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애 유성룡 - 8장 - 반격
정주를 안심시킨 유성룡은 대가를 따라 의주로 향했다. 선조는 의주까지 도주했으나 상황은 좋지 않았다. 의주 목사 황진과 판관 권탁 등이 관인과 관아의 여종 두어 명을 데리고 직접 임금의 수라를 장만하는 형편이었다. 《선조실록》은 “꼴과 땔나무가 계속 조달되지 않아서 행재소라고는 하지만 적막하기가 빈 성과 같았다” 라고 전하고 있다.
그나마 평양성을 점령한 소서행장 군이 더 이상 북상하지 않아 다행이었다. 일본군은 순안이나 영유처럼 손을 뻗으면 닿을 거리에 있는 군현도 점령하지 않았다. 단독으로 평양까지 북상한 소서행장은 어떻게 해야 할지 망설였다. 그는 마치 농성하는 군사처럼 평양성에 은거했다. 조선으로는 하늘이 준 기회였다. 그러나 선조는 이 황금 같은 시간을 전열을 정비하는 계기로 사용하지 않고 요동으로 도망갈 준비를 하는 시간으로 사용했다.
《선조실록》 25년 6월 23일
상이 전교했다.
“요동으로 건너가는 것을 비록 갑작스럽게 할 수 없으나 모든 일을 충분히 예비하도록 하라.”
예조판서 윤근수가 요동으로 건너가면 낭패하고 강력히 말하고, 풍원 부원군 유성룡도 그 불가함을 강력히 말하면서 아뢰었다.
“북도 · 하삼도 · 강변 등이 있으니 두루 행행하시면 수복할 수 있는 일이 있을 듯합니다.”
드디어 서로 눈물을 흘리며 목메도록 울었다.
유성룡의 말대로 함경도와 전라 · 경상 · 충청도 등은 아직 일본군의 수중에 떨어지지 않았다. 선조가 이런 지역들을 행행하면서 전투를 독려하면 전세가 뒤집힐 수 있었다.
유성룡은 먼저 선조의 마음을 다잡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의주에서 계사를 올려 시무를 진술했다.
《연보》
☞ 토병(평안도 군사)은 날래고 용감하기가 남군보다 갑절이니 군에 응모하는 자가 있으면 각별히 권장하여 흥기하게 하소서. 또한 본도의 민생들이 곤란함이 더욱 심하오니 모든 폐단을 일체 깨끗이 없애소서.
☞ 무리를 지어 창고를 노략질한 무리들은 반드시 모두 난민이 아니라 배고픔에 견디다 못해 한 짓에 불과합니다. 이것은 수령들이 구휼에 힘쓰지 않아 그러하니, 여러 가지 방법으로 이쪽 사정을 알게 하여 그들로 하여금 각기 무리들을 거느리고서 적을 소탕하는 일에 힘쓰게 하되 공적이 있으면 평인과 같이 상을 주소서.
☞ 화포를 만들 줄 아는 장인도 마땅히 불러 모아 제조하게 해서 전쟁의 쓰임에 대비하소서.
☞ 왜적이 수백 리 가까이 있으므로 안으로 간첩을 엄하게 살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성안과 군중(軍中)으로 하여금 별도로 표호를 만들어 서로 식별할 수 있게 하소서.
유성룡의 계책은 무너진 군사를 빨리 수습해서 평양성을 탈취하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선조의 뇌리에는 압록강을 건널 생각뿐이었다. 그러나 선조는 압록강 도강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요동으로 내부하겠다는 자문에 대한 명나라의 반응 때문이었다.
“명나라에서 우리나라가 내부를 청한 자문(咨文)을 보고 장차 우리나라를 관전보의 빈 관아에 거처시키려고 한다는 소식을 듣고는, 상이 드디어 의주에 오래 머물 계획을 하였다.”
선조는 자신이 명나라로 망명하면 나라는 망해도 요동에서 비빈들을 거느리고 제후로 살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명나라는 선조가 압록강을 건너면 관전보의 빈 관아에 유폐시킬 계획이었다. 이 때문에 선조는 요동내부 계획을 포기했다. 이 소식을 들은 선조는 6월 29일 의주에서 자신을 호종한 신하들 중 가자를 받지 못한 사람을 승급하라고 명했다. 끝까지 자신을 따라다니라는 뜻이었다.
선조가 전란 극복에 가장 큰 방해물로 전락한 반면 분조(分朝)를 이끌고 있는 세자 광해군의 활약은 눈부셨다. 선조의 명으로 영변에 떨어진 세자는 그곳에만 머물러 있지 않았다. 세자는 그해 7월 1일 함경도 남부 맹산으로 갔다가 4일에는 더 남쪽 양덕으로 이동했다. 선조는 요동으로 도망갈 생각만 한 반면에 세자는 적진 깊숙한 남쪽으로 잠입한 것이다.
이날 선조는 세자를 시위하던 김우고 · 이시언을 의주로 보내라고 명령했다. “이곳에서 적을 토벌할 일이 한창 급하고 또 이런 때에 이 같은 사람을 얻기가 어렵다” 는 이유였다. 적진으로 들어가는 세자에게 군사를 늘려주기는커녕 군사를 빼앗은 것이다. 그러나 세자는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5일에는 강원도 곡산으로, 9일에는 이천으로 잠입했다. 28일에는 다시 신계로 잠입했다.
7월 무렵 유성룡은 치질이 심해 일어나지도 못했다. 선조는 윤두수에게 대신 명나라 군사 접대를 맡겼으나 유성룡은 자신이 해야 한다는 생각에 종사관 신경진을 시켜 선조에게 글을 올렸다.
“신이 전교를 보건대, 명나라 군사에게 지급할 군량이 시급하게 되었는데 신이 병중에 있기 때문에 좌상 윤두수에게 조처하도록 하려 하였습니다. 그러나 연도의 군량과 말먹이는 신이 전부터 관할하였습니다. 신이 병들어 있으나 죽기 전에는 스스로 힘을 다하여 분주히 뛸 것입니다. … 신은 오늘 신경진을 먼저 보내고, 내일 새벽에 병을 무릅쓰고 수행하여 일이 지연되지 않게 하였습니다.”
유성룡이 하직 인사를 하자 선조가 직접 불렀다. 그는 엉금엉금 기어 들어가서 아뢰었다.
“소곶역에서부터 남쪽 정주 · 가산에 이르기까지는 명군 5천 명이 하루 이틀 먹을 것은 준비될 수 있으나, 안주 · 숙천 · 순안 세 고을에는 양식이 전혀 없습니다. 명나라 군사가 이곳을 지날 때는 먼저 사흘치 양식을 가지고 대비해야 할 것입니다. 군사가 평양을 즉시 수복하면 평양에는 곡식이 많으므로 능히 보급될 수 있을 것입니다.”
유성룡이 떠나겠다고 하자 선조는 웅담과 납약(臘藥)을 내려주었다. 유성룡이 아픈 몸을 이끌고 의주를 떠나자 내의원의 하인 용운이 성문 밖 5리까지 배웅하며 내내 통곡했다. 심지어 유성룡이 전문령 고개에 올랐을 때까지 통곡소리가 들렸다. 이렇게 유성룡은 저녁 때 소곶역에 도착했으나 이속과 군졸들이 모두 흩어져 사람의 그림자도 볼 수 없었다. 유성룡은 군관들에게 촌락을 수색시켜 군졸 몇 사람을 찾았다. 유성룡은 그들을 회유했다.
“나라에서 평일에 너희들을 길러온 것이 이런 때 쓰고자 한 것인데, 어찌 도망칠 수가 있겠는가. 더구나 명군이 방금 도착해 나라 일이 급하니, 이때야 말로 너희들이 힘을 다해 공을 세워야 할 시기다.”
유성룡은 공책 한 권을 꺼내서 그들의 이름을 썼다.
“훗날에 이것ㅇ로 공로(功勞)를 조사해 임금께 아뢰어 상을 줄 것이다. 만일 여기에 기재되지 않은 사람은 난리가 평정된 뒤에 낱낱이 조사해 벌을 받을 것이다.”
이 소문이 퍼져나가자 얼마 지나지 않아 이속과 군졸들이 잇달아 찾아왔다.
“소인들은 볼 일이 있어서 잠시 나간 것입니다. 어찌 감히 신역을 피할 수 있겠습니까? 저희 이름을 기재해 주십시오.”
유성룡은 곧 여러 고을에 공문(公文)을 보내 자신이 만든 것과 같은 고공책(考功册)을 만들어 시행하도록 했다. 그러자 사람들이 다투어 몰려와서 일을 했다. 유성룡은 국난을 극복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선조도 관전보 유폐 계획이 전해진 이후 요동내부 생각을 접으면서 인심이 차차 안정되기 시작했다.
이런 상황에서 명의 요동 부총병 조승훈과 유격장 사유가 명군 3천여 명을 이끌고 들어왔다. 이들은 가산 · 순안을 거쳐 7월 17일 평양성 부근까지 진군했다. 조승훈은 가산에 도착해 조선 군사에게 큰소리부터 쳤다.
“평양에 있는 왜적이 벌써 도망하지 않았는가?”
“아직 물러가지 않았습니다.”
조승훈은 술잔을 들고 하늘을 쳐다보며 말했다.
“적군이 아직 그대로 있다 하니 이것은 반드시 하늘이 나에게 큰 공을 세우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조선군 도원수 김명원은 척후장 순안 군수 황원으로부터 ‘왜적은 모두 한성 쪽으로 철수하고, 평양성에는 소수의 병력만 남아 있습니다’ 라는 고무적인 보고를 받았다.
김명원에게서 이 소식을 들은 조승훈은 평양성을 탈환할 기회라고 생각했다. 7월 19일 밤 삼경에 조승훈은 군사를 평양성으로 진군시켰다. 비가 내리는 가운데 평양성문이 활짝 열려 있음을 확인하고 성안으로 들어갔는데 보통문을 지나 대동문까지 진출했으나 별다른 저항이 없었다.
일본군이 평양성에서 퇴각한 것이라고 판단한 조승훈은 평양성 중심으로 들어갔다. 명군의 후미가 막 보통문을 통과할 무렵 갑자기 총알이 날아왔다. 순식간에 선봉장 사유와 천총 대조변과 장국충이 전사했고, 조승훈은 겨우 살아남아 도주했다. 큰비로 생긴 진흙에 질척대던 군사들은 뒤쫓아온 일본군에게 살해되었다.
큰소리를 쳤다가 뜻밖의 패전을 당한 조승훈은 남은 군사를 거느리고 순안 · 숙천을 지나 밤중에 안주까지 도주했다. 조승훈은 역관 박의검을 불러 말했다.
“우리 군사가 오늘 적병을 많이 죽이기는 했으나 불행히 사 유격이 상처를 입고 죽었으며, 천시(天時)도 또한 좋지 못해서 큰비가 내려 적병을 섬멸하지 못했으나 군사를 보충해 다시 올 것이다. 너희 재상(유성룡)에게 동요하지 말라고 이르고 부교(浮橋)도 철거하지 말도록 하라.”
그러나 동요한 사람은 유성룡이 아니라 조승훈이었다. 조승훈은 청천강과 대정강을 건너 도주한 다음 군사를 공강정 들판에 주둔시켰다. 명군이 공강정에 주둔하고 있는 이틀 동안 큰비가 내려 옷과 갑옷이 다 젖자 군사들은 조승훈을 원망했다. 유성룡은 행여 조승훈이 강을 건너 도주할까 봐 종사관 신경진을 보내 위로하고 양식도 실어 보냈으나 조승훈은 그대로 요동으로 도주하고 말았다. 조선이 믿고 있던 명군은 초전에 일본군에게 박살나고 도주해 버린 것이다. 유성룡은 인심의 동요를 걱정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이 안주에 남아 인시을 수습하겠다고 계청했다.
이 무렵 건주위 여진족이 군사를 보내 도와주겠다고 자청했다. 유성룡은 왜적 격퇴가 아무리 급하더라도 여진족 군사들을 끌어들일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여진족은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북방에서 조선군과 치열하게 싸웠기 때문이다. 조선에 들어온 후 철수를 거부하거나 조선을 집어삼키려고 나올 수도 있었다. 유성룡은 차자를 올려 불가하다고 진술했다.
“당나라는 안녹산 · 사사명이 난을 일으키자 회흘(위구르족) · 토번(티베트족)에게 원병을 청했다가 대대로 그 화를 입었습니다. 지금 우리 형세가 급하기 때문에 그들이 들어올 경우 진퇴를 우리 뜻대로 할 수 없습니다. 많은 병사와 군마를 거느리고 강 건너편에 와 주둔하면서 이름은 구원이라고 하지만 그 속뜻은 헤아리기 어려우니, 어떻게 그들의 대접을 감당하겠습니까. 변방의 장수로 하여금 좋은 말로 거절해 그치게 하소서.”
유성룡은 11월에는 정주에 머물면서 강원도 사냥꾼들을 활용하자는 내용이 담긴 차자를 올렸다.
“강원도 산속에서 사냥으로 생계를 삼는 자가 적지 않습니다. 만약 그들을 후한 상으로 불러 수풀 사이에 매복시켰다가 출몰해서 적을 죽이면 적이 왕래하는 북로는 수미가 끊겨 동남의 형세와 서로 통할 수 있습니다.”
사냥꾼 활용은 기발한 계책이었다. 이들은 누구보다 강원도 지리를 잘 알았다. 이들이 적절한 곳에 매복해 공격하면 지리에 어두운 일본군은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면 함경도에 있는 일본군은 본대와 연락이 끊기는 반면 조선은 동남, 곧 영남과 서로 연결할 수 있었다. 이 차자에서 유성룡은 영남을 주목했다.
“지금 영남 사람의 마음이 자못 분격하여 적을 토벌하려는 뜻을 갖고 있으나 군량과 백성들의 양식이 떨어지고 없습니다. 만약 영남좌도가 무너지면 우도도 지탱하지 못하고, 우도가 무너지면 호남과 호서가 차례로 침략을 받게 되어 팔도가 한 곳도 조용하지 않을 것입니다. 지금 들으니 호남의 농사가 대체로 풍년이 들었다 합니다. 호남의 관리를 두어 급급하게 구분 처리하여 구렁에 떨어진 근심을 구한 뒤에야 남방이 보전될 수 있습니다.”
유성룡은 풍원 부원군이란 명목뿐인 자리에 있었지만 민심을 수습하고 곡식 창고를 지키고, 명군에게 양식을 제공하고, 차자를 올려 군무를 진언했다. 그런 유성룡을 꼭 필요로 하는 곳이 있었다. 바로 비변사였다. 비변사는 차자를 올려 유성룡을 도체찰사로 임명하자고 건의했다.
《선조실록》 25년 12월 4일
비변사가 아뢰었다.
“풍원 부원군 유성룡은 안주에 주재하면서 이미 군사 업무를 겸해 살피도록 했는데 명호(名號)가 없어 방해되는 일이 많습니다. 도체찰사란 칭호를 주어 그에게 각군의 일을 총독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가?”
아뢴 대로 하라고 답하였다.
비변사는 선조가 유성룡을 꺼리는 것을 알기 때문에 ‘칭호가 없어 방해되는 일’ 이 많다며 명목상의 칭호를 요구하는 것처럼 청했다. 이때는 선조도 요동 내부를 사실상 포기한 상태였으므로 유성룡을 도체찰사로 삼자는 건의를 수용한 것이다.
도체찰사는 사실상 전선 총사령관이다. 평안도 도체찰사에 제수된 유성룡은 곧 군사방면에 두각을 나타냈다. 그중 하나가 일본군의 첩자 김순량을 사로잡은 것이다. 조선군의 많은 정보가 일본군에게 속속 넘어가고 있었다. 명장 조승훈의 평양성 공격 때 일본군이 매복하고 있던 것은 사전 정보가 없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정보가 새나가고 있다고 직감한 유성룡은 평안도 도체찰사부의 비밀공문을 취급하는 조선인들을 주목했다. 김순량이 체부(도체찰사부)의 비밀공문을 보여주자 일본군은 상금으로 소 한 마리를 주면서 계속 정보 제공을 요구한 것이다. 김순량을 체포해 심문한 유성룡은 각 진(鎭)에 침투한 일본군 첩자가 40여 명이나 된다는 사실을 알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조선군의 모든 정보가 속속들이 일본군에게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산천의 형세와 도로 상태는 물론 조선군의 행군 일자까지 모조리 넘어갔다. 유성룡은 간첩 명단을 모든 군진에 통보하고, 김순량의 목을 베어 조리돌렸다. 일본군이 구축한 정보망이 일거에 무너진 것이다. 《연보》는 “이로부터 간사한 무리들은 흩어져 얼마 후 명군이 대거 출병했으나 적은 알지 못했다” 고 적고 있다.
평안도 도체찰사부는 임금이 머무르고 있는 지역의 체부였으므로 그 무게가 남달랐다. 유성룡은 체부 명의로 “사방에 공문을 띄워 각기 군대를 일으켜 달려오게 하였다. 공문이 이른 곳마다 감격하여 눈물을 흘리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라는 《연보》의 기록은 각 진영이 얼마나 통합적 지휘체계의 수립을 희구했는지를 말해준다.
“너도나도 다투어 일어나 달려왔으며 승도(僧徒)들도 다 뭉쳐 적을 토벌” 하는 상황이 전개된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이여송이 이끄는 명나라 대군이 압록강을 건넜다. 4만 명이 넘는 대군이었다. 조승훈의 패전으로 일본군이 그리 만만치 않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보낸 대군이었다. 조승훈의 패전일은 7월인데 12월에야 대군을 보낸 것은 명나라의 사정도 편안치 못했기 때문이다. 임진왜란 발발 한 달 전에 몽고인 발배가 영하에서 일으킨 군사를 진압하는 것이 더 시급했기 때문이다. 명나라는 이여송을 영하로 보내 발배의 봉기를 진압하게 하는 한편 유격장군 심유경을 급파해 일본군과 교섭했다. 일본군이 압록강을 넘어 자국이 싸움터가 되는 것을 막으려고 심유경을 보낸 것이다. 화술에 능한 심유경은 소서행장과 회담 끝에 9월 1일부터 50일간 잠정적 휴전 조약을 맺는 데 성공했다. 그사이 이여송은 발배의 봉기를 진압하고 조선으로 온 것이다.
12월 말 명군이 안주에 도착하자 도체찰사 유성룡은 안주 동헌에서 이여송을 만났다. 유성룡은 《징비록》에서 이여송에 대해 “풍채가 뛰어난 장부였다” 라고 말했다. 의자에 앉자마자 유성룡은 소매 속에서 평양 지도를 꺼내 각 지방의 형세와 군사들이 들어갈 수 있는 길을 가리키자 이여송은 주의 깊게 들으며 가리키는 곳마다 붉은 점을 찍어 표시했다. 이여송은 기뻐하며 말했다.
“적이 내 눈에 환하게 보인다.”
이여송은 사실 조선인이나 마찬가지다. 그의 부친 이성량이 조선 출신이다. 아우 이여백도 영장으로 삼아 함께 출전한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인지도 모른다. 이여송은 자신감에 넘쳐 있었다.
“왜병들이 믿는 것은 조총 뿐이지만 우리는 대포를 쓰는데, 대포는 모두 5~6리를 날아갑니다. 왜적들이 어찌 당해내겠습니까?”
이여송은 유성룡이 인상 깊었는지 부채에 시를 써서 보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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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3년 1월 6일, 명군은 평양성 가까이 진출했다. 조선에서도 도원수 김명원과 순변사 이일이 이끄는 1만여 명의 평양탈환군이 합류했다. 휴정(서산대사)이 이끄는 승군들도 합류했다.
이여송은 부총병 사대수를 먼저 순안으로 보내서 일본군과 대화하는 척하라고 명했다. 며칠 후 과거 강화회담을 주도한 심유경까지 오자 소서행장은 평호관에게 군사 20여 명을 주어 맞이하게 했다. 평호관과 술을 마시던 사대수가 약조한 대로 신호를 보내자 ㅅ무어 있는 복병이 튀어나와 일본군을 죽이고 평호관을 사로잡았다. 겨우 세 명이 빠져나가 달아났는데 그제야 일본군은 명나라 군사가 온 줄 알고 소란스러워졌다. 유성룡이 김순량을 비롯한 첩자들을 체포해 정보망을 붕괴시켰기 때문에 일본군은 명의 대군이 온 사실을 알지 못한 것이다. 이여송은 틈을 주지 않고 평양성을 공격했다. 명군은 평양성 북쪽의 모란봉과 칠성문, 보통문을 공격하고 조선군은 남쪽의 함구문을 공격하는 것으로 그 역할을 분담했다. 1월 8일 조명연합군은 화포와 불화살을 성안으로 날려 보냈다. 명군의 대포소리는 땅을 진동시켰다. 자욱한 연기를 날리며 날아간 불화살은 성안 여기저기에 불을 냈다.
《징비록》
낙상지 · 오유충 등은 자기 부하 군사를 거느리고 개미처럼 성에 붙어 오르는데, 앞의 군사가 떨어지면 뒤따르는 군사가 또 올라 물러나는 군사가 없었다. 적병의 칼과 창이 고슴도치 털처럼 성가퀴 아래로 내려져 있었으나 명나라 군사가 더욱 힘차게 싸우니 적병은 능히 지탱하지 못하고 내성으로 도망갔는데 칼날에 베이고 불에 타서 죽은 군사가 아주 많았다.
명나라 군사는 성안으로 들어가 내성을 공격했다. 적병은 성 위에 토벽을 쌓고 구멍을 많이 뚫었는데, 벌집과 같았다. 구멍 틈으로 총탄을 함부로 쏘니 명나라 군사가 많이 상했다. 제독은 궁지에 빠진 적병이 죽을힘을 다하지 않을까 염려해서 군사를 거두어 성 밖으로 나가서 적군이 달아날 길을 열어주니, 적군은 그날 밤 얼음을 타고 대동강을 건너서 도주해버렸다.
1593년 1월 9일, 평양성은 일본군에게 점령당한 지 7개월 만에 수복되었다. 소서행장은 패잔병을 이끌고 봉산 → 용천 → 배천을 경유해 서울로 철수했는데, 당초 1만 8,700명의 병력은 6,600여 명으로 줄었다. 3분의 1로 토막 나고 만 것이다. 평양성 탈환을 계기로 전국의 주도권은 조명연합군으로 넘어갔다.
명군의 대거 참전이 확실해지자 유성룡은 전쟁을 단번에 끝낼 수 있는 전략을 마련했다. 평양성 수복을 예상한 일본군 섬멸작전이었다. 그는 황해도 방어사 이시언과 김경로에게 비밀리에 통지했다.
“그대들은 길가에 군사를 숨겨놓고 있다가 적군이 패해 도주할 때 요격하라. 적군은 굶주리고 피곤한 상태에서 도망가니 싸울 생각도 못할 것이므로 빠짐없이 잡을 수 있을 것이다.”
이시언은 이 지시에 따라 군사를 이끌고 황해도 중화로 이동했다. 중화는 평양 남쪽의 요충지로 일본군이 퇴각시 도주로로 이용하는 곳이다. 그러나 김경로는 다른 이유를 대며 움직이지 않았다. 유성룡이 군관 강덕관을 보내 재촉하자 마지못해 중화로 왔으나 해주에 있던 황해도 순찰사 유영경이 호위를 요청하자 해주 근처 재령으로 이동했다. 평양성 전투 하루 전이었다.
유성룡의 예견대로 패전한 소서행장과 평의지 · 현소 · 평조신 등은 패잔병들을 거느리고 도주했다. 굶주려 걷지도 못하는 형편이었으나 아무도 추격하지 않았다. 다만 이시언만이 뒤를 쫓았으나 가가이 접전하지는 못하고 낙오병 60여 명만 베어 죽였다. 유성룡은 천재일우의 기회를 놓쳤다고 한탄했다.
《징비록》
이때 왜적의 장수로 서울에 남아 있던 사람은 평수가(우희다수가, 풍신수길의 양자)뿐이었는데, 나이가 어려 군무를 주관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군무는 소서행장이 주관했고, 가등청정은 함경도에서 돌아오지 않았다.
만약 소서행장 · 평의지 · 현소 등을 사로잡았다면 서울에 있는 적군은 저절로 무너졌을 것이고, 서울의 적군이 무너졌다면 가등청정은 돌아갈 길이 끊어지고, 군사들의 마음이 어수선하고 두려워져서 반드시 바닷길을 따라 도주하려 했겠지만 능히 빠져나가지 못했을 것이다. 한강 이남의 적진은 차례로 와해되어 명나라 군사는 북을 울리고 천천히 행진해도 바로 부산에 이르러서 술을 흠씬 마시면 되었을 것이니, 잠깐 동안에 우리의 모든 강산이 숙청되었을 것이다. 어찌 그 후에도 몇 년 동안 시끄러움이 있었겠는가? 한 사람의 잘못이지만 일은 천하의 평화에 관계되었으니 진실로 통분하고 애석한 일이다.
크게 탄식한 유성룡은 김경로에게 군법을 시행하자고 선조에게 주청했고, 선조는 선전관 이순일을 보내 김경로를 목 베려고 했으나 이여송이 반대했다. 죄는 죽어 마땅하지만 무사는 죽이는 것보다 백의종군시켜야 한다는 것이었다. 김경로는 선조 30년(1597)의 정유재란 때 전주를 방어하다가 전사했다. 평양성 전투 때 도주하는 소서행장을 요격했으면 전사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평양성 탈환은 조명연합군의 공동작전이었다. 평안도 도체찰사 유성룡의 역할이 컸다는 뜻이다. 이 공로로 유성룡은 선조 26년(1593) 1월 호서 · 호남 · 영남 삼도 도체찰사에 제수된다. 일본군이 대거 남아 있는 지역의 총사령관이 된 것이다. 유성룡은 조기에 서울을 탈환해 전쟁을 끝내는 것이 상책이라고 생각했다.
평양성 탈환으로 전국(戰局)은 급변했다. 평양성 함락 소식을 들은 일본군 총대장 평수가는 전략을 세워 서울 방어에 전력을 집중했다. 공세에서 수세로 전환한 것이니 개전 9개월 만의 큰 변화였다. 평수가는 근방의 모든 병력을 서울로 결집시켰다. 이에 따라 서울 근교 김화, 금성 등지의 일본군과 철원의 일본군도 모두 서울로 집결했다. 1월 18일에는 소서행장도 서울로 쫓겨왔다. 서울에 집결한 일본군은 5만여 명이었다. 그러나 전국은 일본군에게 유리하지 않았다.
조명연합군이 50만에 달한다는 소문이 돌면서 성 내의 주민들이 크게 동요했다. 마지못해 일본군에게 협조한 주민들은 조선군에 내응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자칫 안팎의 적과 싸울까 두려워진 일본군은 1월 14일 성안의 장정들을 도륙하고 민가를 소각했다.
유성룡은 서울 탈환에 전쟁의 조기 종결 여부가 달려 있다고 보고 만반의 준비를 갖추었다. 그는 군량 확보에 많은 신경을 썼다. 명군은 군량이 준비되지 않으면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유성룡은 평안 감사 이원익에게 공문을 보내 김응서가 거느린 군사 중에서 전투할 수 없는 인원을 징발해 곡식운반을 맡기고, 평안도 세 고을의 관곡을 배로 청룡포를 거쳐서 황해도로 옮겼다. 황해 감사 유영경에게는 군사들이 행군할 연도에 곡식을 비축해 제공하게 했다.
문제는 임진강에 다리를 놓는 것이었다. 그해 겨울은 따뜻했기 때문에 강 한가운데가 얼지 않아 군사가 건널 수 없었다. 유성룡은 임진나루에 부교를 놓아 해결하기로 계획을 세웠다.
《잡저》 임진강에 부교 놓은 일을 기록함
나는 우봉 현령 이희원에게 고을 사람 몇백 명을 데리고 밤새워 먼저 가서 칡덩굴을 거두어 임진강 어귀에 모이라고 약조했다. 이튿날 아침 일찍 임진당으로 달려가서 내려다보니, 날씨가 따뜻해서 강 가운데의 얼음이 내려앉아 물이 흘렀기 때문에 강 너비가 매우 넓었다. 경기 수사 이빈과 장단 부사 한덕원 등이 모두 도착했지만 속수무책이었다. 나는 이빈에게 태만하여 준비하지 못한 책임을 추궁하여 장(杖)을 때렸다. 그리고 우봉 사람들을 불러 칡을 수납하여 모두 앞에다 쌓았으나, 여러 사람들은 무엇을 하려는지 알지 못하였다.
새끼를 꼬아 강을 가로지를 만한 동아줄 15개를 마련했다. 또 강 남쪽과 북쪽 두 언덕에 땅을 파 서로 마주보게 두 기둥을 세워 움직이지 않게 하고, 나무 하나를 눕혀 기둥 안쪽에 놓아 붙들어 매서 베틀 모양으로 만들었다. 거기에다 동아줄을 팽팽하게 늘여 강 건너 기둥의 가로지른 나무에 매어 날줄을 만들었다. 강 너비가 너무 넓어서 동아줄 중간이 반쯤 물에 잠겨 올라오지 않으니, 모두 “이는 사람 힘만 헛되게 없앨 뿐 어떻게 다리가 되겠는가” 라고 말했다.
나는 강가에 있는 군사 천여 명에게 각각 3, 4척 되는 짧은 통나무를 가지고 동아줄을 몇 번 감아 돌려 저 끝과 이 끝이 팽팽하게 조이게 하였다. 그러자 물에 잠긴 동아줄이 비로소 서면서 통나무가 서로 잇댄 것이 빗살처럼 강 위에 걸터앉아 활 모양 비슷한 둥근다리 하나가 튼튼하게 만들어졌다. 그렇게 한 뒤에 그 위에다 가는 버드나무 · 싸리 · 갈대를 섞어서 펴고 흙을 덮었다.
명군이 이것을 보고 매우 기쁘게 여겨 다리 위로 말을 달려 지나갔다. 먼저 화포와 군기를 모두 이 다리로 운반하였다.
미국의 사학자 헐버트는 한국의 4대 발명품으로 금속활자 · 거북선 · 한글 · 적교를 꼽았는데, 적교가 바로 유성룡이 만든 임진강 조교인 부교다.
부교를 통해 명나라 군사를 남하시키는 데 성공한 유성룡은 이여송에게 빨리 진격하자고 요청했다. 그러나 이여송의 생각은 달랐다. 이여송은 임진강에 다리를 놓으라고 재촉했지만 실제로 만들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다리가 없어 강을 건널 수 없다는 핑계로 남하가 늦어진 책임을 조선에 떠넘기기 위한 것이었다. 이여송은 부교가 있어 도강했으나 그리 시급히 남하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그사이에 일본군은 서울 서북 30리 지점의 벽제관 여석령 일대에 선봉대를 포진시켰다. 이곳에서 전쟁의 흐름을 바꿔놓을 벽제관 전투가 불시에 벌어진다.
명군의 선봉장 사대수와 조선의 경기 방어사 고언백이 여석령에서 일본군 백여 명의 목을 베는 승리를 거둔 것이 계기였다. 이 소식을 들은 이여송은 갑자기 집에서 부리던 가정(家丁)과 기병 1천여 기로 질풍처럼 내달았다. 혜음령을 지나다가 말이 넘어지는 바람에 굴러 떨어졌지만 이여송은 일어나 남진을 계속했다. 수백 명의 일본군이 막아서는 것을 본 이여송은 전공에 눈이 뒤집혀 유인책이란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 배후에 1만여 명의 대군이 숨어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을 때는 이미 늦었다. 이여송은 수하 병력을 거의 잃은 채 목숨을 건져 파주로 돌아왔다. 이여송은 일부러 패전 사실을 숨겼으나 한밤중에 죽은 가정들의 이름을 부르며 통곡했다.
이튿날 이여송은 군사를 임진강 북쪽 동파로 퇴각시키라고 명했다. 소식을 들은 유성룡은 우의정 유홍, 도원수 김명원과 함께 이여송의 장막으로 달려갔다. 명나라 장수들이 도열한 가운데, 유성룡이 말했다.
“이기고 지는 것은 병가의 상사입니다. 적군의 형세를 보아 다시 진격할 일이지 어찌 경솔히 움직이려 하십니까?”
“우리 군사가 어제 적병을 많이 죽였으므로 불리한 일은 없소. 다만 비가 와서 땅이 진창이라 군사들이 주둔하기에 불편하므로, 동파로 돌아가서 군사를 쉬게 했다가 다시 진격하려는 것이오.”
벽제에서 호되게 혼난 이여송은 더 이상 싸울 생각이 없었다. 유성룡과 조선 대신들이 퇴각을 계속 반대하자 이여송은 자신이 본국에 상주한 글의 초고를 내 보였다. 그 가운데 경악할 만한 글귀들이 있었다.
“… 적병은 서울에 있는 군사만 20여만 명이 되는데, 적병은 많고 우리 군사는 적어서 대적할 수가 없고 … 신(이여송)의 병이 매우 심하오니 다른 사람으로 대신하게 해주소서.”
깜짝 놀란 유성룡이 손으로 글을 가리키며 빠졌다.
“적병의 숫자가 어떻게 20만 명이나 되겠습니까?”
“내가 어찌 알 수 있겠소. 그대 나라 사람들이 하는 말이오.”
부총병관 장세작은 강력하게 퇴각을 주장하면서 유성룡 등이 물러가지 않는다며 순변사 이빈을 발길로 차고 퇴각하고 말았다.
명군의 퇴각은 끝이 없었다. 동파에 진을 치더니 다시 개성부로 퇴각하려 했다. 유성룡이 다시 반대했다.
“대군이 한번 물러가면 적군의 기세는 더욱 교만해지는 반면 우리나라는 인심이 놀라고 두려워할 것이기에, 임진강 이북 지방 또한 보전하지 못할 것입니다. 잠시 동파에 머무르며 적군의 틈을 살펴 움직이시기 바랍니다.”
이여송은 그러겠다고 대답했으나 유성룡이 나가자마자 개성으로 퇴각해버렸다. 유성룡이 진군을 독촉하면, “날이 개고 길이 마르면 당연히 진병(進兵)할 것이오” 라고 답변했지만 다시는 일본군과 싸우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명군은 개성부에서 움직이지 않으면서 귀한 군량만 축냈다. 강화도에서 조와 말먹이 풀을 가져오고, 충청도와 전라도의 조세를 배로 운반했으나 놀고먹는 대군의 식량으로는 부족했다. 이여송은 군량이 떨어지자 기다렸다는 듯이 유성룡과 호조판서 이성중 · 경기 좌감사 이정형을 뜰아래 꿇어앉히고 군량을 제때 공급하지 못한 죄를 꾸짖으며 군법을 시행하겠다고 으르댔다. 유성룡이 나라 일이 이 지경에 이른 것을 한탄하며 눈물을 흘리자 민망해진 이여송은 되레 명나라 장수들을 꾸짖었다.
“너희들이 전날 나를 따라 영하의 발배를 정벌할 때도 여러 날을 먹지 못했지만 돌아가자고 말하지 않고서 마침내 큰 공을 세우지 않았는가? 지금 조선에 와서는 며칠 동안 양식이 공급되지 않았다고 갑자기 군사를 돌이키고자 하는가? 너희들은 가고 싶으면 돌아가라. 나는 적군을 쳐서 없애지 않고서는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
말은 시원하게 했으나 싸우고 싶은 마음이 없는 장본인은 이여송이었다. 유성룡이 가까스로 강화도에서 배 수십 척을 끌어다가 군량을 댔으나 이여송은 도리어 평양으로 퇴각하려 했다. 명분이 없어서 주저하고 있던 참에 함경도에 있던 가등청정이 함흥에서 양덕과 맹산을 넘어 평양을 공격할 것이라는 확인되지 않은 첩보가 들어왔다.
“평양은 근본이 되는 곳이므로, 이곳을 지키지 못하면 대군(大軍)이 돌아갈 길이 없을 것이니 평양을 구원하지 않을 수 없다.”
이여송은 왕필적을 개성에 남겨두고는 접반사 이덕형에게 조선군도 모두 임진강 이북으로 돌아오라고 권하면서 평양으로 도주했다. 믿었던 명나라 군사가 아무 쓸모없다는 것이 밝혀진 순간이었다.
반면 일본군은 다시 사기충천했다. 명 제독 이여송을 격퇴했다는 자신감 때문이었다. 이런 자신감으로 달려든 곳이 권율이 지키는 행주산성이다. 전라도 순찰사 권율은 1592년 12월부터 수원 독성 산성을 지키고 있었다. 광주 목사로 있다가 전라도 순찰사 이광이 용인에서 일본군에 패전하는 바람에 대신 전라도 순찰사가 된 권율은 이광이 들판에서 싸우다가 패전한 것을 거울삼아 독성산성에 웅거했다. 그는 강한 적과 무모하게 맞닥뜨리기보다 전력을 보존하면서 결정적 시기를 노리는 것이 낫다고 판단했다.
그러던 중 조명연합군의 평양성 탈환에 이어 서울 탈환 작전 소식이 들리자 기회가 왔다고 판단했다. 그는 서울 근교에 군사를 이동시켜놨다가 조명연합군 본진과 함께 협공하기로 계획했다. 그는 조방장 조경을 먼저 보내 주둔할 만한 장소를 찾게 했는데, 그가 물색한 곳이 행주의 고지였다. 장수들이 행주에 성책을 쌓자고 했을 때 그는 내심 내키지 않았다. 조명연합군 본진이 남하하는 판국에 일본군이 서울 밖으로 나와 자신을 공격하지는 않을 것으로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양주에 온 도체찰사 정철이 조명연합군의 남진이 예상보다 더디다고 말해주자 생각을 바꾸었다. 일본군이 공격할 수도 있다고 생각한 권율은 조경에게 성책 축조를 명했고, 이틀간에 걸쳐서 목책을 세웠다. 돌로 쌓는 보통 산성과는 다른 방책이었다. 권율은 독성산성의 병력을 행주산성으로 옮기면서 독성산성에도 대군이 머물러 있는 것처럼 위장해 일본군의 눈을 속였다.
권율이 한성부 서쪽 20리 행주에 진을 치자 서울 주둔 일본군은 이를 함락시켜 본때를 보여주기로 결정했다. 1593년 2월 12일 여명에 일본군은 행주산성 가까이까지 다가왔다. 긴 싸움이 될 것을 예상한 권율은 군사들에게 급히 아침을 먹이고 전열을 갖추었다. 일본군은 그간 직접 진두에 나서지 않은 총대장 평수가와 평양에서 퇴각한 소서행장 군을 비롯해 총 7대 3만여 명이었고, 조선군은 1만여 명이었다.
소서행장이 이끄는 제1대는 평양에서 패주한 후 벽제관 전투에도 참가하지 않았으므로 여기에서 명예를 회복하겠다고 벼르고 있었다. 그러나 조선군의 화살과 화차 · 비격진천뢰 · 총통이 한꺼번에 불을 뿜자 소서행장 군은 궤멸상태에 빠져 퇴각하고 말았다.
제2대장 석전삼성이 뒤를 이어 공격했으나 장군 전야장강이 흉부를 관통당하는 중상을 입고 퇴각했다. 이어서 흑전장정이 이끄는 제3대가 뒤를 이었다. 그는 연안성 싸움에서 조선군이 만만치 않음을 경험했기 때문에 섣불리 돌진하지 않았다. 그는 높은 대를 세우고 그 위에서 조총을 쏘게 했다. 사거리가 짧은 화살로는 닿지 않는 곳이었다. 조방장 조경은 대포로 이를 깨트리고, 비격진천뢰를 퍼부어 제3대도 궤멸상태로 만들었다.
이를 보고 분개한 22세의 총대장 평수가가 직접 선두에 나섰다. 평수가가 죽기를 각오하고 덤벼들자 행주산성의 제1성책이 무너졌으나 그 역시 큰 부상을 입고 부하들의 부축을 받으며 퇴각했다. 그러자 제6대장 모리원강(모리 모토야스)이 다시 공세에 나서 제1성책을 넘어 제2성책 가까이 진출하면서 조선군은 위기에 빠졌다. 이때 의외의 전법이 나왔다. 눈에 재를 뿌리는 ‘재주머니 던지기’ 였다. 재주머니 전법은 유성룡이 선조 28년(1595) 겸사도 도체찰사 자격으로 선조에게 올린 장계 중에도 등장한다.
“남북 변성 위에 반드시 고운 모래와 보드라운 재를 두게 한 것은 이를 뿌려 적의 눈을 못 뜨게 하여 감히 성에 오르지 못하도록 하려 한 것입니다. 이 계책은 장난에 가까우나 실로 유익하니 또한 준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행주대첩 때 호서 · 호남 · 영남 삼도 도체찰사는 유성룡이므로 전라도 순찰사 권율은 유성룡의 직속 수하였다. 또한 권율은 유성룡이 천거한 인물이다. 행주산성 전투 때 등장한 재주머니는 권율과 유성룡의 교감의 산물일 가능성이 높다.
‘재주머니’ 로 제6대의 공격도 막아냈으나 예순 살의 노장 소조천융경이 이끄는 제7대가 다시 공격해왔다. 이제 화살마저 떨어진 조선군은 성안에 있는 돌을 던졌다. 끈질긴 투혼이었으나 일본군은 성내에 화살이 떨어진 사실을 알고 기세를 올렸다. 이때 경기 수사 이빈이 통진에서 배 2척에 수만 개의 화살을 가득 싣고 한강으로 올라오면서 전세는 다시 뒤집혔다. 이빈은 항상 유성룡과 함께 움직인 장수이므로 유성룡이 급히 보낸 무기였다. 이빈이 배후로 나타나자 포위될까 봐 두려워한 일본군은 마침내 내성에서 퇴각하기 시작했고, 조선군은 퇴각하는 일본군을 뒤쫓아 130여 급의 머리를 베어 돌아왔다. 이것이 행주대첩이다.
행주대첩은 일본군에게 커다란 충격을 주었다. 평양성 전투는 조명연합군의 공동작전이었지만 행주대첩은 조선군 단독 전투다. 정예병력 3만으로 목책성 하나를 함락시키지 못했으니 사기가 대폭 저하될 수밖에 없었다. 반면에 조선군은 용기백배했다. 조선군의 힘만으로도 일본군을 물리칠 수 있다는 사실이 입증된 것이다. 명나라도 충격이었다. 명의 부총병 사대수는 승전 소식을 듣고 권율에게 예물을 보내 치하한 다음 자신이 직접 행주산성을 방문해 권율을 만났다. 권율이 이끄는 군사들의 군기가 엄정한 것을 보고 사대수는 부하 장수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권 감사의 군사는 다른 군보다 특별히 뛰어난 군사다. 참으로 외국에 진정한 장수가 있었다.”
유성룡은 승리의 여세를 몰아 서울을 탈환하고 전쟁을 조기에 종결지을 수 있다고 판단했다. 그는 이여송에게 다시 서울 탈환 작전에 나서도록 독촉했으나 이여송은 계속 회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