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전기록 - 38장 - 제2차 당항포 해전
● 제2차 당항포 해전
※ 《당항포파왜병장》 1594년 3월 10일 ※
삼가 적을 불태워 무찌른 일로 아뢰나이다.
거제와 웅천의 적들이 수없이 떼를 지어 진해, 고성 등지를 제멋대로 드나들면서 여염집에 불을 지르고 사람들을 죽이고 재물을 빼앗아 가기 때문에 적들이 오고 가는 기회를 엿보다가 형편을 보아 섬멸하려고 3도의 여러 장수들에게 명령하여 배들을 정비하고 무기들도 엄중히 갖추는 한편 각 처의 망대 있는 산봉우리에서 망보는 장수를 정해 보내면서 멀리 적세를 정찰하다가 적이 나타나는 즉시 급히 보고하라고 하였습니다.
이달 3월 3일 미시(오후 2시경)에 고성 땅 벽방의 망보는 장수 제한국 등이 와서 급보하기를 “오늘 날이 밝자 왜의 큰 배 10척, 중간 배 14척, 작은 배 7척이 영등포에서 나오기 시작했는데, 21척은 고성 땅 당항포로, 7척은 진해 땅 오리량(창원군 구산면)으로, 3척은 저도로 향해 갔습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신은 즉시 경상우수사 원균, 전라우수사 이억기 등에게 전령하여 다시금 엄중히 약속하는 한편, 순변사 이빈에게도 그 전에 약속한 대로 보병과 기병들을 거느리고 나와서 이미 육지로 올라간 적들을 모조리 무찔러 달라는 일로 공문을 띄운 후, 그날 술시(오후 8시경)에 3도의 여러 장수들을 한 사람도 빠짐없이 모두 거느리고 한산도 앞 바다에서 배를 띄워 어둠을 타고 몰래 배를 몰아 밤 2경(오후 10시경)에 거제도 안쪽에 있는 지도(통영군 용남면-견내량 바로 북쪽) 앞바다에 도착하여 밤을 지냈습니다. 4일 새벽 전선 20여 척을 견내량에 머물러 두어 불의의 사태에 대비토록 하였습니다.
순변사 이빈과 수륙전을 협의했다. 이번 작전은 경상감사 한효순이 조정에 건의하고 조정에서 어명으로 작전을 진행시킨, 규모가 큰 작전이었다. 조선 함대는 야간 항해로 견내량을 통과하여 지도에서 밤을 지냈다. 새벽에는 전선 20여 척을 지도에 머물러 두어 견내량을 지키게 했는데, 이유는 함대가 당항포 등지에서 작전 중일 때 한산도가 습격을 받으면 안 되기 때문이었다.
※ 《당항포파왜병장》 1594년 3월 10일 ※
또 3도에서 가볍고 빠른 정예선들을 뽑아 대오를 짰습니다. 전라좌도는 좌척후장 사도 첨사 김완, 제1령장 노천기, 제2령장 조장우, 좌별도장 전 첨사 배경남, 판관 이설, 좌위좌부장 녹도 만호 송여종, 보주통장 최도전, 우척후장 여도 만호 김인영, 제1령장 윤봉, 거북선돌격장 주부 이언량으로 구성하였고,
전라우도는 응양 별도장 우후 이정충, 좌응양장 어란포 만호 정담수, 우응양장 남도포 만호 강응표, 조전통장 배윤, 전 부장 해남 현감 위대기, 중부장 진도 군수 김만수, 좌부장 금갑도 만호 이정표, 통장 곽호신, 우위중부장 강진 현감 유해, 좌부장 목포 만호 전희광, 우부장 주부 김남준으로 구성하였고,
경상우도는 미조항 첨사 김승룡, 좌유격장 남해 현령 기효근, 우돌격부장 사량 만호 이여념, 좌척후장 고성 현령 조응도, 선봉장 사천 현감 기직남, 우척후장 웅천 현감 이운룡, 좌돌격장 평산포 만호 김축, 유격장 하동 현감 성천유, 좌선봉장 소비포 권관 이영남, 중위 우부장 당포 만호 하종해 등 총 31명의 장수로 선단을 구성하였습니다. 그리고 수군 조방장으로는 어영담을 뽑아 정하여 당항포 오리량 등지의 적선들이 정박해 있는 곳으로 은밀히 달려보냈습니다.
이 같은 진용에 300여 척의 대선단이다. 이번 작전의 규모와 3도수군통제영 함대의 위용을 확인할 수 있다.
※ 《당항포파왜병장》 1594년 3월 10일 ※
신은 이억기와 원균 등과 함께 많은 군사를 거느리고 영등포와 장문포의 적진 앞 바다에 이는 증도(창원군 구산면)바다에 학익진을 치고 온 바다를 가로 끊어서 앞으로는 우리 함대의 위세를 보이고 뒤로는 왜적들이 도망갈 길을 차단하였습니다.
함대 수뇌진도 각기 선단을 거느리고 초대형 학익진 퍼레이드를 펼치며 통제영 함대의 위세를 떨쳤다. 군악소리가 우렁차게 울리는 가운데 어영담을 중심으로 한 선단은 당항포와 진동리 쪽으로 간 왜선단을 치기 위해 이동했다.
※ 《당항포파왜병장》 1594년 3월 10일 ※
그러자 왜적의 배 10척이 진해 선창으로부터 나와서 기슭을 끼고 행선하는데, 조방장 어영담이 거느린 여러 장수들이 한꺼번에 돌진하여 좌우로 협공하자 6척은 진해 땅 읍전포(진해면 고현리)에서, 2척은 고성 땅 어선포(통영군 용남면)에서, 2척은 진해 땅 시구질포(창원군 구산면 비포리)에서 배를 버리고 육지로 올라가므로, 모조리 깨뜨리고 불태워버렸습니다.
녹도 만호 송여종이 왜선에 사로잡혀 있던 고성 정병 심거원과 진해 관비 공금, 함안 양가집 여자 남월 등을 구출해 왔으나, 또 다른 (조선인) 포로 두 명은 왜적들이 머리를 베어버리고 달아났습니다.
그런데 당항포로 들어가 정박한 왜선들은 큰 배, 중간 배, 작은 배 합하여 모두 21척인데, 멀리서 불타는 연기를 바라보고는 모두들 기가 꺾여서 저희 세력이 궁한 줄 알고 육지로 올라가서 진을 치므로 순변사 이빈에게 다시금 독촉 공문을 보냈습니다.
왜군들이 진동리와 당항리 등 육지로 도망치자 순변사 이빈에게 속히 토벌하라는 공문을 보냈다.
※ 《당항포파왜병장》 1594년 3월 10일 ※
그리고 어영담에게 곧바로 인솔하고 있는 여러 장수들을 거느리고 그곳으로 가도록 지시하였으나, 마침 저녁 썰물이 빠진 뒤이고 날까지 어두워져서 쳐들어 갈 수 없어서 당항포 포구를 가로질러 막고서 밤을 지냈습니다.
5일 새벽, 신과 이억기는 큰 바다에서 진을 치고 밖으로부터 들어오는 적들에 대비하고, 어영담은 여러 장수들과 함께 포구 안으로 곧바로 들어갔는데…
‘어영담은 여러 장수들과 함께’ 라고 했다. 그런데 《난중일기》를 보면 ‘조방장과 원균 수사와 함께 나아가 토벌하도록 전령하고’ 라고 기록되어 있다. 아마도 원균이 따라가기를 희망하므로 이순신은 마지못해 승낙을 했던 것 같다. 그 이유는, 당항포의 왜선들은 수송선들이었으므로 원균 수사가 나서지 않아도 될 일이었기 때문이다.
※ 《당항포파왜병장》 1594년 3월 10일 ※
그날 오후 2시경 어영담 등이 급보를 보내왔는데 “왜적들은 모두 도망가 버렸고 왜선 21척에는 기와와 굵은 대나무를 가득 실은 채 정박해 있으므로 몽땅 깨뜨리고 불태워버렸다” 고 하였습니다. 전라우수사 이억기 휘하 여러 장수들의 보고 역시 같은 내용이었습니다. 하세를 부리던 남은 적들은 한놈도 감히 나와서 항전하지 못하다가 밤중에 배를 버리고 도망가 버리고 말았습니다.
어영담이 보고서를 올려왔고, 이억기도 전라우수영 소속 선단으로부터 올라온 보고 내용을 통제사에게 보고해 왔다. 그런데 원균으로부터는 보고가 없었다. 왜 없었을까?
※ 《당항포파왜병장》 1594년 3월 10일 ※
이럴 때 수륙이 호응하여 한꺼번에 합공(合攻)하였더라면 거의 섬멸할 수 있었을 텐데, 수군과 육군이 주둔하고 있는 곳이 서로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에 쉽게 급히 연락을 취할 수 없어서 새장 속에 든 적들을 몽땅 다 잡지 못한 것이 참으로 통분합니다. 그러나 고성, 진해로 멋대로 돌아다니던 적들도 이제부터는 뒤가 염려되어 연방 돌아보느라 멋대로 나돌아 다니지는 못할 것입니다.
‘수군과 육군의 주둔지가 서로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에’ 라고 하였는데, 이빈 순변사의 육군이 해안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었고, 그래서 육지로 올라간 왜군들을 효과적으로 협공할 수 없었다. 그러나 이번 작전으로 고성과 진동리 지역의 왜군들은 물러갔다.
※ 《당항포파왜병장》 1594년 3월 10일 ※
이날 수군 전체가 합세하여 큰 바다를 가득 메운 채 대포를 쏘아대니 그 소리가 하늘을 진동시켰으며, 동서로 진을 바꾸면서 덮어 칠 기세를 보이니 영등포 · 장문포 · 제포 · 웅천 · 안골포 · 가덕 · 천성 등지에 버티고 있던 왜적들은 우리가 곧바로 쳐들어갈까봐 복병하고 있던 임시 막사들까지 몽땅 자기들 손으로 불 질러 버리고 겁을 먹고는 굴속으로 기어들어가서 밖에는 그림자조차 끊어지고 말았습니다.
6일, 고성 땅 아자음포(통영군 용남면)에서 출발하여 순풍에 돛을 달고 배의 머리와 꼬리가 서로 이어지게 하여 거제읍 앞에 있는 흉도(동부면) 앞바다를 향하여 가고 있을 때 남해 현령 기효근이 급보를 보내왔습니다. 그 내용은 “왜선 1척이 영등포로부터 나와서는 건너편에 상륙하였는데 명나라 병사 2명과 왜놈 8명이었으며, 명나라 병사가 소지하고 있던 패문도 같이 보낸다” 는 것이었습니다. 그 패문에 대하여 회답한 사연들은 따로 올린 장계에서 모두 말씀드렸습니다.
담종인 도사의 패문 건(왜군을 치기 위한 해전을 금하는 명령)은 이미 따로 장계를 올린 바 있었지만, 이번 장계에 다시 넣어 구체적인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 《당항포파왜병장》 1594년 3월 10일 ※
수군 전체 장병들은 승리한 기세로 기뻐 뛰면서 모두 사생결단으로 돌진하고자 하였고, 굶주리고 바짝 여위어 숨이 넘어가고 있던 병졸들까지 모두들 기꺼이 싸우러 나가서 왜선 30여 척을 모조리 불태워버리고 한 척도 빠져나가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그대로 장문포 · 영등포의 적들까지 차례차례 섬멸시킬 계획입니다.
‘굶주리고 여위어’ 라면서 수군의 어려운 사정을 언급했다.
※ 《당항포파왜병장》 1594년 3월 10일 ※
그런데 수군에 소속된 나주 등 아홉 고을에서 더 만들기로 되어 있는 전선과 원래의 전선 등이 지금까지 하나도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우도의 각 진(鎭)과 포구에서도 역시 각 고을에서 수군을 징발해 보내지 않기 때문에 절반이나 정비되지 않고 있습니다. 또 충청수사 구사직도 아직까지 진에 도착하지 않아서 군대의 위세가 다소 고단하고 약한 듯하여 형세를 보아 다시 진격하여 섬멸시키기로 하고, 3월 7일에 한산도 진중으로 다시 돌아왔습니다.
전라감사 이정암이 육군 쪽으로 편입시킨 9개의 후방 고을에서는 아직까지 수군에 협조하지 않고 있었다.
※ 《당항포파왜병장》 1594년 3월 10일 ※
3도의 여러 장수들이 적선을 불태워버린 숫자는 이억기, 어영담의 보고에 의하여 자세히 정리하여 아래에 적어두었습니다. 왜적의 물건들은, 저들은 본래 약탈하고 돌아다니던 적들인지라 중요한 물건이라고는 별로 없었습니다. 의복, 양식, 솥, 나무그릇 같은 잡물들뿐이므로 찾아내 온 군졸들에게 각각 나누어주었습니다.
※ 《당항포파왜병장》 1594년 3월 10일 ※
경상우수사 원균은 마치 적선 31척을 그 도(경상우수영) 장수들의 힘만으로 불태운 것처럼 공문을 작성하여 보냈는데, 그 때문에 진중의 장수들은 모두 해괴하게 여기고 있으니, 조정에서는 참작하고 헤아려 시행하시기 바랍니다.
원균은 전적을 보고하는 공문에서 마치 31척 모두를 경상우수영에서 깨친 것처럼 작성해서 통제영으로 보내왔다. 때문에 모두들 원균을 괘씸하게 생각했다. 이에 이순신은 아래와 같이 공적을 바로잡아 조정에 장계를 올렸다.
※ 《당항포파왜병장》 1594년 3월 10일 ※
전라좌우도 장수들의 공적
☞ 절충장군 수군 조방장 어영담 : 왜의 큰 배 2척을 불태워 깨뜨렸음.
☞ 우척후장 훈련부정 겸 여도 만호 김인영 : 왜의 큰 배 1척, 중간 배 1척을 불태워 깨뜨렸음.
☞ 우부장 서부 주부 겸 녹도 만호 송여종 : 왜의 큰 배 1척, 작은 배 1척을 불태워 깨뜨렸음.
☞ 우돌격장 훈련주부 이언량 : 왜의 중간 배 2척을 불태워 깨뜨렸음.
☞ 좌척후장 절충장군 사도 첨사 김완 : 왜의 중간 배 1척을 불태워 깨뜨렸음.
☞ 좌별도장 전 첨사 배경남, 훈련판관 이설 : 두 사람이 합력하여 왜의 큰 배 1척을 불태워 깨뜨렸음.
☞ 좌부 보전통장 전 훈련봉사 최도전, 좌척후 제1령장 정병보 노천기, 제2령장 정병보 조장우 : 서로 합력하여 왜의 작은 배 1척을 불태워 깨뜨렸음.
☞ 계원장 수군 우후 이정충 : 왜의 큰 배 1척을 불태워 깨뜨렸음.
☞ 전부장 해남 현감 위대기 : 왜의 중간 배 1척을 불태워 깨뜨렸음.
☞ 좌응양장 훈련판관 겸 어란 만호 정담수 : 왜의 큰 배 1척을 불태워 깨뜨렸음.
☞ 우응양장 훈련판관 겸 남도포 만호 강응표 : 왜의 중간 배 1척을 불태워 깨뜨렸음.
☞ 중위 좌부장 훈련판관 겸 금갑도 만호 이정표 : 왜의 중간 배 1척을 불태워 깨뜨렸음.
☞ 좌위 좌부장 훈련판관 겸 목포 만호 전희광 : 왜의 작은 배 1척을 불태워 깨뜨렸음.
☞ 우위 중부장 강진 현감 유해, 좌부장 주부 김남준 : 서로 합력하여 왜의 중간 배 1척을 불태워 깨뜨렸음.
☞ 우척후 제1령장 겸 사복 윤붕, 우응양 조전장 충순위 배윤, 중위 좌부 보주통장 정병보 곽호신 : 서로 합력하여 왜의 작은 배 1척을 불태워 깨뜨렸음.
경상도 여러 장수들의 공적
☞ 우수사 원균 : 왜의 중간 배 2척을 불태워 깨뜨렸음.
☞ 좌척후 제1선봉장 사천 현감 기직남 : 왜의 큰 배 1척을 불태워 깨뜨렸음.
☞ 좌돌격장 군기시 부정 겸 고성 현령 조응도 : 왜의 큰 배 1척을 불태워 깨뜨렸음.
☞ 좌척후 선봉부장 웅천 현감 이운룡 : 왜의 큰 배 1척을 불태워 깨뜨렸음.
☞ 유격장 하동 현감 성천유, 우부장 당포 만호 하종해 : 합력하여 왜의 중간 배 1척을 불태워 깨뜨렸음.
☞ 좌선장 훈련판관 겸 소비포 권관 이영남 : 왜의 큰 배 2척을 불태워 깨뜨렸음>
☞ 우돌격 도장 훈련정 겸 사량 만호 : 왜의 중간 배 1척을 불태워 깨뜨렸음
☞ 전부장 거제 현령 안위 : 왜의 중간 배 1척을 불태워 깨뜨렸음.
☞ 우유격장 진해 현감 정항 : 왜의 중간 배 1척을 불태워 깨뜨렸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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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왜선 |
중간 왜선 |
작은 왜선 |
계 |
전라좌우도 |
7 |
8 |
4 |
19 |
경상우도 |
5 |
6 |
0 |
11 |
충청도 |
0 |
0 |
0 |
0 |
합계 |
12 |
4 |
4 |
30 |
예전과 달리 원균의 경상우도에서도 많은 수의 왜선을 깨뜨렸다. 그 이유는 이번 작전을 위해서 한효순 감사와 이빈 순변사 등이 경상도 차원에서 관여했기 때문에 준비도 많았다. 또 세부적으로 보면 무장이 약한 왜군 수송선단에 대한 불태우기 작전이었기 때문에 특별한 해전의 노하우도 필요하지 않았다.
※ 《난중일기》 1594년 3월 ※
1일. 맑다. 망궐례를 행하였다. 활터에 올라가 검모포 만호에게 매를 때리고 도훈도는 처형하였다. 종사관(정경달)이 돌아왔다. 어두울 무렵 출발하려 할 때쯤 제한국(벽방 망장)이 보고하기를 “왜선이 벌써 모두 도망가고 없다” 고 하므로 추격을 중지시켰다. 초저녁에 장흥 제2선에 불이 나서 다 타버렸다.
2일. 맑다. 늦게 활터에 올라가 좌우 조방장과 순천(권준), 방답(이순신) 등과 함께 활을 쏘았다. 초저녁에 강진의 장작 쌓아 놓은 곳에 실화(失火)하여 다 타버렸다.
3일. 맑다. 아침에 전문(임금에게 명절에 하례하는 글)에 절을 하여 올려 보내고 그대로 활터에 앉아 있었는데, 경상 우후(이의득)가 와서 말하기를 “수군이 적을 많이 잡아오지 못했다고 해서 수사(원균)에게서 매를 맞았는데 또 발바닥까지 치려고 하더라” 고 하였다. 참으로 놀랄 일이다. 순천(권준), 좌우 조방장, 방답(이순신), 가리포(이응표), 좌우 우후들과 함께 활을 쏘았다.
유시(오후 6시경)에 벽방 망장(제한국)이 보고하기를 “왜선 6척이 오리량과 당항포 근처에 정박해 있다” 고 하므로 즉시 배를 집합시키라고 전령하여 큰 부대로 흉도(거제도) 앞바다에 진을 치고 정예선 30척은 우조방장 어영담이 거느리고 가서 적을 무찌르도록 하였다. 그리하여 초저녁에 배를 부려 지도에 이르렀다가 새벽 2시에 출발하였다.
4일. 맑다. 진해 앞바다에 이르러 왜선 6척을 뒤쫓아 가서 붙잡아 불태워버리고 저도에서 2척을 불태웠다. 소소강(고성군 마암면 두호리)에 왜선 14척이 들어왔다고 하므로 조방장 원 수사와 함께 나아가 토벌하도록 전령하고, 고성 땅 아자음포에서 진을 밤을 지냈다.
5일. 맑다. 겸사복(윤봉)을 당항포로 보내어 적선을 불태웠는지 탐문케 하였더니, 우조방장 어영담이 보고하기를 “적들이 우리 군사들의 위엄을 겁내어 밤을 타고 도망가 버렸으므로 빈 배 17ㅊ척을 남김없이 불태워버렸다” 고 하였으며, 경상수사(원균)의 보고도 같은 내용이었다.
오늘 아침 순변사에게서도 토벌을 독려하는 공문이 왔다. 원 수사는 나의 배로 왔고 여러 장수들은 각각 돌아갔다. 오늘 저녁 광양의 새로 만든 배가 들어왔다.
6일. 맑다. 늦게 거제로 향했다. 역풍으로 간신히 흉도(거제도)에 이르자 남해 현감(기효근)이 급히 보고하기를 “명나라 병사 두 명과 왜놈 여덟 놈이 패문을 가지고 들어왔기에 그 패문과 명나라 병사들을 올려 보냅니다” 고 하였다. 그것을 가져오게 하여 살펴보니 명나라 담도사(담종인)의 “적을 치지 말라” 는 내용의 패문이었다. 나는 몸이 몹시 괴로워 앉아 있기도 누워 있기도 불편하였다. 저녁에 우수사와 함께 명나라 병사를 만나보았다.
7일. 맑다. 몸이 극도로 불편하여 돌아눕기조차 어려웠다. 그래서 아랫사람을 시켜서 패문에 대한 답장을 써 보내도록 하였더니 글꼴이 말이 아니다. 원 수사가 손의갑을 시켜서 만들게 했지만, 그것 역시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나는 병중에 억지로 일어나 앉아 글을 지은 후 정사립(군관)을 시켜서 써 보내게 하였다. 미시(오후 2시경)에 출발하여 한산진에 이르렀다.
8일. 맑다. 병세는 별로 달라진 것이 없다. 기운은 더욱 없어 하루 종일 앓았다.
9일. 맑다. 기운이 조금 나은 듯하므로 따뜻한 방으로 옮겨 누웠다. 다른 증세는 없다.
10일. 맑다. 병세는 차츰 덜해졌지만 열기가 위로 치받아 올라와서 그저 찬 것만 마시고 싶었다.
11일. 큰 비가 종일 내렸다. 병세가 훨씬 덜해졌다. 열도 내렸다. 다행, 다행이다.
12일. 맑으나 큰바람이 불었다. 몸이 몹시 불편하였다. 장계의 정서를 마쳤다.
13일. 맑다. 아침에 장계를 봉해 올렸다. 병은 차츰 낫는 것 같았으나 기력은 몹시 떨어졌다. 회와 송두남을 집으로 보냈다.
14일. 비. 병은 나은 듯하나 머리가 무겁고 불쾌하였다. 저녁에 광양 현감(송전)과 강진 현감(유해), 배첨사(배경남)들이 같이 돌아갔다. 들으니 충청수사가 벌써 신장에 도착했다고 한다.
15일. 비는 그쳤으나 바람이 크게 불었다. 하루 종일 끙끙 앓았다. 미조항 첨사(김승룡)가 돌아갔다.
16일. 맑다. 몸이 몹시 불편하였다. 우수사가 와서 만나보았다. 충청수사가 전선 9척을 거느리고 진에 도착했다.
충청도 수군이 도착하였다.
※ 《난중일기》 1594년 3월 ※
17일. 맑다. 몸이 쾌차되지 않았다. 해남 현감(위대기)은 새 현감과 교대하는 일로 나가고 황득중 등은 복병할 일로 거제도로 들어갔다. 탐후선이 들어왔다.
18일. 맑다. 몸이 몹시 불편하였다. 남해 현감 기효근, 보성군수 김득광, 소비포 권관(이영남), 적량이 와서 보았다. 기(기효근)는 파종 일 때문에 고을로 돌아갔다. 낙안의 유위장과 향소들을 잡아와서 가두었다.
19일. 맑다. 몸이 불편하였다. 종일 앓았다.
20일. 맑다. 몸이 불편하였다.
21일. 맑다. 몸이 불편하였다. 녹명관으로 여도 만호(김인영), 남도 만호(강응표), 소비포 권관(이영남)을 뽑아 정했다.
22일. 맑다. 몸이 좀 나은 것 같았다. 도원수의 회답 공문이 왔는데 담도사의 자문(공문)과 왜장의 서계(편지)를 조 파총이 가지고 갔다고 한다.
명나라 담종인의 해전 금지 공문이 권율에게도 왔다.
※ 《진왜정장》 1593년 3월 10일 ※
삼가 왜의 정황에 대하여 아뢰나이다.
이달 3월 6일 거제읍 앞에 있는 흉도 바다에서 진을 치고 있었는데, 남해 현령 기효근이 와서 급보한 바에 의하면 “왜의 작은 배 1척이 고성 건너편에 상륙하여 우리 배를 불렀는데, 그 형상을 바라보니 붉은 옷과 푸른 옷을 입은 명나라 사람 2명과 왜인 8명이었다” 고 하였습니다.
명나라 사람이 소지하고 있던 패문도 같이 보내왔기에 살펴보니, 그것은 명나라 선유도사부 담 도사의 왜적 토벌을 금지하는 패문이었습니다. 그래서 명나라 병사들을 불러들여 그 까닭을 물어보았더니, 작년 11월에 도사 담 대인 등이 웅천에 이르러 지금까지 눌러 있으면서 명나라 조정에서 화친을 허락하는 명령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는데, 근래 왜인들이 우리 수군의 위세에 겁을 먹고 상심, 낙담하여 도사 대인 앞에서 온갖 말로 애걸복걸하였기 때문에 이 패문을 만들어 보내게 된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교활하고 속이기를 잘 하는 왜놈들이 온갖 간교한 꾀를 다 내어 저희 스스로 이 패문을 만들어 가지고는 그곳에 있는 명나라 군사들에게 주어서 명나라 사람들이 부쳐 보내도록 애걸했던 것임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이 무렵 웅천에서는 심유경-고니시 간의 강화회담이 진행되고 있었고, 담종인은 명나라 측 대표였다. ‘왜인들이 온갖 간교한 꾀를 다 내어’ 라고 하였는바, 왜군들은 회담 중에도 남해안 일대에 왜성 쌓는 작업을 계속 진행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순신으로서는 담종인 조차도 믿기 어려웠다.
※ 《진왜정장》 1593년 3월 10일 ※
왜적을 무찌르지 말라는 말은 경략, 제독, 총병부 같은 데서는 아직 분명한 지시의 명령이 내려오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패문을 명나라 병사 2명이 이미 가지고 왔고, 또 남해 현령 기효근이 공문까지 만들어 같이 보내왔으므로 거절하고 받지 않는다는 것도 온당치 않을 뿐더러, 우리 수군 역시 및처 다 모이지 아니하여 군대의 위세가 고단하고 약한 것 같아서 패문에 회답을 만들어 보내면서 짐짓 (왜적을 치는 일을) 정지하려는 뜻인 것처럼 보이기는 했으나, 실상은 왜적의 정세를 다시 탐색하여 기회를 보아 나아가 칠 계획입니다. 패문은 봉하여 올려 보내오며, (담도사의 패문에 대한) 회답은 이렇게 하였습니다.
명나라 쪽에서 조선 수군에게 해전 금지명령을 노골적으로 보내온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이순신은 처음에는 패문을 받지 않으려고 했지만 ‘적의 정세를 정탐’ 하고자 하는 목적도 있었기에 명나라 병사를 불러들여 패문을 받았다. 다음은 패문에 대한 회답 내용이다.
※ 《진왜정장》 1593년 3월 10일 ※
“조선국 신하들은 삼가 명나라의 선유도사 대인 앞에 답서를 드립니다.
왜적이 스스로 트집을 잡아 군사를 이끌고 바다를 건너와 무고한 우리 백성들을 살육하고 또 서울로 쳐들어가 흉악한 짓들을 저지른 것이 이루 말할 수 없으므로, 온 나라 신하와 백성들은 그 통분함이 뼛속 깊이 박혀서 이 왜적들과는 같은 하늘 아래에서 살지 않기로 맹세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각 도의 배들을 모조리 정비하여 곳곳에 주둔하면서 동서에서 호응하고 육지에 있는 장수들과도 의논하여 수륙으로 합동 공격하여 남아 있는 왜적들의 배 한 척, 노 한 개도 돌아가지 못하게 함으로써 나라의 원수를 갚고자 하여 이달(3월) 3일 선봉선 200여 척을 거느리고 곧바로 거제도로 들어가 저들의 소굴을 싹 쓸어버리고 섬멸함으로써 왜적의 종자까지 없애고자 하였습니다.
그런데 왜적의 배 30여 척이 고성 · 진해 지역으로 함부로 들어와서 여염집들을 불태우고 우리 백성들을 죽이거나 사로잡아 가고, 기와를 나르고 대나무를 찍어서 저희 배에 가득 싣고 가는데, 그 하는 짓들을 생각하면 통분하기 그지없습니다.”
적들의 배를 쳐부수어 불태우고 흉악한 적도들의 뒤를 쫓아서 도원수에게 보고한 다음, 수군을 거느리고 나아가 합세하여 적들을 짓밟으려 할 때, 명 · 왜 간에 회담이 진행되고 있는데도 왜군들은 전라도 진출을 위해 왜성을 야금야금 쌓고 있었으므로, 이를 쳐부수고 있었다고 했다.
※ 《진왜정장》 1593년 3월 10일 ※
마침 도사 대인의 타이르는 패문이 뜻밖에 진중에 도달하였기에 받들어 재삼 읽어보니 순순히 타이르신 말씀이 간절하고 곡진하기 그지없었습니다. 그러나 다만 패문의 말씀 가운데 ‘일본 장수들이 마음을 돌려서 귀화하지 않는 자 없고 모두들 무기를 거두어 저희 나라로 돌아가고 싶어하니, 너희 모든 병선들은 속히 제 고장으로 돌아가고 일본 진영에 가까이 하여 트집을 일으키지 말도록 하라’ 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왜인들이 진을 치고 있는 거제 · 웅천 · 김해 · 동래 등지는 모두 다 우리 땅인데 우리에게 일본 진영에 가까이 가지 말라고 하신 것은 무슨 뜻입니까? 또 우리에게 속히 제 고장으로 돌아가라고 하셨는데, 제 고장이란 어디를 가리키는 것인지 또한 알 길이 없습니다. 또 트집을 잡은 쪽은 우리가 아니고 왜인들입니다.
‘저희 나라로 돌아가고 싶어하니’ 라고 하였는바, 고니시 등 일부 왜장들은 그렇게 하고 싶어했다. 그러나 가토 기요마사와 히데요시는 그렇지 않았기에 정유재란이 일어나게 된다.
※ 《진왜정장》 1593년 3월 10일 ※
원래 왜인들이란 그 속임수가 천변만화하여 헤아리기 어렵기 때문에 예로부터 저들이 신의를 지켰다는 말은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흉악하고 교활한 적도들은 아직도 그 포악한 행동을 멈추지 않고, 바닷가에 진을 치고는 해가 지나도 물러가지 않고 여러 곳을 멧돼지처럼 쳐들어와서 사람을 죽이고 재물을 약탈하기를 전일보다 곱절이나 더한데, 무기를 거두어 바다를 건너 돌아가려는 생각이 어디에 있다는 것입니까?
지금 화의를 맺고자 한다는 것은 사실은 속임수와 거짓말입니다. 그러나 대인의 뜻을 감히 어기기 어려우므로 우선은 기한을 정해놓고 지켜보면서 우리 임금께 급히 아뢰려 합니다. 그러니 대인께서는 이런 뜻을 널리 살피시어 왜적들에게 하늘의 뜻을 거스르는 것과 하늘의 뜻에 따르는 것의 도리가 어떤 것인지 알도록 해주신다면 천만 다행이겠습니다.
왜군들을 신뢰할 수 없는 점을 통렬히 지적했다. 하지만 담종인의 지시를 정면으로 어길 수도 없었기 때문에 얼마 동안 공격을 멈추고 지켜보겠다고 하면서, 왜군들에게도 ‘하늘의 도리’ 를 알려주라고 따끔하게 조언했다.
※ 《진왜정장》 1593년 3월 10일 ※
이 패문에는 신과 원균, 이억기가 같이 서명하여 보냈습니다. 한편, 도원수 권율에게 ‘담 도사라는 이가 어느 달 어느 날에 웅천으로 내려오는지 여부를 탐문하여 회답해 달라’ 고 요청하는 공문을 보냈습니다.
위에서 말한 명나라 군사와 함께 나온 우리나라 포로로서 상주에 사는 사가의 종 희순이 왜인의 말을 할 줄 알아 통역 일을 겸하기 위하여 왔으므로, 명나라 군사 무화에게 희순을 도로 데려갈 수는 없다는 것을 이치를 따져가며 타일러 주었더니 주저하면서 결정하지 못하기에, 또다시 타일러 말하기를, “항복을 애걸하기 위해 이곳에 왔다고 하면서 우리나라 사람을 어떻게 도로 데리고 갈 수 있다는 것이냐” 고 하였더니, 명나라 군사가 말문이 막혀서 대답을 못하고 그대로 내버리고 돌아갔습니다. 그래서 왜적의 형세와 명나라 군사가 이리로 오게 된 내력들을 심문하였던바, 그의 대답은 이러하였습니다.
이순신은 통역관으로 따라온 조선인 통역관을 억류해 놓고 정보를 캐기 시작했다.
※ 《진왜정장》 1593년 3월 10일 ※
본래 상주에서 살았는데 작년 4월에 서울에서 내려온 왜적들에게 붙잡혀 포로가 되어 부산으로 내려왔습니다. 그 후 왜놈들이 진주성을 함락시키고는 부산으로 돌아왔습니다. 그해 7월에 명나라 군사 15명이 한꺼번에 웅천으로 옮겨왔는데, 그곳의 왜장 묵감둔의 진중에 지금까지 그대로 머물러 있습니다. 명나라 군사 30여 명이 지난 11월에 또 뒤따라 왔습니다.
명나라 군사가 패문을 가지고 오게 된 것은 우리 수군이 바다를 뒤덮고 일제히 진군하여 왜선을 쳐부수자 왜장 목감둔은 곧바로 저희들을 짓밟을까봐 겁을 먹고는 명나라 장수에게 간절히 애걸하여 이 글을 만들어 보내게 된 것입니다. 그때 왜장은 소인과 무화에게 조선 진중으로 가라고 하면서 말하기를 ‘일본 사람들은 서로 싸우고 싶어하지 않는데 조선에서는 무엇 때문에 나와서 싸우려고 하느냐’ 라고 말하라고 시키고 내보낸 것입니다.
그리고 웅천의 적들은 세 진영인데 한 진영에 혹 천여 명, 혹 8백~9백 명씩이며, 병들어 죽는 놈들도 많았고 또 진을 치고 성을 쌓는 토목공사에 시달려서 저희 본국으로 도망가는 자도 부지기수입니다. 배는 세 진영의 중 · 소선 합하여 300여 척은 되어 보였으며, 큰 배는 단지 2척뿐이었고, 장수는 한 진영은 묵감둔이고, 또 한 진영은 소서여안, 또 한 진영은 유마청신입니다.
그런데 작년 11월에 늙은 명나라 장수 한 분이 진중으로 와서 그대로 머물고 있다가 왜놈 세 명을 데리고 문서를 가지고 중국으로 떠나갔는데, 그 왜놈들이 돌아오는 대로 왜적들은 전부 저희 본국으로 돌아간다고 하였습니다.
늙은 명나라 장수는 심유경이다. 소서여안은 심유경-고니시의 각본에 따라 히데요시의 ‘가짜 항복 문서’ 를 지참하고 북경에서 명나라 황제를 만난다.
※ 《선조실록》 ※
“우리나라 남녀들은 혹은 일본으로 들여보냈고 혹은 남겨두어 심부름도 시키며 또 저희 본국 여인들도 많이 데려 와서 심부름을 시키고 있습니다. 왜적들이 날마다 하는 일은 혹은 총알을 두들겨 만들기도 하고, 혹은 성을 쌓고 집을 짓는 일도 합니다. 군량은 이달 초에 중간 배 6척에 가득 싣고 왔는데, 새로 오는 왜적들도 혹은 20명씩, 혹은 30명씩 배로 싣고 왔습니다. 그리고 그 밖의 다른 일들은 무식한 소인들로서는 알 수 없었습니다.” 고 하였습니다.
웅천 지역에 있는 왜군 진영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의 모습이다.
※ 《진왜정장》 1593년 3월 10일 ※
위에서 말한 종 희순은 적에게 포로로 잡혀가서 오랫동안 적진 가운데 있었으므로 적들의 간교한 꾀와 속사정을 모르는 것이 없었습니다. 때문에 다시 반복해서 추궁해 보니 바른대로 말하지 아니할 뿐만 아니라 왜적의 진영으로 돌아가려는 생각이 말과 얼굴에 나타나기에 무서운 형틀을 차려놓고 그 앞에 앉혀놓은 후 대강 문초를 받았으나, 꾸며대는 말이 많은 것 같았습니다. 이미 본국으로 돌아와서까지 전혀 머물러 있을 생각을 하지 않으니 나라를 배반한 죄인을 잠깐이나마 기다려 줄 수 없지만, 뒷날에 다시 또 물을 것이 있을 것이라 생각되어 우선 흥양현에 옮겨다 가두어 놓고 조정의 명령을 기다립니다.
이미 이들의 마음이 조선을 떠나 왜적에게 기울어진 상태임을 확인하고 곧바로 죽이고 싶었지만, 왜적에 관한 정보를 더 알아내기 위하여 잠시 살려두고 흥양현으로 이송 수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