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전기록 - 5장 - 거북선
● 돌격함 거북선
※ 충무공의 장계 (당포파왜병장) ※
그런데 신이 일찍이 왜적의 난리가 있을 것을 걱정하여 특별히 거북선을 만들었사온데, 앞에는 용머리를 붙여 그 입으로 대포를 쏘고, 등에는 쇠못을 꽂았으며, 안에서는 밖을 내다볼 수 있으나 밖에서는 안을 볼 수 없고, 비록 적선 수백 척 속이라도 뚫고 들어가 대포를 쏘게 되는데 이번 길에는 돌격장이 타고 나왔습니다.
그래서 먼저 거북선에 명령하여 적 함대 속으로 돌진해 들어가 천 · 지 · 현 · 황 등 각종 대포를 쏘게 했습니다.
임진왜란이 있은 지 200년이 지날 무렵 정조대왕(1752~1800)은 규장각, 삼도 수군 본부, 이순신 후손 종가에 명하여 임진왜란 때 활약한 거북선 관련 그림들을 수집케 했다. 그렇게 해서 찾아낸 그림의 이름은 ‘전라좌수영 거북선’ 이다.
왕명으로 찾아 둔 그림이므로 이 그림은 조선왕조의 정사적 자료가 되고 이 점이 민간에서 그려 전해진 것들과는 다르다. 그리고 충무공 자신이 기록해 둔 3편의 거북선 특집과 함께 임진란 당시의 용맹스러웠던 거북선의 모습을 밝혀주고 있기에 참으로 반가운 것이다.
《태종실록》 을 보면 “태종 13년(1413)에 임금이 ‘임진강을 지나며 거북선과 왜선이 서로 싸우는 (훈련)형상을 구경했다.’ 그리고 태종 15년(1415)에 ‘거북선의 법은 많은 적과 충돌하되 적이 능히 해치지 못하므로 과연 승전할 만한 좋은 방식이라 할 수 있사오니 다시금 튼튼히 만들도록 명령을 내리시어 전쟁에 이길 수 있는 기구를 갖추게 하소서” 라는 기록이 있다.
태종은 왜구 정벌을 위해 오랜 세월 동안 수군의 전력 강화에 힘썼고, 그 무렵 병선의 수는 500여 척에 달했다. 그러다가 태종 18년, 왕위를 세종에게 이양하고 세종 1년에 상왕으로서 대마도 정벌을 주관했다.
아마도 그때 대마도 정벌에는 거북선도 참전했을 것으로 여겨진다. 거북선을 건조하고자 했던 목적인 왜군과의 해전을 위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거북선은 목선이었으므로 평균수명은 약 10년 정도였다. 따라서 태종 15년에 건조된 거북선은 대마도 정벌 때는 선령이 3년밖에 되지 않은 신조 병선이었다.
그 후 세종은 화포의 개량에 매진했으며, 무려 28년이라는 세월이 걸렸다. 그리고 그 내용을 ‘훗날 긴히 쓰일 것이다’ 고 하면서 《총통등록》 이란 책자로 발간토록 했는데, 세종이 말한 ‘훗날’ 은 임진왜란이 되었다.
이 책자의 발간은 조선왕국의 병기 교과서의 출간이었던 동시에 세종의 조선왕국형 문물제도 완성을 위한 차원으로 추진되었다. 주물공업은 그 당시 중공업의 대명사였다. 조선의 중공업은 그 무렵 세계 최고의 수준이었다.
병선들의 발전사를 살펴보면, 세종 때는 그 당시까지의 조선, 중국, 일본, 그리고 오키나와의 병선들을 참조해서 다도해에 알맞게 밑이 평평하고 왜구들이 쉽게 기어오르지 못하도록 높이가 높은 병선을 개발했다.
세종은 이 일을 신숙주에게 맡겼고, 신숙주는 그 후 세조 때에 이르기까지 병선의 개략에 힘썼다.
1550년, 명종 때에 와서 나무판자로 된 함포실 겸 노꾼실을 갖추게 된 병선이 판옥선이다. 선조 때는 이 판옥선에서 거북선이 나왔다.
이순신은 무관이었으면서도 학자(선비)였다. 젊은 시절에는 늘 등불을 밝히고 밤늦은 시각까지 독서를 했다는 기록도 있지만, 장계나 《난중일기》 속에 등장하는 글귀들을 보면 동양권의 유교 경전과 각종 병서는 물론 《태종실록》 에 있는 거북선의 구조와 각종의 해전사를 격물 · 치지의 정신으로 그 이치를 깊이 탐구했다.
또 젊은 시절 훈련원 봉사로서 우수한 군관 경험을 쌓은 바도 있었다.
이러한 역사를 종합해 보면, 거북선은 조선시대의 국방과학 역량이 응집되어 탄생한 세계적인 최첨단 전함이었던 것이다.
태종 때와 선조 때의 거북선을 비교해 보면, 대포의 성능은 세종 때 비약적인 발전이 있었으므로 무장면에서 대폭 강화되었고, 선체는 판옥선을 개량한 것이었으므로 태종 때의 선박 구조와도 많이 다르다. 따라서 현대적 시각에서 볼 때도 이순신의 거북선은 신개발품이라 할 수 있다.
이 같은 점들은 하드웨어에 속하는 부분이다. 여기에 해전에서 사용된 학익진 등 다양한 소프트웨어들은 태종 때의 해전법과는 아주 큰 차이가 있었다.
《난중일기》 1592년 3월 5일자를 보면, 류성룡(1542~1607)은 《증손전수방략》 이라는 책을 구해 이순신에게 보냈다.
이 책을 보고 나서 이순신은, ‘수륙전에서 불로 공격하는 전술 등에 관한 것들을 낱낱이 말했는데, 참으로 만고에 기이한 저술이다’ 라고 기록해 두었다. 이 기록은 병학의 대가가 남긴 독후감임을 유념해 두자.
‘불로 하는 공격’ 이란 화약과 대포, 소총을 활용한 공격법을 말한다. 이 책자는 명나라의 군사교범인 것 같고, 어쩌면 오늘날에도 중국에 전해지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순신의 해전 원리는 이 책에서도 적지 않은 영향을 받은 것 같다. 따라서 향후 이 책자를 찾아 연구해 본다면 이순신 해전의 원리를 더욱 명확히 조명해 내는 데 도움이 될 것 같다.
명나라는 유럽제 대포(불랑기포)의 원리를 도입하고 있었다.
조총은 명 나라 중앙정부 차원에서는 채택되지 않았지만 일본과 마찬가지로 1543년 경 포르투갈인 상인이 전해준 바 있었다. 그래서 이 책자에도 ‘불랑기식 소총’ 이라고 해서 조총에 대해서도 특별히 설명되어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류성룡은 왜란의 가능성을 앞두고 일본측 무기와 병법 등에 대해서 나름대로 깊이 고심해 왔고, 신립과 이순신 등 수륙을 대표하는 장수들과 상의도 하면서 귀중한 자료들을 보내주었다.
그러나 받아들이는 쪽에 따라 반응과 결과는 크게 달랐고, 조정차원에서도 대체로 무사안일에 빠져 있었기에 류성룡의 위치에서도 그의 걱정은 걱정으로 끝나고 말았다.
하지만 이순신은 그렇지 않아도 각종 정보들을 수집하고 있었고, 류성룡으로부터 소중한 자료들을 받았으니(어쩌면 이순신이 요청했을 수도 있다) 그로서는 대단히 반가운 일이었을 것이다.
앞의 장계에서 ‘용머리를 설치해서 입으로는 대포를 쏘고…’ 라고 한 대목은 거북선의 용머리의 용도가 ‘포탑’ 임을 설명한 것이다. 위치상으로 따져보면 거북선에서 가장 높은 위치에 있는 포탑이었다. 만약 거북선이 선체가 높은 층루선에 바짝 접근해서 용머리의 대포로 사격을 했다면 가공할 위력을 발휘했을 것이다.
또 거북선이 적장을 표적으로 삼아서 죽였다면, 해전은 초전 승리로 종결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용머리 포탑에서는 왜선의 갑판을 내려다보면서 산탄 포탄을 쏠 수도 있었고, 대포를 장탄하는 동안 발화탄에 불을 붙여 투척하기에도 용이했을 것이다. 또 특수한 표적을 쏘아 맞췄던 저격병들에게도 최적의 조건을 만들어 주었다.
전라좌수영 거북선의 그림에서 보는 용머리는 다락방 같은 구조에 버스만한 크기이며, 2개의 사격조가 탑승해서 아래에서 장탄을 도와주었다면 엄청난 화력을 내뿜는 포탑 기능을 수행했을 것이다.
중세 유럽의 대포를 보면 포신을 상하로 움직이기가 불편했다. 그래서 가까이 있는 적함의 돛대를 쏘아 맞출 때는 작은 포를 뺏전에 설치해 놓고 수동으로 조준해서 파도와 바람으로 상하로 움직이는 돛대를 치켜 쏘아 맞춰서 내려앉게 했다.
거북선 2층에 위치한 대포(천자포, 지자포)는 크고 무거웠다. 게다가 갑판 위의 대포이므로 거리가 10m 이내가 되면 층루선의 층루를 치켜 쏘기가 어렵다. 그래서 용머리 포탑에 중형포에 속하는 현자포를 설치해서 유럽의 뱃전에서 쏘는 소형포와 같이 포신을 상하 좌우로 쉽게 돌려 가면서 사격을 했을 것이다.
거북선 등에 있는 좌우 각각 여섯 개의 총포 구멍과 두 개씩의 창문도 설명해 놓았다. 창문들은 아래쪽을 밀어서 열고 무엇을 쏘거나 던진 후, 손을 떼면 저절로 닫히는 구조다.
충무공의 조카 이분의 《이충무공 행록》 에는 거북선의 칼, 송곳 위에 거적(또는 이엉)을 덮고 싸웠다고 한다. 그렇다면 안은 어둡고 외부 쪽은 밝았으며, 그 위에 이엉을 덮었다면 위장망을 씌운 구조로 보인다.
또 안쪽에 허수아비 등을 세웠다면 가까운 거리에 있는 왜군 조총수들도 표적을 찾기 어려웠을 것이다.
‘비록 적선 수백 척 속에라도 뚫고 들어가…’ 라는 기록으로 볼 때 적진을 교란시키는 것은 물론 근접탄을 쏘고 다녔음을 알 수 있다.
더욱이 거북선이 쏜 근접탄이 왜장선의 층각을 공격했다면 왜군측은 순식간에 ‘지휘력 마비’ 라는 위기에 직면했을 것이다.
이렇게 교란과 근접탄 사격, 지휘부 파괴 등의 임무를 한꺼번에 수행해 냈던 전함은 세계사 속에서도 그 유례를 찾아보기 어렵다. 거기에 해전의 내용을 분석해 보면 왜군들은 거북선의 등에 기어오르기는커녕 접근조차 하기 어려웠을 것으로 보인다.
‘이번 길에 돌격장이…’ 는 거북선이 돌격전을 위한 특공 전함이라는 점과 거북선의 지휘관 신분을 기록한 것이다.
또 하나 중요한 점은, 돌격장이 타고 있는 3층 선실이 철갑으로 쌓여 있을 뿐더러 함교의 위치가 어디인지 외부에서는 알아보기 어렵다는 점이다.
이 점이 왜군들의 층루선(또는 유럽의 병선)이 함교가 분명해서 초전에 사령관이나 대장급 지휘관들이 쉽게 표적이 되었던 것과 다르다. 그러므로 거북선의 돌격장은 치열한 전투상황 속에서도 시종 안정된 상황에서 해전을 풀어나갈 수도 있었다.
장계에는 거북선이 천 · 지 · 현 · 황 등 조선식 대포와 대완구, 질려탄, 그리고 중형과 소형의 각종 승자총통으로 중무장하고 있었음을 기록하고 있다. 그밖에도 전란 중에 서양의 것을 참조해서 개발한 새로운 대포들도 최우선적으로 탑재했을 것이다.
이상에서와 같이 거북선은 당시 지구촌을 통해서도 독보적인 다목적 · 다기능 전함이자 최첨단의 무기였다.
마지막으로 조선 함대가 사용한 무기들을 살펴보자.
☞ 장편전 : 장전(보통화살)과 편전을 합한 개념이다.
☞ 철익전 : 쇠 날개를 부착한 굵고 긴 화살로서, 종류는 천자총통의 대장군전, 지자총통의 장군전, 현자총통의 차대전류를 통칭한다.
동양권의 전쟁사를 살펴보면 오랜 옛날부터 사용되어 왔다. 그때는 대포에 넣어서 쏜 것이 아니라 큰 활로 쏘았다. 그러나 유럽에서는 이와 같은 장편전류의 발사물은 없었던 것 같고, 동양사 속에서도 중세 이후에는 이런 발사물은 없었던 것 같고, 동양사 속에서도 중세 이후에는 이런 발사물들은 점차 사라져 갔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낯선 역사적 유물이 되었다.
쇠 날개의 용도는 방향 유지의 역할뿐만이 아니었다. 방향 유지만을 위해서라면 가벼운 목재가 더 좋다.
임진왜란 때 진주성과 행주산성 전투 때는 이들 대형의 살탄에 칼을 매달아 적의 공성용 사다리나 운제를 파괴하기도 했다. 그래서 쇠 날개는 그 자체로도 무서운 무기였으며, 다른 무기나 화약통을 매다는 데에도 도움이 되는 돌기 기능도 가지고 있었다.
한편 쇠 날개는 포구의 구경을 확대하는 효과를 가져왔다. 그래서 구경 12cm에 너비 10cm의 쇠 날개를 달았다면 구경이 30cm에 달하는 대포에서 무쇠탄을 쏘는 효과를 낼 수도 있었다. 이것은 유럽과는 다른 동양권 포탄류의 특색이다.
유럽의 해전사를 보면 큰 구경의 철탄은 대체로 선체와 수면이 접하는 분계선인 흡수선 아래를 맞춰 침수시키는 효과를 가져왔다. 이러한 사례로 볼 때, 거북선에서도 거포들은 적선의 홀수선 아래를 쏘아 맞추는 데 중점을 두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 용도로 사용할 때에는 구경이 굵은 대장군전이나 장군전을 사용했을 것으로 보여지며, 이 경우 쇠 날개가 적선의 선복에 꽂혀서 잘 빠지지 않았다면 많은 침수가 뒤따랐을 것이다. 또한 왜선의 홀수선 위 선복에 구멍을 뚫게 하고, 그 다음 소발화탄을 매단 통상의 화살 류들을 그 구멍으로 쏘아 넣는 등 여러 가지 방법을 구사했을 것이다.
☞ 피령전 : 보통의 화살에는 새의 깃을 달았고, 피령전에는 가죽 날개를 달아 여러 발을 한 개의 총통에 넣고 쏘았다.
피령전은 크기가 매우 다양했다. 가장 큰 피령전은 현자총통에 넣어서 쏘는 차대전 다음으로 큰 차중전이 있었으며, 차중전에 중대형 발화탄과 분사용 화약 등을 매달면 중대형 신기전이 되었다.
가장 작은 피령전은 길이가 15cm 정도로 쇠젓가락 만한 크기였다. 작은 표창과도 같은 무기로 한꺼번에 여러 발을 쏘았는데 조선 함대는 이것을 소 · 중형 승자총통에 넣어 동시다발로 쏘았고, 때문에 근접전용 무기로 보인다.
왜군이 15cm 짜리 피령전을 다발로 공격받았다면 고슴도치가 되었을 것이다. 피령전은 대인 살상용 무기로서 왜군들에게는 가히 공포의 대상이었다.
☞ 차중전 : 날개는 가죽으로 만들어 부착시킨다. 차중전은 삼총통에서 발사했다. 가죽으로 만든 날개를 기준으로 하면 피령전에 속하고, 살대의 유무를 기준으로 하면 살탄류로 표현할 수 있다. 살탄류에 대해 《징비록》 에서는 ‘서까래 같이 날아갔다’ 고 묘사해 두었다. 피령전형 살탄류의 용도는 선체 파괴용보다는 적의 지휘부 공격용으로 보인다.
☞ 화전 : 보통의 불화살이다. 이순신은 보통의 불화살로 조총을 이길 수 있는 방안을 찾아냈다.
☞ 철탄형 : 돌이나 철탄에 납을 입혔기에 연의환이라고도 한다. 납을 입힌 것은 포신을 잘 빠져나가게 하기 위해서였다.
☞ 산탄형 : 작은 철탄이나 자갈을 넣어서 쏘았는데 새알탄(조란탄)이라고도 불렀다. 천자포에는 200개, 현자포에는 100개씩 넣어 쏘았다. 사정거리가 짧았지만 거북선들이 왜군 함대 속에 들어가 10m 내외에서 근접사격을 했기 때문에 큰 피해를 입혔다.
사천포해전을 보고한 장계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후에 있은 당포 · 당항포 해전 때의 기록을 참조하면 다음과 같은 ‘사천포해전 다큐멘터리’ 가 엮어진다.
“둥! 둥! 둥!…”
함대 정중앙에 위치한 기함에 독전기가 휘날렸다. 이에 거북선의 돌격을 알리는 북 소리가 울렸고, 선단 뒤편에 모습을 감추고 있던 거북선들이 일제히 선단 앞으로 빠져 나와 그 위용을 드러냈다. 그리고는 곧장 포구 쪽을 향해 돌진해 들어갔고, 이와 때를 같이 하여 전 함대에 ‘학익진을 펴라!’ 는 명령이 내려졌다. 기함의 북소리에 맞춰 각 전선에서도 북을 치고 군악을 울려대는 가운데 어느 새 학익진이 완성되었다.
각 단위 함대들로부터 ‘공격 준비 완료’ 신호가 수기로 보고되었고, 곧이어 ‘전 함대 전진 앞으로!’ 라는 명령이 기함으로부터 하달되었다.
조선 함대는 마치 대붕이 날개를 편 채 움직이고 있는 듯한 모습이었다. 대붕의 머리는 전속력으로 돌진해 들어가고 있던 거북서들이었고, 그 뒤를 특공 판옥선단이 얼마의 거리를 두고 따르고 있었다.
이 거대한 새는 왜선단 전방 70m 쯤에서 일제히 멈춰 섰고 돌진해 들어가던 거북선단만이 전진을 계속했다.
※ 충무공의 장계 (당포파왜병장) ※
그러자 산 위와 언덕 아래, 그리고 배를 지키는 세 곳의 왜적들 역시 빗발치듯 철환을 쏘았습니다. 그리고 그 가운데는 혹 우리나라 사람도 썩여서 쏘므로 신은 더욱 분하여 배를 급히 저어 앞으로 나아가 배를 두들기자, 여러 장수들도 한꺼번에 구름처럼 모여들어 철환 · 장편전 · 피령전 · 화전 · 천자 · 지자 대포들을 폭풍우 같이 쏘아대며 저마다 힘을 다했는지라 소리는 천지를 뒤흔들었고, 고막이 상해서 엎어지는 자, 부축해서 끌고 달아나는 자가 얼마인지 모르겠으며, 그리고는 언덕으로 물러가서 감히 앞으로 나올 생각을 못하는 것이었습니다.
왜군들은 조선 함대가 싸움을 포기하고 물러가는 것으로 생각했었다. 그러다가 다시 돌아오는 모습을 보고는 유인전을 펴기 위한 술책으로 판단했다. 물론 밀물이 차 들어왔기 때문에 전면전의 가능성도 배제하지는 않았다.
왜장은 병력을 선상과 해안가, 그리고 언덕에 분산 배치해서 조선 함대의 공격에 대비케 했고, 자신은 언덕 위에 서서 조선 함대의 움직임을 주시하고 있었다.
그런데 포구로 진입해 오던 조선 함대는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고 이상하게 생긴 몇 척의 배만 계속 다가오고 있었다.
‘흠, 역시 우리를 끌어내려는 속셈이로군…. 저것들은 아마 미끼배일 거야!’
거북선의 존재와 그 용도를 알 리가 없었던 왜장은 조선 함대가 몇 척의 미끼 배를 보내 자신들을 꾀어내려는 줄로 생각했다. 그것은 여타 왜군들에게도 너무나 뻔한 수작으로 보였다. 상식적으로 생각해 봐도 3척의 배로는 12척의 대선을 당해낼 수 없기 때문이었다.
왜장은 이 배들이 자신들을 공격할 거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을 뿐더러 오히려 거북선이 조총의 유효사거리 안으로 들어와 주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
‘걸려들기만 해봐라! 벌집을 만들어 주마!’
왜장은 적의 미끼 배를 격파하고 나면 상황을 봐서 적의 주력도 깨뜨릴 생각이었다. 적은 소문만큼 강해 보이지 않았고, 어수룩한 술책으로 스스로의 한계를 드러내고 있다고 여겼다. 그래서 곧바로 조총부대에 만반의 태세를 갖추도록 명했고, 돌격선단에도 “명이 떨어지면 적장의 머리를 가져오라” 는 지시를 내려둔 상태였다.
그런데 예상과는 달리 미끼 배들은 조총의 유효사러기를 지나 빠른 속도로 달려오고 있었다.
‘저놈들이 제정신이 아닌 모양이다. 제 발로 기어들어 오다니…’
대부분의 왜군들은 이 뜻밖의 상황을 ‘먹이가 저절로 굴러들어온다’ 고 생각했다. 또 한편으로는 적이 이렇듯 무모한 도발을 벌일 수 있게 된 데에는 지난번의 승리로 자신들을 우습게 여기고 있기 때문이라고도 생각하고 있었다.
은근히 자존심이 상한 왜군들은 사격명령을 기다리며 접근해 오는 적선들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런데 또 한 가지 이상한 것이 눈에 띄었다. 그 미끼 배들은 선수에 괴물 모양의 머리(용머리와 충돌용 돌기)를 두 개나 달았고, 선체를 거적 같은 것으로 덮고 있었다.
처음 보는 이상한 배였다. 괴물 같은 모습이 왠지 꺼림칙한 느낌마저 들게 했는데, 왜군 돌격대장 하나가 혹시나 있을 수 있는 동요를 차단하려는 듯 이렇게 외쳤다.
“괜히 겁을 주려고 하는 수작이 아니냐! 놈들은 거적을 헤치고 뛰쳐나올 것이니 그때 남김없이 해치워라!”
왜장의 생각도 비슷했다.
조선군은 조총에 노출되지 않으려고 배에 지붕을 씌우듯 무엇인가를 덮었고, 일단 접근에 성공하면 지붕을 열고 일시에 쏟아져 나올 것으로 보였다. 그렇다면 조선군은 창칼로 승부를 걸어올 것이었고, 괴이하게 생긴 그 배에는 칼을 제법 다룰 줄 아는 조선의 무사들이 타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왜장은 거북선단을 조선 함대의 돌격대쯤으로 여겼다. 그리고 거북선들이 싸움을 걸어오면 나머지도 때를 봐서 합세할 것이라고 판단했다. 때문에 왜장으로서는 적의 주력이 합세하기 전에 미끼 배들을 제거해 버리는 것이 일단은 상책이었다.
이윽고 전속력으로 돌진해 들어가던 거북선 중 1척이 왜선단 정면에 밀집해 있는 왜군 돌격대의 코앞에까지 접근했다.
그러자 왜군의 조총수들은 거북선을 향해 정조준을 했고, 왜군 창검수들은 쏟아져 나올 조선 무사들과의 일전을 위해 모두 선수 쪽으로 나와 있었다.
그런데 쏟아져 나오 것이라 생각했던 조선군은 꼭꼭 숨어서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고, 돌격대장이 타고 있는 층루선 함교를 향해 용아가리를 가까이 들이밀고 있었다.
‘저건 대체 어쩌자는 수작인가?’
‘저기서 군사들이 뛰쳐나와 활을 쏘거나 사닥다리를 놓고 층각쪽으로 돌격해 나오려는 것일까?’
왜군들은 이렇게 생각하고들 있었다.
왜군 돌격대장은 자신을 향해 접근해 오는 거북선을 보며 코웃음을 쳤다. 그리고는 칼을 뽑아 들고 이렇게 소리쳤다.
“오냐, 오너라! 단칼에 베어 주마!”
그런데 또 한 번 뜻밖의 상황이 벌어졌다. 나오라는 조선군은 나오지 않고 별안간 용 아가리에서 시커먼 것이 불쑥 튀어나왔다.
“대포다!”
“피해라!”
전혀 예측하지 못한 상황이 벌어지자 왜군들은 기겁을 했다. 저렇게 가까운 거리에서 대포를 맞는다면 살아날 수 없다는 것은 불을 보듯 뻔했다.
순간적으로 ‘무언가 속았다’ 는 예감이 왜군들의 뇌리를 훑고 지나갔다.
왜군 돌격대장은 심장이 멎어버릴 것처럼 온몸이 굳어버렸지만 조건반사적으로 몸을 방패 밑으로 내던졌다. 그 순간 “꽝!!” 하는 폭음과 함께 철탄이 방패를 맞췄고 방패는 다시 왜장의 몸을 사정없이 후려쳤다. 돌격대장은 실신한 채 바다로 굴러 떨어졌다.
거북선의 포격을 시발로 전투가 시작되었다.
포구 앞을 학익진으로 막아선 판옥선단에서도 철환 · 장편전 · 화전 등 온갖 발화 · 살탄형 무기들을 왜선단에 집중시켰다.
이순신은 그 상황을 ‘폭풍우 같이 쏘아대며’, ‘천지를 뒤흔들었고’, ‘고막이 상해서’ 라고 기록하고 있다.
왜군 진영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그때 언덕 위아래에 진을 친 왜군들은 조총사격으로 즉각 응수했다. 그러나 선상 위의 왜군들로서는 반격보다는 당장 몸을 피하는 것이 더 급했다.
그래서 방패와 기둥 뒤로 몸을 숨겼고, 어떤 자들은 그나마 안전한 배 뒤편과 선실로 몰려들었다.
각 병선의 대장들도 장대비처럼 쏟아지는 포탄과 살탄에 눈이 휘둥드레졌다. 그러나 돌격대장 하나가 직격탄을 맞고 나가떨어지는 장면을 목격한 이들에게는 조선 함대의 함포사격보다는 눈앞에 있는 거북선들이 더 위협적이었다.
‘일단 저 괴물의 선수 쪽은 피하고 볼 일이다…’
하지만 어느 새 또 다른 거북선이 부딪혀 들어왔고, 그 충격으로 왜군 돌격대장이 탄 배의 선복에는 커다란 구멍이 생겼다. 그 깨진 선채로 바닷물이 거세게 유입되기 시작했다.
“적선을 막아라! 공격해라!”
더 이상 당하고만 있지는 않겠다는 듯 일단의 무사들이 2층 층루에서 긴 사다리를 걸고 거북선 등 위로 우르르 뛰어내렸다. 배 안으로 들어가 요절을 낼 생각이었지만 그러나 이것이 엄청난 실수임을 깨닫게 되기까지는 단 몇 초도 걸리지 않았다. 뛰어내리기가 무섭게 거적 속에 감추어져 있던 20cm 길이의 쇠못들이 다리며 엉덩이며 가숨이며 목이며 할 것 없이 그대로 쑤셔 박혔고, 쇠못이 관총한 부위에서는 시뻘건 선혈이 솟구쳤다.
거북선은 이들의 시체를 등에 메단 채 적진을 종횡무진 휘저었다. 아직 숨이 붙어 있던 왜군들은 비명을 지르며 울부짖었다. 이 광경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던 왜군들은 발을 구르며 절규했다.
특히 그 모습을 비교적 가까이에서 지켜볼 수 있었던 선상의 왜군들은 겁에 질려서 더 이상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었다. 싸워볼 엄두를 내지 못했음은 물론 발끝 하나 손끝 하나 제대로 움직일 수조차 없었는데, 이들의 눈에 비친 전장의 모습들은 하나같이 끔찍한 생지옥을 연상시키고 있었기 때문이다.
많은 수의 왜군들이 공포를 이기지 못하고 여기저기서 오열하기 시작했다.
왜군들로서는 거북선을 당해낼 방법이 없었다. 이건 배가 아니라 괴물이었고, 그 괴물은 자신들 모두를 절단 내기 전에는 결코 공격을 단념할 것 같지 않았다.
괴물들은 조총이나 돌격전 따위에는 꿈쩍도 안 했고, 전후좌우에서 쉴 새 없이 불을 뿜어대고 있었기 때문에 접근조차 할 수가 없었다. 전설 속에서나 들어본 사방으로 불과 안개를 토하는 영락없는 용의 모습 같았다.
거북선단은 치고 부수고 퍼붓는 일련의 공격과정들을 동시에 수행하면서 왜군 진영을 삽시간에 아비규환의 나락으로 몰아넣었다. 거기에 판옥선단의 협격으로 왜선들은 불타기 시작했고, 화염은 바닷바람을 타고 하늘 높이 치솟았다.
왜군들은 바다로 뛰어들었다. 그리고는 죽을 힘을 다해 헤엄쳐서 육지로 기어올랐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난 것은 아니었다. 조선 함대는 도망치는 왜군들을 향해 산탄과 살탄형 포탄, 피령전, 장편전 등을 발사했다. 다행히 산탄과 화살이 사람을 피해준 경우에는 살아서 언덕까지 올라갈 수 있었지만 많은 수의 왜군들은 물 위에서, 그리고 땅 위에서 고슴도치가 되었다.
왜장의 얼굴은 하얗게 질려 있었다. 그저 모든 것이 꿈만 같았고 옥포에서 참패한 도도 함대 역시 ‘이렇게 당했구나’ 생각하니 소름이 끼쳤다.
전 병력을 승선시키지 않은 것은 그나마 다행이었다. 왜장은 분노와 수치감으로 몸을 떨었다. 그러면서도 ‘혹 놈들이 상륙해 오지나 않을까?’ 하는 두려움에 긴장을 늦추지 않았다.
그런데 바로 그때였다. 조선 함대의 기함이 포구 바로 앞에까지 들어와 있는 것이 왜장의 시야에 들어왔다. 조총으로 충분히 쏘아 맞출 수 있는 거리라는 판단이 서자 왜장은 미친 듯이 외쳤다.
“적의 대장선이다! 적장을 쏴라! 쏴라! 쏴라…!”
사천포 해전에서도 사망자는 없었고, 부상자만 세 명 발생했다. 그 중 한 명은 전라좌수사 이순신 자신이었고, 또 한 명은 그의 군관 나대용, 그리고 봉사 벼슬을 했던 종군 장수 이설이었다. 세 사람 모두 기함에 승선해 있던 지휘관들이었다.
이렇게 기함에서만 부상자가 발생했던 것은 이순신의 기함이 조총의 유효사거리 안에 들어가 있었기 때문이다.
해전에서 통상적으로 기함이 이렇게 앞에 나서는 경우는 드문 일이며 금기였다. 이런 원칙을 무시하고 기함이 선두에 섰던 것은 처음 출전한 거북선을 좀더 가까이서 지휘하고자 했기 때문일 것이다.
울돌목 해전(명량대첩) 때도 이순신의 기함은 조총의 사정거리 안에 들어갔다. 그러나 그때는 조선 수군이 극도의 열세에 몰려 있었으므로 기함이 선봉에 나서지 않을 수 없었다. 또한 겁을 먹고 있던 병사들에게 ‘죽으려는 자는 살고, 살려는 자는 죽는다’ 의 시범을 몸소 보이기 위해서이기도 했다.
노량해전에서도 충무공의 기함은 조총의 사정권 안에 들어갔다. 그때는 명나라 진린 도독이 왜군들에게 포위되었으므로 이순신은 진린을 구하려고 돌진해 들어갔고, 그때 피탄된다.
그러나 사천포 해전 때는 거북선이 참전했던 절대 우세의 상황이었고, 기함이 선봉에 나설 이유가 없었다. 이순신은 그때 피탄되어 어깨뼈를 심하게 다쳤으며, 두 치 깊이의 수술을 받아야 했다.
그로부터 1년 뒤 류성룡에게 보낸 편지에서 자신의 부상에 대해 다름과 같이 적었다.
살피지 못한 동안 기운 어떠하시옵니까. 전일 두 번이나 주신 글을 받자옵고 나아가 뵈옵고 겸하여 적을 토멸하는 방략도 품하려 하였으나, 접전할 때에 스스로 조심하지 못하여 적의 탄환에 맞아 비록 사경에 이르지는 않았사오나 어깨뼈를 깊이 상한데다가 또 언제나 갑옷을 입고 있으매 상한 구멍이 헐어서 궂은 물이 늘 흐르기로 밤낮 없이 뽕나무 잿물과 또는 바닷물로써 씻건마는 아직 쾌차하지 못하와 민망스럽습니다.
군사들을 거느리고 발정하실 날이 언제인지요. 국사가 급급하게 되었는데 병이 이와 같아 북쪽을 바라보며 깊이 통탄할 따름입니다.
그런데 이 지방 민심이 한번 징병한다는 소문을 들으면 모두 달아날 꾀만 생각하고, 또 바닷가 사람들은 물길을 따라 서쪽으로 가기만 하면 다시 돌아오기가 어려울 것이요, 거기 따라 이 지방을 지킬 이 없어 적의 소굴이 될 뿐 아니라 부모 처자들을 다시 보지 못할 것이라 하여 인심의 흩어짐이 극도에 이르렀으니 이것을 무엇으로 수습하오리까.
‘스스로 조심하지 못해서…’ 하는 편지의 글귀로 보아 이순신 자신도 당시를 몹시 후회하고 있었던 것 같다.
1년 후라면 한산도, 부산포, 그리고 이듬해 웅천포 공방전을 치를 때다. 그렇다면 그때까지 이렇게 부상을 입은 상태에서 전란을 수습해 갔던 것이기에 오늘의 우리들을 더욱 숙연하게 한다.
그렇다면 이순신의 기함이 왜 조총의 유효 사정거리 안에 들어갔을까? 앞에서 본 장계에서 ‘그 가운데는 혹 우리나라 사람도 섞여서 쏘므로 신은 더욱 분하여 배를 급히 저어 앞으로 나아가…’ 라는 대목이 있는데 그것이 이유였던 것 같다.
사천포의 왜군들은 처음에는 매우 교만한 자세를 보였다. 그러나 무장이나 병력, 그리고 전술 면에서 보면 옥포의 왜군들과 별반 다를 것이 없었다. 조선 함대의 집중 포화에 무방비로 얻어맞았던 점이나, 해전 초에 배를 버리고 달아난 점도 같았다. 그래서 사천포에서의 해전도 쉽게 끝낼 수 있었다.
특히 거북선의 출전으로 해전의 내용은 보다 새로워졌고 공격력은 더욱 강해졌다. 거북선이 투입되면서 이순신 특유의 해전법인 속공 돌격전은 더한층 빛을 발했다.
옥포에서처럼 사천포의 왜군들에게도 조총과 일본도는 쓸모가 없었다. 배에 있던 왜군들 중 육지로 기어오를 때까지 죽지 않았다면 대체로 부상이었다. 그래서 언덕 위 멀리까지 도망쳐서 불타는 배를 보며 울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 충무공의 장계 (당포파왜병장) ※
왜인들은 멀리서 발을 구르며 무슨 소리를 부르짖거나 대성통곡을 하는데, 신은 여러 병선에서 날랜 군사를 뽑아 쫓아가서 목을 벨까도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숲이 울창하고 또 해도 저물었으므로 도리어 피해가 있을까 두려워 적을 수색하거나 목베기를 하지 못하도록 하고, 짐짓 작은 배 몇 척을 남겨 두어 적을 끌어내다가 잡아 없앨 계획을 하고 밤을 타서 함대를 돌려 사천 땅 모자랑포(경남 읍남면 주문리)로 나와서 진을 치고 밤을 지냈습니다.
왜군들은 발을 구르고 땅을 치며 대성통곡했다. 순신간에 당한 허무한 패전이라 분해서 울었고, 땅에 떨어진 무사도에 낙망해서 울었다.
사랑하는 전우와(같은 지역 출신이라 가족관계인 경우도 있었다) 상관들의 죽음도 살아남은 자들에게는 크나큰 슬픔이자 고통이었다.
왜군들의 통곡 소리는 부서진 애함의 파편과 함께 바다 위를 떠다녔다. 이로써 사천포를 거점화 하려던 히데요시의 계획도 물거품이 되었다.
이 무렵은 진주는 물론 함안군의 일부가 아직 조선 육군의 손안에 있을 때였다. 그래서 사천포의 왜군 패잔병들은 부상당한 몸을 이끌고 본대로 귀환할 때까지 온갖 고생을 겪어야 했다.
이순신은 왜군의 작은 배 몇 척은 불사르지 않고 남겨 두었다. 육지에 올라가 적을 뒤쫓는다면 조총과 일본의 공격에 농어민 출신의 군사들이 크게 당할 우려가 있었다. 또 해가 떨어진 시각에 적을 쫓는다는 것은 무의미했을 뿐만 아니라 위험천만한 일이기도 했다.
조선 함대 사령부에서는 왜군들이 육로를 통해 되돌아간다는 것은 매우 어렵다고 보았다. 그래서 바다로 도망갈 생각을 하도록 미끼 배 몇 억을 남겨 두었다. 모자랑포에서 밤을 지낸다면 일단은 이동거리가 짧아서 좋았고, 바다를 지키고 있다가 도망가는 적들을 사로잡거나 모두 섬멸해 버릴 수도 있었다.
모자랑 바다 입구의 폭은 불과 2km 정도다. 그날 밤 조선 함대의 탐색선들이 바다 어귀 양쪽을 밤새워 지키고 있었는데, 이는 도망가는 적도 사로잡아야 했고 적의 기습에도 대비하기 위해서였다.
※ 충무공의 장계 (당포파왜병장) ※
6월 1일 새벽, 경상우수사 원균이 신에게 이르기를 “어제 접전 때 남겨둔 작은 전선 2척이 도망갔는지 여부를 알아볼 겸 화살에 맞아 죽은 왜병의 수급을 베어 오겠다” 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원균은 패군한 후 군사 없는 장수로서 지휘할 것이 아무것도 없기 때문에 접전하는 곳마다 화살이나 탄환에 죽은 왜인들을 찾아내어 수급 베는 일을 맡아 왔습니다.
그날 8시경 그곳을 다녀와서 하는 말이 “왜적들은 육지로 해서 멀리 도망을 갔고, 그래서 남겨둔 배만 불태웠는데 죽은 왜병을 찾아내어 목을 벤 것이 셋이요, 나머지는 숲이 울창해서 찾지 못했다” 고 했습니다.
당시 원균과 그 휘하 장병들이 해전장에서 주로 무엇을 했는지를 달게 해주는 기록이다.
혹자는 “이순신이 원균에게 군사를 빌려주고 함께 싸울 수도 있었지 않느냐?” 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제도상 이순신이 임의로 그러한 결정을 내릴 수는 없었다.
수사에게 작전권은 있었지만 관내 소속의 각 단위 함대들을 타도의 수사에게 지휘할 수 있게 할 권한은 없었기 때문이다. 아울러 병선 역시 빌려줄 수 없었는데, 그 이유는 병선의 소유권이 후방의 고을에 있었기 때문이다. 이는 현대전에서도 어떤 사단장이 휘하의 병력을 잃었다고 해서 다른 사단장이 자신의 병력을 빌려줄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의 이치다.
그러나 훗날 선조는 원균의 편을 드는 조정 대신들의 귓속말에 ‘원균은 늘 《삼국지》 의 장비와 같은 용맹으로 적을 뒤쫓아 수급을 많이 베었다’ 고 인식하게 되었다. 그것이 원균을 과대평가하게 되는 계기가 되어 그를 삼도 수군통제사로 임명하게 됐고 결과적으로 칠천량의 참패를 불러오고 만다.
※ 충무공의 장계 (당포파왜병장) ※
함대는 정오 때쯤 발진해서 고성 땅 사량도 앞바다까지 와서 머물며 군사를 쉬게 하고 위로하고, 진을 치고 밤을 지냈습니다.
6월 1일. 원균이 미끼로 남겨 둔 소형 왜선의 형편을 보고 왔을 무렵인 정오 경. 함대는 모자랑포를 출발, 외딴섬인 사량도에서 그날 밤을 보냈다. 함대가 사량도까지 올 때는 대낮이었기 때문에 왜군 탐색선에 발각될 소지도 있었다. 그러나 현자포 등 경량급 대포로 무장한 탐색선들이 사방팔방 넓은 경계망을 펴고 있었으므로 그럴 가능성은 적었다.
조선 함대는 사량도까지 이동해 왔고, 사량도의 아래쪽 섬과 위쪽 섬 사이에 있는 포구에 정박했다. 이곳은 큰 선단이 숨어서 쉬기에 적합한 지형을 갖추고 있었다.
사량도에는 만호 이여념의 지휘 하에 있는 수군기지가 있었다. 그렇지만 이여념이 그동안 원균을 따라 나서고 없었기 때문에 사량도 백성들은 한동안 조선 수군의 그림자도 구경해 보지 못했다.
그래서 왜군들이 쳐들어오지 않을까 노심초사했고, 백성들 스스로 자율적인 탐망 조직을 만들어 상황을 살펴가면서 틈틈이 고기를 잡고 농사일을 하면서 위기에 대처해 왔다.
그러던 중 조선 함대라고 믿기에는 너무도 황홀할 만큼 당당한 모습으로 나타난 함대를 보고는 모두들 감격했다.
‘하늘이 우리를 버리지 않으셨구나…!’
임금도 피난을 떠났고 그나마 사량도에 주둔해 있던 수군들도 모두 원균 함대에 합류하면서 ‘조선 땅 어디에도 자신들을 돌봐줄 군대는 없다’ 고 생각해 온 터였다. 그래서 자구책으로 낮에는 교대로 망을 보면서 왜적의 침입에 대비했고, 밤에는 산 속에 숨어서 밤을 보냈다.
언제 죽을지 모르는 불안감으로 하루하루를 보내왔는데 자신들의 눈앞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다 죽고 없는 줄로만 알았던 당당한 모습의 조선 군대였다. 더구나 이 군대가 사천포에서 왜군들을 여지없이 쳐부쉈다는 소식을 듣고는 더욱 감격했다.
만호를 따라 떠났던 젊은이들도 무사히 돌아왔고, 그들의 생사를 걱정해 왔던 가족들은 서로 얼싸안고 꿈같은 재회를 나눴다.
그런데 병사들의 낯빛은 그리 밝지가 않았다. 이유를 들어보니 “사량도를 관장하는 사령관은 원균이지만, 정작 해전에서는 이순신이라는 전라도 장수가 호령을 했는데, 그 장수가 그 전날의 전투에서 부상을 입었다” 는 것이었다. 그래서 이곳에 잠시 머물면서 상처를 치료하고 그 경과를 지켜보아야 한다는 설명이었다.
‘큰 부상이 아니며 상처는 곧 나을 수 있다’ 는 소식이 전해지기까지 한동안 섬 전체는 깊은 충격 속에 휩싸였다. 특히 이순신을 하늘처럼 믿고 따랐던 군사들에게 있어서 이순신의 부상은 함대의 운명과도 직결되는 엄청난 사건이기도 했다.
기함을 제대로 호위하지 못했다는 죄책감과 함께 사령관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생각이 병사들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걱정스럽기는 백성들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사량도 백성들에게 더 이상의 좌절은 무의미했다. 그들에게는 조선 함대가 마지막 희망이었고, 이 생명줄과도 같은 희망의 끈을 놓지 않으려고 모두가 팔을 걷어붙이고 나섰다.
백성들은 우선 사령관의 부상으로 의기소침해진 병사들을 배불리 먹이고 푹 쉬게 해줄 요량으로 나무를 해다 나르기도 하고, 물도 길어 왔다. 또 술이 있는 집에서는 술독을 지고 나왔다.
“모든 사람들이 말하기를 ‘이순신 수사야말로 하늘이 낸 장재이다’ 고 하니 별 일이야 있겠소만은… 이럴 때일수록 그대들이 더욱 힘이 내어 장군을 보필해야 하지 않겠소…”
“하늘이 무심치 않을 것이니 너무 걱정들 마시오…”
사량도 백성들은 저녁 준비를 위해 부지런히 손을 놀리는 중에서도 병사들을 달래고 위로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군사들이 눈물의 저녁을 먹고 있던 중에 이순신이 진중을 순시했다. 그리고는 침체된 분위기를 쇄신하려는 듯 이렇게 외쳤다.
“우리는 지금 전장에 나와 있느니라! 이미 죽고 사는 것을 하늘에 맡긴 터이거늘 누가 감히 소침해 있다는 말이냐! 상감께서 피난을 떠나 계시매 모두가 죽기로 싸워 나라의 욕됨을 되갚아도 모자랄 것이거늘…. 그러고도 너희들이 전하의 충성스런 군사라 할 수 있겠느냐!”
뜻하지 않은 부상으로 인해 다소 무거워 보이는 모습이기는 했지만 전장을 압도하던 눈빛과 그 기상만큼은 여전했다. 이순신의 건재가 재차 확인되는 순간이었다. 이에 진중은 다시금 활기를 되찾았다.
이순신은 일일이 병영을 돌며 병사들을 위로했다. 자신의 부상이 군의 사기에 미칠 영향을 고려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거북선이 처음 참전한 해전에서의 승리를 자축하고자 하는 마음도 컸다.
그리고 늦은 밤, 이순신은 불편한 몸을 이끌고 작전회의를 주재했다.
이날 작전회의는 사령관의 부상에도 불구하고 매우 고무된 분위기였다. 거북선을 통한 필승의 전술을 확인했고, 그로 인한 자신감이 전 장졸들의 사기를 크게 진작시켰기 때문이다.
특히 거북선 돌격장들이 보고한 해전 당시의 상황들은 거북선이 다기능의 전술 · 전략 무기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할 수 있겠다는 확신을 갖게 했으며, 향후 해전에 대한 대비와 보완책 수립에도 많은 근거가 되었다.
작전회의 내내 어깨에 총상을 입었다고는 믿기 어려울 만큼 이순신의 표정은 밝았다.
무엇보다 우박 쏟아지듯 한 조총의 탄막을 헤집고 적진 속에서 접전을 펼친 거북선단에 단 한 명의 부상자도 나오지 않았다는 사실은 그의 가슴을 더욱 뜨겁게 만들었고, 그 누구도 생각하지 못한 더 큰 기획과 도전을 준비하게 했다.
아무튼 그날 조선 함대가 사량도에서 하루를 쉬게 되었던 것은 아직 별다른 적정을 찾아내지 못했고, 이순신의 상처도 좀더 살펴가면서 6월 3일까지 오기로 한 이억기 함대를 기다리고자 하는 의미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