징비록 - 녹후잡기
무인년(선조11년, 1578) 가을에 장성(혜성)이 하늘에 뻗쳤는데, 모양은 흰 비단과 같았으며 서쪽에서 동쪽으로 향하더니 몇 달 만에 사라졌다.
무자년(선조21년, 1588) 무렵에는 한강 물이 사흘 동안이나 붉었으며, 신묘년(선조24년, 1591)에는 죽산 대평원 뒤쪽에 있던 돌이 저절로 일어섰고, 통진현에서는 넘어졌던 버드나무가 다시 일어났다. 그러자 민간에는 “장차 도읍을 옮길 것이다” 라는 헛소문이 퍼졌다.
또 동해의 물고기가 서해에서 생산되었는데 이 물고기는 점차 한강까지 올라왔고, 청어(靑魚)는 본내 해주에서 생산되었으나 10여 년 동안 전혀 생산되지 않았으며, 요해(요동만)로 옮겨 가서 생산되니 요동 사람들이 이를 신어라고 불렀다.
또 요동 팔참에 거주하는 백성들이 어느 날 아무런 이유없이 놀라며 “도적이 조선에서 들어오고, 조선 왕자의 십정 교자가 압록강에 이르렀다” 하면서 서로 전하여 말하니, 늙은이와 어린이는 산에 올라가기도 했으며 며칠 만에야 진정되었다고 한다.
또한 우리나라 사신이 북경에서 돌아오면서 금석산에 있는 성이 하(河)씨인 사람의 집에서 유숙했는데, 그 집주인이 말하기를 “조선의 역관이 나에게 ‘너의 집에 3년 된 술과 5년 된 술이 있거든 아끼지 말고 즐겁게 마시며 놀아라. 오래지 않아 난리가 나면 너희들이 비록 술이 있더라도 누가 그것을 마실 것인가?’ 하니 이 말을 들은 요동 사람은 조선이 다른 뜻이 있는가 의심하여 많이 놀라고 의심하고 있다” 라고 했다.
사신이 돌아와서 임금에게 그 일을 아뢰니, 조정에서는 역관 중에 말을 만들어 일을 일으키고 본국을 모함한 사람이 반드시 있을 것이라 판단하여 서너 사람을 체포해 인정전 뜰에서 국문하고 압슬화형(죄인을 심문할 때 널빤지로 무릎 위를 누르고, 달군 쇠로 허벅지를 지지는 형벌)을 썼으나 모두 승복하지 않고 죽었다. 이것이 신묘년 무렵의 일인데 명년(선조25년, 1592)에 드디어 왜변이 일어났다. 이러한 일을 볼 때, 큰 난리가 발생하기 전에는 사람이 비록 깨닫지 못하더라도 여러 가지 조짐이 나타나는 것을 알 수 있다. 흰 무지개가 해를 꿰뚫고 금성(金星)이 하늘을 지나간 것이 어느 해든지 없을 때가 없었으나, 사람들은 예사로 보고 있었다.
또 도성 안에 항상 검은 기운이 있어 연기도 아니고 안개도 아닌 것이 땅 바닥에 서리어 하늘까지 닿았는데 이같은 것이 거의 10여 년이나 계속되었으며, 그것 외에 다른 변괴도 다 기록하기 어려웠다. 하늘이 사람에게 경고함은 매우 간절하나 다만 사람들이 능히 살피지 못할 뿐이었다.
두보* 시에 다음과 같은 것이 있는데, 대개 괴이한 일을 기록한 것이다.
장안성 위 머리 흰 까마귀는, 연추문 위로 밤에 날아와 부르짖네
또 인가를 향해 큰 집을 쪼니, 집 밑의 달관이 오랑캐를 피해가네
※ 두보 : 당나라 현종 때의 대시인으로 안록산의 난을 피해 촉중에서 유랑 생활로 일생을 마쳤는데, 그의 시는 시사(時事)를 개탄하는 우국시가 많아 세상에서 시사(詩史)라고 일컫는다.
임진년 4월 17일에 적군이 침입했다는 보고가 이르니 조정과 민간에서 매우 황급하여 허둥지둥했다. 그 때 갑자기 괴이한 새가 궁정의 후원에서 울다 공중으로 날아다니면서 가까이 있다가 멀리 있다가 하니, 새는 단 한 마리뿐인데도 성안에 가득 차서 사람들이 이 새소리를 듣지 않은 이가 없었다. 종일토록 밤새도록 그 우는 소리가 멈추지 않았다. 이와 같은 지 10여 일 만에 임금께서 피란하시고 적군이 도성에 들어와 궁궐과 묘사(종묘와 사직), 관청, 민간의 집들이 아무것도 없이 텅 비게 되었으니, 아아 그것이 또한 매우 괴이한 일이었다.
또 5월에 내가 임금을 따라 평양에 이르러 김내진의 집에 우거했는데, 김내진이 나에게 말하기를 “몇 해 전에 승냥이가 여러 번 성안에 들어왔으며, 대동강 물이 붉었는데 동쪽은 매우 탁하고 서쪽은 맑더니 이제 과연 이런 변고가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하였다. 이때 적군이 아직 평양에 이르지도 않았는데, 나는 이 말을 듣고는 잠잠히 대답하지 않았으나 마음속으로는 좋아하지 않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평양 또한 함락되었다.
대개 승냥이는 들짐승이므로 성안 시가지에 들어온다는 것은 맞지 않는 일이다. 그러나 춘추(공자가 산정, 편차한 노나라의 역사서)에 “구욕새가 와서 집을 짓고, 익새 여섯 마리가 날아가고, 순록이 많으며, 물여우가 있다” 라고 기록된 것처럼 그 반응이 없는 것이 드문 법이다. 하늘이 인간에게 현저하게 계시했으며 성인(聖人)이 후세에 매우 간절히 경고했으니 두려워하고 조심하지 않아서야 되겠는가.
또 임진년 봄 · 여름 무렵에는 목성이 미성과 기성을 지켰다. 미성과 기성은 곧 연나라 분야이며, 옛날부터 우리나라는 연나라와 분야가 같다고 했다. 이때 적병이 나날이 앞으로 닥쳐서 인심이 어수선하고 두려워하여 어찌할 줄 몰랐는데, 어느 날 임금께서 “복성이 지금 우리나라에 있으니 적군을 두려워할 것이 없다” 라는 교지를 내리셨다.
아마도 임금께서는 인심을 진정시키고자 이 말을 인용하셨을 것이다. 그러나 그 후에 비록 도성을 잠시 동안 잃기는 했으나 마침내 예전의 나라를 회복할 수 있었고 옛 도성에 곧바로 돌아오게 되었다. 또한 적의 괴수 풍신수길은 끝까지 흉역을 부리지 못하고 저절로 죽었다. 이것이 어찌 우연으로 된 것인가. 천운(天運)이 아닌 것이 없었다.
왜적은 가장 간사하고 교활하다. 그들이 전쟁하는 것은 거의 한 가지 일도 남을 속이려는 꾀에서 나오지 않은 것이 없었다. 그러나 임진년의 일을 살펴보면, 서울에 들어올 때까지는 잘했으나 평양에서는 졸렬했다고 할 수 있다. 우리나라는 태평세월이 백 년 동안이나 계속되어 백성들이 전쟁을 알지 못했다. 갑자기 왜병이 이르렀다는 말을 듣고 어찌할 줄을 모르고 엎어지고 넘어져서 원근 지방이 바람에 쓰러지듯이 모두 넋을 잃었던 것이다. 왜병은 멈출 수 없는 기세를 타고 열흘 만에 바로 서울에 이르렀다. 지혜 있는 사람이 미처 꾀를 내지 못하고, 용맹 있는 사람이 미처 결단을 내리지 못하며, 인심이 무너져 수습할 수 없게 되었다. 이것은 병가(兵家)의 훌륭한 꾀이며 적군의 교묘한 계책이었다. 이런 까닭으로 잘했다는 것이다. 이에 적군은 상시 이기는 위력만 믿고 그 후방은 돌아보지도 않고서 여러 도에 흩어져 나가서 마음껏 미쳐 덤볐다. 그러나 군사가 나뉘면 세력이 약해질 수밖에 없다. 천 리에 진영을 늘어세우고 시일을 허비하면서 오랫동안 버텼으니, 이른바 “센 쇠뇌로 쏜 화살도 먼 데까지 나가서 힘이 다하면, 노나라에서 생산된 얇은 깁(노나라에서 생산되는 얇은 깁)도 뚫을 수 없다” 는 옛말과, 장숙야*가 말한대로 “여진은 용병할 줄을 알지 못한다. 어찌 고립된 군사가 적지에 깊이 들어갔다가 잘 돌아갈 수가 있겠는가” 라는 상황과 흡사했다. 이리하여 명나라 군사 4천 명이 평양을 쳐서 부수자 여러 도에 있던 적군 또한 모두 기운이 꺾여버렸다. 비록 서울은 아직 점거하고 있었지만 대세는 이미 움츠러들었다. 사방에 있던 우리 백성들도 곳곳에서 맞아 쳐서, 적군은 앞뒤가 서로 구원할 수 없게 되어 마침내 도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런 까닭으로 평양에서는 졸렬했다는 것이다.
☞ 장숙야 : 중국 송나라 사람으로 휘종 때 벼슬이 용도각학사에 이르렀다. 정강4년(1126)에 금병이 남쪽으로 침입하자 장숙야는 등주남도도총관으로서 근왕병을 일으켰으며, 휘종이 금병에게 붙잡혀 북방으로 갈 때는 휘종을 따라가다가 도중에서 먹지 않고 목구멍을 움켜쥐고 죽었다.
아아, 적군의 실책은 우리 편에게는 다행이었다. 그러나 진실로 우리나라에 한 사람이라도 장수다운 장수가 있어 군사 몇 만 명만 거느리고 시기를 보아 기계를 썼다면, 장사를 쳐서 끊어서 그 허리와 등골을 갈라놓게 되었을 것이다. 평양에서 패전한 적군을 쳤다면 적의 큰 장수를 힘들이지 않고 잡았을 것이고, 서울 이남에서 적군을 쳤다면 장차 수레 한 척도 돌아가지 못하게 했을 것이다. 이렇게 된 후에야 적군은 마음이 놀라고 담이 떨어져서 수십, 수백 년 동안이나 감히 우리를 바로 보지도 못할 것이며 다시는 뒷걱정이 없었을 것이다.
그 당시에 우리는 너무 쇠약하여 힘으로 능히 이것을 처리하지 못했으며, 명나라 여러 장수들도 이 계책을 쓸 줄 몰라 적군으로 하여금 조용히 가고 오게 했던 것이다. 이 때문에 적이 조금도 징계하거나 두려워하지 않고 갖은 방법으로 이것저것 요구하게 되었는데, 그제야 가장 졸렬한 계책을 써서 봉공으로 적군을 견제하고자 했으니 탄식할 일이며 애석한 일이다. 지금 와서 생각하더라도 사람들이 팔을 걷어붙이고 분격할 일이다.
옛날에 조조*가 병사(兵事)에 관하여 진언하기를 “군대를 사용하여 전장에 나가서 교전할 때 급한 것이 세 가지가 있는데, 첫째는 지형을 얻는 것이고, 둘째는 군졸이 명령을 잘 듣고 익히는 것이며, 셋째는 병기가 예리한 것이니, 이 세 가지는 용병의 대요이며 승부가 결정되는 것이므로 장수 된 사람은 알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하였다. 그런데 왜놈은 전쟁하는 데 익숙하고 무기가 예리하며, 예전에는 없던 조총을 지금은 가지고 있다. 조총은 멀리 가는 힘과 명중시키는 기교가 화살보다 여러 갑절이나 된다.
☞ 조조 : 중국 한나라 경제 때 사람으로 신불해 · 상앙의 형명학을 배워 문제 때 태자가령이 되고, 경제 때 어사대부가 되어 더욱 중용되었다.
우리가 만약 평탄하고 넓은 들판에서 만나 두 진이 서로 마주쳐서 법대로 교전했다면 당적하기가 매우 어려웠을 것이다. 대체로 화살의 능력은 백 보에 불과하지만 조총은 능히 수백 보까지 미치고, 날아오는 것이 바람과 우박 같아 그것을 당해내기가 쉽지 않은 것이 결정적이었다. 그러나 지형을 먼저 선택하여 산이 험준하고 숲이 빽빽한 곳에 사수를 분산, 매복시켜 적군에게는 그 형체를 보이지 않게 하고 좌우편에서 한꺼번에 쏘았다면, 저들이 비록 조총과 창 · 칼이 있더라도 모두 소용없게 되어 크게 승리했을 것이다.
지금 한 가지 일을 예로 들어 이를 증명하고자 한다. 임진년에 적군이 서울에 들어와서 날마다 성 밖에서 노략하여 원릉까지도 보전할 수 없었는데, 고양 사람 진사 이로는 활을 조금 쏠 줄 알고 담력이 있었다. 어느 날 동반한 두 사람과 함께 각기 활과 화살을 가지고 창릉 · 경릉에 들어갔는데 뜻밖에 적군이 많이 나와서 산골 속에 가득했다. 이로 등은 어찌할 계책이 없어 등나무 우거진 숲 속에 도망쳐 들어갔는데, 적군이 와서 수색하면서 배회하고 엿보았다. 이로 등은 숲 속에서 문득 활을 쏘았는데, 시위 소리가 나자 모두 곧 꺼꾸러졌다. 또 그들이 자리를 옮겨 왔다 갔다 하면서 여기 번쩍, 저기 번쩍 하자 적군은 더욱 더욱 헤아릴 수 없게 되었다. 이로부터 적군은 가는 곳마다 우거진 수풀만 보면 멀리서 피해 달아났고 감히 가까이 오지 못했으므로 창릉과 경릉 두 능은 보전되었다. 이 일로 미루어본다면 지형을 얻고 얻지 못하는 데 성패가 따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적군이 상주에 있을 때 신립 · 이일 등이 만약 이 계책을 쓸 줄 알아서 먼저 토천과 조령의 삼십수 리 사이에 사수 수천여 명만 매복시켜 적군이 우리 군사가 많은지 적은지 헤아리지 못하게 했더라면 적군을 제어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오합지졸과 훈련되지 않은 군사로 그 험지를 버리고 평지에서 승부를 겨루었으니, 그가 패전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내가 용병의 기밀에 대하여 앞서 상세히 말했는데, 지금 또다시 특별히 기록하여 훗날의 경계로 삼는 것이다.
성(城)이란 도적을 막고 백성을 보호하는 곳이므로 마땅한 견고함을 으뜸으로 한다. 옛날 사람이 성의 구조를 말할 때 모두 치(雉)에 대해서 말하고 있으니 이른바 천 치, 백 치라는 것이 이것이다.
나는 평상시에 조솔하게 글을 읽었으므로 치가 무슨 물건인지 알지 못하고, 매양 살받이터가 이에 해당하는 것인 줄로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살받이터가 다만 천 개, 백 개뿐이라면 그 성은 너무 작아서 능히 여러 사람을 용납할 수 없을 것이니 대체 어떻게 쓰겠는가 하고 일찍부터 의심했다. 그러다 왜변이 일어난 후에 비로소 척계광*의 《기효신서》를 얻어서 읽고는 그제야 치가 살받이터가 아니라 지금의 곡성 · 옹성 임을 알게 되었다.
☞ 척계광 : 명나라 세종 때의 명장으로 가정년간에 절강첨장으로서 강서 · 복건을 침범한 왜구를 토평했고 전공이 특출하여 복건총독에 승진되고, 위명을 남방에 떨쳐 사람들이 ‘척가군’ 이라 불렀다.
만약 성에 곡성 · 옹성이 없다면 비록 사람마다 한 살받이터를 수비하고 살받이터 사이에 방패를 세우고 외면(外面)에서 오는 화살과 돌을 가려 막더라도 적군이 성 밑에 와서 붙으면 이를 보고서도 막을 수가 없다.
《기효신서》에 의거하면 50타 마다 1치를 두어 밖으로 2~3장이나 나오게 했는데, 두 개의 치 사이의 거리는 50타이며, 1치가 각각 25타를 점령하게 된다. 따라서 화살이 나가는 힘이 한창 강하고 좌우로 돌아보면서 쏘기가 편리하므로, 적군이 성 밑에 와서 붙을 수 없게 된다.
임진년 가을에 나는 안주에 머물러 있었는데, 적군은 평양에 있었다. 그때 적군이 만약 단시일에 서쪽으로 내려온다면 행재소 전면에는 한 곳도 가로막을 곳이 없었다. 그래서 그 힘은 헤아리지 않고서 먼저 안주성을 수축하여 이것을 지키려고 생각했다. 중양일(9월 9일)에 우연히 청천강 가에 나가 주성을 돌아보고, 잠잠히 앉아서 깊이 생각한 지 한참 만에 문득 한 가지 계책을 생각해냈다. 그것은 바로 성 밖의 지세를 따라 별도로 뾰족하게 나온 성을 치의 구조와 같게 쌓는 것이었다. 그 속은 비워서 사람을 수용하도록 하며, 전면과 좌우에 포혈을 뚫어 그 안에서 포를 쏘게 하고, 위에는 마주 보는 누를 세우되 누의 상거는 천여 보 이상 되도록 하며, 대포 속에는 새알과 같은 탄환을 서너 말이나 넣어두었다가 적군이 성 밖에 모여들 때 대포의 탄환을 두 곳에서 번갈아 발사하면 사람과 말은 말할 것도 없고 비록 쇠와 돌이라도 가루가 되지 않는 것이 없을 것이다. 이렇게 되면 다른 성가퀴에는 비록 수비하는 군사가 없더라도 다만 수십 명만으로 포루를 지키게 되어 적군은 감히 가까이 오지 못할 것이다.
이것이 실상 성을 지키는 기묘한 방법이므로, 그 구조는 비록 치를 모방했지만 공효는 치보다 만 배나 나을 것이다. 대개 천 보 안에 적군이 감히 가까이 오지 못한다면, 이른바 운제 · 충차라는 것도 모두 소용없게 될 것이다.
이 일은 내가 우연히 생각해내서 그때 곧바로 행재소에 계문하고, 그 후에 경연에서도 여러 번 제안했다. 또 사람들에게도 그것이 반드시 쓸 만하다는 것을 보이려고 병신년(선조29년, 1596) 봄에 서울 동쪽 수구문 밖의 적당한 곳을 골라 돌을 모아 만들다 성취하지 못하는 동안 이론이 부산하게 일어나 그만 폐지하고 만들지 못했다.
훗날에 만약 원대한 계책을 가진 사람이 있어, 나 같은 사람의 말이라고 버리지 말고 이 구조를 정비하고 실행한다면 적군을 방어하는 방법으로는 이익이 적지 않을 것이다.
내가 안주에 있을 때, 우인 김사순(사순은 김성일의 자)이 경상 우감사가 되었는데, 나에게 서신을 보내 “진주성을 수리하여 죽기를 각오하고 성을 지킬 계획입니다” 하였다. 이에 앞서 적군이 전에 한 번 진주를 침범했다가 이기지 못하고 물러갔으므로, 나는 사순에게 답서하기를 “적군이 반드시 조만간에 와서 보복할 것인데, 온다면 반드시 군사가 많이 올 것이니 수비하기가 예전보다는 좀 더 어려울 것입니다. 마땅히 포루를 세워 대비해야만 걱정이 없을 것입니다” 하고, 드디어 서신에 그 방법에 대하여 자세히 말했다.
계사년 6월 적군이 진주성을 공격한다는 말을 듣고 종사관 신경진에게 이르기를 “진주의 일이 매우 위태하니 다행히 포루가 있으면 지탱할 수 있겠으나 그렇지 못하면 지키기가 어려울 것이니라” 하였다.
얼마 후에 합천으로 내려가서 진주가 이미 함락되었다는 말을 들었다. 사순의 친우인 단성 현감 조군 종도가 나에게 말하기를 “지난해 사순과 함께 진주에 있을 때, 사순이 당신의 서신을 보고 좋아 뛰면서 기계(奇計)라 일컫고, 곧바로 그 막하인 사우 몇 사람과 함께 성을 순시하고 그 지형에 따라 마땅히 여덟 곳에 포루를 설치해야 될 것이라 하면서 나무를 베어 강물에 띄워 내려 보내도록 독려했습니다. 그런데 고을 백성들이 그 역사를 꺼려서 ‘이전에는 포루가 없어도 오히려 성을 수비하고 적군을 물리쳤는데, 지금은 무엇 때문에 사람을 괴롭히는가’ 했으나, 사순은 그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그 후 재목을 준비하고 역사를 시작한 지 며칠이 되었는데, 때마침 사순이 병이 들어 영영 일어나지 못했고 그 일은 마침내 중지되었습니다” 하면서, 함께 한 차례 통석하게 여기고 헤어졌다.
아아, 사순의 불행은 곧 한 성과 무수한 사람들의 불행이었으니, 이것은 진실로 운수이며 인력으로 어떻게 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임진년 4월에 적군이 내지(內地)의 주군을 잇달아 함락시키니, 우리 군사는 풍문만 듣고도 무너지고 흩어져서 감히 교전하는 사람이 없었다. 비변사의 여러 신하들은 날마다 대궐에 모여 방어할 계책을 강구했으나, 아무런 좋은 계책이 없었다.
어떤 사람이 건의하기를 “적군은 창과 칼을 잘 쓰는데 우리는 이것을 막을 만한 튼튼한 갑옷이 없으므로 능히 당적해내지 못합니다. 마땅히 두꺼운 쇠로 온몸을 싸는 갑옷을 만들어 형체가 보이지 않도록 하여 이것을 입고 적진으로 들어간다면 적군은 찌를 틈이 없으므로 우리가 이길 수 있을 것입니다” 라고 했다.
여러 사람들이 “그 말이 맞겠다” 고 하여, 이에 공장을 많이 모아 밤낮으로 쇠를 쳐서 만들었다. 나는 홀로 이 일을 옳지 않게 여겨서 “적군과 싸울 때는 구름처럼 모이기도 하고 새 떼처럼 흩어지기도 하니 무엇보다 빠르게 움직이는 것이 중요한데, 온몸을 싼 두꺼운 갑옷을 입는다면 그 무게를 이길 수 없으므로 몸을 쉽게 움직일 수 없을 테니 어떻게 적군을 죽이기를 바랄 수 있겠는가” 하였더니, 며칠 후에 그것이 쓰기 어렵다는 걸 깨닫고 마침내 그만두었다.
또 대간이 대신에게 회견을 청하고 계책을 말했는데, 그중 한 사람이 성난 기색으로 대신이 무모하다고 지척하기에 그 자리에서 무슨 계책이 있느냐고 물었더니, 그 사람이 대답하기를 “어째서 한강 가에 높은 누각을 많이 설치해서 적군을 못 올라오게 하고, 우리만 내려다보고 활을 쏘도록 하지 않으십니까?” 하였다. 그러자 어떤 사람이 “적군의 철환 또한 올라오지 않는다더냐?” 라고 하여, 그 사람은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하고 물러났고, 이 말을 들은 사람들은 서로 전하여 웃음거리가 되었다.
아아, 전진(戰陣)은 일정한 형세가 없으며 전투는 일정한 방법이 없으므로, 시기에 따라 적당히 처리하여 나아가고 물러가며 합치고 흩어져서 기계를 쓰는 것이 한이 없는 것은 다만 장수에게 달려 있을 따름이다. 그렇다면 온갖 말과 계책도 소용이 없으며 오직 한 사람의 장수 될 인재를 얻는 것이 중요할 뿐이고, 조조가 진술한 세 가지 계책은 더욱 간절하므로 한 가지도 빠뜨려서는 안 되지만, 그 나머지의 어수선한 의견은 무슨 도움이 되겠는가?
대체로 국가에서는 사변이 없을 시기에 장수를 선택하고 사변이 있을 즈음에 장수를 임명하되, 선택은 마땅히 정밀해야 하고 임명은 마땅히 전임(專任)해야 된다. 그런데 그 당시 경상도의 수군장은 박홍과 원균이고 육군장은 이각과 조대곤이었으니 이것은 벌써 장수 될 인재의 선택이 아니었다. 그 후 사변이 발생하자 순변사 · 방어사 · 조방장 등은 모두 조정에서 명령을 받아 왔기 때문에 각기 마음대로 결단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어 제 마음대로 호령을 행하고 제 멋대로 진퇴하여 서로 통속이 되지 않았기에 ‘여러 사람이 주관하면 패전한다’ 는 경계를 범했으니 일이 어떻게 성공할 수 있겠는가. 또한 자기가 양성한 군사를 자기가 지휘하지 않고 자기가 거느린 군사는 자기가 양성한 군사가 아니었으므로 장수와 군사가 서로 알지 못하게 되었으니, 이것은 모두 병가(兵家)의 대기(大忌)였다.
어째서 앞 수레가 이미 엎어졌는데 후에 뜯어 고칠 줄도 모르고 지금까지 오히려 엎어진 바퀴의 자국을 따르고 있으니, 이같이 되고도 무사하기를 바라는 것은 다만 요행만을 믿는 노릇이다. 이것을 말한다면 그 설명이 너무 길어서 한두 말로 끝낼 수 없으니 아아, 위태한 일이다.
계사년 정월에, 명나라 군대가 평양에서 출발했는데 나는 명나라 군대보다 앞서 출발했다. 이때 임진강의 얼음이 녹아서 건널 수 없었으므로, 제독(이여송)은 잇달아 사람을 보내 부교(배다리)를 만들도록 독촉했다.
내가 금교역에 이르렀을 때 황해도의 수령 등이 아전과 백성을 거느리고 대군(명군)을 영접, 호군하려고 모여들었는데 그 사람들이 들에 가득했다. 우봉 현령 이희원을 불러 거느린 고을 사람이 몇 명인가 물었더니 “수백 명에 가깝습니다” 라고 하였다. 나는 분부하기를 “그대는 빨리 고을 사람들을 거느리고 산에 올라가서 칡을 캐어낸 후 내일 나와 임진강 어귀에서 만나기로 하되, 때를 어겨서는 안 될 것이다” 하니, 이희원은 떠나갔다.
이튿날 나는 개성부에서 유숙하고, 그 다음 날 새벽에 덕진당으로 달려가 보니 강의 얼음이 아직 완전히 녹지는 않았고 얼음 위에 몸 반 길이나 되는 석얼음이 흐르고 있어서 하류의 배가 올라오지 못했다. 경기 순찰사 권징, 수사 이빈, 장단 부사 한덕원과 창의 추의군 천여 명이 강변에 모였으나, 모두 어찌할 도리가 없어 꼼짝 못하고 있었다.
내가 우봉 사람을 불러 칡덩굴을 가져오게 하여 이것으로 큰 동아줄을 꼬아 만들자, 그 크기가 서너 아름이나 되고 길이가 강에 가로 걸칠 만했다. 강의 남쪽과 북쪽 언덕에 각각 두 개의 기둥을 세워 서로 마주 보게 하고, 그 안에 가로지른 나무 하나를 눕혀두고 큰 동아줄 열다섯 가닥을 당겨서 강면에 펴 걸쳐서 양쪽 끝을 가로지른 나무에 매었다. 그러나 강면이 너무 넓어 동아줄이 반쯤 물에 잠기고 일직선으로 강면 위에 떠오르지 않자, 사람들은 헛되이 인력만 소비했다고 말했다. 내가 천여 사람들로 하여금 각자 2~3자나 되는 짧은 막대기를 가지고 칡 동아줄 속에 비벼 넣어서 서너 바퀴를 힘껏 뒤틀게 했더니, 동아줄이 서로 당겨져서 물위로 떠올라 빗살처럼 가지런히 배열되고, 그제야 여러 동아줄이 긴속되어 꾸부렁하게 높이 떠올라 엄연히 다리 모양으로 되었다. 세버들을 베어 그 위에 펴놓고 풀로 두껍게 덮고 흙을 깔아놓았다.
명나라 군사가 이것을 보고 크게 기뻐했으며, 모두 채찍을 쳐들고 말을 달려 지나갔고 포차와 병기도 모두 뒤따라 건너갔다. 조금 후에 건너가는 사람들이 더욱 많아지자 긴속된 동아줄이 늘어져 수면과 가까워졌으나, 대군은 얕은 여울을 따라 건넜기에 별일은 없었다.
내가 생각해보건대, 그때 창졸간에 칡덩굴을 많이 준비하지 못했지만, 다시 그것을 배로 하여 동아줄 30가닥을 만들었다면 더 긴속되어 늘어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후에 남북사를 읽어보니 제나라 군사가 양나라 임금 규를 쳤을 때 규가 주나라 총관 육등과 함께 막아 싸웠는데, 주나라 사람이 협구 남쪽 언덕에서 안촉성을 쌓고는 큰 동아줄을 강 위로 가로질러 당겨 매고서 갈대를 엮어 다리를 만들어 군량을 운반하여 건넜으니 그것이 바로 이 방법이었다. 나는 스스로 생각하기를 ‘내가 우연히 생각해서 이 계책을 알아낸 것이지만, 옛날 사람이 이미 시행한 줄은 미처 알지 못했다’ 여기면서 한번 웃기까지 했는데, 이내 이 일을 기록하여 뒷날 창졸히 대처할 때 도움이 되고자 하는 것이다.
계사년 여름에 나는 병으로 한성 묵사동에서 누워 있었는데, 어느 날 명나라 장수 낙상지가 나를 와소로 방문하고 매우 친절히 문병하고는 이내 말하기를 “조선은 지금 국력이 미약한데 적군은 아직 조선 나라 안에 있으니, 군사를 교련하여 적군을 방어하는 것이 가장 시급한 일입니다. 마땅히 지금 명나라 군사가 돌아가지 않을 때를 이용하여 군사 교련하는 법을 배워 익혀서, 한 사람이 열 사람을 가르치고 열 사람이 백 사람을 가르치면 몇 해 동안에 모두 정련된 군사가 되어 나라를 지킬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나는 그 말에 감동하여 곧바로 행재소에 빨리 아뢰고, 이내 데리고 있던 금군 한사립을 시켜 서울 안에서 군사를 모집하여 70여 명을 얻어 낙공(낙상지)에게 보내 가르쳐주기를 청했더니, 낙상지가 막하 중에 진법을 잘 아는 사람 장육삼 등 10명을 뽑아 교사로 삼아 밤낮으로 창술 · 검술 · 낭선 등의 기술을 연습시켰다.
잠시 후에 내가 남방으로 내려가게 되어 그 일도 곧 폐지되었으나, 임금께서 장계를 보시고 비변사에 내려보내 별도로 도감을 설치하여 훈련하도록 하고, 좌상 윤두수가 그 일 전체를 주관하도록 했다.
그 해 9월에 내가 남방에서 행재소로 불려가다가 임금의 행차를 해주에서 맞이하여 모시고 서울로 돌아오던 중, 연안에 이르러 다시 나에게 윤두수를 대신하여 도감 일 전체를 주관하도록 하라고 명하셨다.
이때 서울에 기근이 심해서 나는 용산창의 당속미(중국에서 보내온 좁쌀) 1천 석을 방출하도록 요청하고 매일 한 사람에게 곡식 두 되를 주도록 했는데, 모집에 응하는 사람이 사방에서 모여 들었다. 도감 당상 조경은 곡식이 부족하여 능히 줄 수 없기 때문에 법을 만들어 제한하고자 하여, 큰 돌 한 개를 놓아두고 모집되기를 원하는 사람에게 먼저 돌을 들게 하여 힘을 시험했다. 또 높이 10척이나 되는 흙담을 뛰어넘게 하여 넘는 사람은 들어오게 하고 넘지 못하는 사람은 들어오지 못하게 했다. 그런데 사람들이 굶주려 피곤하여 기운이 없으므로 합격하는 사람은 10명 중 1~2명이고, 어떤 사람은 시험을 보고자 해도 보지 못해서 도감문 밖에서 넘어져 죽기까지 했다.
오래지 않아 수백, 수천 명을 뽑아 파총과 초관을 세워서 부서를 나누어 거느리게 했다. 또 조총 쏘는 법을 가르치고자 했으나 화약이 없었다. 군기시 장인 대풍손이 적진에 들어가서 화약을 많이 만들어 적군에게 주었기 때문에 강화에 가두어두었다가 장차 죽이려 했는데, 내가 특별히 그 죽음을 용서해주고 염초를 구워서 속죄하도록 했다. 그 사람이 감격하고 송구해하며 힘을 다하여 하루 동안에 화약을 구워 만든 것이 몇 십 근이나 되었다. 이것을 날마다 각 부서에 나누어주어 밤낮으로 총 쏘기를 익히도록 하고 잘하고 못하는 것을 등급을 매겨 상벌을 시행했다. 한 달 후에는 능히 나는 새라도 맞히는 정도가 되었으며, 서너 달 후에는 항복한 왜적이나 중국 남방의 조총 잘 쏘는 사람과 서로 비교하여도 그보다 못한 사람은 없었고, 어떤 사람은 그보다 낫기까지 했다.
나는 차자를 올려 “군량을 조치하고 더욱 군사를 모집하여 1만 명이 다 차거든 오영을 설치하고, 영마다 각각 2천 명을 소속시켜 매년 절반은 성안에 남겨두어 교련시키고 절반은 성 밖에 내보내 널찍하고 비옥한 땅을 선택하고 둔전을 설치하여 곡식을 저장토록 하되, 번갈아 교체시킨다면 몇 해 후에는 군량의 근원이 튼튼해지고 국가의 근본도 견고하게 될 것입니다” 하였다. 임금께서 그 의론을 병조에 내려보냈으나 곧바로 시행하지 않아, 결국 효과를 보지 못했다.
심유경은 평양에 온 이후로 적군의 진중에 드나들어 노고가 없지는 않았으나, 강화를 표방한 까닭에 우리나라에서는 그를 좋아하지 않았다. 맨 마지막에는 적군이 부산에 남아 있으면서 오래도록 바다를 건너가지 않고 있던 중에, 이 책사(이종성)가 도주해 본국으로 돌아갔으므로 중국에서는 심유경을 부사로 임명해 정사인 양사(양방형)와 함께 왜국에 들여보냈으나 끝내 요령을 얻지 못한 채 돌아왔으며, 소서행장과 가등청정 등도 다시 돌아와서 해변에 진을 치게 되었다. 이에 중국과 우리나라에서도 의론이 떠들썩하여 모두 심유경에게 허물을 돌리고, 심한 사람은 간혹 “심유경이 왜적과 공모하여 배반할 낌새가 있다” 라고 했다.
우리나라 승인 송운(유정)이 서생포에 들어가서 가등청정을 만나보고 돌아와서 말하기를 “적군이 명나라를 침범하려 하며 말하는 것이 매우 이치에 어긋나니, 곧바로 그 사유를 기록하여 명나라 조정에 아뢰야 될 것입니다” 하니, 이 말을 들은 사람들은 더욱 화를 냈다. 심유경은 자기에게 화가 닥칠 것을 깨닫고 걱정과 두려움으로 어찌할 줄 몰랐다. 이에 김명원에게 다음과 같은 서신을 보내 일의 시말을 서술하여 자기의 행위를 변명했다.
세월이 빨리 흘러가니 지나간 일이 어제와 같습니다. 생각건대 몇 해 전에 왜적은 귀국을 침구하여 바로 평양에까지 닥쳤으니, 적군의 안중에는 벌써 조선 팔도가 없었던 것입니다. 노후(심유경 자신)는 황제의 명령을 받들어 왜적의 실정을 정탐하고 사기를 보아 이를 제어했습니다. 족하(김명원)와 이 체찰(이원익)을 서로 만난 것도 난리 중이었지만, 평양에서 서쪽 일대의 지역은 거주민들이 유리, 신고하여 바늘방석에 앉은 것처럼 되어 아침에 저녁 일을 예측하지 못하는 형상임을 내 눈으로 직접 보고 특별히 마음 아프게 여겼습니다. 족하께서도 몸소 그 일을 겪었사오니 나의 수다스러운 말을 기다릴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나는 소서행장을 격문으로 불러내어 건복산에서 만나보고 그곳에서부터 서쪽으로 침범하지 못하도록 약속시켰는데, 왜적이 명령을 듣고 감히 어기지 못한 지 수개월 만에 명나라 대병이 도착하여 평양의 승전을 가져왔습니다. 만약 그때 내가 오지 않았더라면 왜적은 조공(조승훈)이 패전한 기회를 틈타 의주까지 갔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평안도 하나만이라도 거주민들이 심한 해독을 입지 않은 것은 귀국에 무척 다행한 일입니다.
얼마 후에 왜적의 장수 소서행장은 서울로 물러가서 지켰고, 총병 수가가 거느린 석전삼성, 증전장성 등 30여 명의 장수들이 군사를 합치고 진영을 연결하여 험준한 곳을 끼고 수비하니 형세가 튼튼하여 쳐부술 수 없었으며, 벽제관 싸움 이후로는 진군하여 적군을 공격하기가 더욱 어렵게 되었습니다.
그때 판서 이덕형이 개성에서 나를 만나보고는 “적군의 세력이 이미 강성해졌으며, 명나라의 대병이 또한 물러간다면 서울 수복은 아예 희망이 없을 것입니다” 하면서 눈물을 흘렸고, 또 나에게 말하기를 “서울은 국가의 근본이 되는 땅이므로 서울을 수복해야만 여러 도를 호령, 소집할 수 있는데, 지금 사세가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장차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라고 했습니다. 내가 “단지 서울을 수복하더라도 한강 이남의 지역이 수복되지 않는다면 여러 도의 사세 또한 뜻대로 되기 어렵지 않겠습니까” 하니, 이덕형은 “다만 서울만 수복되더라도 실로 소망에 지나치는 것이니, 한강 이남의 지역은 소방의 군신들이 자력으로 능히 조금씩 수복하여 지탱해 나가기가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라고 대답했습니다. 내가 말하기를 “나는 그대의 나라와 함께 도모하여 서울을 수복하고, 아울러 한강 이남의 여러 도까지도 수복하고 왕자와 배신들을 돌려보내도록 할 것이니, 그제야 나라가 보전될 것입니다” 했더니, 이덕형은 눈물을 흘리며 머리를 숙이고 감격하면서 “과연 그렇게 된다면 노야께서 소방을 재생시키는 것이니 공덕이 적지 않을 것입니다” 라고 했습니다.
잠시 후에 내가 배로 한강을 건너갔더니 왕자 임해군 등이 가등청정의 군영에서 사람을 보냈는데, 그 사람이 달려와 나에게 전하기를 “혹시 우리들을 돌아가게만 해준다면 한강 이남의 지역은 어느 땅을 불구하고 마음 내키는 대로 줄 것입니다” 했으나, 나는 그 말에 따르지 않았으며 또 왜적의 장수와 서약하기를 “돌려보내려면 돌려보내고, 돌려보내지 않으려면 너희들 마음대로 죽일 것이지, 그 외에는 말할 필요가 없다” 라고 했습니다.
왕자는 귀국의 왕세자인데, 난들 소중한 줄 어찌 모르리오마는 이러한 때는 차라리 죽이라고 말해놓고서 다른 일을 허락하고 싶지 않았던 것입니다. 훗날 그들이 부산에 와서는 재물을 소비하고 예를 다하여 여러 방면으로 왕자에게 곡진히 대했는데, 그 전에는 거만했던 것이 그 일이 있은 뒤로는 공경하게 된 것입니다. 시기에는 늦출 때와 급히 서두를 때가 있고, 일에는 가벼운 일과 무거운 일이 있기에 마지못해서 한 일입니다.
나의 서너 마디 말 끝에 서울에서 왜적이 물러가니 연도의 영책과 남기고 간 군량이 헤아릴 수 없이 많았으며, 한강 이남의 여러 도도 빠짐없이 수복되었고, 왕자와 배신들도 돌아왔습니다. 마침내 봉공을 준다는 한 가지 일로 적군의 여러 괴수들을 견제하여, 그들이 부산 해변의 궁벽한 땅에서 두려워하고 삼가면서 명령을 기다린 지 3년 동안 감히 함부로 행동하지 못하였으며, 잇따라 봉공의 의론이 성립되었기에, 나는 명령을 받들어 분쟁을 조정하고 전쟁을 끝내게 했습니다.
서울에서 다시 족하와 이덕형 등을 만났을 때 나는 “지금 가서 왜적을 봉하게 되었으니 왜적이 혹시 물러갈지도 모르는데, 귀국의 선후책은 어찌 되었습니까?” 하였더니, 이덕형은 그 말에 응답하여 “뒷일을 잘 처리하는 것은 소방 군신들의 책임이오니, 노야께서 마음에 두실 필요는 없습니다” 하였습니다. 내가 그 말을 처음 들었을 때는 일찍이 그가 큰 역량이 있고 큰 식견이 있는 위대한 한 사람의 대신임을 기특하게 여겼습니다. 그러나 지금에 와서 그 사실을 조사해보니 문장과 공업이 서로 부합하지 않은 것 같으니, 나는 이 판서(이덕형)를 위하여 애석히 여기지 않을 수 없습니다.
또 부산과 죽도의 여러 진영이 곧바로 철거되지 못한 것은 물론 나의 책임입니다. 그렇지만 기장과 서생포의 여러 곳에서는 왜병이 모두 물러갔고 영책이 모두 불태웠으며 지방관에게 땅을 돌려 주도록 하는 감결이 모두 있었는데도 어째서 가등청정이 한번 나오자 한바탕 싸워보지도 않고 화살 한 대 쏘지도 않고서 지방관은 몸을 빼쳐서 땅을 왜적에게 양도한 까닭은 무엇입니까? 한강 이남의 지역은 자신의 힘으로 능히 조금씩 수복하여 지탱한다고 기왕에 말해놓고서도, 어찌 이같이 이미 얻은 것도 다시 잃어버렸습니까?
또한 말하기를 ‘뒷일을 잘 처리하는 것은 소방의 책임이라’ 했는데도, 어째서 큰 계책이 있다는 말은 들리지 않고 다만 궐하(국왕의 어전)에서 소리를 높여 우는 한 가지 계책만이 있을 뿐입니까? 병법에 이르되 “약한 세력이 강한 세력을 당할 수 없고, 적은 인원으로 많은 인원을 대적할 수 없다” 하였으니, 나 또한 귀국의 여러 당사자에게 어려운 일을 책임지우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정세가 완화할 때는 그 근본을 다스리고, 위급할 때는 그 말단을 다스린다” 라고 했으니, 군사를 훈련하여 수비에 만전을 기하고 시기를 보아 적군을 제어하는 일을 귀국의 당사자 여러분들께서 등한히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내가 바다를 건너온 이후로 귀국의 국왕을 네 번이나 만나 뵈었으며 피차간에 문답한 말이 마음속에서 우러나서 시의(時宜)에 적합하여 조금도 가차함이 없었으며 조금도 그릇됨이 없었으니, 국왕의 마음과 나의 마음은 피차간에 서로 훤하게 통했습니다. 나는 진실로 생각하기를 ‘동쪽 나라 일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다른 염려는 없을 것이다’ 라고 여겼는데, 뜻밖에도 귀국의 모신(謀臣)과 책사(策士)들은 온갖 슬기로 이간하는 일을 번갈아내어, 안으로는 위언(위란을 두려워하지 않고 직언한다는 말)으로 명나라 조정의 노여움을 격발시켰고 밖으로는 약졸(弱卒)로 일본에게 싸움을 돋우었습니다.
송운의 한 차례 설화는 또한 예절에도, 법에도 벗어난 것입니다. 조선이 왜적의 전도(前導)가 되어 명나라를 치라고 한다느니, 팔도를 할양(割讓)하고 국왕이 친히 바다를 건너가서 굴복하라고 왜가 말한다느니 하여, 잠깐 동안에도 그 말이 두 번, 세 번 바뀌었는데, 다만 알 수 있는 것은 이 말이 국왕의 생각을 움직이리라는 것과, 명나라 조정을 격동시켜서 군대를 동원하리라는 것뿐입니다. 귀국이 다만 팔도를 보유하는 데 유념하지 않고 만약 이를 모두 허락하고, 또한 국왕이 친히 바다를 건너가서 왜적에게 굴복하도록 허락한다면, 귀국의 종묘와 사직, 그리고 신민들은 모두 일본 소유가 될 것입니다. 사실이 그렇다면 어떻게 두 왕자를 돌려받을 수 있었겠습니까? 내 생각으로는 삼척동자도 이러한 실언은 하지 않을 것이며, 가등청정이 비록 횡포하더라도 또한 이와 같이 방자하게 행동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당당한 명나라 조정에서는 외번(外藩=중국 밖에 있는 제후의 나라)을 통솔, 제어함에 저절로 대체(大體=대원칙)가 있습니다. 한 번 은혜를 베풀고 한 차례 위엄을 부리는 것 또한 그 시기가 있으니, 반드시 수백 년 동안 전해오던 속국을 생각 밖으로 내버려두지는 않을 것이며, 또한 약속을 지키지 않는 역적을 놓아서 우리의 번국을 노략질하도록 버려두지는 않을 것입니다. 자연의 형세가 그러할 것이라고 생각지 않으십니까? 나는 일을 잘 살피지 못하오나 내외, 친소의 구별과 역순, 향배의 사정은 또한 사람마다 깨닫기 쉬운 것인데, 하물며 황제의 칙명을 받들어 이 일을 조정, 즙병함에 있어, 성패, 휴척(기쁨과 근심)에 관계됨이 중대하오니, 어찌 감히 귀국의 일을 업신여겨 마음에 두지 않겠으며, 또한 감히 일본의 횡포함을 마음속에 숨겨두고 통보하지 않겠습니까?
족하는 일의 대체를 깊이 이해하고 국사를 자세히 알기 때문에 이에 서신을 보내오니, 원컨대 족하께서는 나의 충심을 살피시어 국왕에게 아뢰고 아울러 당사(當事)한 여러 동료들에게 사유를 대강 알도록 해주십시오. 이미 말했듯이 “우리 명나라 조정을 의뢰하여 만전의 계획을 도모하고, 마땅히 명령에 따라 일을 처리함으로써 무궁한 복을 바란다” 고 했으니, 다만 잘못된 계책으로 날마다 노고만 하고 결과가 졸렬해지는 일이 없도록 할 것입니다. 성심으로 부탁하며 할 말을 다하지 못합니다.
이 서신을 보건대, 그 내용이 서울 수복 이전까지는 말이 조리에 맞아 증거할 수 있으나, 왜적이 부산으로 물러간 후에 와서는 말이 갈라지고 명백하지 않은 점이 있다. 그러나 공과 죄는 서로 저절로 가려지거나 숨길 수가 없는 것이다. 훗날 심유경을 평론하는 사람은 마땅히 이 글로 단안(斷案)을 삼을 것이므로, 이것을 기록해두는 것이다.
심유경은 유세(遊說)하는 사람이다. 평양 싸움 이후에 두 번이나 적군의 진중으로 들어갔는데, 이것은 사람들이 어렵게 여기는 일이다. 마침내 능히 변설(辯舌)로 군대를 대신하여 많은 수효의 적군을 몰아내고 수천 리의 땅을 수복하였다. 맨 나중의 한 가지 일이 그릇되어 큰 죄를 면하지 못했으니 슬픈 일이었다.
평행장은 심유경을 가장 신임했으므로 평행장이 서울에 있을 때 심유경이 평행장에게 은밀히 말하기를 “너희 무리들이 오래도록 이곳에 머무르고 돌아가지 않는다면 명나라 조정에서 다시 대군을 동원하여 서해에서 나와 충청도로 출격하여 너희들이 돌아가는 길을 끊을 것이니, 그때는 비록 물러가고자 하더라도 가지 못할 것이다. 나는 평양에서부터 너와 서로 친한 까닭에 차마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고 했더니, 그제야 평행장은 겁이 나서 마침내 서울을 나간 것이다.
이 일은, 심유경이 우상 김명원에게 스스로 말한 것인데, 김 우상이 나에게 이와 같이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