 이런 요소들을 배제해 나가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그의 주장은 그 후 중국 전역에서 벌어진 홍위병이 준동하도록 멍석을 깔아준 결과가 되고 말았습니다.

 

   마오(毛)가 문혁을 제창하면서 가장 큰 명분으로 내세웠던 것은,구 소련의 잘못된 수정주의가 중국에서 재연되는 것을 차단하고, 중국의 이상적인 사회주의국가를 건설하기 위한 것이라고 천명했습니다. 그러나 전후 상황을 들여다 보면, 자신이 주도했던 대약진운동이 실패함으로써 공산당의 권력과 영향력이 덩샤오핑(鄧小平)과 류샤오치(劉少奇) 등 개방세력에 넘어 간 주도권을 되찾기 위한 모험이었던 것입니다.

 

    1969년에 이르러 마오는 공식적으로 문혁이 끝났다고 선언하였으나, 1976년 그의 죽음과 광적으로 문혁을 지지하였던 4인방(四人幇:강청.마오쩌둥 처,요문원.정치국위원,왕홍문 부주석,장춘교부총리)이 체포되기까지의 혼돈 시기를 문혁기간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입니다.그런가 하면 중국인들은 고통스럽고 힘들었던 문혁기간을 십년동란(十年動亂)이라 부르기도 합니다. 문혁은 수많은 중국인과 외국인,심지어는 중국공산당 내에서도 국가적 재난(災難)이라 깎아내릴만큼 혹평이 극에 달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이에 대해서는 1981년에 이르러 중국공산당이 정의를 내렸거니와, 그 요지를 마오(毛)의 과오(過誤)였는 것으로 발표한 바 있으며,그 주된 책임자로 린뱌오(林彪.임표)와 사인방(4人幇)을 지목하였습니다.

 

                                   불순분자 숙청하려는 사상정화운동

   1949년 10월1일 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된 이후 공산당이 실시한 여러 개혁정책은 중국사회에 많은 변화를 초래하였고,그 이전의 지배층은 "반동분자"로 낙인찍혀 재산과 모든 기득권을 몰수당하는 것으로도 모자라 처형되거나 수용소에 감금당했습니다. 그런가 하면 정권핵심 인사중에는 혁명이 성공하기 직전에서야 공산당 측에 합류한 기회주의자들이 있었으며,그들 중엔 공산당 집권 후에도 혁명에 동참한 것처럼 지배층에 합류하고 있었던 것이죠. 중국공산당은 이러한 모순으로 야기된 갈등이나 불만을 봉합하고, 당내 불순분자를 제거하는 사상정화운동 차원에서 "반혁명세력" 및 "우파"를 숙청하곤 했습니다.

   문화대혁명시만 하더라도 새롭게 선보이기 시작한 라디오가 큰 홍보역할을 하였지요. 중국정부는 초기 준비단계에서부터 모든 학교, 군부대, 공공조직 등에 라디오를 지급,청취하도록 하였으며,이를 대중에게 전달하기 위한 수단으로 홍보담당자를 선정했습니다. "중앙인민방송국"의 라디오방송은 선전활동을 위한 기구였으며,당시 홍보담당자들이 1960년대 4억의 농촌인구 중 7천만명에 달했다니 홍보요원 규모가 놀랍기만 합니다.

 

    약진운동 이후 류샤오치와 덩샤오핑이 주도했던 개혁의 핵심은, 집단화를 시정하여 실용적이고 효과적인 정책을 추진하는 것이었습니다. 류와 덩의 정책은 "생산보다 자유로운 구매행위 등 새로운 경제정책을 시행하려 했기 때문에, 마오의 자급자족경제와 크게 상반되는 것이었습니다. 아무튼 류샤오치는 난국을 풀어나가기 위해 인민공사를 해체하는 등 대약진 이전으로 돌아가려 했던 것이고,이러한 류샤오치의 개혁정책이 성공을 거둠으로써 인민들뿐만 아니라 고급 당원들까지도 류와 덩을 신뢰하기 시작했던 것이었지요.

 

    이에 위기의식을 느낀 마오는 자신의 권력을 회복하고 정적을 제거하기 위해, 1963년부터 아래로부터의 풀뿌리운동인 공산주의 교육운동을 시작하였습니다.그 때까지만 해도 류와 덩은 이 운동이 학생들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어서 현실정치와 무관할 것으로 보았던 것이죠. 그러나 이 아이들이 몇 년 후엔 마오의 주된 지지세력, 즉 홍위병 역할을 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1963년에 이르러 마오는 계급투쟁의 이상이 적용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류를 공개적으로 비판하기 시작했고, 이듬해인 1964년에는 공산주의교육이 "사청운동(四淸運動:정치,경제,조직,이념)"이어야 하고,그렇기 때문에 불순세력을 청산해야 한다며, 류샤오치 등을 비판하기 시작했습니다.

 

   마오는 1966년 8월에 개최된 제8회 제11차 중앙위원회전체회의(十一中全會)에서 문화대혁명을 공식화 했습니다. 그는 문혁 초기단계에서 국가주석 류사오치(劉少奇.유소기)와 당 총서기 덩샤오핑(鄧小平.등소평) 등을 권좌에서 축출하였으며,1968년에는 더 많은 통제력을 확보하기 위해 군병력을 동원,학교·공장·정부기관 등을 접수했고,어지러운 질서를 바로잡는다는 명분하에 우군역할을 했던 홍위병을 깊숙한 산골로 보낸 적도 있었습니다.그 후 문혁이 진행되는 동안 마오 주변에서 있었던 권력의 부침에 대해서는 언급을 생략하고, 문혁이 종료되어야 했던 원인 등을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마오(毛) 사망, 사인방의 체포, 문화대혁명의 종식

   1976년 7월26일 새벽 13초 동안의 대지진으로 허베이성 당산시가 초토화 되었습니다.지진 발생 3년후 공식발표한 중국정부의 통계는 25만여명이 사망했다는 것이었으나, 당시 서방 언론에서는 50만명 이상으로 추측했었다니 엄청난 규모의 참변이었던 것만은 확실합니다. 지진발생 40여일 후인 9월9일,마침내 천운을 다한 마오쩌둥이 83세를 일기로 사망함으로써 사실상 문화혁명이 막을 내렸습니다. 그해 10월 앞서 언급했던 4인방이 체포됨으로써 문혁이 사실상 종료 되었고, 연금중이던 덩샤오핑이 정계에 복귀할 수 있는 수순을 밟게 되었던 것이죠.

 

   그보다 앞서 있었던 역사적 전환점이 된 사건 한가지에 대해 언급해야 될 것 같습니다. 1976 1월8일,오직 마오의 충직한 심복으로 방패막이 역할을 했던 저우언라이(朱恩來:주은래)가 방광암으로 사망하게 되자, 강청 등 4인방측에서는 국무원총리인 덩샤오핑을 몰아내고, 그 들 중 한 사람이 그 자리를 차지하려 했었습니다.그러나 마오가 그들의 속셈을 알아차렸던지, 덩을 실각시키되, 그 때까지 잘 알려지지 않았던 화궈펑(華國鋒:화국봉)을 총리직에 임명하였던 것이지요.

 

   만약 그 당시 마오가 4인방 중 누군가를 총리로 임명했더라면, 마오(毛) 사후에도 그들이 실권을 쥐게 되었을 것이고,그랬으면 문혁이 종식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랬더라면 중국인들은 그 후 오랜 기간 더 암울한 생활을 하게 되었을 것이라며 가슴을 쓸어 내렸다는 후문입니다. 어쨌거나 예젠잉(葉劍英:섭검영)과 같은 유력한 군지도자와 비록 연금중이었지만 당에 영향력을 행사하던 덩샤오핑, 그리고 인민해방군의 지지아래 화궈펑은 사인방의 체포를 명령하였고,그 해 10월10일, 인민해방군 특수부대가 사인방 제거함으로써 군권을 확실히 장악할 수 있었습니다.

 

   그 후 덩샤오핑의 복권이 이루어지게 된 뒷 얘기로는, 당시 정치국 상무위원이었던 예젠잉은 덩이 정무원에 복직되지 않으면 자신이 사임하겠다고 화궈펑에 압력을 행사했다는 것이고, 이 청을 받아들인 화궈펑이 덩을 다시 정무원으로 복직시켜 부총리에 임명하였던 것으로 전해집니다. 이로써 덩은 화궈펑에 뒤이은 제2의 실력자가 되었으며, 8월에 있은 제11차중앙위원회에서 정치국 상무위원으로 재기함으로써 혼란스러운 중국을 개혁개방의 길로 이끌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할 수 있었습니다.

 

                                        문화대혁명의 감추고싶은 진실

   무엇보다도 10년간 계속된 문화대혁명 기간에 후세를 위한 교육시스템이 마비되었던 게 중국인들이 입었던 가장 큰 손실이었습니다. 당시 전국의 모든 대학에서는 입학시험을 완전히 취소하였으며, 사인방이 몰락하고도 한참 지난 1979년이 되어서야 다시 교문을 열 수 있었습니다. 학생뿐만 아니라 거의 모든 지식인들이 하방(下方)이라는 미명하에 농촌의 노동교화소로 내려가야 했으며, 문혁기간 동안 도시의 젊은이들이 농촌으로 이주하도록 강요되었고, 그 곳에서 모든 정규교육을 포기한 채 공산당의 사상교육만을 받아야했으니, 더 이상의 학력 없이 성년을 맞아야 했던 불행한 세대였습니다.

 

   이러한 사회적 병폐는 지방에 따라 다르긴 하지만 문혁이 종료된 20년후까지도 문맹율이 40%에 달했다고 하니,중국인들이 마오의 잘못된 권력욕에 의해 얼마나 많은 희생을 치루었던가를 능히 알 수 있다 하겠습니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동 기간 동안 중국의 전통 예술과 사상이 완전히 무시되는 풍조하에서 마오쩌둥 사상이 자리 잡아야 했다는 점이며, 홍위병에 가담한 청소년들이 자신의 부모나 스승을 반혁명세력이라고 고발하거나 구타하는 사례가 빈번했었다는 점이었지요. 당시 문혁지도부는 중국인들로 하여금 문화적 전통을 사갈시하고, 부모와 스승의 가르침을 비판하도록 부추겼으니, 전통 유교사상을 중시하는 중국들의 가슴이 얼마나 아팠을까를 짐작케 합니다.

 

   문화적인 측면에서도 말로 형언키 어려운 손실을 자초하였던 바, 문혁기간 동안 중국의 많은 역사적 유산들이 "구시대적 산물"로 간주되어 파괴되었으며,값진 전통유물인 공예품들도 탈취되거나 즉석에서 파괴되는 게 다반사였습니다. 외국인 목격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중국의 수천년 역사적 유물들이 10년간의 문혁기간동안 거의 파괴되었을 것이라 했습니다. 중국 역사학자들도 당시의 파괴행위는 기원전 2세기에 있었던 진시황제의 분서갱유(焚書坑儒)보다 더 무자비했다고 혹평했던 것으로 보아,약진운동과 문혁이 거의 모든 분야에서 중국의 선진화를 30년 이상 후퇴시켰다는 견해가 옳을 듯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