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임진왜란

해전기록 - 51장 - 면사첩

구름위 2013. 5. 1. 1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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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은 고하도에 통제영을 설치하고 울돌목과 신안 앞바다를 지키면서 영산강 상류에서 왜군들이 배를 만들어 바다로 나오는 것을 방지했다.

 

※ 《난중일기》 1597년 10월 30일 ※
맑다. 아침에 집 지을 곳으로 내려가 앉으니 여러 장수들이 와서 인사를 하였다. 해남현감(유형)도 와서 왜적에게 붙었던 자들의 소행을 전했다.

 

황득중에게, 목수들을 데리고 섬의 북쪽 봉우리 밑으로 가서 집 지을 재목을 찍어 오라고 하였다. 늦게 해남에서 적에게 붙었던 정은부와 김신웅, 그리고 왜놈에게 우리나라 사람들을 죽이도록 지시한 두 사람과, 선비 집 처녀를 강간한 김애남 등을 모두 목 베어 효시하였다. 저녁에 도양장의 벌레 먹은 곡식을 제멋대로 나누어준 죄로 양밀에게 곤장 60대를 쳤다.

 

오늘날 고하도 유적지에는 충무공을 추모하는 24편의 시가 있는데 다음의 시는 그 중의 하나이다.

 

※ 《추모사》 수군준장 최정식 ※
7년 전쟁 싸움터에 사랑하는 아들 잃고 옥체 불편하신 중에서도 한 인간의 고뇌를 이겨내시어
이 작은 섬에 배를 대고 다시 전열 가다듬어 민족의 맥을 이어주셨다.

거룩하신 님의 숨결이 여기 고하도 언덕 노송에 스치는 바람결 따라 들려오기에 옷매무새 고쳐 입고
님의 채찍 달게 받는다.

 

일제시대 때 동아일보의 주도로 현충사가 중건된 후, 조선일보는 민족의식 고취를 위해 전국에 향토 노래가사를 공모했다. 그때 이난영의 노래로 유명해진 ‘목포의 눈물’ 이 1등작으로 뽑혔는데, 이 노래가 조선 8도를 뒤덮자 총독부는 노래 2절에 있는 ‘삼백년 원한 품은 노적봉… 임 자태 완연하다’ 등의 가사를 충무공과 관계된 것으로 보고 금지곡으로 삼았다. 그러나 체포와 투옥에도 불구하고 온 조선인들이 계속 그 노래를 불렀고, 나중에는 이들을 수용할 감방이 부족해서 총독부는 단속을 단념하고 말았던 일이 있었다.

 

※ 《난중일기》 1597년 11월 ※
1일. 비. 아침에 사슴 털가죽 두 장이 물에 떠내려 왔으므로 명나라 장수에게 보내주기로 했다. 괴이한 일이다. 오후 2시경에 비가 개었으나 북풍이 크게 불었다. 배에 탄 사람들은 추위를 견디기 어려웠고, 나도 선실에 웅크리고 앉아 있으니 심기가 좋지 않아 하루를 보내기가 마치 1년 같았다. 비통함을 어찌 다 말하랴. 저녁에 북풍이 크게 불어 밤새도록 배가 흔들려서 사람들이 안정을 취할 수가 없었다.

 

2일. 흐리다. 우수사(김억추)의 전선이 바람에 떠내려가다가 바위에 걸려 깨어졌다고 하니, 매우 통분하다. 병선 담당 군관 당언량에게 곤장 80대를 쳤다. 선창에 내려가 앉아서 다리 놓는 것을 감독하였다. 그 길로 새로 집 짓는 곳으로 올라갔다가 어두워질 때 배로 내려왔다.

 

3일. 맑다. 일찍 새로 집 짓는 곳으로 올라갔더니, 선전관 이길원이 배설을 처단할 일로 들어왔다. 배설은 벌써 성주 본가로 도망갔는데, 그리고 가지 않고 바로 이리로 찾아 왔으니, 그의 사사로운 정분 앞세우는 죄가 극심하다.

 

이길원은 도망간 경상우수사 배설과 친한 사이였다. 그래서 의도적으로 배설이 달아날 시간 여유를 주려고 이곳으로 와서 시간을 지체하고 있음을 지적한 것이다.

 

※ 《난중일기》 1597년 11월 ※
4일. 맑다. 일찍 새로 집 짓는 곳으로 올라갔더니, 이길원이 그곳에 머물러 있었다. 진도 군수 선의경이 왔다.

 

5일. 맑다. 따뜻하기가 봄날 같다. 일찍 새로 집 짓는 곳으로 올라갔다가 해가 저물어서야 배로 내려왔다. 영암군수 이종성이 와서 밥 30말을 지어 일꾼들을 먹이고 또 말하기를, 군량미 2백 섬과 벼 7백 섬을 준비해 놓았다고 하였다. 이날 보성군수와 흥양군수를 시켜서 군량 창고 짓는 일을 보살피게 하였다.

 

6일. 맑다. 일찌 새로 집 짓는 곳으로 올라가서 종일 거닐며 해가 지는 줄도 몰랐다. 새로 지은 집에 지붕을 잇고 군량 창고도 세웠다. 전라우도 우후(이정충)가 나무를 찍어 올 일로 황원장으로 갔다.

 

7일. 맑고 따뜻하다. 해남의 의병들이 왜놈의 머리 하나와 환도 한 자루를 가지고 와서 바쳤다. 이종호와 강언국을 잡아왔기에 거제의 배에다 가두었다. 늦게 홍산 전 현감 윤영현과 생원 최집 등이 와서 보고 또 군량으로 벼 40섬, 쌀 8섬을 바쳤다. 본영의 박주생이 왜적의 머리 두 개를 베어 왔다.전 현감 김응인이 찾아와서 만나보았다. 저녁에 새집 마루를 다 놓았다. 여러 수사들이 찾아왔다. 이날 밤 자정 때쯤 꿈에 죽은 면을 보고 슬퍼서 울부짖고 통곡하였다.

 

8일. 맑다. 새벽 2시경에 물에 들어가 고기를 잡는 꿈을 꾸었다. 이날은 따뜻하고 바람도 없었다. 새 방 벽에 흙을 발랐다. 이중화 부자가 찾아와 만나보았다.

 

드디어 겨울을 지낼 따뜻한 방이 마련되었다.

 

※ 《난중일기》 1597년 11월 ※
9일. 맑다. 따뜻하기 봄날 같다. 우수사가 와서 보았다. 강진 현감이 돌아갔다.

 

10일. 눈비가 섞여 왔다. 서북풍이 세게 불어 배를 간신히 보호하였다. 이정충이 와서 말하기를, 장흥에 있던 적들이 달아났다고 하였다.

 

11일. 맑다. 식사 후에 새로 집 짓는 데로 올라갔더니 평산 새 만호가 찾아와서 부임장을 바쳤다. 그는 하동현감(신진)의 형 신훤이다. 장흥 부사(전봉)와 조방장(배흥립)이 찾아왔다. 저녁에 우 우후 이정충이 왔다가 밤 8시경에 돌아갔다.

 

12일. 맑다. 이날 늦게 영암, 나주 사람들이 타작을 못하게 방해한 자들을 결박해 왔으므로, 그 중에서 주모자를 뽑아내어 처형하고 나머지 4명은 각 배에다 가두었다.

 

14일. 맑다. 해남현감 유형이 와서 윤단중의 무리한 일을 많이 전하였다. 또 아전들이 법성포로 피난 갔다가 돌아올 때 바람을 만나 배가 전복되려고 할 때, 그들을 바다 가운데서 만났으나 구조하기는커녕 배에 있는 물건들을 약탈했다고 하였다. 그래서 중군선에 가두었다. 김인수는 경상 수영의 배에 가두었다. 내일은 아버님의 제삿날이어서 드나들지 않았다.

 

15일. 맑다. 따뜻하기가 마치 봄날 같았다. 식사 후에 새로 지은 집으로 올라갔다. 늦게 임환과 윤영현이 찾아왔다. 밤에 송한이 서울에서 들어왔다.

 

16일. 맑다. 군공마련기(개인별 전공 조사기록)를 보니 안위가 통정대부가 되고 그 나머지도 차례차례 벼슬을 받았으며, 은자 20냥은 나에게 상으로 하사되었다. 명나라 장수 경리 양호는 붉은 비단 한 필을 보내며 “배에 괘홍(승전했을 때 군선에 붉은 비단을 걸어서 전공을 치하하는 의식)하는 의식을 거행하고 싶으나 길이 멀어서 못 간다” 고 하였다. 영의정(유성룡)의 답장도 왔다.

 

울돌목해전의 공로를 표창함에 있어 선조는 이순신에게 은자 20냥을 하사했는데, 선조가 일찍이 요시라에게 하사한 은자는 80냥이었다. 요시라에게 은자를 내렸을 때는 전쟁은 소강상태였고 전라도가 건재했으며 조정의 재정도 다소 안정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 무렵 전라도는 초토화되었고 조정과 사대부, 온 백성들이 피난 준비를 하느라 세상은 아비규환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받은 은자였으므로 이순신은 금액에 관계없이 오직 진충보국에 힘썼으며, 이 같은 시대상도 긍정적으로 이해했다.

 

● 명나라와 이순신

 

※ 《난중일기》 1597년 11월 17일 ※
비. 경리 양호의 차관이 초유문(적이나 적에게 붙었던 자들을 너그러운 조건으로 용서한다는 포고문)과 면사첩(죽음에 처하지 않게 할 것임을 약속하는 증명서)을 가지고 왔다.

 

명나라가 초유문을 보내온 것은 수복지의 민심을 조기에 안정시키고자 했기 때문이다. 초유문은 명군 사령관 양호의 명의로도 발급할 수 있다. 그러나 면사첩은 ‘죽을 사람도 살리는 증명서’ 이기에 황제만이 가지는 권한이다. 춘원 이광수 저 《이순신(1931)》에서도 ‘면사첩은 명의 천자만이 내릴 수 있다’ 고 했고, 오늘날 명 · 청 시대를 다룬 중국의 TV 사극물에서도 황제-면사첩 관련 내용은 자주 등장한다.

명나라는 해양국가로 출발했기에 수군의 중요성을 잘 알았다. 또 이순신이 한산도 · 울돌목 대첩으로 명나라를 지켜낸 공도 잘 알고 있었다. 명나라로서는 이순신 같은 명장이 또다시 모함을 받아 하옥되거나 목숨을 잃게 될 것을 우려해서 면사첩을 내렸는데, 여기에는 이순신을 헤치려는 조선 조정과 붕당들에 대한 경고가 들어있다.

 

‘면사첩의 발급 권한’ 이 누구에게 있었는지를 아는 것은 이순신의 자살설 논쟁을 해석하는 데 있어서도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흔히 면사첩을 선조 임금이 내린 것으로 잘못 이해하고 있는데, 결코 그렇지 않다. 아래는 김훈 저 《칼의 노래》에서다.

 

※ 《칼의 노래》 김훈 ※
이원길이 돌아간 지 보름 뒤에 임금이 보낸 면사첩(免死帖)을 받았다. 도원수부의 행정관이 면사첩을 들고 왔다. ‘면사(免死)’ 두 글자뿐이었다. 다른 아무 문구도 없었다. 조정을 능멸하고 임금을 기만했으며 임금의 기동출격 명령에 따르지 않은 죄에 대하여 죽음을 면해 주겠다는 것이었다. 면사첩을 받던 날은 하루 종일 비가 내렸다. 나는 ‘면사’ 두 글자를 오랫동안 들여다보았다. 죄가 없다는 것도 아니고, 죄를 사면해 주겠다는 것도 아니고, 다만 죽이지는 않겠다는 것이었다.

 

너를 죽여 마땅하지만 죽이지는 않겠다고 임금은 멀리서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면사’ 두 글자 속에서, 뒤척이며 돌아눕는 임금의 해소기침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글자 밑의 옥새는 인주가 묻어날 듯이 새빨갰다. 칼을 올려놓은 시렁 아래 면사첩을 걸었다. 저 칼이 나의 칼인가 임금의 칼인가. 면사첩 위 시렁에서 내 환도 두 자루는 나를 베는 임금의 칼처럼 보였다. 그러하더라도 내가 임금의 칼에 죽으면 적은 임금에게도 갈 것이었고, 내가 적의 칼에 죽어도 적은 임금에게도 갈 것이었다. 적의 칼과 임금의 칼 사이에서 바다는 아득히 넓었고 나는 몸 둘 곳 없었다.

 

면사첩을 보낸 이를 선조 임금으로, 가지고 온 사람을 도원수부의 행정관으로 꾸몄다. 내용을 보면 김훈은 면사첩 제도에 대한 연구가 전연 없었던 것 같다. 연구가 있었다면 ‘내가 임금의 칼에 죽으면…’ 과 같은 표현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다음은 박기봉 편역 《충무공 이순신 전서》에서 밝혀둔 면사첩 관련 내용이다.

 

※ 《이충무공전서》 ※
면사첩은 본래 조선에는 없었던 명나라의 제도로서, 명나라 황제가 내려준 것이기 때문에 조선의 임금조차도 중국 황제에게 거역할 각오 없이는 이순신을 감히 죽일 수 없다. 따라서 이순신이 명나라 황제에게 반역의 죄를 범하지 않는 이상 조선에서 이순신의 목숨을 해칠 권력은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이 면사첩이 명나라 황제에게서 내려왔다는 점에서 이순신이 전란이 끝난 후에 또다시 선조와 반대 측의 질시로 죽임을 당할까봐 최후의 전투에서 스스로 죽는 쪽을 택했다는 자살설(自殺設)은 근거가 없는 것임이 증명된다. 즉, 중국 황제가 내려준 면사첩을 소지하고 있는 한, 전란이 끝난 후에 또 다시 조선의 권력자들에 의해 모함을 당하여 목숨을 잃게 될까봐 걱정할 필요가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소인배들인 당시의 권력자들로서는 누구도 이해할 수 없었던 더 크고 소중한 가치에 자신의 신명을 바치고 있었고, 그의 지성(至誠)의 삶이 이미 하늘을 감동시키고 있었던 군자 이순신에게 있어서는 이런 황제의 면사첩조차도 아무런 의미 없는 한 장의 종이쪽지에 불과한 것으로 여겼을 만큼 그의 정신세계는 생사(生死)를 초월해 있었던 것이다.

 

※ 《난중일기》 1597년 11월 ※
18일. 따듯하기가 봄날 같다. 윤영현이 와서 만나보았다. 정한기도 왔다.

 

19일. 맑다. 조방장(배흥립)과 장흥부사(전봉)가 와서 만나 보았다.

 

20일. 비. 임준영이 와서, 완도를 정탐해 보았으나 적선이 없더라고 하였다.

 

완도가 수복되고 있다.

 

※ 《난중일기》 1597년 11월 ※
21일. 송응기가 산판 일 할 사람들을 데리고 해남의 소나무가 있는 곳으로 갔다.

 

22일. 흐리다. 저녁에 김애가 아산에서 돌아왔다. 장흥에 있던 적들이 20일에 달아났다는 보고가 왔다.

 

장흥이 수복되고 있다.

 

※ 《난중일기》 1597년 11월 ※
23일. 큰 바람이 불고 큰 눈이 왔다. 저녁에 얼음이 얼었다고 한다. 아산 집에 편지를 쓰며 눈물을 거두지 못하였다. 자식을 생각하는 정을 참기 어렵다.

 

24일. 비와 눈이 내렸다. 서북풍이 계속해서 불었다.

 

25일. 눈이 내렸다.

 

26일. 비와 눈이 내렸다.

 

27일. 맑다. 장흥 부사의 승첩 장계를 수정하였다.

 

28일. 맑다. 무안에서 사는 진사 김덕수가 군량으로 벼 15석을 가져와 바쳤다.

 

29일. 맑다. 마 유격이 파견한 군관 왕재가 “물길로 명나라 군사가 내려오고 있다” 고 전하였다. 전희원, 정봉수가 왔다. 무안현감도 왔다.

 

명의 수군이 온다는 소식이다.

 

※ 《난중일기》 1597년 12월 ※
1일. 맑고 따뜻하다. 경상수사 이순신이 진으로 왔다. 그와 같이 대책을 의논하였다.

 

2일. 맑다. 날씨가 매우 따뜻하여 봄날 같았다. 영암 향병장 유장춘이 적을 토벌한 사유를 보고하지 않았기에 곤장 50대를 때렸다. 홍산현감(윤영현), 김종려, 백진남, 정수 등이 찾아왔다.

 

3일. 맑다. 큰바람이 불었다. 몸이 몹시 불편하였다. 경상수사가 와서 만났다.

 

4일. 맑다. 몹시 춥다. 장흥 교생 기업에게 군량을 훔쳐 실은 죄로 곤장 30대를 때렸다. 거제 현령(안위), 금갑도 만호(이정표), 천성 만호가 (둔전의) 타작하는 일을 보고 돌아왔다. 무안 현감 및 전희광 등이 돌아왔다.

 

5일. 맑다. 전공을 세운 여러 장수들에게 상품과 직첩을 나눠 주었다. 보자기를 수색하고 단속하는 정응남이 새로 만드는 배의 부정 사실을 적발할 일로 점세를 데리고 진도로 갔다. 아울러 해남으로 나갔던 독동을 처형했다.

 

울돌목해전의 승첩 장계를 받은 조정은 상품과 직첩을 내렸기에 나누어 주었다.

 

※ 《난중일기》 1597년 12월 5일 ※
도원수(권율)의 군관이 유서를 가지고 왔는데, “이번 선전관 편에 들으니 통제사 이순신은 아직도 상제의 예법대로만 따르고 권도를 쫓지 않아 여러 장수들이 민망하게 여긴다고 하였다. 사사로운 정이야 간절하겠지만, 국사가 한창 바쁜데, 옛사람의 말에도 전쟁에 나가서 용맹이 없는 것도 효(孝)가 아니라고 하였다. 전쟁에 나가서 용감하다는 것은 소찬이나 먹어서 기운과 힘이 곤비한 자로서는 할 수 없는 일이다. 예(禮)에도 원칙을 지키는 경이 있고 방편을 따르는 권이 있어서 꼭 원칙만을 지킬 수는 없는 것이니, 그대는 내 뜻을 받들어 소찬 먹는 것을 그만두고 방편을 따르도록 하라” 는 것이었다. 그리고 아울러 고기반찬을 하사하셨으니 감동, 감동스럽다.

 

임금이 원칙만 지키지 말고 방편도 중시하라는 중용의 정신으로 고기반찬을 하사했기에 ‘감동, 감동’ 했다. 임금의 유지(諭旨)에는 모친상만이 언급되어 있지만, 이순신은 이 무렵 셋째 아들의 상까지 입고 심신이 날로 쇠약해져 가고 있었다.

 

아래는 《칼의 노래》이다.

 

※ 《칼의 노래》 김훈 ※
지난번에 다녀온 선전관 편에 들으니, 너는 아직도 상례(喪禮)를 지키느라 고기를 먹지 않는다 하더구나. 사사로운 정이 간절하다 할지라도 나라의 일은 지엄한 것이다. 싸움에 나가 용맹이 없으면 효도가 아닐진대, 어찌 채소나 나물만 먹고 능히 해낼 수 있겠느냐. 상례에도 원칙이 있고, 방편이 또한 있지 않겠느냐. 내 헤아리되 그러하다. 그대는 내 뜻을 따라 방편을 좇으라. 그러므로 이제 술과 고기를 보내니 너는 받으라.

 

군관이 놓고 간 대나무 상자를 열었다. 쇠고기 5근과 술 2병이 들어 있었다. 임금의 명에 따라 도원수가 보낸 물건이었다. 갓 잡은 고기는 살에서 경련이 일듯이 싱싱했다. 칼이 한 번 멈칫거린 듯, 칼 지나간 자리가 씹혀 있었다. 잘려진 단면에서 힘살과 실핏줄이 난해한 무늬를 드러냈다. 붉은 살의 결들이 어디론지 흘러가고 있었다. 칼이 베고 지나간 목숨의 안쪽에 저러한 무늬가 살아 있었다. 내가 적의 칼에 베어지거나 임금의 칼에 베어질 때, 나의 베어진 단면도 저러할 것인지를 생각했다. 단면은 떠오르지 않았다.

 

임금이 술과 고기반찬을 내렸다면 당연히 대궐의 수라간에서 만들어야지 어찌 감히 도원수부의 부엌에서 만들었다고 하며, 반찬은 왜 날고기 5근으로 고쳤을까.

 

수라간에서 보낸 고기반찬의 양은 적어도 1~2개월 동안 아침저녁 반찬으로 먹으면서 입맛도 살리고 원기회복에 도움이 될 정도의 양이었을 것이다. 또 오래 두고 먹어도 변질되지 않도록 수라간에서 정성을 들여 특별히 조리한 귀한 음식이었을 것이다. 멀리에서 임금이 상중에 있는 장수의 건강을 염려해서 특별히 사람을 보내어 반찬을 하사하면서 쇠고기 5근과 술 2병밖에 안 보냈다는 것은 아무리 소설이라도 말이 안 된다. 김훈은 ‘임금의 칼에 베어질 때, 나의 베어진 단면도…’ 라는 문학적 글귀를 살리기 위해서 ‘날고기’ 로 바꾼 것 같다.

 

《난중일기》의 기록이 현저하게 줄어들고 있는데, 심신이 극도로 쇠약해져서 마지막 타는 불꽃을 보는 듯하다. 그러나 줄어들고 있는 기록 속에도 당시의 안타까웠던 전란사가 들어 있다.

 

※ 《난중일기》 1597년 12월 ※
6일. 나덕준과 정응청이 찾아와 만났다.

 

9일. 맑다. 종 목년이 들어왔다.

 

10일. 맑다. 조카 해, 아들 열과 진원이 윤간, 이언량과 함께 들어왔다. 배 만드는 데 나가 앉아 있었다.

 

11일. 맑다. 경상수사와 조방장(배흥립)이 왔다. 우수사(이시언)도 와서 만났다.

 

17일. 눈보라가 몹시 차가왔다. 조카 해와 작별의 술을 마셨다.

 

18일. 눈이 내렸다. 해가 어제 취한 술 때문에 늦도록 깨지 않았다. 이날 새벽에 배를 출발시키니 마음이 편치 않았다.

 

20일. 진원의 모친과 윤간이 올라갔다.

 

21일. 눈이 왔다. 아침에 홍산 현령이 목포로부터 찾아와 만나보았다.

 

22일. 눈비가 섞여 내렸다. 함평 현감(손경지)이 들어왔다.

 

23일. 눈이 내려 세 치나 쌓였다. 순찰사(황신)가 진에 온다는 연락이 왔다.

 

24일. 눈이 오다 개었다 하였다. 아침에 이종호를 순찰사에게 보내어 문안하였다.

 

25일. 눈이 왔다. 아침에 열이 돌아갔다. 그 어머니의 병 때문이다. 늦게 경상수사와 배 조방장이 보러 왔다. 오후 6시경 순찰사가 진에 왔으므로 그와 같이 군사에 관한 일을 의논하고, 연해안 열아홉 고을을 수군에 전속시키도록 하였다.

 

부인 방씨도 셋째 아들을 잃은 후 병석에 누웠다. 황신 전라 감사가 와서 군사 일을 의논하면서 (1593년 윤11월 17일) 당시 전라 감사 이정암에 의해 육군에 소속시켰던 9개 고을이 다시 수군 소속이 되었다.

 

울돌목 승첩이 있은 후 왜군들이 남해안으로 물러가는 것을 본 조정과 전라감영은 그제서야 수군의 소중함을 실감했기에 9개 고을을 수군 소속으로 되돌린 것이다.

 

※ 《난중일기》 1597년 12월 ※
26일. 눈이 왔다. 방백(순찰사)과 같이 조용히 군사 대책을 이야기하였다. 늦게 경상수사와 배 조방장(배흥립)이 와서 만났다.

 

27일. 눈이 왔다. 순찰사가 돌아갔다.

 

28일. 맑다. 경상수사와 배 조방장이 와서 만났다.

 

29일. 맑다.

 

30일. 눈, 바람. 몹시 춥고 얼음이 얼었다. 여러 장수들이 모두 와서 보았다. 이날 밤은 그믐이라 슬픈 생각이 한결 더 하였다.

 

※ 《방씨부인전》 ※
정경부인 상주 방(方)씨는 충무공의 부인이다. 부친의 이름은 진(震)인데 보성 군수 벼슬을 지냈다. 부인이 어릴 때부터 영미한 품이 어른과 같았다. 나이 겨우 열두 살 때인데 강도들이 안마당까지 들어오므로 보성공이 화살로 적을 쏘다가 화살이 다 되자 방 안에 있는 화살을 가져오라고 했으나 계집종이 적과 내통하여 몰래 훔쳐 가지고 나가 남은 것이 없었다.

 

그러자 부인이 “여기 있습니다!” 하고 급히 베 짜는 데 쓰는 대들을 한 아름 안아다가 다락에서 던지니 그 소리가 마치 화살이 떨어져 흩어지는 것 같았다. 적이 본래 보성공의 활 잘 쏘는 것을 두려워했던 바라 화살이 아직 많이 있다고 여기고는 곧 놀라 도망갔다.

 

충무공이 세상을 떠나자 으뜸 공훈으로 책정하고 높은 벼슬을 증직하였는데, 부인도 그 준례에 따라 봉함을 받았고 80이 넘도록 살았다.

통제사 이운룡이 부하로 있었던 옛 의리를 생각하고 충무공의 사당에 참배코자 하여 지나는 길에 굉장한 위엄을 갖추고 들어가 먼저 부인께 문안하는 예단을 올렸으나, 부인은 받지 않고 말을 전하기를 “대장과 막하의 신분은 본시 한계가 엄연한데, 대감(충무공)의 사당을 지척에 두고서 호각을 불며 곧장 들어오기가 미안하지 않은가!” 하였다. 이공은 마침내 실수하였음을 깨닫고 황공하여 머물러 사죄하므로 부인도 그 예단을 받았다. 그런 뒤에 떠나갔다.

 

조선 수군이 고하도에서 명의 진린 함대를 기다리며 수군 재건에 힘쓰고 있던 1597년 겨울, 조 · 명의 육군은 울산 왜성의 가토 기요마사 군과 제1차 울산성전투를 치뤘다.

 

● 울산성 전투

 

※ 《KBS 역사스페셜》 ※
울산성 전투 초반에는 연합군이 기선을 제압했다. 연합군은 철저한 고립 작전을 구사했고, 기마병을 매복시켜 태화강 하류를 봉쇄했다. 부산과 서생포 등에서 오는 일본군의 구원병을 차단하기 위해서였다. 실제로 울산성에서 70리 남쪽에 있는 서생포에서 일본군(구로다 나가마사의 5천 군) 구원병이 왔으나 저지당하고 말았다.

 

그런 다음 연합군은 울산 지역 전체를 고립시켜 나갔다. 양산으로 군대를 보내 이곳을 통해 울산으로 들어오는 일본 육군을 막도록 했다. 그리고 멀리 남원에서는 일본군의 전라도 병력을 견제하게 했다. 실제로 연합군은 양산과 태화강에서 일본군 구원병을 물리쳤으며, 이러한 입체 작전은 전투 초반 효과를 거두었다.

 

조 · 명 연합군은 성 안의 일본군을 외부와 완전히 차단시키고 물샘틈없이 포위했다. 성 안의 일본군은 최악의 상황에 처했다. 가토 기요마사가 다른 장수에게 보낸 전갈을 통해 당시 성 안의 상황이 얼마나 절망적이었는지 알 수 있다.

 

“나는 여기서 할복자살할 것이니 당신은 그 성에서 (할복자살)하시오.”

 

가토 기요마사는 항복 대신 할복자살을 결심하고 있었던 것이다.

 

전투가 한창이던 당시 상황을 그린 전투도를 보면 울산성 안에서 몇몇 일본군이 말을 잡고 있다. 전투가 한창인데도 이렇게 말을 잡은 이유는 식량과 물 부족 때문이었다. 성 안의 일본군들은 말을 잡아먹기도 했다. 식량은 조총수에게만 배급되었다. 그것도 하루에 생쌀 한 홉뿐으로, 전투병의 하루 식사로는 턱없이 부족한 양이었다. 조총수 외에 다른 병사들은 방치될 수밖에 없을 정도로 울산성의 식량 사정은 열악했다.

 

게다가 울산성은 치명적인 약점이 있었다. 성 안에 우물이 없었던 것이다. 우물은 성 밖에 있었는데 그것조차 조 · 명 연합군이 돌로 메워버렸다. 결국 일본군은 식수를 구하기 위해 목숨을 걸고 성 밖 태화강으로 나가야 했다. 울산성 전투가 벌어진 때는 12월 하순이었다. 일본군은 조 · 명 연합군이라는 성 밖의 적 외에 극심한 식량난과 식수난, 그리고 혹독한 추위와 사투를 벌여야 했다.

 

… 처절했던 울산성 전투는 가토 기요마사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전쟁 후 그는 일본으로 돌아가 구마모토에 성을 세웠다. 이 성에는 우물을 120개나 팠다. 식수 문제로 곤욕을 치른 울산성의 기억 때문이다. 지금은 17개의 우물이 남아 있다. 성의 모든 건물에 깔려 있는 다다미에도 울산성 전투의 교훈이 담겨 있다. 성의 천수각이나 어전에는 보통 짚으로 만든 다다미를 까는데, 구마모토성의 경우 다다미 안에 고구마 줄기를 넣어서 만들었다고 전해진다. 울산성의 고된 농성을 경험하고 나서 비상 식량을 확보, 저장하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 울산성 공방전이 길어지자 각지의 일본군 구원병들이 속속 도착하여 병력이 점점 늘어났다. 나중에는 순천의 고니시 유키나가의 병력까지 합세하여 구원병은 6만이 넘었다.

 

1598년 1월 4일, 결국 조 · 명 연합군은 경주 방향으로 철수를 시작한다. 6만 명 이상으로 늘어난 일본군 구원병들로 인해 결국 조 · 명 연합군은 철수를 결정했고, 13일간의 울산성 전투는 끝난다. 이 전투로 조 · 명 연합군 약 5,800명, 일본군 약 6,000명이 전사하는 등 양측은 다 같이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 조 · 명 연합군의 철수는 울산성 안의 일본군들에게 구원의 소식이었다.

 

… 울산성에서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은 가토 기요마사는 남쪽의 서생포성으로 후퇴, 그 안에서 꼼짝 않고 수성전(守城戰)으로 일관했다.

 

※ 《징비록》 ※
12월에 양 경리 · 마 제독은 기병과 보병 수만 명을 거느리고 경상도로 내려가서 울산에 있는 왜적의 진영으로 나아가 공격하였다. 이때 왜적의 장수 가등청정이 성을 울산군의 동해 바닷가 험준한 곳에 쌓고 있었는데, 양호 경리와 마귀 제독은 뜻밖의 기회를 틈타서 엄습하여 날랜 기병대로 몰아치니, 왜적들은 스러져 감히 견디지 못하였다. 명나라 군사가 왜적의 외책(外柵)을 빼앗으니 왜적들은 달아나 내성(內城)으로 들어갔다.

 

명나라 군사들은 왜적이 두고 간 전리품의 노획을 탐내어 즉시 진공하지 않았는데, 왜적들은 성문을 닫고 굳게 지키므로 이를 공격해도 이기지 못하였다. 명군의 여러 진영은 성 아래 나누어 주둔하고, 성을 포위한 지 13일이나 되어도 왜적들은 나오지 않았다.

 

29일에 내가 경주로부터 울산으로 가서 양 경리와 마 제독을 만나보았는데, 왜적의 진루를 바라보니 매우 고요하고 한가로워 정적만이 감돌뿐이었다. 성 위에는 사면을 둘러 장랑을 만들어 지키는 군사들은 모두 그 안에 있다가 밖의 명나라 군사가 성 밑에 접근하면 총탄을 비가 쏟아지듯 어지럽게 쏘았다.

 

날마다 이런 상황이 되풀이되자 명나라 군사와 우리나라 군사들의 희생만 늘어나서 주검이 성 밑에 쌍여갈 뿐이었다. 이때 왜적의 배들이 서생포로부터 와서 지원했는데, 정박한 배들의 모습이 마치 물오리 떼와 같았다.

 

한편, 성 안에는 물이 없어서 왜적은 밤마다 성 밖으로 물을 긷기 위해 나왔다. 양 경리는 김응서로 하여금 정예 군사를 거느리고 성 밖의 샘 곁에 복병을 두게 하여 밤마다 백여 명의 적들을 사로잡았는데, 그들은 다 굶주리고 파리하여 겨우 목숨만 부지하고 있었다. 여러 장수들은 말하기를 “성 안에는 양식이 끊어졌으니 오랫동안 포위하고 있으면 왜적들은 장차 저절로 무너져버릴 것이다” 고 하였다.

 

그때는 겨울이어서 날씨가 몹시 춥고 게다가 비까지 와서 군사들은 손발이 얼어 터졌다. 얼마 뒤에 또 육로로부터 적의 구원병이 오자 경리 양호는 그들의 공격을 받게 될까 두려워서 갑자기 군사를 돌리고 말았다. 이듬해 정월이 되자 명나라 장수들은 서울로 돌아가 다시 공격할 계획을 세웠다.

 

무술년(선조 31년, 1598) 7월에 경리 양호가 파면되고, 만세덕이 새 경리로 임명되어 부임해 왔다.

 

‘왜선들이 배들의 모습이 마치 물오리 떼와 같았다’ 고 했는데, 유성룡과 같은 고위층에서 왜성을 직접 확인한 첫 사례로 보인다. 당시 김응서는 ‘고니시-요시라의 반간계’ 에 속아서 조선 수군의 칠천량 패전을 초래하게 했다는 문책을 받아 백의종군하고 있었는데, 울산성전투에서 공을 세웠기에 복권된다.

 

경리 양호는 패전의 책임으로 파면을 당했는데, 패한 원인은 왜성의 견고한 수비력과, 왜군들에게는 남해안의 왜군들을 신속하게 수송할 수 있는 선단이 있었기 때문이다.

 

제1차 울산성 전투를 실패하고 본 명나라 지휘부는 새로 4로군 전략을 수립하고 남해안의 왜군들을 각개로 공격하면서, 진린의 수군을 참전시켜 수륙으로 협공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히데요시가 병사(1598. 8. 18)하자 조 · 명의 4로군은 남해안의 왜군 거점들에 대한 공세를 더욱 강화했고, 이로써 7년 전쟁의 종반부는 필사전의 공방전으로 이어졌다.

 

동로군 마귀 제독의 군사 2만4천 명과 김응서 병마사의 5천5백 명이 제2차 울산성전투를 전개하자, 1만 명의 가토 군은 구원군을 기다리며 수비에 전념했다. 그러나 히데요시 사망의 여파로 구원군은 오지 않았고, 그 와중에 ‘전군은 11월 15일까지 부산에 집결한 후 본국으로 철수하라’ 는 4대로(도쿠가와 이에야스 · 모리 데루모토 · 우키타 히데이에 · 마에다 도시이에)의 연명 지시가 있자, 11월 18일 울산성을 불태우고 서생포→부산→왜국으로 돌아갔다.

 

히데요시의 사망 소식을 접한 명나라 동일원 제독의 군사 3만4천 명과 정기룡 경상병마사의 2천2백 명의 군사들은 사천 왜성에 주둔해 있던 시마즈 요시히로 군(1만 명)을 공격했다. 사천 왜성은 왜성들 중에서도 공성이 어렵기로 유명한 난공불락의 요새였다. 그 결과 연합군은 5천여 명의 사상자를 내고 10월 11일 퇴각했다.

 

한편, 동일원의 중로군이 사천 왜성에 대한 공격을 단념하고 퇴각했다는 보고를 받은 명 황제는 히데요시의 사망으로 우왕좌왕하고 있는 적을, 그것도 우세한 병력을 가지고도 패퇴했다며 엄히 꾸짖었고, 특사를 보내 ‘속히 공격하라!’ 는 명령을 전했다. 이에 황망해진 제독 동일원은 심기일전해서 11월 17일 사천 왜성으로 진격했으나, 도착해 보니 시마즈 군은 11월 16일 본국의 철군 명령과 순천 왜교성에서 농성 중이던 고니시 군의 구원 요청에 따라 노량으로 떠난 후였다.

 

● 진린 도독

 

막내아들 면이 전사한 후로 이순신의 건강은 극도로 악화되어 갔는데, 마치 제갈무후(제갈량)가 마지막 출전(오장원 전투)을 앞두고 쇠약해져 갔던 역사를 연상케 한다.

 

무술년(1598)으로 넘어오면서 이순신의 건강은 더욱 악화된 듯하다. 전해지는 《난중일기》의 분량을 보더라도 짐작할 수 있다.

 

※ 《난중일기》 1598년 1월 ※
1일. 맑다. 늦게 잠깐 눈이 왔다. 여러 장수들이 모두 와서 모였다.

 

2일. 맑다. 국기일(명종 인순왕후 심씨의 제삿날)이어서 공무를 보지 않았다. 새로 건조한 배를 진수시켰다. 해남현감(유형)과 진도군수(선의경)가 와서 보고 돌아갔다. 송대립, 송득운, 김붕만이 각기 관아로 나갔다.

 

4일. 무안현감(남언상)에게 곤장을 때렸다.

 

기록이 이렇게 짧아서야 그 무렵의 군영 경영은 물론 이순신의 건강이 어떠했는지를 자세히 확인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이충무공행록》을 보면 이에 대한 궁금증을 풀어줄 기록들이 있다. 다음은 이미 앞에서 소개한 바 있는 《이충무공행록》 부분이다.

 

※ 《이충무공행록》 ※
1597년 10월 14일. 우수영에 있다가 아들 면이 죽었다는 기별을 들었는데, 면은 공의 막내아들로서 용기와 지혜가 있고 또 말 타기 활쏘기에도 능하여 공은 늘 자기를 닮았다고 사랑해 왔던 것이다. 그해 9월에 어머님을 모시고 아산 본가에 가있다가 왜적들이 여염집을 분탕질한다는 말을 듣고 달려 나가 싸우다가 복병의 칼에 찔려 길에서 죽은 것이다.

 

공이 그 기별을 듣고 너무 애통한 나머지 그 후로부터 정신이 날마다 쇠약해져 갔다.

 

‘그 후로부터 날마다 정신이 쇠약해져 갔다’ 고 하였다. 자식을 잃은 어버이로서의 인간적인 모습이다.

 

※ 《이충무공행록》 ※
12월 5일. 나주 땅 보화도(목포 앞바다)에 있었을 때 위에서 분부가 계시었는데 “들으니 그대가 아직도 상례의 법대로만 지키고 방편을 쫓지 않는다고 하니, 사정으로는 간절하나 이제 나랏일이 한창 어려운 고비가 아니냐. 옛 사람의 말에도 전쟁에 나가서 용기 없는 것도 효(孝)가 아니라고 하였다. 전쟁에 나가서 용감하다는 것도 본래 소찬이나 먹어서 기운과 힘이 곤비하고 쇠약해진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는 일이다. 또 예(禮)에도 예법의 원칙과 방편이 있어서 반드시 원칙만을 지키라 한 것은 아니니 그대는 내 뜻을 받들어 속히 방편을 따르도록 하라” 고 하였으며, 그와 아울러 고기를 보내 왔기로 공은 슬프고 감격한 마음을 누를 길이 없었다.

 

《이충무공행록》에는 모친상을 입고 고기를 먹지 않아서 몸이 쇠약해진 것으로 해석되고 있지만, 그 같은 슬픔에 자식 잃은 슬픔까지 더해져서 정신마저 나날이 쇠약해지고 있었다. 또 날마다 식은땀으로 온 몸을 적실만큼 지병으로도 고생하고 있었다.

 

※ 《이충무공행록》 ※
그 뒤에 공이 고금도(전남 완도군 고금면)에 진을 치고 있던 때였다. 어느 날 낮잠이 어슴푸레 들었는데, 면이 공의 앞으로 다가와 슬피 울면서 말하기를 “저를 죽인 왜적을 아버지께서 죽여주십시오.” 하였다.

 

공은 대답하기를 “네가 살아 있을 때는 장사였는데 죽어서는 적을 죽일 수가 없느냐?” 고 하자, 면은 “제가 적의 손에 죽었기 때문에 겁이 나서 감히 죽이지를 못하옵니다” 라고 하였다.

 

이 말을 듣고 공이 문득 깨어 일어나 주위 사람들을 보고 “내 꿈이 이러이러하니 웬 일인고?” 하며 슬픔을 스스로 억제하지 못하고 그대로 팔을 굽혀 베고 눈을 감았는데, 몽롱한 가운데 면이 또 와서 울며 아뢰는 말이 “아버지로서 자식의 원수를 갚는 일에 저승과 이승에 무슨 차이가 있겠습니까. 원수가 같은 진 안에 있는 제 말을 예사로 듣고 죽이지 않으시다니요.” 하면서 통곡하고 가버렸다.

 

공이 깜짝 놀라 확인해보니 과연 새로 잡혀 온 왜적 하나가 배 속에 갇혀 있다고 하므로, 공의 명령으로 그 놈의 소행과 내력을 물었더니 바로 면을 죽인 놈임에 조금도 틀림이 없으므로, 동강을 내어 죽이라고 명령하였다.

 

현대사회에 살고 있는 오늘날의 우리로서는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다소 난감할 수도 있는 부분이다. 하지만 당시의 정서와 문화를 고려해 보면 억울하게 죽은 망자(亡者)의 한에 대한 동양적인 인생관이 담겨 있다. 즉, 임진왜란 때 죽은 조선 인구 절반에 해당하는 혼령들의 한이 들어 있고, 이러한 꿈을 꾸는 모습이 주위 사람들에게는 ‘정신이 날마다 쇠약해져 가고 있는’ 것으로 비춰졌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순신은 평소에도 자주 꿈을 꾸었고, 그 꿈들은 대부분 앞날에 생길 일들을 게시해주는 성격의 것이 많았다. 격물치지적인 수도가 깊어지면 입신의 경지에 이르게 된다는 말이 있는데, 유가(儒家)에서는 이 단계를 ‘전체대용(全體大用)의 활연히 트이는 경지’ 라고 말한다. 또한 성인(聖人)은 신과 인간의 중간적 존재이므로 하늘과 통할 수 있다고 한다. 그런 면에서 보면, 꿈을 통해서 많은 문제를 해결했던 이순신의 이 같은 일들을 비과학적이고 정신이 쇠약해진 결과로 보기에는 곤란한 점이 있다.

 

한편, 이순신은 이 기간 중에도 조선 수군의 재건과 백성들의 생활안정, 그리고 명나라 수군을 맞이하기 위해 병영건설 · 무기제조 · 군량미 비축 · 염전사업 착수 등 군영 경영 전반을 강화해 갔다.

 

※ 《이충무공행록》 ※
1598년 2월 17일, 고금도로 진을 옮겼다. 그 섬은 강진에서 남쪽으로 30여 리쯤 되는 곳에 있어서 산이 첩첩이 둘려 지세가 기이하고 또 그 곁에 농장이 있어서 아주 편리하므로, 공은 백성들을 모아 농사를 짓게 하고 거기서 군량 공급을 받았던 것이다. 그리하여 군대의 위세가 이미 강성해져서 남도 백성들이 공을 의지해 사는 자들이 수 만 호에 이르렀고 군대의 장엄함도 한산진보다 10배나 더하였다.

 

1598년 2월, 진을 고하도에서 고금도로 옮겼다. 고금도 역시 지리적으로는 한산도와 같은 ‘숲 속의 호랑이’ 형세를 갖추고 있었으며, 왜군 측의 해안 전진기지인 순천 왜교성의 고니시 군을 견제하기에도 좋았다. 또한 한산도와는 달리 주변에 완도 등 큰 섬들이 있어서 3만여 호나 되는 백성들이 정착해 살 수 있었다. 이것이 성공적인 군민 합동 경영 시대를 열게 한 밑거름이 되었다.

 

※ 《이충무공행록》 ※
7월 16일. 명나라 수군 도독 진린이 수군 5천 명을 거느리고 왔다. 공은 진린의 군사가 온다는 말을 듣고 술과 안주를 성대하게 차리고 또 군대의 위의(威儀)를 갖추고서 멀리나가 맞아들여 큰 잔치를 베풀었다. 이에 여러 장수들이 잔뜩 취하였고 병졸들도 서로 이르기를 “과연 훌륭한 장수다” 고 하며 감탄하였다.

 

진린 함대를 맞은 조선 수군은 그들에게 온갖 해산물과 곡식으로 진수성찬을 바쳤다. 이는 이순신의 군영 경영을 뒷받침한 3만 호의 후방 백성들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조선으로 건너온 명나라 군대 중 어느 누구도 진린의 군대만큼 풍족한 대접을 받지 못했다. 진린은 조선으로 오기 전, 조선에 출정해 있는 명군의 사정을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때문에 자신들이 이렇게 융숭한 대접을 받게 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진린의 입장에서는 자신의 함대를 지극 정성으로 맞아준 이순신이 고마웠다. 이런저런 이유로 두 사람의 첫 대면은 시작부터 감이 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