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임진왜란

해전기록 - 37장 - 이순신과 원균

구름위 2013. 5. 1. 12:48

※ 《진왜정장》 1594년 1월 5일 ※
삼가 왜적의 정황에 대해 아뢰나이다.
경상우수사 원균이 보고서를 보내왔는데 그 내용은 이러했습니다.

“거제 땅 둔덕, 사등, 읍내(거제읍) 등지에 왜적이 어떤 때는 1백여 명씩 떼를 지어 다니고, 각처의 산간으로 다니는 적들도 얼마인지 모릅니다. 거제의 사수 제득호 등이 밤에 몰래 가서 지난 12월 13일 주산 봉우리까지 올라가 바라보니 지세포와 옥포 성 안팎에 왜적 1백여 명이 막을 치고 버티고 있었습니다. 장문포(장목면 장목리)에서 읍내까지, 그리고 율포(장목면 대금리)에서 지세포까지 사이의 길목 요해처와 여러 곳 들판에 막을 치고 있는 숫자가 혹 4, 5개씩 연달아 있는데, 낮에는 흩어져 돌아다니고 밤에는 횃불로 서로 연락하고 있었습니다. 수치와 삼기리 같은 곳에도 50여 명씩 왕래하고 있었습니다.

 

16일에 명진포에 이르러 바라보니, 왜적 1백여 명이 하루 종일 진을 치고 있다고 하기에 사수들을 많이 뽑아 다시가서 적의 형세를 정탐하라고 하였습니다.”

 

뒤어어 도착한 원 수사의 보고서에서는 또 이렇게 적혀 있었습니다.

“고성 현령(조응도)의 보고에 의하면, 이달 12월 23일에 왜선 3척은 춘원포(광도면 예승포) 선암에, 또 6척은 소질소포(고성군 마암면 두호리)와 당항포에 와서 정박하고 있으면서 산막에 숨어 있는 (조선) 사람들을 모두 찾아낸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또 거제현 초탐장인 본영의 군관과 매복장 제득호 등이 와서 보고하기를 ‘영등(장목면 구영리) · 소진(송진포리) · 장문(장목리) 등 세 곳에 있는 적들은 산과 들에 두루 퍼져 있고, 서쪽으로는 명진 · 산촌(동부면 산촌리) · 소라포(일운면 구조라리) · 지세포 · 삼거리 등지의 왜적들도 무려 1백여 명이 패거리를 지어 함부로 행동하고 있으며, 읍내 삼대문(거제읍 동하리) 밖에 막을 치고 있는 숫자도 1백여 개나 되고, 배는 6척이 대어 있었으며, 옥포성 안팎과 아주 · 관전 등지에도 숲처럼 막사를 빼곡히 치고 있었는데 그 수가 얼마나 되는지는 알 수 없었습니다.

 

산과 들에서 나무를 잘라다가 지금도 계속 막사를 짓고 있으며, 또 읍내에서 장문포에 이르기까지의 길가와 산허리 각처에서는 연달아 막사를 짓느라 도처에서 산역을 한창 벌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횃불과 대포소리는 좌도의 부산포와 동래 등지에 가득했고, 창원 · 진해에서 연해안 일대에 이르기까지는 불빛이 벌려 있었습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이같이 흉악하고 교활한 적들이 외딴 섬에 버티고 앉아서 산과 들판을 마음대로 쏘다니니 참으로 통분할 일입니다.

 

지난해 12월 12일 여수로 돌아와 있던 이순신에게 원균이 거제 · 고성 · 영등 · 창원 · 부산 등지에 왜군들이 창궐하고 있다고 보고해 왔다.

 

※ 《진왜정장》 1594년 1월 5일 ※
그래서 봄이 오면 대거 수군을 이끌고 나아가 한 섬을 그대로 둘러싸고 남김없이 무찔러버릴 계획입니다. 그러나 3도의 수군을 다 합해 봐야 전선이 겨우 1백여 척쯤 되니, 병력이 고단하고 약한 실정입니다. 그래서 이미 3도의 수사들에게 빨리 전선을 더 만들되 겨울 전에 끝내라고 지시하였습니다. 신에게 소속된 각 고을과 포구에서는 이미 전선을 다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연해안 고을에서 장정들을 뽑아내어 사부 및 격군들로 배치하여 조정하는 일은 명령을 내리는 곳이 여러 군데여서 소란스럽기만 하고 일이 매듭지어지지 못하고 있습니다. 다시 모이기로 약속한 때는 이미 박두했는데 이 일을 빨리 매듭지을 길이 없으니, 참으로 답답하고 걱정스럽습니다.

 

신은 우선 본 도로 돌아가서 직접 일들을 점검한 후 군사들을 거느리고 일제히 돌아와야겠다는 내용으로 여러 가지 사유를 들어 장계를 올린 후에, 지난 12월 12일 본영으로 돌아와서 현재 점검하면서 빨리 일들을 매듭짓도록 독려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전라우수사 이억기와 충청수사 구사직에게는 소속 수군들을 거느리고 기일 안에 달려오라고 전령하였습니다.

 

‘봄이 오면 수군을 이끌고’ 나가려고 했다. 그런데 전라감영과 조정에서 수군력 증강에 발목을 잡는 것 같은 조치들을 취했기 때문에 출전 준비에 차질이 빚어졌다.

 

※ 《금연읍수륙교침지폐사장》 1594년 1월 16일 ※
삼가 결정하여 주시기를 바라는 일로 아뢰나이다.
신의 장계에 대하여 비변사에서 회답한 공문의 내용은 이러하였습니다.

“(비변사에서는 다음과 같이 건의하였다.)
‘적병들이 지금 거제도에 있으므로 앞으로 닥쳐올 근심은 지난해보다 배나 더 심할 것입니다. 수군에 소속된 연해안 여러 고을에 속한 수군 병사들을 다시는 육군으로 옮겨서는 안 된다는 일로 전에 이미 분부를 내리셨습니다.

 

그런데 순찰사 이정암이 군대의 편성을 고쳐서 다만 전라 좌우도의 각 다섯 고을만 그대로 수군에 소속시키고 나머지 고을들은 모두 (나주 등 9개 고을) 다시 육군으로 소속시켰는데, 좌우도의 각 다섯 고을들조차 다른 곳(육군)에서 징발해 가고 있다고 하는바, 이는 필시 경상도에서 군사들을 많이 뽑아야 하지만 자체에서 그 수를 채우기가 어렵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수군과 육군은 각각 그 소속된 곳이 있는데 서로 옮기게 되면 군사들은 안정을 얻지 못하고, 또 명령이 나오는 곳이 여러 곳이 되면 단지 수군에게만 해로울 뿐만 아니라 육군에게도 역시 이익이 없는 일입니다. 그리고 군량과 무기 등을 징발당해 버린다면 비록 이미 전선을 준비해 놓았다 하더라도 일을 성시시키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더욱이 적들과 대진(對陣)하고 있어서 성패가 순식간에 달린 이 판국에 수군과 육군의 소속 문제를 아직도 어느 한 쪽으로 결정짓지 못하고 이같이 혼란스럽게만 하다가는 혹시 큰일을 그르칠까 염려됩니다.

 

지금 우선은 일단 내리신 분부대로 군사를 이동시키지 말라고 순찰사 이정암과 이순신에게 다 같이 공문을 내려 보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였더니, 이에 대하여 전하께서는 ‘건의한 대로 하라.’ 고 승인해 주셨다.” 라고 하였습니다.

 

좌도의 다섯 고을과 우도의 다섯 고을은 그대로 수군에 소속되어 있기에 신은 전선을 더 많이 만드는 일을 독려하여 일을 끝내고 정해진 기한 안에 돌아오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우도의 나주 외에 아홉 고을도 본래 수군에 소속된 고을이므로 전선 만드는 일을 다른 고을과 마찬가지로 배정하여 더 만들게 하였더니, 나주 목사 이용순이 다음과 같이 보고해 왔습니다.

 

“순찰사의 공문에서 ‘본 주(나주)와 무안 · 함평 · 영광 · 무장 · 흥덕 · 고부 · 부안 · 옥구 등 연해안 아홉 고을은 육군으로 옮겨 배속시켰으니 전선 더 만드는 일을 모두 중지하라’ 고 하였으므로 배를 더 만들 수가 없습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근래에 와서 영남 좌도에 있던 적들이 우도로 옮겨와 모두 거제에 모였는데, 그 형세가 아무래도 호남으로 쳐들어오려는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므로 수군을 정비해 거느리고 나가서 힘을 합쳐 적의 앞길을 끊어 막는 일이 지금 당장 매우 급하므로 전선 1척도 크게 관계가 되는 이때에, 아홉 고을에서 더 만들어내도록 배정된 전선 20여 척을 일시에 중지시킨다면 바다를 방비하는 일이 참으로 걱정스러울 뿐만 아니라, 특히 전하께서 간곡하게 분부 내리신 본래의 뜻도 없어지게 됩니다.

 

이미 아홉 고을에 전선을 더 만들도록 명령해 놓은 것은 그대로 일을 끝내어 정해진 기한 안에 배를 몰고 와서 대도록 다시금 순찰사 이정암에게 엄히 지시하셔서 수군의 위엄을 드높일 수 있게 해주시고, 연해안 각 고을의 군사들과 백성들이 수군과 육군으로부터 교대로 징발당하는 괴로움을 면할 수 있게 해주시기를 바라면서 감히 어리석은 생각을 진술하는 바입니다.

 

전라감사 이정암은 비변사의 지시를 어겨 가면서까지 전라우도의 9개 고을들을 육군 쪽에 귀속시키고 있었다.

 

※ 《환진장》 1594년 1월 17일 ※
삼가 진영으로 돌아가는 일로 아뢰나이다.
본 도에서 전선을 더 많이 만드는 일을 직접 살피고 조처해야겠다는 사유를 들어 장계를 올린 다음, 지난 12월 12일(계사년)에 본 도로 돌아와서 일을 점검하고 독려하였습니다.

 

본영에 소속된 수군은 다섯 고을로서 순천 전선 10척, 흥양 10척, 보성 8척, 광양 4척, 낙안 3척은 벌써 다 만들었으나 수많은 사부와 격군들을 한꺼번에 채울 수 없어서 일제히 떠나기가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순천 5척, 광양 2척, 흥양 5척, 보성 4척, 낙안 2척만을 우선 독려하여 거느리고 오늘 정월 17일(갑오년) 거제 땅 한산도 진중으로 떠나가면서 아직 미처 준비가 덜 된 전선들도 뒤따라 밤낮 없이 돌아오도록 명령을 전하였습니다.

 

그런데 우도의 전선 수효는 좌도의 배나 되므로 그 많은 사부와 격군들을 정해진 기한 안에 다 채워 넣기는 필시 어려울 것이므로, 신의 종사관 정경달에게 “돌아다니며 점검하고 조치하여 우수사 이억기와 만나기로 약속한 곳으로 전선을 독려하여 보내도록 하라” 고 엄히 지시하여 보냈습니다.

 

그러하오니 순찰사 이정암에게도 전선 들여보내는 일을 각별히 독려하라고 해당 부서에서 지시 공문을 내려 보내주시기 바랍니다.

 

3도수군통제영의 본영이 여수라는 점을 밝혀 둔 기록이다. 또 한산도는 본영이 아닌 한산진이라 했으며, 이순신은 본영과 한산진을 바쁘게 오가며 후방 및 군영 경영에 매진했다.

 

※ 《환진장》 1594년 1얼 17일 ※
삼가 진으로 돌아가는 일로 아뢰나이다.
전선에 더 만드는 전선에 사부와 격군들을 채우는 문제를 직접 처리하기 위하여 잠깐 본 도로 돌아가고자 한다는 사유를 들어 장계한 다음, 지난 12월 12일 본 도로 돌아와서 점검해 보았습니다. 그랬더니 연해안 다섯 고을에서 뽑아낼 장정들은 이미 육군에서 징발해 갔으며, 또 태반이나 도망가서 명부에 이름만 남아 있고 실제로는 없었습니다.

 

또 수군의 경우 각 고을 수령들은 게으르고 해이해진 것이 습관처럼 되어서 징병 대상자를 일일이 찾아내어 보내는 일에는 관심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지금은 도망병이 생겨도, 순찰사 이정암이 공문까지 돌려서 친족이나 이웃에서 대신 징발하여 채우는 일은 없도록 하라고 지시하였기 때문에, 어느 한 가지 일도 제대로 되는 것이 없습니다. 현재 있는 사람조차 잡아보내지 않는 것이 더욱 심해진 실정입니다.

 

관리들은 찾아서 잡아 보내라는 명령이 내려와도 그저 탈이 났다는 핑계만 대고 보내주지 않고 있습니다. 전선은 벌써 더 만들어 놓았지만 격군을 채울 길이 없으니 참으로 통분합니다. 전라우도는 신이 종사관 정경달을 보내서 돌아다니며 점검하고 잘 정비하여 우수사 이억기와 만나기로 약속한 곳으로 급히 보내도록 하였으며, 신에게 소속된 각 고을과 포구의 전선들은 겨우 온전히 갖추어 정월 17일인 오늘 (한산도의) 진으로 돌아갑니다.

 

이정암은 이순신의 수군 증강 노력에 부정적인 모습이다.

 

※ 《난중일기》 1594년 1월 1일 ※
비가 퍼붓듯이 내렸다. 어머님을 모시고 같이 한 살을 더 먹게 되니 이것은 난리 중에도 다행한 일이다. 늦게 군사들을 훈련시키고 전쟁에 대비할 일로 본영으로 돌아오는데 비가 그치지 않았다.

 

이 무렵 이순신의 노모는 여수로 피난 와서 함께 설을 쇠고 있었다.

 

※ 《난중일기》 1594년 1월 ※
2일. 비는 그쳤으나 흐렸다. 국기일이어서(명종 인순왕후 심씨의 제삿날) 공무를 보지 않았다.

3일. 맑다. 동헌에 나가 공무를 보고, 날이 저문 후 관아로 들어와 여러 조카들과 이야기하였다.

4일. 맑다. 동헌에 나가 공무를 보았다.

5일. 비.

6일. 비가 왔다. 동헌에 나가서 남평 고을의 아전 도병방을(징병 업무를 태만히 한 죄로) 처형하였다.

7일. 비가 왔다. 동헌에 앉아 공무를 보았다. 저녁에 남의길이 들어와서 마주 앉아 이야기하다가 밤이 깊어서야 헤어졌다.

8일. 맑다. 동헌에 나가 앉아 공무를 보았다. 남원고을의 아전 도병방을 (징병업무를 태만히 한 죄로) 처형하였다.

9일. 맑다.

10일. 맑다. 아침에 남의길을 맞아들여 이야기하였다. 피난 가서 고생한 일들을 전부 말하는데 개탄스러움을 이기지 못하였다.

11일. 흐리되 비는 오지 않다. 아침에 (피난 와 계신) 어머님을 뵈려고 배를 타고 바람을 따라 곧바로 고음천(여수시 웅천동)에 대었다. 남의길, 윤사행, 조카 분과 같이 가서 어머님을 뵈었다. 기운은 없으셨으나 말씀은 또록또록 하셨다. 적을 토벌할 일이 급하여 오래 머물러 있지 못했다.

 

노모께서 피난 와 있는 여수 고음천으로 어머니를 뵈러 갔다.

 

※ 《난중일기》 1594년 1월 ※
12일. 맑다. 아침을 먹은 뒤에 어머님께 하직을 고하니 “잘 가거라! 나라의 치욕을 크게 씻어라!” 하고 두 번 세 번 거듭 타이르시며 이별을 조금도 슬퍼하지 않으셨다. 선창에 돌아오니 몸이 불편한 것 같아서 곧바로 뒷방으로 들어갔다.

13일. 맑으나 바람이 크게 불었다. 몸이 몹시 불편하여 자리에 누워 땀을 흘렸다.

14일. 흐리고 바람이 크게 불었다. 늦게 동헌에 나가서 위에 올릴 장계를 봉함하고, 또 승장 의능을 면천시켜 준다고 한 (위조)문서를 봉해 올렸다.

15일. 맑다.

16일. 늦게 동헌에 나갔더니 황득중이 들어왔다. 들으니, 문학 유몽인이 암행어사로서 흥양현에 들어갔다고 한다.

17일. 새벽에는 눈이 오고 늦게 비가 왔다. 이른 아침에 배에 올랐다. 아우 여필과 여러 조카와 아들과 작별하고, 다만 분(조카)과 울(둘째 아들)만 데리고 출발했다. 오늘 장계를 올려 보냈다. 신시(오후 4시경)에 와두(노량)에 이르니 역풍이 불고 썰물이 시작되어 배를 운행할 수가 없어서 닻을 내리고 조금 쉬었다. 유시(오후 4시경)에 다시 닻을 걷어 올려 노량으로 건너왔다. 여도 만호(김인영), 순천 부사(권준), 이감과 우후(이몽구) 등도 와서 같이 잤다.

18일. 맑다. 새벽에 출발할 때는 역풍이 크게 일더니 창신도에 이르니 순풍으로 바뀌어 돛을 달고 사량에 이르니 바람이 다시 역풍으로 바뀌어 크게 불었다. 사량 만호(이여념)와 경상우수사 군관 전윤이 와서 만나보았다.

19일. 흐리다가 늦게 개었다. 바람이 크게 불었다. 아침에 떠나 당포 바깥 바다에 이르러 바람을 따라 돛을 반쯤 올리니 순식간에 한산도에 이르렀다. 활터에 올라 앉아 여러 장수들과 이야기하였다. 저녁에 원 수사(원균)가 왔다. 소비포 권관(이영남)에게서 영남 여러 배의 사부와 격군들이 거의 다 굶어죽게 되었다는 말을 들었다. 참혹하여 차마 들을 수가 없었다. 또 “원수사와 송연수, 이극함 등은 서로 곁눈질하던 여자들과 모두 다 관계했다” 고 하였다.

 

영남의 수병들이 모두 다 굶어 죽을 형편이었는데, 그런 와중에도 원균과 그 휘하 장수들은 여자나 밝히고 있었다.

 

※ 《난중일기》 1594년 1월 20일 ※
맑으나 바람이 크게 불고 몹시 추웠다. 각 배에 옷없는 사람들이 거북처럼 꼬부리고 안자 추워서 떠는 소리는 차마 듣기 어려웠다. 군량조차 오지 않으니 더욱 답답한 노릇이다. 낙안군수(신호), 우수사 우후(이정충)가 와서 만나보았다. 늦게 소비포 권관(이영남), 웅천 현감(이운룡), 진해 현감(정항) 등이 왔다. 병들어 죽은 사람들을 거두어 장사지낼 책임자로 녹도 만호(송여종)을 정해 보냈다.

 

군량조차 오지 않았다. 군에서 ‘굶고 병들어 죽은 백성들’ 을 장사지내고 있다.

 

※ 《난중일기》 1594년 1월 21일 ※
맑다. 아침에 본영의 격군 742명에게 술을 주었다. 광양 현감(어영담)이 들어왔다. 저녁에 녹도 만호가 와서 보고하기를 “병들어 죽은 (백성들의) 시체 274구를 거두어 묻었다” 고 하였다. 사로잡혀 갔다가 도망쳐 돌아온 자 둘이 원 수사로부터 와서 적의 정황에 대해 여러 가지 이야기했지만 믿을 수가 없다.

 

원균 휘하의 사람들을 못 미더워하고 있다.

 

※ 《난중일기》 1594년 1월 ※
22일. 맑다. 날씨가 따뜻하고 바람도 없다. 활터에 올라앉아 진해 현감(정항)을 시켜서 교서에 숙배례를 행하게 하고 하루 종일 활을 쏘았다.

 

23일. 맑다. 낙안 군수와 고부 군수(이숭고)가 나갔다. 흥양의 전선 2척이 들어왔다. 최천보, 유황, 유충신, 정량 등이 들어왔다. 늦게 순천 부사도 들어왔다.

 

24일. 맑고 따뜻하다. 송덕일이 아침에 산에 가서 벌목할 일로 목수 41명을 거느리고 갔다. 원 수사가 군관을 보내어 보고하기를 “좌도의 적 3백여 명을 죽였다” 고 하면서 몹시 기뻐하고 또 “평의지가 지금 웅천에 있다” 고 하였으나, 자세하지 않다.

 

‘좌도의 적 3백여 명’ 은 원균의 우도 관내도 아닌데 누가, 어떻게, 죽였다는 것일까? 보고를 받은 이순신은 ‘자세하지 않다’ 고 했는데, 만약 원균이 해전을 통해서 적을 죽인 것이라면 대단한 승첩이므로 이순신도 그 전에 이미 ‘자세히’ 알고 있었을 것이다.

 

※ 《난중일기》 1594년 1월 ※
25일. 흐렸다가 늦게 맑았다. 송두남, 이상록 등이 새로 만든 배를 몰고 올 일로 사부와 격군 132명을 거느리고 갔다. 아침에 우수사 우후(이정충)가 와서 늦게까지 활을 쏘았다. 우수사 우후와 여도 첨사(김인영)가 활쏘기 내기를 했는데, 여도 첨사가 7분을 이겼다. 나는 10순을 쏘았고, 다른 사람들은 모두 20순을 쏘았다.

 

26일. 맑다. 아침에 활터로 올라가 활을 쏘았다. 순천 부사(권준)가 기일을 어겼기에 벌을 주었다.

 

27일. 맑다. 새벽에 배를 만들 재목을 끌어올 일로 우후(이몽구)가 나갔다. 어머님의 편지와 아우 여필의 편지가 왔는데, 어머님이 평안하시다니 다행이다. 다만, 동문 밖 해운대(여수시 동북쪽) 결과 미평에 화적들이 돌아다닌다고 하니 놀랄 일이다. 녹도 수군들이 복병하고 있는 곳에 왜적 5명이 멋대로 돌아다니며 총질을 하기에 활로 한 놈을 쏘아 죽인 후 목을 베자 남은 놈들은 화살을 맞고 도망갔다고 하였다. 우후의 배가 재목을 싣고 왔다.

 

28일. 맑다. 아침에 우후가 와서 만나보았다. 경상 우후가 보고하기를 “유 제독이 군사를 돌려서 이달 25, 26일 경에는 올라 간다” 고 하였으며, 또 “위무사 홍문교리 권협이 도내를 순시한 뒤에 수군으로 들어온다” 고 하였다. 또 “화적 이겸 등을 잡아 가두었으며, 아산 · 온양 등지의 고을에서 횡행하는 큰 도적 90여 명을 잡아 죽였다” 고 하였다. 또 “익호장(김덕령)이 가까운 기일 안에 들어올 것” 이라 하였다. 전선 만드는 공사를 시작하였다.

 

사람이 사람고기를 먹는 상황이어서 도적떼가 많았다.

 

※ 《난중일기》 1594년 1월 ※
29일. 비. 비가 종일토록 오고 밤새도록 내렸다. 새벽에 여러 배들이 무사하다는 보고를 받았다. 몸이 불편하여 저녁내내 누워서 끙끙 앓았는데, 큰 바람과 거센 파도로 배가 가만히 있지를 못하니 마음이 극도로 산란하였다. 미조항 첨사(김승룡)가 배를 꾸밀 일로 돌아갔다.

30일. 흐리고 큰 바람이 불더니 늦게는 개고 바람도 조금 잤다. 순천 부사와 우수사 우후와 강진 현감(유해)이 와서 보고하고 돌아갔다. 나는 몸이 몹시 불편하여 하루 종일 땀을 흘렸다. 군관들과 여러 장수들은 활을 쏘았다.

 

이정암 감사가 9개 고을을 육군으로 편입시키자 이들 지역의 함대들은 해당 집결지로 모이지 않고 있었다. 이에 이순신은 해당 고을 수령들의 징계를 조정에 요청했다.

 

※ 《청죄지유제장장》 1594년 2월 25일 ※
삼가 추궁할 일로 아뢰나이다.
전라우수사 이억기가 보낸 보고서에서 말하기를, “본 도 소속 각 고을과 포구의 전선들을 상도에서는 정월 20일 안에 우수영 앞바다로, 또 하도에서는 가리포 앞바다로 모이도록 군관들까지 보내어 독촉하였습니다. 그러나 각 고을에서는 수군 입대병들을 전혀 보내주지 않아 격군을 채울 길이 없어서 여태까지 모이지 못한 채 기한이 이미 지났기로 극히 답답하고 걱정되어 우선 수군 22척을 거느리고 이달 17일 진에 도착하였습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우수영 북쪽 고을 함대는 우수영에 모이고, 우수영 남쪽의 함대는 완도의 가리포(고금도) 앞바다에 모이기로 되어 있었는데, 상도 쪽(9개 고을 쪽) 함대의 집결 상태가 특히 불량했다.

 

※ 《청죄지유제장장》 1594년 2월 25일 ※
그리고 또 말하기를, “나주 · 무안 · 함평 · 영광 · 무장 · 장흥 · 흥덕 · 고부 · 부안 · 옥구 등 고을에서는 더 만들기로 배정된 전선을 정비해 보내지 않을 뿐만 아니라 본래 있던 전선조차 정비해 보내지 않았으며, 각 진과 포구에서 수군으로 입대할 징집 대상자 명부조차 보내오지 않아서 선부와 격군을 채우지 못하고 있으니 극히 답답하고 걱정스럽습니다.

 

각 포구에서도 보고가 연속 올라오고 있습니다만 그 중에서도 군산포 만호 이세환과 법성포 만호 조대지, 다경포 만호 이식 등은 그 지역을 책임지고 있는 변방 장수들인데 격군이 없다는 핑계만 대고 지금까지 오지 않고 있으니 더욱 해괴한 일입니다. 위의 각 고을과 포구의 수령과 변방 장수들을 군령에 따라 중벌로 다스림으로써 다른 사람들의 경계로 삼도록 해야겠습니다.” 라는 보고서를 보내왔습니다.

 

이억기도 지체하는 장수들을 중징계할 것을 요청하였다.

 

※ 《청죄지유제장장》 1594년 2월 25일 ※
7도에 가득 찼던 적들이 지금 모두 한 곳에 모여서 흉측하고 간사한 계책을 꾸미지 않는 것이 없으므로, 순식간에 전라도로 침범해 올 우환도 눈앞에 박두해 있습니다. 사정이 이런데도 수군에 소속된 나주 이상 아홉 고을의 수령들은 더 만들도록 배정되어 있는 전선이건 본래 있던 전선이건 간에 정비해서 보낼 생각을 하지 않고, 또 각 포구의 수군 입대병조차 한 명도 들여보내지 않아서 각 포구의 전선을 정비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군령이란 중대한 일인데도 이렇게까지 해이해졌으니 나아가 공격할 길로 물러나 수비할 길도 전혀 없게 되어 참으로 놀랄 따름입니다.

 

임진년에 왜적의 형세가 서슬이 시퍼렇던 그 무렵, 영남의 여러 성들은 적들이 쳐들어온다는 소리만 듣고도 무너지고 연해안 일대에는 사람의 그림자가 끊어졌을 때, 무려 200여 척이나 되는 적선들이 고성 · 사천 · 하동 · 남해 등 전라도와 연접된 지방으로 연속해서 쳐들어 왔지만, 우리 수군은 30척도 안 되는 배를 가지고 돌진하여 무찔러서 하나도 빠져 돌아가지 못하게 함으로써 그 기세를 꺾어놓았습니다.

 

그 후 전선이 차츰 더 많이 준비되어 전라 좌우도 합하여 80여 척이 되었으며, 그리하여  매번 출동할 때마다 3도 수사 및 여러 장수들과 함께 적을 토벌할 계획을 세우고 죽음을 맹세하고 바닷길을 끊어 막음으로써 왜적들이 전라도로 침범해오지 못하게 한 지 이제 3년이 다 되어 갑니다.

 

호남 땅이 온전히 보전된 것은 수군에 힘입은 것 같은데, 요즘 와서는 의논이 분분하여 수군에 소속된 좌 · 우도 합계 열아홉 고을 중 아홉 고을은 그 소속을 육군으로 옮겼다고 하여 본래 배정되어 있던 수군 입대병조차 전혀 보내지 않고 있으니, 수군의 고단하고 약함이 전일보다 더욱 심하여 참으로 답답하고 걱정스럽습니다.

 

개전 이래 수군은 국난 극복의 일등공신이었으며 난국을 헤쳐 나갈 핵심 전력이었지만, 이런 저런 조치들이 수군의 전력을 약호시키고 있다고 걱정했다.

 

※ 《청죄지유제장장》 1594년 2월 25일 ※
나주 등 아홉 고을 중에서 가장 심한 곳은 나주 · 무안 등지의 고을입니다. 이 고을들은 책임지고 만들도록 배정된 전선들이 기일이 넘도록 보내지 않고 있습니다. 또 수비군을 전혀 보내지 않은 죄상뿐만 아니라 군산포 만호 이세환, 법성포 만호 조대지, 다경포 만호 이식 등 수군 소속 변방 장수들은 두세 번 거듭 독촉해도 끝내 오지 않음으로써 군법을 크게 위반하고 있습니다.

 

조정에서 이들 모두를 처벌함으로써 다른 사람들의 경계로 삼아주시고, 또 전선은 밤낮 없이 달려 보내도록 하라고 순찰사 이정암에게 각별히 신칙해 주시기를 바라나이다.

 

※ 《충청수군절도사최촉도진장》 1594년 2월 25일 ※
삼가 추궁해 주실 일로 아뢰나이다.
전라우수사 이억기는 정월 25일에, 충청수사 구사직은 2월 5일에 각각 휘하 장수들을 거느리고 일제히 오도록 기한을 정해 명령을 전하였던바, 이억기의 보고서에 의하면, “나주 · 무안 · 영광 등의 고을에서 방비군 명부조차 보내지 아니하여 많은 전선에 격군을 채울 길이 없습니다. 기한은 벌써 박두하였는데 극히 답답합니다.” 고 하면서, 이와 같은 내용으로 두세 번이나 거듭 보고해 오기에 신도 또한 각 고을에 공문을 보냈습니다.

 

그리고 이달 2월 17일에 전선 22척을 거느리고 진중에 도착하였는데, 먼저 온 전선과 합하면 모두 46척이 됩니다. 우도에 배정된 전선 합계 90척 중에서 나주 외 아홉 고을에 배정된 27척은 전혀 마련되지 않아서 일이 매우 괴이하게 되었다는 사유에 대해서는 이미 장계를 올린 바 있습니다. 그 나머지 21척의 전선은 모두 새로 만든 것들인데, 격군이 없어서 일찍 거느리고 오지 못하기 때문에 수군을 징집하여 보내지 않은 각 고을에 다시 전령을 보내어 독촉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우수사 이억기는 이렇게 흉악한 적들이 꾀를 부리기 시작한 때를 당하여 정해진 기한에 도착하지 못했으니 기한 어긴 죄를 면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렇기는 하오나 격군이 없어서 정해진 기일에 오지 못한 것이고, 또 그런 고민을 계속해서 보고했을 뿐만 아니라, 각 고을에서 수군을 전혀 징집하여 보내지 않는 것이 요즘 와서 더욱 심하여 각 진(鎭)과 포구의 전선들을 쉽게 정비할 수 없는 실정은 도 안이 모두 같으므로, 우선 행수 군관과 도훈도에게 군령에 의거하여 벌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충청수사 구사직은 기한이 벌써 한 달이나 지났는데도 아직도 진에 도착하지 않았습니다. 중대한 약속 기한을 느슨하게 늦추기를 이와 같이 하고 있으니, 조정에서 각별히 독촉해 주시기 바랍니다.

 

임진년 이듬해인 8월, 명 · 왜의 주력이 본국으로 돌아가자 조선 육군과 충청수군도 고향으로 돌아갔다. 그 무렵부터 시작된 조 · 왜 간의 강화회담은 반전(反戰) 사상과 ‘곧 평화가 올 것’ 이라는 기대감을 낳았다. 게다가 명나라에서는 강화회담에 방해된다고 하여 조선 측에 군사 작전을 금한다는 명령까지 내렸는데, 이 같은 변화된 상황도 충청수군 등의 도착이 지연되는 원인이 되었다.

 

※ 《난중일기》 1594년 2월 1일 ※
맑다. 늦게 활터에 올라가 공무를 보았다. 청주에 사는 겸사복 이상이 임금의 분부를 가져왔는데, 그 내용은 “경상감사 한효순이 보고하기를, 좌도의 적들이 합하여 거제로 들어가니 장차 전라도 지역을 침범할 것이라 하였는바, 그대는 3도 수군을 합하여 적을 무찌르라” 는 것이었다.

 

오후에 우수사 우후(이정충)를 불러 활을 쏘았다. 초저녁에 사도첨사(김완)가 전선 3척을 거느리고 진에 이르렀다.

 

경상감사의 급보가 조정에 올라갔고, 이에 조정은 3도 수군에게 출동명령을 내렸다. 이순신은 이 같은 어명에 따라 충청수군 등 소집에 지체하고 있는 장수들의 징계를 요청한 것이다.

 

※ 《난중일기》 1594년 2월 ※
2일. 맑다. 늦게 활터에 올라가서 활 열 순을 쏘았다. 바람이 어지럽게 불고 따뜻하지 않았다. 사도 첨사가 기한에 늦었기 때문에 신문하였다.

 

3일. 맑고 바람이 크게 불었다. 식후에 활터에 올라가 활을 쏘았다. 우조방장(어영담)이 왔는데, 그에게서 역적들의 소식을 들으니 걱정되고 통분함을 이기지 못하겠다. 원식(원균의 아들), 원전(원균의 동생)이 와서 상경한다고 보고하였다. 날이 저물어 막사로 내려왔다.

 

조방장 어영담이 왜적들의 소식을 보고하였는데 통분한 일이 많았다. 원전과 원식은 무슨 일로 서울에 간다는 것일까?

 

※ 《난중일기》 1594년 2월 ※
4일. 맑으나 바람이 크게 불었다. 아침을 먹은 뒤 순천 부사, 우조방장 어영담이 와서 이야기하였다. 늦게 본영의 전선과 거북선이 들어왔다. 조카 봉이 오는 편에 어머님께서 평안하시다는 소식을 들으니 다행, 다행이다.

 

5일. 맑다. 꿈에 좋은 말을 타고 곧바로 큰 바위가 층층이 쌓인 큰 산마루로 올라가니 아름다운 산봉우리들이 서쪽에서 동쪽으로 뻗어 있고, 또 산봉우리 위에 평평한 곳이 있기에 앉을 자리를 고르다가 깨었다. 무슨 징조인지 모르겠다. 또 어떤 미인이 혼자 앉아서 손가락질을 하는데, 나는 소매를 뿌리치고 응하지 않았는데, 우습다.

 

아침에 군기시에서 흑각궁 100개와 화피 89장을 받아왔기에 숫자를 세어보고 서명하였다. 발포 만호(황정록)와 우수사 우후가 와서 보았다. 늦게 활터에 올라가 어영담, 우수사 우후, 여도 만호(김인영) 등과 활을 쏘았다.

 

원수(권율)의 회답이 왔는데, 유격 심유경이 벌써 왜적과 화해하기로 결정했다고 한다. 그러나 왜적들의 간교한 꾀와 교묘한 계책은 헤아릴 길이 없다. 전에도 놈들의 꾀에 빠졌으면서 또 이렇게 빠지게 되니 한탄스러운 일이다.

 

권율로부터 심유경의 강화회담에 진전이 있다는 회답이 왔다. 이 회답에는 강화회담이 이렇듯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으니 조선군은 회담에 방해가 되는 어떤 행위도 하지 말라는 명군 측의 메시지가 들어있다.

 

※ 《난중일기》 1594년 2월 ※
6일. 비. 오후에는 개었다. 순천(권준), 우조방장(어영담), 웅천 현감(이운룡), 사도 첨사(김완)가 와서 만나보았다.

 

7일. 맑다. 서풍이 크게 불었다. 어머님께 문안드리는 편지를 조카 분이 가는 편에 부쳤다. 봉과 분이 나갔는데, 봉은 나주로 가고 분은 온양으로 갔다. 회포가 불편하다. 고성 현감(조응도)이 보고하기를, 적선 50여 척이 춘원포(통영군 광도면 예승포)에 왔다고 하였다. 오늘 군대를 다시 편성하고 격군들을 각 배에 옮겨 태웠다. 보성의 전선 2척이 들어왔다. 소비포 권관(이영남)이 와서 만나보았다.

 

왜군들이 움직이고 있다.

 

※ 《난중일기》 1594년 2월 8일 ※
맑다. 동풍이 크게 불고 날씨가 몹시 찼다. 아침에 순천(권준)이 와서 말하기를 “고성 땅 소비포 마암면 두호리에 적선 50여 척이 드나든다” 고 하기에 즉시 제만춘을 불러 지세의 편리함 여부를 물어보았다. 늦게 활터에 올라가 공무를 보고 저녁에 돌아오니 바다에 달빛이 밝아서 누워 있어도 잠이 오지 않았다. 권준, 어영담이 와서 이야기하다가 밤 2경(오후 10시경)이 되어서야 헤어졌다.

 

상당수의 왜선이 두호리에도 나타났다.

 

※ 《난중일기》 1594년 2월 9일 ※
맑다. 새벽에 우후(이몽구)가 배 두 세 척을 거느리고 소비포 뒤쪽으로 띠풀을 베러 갔다. 아침에 고성 현령(조응도)이 오기에 그에게 당항포로 적선이 왕래하던지 물어보고, 또 백성들이 굶주려서 서로 잡아먹는다고 하니 장차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 물어보았다. 늦게 활터에 올라가 활 10여 순을 쏘았다. 이유함(전 좌랑으로 진주에서 피난왔다)이 와서 작별을 고하므로 그 자(字)를 물어보니 여실이라고 하였다. 순천(권준), 조방장(어영담), 우수사 우후, 사도 첨사, 여도 만호(송여종), 강진 현감(유해), 사천 현감(기직남), 하동 현감(성천유), 보성 군수(김득광), 소비포 권관 등이 왔다.

 

당항포 지역의 왜선 출몰 여부와 사람이 인육을 먹는 것에 대한 대책도 물어보고 있다.

 

※ 《난중일기》 1594년 2월 10일 ※
이슬비가 개지 않고 내렸고 큰 바람이 불었다. 오후에 조방장(어영담)과 순천(권준)이 와서 저녁 늦게까지 이야기하며 적을 토벌할 일을 의논하였다.

 

제2차 당항포해전을 위한 작전을 논의했다.

 

※ 《난중일기》 1594년 2월 ※
11일. 맑다. 아침에 미조항 첨사(김승룡)가 왔다. 식후에 활터로 올라가니 경상수사(원균)와 우수사 조방장도 왔는데, 같이 술에 취해 있었다. 활 3순을 쏘았다.

 

12일. 맑다. 이른 아침에 본영의 탐색선이 들어왔다. 사시(오후 10시경)에 진을 적도로 옮겼다. 미시(오후 2시경)에 선전관 송경령이 진에 도착하였다. 유서 2통과 밀지 1통, 합하여 세 통인데 그 중 한 통에는 명나라 군사 10만 명과 은 3백만 냥을 명나라에서 보내온다는 것이었고, 한 통은 흉적들이 호남으로 쳐들어가려는 생각을 하고 있으니 힘을 다하여 길을 끊어 막고 형세를 보아서 무찌르도록 하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밀지에는 “해가 다 가도록 바다 위에서 애쓰고 고생하고 있음을 내 언제나 잊지 않고 있다. 공로가 있는 장수와 군사들로 아직도 상을 받지 못한 자들의 이름을 적어 올리도록 하라” 는 내용이었다.

 

선전관 편에 서울의 여러 가지 소식을 듣고 또 역적의 일 때문에 전하께서 근심하며 밤낮으로 정사에 분주하시다는 말을 들으니 강개한 마음과 그리움이 그지없다. 영의정(유성룡)의 편지도 가져왔다.

 

조정이 보내온 소식 중에 ‘명군 10만 명과 은 3백만 냥’ 은 조정에서 군대의 사기를 진직시키기 위해 거짓으로 꾸며낸 이야기였다.

 

※ 《난중일기》 1594년 2월 13일 ※
맑고 따뜻하다. 아침에 영의정(유성룡)에게 회답 편지를 쓰고, 식후에는 선전관과 다시 이야기하다가 작별한 뒤 하루 종일 배에 있었다. 신시(오후 4시경)에 소비포 권관(이영남), 사량 만호(이여념), 영등포 만호(우치적)가 왔다.

 

유시(오후 6시경)에 출발하여 한산도로 돌아오고 있을 때 경상우수사(원균)의 군관 제홍록이 삼봉으로부터 와서 말하기를 “적선 8척이 춘원포에 들어와 정박해 있으니 들어가 칠만하다” 고 하였다. 그래서 곧 나대용을 원 수사(원균)에게 보내 작은 이익을 보려고 들어가 치다가는 큰 이익을 이룰 수 없으므로 우선은 내버려 두었다가 기회를 보아서 무찔러야 한다고 전하도록 하였다. 미조항 첨사(김승룡), 순천(권준), 조방장(어영담) 등이 왔다가 밤이 깊이서야 돌아갔다.

 

원균이 8척의 왜선을 치자고 했다. 이때 이순신은 규모가 큰 제2차 당항포해전을 계획하고 있었기에 원균의 작전을 보류시켰다.

 

※ 《난중일기》 1594년 2월 ※
14일. 맑고 따뜻하고 바람조차 부드럽다. 경상도 남해 · 하동 · 사천 · 고성 등지에는 송희립 · 변존서 · 유황 · 노윤발 등을, 우도에는 변유헌 · 나대용 등을 점고하러 내보냈다. 본영에서 군량 20섬을 실어왔다. 방답 첨사와 배첨지(배경남)가 왔다. 장언춘의 면천 공문을 만들어 주었다.

 

15일. 맑다. 새벽에 거북선 2척과 보성의 배 1척을 멍에로 쓸 재목 베는 곳으로 보내어 초저녁에 실어왔다. 식후에 활터에 올라가 좌조방장(흥양 배흥립)의 늦게 온 죄를 신문하였다. 흥양 배의 부정 사실을 조사해 보니 허술한 점이 많았다.

 

거북선 2척이 멍에목(배 만드는 목재) 운송선을 호위했다.

 

※ 《난중일기》 1594년 2월 16일 ※
맑다. 암행어사 유몽인의 장계 초본을 보니, 임실 군수 이몽상 · 무장 군수 이충길 · 영암 군수 김성헌 · 낙안 군수(신호) 등은 파면하고, 순천 부사(권준)는 탐관오리로 보고하였으며, 담양(이경노) · 진원(조공근) · 나주(이용순) · 창평(백유항) 수령 등은 악행을 덮어주고 칭찬하는 내용의 장계였다. 임금을 속임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나라 일이 이러하고서야 난리가 평정될 리가 만무하다. 우러러 탄식할 뿐이다.

 

또 수군에서 도망병이 있을 경우 일족 중에서 대신 징발하여 충당하는 일과 장정 넷 중에 둘은 전쟁에 나가야 한다는 것을 심히 잘못된 일이라고 말했으니, 암행어사 유몽인은 국가의 위급함은 생각하지 않고 다만 눈앞의 작은 안일만을 생각하는 것이니, 나라를 그르치는 교활하고 간사한 말이 악비(岳飛)에 대한 진회(秦檜)의 그것과 다를 것이 없다. 나라를 위해서는 더욱 통탄스러운 일이다. 늦게 활터에 올라가 순천 · 흥양 · 우조방장 · 우수사 우후 · 사도 · 발포 · 여도 · 녹도 · 강진 · 광양 등 고을 수령들과 활 열두 순을 쏘았다.

 

악비와 진회는 남송(南宋) 초기의 인물들이다. 진회는 금(金)나라의 침입 때 굴욕적인 화의를 성사시킨 인물이고, 금의 침입을 막아낸 무장 악비는 진회의 간계에 의해 누명을 쓰고 옥사했다. 이순신은 악비를 존경했다.

 

※ 《난중일기》 1594년 2월 ※
17일. 맑다. 따뜻하기가 초여름 같다. 아침에 활터에 올라가 공무를 보았다. 이홍명, 임희진이 찾아왔다. 대나무로 총통을 만들어 왔기에 시험 삼아 쏘아보니 소리는 났지만 별로 쓸모가 없었다. 우습다. 우수사가 들어왔는데 거느리고 온 전선이 다만 20여 척뿐이어서 한탄스럽다. 순천(권준)과 조방장(어영담)도 와서 활 다섯 순을 쏘았다.

 

18일. 맑다. 후에 활터에 올라가 해남 현감 위대기를 전령을 거역한 죄로 처벌하였다. 우도의 여러 장수들이 와서 현신한 뒤에 활 두어 순을 쏘았다.

 

19일. 종일토록 이슬비가 내렸다. 사정에 올라가 홀로 두 시간 넘게 앉아 있으니 우조방장과 순천이 왔다. 손충갑도 왔다. 불러들여 적을 토벌하던 일을 물어보고 강개함을 이기지 못하였다. 종일토록 왜적을 토벌할 일을 의논하였다.

 

20일. 안개비가 그치지 않았다. 몸이 불편하므로 하루 종일 나가지 않았다. 우조방장과 배첨지(배경남)가 와서 이야기했다.

 

21일. 맑다. 순천과 우조방장이 와서 보고하기를, 견내량에 복병시켜 둔 곳을 가서 살펴보았다고 했다. 청주 의병장 이봉이 순변사(이빈)로부터 와서 육지의 사정을 자세히 일러주고 해가 저물어서야 돌아갔다.

 

경상도순변사 이빈의 육군과 합동전을 펴기 위해 연락을 취하고 있다.

 

※ 《난중일기》 1594년 2월 21일 ※
유시(오후 6시경)에 벽방(통영군 광도면) 망보는 장수가 와서 보고하기를 “구화역(통영군 광도면 노산리) 앞바다에 왜선 8척이 정박해 있다” 고 하므로 나아가서 치라고 전령하고, 제홍록(원균의 군관)의 보고가 오기를 기다렸다.

 

작전이 시작되었고, 원균 쪽에도 이를 알렸다.

 

※ 《난중일기》 1594년 2월 22일 ※
22일. 제홍록이 와서 보고하기를 “왜선 10척이 구화역에 도착하고 6척은 춘원포에 도착했으나 날이 벌써 새어서 미처 추격하지 못했다” 고 하므로, 다시 정찰하라고 명령하여 보냈다.

 

28일. 맑다. 아침에 활터로 올라가 종사관(정경달)과 함께 종일 이야기하였다. 장흥 부사(황세득)가 들어왔다.

 

29일. 벽방 망보는 장수 제한국이 급보하기를, 적선 16척이 소소포(고성군 마암면 두호리)로 들어왔다고 하므로, (전라우수사, 경상우수사 등에게)전령하여 알리도록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