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임진왜란

해전기록 - 11장 - 학익진

구름위 2013. 5. 1. 11:27

왜군 함대의 주력 선단이 무기력하게 무너지면서 와키자카의 기함을 호위하던 수비망에도 듬성듬성 틈새가 보이기 시작했다. 때를 놓칠 새라 2척의 거북선이 기함이 있는 쪽으로 쑤시고 들어갔다.

 

여기에 놀란 왜선들이 거북선을 향해 몰려들었고, 거북선을 포위했다. 하지만 더 이상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었다. 저지선이 뚫린다면 와키자카 사령부는 그야말로 끝장이었다. 결사항전으로 맞선 호위 선단의 막대한 희생에도 불구하고 거북선의 용머리 포탑은 와키자카의 기함 층루를 향해 점점 다가가고 있었다.

 

누상의 와키자카는 조선함대에 철저히 농락당하고 있는 자신의 함대를 넋을 잃고 바라보았다.

 

‘이럴 수가…!’

 

바다 한가운데서 포위를 당했고, 그것도 퇴로를 찾지 못해서 당한 치욕적인 패배였다. 지금까지 조선 수군에 패한 왜장들에게 “바가야로!” 라고 손가락질을 했지만, 오늘 자신이 당한 패배는 변명의 여지가 없는 완벽한 패배였다.

 

“장군! 몸을 보존하시어 훗날을 기약하소서!”

 

망연자실 서 있는 와키자카를 향해 휘하 왜장들이 울부짖듯 소리쳤다. 와키자카 자신도 목숨을 부지하는 것만이 치욕을 씻을 수 있는 길이라고 생각했다.

 

“내 오늘을 잊지 않겠다… 모두 배를 버리고 몸을 피해라!”

 

독백처럼 내뱉은 이 말이 사태 수습을 위한 그의 두 번째 명령이었다. 와키자카는 끓어오르는 분노를 삼키며 지체 없이 갑옷과 투구를 벗어 던졌다. 그리고는 졸병 복색으로 바다에 뛰어들었다. 그의 참모들 역시 바다로 몸을 던졌다.

 

이것이 한산도 해전의 마지막 장면이었다. 이렇게 탈출한 와키자카 야스하루는 그후 정유재란 때 칠천량에서 원균 통제사를 상대로 이 날의 치욕을 되갚는다. 그리고 호기롭게 사천포와 여수, 순천을 점령하고 울돌목으로 향했다.

 

이순신은 한산도 해전의 마지막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 충무공의 장계 (견내량파왜병장) ※
여러 장수와 병사, 그리고 관리들은 승리한 기세를 업고 용약분발하여 서로 다투어 돌진해 들어가 살과 탄환을 교대로 쏘아 부치니 그 형세가 바람과 우레 같았습니다. 그래서 적의 배를 불사르고 적을 사살하기를 일시에 모두 해치우게 된 것입니다.

 

한산도 해전에서 와키자카 함대는 불과 2~3시간 만에 궤멸되었던 반면, 조선 함대가 치른 희생은 놀랍게도 사망 10여 명에 불과했다.

 

양측을 합쳐 약 2만여 명이 격돌한 전투였다는 점을 감안하면 선뜻 납득이 가지 않는 결과다.

 

이순신은 최소의 손실로 수천의 적을 살상했고, 70여 척의 적선을 깨뜨려 불태웠다. 그는 백병전으로 승패를 가름하던 시대에 현대전에서나 볼 수 있는 순수 함포전을 구사했고, 거북선의 속공전을 통해서 승부를 조기(早期)에 결정지었다.

 

해전을 끝낸 후, 이순신은 해전의 전과를 기록한 장계에 다음과 같이 기록해 놓았다.

 

※ 충무공의 장계 (견내량파왜병장) ※
순천부사 권준이 제 몸을 잊고 돌입해 들어가 먼저 왜의 층각대선 1척을 깨뜨려 바다 가운데서 완전히 잡고, 왜장을 비롯하여 수급 10개를 베고 우리나라 남자 1명을 도로 찾았습니다.

 

광양현감 어영담도 앞서 돌격해 들어가 먼저 층각선 1척을 깨뜨려서 바다 가운데서 완전히 잡았으며, 왜장을 쏘아 맞추어 신의 배로 묶어 왔는데 문초하기 전에 화살에 맞아 말을 못하기에 즉시 머리를 베었고, 다른 왜의 목 12개를 베고 우리나라 사람 하나를 도로 찾아왔습니다.

 

사도 첨사 김완은 큰 배 1척을 바다 가운데서 완전히 잡고, 왜장을 비롯해서 수급 16개를 베었으며, 흥양현감 배흥립은 바다 가운데서 큰 배 1척을 완전히 잡고 수급 8개를 베고 또 많이 익사시켰습니다.

 

방답첨사 이순신은 큰 배 1척을 바다 가운데서 완전히 깨뜨리고 수급 4개를 베었는데, 다만 사살하기만을 힘쓰고 수급 베는데는 힘쓰지 않았으며, 또 2척을 뒤쫓아서 깨뜨리고 불살라 버렸습니다.

 

좌돌격장(거북선 돌격대장) 급제 이기남은 큰 배 1척을 바다 가운데서 완전히 깨뜨리고 수급 7개를 베었습니다.

 

좌별도장이며 본영의 군관인 전 만호 윤사공과 가안책 등은 층각선 2척을 바다 가운데서 완전히 사로잡아 수급 6개를 베었습니다.

 

낙안군수 신호는 왜의 대선 1척을 바다 가운데서 완전히 사로잡아 수급 7개를 베었습니다.

 

녹도만호 정운은 층각대선 2척을 총통으로 속까지 꿰뚫은 것을 여러 전선이 협공하여 불사르고, 수급 3개를 베고, 우리나라 사람 2명을 산 채로 빼앗았습니다.

 

여도권관 김인영은 왜의 큰 배 1척을 바다 가운데에서 완전히 잡았고, 머리 셋을 베었으며, 발포만호 황정록은 층루선 1척을 깨뜨리고 여러 배가 협공하여 불살라 없애고 머리 둘을 베었으며, 우별도장 전 만호 송응민은 머리 둘을 베고, 흥양통장 전 현감 최천보는 머리 셋을 베고, 전 첨사 이응화는 머리 하나를 베었습니다.

 

우돌격장 급제 박이량은 머리 하나를 베었고, 신이 타고 있는 배는 머리 다섯을 베고, 유군일영장 손윤문은 왜의 작은 배 2척에 방포하고 달아난 적을 산위에까지 쫓아갔으며, 오령장 전 봉사 최도전은 우리나라 소년 3명을 도로 빼앗았고, 그 나머지 왜의 큰 배 20척과 중간 배 17척과 작은 배 5척 등은 좌우도의 수십 장수가 힘을 합하여 불태워 깨뜨렸으며, 화살을 맞고 물에 떨어져 죽은 자는 그 수를 이루 헤아릴 수 없고…

 

순천부사 권준은 왜군들이 불타는 병선을 버려두고 도망치자 자신의 병력으로 하여금 왜선에 좀더 가까이 접근하게 해서 소탕전을 전개했다. 그리고 왜선에 승선하여 미처 수장되지 않은 시체의 수급을 베어 오게 했고, 그러던 중에 살아 있던 조선인 부역자 한 명을 구출해 냈다.

 

얼핏 생각하면 권준 스스로 왜선에 뛰어올라 왜장과 싸워 목을 벤 것으로 이해하기 쉽지만, 이순신의 해전 방식에는 백병전은 존재하지 않았을 뿐더러 그의 직책이 함대 작전사령관인 중위장 신분이었다는 점으로 미루어 볼 때, 순천 소속의 다른 병선들을 시켜서 쌓은 공로였다.

 

그러나 어영담은 중부장이었으므로 직접 왜선에 올랐으며, 왜병들 대부분이 배를 버리고 바다로 뛰어든 시점이었기 때문에 죽은 왜장을 비롯한 16개의 시체에서 어렵지 않게 수급을 벨 수 있었다.

 

조선 수병들이 왜선에 올라 목을 벤 시점은 해전 마지막 단계로 왜군들은 이미 배를 버린 후였다. 그래서 김완이 층루선 1척을 나포했음에도 불구하고 목을 벤 숫자는 16개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배흥립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왜선에서 가져온 수급의 숫자가 생각보다 적었던 것은 죽은 왜군들의 시체를 왜군들이 바다에 수장시켰기 때문이며, 남아 있던 시체들은 미처 수장시키지 못해 남게 된 것들이다.

 

이순신의 기함에서는 싸우는 광경을 기록하고, 해전이 끝난 후 왜선에 박힌 화살에서 부대 명을 확인하여 종합적으로 평가한 후 각 기지별로 공적을 안배했다.

 

여기서 한 가지 주의를 요하는 대목이 있다. ‘권준 부사가 제 몸을 잊고 돌진해 들어갔다’ 는 기록이다. 오늘날의 학자들은 이 글귀를 ‘백병전을 위한 돌격전’ 으로 해석하고 있는데 잘못된 해석임을 유념해 두자.

 

발포만호는 그간 공석이었으므로 이순신의 군관 나대용이 가장으로 참전해 왔는데, 황적록이 부임하자마자 공을 세웠다. 어떻게 된 일일까?

 

‘여러 배가 협공했다’ 고 했는데 이순신은 합동으로 깨뜨린 것을 발포 고을의 공으로 돌린 듯하다. 발포 함대는 ‘왜의 작은 배 2척’ 을 총포로 공격하고 부상해서 도망가는 왜병을 뒤쫓기도 했다. ‘나머지 왜의 큰 배 20척과 중간 배 17척, 작은 배 5척’ 은 전라 좌 · 우도에서 공동으로 깨뜨렸다.

 

아래의 표는 앞의 장계에서 이순신, 이억기, 원균 수사가 깨친 왜선의 수를 정리해본 것이다. 이 통계를 보면 몇 가지 중요한 사실을 읽어낼 수 있다.

 

 

큰 배

중간 배

작은 배

좌수영 단독

15

 

 

15

좌우수영 공동

20

17

7

44

경상우수영

0

0

0

0

35

17

7

59

도주 성공 척수

1

7

6

14

36

24

13

73

 

첫째, 큰 배(층루선)는 좌수영 단독, 또는 우수영과 공동으로 깨뜨렸다는 점이다. 아울러 좌수영 쪽은 시종일관 층루선을 표적으로 공격하고 다녔음을 알 수 있다.

 

둘째, 왜군 측은 중간 배와 작은 배를 타고 도망가다가 이억기 함대에 저지당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결국 포위당한 왜선들 중 해상탈출에 성공한 경우는 없었다는 사실이다.

 

셋째, 훗날 와키자카가 살아서 김해 쪽에 다시 나타난 것으로 보아 그 역시 배로 탈출한 것이 아니라 헤엄을 쳤거나 나무 등에 의지해서 탈출했을 것으로 보인다.

 

넷째, 전라 좌 · 우수영 함대의 철통같은 포위망으로 인해 왜선들은 원균 수사가 위치하고 있던 후미 지역까지는 접근하지 못했다. 그래서 원균 쪽에서 깨친 왜선이 하나도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헤엄쳐 달아나거나 널빤지 등을 타고 도망치던 왜병들은 많이 잡을 수 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원균으로서는 깨뜨린 왜선이 없었다는 것이 나름대로는 큰 불만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할 수 있는 전력이 안 되었기 때문에 선봉이나 중군 함대가 되지 못하고 후미를 지킬 수밖에 없었다.

 

혹자들은 ‘원균 함대를 학익진 함대에 포함시켜 함께 공을 세우게 할 수도 있었지 않았느냐?’ 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생사를 건 전투에서 그런 방식의 부대배치는 있기가 힘들다. 아무리 연합군이나 연합함대라도 오히려 각자의 역할과 책임은 분명하게 구분되기 때문이다.

 

또한 해전의 결과가 나오기 전까지는 선봉 · 중군 · 후미 함대간에 어느 쪽이 더 많은 공을 세울지, 더 위험할지는 그 누구도 예측할 수 없는 일이기도 하다.

 

원균은 이런 점들을 이해하고 해전의 결과를 수용했어야 했다. 그러나 공적에 몰두한 나머지 익사한 왜병들의 시체에서 많은 수급을 얻었고, 조정에 “자신의 공이 더 크다!” 고 주장했다.

 

다섯째, 왜선 중 14척은 애초부터 포위망 밖에 있었다. 왜군 함대는 긴 견내량을 종대로 빠져 나왔고, 견내량을 통과한 뒤에는 맹렬한 추격전을 벌이면서 앞쪽의 선단과 뒤쳐진 뒤쪽 선단간에는 길게 늘어선 종대 진형이 유지되고 있었다.

 

그렇다면 접전 초기에 즉시 전투에 들어갈 수 있었던 왜선은 선두와 중간이었고, 후미는 거리가 멀어서 애초부터 포위되지 않았다. 이 후미의 선단은 왜군 함대가 난타당하는 모습을 보고 도망갔다.

 

왜군 함대가 쉽게 무너진 원인에는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겠지만 길이가 긴 종대형 대형에도 원인이 있었다. 반면에 좌수영 함대는 대부분의 병선들이 폭이 넓은 해간도 부근에서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에 처음부터 학익진 대형을 펼칠 수 있는 대형을 유지하고 있었다.

 

전날의 작전회의 때도 ‘2단계 유인전이 끝나는 대로 한산 앞바다에서 학익진을 펼 계획’ 을 수립해 놓았으므로 달아나는 동안에도 가급적 긴 종대형 대형이 되지 않도록 하라고 지시해 두었다.

 

그 결과 조선함대는 정상적인 대형, 왜군 함대는 비정상적으로 기다란 대형으로 쫓고 쫓기는 추격전 끝에 한산도 앞바다까지 이르게 되었던 것이다.

 

※ 충무공의 장계 (견내량파왜병장) ※
그리고 왜인 400명은 형세가 다 되고 힘도 다하여 빠져나갈 수 없음을 스스로 깨닫게 되자 배를 버리고 한산도로 올라갔습니다. 종일 접전으로 장수와 군사들이 피곤하였고 날도 황혼에 어두워지기 시작하였으며, 궁한 적을 쫓는 것도 문제가 있어 보이기에 견내량 한 쪽 바다에 진을 치고 밤을 새우게 되었습니다.

 

이순신은 해전 막바지에 은근히 한산도 쪽을 향한 포위망을 풀어주었다. 그래서 마지막까지 항전했던 일부의 왜군들은 한산도를 섬이 아닌 육지로 알고 그곳으로 기어 올라갔다.

 

다도해는 해안선이 복잡하고 섬도 많아서 섬으로 알고 올라가 보면 육지이고, 육지로 알았던 것이 섬인 경우가 많다. 더구나 지도에 없는 섬들도 무수히 많다.

 

일본측 기록을 보면, 그 때 한산도로 도망친 왜장들 중 일부는 분함을 견디지 못하고 할복자살한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갑자기 기습을 받은 것도 아니고 계교에 의한 패배였기 때문에 자살을 했을 수도 있겠지만, 사령관인 와키자카의 생사를 확인할 수 없었기 때문에 죄책감을 느끼고 할복했을 가능성도 있다.

 

한편, 조선 수군의 입장에서 보면 한산도는 천혜의 포로수용소나 마찬가지였다. 따라서 애써 뒤쫓아 소탕할 필요가 없었다. 이순신은 몇 척의 감시선으로 보름 정도만 지키고 있으면 모두 굶어 죽일 수 있을 것으로 보았다. 그러나 이순신의 이러한 계획은 후에 원균이 왜군들이 온다는 헛소문을 듣고 감시선단을 물리면서 물거품이 되고 만다.

 

다음 표는 한산도 해전과 뒤에 있을 안골포 해전이 끝난 후 전라좌수영 쪽 사상자 기록을 원인별로 나눠 통계를 낸 것이다.

 

원인

부상

사망

총탄

118

19

137

창칼

0

0

0

화살

0

0

0

기타

0

0

0

 

칼이나 창 등에 의한 사상자가 없었는데 역시 백병전이 없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결국 왜선들은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었던 무거운 일본도를 공연히 차고 다닌 셈이었다.

 

화살에 의한 사상자도 없었다. 일본식 활보다는 총포류를 대폭 강화해서 조선함대의 화력에 대응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총탄에 의한 사상자는 조초오가 왜국식 대포에 의한 경우도 포함된다.사상자 명단에는 본영 소속 거북선에서 2명이 전사했고, 16명이 부상했다. 방답 소속 거북선에서는 6명이 부상을 당했다.

 

이억기와 원균 수사 측에서는 사상자가 얼마나 났을까? 기록은 없지만 해전의 경과로 보아 약간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아무튼 가장 큰 접전을 벌인 좌수영 측의 사상자가 가장 많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왜군측의 피해는 어떠했을까?

 

후에 제만춘이라는 조선군 군관이 일본에 붙잡혀 갔다가 도망해 와서 보고한 내용을 보면 ‘히데요시의 집무실에서 와키자카 군이 9천 명을 잃었다’ 는 기록을 읽었다고 한다.

 

그러나 ‘잃었다’ 는 것이 반드시 전사(戰死)를 의미하는 것으로 보기는 어렵다. 앞에서 와키자카 측의 병력을 약 1만 명 정도로 추산해 보았는데, 9천 명의 전사자를 냈다면 총 1만의 병력 중 90%가 죽었다는 얘기가 된다. 하지만 이 9천 명 주에는 도망병, 실종자, 심하게 다친 부상자들도 포함되었다고 보는 것이 합당하리라고 여겨진다.

 

원균은 판옥선 7척으로 도망가는 왜군들을 소탕했겠지만, 어느 한 쪽 방향으로 도망친 왜군들이 그 대상이 되었을 것이다.

 

세계 해전사를 보면, 16세기는 물론 18세기에 이르기까지 해전 초반에는 대포를 쏘고 중반과 후반에는 적선에 갈고리 등을 걸어 끌어당겨서 타넘은 후에 백병전으로 끝장을 보는 접현전 방식이 주종을 이루었다. 그런데 이순신은 이미 현대식 해전을 방불케 하는 함포전만으로 해전을 치뤘다.

 

일본군의 돌격전과 백병전은 청일전쟁, 러일전쟁, 중일전쟁 때는 물론 태평양전쟁 때까지도 상대방에게는 공포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이순신은 중세의 신통치 않은 총포류를 가지고 일본군의 돌격전과 백병전을 철저하게 따돌렸다.

 

한산도해전이 있었던 날은 이른 새벽 당포항을 떠나 ‘전투 → 노획물 수거 → 부상병 치료 → 저녁 작전회의’ 에 이르기까지 임진왜란 해전사 가운데 가장 극적이고 긴 하루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막상 해전에 소요된 시간은 약 2~3시간 정도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 안골포 해전

 

안골포에는 신라 · 고려시대 때부터 해안을 지키는 성이 있었다. 그리고 조선시대 때 안골포는 3포(부산포 · 염포 · 제포) 가운데 제포(기금의 진해시 제덕동) 바로 옆에 있던 수군 기지이기도 했다. 위치를 보면 안골포에서 거제도 북단에 있는 칠천량까지는 25km, 칠천량에서 견내량까지도 약 25km의 거리다.

 

한산도 해전이 마무리될 즈음인 오후, 조선함대 사령부는 해상경계와 적정 탐색을 위해 몇 척의 탐색선을 띄웠다. 도망친 14척의 적선들도 찾을 겸, 해전 중 대포 소리와 연기를 보고 또 다른 왜 함대가 몰려올 가능성에 대비하기 위해서였다.

 

그 지역 출신 수병들을 주축으로 한 탐색 선단은 견내량을 통과해서 마산, 진해, 안골, 거제, 김해 등지로 출발했다. 본대는 그날 저녁 견내량 안쪽(해간도 부근)에서 숙영했다.

 

※ 충무공의 장계 (견내량파왜병장) ※
9일은 가덕으로 향하려는데 “안골포에 왜선 40여 척이 정박하고 있다.” 고 탐망선이 보고해 왔습니다. 그래서 본도 우수사와 경상우수사들과 함께 적을 토벌할 계책을 상의했으며, 그날은 날이 저물어가고 역풍도 크게 일어났기에 나아가 싸울 수가 없어 거제도 온천도(칠천도)에 와서 밤을 지냈습니다.

 

피로한 군사들이 휴식을 취할 시간이 필요했고, 사상자를 위한 뒤처리와 한산도로 기어오른 왜군들 단속 방안에 대한 대책도 필요했다. 그때까지는 탐색선들로부터 적정에 관한 소식도 없었고, 지형적으로 보았을 때 새벽 기습이 우려되는 지역도 아니었다.

 

이튿날, 안골포 쪽을 정찰한 탐색선이 돌아와 적정을 보고했다. ‘경상우수사, 전라우수사와 계책을 논의했다’ 고 했는데, 여타의 작전회의 기록을 참조해 보면 각 기지의 단위대장들도 모두 참여한 회의였다. 중지를 모으는 회의방식이기도 했지만, 이순신은 해전을 앞두고 단위대장들에게 ‘약속을 거듭해 두기’ (작전을 주지시키기) 위해서 모두를 참석시키곤 했다.

 

40여 척이라면 결코 적은 함대가 아니었다. 적의 위치로 볼 때 조선 함대가 찾고 있던 제2의 함대였고, 제3의 함대와 전날 도망친 14척의 전선들이 한꺼번에 몰려온다면 한산도에서의 왜군 함대보다 더 큰 규모가 될 수 있었다.

 

그렇다면 역시 큰 바다에서의 접전이 예상되는 상황이었다. 때문에 이날 작전회의에서는 ‘망망대해에서 속력이 빠른 왜선단을 어떻게 무찌를 것인가?’ 하는 방안에 의견이 모아졌다.

 

여러 가지 방법론들이 나왔는데 그 내용은 이랬다.

 

첫째, 이번에는 유인전이 쉽게 통하지 않을 것이라는 점이었다. 한산도에서 구사한 유인전술은 도망친 왜군들에 의해 이미 안골포의 왜군 함대에도 알려졌을 터였다.

 

둘째, 즉각 출동하지 말고 출동을 다음날로 미루자는 것이었다. 작전회의가 있었던 시각은 늦고 오후였고 바람도 역풍이었다. 그러한 상황에서 즉시 출발한다면 안골포에는 밤에 도착하게 된다. 야밤에 적이 선점하고 있는 해역을 항진해 가는 것도 위험했고, 또 당시로서는 야간 해전은 가급적 피하는 것이 상식이었다. 그리고 썰물 때 안골포 앞바다는 갯벌이 되므로 판옥선 같이 큰 배는 물론 포작선 같이 작은 배들도 좌초되기 십상이었다.

 

셋째, 낮 시간인 밀물 때를 맞춰 새벽에 출발한다는 것이었다. 선봉에는 좌수영 함대가 서고, 전투가 시작되면 우수영 함대가 바로 합류한다는 계획이었다. 또 우수영 함대의 일부는 인근에 있을지도 모를 제 3함대의 협격(挾擊)에도 대비하고, 원균 함대는 좌수영 함대의 뒤를 따른다는 것이었다.

 

조선 함대는 이같은 작전을 세우고 칠천량에서 숙영했다. 이곳은 진을 치고 지내기에는 그리 적합한 장소가 아니었다. 그렇지만 당시 조선 함대는 적의 동향을 면밀히 주시하고 있었고, 안골포의 왜군들과는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있었기 때문에 그런 대로 좋은 휴식처가 될 수 있었다.

 

안골포 앞은 직경이 1km 정도 되는 축구장 모양의 바다인데 썰물 때는 모두 갯벌로 변한다. 안골포는 갯벌이 되면 좁은 수로를 통해서만 포구에 들어갈 수 있는 대단히 특수한 지형에 위치하고 있었다. 때문에 지금까지의 해전방식과는 다른 특별한 대책이 필요했다.

 

포구 입구에서 안골리 마을까지의 직선거리는 약 1,000미터다. 그래서 썰물 때, 바다에서 쏘는 포탄은 목표까지 날아가기가 어려웠다(뒷산에 위치한 안골포성은 거리가 1,500미터나 된다). 따라서 효과적인 공격을 위해서는 밀물 때를 맞춰야 했다.

 

밀물 시간의 정점은 오전 9시와 오후 3시경이었다. 그러므로 최적의 공격시점은 오전 8시에서 10시, 그리고 오후 2시에서 4시 사이였다.

조선 함대는 새벽 일찍 칠천량해협을 출발해서 안골포로 향했다. 이억기 함대는 가덕도 부근에서 매복을 위해 대오에서 뒤쳐졌고, 이순신과 원균 함대는 송도를 지나 안골포를 향해 계속 항진해 들어갔다.

 

※ 충무공의 장계 (견내량파왜병장) ※
10일에는 새벽에 함대가 출항해서 본도 우수사는 안골포 바깥바다에 있는 가덕도 해안에 진을 치고 있다가 우리가 만약 접전해 들어가게 되면 복병선을 남겨 두고 즉시 달려오기로 약속을 하였습니다.

 

신은 함대를 이끌고 학익진 대형으로 먼저 출발하고, 경상우수사가 신의 뒤를 따르도록 했습니다.

 

이때 좌수영 함대는 학익진을 펴고 있었는데, 혹시라도 숨어 있던 왜군 함대가 나타난다면 육망산 앞바다를 통과하도록 내버려 두었다가 이억기 함대가 퇴로를 차단하면 양쪽에서 포위해 섬멸할 계획이었다. 또 이 계획은 안골포에 주둔해 있는 적의 주력과 분리시켜서 적을 흔들어 놓겠다는 작전이기도 했고, 왜군 측의 탈출을 사전에 봉쇄하려는 것이기도 했다.

 

‘안골포의 왜군 함대는 한산도에서 패한 왜군들과 비슷한 수준으로 무장했을 것이므로 10여 척의 판옥선으로 밀물 때만 막아서서 긴 사정거리의 대포를 동원한다면 왜군 함대는 포구에 발이 묶일 수밖에 없을 것’ 이라는 것이 조선 함대의 판단이었다.

 

포작선을 제외한 전라좌수영의 판옥선과 협선을 총 50여 척이라고 보고, 병선과 병선 사이의 간격을 50m 정도였다고 가정하면, 약 2km 이상 되는 거리가 된다. 그렇게 되면 안골포와 웅천포(와성산) 앞바다를 연결하는 ‘一’ 자 진형이 형성되는데 이는 수색을 겸한 학익진의 봉쇄작전이었다.

 

원균 함대는 바로 그 뒤를 따르면서 학익진 대형을 보완했다. 그렇다고 두 함대가 서로 뒤섞여 항진했던 것은 아니었다.

 

안골포에 정박해 있던 왜군 함대 진영에는 와키자카 함대의 대패소식이 전해져 있었다. 한산도에서 도망쳐온 왜선단에서 급전한 것인데, 설마 했던 일이 현실로 나타나자 전국(戰國)을 풍미하며 최고의 수군지장으로 이름을 날렸던 구키 요시다카의 안색은 하얗게 질려버렸다.

 

보고된 내용은 상식적으로는 받아들이기 힘든, 그야말로 가당치도 않은 일대 변괴가 아닐 수 없었다. 아무리 강한 적이라 해도 그렇게 큰 함대를 단번에 요절낼 수는 없는 일이었다. 더욱이 이번에는 포구에 갇힌 상태에서 싸운 것이 아니라 바다 한가운데에서 벌인 전투였기 때문에 어찌됐건 접전이 벌어졌어야 했다.

 

하지만 “위계(危計)에 걸려 포위당했고, 적의 공격이 너무도 급작스러워 차마 반격의 기회를 가질 수 없었다” 는 전언이었기 때문에 의문은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더구나 이 소식을 전해온 이들은 본대에서 처져 있었던 덕에 처음부터 조선 함대의 공격권에서 벗어나 있었고, 해전 초에 곧바로 도망쳐온 경우였기 때문에 그들에게서 얻을 수 있는 정보에는 한계가 있었다.

 

와키자카의 생사와 기타 자세한 상황 등에 대해서는 더 이상 확인할 길이 없다는 점에서 구키의 의문은 계속 증폭되어만 갔다. 구키는 와키자카가 자신들을 기다리지 않고 단독으로 출동함으로써 결국 대사(大事)를 그르치고 말았다는 사실에 가슴을 치면서도 보다 충분한 준비 없이 조선으로 건너온 자신의 성급함에 대해서도 크게 자책하고 있었다.

 

구키는 오다 노부나가 밑에서 수군장을 지냈고, 히데요시 밑에서는 수군장관의 직책을 수행하며 각 영지에 병선 건조를 독려해 온 인물이었다. 임진왜란 개전 후 1년이 되는 시점에서는 그동안의 경험을 바탕으로 새로운 층루선을 개발했으며, 이 신형 층루선을 전군에 보급하기도 했다.

 

그 이전의 층루선들이 포장마차형에서 판자형(밀폐형)으로 변모하게 된 것은 그의 공로였던 것으로 보여진다.

 

와키자카 야스하루와 도도 다카도라, 가메이 코레노리 등이 일본을 대표하는 수군 맹장들이었다면, 구키는 해전술에 밝은 지장형이었으며, 중세 일본 수군 역사상 최대의 거물급 수군장군이자 제독으로 전해지는 인물이다.

 

하지만 구키 요시다카의 화려한 이력은 임진왜란 후 새로운 통치세력으로 부상한 도쿠가와 이에야스에 의해 마감되었다고 전해지는데, 이와는 반대로 히데요시 사후 도쿠가와 막부의 수군 총사령관직을 맡아 여생을 보냈다는 설도 있다. 어떤 것이 정확한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여기서는 그의 최후에 대해 전해지는 일화 하나를 소개할까 한다.

 

‘전쟁이 끝난 후 본국으로 돌아간 구키는 현역에서 은퇴한다. 그러나 1600년 히데요시 세력과 도쿠가와 세력이 천하쟁패를 놓고 벌인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히데요시 측인 서군에 가담하여 도쿠가와의 동군에 맞서 싸운다. 그런데 그의 아들 모리다카가 동군에 가담하면서 부자가 서로 칼을 겨누게 되었고, 승리는 아들이 가담해 싸운 동군에 돌아갔다. 모리다카는 자기가 세운 전공의 대가로 도쿠가와에게 구키의 구명을 청했고 허락을 받았지만 그 소식이 도착하기 전에 구키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구키 함대의 군사(軍師)는 함대 참모장이었던 가토 요시아키라는 27세의 무장이었다. 기록에 의하면 가토 역시 거물급 수군제독으로 알려져 있다.

 

구키 함대는 신형의 전함 3척을 포함해서 약 40여 척의 병선을 보유하고 있었다. 일본 측 기록에는 당시 조선 함대와의 일전을 위해 3개의 함대가 출전해 있었다고 한다. 70여 척으로 구성된 와키자카 함대와 40여 척으로 구성된 구키함대, 그리고 김해 부근에 머물러 있었다는 30여 척 규모의 제 3함대였다. 이들 함대는 총 150여 척에 달하는 대 함대였다.

 

오늘날 일본 학자들 중에는 “와키자카 장군이 자신의 능력을 과신한 나머지 단독으로 출동했으며, 결국 유인전에 말려 쉽게 패했다” 고 설명하기도 한다. 그러나 한산도에서 나머지 함대가 모두 동원되었더라도 크게 달라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당시 왜군 측은 무장면에서 조선 함대를 도저히 이길 수 없었고, 특히 이순신이 펼친 고도의 해전법들을 해석하고 거기에 대응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해전에 관한 한 일본 최고의 지장이자 전략가로 통했던 구키 요시다카. 그리고 그의 군사 가토 요시아키. 이들은 자신들의 전력으로는 이순신의 조선 함대를 당해낼 수 없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육망산과 안골산성에 망대를 세워 놓고 조선 함대가 언제 쳐들어올지를 살피게 했으며, 수시로 육망산에 올라 포구 밖 바다에 시선을 고정시키곤 했다. 물론 적을 발견한다고 해서 그들에게 뾰족한 방책이 마련되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다만 와키자카가 졌다는 이유만으로 싸워보지도 않고 물러설 수는 없었다.

 

“안골포의 조선식 성을 튼튼한 왜성으로 고쳐 놓으라!” 는 히데요시의 명령도 따라야 했기 때문에 일단은 버틸 수 있는 데까지 버티다가 정 안 되면 부산 쪽으로 도망친다는 생각이었다.

 

다행히 안골포는 수비전을 펴기에는 안성맞춤의 지형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포구의 너비는 좁고 수심은 얕았다. 때문에 적은 한꺼번에 공격해 오지 못할 것이고, 수로 앞에는 방파제가 둘러쳐져 있었기 때문에 밀물 때에만 총력으로 맞선다면 충분히 버틸 수 있을 것으로 보였다. 썰물 때가 되면 조선 함대는 다시 물러날 것이고, 이 때 전열을 재정비하면서 제 3함대에 구원을 요청한다는 복안도 있었다. 또 포구 뒤로는 안골성이 버티고 있었으므로 그곳에서 최후의 항전을 벌일 수도 있었다.

 

또한 옆에 위치한 육망산은 해발 180m의 가파른 바위산이었다. 맑은 날 그곳에 오르면 대마도까지 보일 정도였으므로 관측소나 봉화대로서는 절묘한 지형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적어도 안골성에 머물고 있는 한 기습당할 위험은 없었다..

 

안골성에서 육망산을 바라보면 오른쪽으로 탁 트이게 보이는 것이 안골포 마을이며, 왼편으로 보이는 것이 가덕도이다. 그리고 눈을 뒤로 돌리면 낙동강 하구의 섬들도 한눈에 들어온다. 육망산에 오르지 않아도 안골성은 낙동강 하구, 부산, 대마도 등지에서 웅천 · 진해 · 마산 · 창원, 그리고 견내량으로 가는 길목을 지키는 천혜의 감시초소였다.

 

오늘날에는 부산에서 마산, 견내량으로 가는 배들이 뱃고동을 울리며 육망산 아래로 지나다닌다. 임진왜란 때 왜군들은 재래식 조선성을 헐고 그 돌로 왜성을 다시 쌓았다. 지금도 그렇게 축성된 왜성의 천주각 돌축대가 남아 있고, 축대 밖 가파른 능선에는 일본식 토담과 돌담(마루성)이 3겹, 4겹으로 둘러쳐져 있어 난공불락의 요새였음을 짐작케 해준다.

 

10일이 되자 육망산 초소에서 “조선 함대 출현!” 이라는 급보가 전해졌다. 보고를 받은 구카와 가토는 황급히 초소로 올라갔다. 초소에서 내려다보니 조선 함대의 일부는 가덕도에서 매복에 들어갔고 나머지 함대가 포구 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구키와 가토는 적이 유인전을 펴고 있음을 직감했다.

 

※ 충무공의 장계 (견내량파왜병장) ※
안골포에 이르러 선창을 바라본즉, 큰 왜선 21척, 중간 왜선 15척, 작은 왜선 6척이 정박하고 있었습니다. 그 중에 3층 선실이 있는 큰 왜선 1척과 2층 선실이 있는 큰 왜선 2척이 포구에서 밖에 향해 떠 있었고, 나머지 배들은 고기 비늘처럼 줄지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포구의 지형이 좁고 얕아서 조수가 물러나면 육지가 드러날 것이므로 판옥선과 같은 큰 배는 출입할 수 없어서 여러 차례 유인해 내려고 하였습니다만, 그들의 선봉 함대 59척을 한산도 바다 가운데로 유인해 불태우고 사살하였기에 형세가 궁해지면 육지로 오르려는 계획으로, 험한 곳에 의거하여 배를 매어둔 채 두렵게 여기며 겁내어 나오지 않았습니다.

 

안골포에 정박해 있던 왜선들 가운데 대선만 21척이었다고 한다. 역시 큰 규모다. 왜군 함대의 병력을 추산해보자.

 

☞ 대선(신형) : 3척×300명 = 900명
☞ 대선 : 18척×180명 = 3,240명
☞ 중선 : 15척×80명 = 1,200명
☞ 소선 : 6척×20명 = 120명
합계 : 5,460명

 

약 6천 명 규모의 병력이다. 그밖에 안골포의 조선식 성을 왜성으로 고쳐 쌓는 작업을 하고 있었다면 더 많은 왜군과 조선인 부역자들이 산성에서 일하고 있었을 것이고, 부역자들도 강압에 의해 일본군 노릇을 했을 수도 있다. 또한 일본 측 기록에 의하면 다수의 왜 육군 부대들이 와키자카와 구키의 연합함대에 합류해 있었다고 하므로 실제 병력은 더 많았을 것으로 여겨진다.

 

이순신은 층각 대선의 모습을 자세히 기록해 두었는데, 그때까지 보아온 것과는 형태나 크기가 달랐던 것으로 여겨진다.

 

구키는 병선 개발에 조예가 깊었던 인물이었다. 그래서인지 이순신의 기록에도 색다른 모습으로 묘사되어 있다. 우선 층루선의 모양새에서 차이가 있다. 이순신은 이 장면을 3층과 2층 선실이 있는 층루선이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사천포 해전 때는 12척의 층루선이 있었으나 그 모양새에 대해 특별히 언급하지 않았고, 당항포 때는 ‘3층 누각형’, ‘돛을 두 개나 달았다’ 등으로 표현하면서 특별히 큰 왜선이라고 했다.

 

한산도 해전 때는 와키자카의 기함이 멀리 있어서 그랬는지 특별히 언급하지 않았다. 그런데 안골포의 층루선을 묘사할 때는 ‘3층 선실이 있는 큰 왜선’ 이라는 표현으로 특별히 언급해 놓았다.

 

그러면 지금까지 기록된 층루선의 유형을 구분해 보자.

 

첫째, 층루선도 작은 것과 큰 것이 있다.
둘째, 층루선도 1층형, 2층형, 3층형으로 서로 다르다.
셋째, 1층 선실형, 2층 선실형, 3층 선실형이 있다.
넷째, 안이 훤히 보이게 만들고 포장을 덮은 ‘포장마차형’ 이 있고, 두꺼운 판자로 만든 ‘밀폐형’ 도 있다.

 

안골포의 선실형 층루선들은 아마도 밀폐형이 아닌가 보여진다. 앞에서 구키가 임진왜란 1년 후부터 신형의 층루선을 개발했다고 했지만, 이 무렵부터 신형이 등장하고 있었던 것 같다.

 

일본에서 출간된 임진왜란 관련 서적들에는 당시 안골포 기함 대선의 층각 선실은 두꺼운 판자를 3중으로 처리해 만들었다고 하는데, 조선 함대의 대포 공격에 대비한 구키 요시다카의 역작으로 보인다.

 

※ 충무공의 장계 (견내량파왜병장) ※
그래서 할 수 없이 여러 장수들에게 명령하여 서로 교대로 출입하면서 천자 · 지자 · 현자 총통과 여러 가지 다른 총통으로 장편전 등을 빗발같이 쏘아 맞추고 있을 무렵 본도(전라도) 우수사도 장수를 정하여 복병을 시켜 두고 급히 달려와 협격하니 군세가 더욱 강해져 3층 방이 있는 큰 왜선과 2층 왜선을 타고 있는 왜적들은 거의 사상되었습니다.

 

그러자 왜적들은 사상한 자들을 하나하나 끌어내고 작은 배로 실어 내고, 다른 배의 왜병들을 다시 작은 배에 옮겨 실어 층각형 큰 왜선으로 모아들이는 것이었습니다.

 

안골포의 왜군들은 처음부터 밀물 때의 공격에 대비한 수비에 치중하고 있었으므로 포구 밖으로는 나오지 않았다. 이에 좌수영 함대는 나름대로의 목표를 정해서 공격을 시작했다.

 

포성을 들은 가덕도의 우수영 함대도 바로 공격에 가담했고, 이때의 공격은 학익진법의 일시집중타가 아니라 교대로 들어가 공격하는 선단별 교대사격이었다.

 

왜군들도 왜식 대포와 조총으로 조선 함대의 접근을 필사적으로 막았고, 이 과정에서 방파제는 수비전에 큰 도움이 되었다. 비늘처럼 앞을 막아선 중간 배와 작은 배의 왜군들은 층루선단의 선체 방어를 위해 죽음을 무릅쓴 방어전을 펼쳤다.

 

포구 안은 수심이 얕아서 배가 침수되어도 하부만 물 속에 잠겼기에 왜군 격군들은 크게 동요되지 않았고, 조선 함대와의 거리도 어느 정도 떨어져 있었던 데다가 집중사격이 아닌 교대식 산발 공격이었으므로 근접전용 산탄이나 피령전 등으로 인한 피해도 그렇게 크지 않았다. 그리고 바닷물이 계속 빠지고 있었기 때문에 ‘조금만 더 버티면 된다’ 는 생각으로 악착같이 버티고 있었다.

 

썰물로 인해 바닷물에 푹 담겨졌다가 떠오른 왜선들은 조선 함대의 불화살과 발화탄 공격에 쉽게 불붙지 않았다. 구키는 천만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이런 식으로는 오래 버틸 수 없을 것으로 판단했다. 이에 오후 한 차례만 더 버텨낸 후, 밤을 틈타 야반도주를 시도할 계획을 세웠다.

 

“가토! 시간을 지체할수록 우리에게 유리할 것은 없다! 이렇게 버티다가는 우리 전함들이 모두 파괴될 것이니 해가 지면 퇴각할 준비를 갖추게 해라!”

 

“만약 출로를 열지 못한다면 안골성에서의 수성(守城)도 하나의 방법이 아닐까 합니다만…!”

 

가토는 탈출 자체를 커다란 위험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밤이라 해도 섬 여기저기에 적의 복병 선단이 진을 치고 그 순간을 노리고 있을 것이라 생각했고, 그렇게 발각된다면 물귀신이 되는 것은 시간문제라고 보았다.

 

그러나 구키의 의지는 확고부동했다.

 

“살고 죽는 것이 문제가 아니다. 서진 계획은 근본적으로 잘못된 것이야. 내가 보고서를 쓸 것이니 단 한 명이라도 살아남아 내 뜻을 다이코님께 전해야 한다!”

 

“계속해서 패한 것도 분한데 계획을 바꾸다니요? 그같은 보고가 올라간다면 다이코님께서 뭐라고 하시겠습니까? 그렇게 될 바에는 차라리 의롭게 죽는 길을 택하겠습니다! 현재로서는 성을 의지하여 최후까지 싸우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후진 함대가 구원하려 올 수도 있으니 그때까지…”

 

“원군이 온들 크게 달라지겠느냐. 계획을 바꾸지 않는다면 서해는 뚫지 못한다! 이를 제대로 알리는 일이야말로 더 큰 충성임을 명심해라!”

 

공방전이 한창인 가운데서도 구키와 가토는 무엇이 최선인지에 대해 소신을 교환했다. 40대의 구키가 실리를 내세웠다면 20대의 가토는 명분을 주장했다. 그러나 구키의 안목과 논리 앞에서 가토의 명분은 힘을 얻지 못했다.

 

“분명히 말해 두거니와 우리는 오늘 밤 이동한다! 실패하더라도 누군가는 살아서 반드시 기지로 돌아가야 하고, 보고서를 전해야 한다!”

 

이순신의 조카였던 이분의 《이충무공 행록》에는 ‘안골포의 왜군들은 철편과 젖은 솜을 둘러치고 있었다’ 적혀 있다.

 

※ 이충무공행록 ※
적들은 배를 쇠로 싸고 젖은 솜으로 가렸는데, 우리 군사를 보고서는 죽기로 싸울 계획을 세우며 혹은 총을 가지고 언덕 위로 올라가며, 혹은 배에서 그대로 항전했지만, 우리 군사들도 이긴 기세로 그것을 꺾어 치자 적들은 당해내지 못하여 언덕에 있던 자들은 달아나고 배에 있던 자들은 죽었으며, 42척을 불태워 깨뜨렸다.

 

조선 함대의 화공에 대비하기 위해 구키는 본국에서 많은 양의 철판과 솜을 가져왔고, 더욱이 한산도에서의 패전 소식을 듣고서는 인근 인가의 이불, 솜옷까지 긁어모아 방탄을 강화했다.

 

구키는 조선(造船) 분야는 물론 해전 분야에도 조예가 깊었으며 그러한 실력을 바탕으로 일본 조선 기술의 상징인 3층 선실의 거함(巨艦)을 결사적으로 지켜내고자 했다.

 

구키는 계속 깨어진 곳을 고치고 불붙은 곳을 끄도록 했는데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음에도 불구하고 왜군들은 계속 버텼다. 그러나 일말의 희망을 버리지 않고 버티기에 총력전을 쏟고 있던 왜군들은 조선 함대의 집요한 공격에 차츰 종말의 위기로 몰리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 위기의 순간에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났다. 구키 요시다카가 신의 가호(加護)를 빌었는지는 그의 회고록이 없어 알 수 없지만, 그의 참모가 남긴 《고려선전기》에는 구키가 신의 가호를 빌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 결과 신령님들이 나타나 각 병선 선수에 서서 조선군의 큰 살탄들을 막아 주었다고 한다. 이 기록은 당시 왜군측 기록으로서는 최고의 권위서로 인정받고 있는데, 이 자료에 기록되어 있는 내용은 다음과 같다.

 

※ 고려선전기(高麗船戰記) ※
하도 남부끄러워 말할 바가 못되지만, 후세를 위해 기록해 둔다.

 

…구키 요시다카 장군과 가토 요시아키 장군의 선단은 7일 가덕에 닿았다가 8일은 당도(안골포인 듯)에 왔다. 9일 조선 수군의 대소 병선 100여 척이 공격해 왔던바, 화포와 화시(火矢)가 비와 같이 쏟아졌고, 아군도 대포를 쏘아 서로 살상했다. 해전은 아침 8시경부터 오후 6시까지 계속되었는데, 조선 쪽은 전부 철로 덮은 것이 있어서 아군의 포가 파괴할 수 없었다.

 

적은 강한 기둥을 가진 철제 화살을 사용했으며, 아주 가까운 거리에서 쏘았기에 아군 장수들 가운데 층루에 있었던 경우에는 특히 위태로웠다.

 

싸움이 무르익었을 때 흰옷을 입고 일본식 예모(禮帽)를 쓴 사람이 각 병선 선수에 나타나 모두들 괴이하게 여겼는데, 가토 요시아키 군사가 말하기를 “수호신이다!” 고 하였다.

 

이때부터 적이 쏜 화살들은 중도에서 파괴되었기에 배에 맞지 않았고, 장수와 층루가 무사했다. 날도 이미 저물었으매 요시다카 장군과 요시아키 군사는 부산으로 돌아왔다.

 

7월 7일(조선 월력 8일. 당시의 월력에는 한 · 일 간에 하루의 차이가 있었다)은 가덕에 있었다고 하는데, 그 날은 와키자카 함대의 뒤를 따르고 있었던 것 같다. 때문에 조선함대가 만약 견내량을 통과해서 북쪽 바다로 나갔다면 이들 함대의 협격을 받았을 수도 있었던 일이다.

 

구키 함대는 한산도에서 패하고 도망해 오던 14척과 가덕도 인근에서 마주쳤을 수도 있었으며, 패전 소식을 듣고는 서둘러 안골포로 와서 수비전을 계획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안골포 해전 때 조선 수군이 쏜 장군전과 대장군전 등은 층루에 있던 왜군들에게 매우 위협적인 무기였었던 것 같다. 전투 때는 최단거리가 5~6m까지 좁혀졌을 경우도 있었을 것으로 보이는데, 이 거리는 방파제를 칸막이 간격으로 둔 거리다.

 

이 기록에는 거북선을 ‘철로써 온 선체를 싼 배’ 라고 설명하고 있다. 조총으로 조준사격을 하자 탄환이 “땡그랑!” 하고 튕겨져 나왔기 때문에 철제 장갑선인 줄 알게 되었을 수도 있고, 이미 전해 들은 바가 있었을 수도 있다.

 

신령님이 나타나 자신들을 구해 주었다고 하는데, 2차대전 당시에도 일본인들은 전쟁에 나가기 전이나 전쟁 때 신사(神社)의 신에게 무운(武運)을 비는 관습이 있었다.

 

구키 요시다카와 가토 요시아키도 해전의 고비에서 많이 빌었을 것이고, 어찌됐건 살아서 돌아갔다.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기적같이 살아남은 이들로서는 하늘이 정말로 자신들을 구해주었을 것이라고 믿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믿음이 과장되게 기록되어 전해져 온 것 같다.

 

※ 충무공의 장계 (견내량파왜병장) ※
하루 종일 이렇게 해서 그 배들을 거의 다 깨뜨리자 살아남은 왜적들은 모두 육지로 올라갔습니다. 육지로 올라간 왜적들을 다 잡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곳 백성들이 산골에 숨어 있던 자가 매우 많은데, 배를 모두 불살라 적들을 궁지에 몰게 되면 숨어 있던 백성들이 비참한 살육을 면치 못할 것이므로 잠깐 1리쯤 물러나와 밤을 지냈습니다.

 

조선 함대가 칠천량해협을 출발했을 때는 이른 새벽 첫 닭이 울 무렵인 새벽 2시경으로 보자. 그 전날 하루를 쉬었기 때문에 특별히 일찍 서두른 출항이었다. 그리고 8시 무렵 안골포 앞바다까지 왔고, 곧 해전을 개시해서 오후 4시까지 적을 두들겼다.

 

그 결과 포구에 있었던 왜선들은 거의 다 불탔으며, 방파제와 왜선의 잔해들이 막아주고 있었던 일부의 병선들만이 배 밑에 구멍이 뚫리는 것을 모면할 수 있었다. 그래도 갑판과 층루 부분은 만신창이가 되었다.

 

썰물 때 조선 함대가 물러나자 왜군 측은 동료들의 시체를 모으고 부상자를 돌보면서 육지 쪽에서 기습해 올지도 모르는 조선군의 공격에도 대비했다. 또한 피아간에 휴식도 필요했다.

 

왜군들은 육탄 방어에 가까운 선체를 동원한 수비전을 펴느라 초죽음 상태가 되었고, 조선 함대는 그날 새벽부터 항진을 시작해서 7월의 무더위 속에서 무려 16시간 동안 비지땀을 흘렸기 때문에 모두 탈진한 상태였다. 이순신은 그러한 상태에서 육지까지 올라가 무리하게 백병전을 벌일 의향이 없었다. 불리한 전투가 되어 아군측의 희생이 클 것이었기 때문이다.

 

만약 백병전을 했었다면 바닷물에 허벅지까지 잠기는 갯벌을 지나 육지로 상륙해야 하고, 그렇게 되면 왜군의 조총 사격으로 육지에 닿기도 전에 모두 사살되고 말았을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이순신은 배를 물려 밤을 지냈다.

 

이순신이 이렇게 결정을 내기게 된 상황을 보다 구체적으로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불리한 소탕전에 얽매이기보다는 제 3의 함대와 부산포 쪽의 왜 함대를 서둘러 분쇄하는 것이 전략적으로 더 값지다는 점이었다.

 

둘째, 궁한 적이 육지로 도망가면서 어떤 짓을 할지 모른다는 점이었다. 안골포 뒤에는 김해부가 있고 그곳은 인구가 밀집된 지역이었다. 이 고을 백성들은 낮에는 산에 숨는 등 왜군들과 숨바꼭질을 하고 있거나 아니면 징용병이나 종노릇을 하고 있을 때였다. 이순신은 힘없는 백성들이 왜군들에게 보복을 당하지 않을까 우려했다. 그래서 왜군들이 덜 부서진 배를 타고 도망가 주기를 바랐다.

 

셋째, 덜 부서진 왜선들은 물을 뒤집어썼기 때문에 화공에 성공하기도 어려웠고, 그 잔당들의 소탕을 위해 야간 해전까지 치르면서 병사들을 지치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는 점이다.

 

넷째, 또 다른 왜 함대의 구원 가능성이었다. 한산도해전 소식은 그 무렵이면 부산포에 있는 왜군들에게도 전해져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또다른 적 함대가 몰려올지도 모르는 일이고, 안골포에서의 대포 소리와 검은 연기는 김해 쪽에서도 감지할 수 있었을 것이므로 역시 다수의 왜군들이 구원 차 달려올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렇다면 여기에 대비해서 장병들을 한시라도 빨리 쉬게 하고 비능률적인 해전으로 허비되는 화약과 포탄도 아껴야 했다.

 

다섯째, 해가 지기 전에 육지에 올라 나무하고 물을 길어 취사 준비를 해야 했다. 이 지역의 육지에는 다른 왜군 부대들이 어디에 어떻게 잠복해 있는지 알 수 없었으므로 어두워진 후에 육지에 오르는 것은 대단히 위험한 일이었다(훗날 원균은 수군통제사가 되었을 때, 해가 떨어진 후에 가덕도에 상륙해서 식수를 긷게 하다가 적의 기습을 받게 된다). 따라서 해가 있을 때 저녁까지 해결하고 일몰 후 자리를 옮겨 다른 바다에서 진을 치고 밤을 지내야 했다.

 

당시 조선 수군의 주축은 어민들이었다. 이들은 시간이 있을 때마다 고기잡이, 김과 미역 따기, 굴이나 조개를 캐 부식거리를 해결했다. 그리고 하루에 한 번 정도 육지에 올라 물을 긷고 나무해서 밥을 짓고, 김밥으로 말아 가지고 다니며 항해도 하고 전투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