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세계사/중국 이야기

국공내전(國共內戰)과 마오(毛)의 중화인민공화국 선포

구름위 2013. 5. 2. 13: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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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공내전(國共內戰), 마오(毛) 중화인민공화국 선포 

   1921년 공산당이 태동한 이래 대장정 이전인 1924년에는 중국통일을 위해 국민당과 공산당이 처음으로 합작한 바 있었고, 대장정 이후 시안사변을 계기로 1937년부터 항일전이라는 공동목표하에 두 번째 국공합작이 이루어짐으로써 양당이 공동보조를 취한 적도 있었습니다.그러나 장제스는 공산당을 파트너십이 아닌 타도의 대상으로 삼았기 때문에 시간이 흐를수록 두 진영의 앙숙관계는 골이 깊어가고 있었습니다.

 

   “하늘엔 두 개의 태양이 있을 수 없다“라며 장제스가 공산당을 토벌하려 하자, 마오(毛.모) 왈 ”하늘에 태양이 두 개면 어떠리,그중 하나를 백성들이 선택하게 하면 되는 것이지.!“ 그래서 1927년부터 1937년까지 양측이 벌인 전투를 제1차 국공내전이라 하고, 2차대전 종료후인 1946년부터 1949년 10월1일 마오쩌둥(毛澤東.모택동)이 톈안먼(天安門.천안문)광장에서 중화인민공화국 수립을 선포하기 이전까지,양측이 치열하게 치룬 전쟁을 제2차 국공내전이라 합니다.

 

   중화인민공화국에서는 그들의 혁명을 정당화하기 위해 ‘해방전쟁’이라 부르기도 하는데, 제2차 세계대전에서 일본이 항복하게 됨에 따라 평화를 갈구하는 중국국민의 여망은 간절한 것이었습니다. 공동의 적이 사라지자 일본군의 무장해제와 점령지정리 등을 둘러싸고 양당간의 견해차도 있었지만, 오랜 전쟁에 지쳐 있었던 터라 내전을 피하기 위한 협상을 개시했고, 1945년 8월부터 1개월 이상 충칭(重慶)시에서 장제스와 마오쩌둥이 직접 만나 평화로운 방식의 건국을 기본방침으로 삼는데 합의했습니다.

 

   공산당은 국민당의 일당독재를 청산하고 무당파 인사들도 대폭 영입하여 연합정부형태의 민주정치를 실현하자고 요구하였습니다.하지만 국민당측이 이에 동의하기를 주저하였습니다.왜냐하면 그렇게 되면 국민당이 주도하는 통치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던 것이죠. 양측은 1946년 1월10일 충칭(重慶)시에서 정치협상회의를 재개하고 5개항 협의를 위한 국민정부설립위원회를 설립키로 했으나, 그로부터 5개월 후인 1946년 6월 국민당측에서 돌연 협상을 파기하고 병력을 동원 내전을 일으킴으로써,중국 국민들이 간절히 기대하던 평화건국을 실현할 수 없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해 6월 국민당군이 본격적으로 공산당지구를 공격함으로써 전면적인 내전이 시작되었던 바, 국민당군은 병력과 장비면에서 공산군보다 압도적으로 우세했고, 미국의 일방적인 지원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객관적인 면에서는 국민당 측의 압승이 예상되었습니다.이러한 예상을 뒷받침하 듯 1947년 3월13일에는 후쫑난(胡宗南.호종남)장군이 지휘하는 23만명의 국민당병력이 중국공산당의 본부가 있었던 옌안(延安)을 점령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무리하게 대도시 위주 점령지를 확대하려 했던 국민당군은 병력이 분산되는 전략적 오류를 범하게 되었지요.

 

    당시 국민당군의 병력은 공산당의 3배에 달했고,전국 대도시와 주요도로를 장악하고 있었으며,전 국토의 76%에 해당하는 토지와 인구의 71%를 점유할 만큼 유리한 고지를 점령하고 있었습니다.그럼에도 이후 3년간의 전쟁은 공산당의 승리로 끝나고 말았습니다. 그렇다면 두 당의 현저한 역량 차이를 중국공산당은 어떻게 극복하였으며,승리를 거머 쥘 수 있었을까요.? 여러 복합적인 이유가 있었겠지만 화폐개혁실패로 인해 천문하적인 물가폭등이 중국인들의 마음을 국민당에서 떠나게 된 결정적인 이유요, 둘째로는 군사적인 면에서 공산당군은 농민들의 지지하에 세불리를 느끼게 되면 일단 퇴각했다가 힘를 집중하여 재탈환 하는 작전을 구사했지요, 그러나 국민당군은 초지일관 전국 주요도시 위주로 군사력을 분산시켰던 것이 두 번째 패인이었던 것이지요.

 

   이처럼 무능과 부패,오합지졸이었던 국민당에 비해 공산당 지도층은 대장정에서와 같이 엄격한 위계질서와 국민에 대한 봉사를 중시하였으니,전쟁의 승패는 불을 보듯 뻔한 것이었지요. 1946년 이후 중국의 가장 큰 과제는 민주주의 실행여부였습니다. 따라서 부패한 국민당의 일당독재에 반대한다는 외침이 커져 가는 것은 당연한 추세였고,일부 국민당원까지도 제3의 길을 찾고자 했으며,국민의 대다수가 공산당으로 기울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무렵 중국의 미래에 대한 마오쩌둥의 확고한 신념이었던 그의 저서 “신민주주의 이론”이 제7차 공산당 전국대표자대회 등을 통해 당원과 국민들에게 지침으로 자리잡게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마오(毛)는 혁명에 대한 풍부한 경험을 바탕으로 중국이 당면한 현실을 구체적으로 분석하여 지도이념을 제시함으로써 국민과 당원들로부터 열성적인 지지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새로운 길을 찾았으며,그 길은 다름 아닌 민주이고,국민이 주인이 되는 새로운 길로서 1840년대부터 중국국민들이 간절히 염원하던 그 길”이라 주장하면서 2천년간 이루지 못했던 국민의 꿈을 이루자고 외쳤던 것이지요. 중국공산당은 1947년 7월9일 중국 토지정책에 대한 방안을 마련하고,반봉건적 토지착취제도를 바꿔서 농민들이 토지를 직접 소유할 수 있도록 조치하였습니다.

 

    그 결과,실제로 9천여만명의 농부들이 자기의 토지를 소유하게 되었지요. 이는 봉건독재를 근본으로 삼았던 중국사회의 커다란 변화였기에 농민들이 느꼈던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토지제도 개혁은 향후 중국운명을 결정하는 힘이 되기에 충분했습니다.여기서 한 영국학자(한스반드벤 캠브릿지대 교수)의 촌평을 들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장세스는 쑨원이나 마오쩌둥과 비교해 보았을 때,중국국민이 원하는 미래의 청사진을 확실하게 제시하지 못했기 때문에 민심을 얻는데 실패했었고,그로 인해 국민당정권이 막을 내리게 된 것이다.”

 

    1949년 2월에 이르러서는 국민당군의 베이징이 함락되었고, 그 여세에 탄력을 받은 공산당군은 파죽지세로 몰아붙인 끝에 4월에 접어들어 장강(揚子江)을 건너 국민당정부가 소재한 수도 난징(南京)을 점령하였습니다. 연이어 5월에는 최대도시인 상하이를 함락시켰고, 10월에는 국민당 최후의 대도시인 청두(成都)마저 함락함으로써,장제스가 이끄는 국민당정부를 타이완(대만)으로 쫓겨가도록 했던게 국공내전의 전말이었습니다.패장 장제스가 남긴 변명도 잠시 들어봐야겠지요. “공산당의 힘은 전쟁 이전에는 보잘 것 없는 것이었으나 그들은 우리의 약점을 잘 알고 있었다.우리가 패한 것은 공산당군이 강해서가 아니라,우리가 부패하고 무능해서였고,우리 스스로가 우리의 약점에 의해 무너진 것이다.”

 

   일종의 자승자박(自繩自縛) 때문이었다는 패장 장제스의 자괴감은, 매사가 그렇듯, 가장 무서운 적(敵)은 항상 가까운 주변에 있었다는 점을 세인들에게 들려주고 싶었는지도 모를 일입니다.내전이 마무리되어 갈 즈음인 1949년 9월21일 베이징에서 중국정치협상대표회의가 열렸습니다.공산당과 전국의 민주당파,민주단체 및 무소속단체들이 한자리에 모여 국가의 앞날에 대해 논의하는 자리였지요. 마오쩌둥은 이 자리에서 다음과 같은 요지의 발언을 했다 합니다.

 

   “여러분,오늘 우리는 같은 느낌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느낌은 우리의 노력이 인류역사에 기록되고, 세계인구의 1/4에 달하는 우리 중국인들이 지구상에 우뚝 설 것이라는 희망을 뜻합니다.” 이를 바라보는 미국 예일대학교 조나단 스펜스(Jonathan D. Spence)교수의 촌평도 들어둘만 합니다. “공산당의 승리는 특별하고 변화무쌍한 역사라 할 수 있었습니다. 민중들의 수많은 희생이 뒤따랐지만 더 많은 것을 얻었고, 결실을 맺을 수 있었으니 말입니다. ” 1949년 10월1일,이 날은 1840년의 치욕적인 아편전쟁 이래 외세에 짓눌려 왔던 중국인들이 간곡히 원해 왔던 자주독립일이었고, 중국의 현실이 결합된 승리의 날이었습니다.

 

   향후 중국이 나아 갈 미래는 이미 정해져 있었으며,그 길은 국가의 번영과 국민의 행복을 위해 중국만이 새로운 길을 개척해야 하는 과업이었습니다. 감격에 겨워 이어졌던 마오(毛)의 말, “1840년 아편전쟁 때부터 시작하여 109년간 풍상풍우를 거치며 중국은 많은 격변을 치루었고, 그처럼 힘든 과정을 통해 오늘과 같은 중국인민정부가 성립될 수 있었습니다.” 이로써 베이징의 톈안문(天安門)은 역사의 아픔 속에 치욕의 산 증인이 되었으며,1919년 5.4운동을 일으킨 중국국민들과 함께 했습니다.그리고 1949년 가을 중국은 새로운 공화국을 수립했습니다. 이 날을 위해 중국인민들은 형언키 어려운 수많은 고통을 겪어 왔던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

 

   1949년 중국인민공화국을 선포하기 전날 초대주석으로 추대된 마오쩌둥은 그 공적을 기린 비석에 다음과 같은 비문을 남겼습니다. ”3년 동안 인민해방전쟁과 인민혁명중 희생한 영웅은 영원할 것이다. 30년 동안 인민해방전쟁과 인민혁명 과정에서 희생한 영웅 또한 영원할 것이다. 중국민족을 통일하고 거대한 공화국을 세우기까지,모든 영웅의 희생은 역사에 기록되었다.” 이로써 사회주의 국가로 새롭게 탄생시킨 중국,마오는 그들을 어디로 이끌 것인가를 국공내전을 통해 몸소 실천했다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