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임진왜란

해전기록 - 2장 - 첫 승전보를 올리다.

구름위 2013. 5. 1. 11:13

※ 《난중일기》 1592년 5월 3일 ※
녹도만호가 보자고 하기에 불러들여 물었더니 “우수사는 오지 않고 왜적은 점점 서울 가까이 다가가니 통분한 마음 이길 길 없거니와 만약 기회를 늦추다가는 후회해도 소용없다” 는 것이었다. 이 때문에 곧 중위장을 불러 내일 새벽에 떠날 것을 약속하고 장계를 고쳤다. 이날 여도 수군 황옥천이 왜적의 소리를 듣고 달아났다. 집에서 잡아 와서 목을 베어 군중 앞에 높이 매달았다.

 

이순신과 관내 기지 장수들은 4월 30일까지 여수에 도착하기로 되어 있던 이억기 함대와의 합류를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달이 바뀌어 5월 2일이 되도록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 더 이상 출동을 늦출 수는 없었다. 더 큰 화를 부를 수 있기 때문이다.

 

이순신은 휘하 장수들과 의논한 끝에 결국 전라좌수영 함대만의 단독 출동을 결정했다. 출동을 결심한 이순신의 심정은 아주 복잡했다. 아직 적에 대해 입수된 정보가 별로 없었다는 점이 우선 마음에 걸렸다. 또 적이 어디까지 진출해 있는지, 그 규모와 전력은 어느 정도인지, 어떤 임무를 띠고 있는지… 모든 게 확실하지가 않았다.

 

경상 좌 · 우수영 함대의 행방도 묘연했고 기대했던 전라우수영 함대와의 연합도 물 건너간 상태였다. 본영인 여수를 비운 사이 있을 수 있는 적의 기습도 커다란 고민거리 중 하나였다.

 

적이 여수를 손에 넣기라도 하는 날엔 전화가 전라도와 충청도에까지 미치게 될 것은 불을 보듯 뻔했다. 또 적이 전라도를 병탄하고 서해를 돌아 한성 이서에 상륙한 후 전후좌우에서 도성을 압박한다면 그것으로 모든 것은 끝이었다.

 

● 전라좌수군, 개전 첫 승전보를 울리다

 

5월 4일 이른 새벽. 출동을 위해 각 기지에서 모여든 전라좌수영 소속의 병선들이 여수항을 가득 메웠다.

 

판옥선 24척, 협선(중선) 15척, 포작선(소선) 46척, 총 85척으로 구성된 함대의 위용은 늠름하고 당당했다.

 

각 병선의 선상에는 커다란 방패가 빽빽이 둘러쳐졌고, 그 뒤로 사령관의 승선을 기다리는 수병들이 장승처럼 도열해 있었다. 이른 새벽(1시경)이었지만 포구에는 많은 인파가 운집해 있었다. 이들 중 눈물을 흘리지 않는 이는 없었다. 그것은 절망과 감동, 슬픔과 환희 등 인간이 느낄 수 있는 온갖 감정이 뒤섞여진 눈물이었다. 또한 재회를 기약할 수 없는 전장으로 자식과 지아비, 아비와 오라비를 떠나보내는 이들의 절규이자 응원의 환호이기도 했다. 누가 과연 그들의 생사를 장담할 수 있었을까?

 

※ 왜란은 개전 초에 막을 수 있었다는 이순신의 증언 (1592년 5월 3일, 첫 출동 때의 충무공의 장계) ※
지난날 부산과 동래 연해안 여러 장수들로 전함을 잘 정비하여 바다에 가득 진을 치고 습격할 위세를 보이며 정세를 보아서 알맞게 병법대로 진퇴하여 육로로 기어오르지 못하게 했더라면, 나라를 욕되게 한 환란이 이렇게까지는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병법에 따라 잘 대응했더라면 왜란은 부산에서 막을 수 있었다고 밝혀둔 부분이다.

 

《난중일기》《충무공의 장계》 를 비교 · 조명해 가노라면 왜란은 문경새재, 충주성, 한강, 임진강, 대동강, 평양성에서도 막아낼 수 있었음을 유추해 낼 수 있다. 그랬다면 임진왜란은 살수 · 귀주 대첩과 같이 민족사에 길이 남는 승전사로 기억되었을 것이며, 조선 인구(약 600만)가 반으로 감소되는 일은(징비록의 기록) 없었을 것이다.

 

※ 1592년 5월 3일, 첫 출동 때의 충무공의 장계 ※
생각이 여기에 미치매 감개가 더욱 간절하와 원컨대 한 번 죽음으로 기약하고, 곧 범의 굴을 바로 두들겨 요망한 기운을 쓸어버리고, 나라의 부끄러움을 만 분의 하나라도 씻으려 하옵니다. 왜군들의 뒤를 사생결단으로 끊고자 경상도 쪽으로 출동하오니 성공하고 실패하고 잘되고 못되는 것이야 신이 미리 헤아릴 바가 아닐까 하옵니다.

 

새벽 2시경, 마침내 출항의 북이 울렸다. 북소리와 함께 우렁찬 군악이 울렸고, 기지 함대들은 일제히 황포돛을 올리고 선봉 · 중군 · 후군의 순서에 따라 칠흑 같은 어둠을 뚫고 차례로 여수항을 빠져 나왔다.

 

첫 출동에는 총병력 1만5천 명 중 5천 명이 선발되었다. 기타 병력은 여수 본영과 각 기지의 수비를 위해 잔류해 있었으며, 우후(부관 역) 이몽구가 후방 방비의 총책인 유진장을 맡았다.

 

전라좌수영이 단독으로 1만 5천의 병력을 동원할 수 있었던 것은 이순신이 평소 빈틈없는 군영을 해온 결과였다. 관내 기지들에 대한 점고와 훈련, 도망병 단속 등등 철두철미한 후방이 있었기 때문에 조정에서조차 못해낸 병력을 준비해 둘 수 있었던 것이다.

 

왜란을 대비하여 특별히 만든 거북선은 첫 출동 때에는 참전하지 않았다. 전란이 터지기 바로 며칠 전에야 진수식을 마쳤기 대문에 실전 배치를 위해서는 더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거북선을 활용한 다양한 전술을 익혀야 했고, 특별한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탑재시켜야 할 무기의 종류도 많았다. 이 모든 것이 아직 완벽하게 준비되지 않은 상태였다.

 

이순신도 거북선이 참전할 수 없었던 점을 매우 아쉽게 생각하고 있었다.

 

※ 《난중일기》 1592년 5월 4일 ※
맑다. 먼동이 틀 때에 출항했다. 곧바로 미조항(남수군 미조면 미조리) 앞바다에 이르러 다시 약속했다. 우척후 · 중부장 · 후부장 등은 오른편에서 개이도로 들어가서 (적을) 찾아 치게 하고, 나머지 대장선들은 아울러 평산포 · 곡포 · 상주포 · 미조항을 지나갔다.

 

여수항을 빠져나온 함대는 남해도의 미조항을 돌아 소비포 쪽으로 향했다. 단순한 동진이 아니었다.

 

함대는 육지 쪽 조선군의 형편과 어디엔가 매복해 있을지도 모를 왜군의 동향을 살피면서 빈틈없는 수색전을 병행했다. 만약 왜군 기동함대가 숨어 있는 것을 모르고 부산 쪽으로 나갔다가는 여수 등 후방기지들이 기습을 받게 될 수 있음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함대는 귀항할 곳도 없이 해상에 고립되는 신세가 될 수 있으므로 이순신으로서는 신중을 기해야 했다.

 

※ 충무공의 장계 (옥포파왜병장) ※
삼가 적을 무찌른 일로 아뢰나이다. 전일 경상우수사와 합력하여 적선을 쳐부수라는 분부를 받잡고 지난 5월 4일 축시(새벽 2시)에 출발하여 우도 우수사 이억기에게 수군을 거느리고 신의 뒤를 따라오라는 일로 공문을 보낸 사연을 장계하였고, 같은 날 같은 시각에 수군 여러 장수들이 판옥선 24척, 협선 15척, 포작선 46척을 거느리고 떠나 경상우도 소비포 앞바다에 이르니 날이 저물기로 진을 치고 밤을 지냈습니다.

 

5일 날 밝을 무렵에 출발하여 전일 두 도 수군들이 서로 모이기로 약속한 당포 앞바다에 이르니 경상우수사 원균이 약속한 곳에 없으므로 신이 거느린 경쾌선을 보내어 당포로 빨리 오라고 공문을 보냈습니다. 6일 아침 진시(8시)에 원균이 자기 경내인 한산도에서 다만 전선 1척을 타고 왔사온데, 적선의 수효와 정박해 있는 곳과 또 접선하던 절차를 자세히 물었습니다.

 

그 도의 여러 장수 남해현령 기효근, 미조항첨사 김승룡, 평산포권관 김축 등이 판옥선 1척에 같이 타고 왔사온데 사량만호 이여념, 소비포권관 이영남은 각각 협선을 타고 영등포만호 우치적, 지세포만호 한백록, 옥포만호 이운용 등은 판옥선 2척에 갈아타고서 5일 6일에 잇달아 도착하므로, 두 도의 여러 장수들을 한 곳에 모으고 두 번 세번 약속을 거듭한 뒤 거제도 송미포(노산 이은상은 거제도 동부면 가을곶리로 보았음) 앞바다에 이르니 날이 저물기로 밤을 지냈습니다. 그리고 7일 새벽에 일찍 출발하여 적선들이 머물고 있는 가덕도의 천성과 가덕을 향하여 가다가 정오쯤에 옥포 앞바다에 이르니…

 

5월 6일, 함대는 사전 연락을 통해 합류하기로 되어 있던 당포에서 원균을 만났다. 원균은 판옥선 1척만을 이끌고 나타났다.

 

원균의 경상우수영이 있는 가배량은 거제도 남쪽 끝에 위치해 있었기 때문에 부산 일대의 왜군 함대와는 아직 교전하지 않은 상태였다. 그렇다면 평소에도 판옥선 5, 협선 10, 포작선 20여 척은 보유하고 있어야 했지만 거느리고 온 병선은 웬일인지 판옥선 1척이 고작이었다.

 

잠시 후 남해도의 고을 수령과 미조항 등의 경상우수영 관내 기지대장들이 1척의 판옥선을 타고 나타났다. 이들 기지들도 각기 판옥선 1~2척과 그밖에 일정 수의 협선과 포작선을 보유하고 있어야 했지만 역시 판옥선 1척뿐이었다. 아무튼 원균 함대는 판옥선 4척과 협선 2척이 전부였다. 병선은 그렇다치고 병력과 노꾼, 화약무기, 군량미는 제대로 갖추었을까?

 

이순신은 이렇게 된 이유를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

 

4월 29일, 탐색대를 남해도 일대에 보냈을 때 “모든 고을이 텅 비어 있다.” 는 보고를 받은 바 있었다. 그것이 이유였다.

 

평소에도 전쟁에 대한 준비가 부실했던 이들 기지들은 왜란의 소식을 듣자 당황해서 우왕좌왕했고, 이에 동요된 백성과 관리들은 일찌감치 피난을 떠나버리자 대장들만이 일부의 병졸들을 모아 1척의 판옥선을 타고 나타나게 되었던 것이다.

 

경상우수영 함대는 전라좌수영보다 넓은 해역을 관할하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함대의 규모도 두 배는 됐어야 했다. 그러나 평소 병선 건조와 동원훈련 등을 소홀히 했고, 게다가 원균 수사는 개전 2개월 전에야 부임한 탓으로 이렇게 초라한 모습의 함대로 전락하고 말았다.

 

이같은 전력으로는 20~30척 규모의 왜군 기동함대들을 상대할 수가 없다. 그 때문에 원균은 그동안 숨어 지내면서 구원군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행여 왜군들의 눈에 뜨일 새라 보름이 넘는 기간을 숨바꼭질하듯 숨어 지냈던 원균은 그렇게 이순신과 만났다.

 

‘한 곳에 모으고 두 번 세 번 약속을 했다’ 고 한 것은 부임 2개월 만에 전란을 맞은 원균 쪽이 화약무기 등에 대한 준비(훈련)가 없었기 때문에 여기에 대한 대응책 논의가 있었던 것 같다.

 

5월 6일, 두 함대는 당포항을 출발해서 거제도 남단에 위치한 송미포에 닻을 내리고 밤을 지냈다.

 

이튿날인 5월 7일, 조선 함대는 아침 일찍 가덕도를 향해 돛을 올렸다. 그리고 옥포로 이동하던 중인 정오 무렵, 탐색대로부터 “옥포만에서 왜선단을 발견했다!” 는 급보가 신기전 발사 신호로 알려져 왔다.

 

이 소식은 곧 사령선인 기함 기라졸(수기병)들의 수기 신호를 통해 전 함대에 알려졌다.

 

※ 충무공의 장계 (옥포파왜병장) ※
거제도 송미포 앞바다에 이르니 날이 저물기로 밤에 지냈습니다. 그리고 7일 새벽에 일제히 출발하여 적선들이 머물고 있는 천성 가덕을 향하여 가다가 정오쯤에 옥포 앞바다에 이르니 척후장 사도첨사 김완, 여도권관 김인영 등이 신기전을 쏘아 사변을 알리므로 적선이 있는 줄을 알고 다시금 여러 장수들에게 신칙하되 ‘망령되이 움직이지들 말고 산과 같이 정중하라’ 고 전령한 뒤…

 

첫 출전으로 인한 두려움과 긴장감 때문인지 병사들의 몸은 평소 훈련 때와는 달리 굳어 있었고, 이순신은 이것을 감지했다.

 

이에 곧 ‘망령되이 움직이지 말고 산같이 정중하라!’ 는 깃발이 기함에 내걸렸다. 이는 각 기지대장들에게 ‘병사들을 독려해서 전투태세를 엄히 갖추게 하라!’ 는 명령이었다.

 

조선 함대는 양지암을 돌아 곧장 옥포만으로 진입해 들어갔다. 옥포만은 왜군들의 약탈과 방화로 시커먼 연기가 하늘 높이 솟구쳐 그 일대를 뒤덮고 있었다. 그리고 수십 척의 왜선들이 옥포 선창에 정박해 있는 것이 보였다. 전투선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만큼 왜군 측 병선들은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었다. 선체에 둘러쳐진 오색의 대형 휘장과 크고 작은 깃발들이 바람에 휘날렸다.

 

“함대, 전투 속력으로…!”

 

이순신의 명령이 떨어지자 조선 함대의 선봉 · 중군 · 후군은 위용을 갖추고 힘차게 군악을 울리며 왜선단을 압박해 들어갔다. 분탕질에 여념이 없었던 왜군들은 예상치 못한 상황에 눈과 귀를 의심하며 잠시 동안 꼼짝도 하지 못했다.

 

‘조선 함대는 모두 도망가고 없다’ 는 생각에 천하태평으로 분탕질에 나선 터였다. 그런데 난데없이 정체를 알 수 없는 괴선단이 나타나 처음 듣는 요란한 군악을 울리면서 자신들 쪽으로 다가오고 있는 것이었다. 군악 소리와 병선의 모양으로 봐서 그것은 분명 왜군 함대는 아니었다.

 

‘그렇다면…’

 

다급해진 왜군측은 급히 징을 치고 고동을 불면서 인근 마을에 나가 있는 왜군 부대들을 불러들였다. 하지만 약탈을 위해 멀리 나가 있던 왜군들은 10~20리 밖까지 떨어져 있었으므로 때맞춰 돌아오는 데에는 많은 시간이 걸렸다.

 

왜군 함대는 기동력과 전투력을 제대로 발휘할 수 없는 상태에 있었다. 따라서 조선 함대가 시리에 매우 유리한 입장이었다. 또한 만안에 밀집해 있는 왜군 함대 뒤편의 병선들은 앞쪽 병선들로 인해 시야가 가려져 있었던 데 반해 조선 함대는 일렬로 진을 형성하고 있었고, 전 함대가 사격에 나설 수 있었으므로 조선 함대는 진법과 지리에서도 유리한 입장이었다.

 

※ 충무공의 장계 (옥포파왜병장) ※
그 포구 앞바다로 열을 지어 들어간 즉, 왜선 30여 척이 옥포 선창에 정박해 있었습니다. 큰 배는 사면에 온갖 무늬를 그린 비단 휘장을 둘러치고, 그 휘장 기에는 긴 대를 꽂았으며, 붉고 흰 작은 깃발을 어지러이 매달았는데 깃발 모양은 여러 가지요, 모두 무늬 있는 비단으로 만들었으며, 바람결에 따라 펄럭이며 바라보기에 눈이 어지러울 지경이었습니다.

 

정보에 밝았던 이순신은 왜선들이 비단 휘장을 둘러치고 있다는 점을 알고 화약무기를 준비해 왔는데 막상 그 광경을 보자 내심 쾌재를 불렀다. 장계에서도 그 같은 심정을 느끼게 한다.

 

※ 충무공의 장계 (옥포파왜병장) ※
그런데 왜적의 무리들이 그 포구로 들어가 분탕질을 쳐서 연기가 온 산에 가득 찼는데, 우리 군함들을 돌아보고서는 엎치락 뒤치락 하며 어쩔 줄을 모르면서 제각기 분주히 배를 타고 아우성치며 노를 바삐 저어 바다 가운데로는 나오지 못하고 기슭을 타고서 배를 저어 가는데, 6척이 선봉에 서서 달아나는 것이었습니다.

 

왜군 측에서 보면 분탕질은 군수물자 조달을 위한 일종의 약탈행위다.

 

옥포에 주둔해 있던 왜군 함대의 주장은 도도 다카도라(1556~1630)라는 맹장이었고, 그가 거느린 병력은 약 3천 명 정도로 오늘날로 보면 연대급 규모였다.

 

왜군들은 분탕질을 하던 중이었기 때문에 보초를 세워 두었다. 그러나 조선의 군대는 수륙군 모두 도망가고 없는 줄로만 알았고, 대다수의 보초병들은 5월(양력 6월)의 따가운 햇살을 피해 소나무 그늘에 앉아 시원한 바닷바람을 맞으며 한가롭게 휴식을 즐기고 있었다.

 

그런데 정체를 알 수 없는 낯선 함대가 다가왔고, 시야에 펼쳐진 것은 크고 작은 병선을 합쳐 모두 100여 척은 되어 보이는 대 함대였다. 함대의 진형도 오와 열이 정연해서 전체의 모습은 마치 산과 같은 위용이었다.

 

기겁을 한 왜의 초병들은 급히 소리를 질렀고 소라고동을 불어 위급함을 알렸다. 이에 선상의 왜군들과 분탕질에 나섰던 왜군 단위부대들, 그리고 사령관 도도 다카도라 모두가 놀랐다.

 

기함 누각 위에 차양막을 치고 곤한 단잠에 빠져 있던 도도는 갑작스런 소리에 벌떡 일어나 장막을 젖혔다. 밖을 내려다보니 군사들이 이리 뛰고 저리 뛰며 소리를 질렀고, 바다 쪽을 바라보니 웬 낯선 함대가 접근해 오고 있었다. 눈 앞이 아찔해지는 순간이었다.

 

‘저것은 분명 조선 함대가 아닌가?’

 

도도는 투구와 칼을 집어 들고 부리나케 갑판으로 뛰어 내려갔다. 그리고는 소리쳤다.

 

“전원 전투준비!”

 

“대장들은 함교를 지켜라!”

 

왜군들은 부산에 닿은 이후 지금까지 조선의 수군이라고는 배 한 척, 사람 한 명 구경해 보지 못했고, 탐색선을 보내 경상도 해안의 여러 수군 기지들을 이 잡듯 뒤졌지만 배와 무기를 파하고 모두 달아난 후였다. 때문에 도도 역시 조선 수군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생각해 온 터였다.

 

꿈도 꾸지 못했던 적 함대의 출현에 도도는 크게 당황했다. 자신의 함대는 거의 무방비 상태였으며 적에게 완벽한 기습을 허용한 꼴이었기 때문이다.

 

“안 되겠다! 이곳을 빠져나갈 것이니 즉각 이동 가능한 병선들을 모아라!”

 

다급해진 도도가 부하들을 향해 소리쳤다. 창졸간에 당한 기습이었음인지 도도에게는 자존심 따위를 생각할 겨를조차 없었다. 자신의 방심을 탓해 본들 죽고 난 후에는 아무런 소용이 없는 일이었다.

 

약탈을 위해 뭍으로 나간 왜군들이 속속 돌아와 전투태세에 돌입하는 가운데 사령관 도도의 탈출을 돕기 위해 몇 척의 왜선들이 그가 탄 배를 오휘하며 기슭을 타고 급히 노를 젓기 시작했다. 왜군 측에서는 조선 함대가 외항 쪽을 가로막고 있었기 때문에 해안선을 따라 탈출하는 것이 가장 안전하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 충무공의 장계 (옥포파왜병장) ※
신이 거느린 여러 장수들이 일심으로 분발하여 모두 죽을힘을 다하니 또 배에 있던 관원과 군사들까지도 역시 그 뜻을 본받아 서로 격려하며 죽음으로써 기약하는 것이었습니다.

 

장계에서처럼 조선 함대 수병들이 이렇게 분발한 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었다.

 

첫째, 시리와 지리 모두에서 조선 함대는 유리한 입장이었고, 거기에다 도망치는 적을 보자 사기가 높아졌기 때문이다. 적은 해전이 시작되기도 전에 이미 꼬리를 내린 격이었으므로, 조선 함대 측에서는 일찌감치 승리를 예감할 수 있었다.

 

둘째, 적의 탈출을 허용한다는 것은 조선 함대 입장에서 보면 일단은 실패작이다. 적의 퇴로를 차단, 단 한 척이라도 남김없이 파괴함으로써 왜군 측의 피해를 최대화하는 것이 이번 출동의 목적이었기 때문이다.

 

※ 충무공의 장계 (옥포파왜병장) ※
그리하여 동서로 에워싸고 대들며, 대포를 놓고 화살과 살탄들 쏘기를 우레 같이 하자, 적들도 탄환과 화살을 쏘다가 기운이 지쳐서는 배에 싣고 있던 물건들을 바다에 내어 던지기에 정신이 없는데, 화살에 맞은 자가 얼마인지 알 수 없고 헤엄치는 놈도 얼마인지 모르며, 대번에 흩어져서 바위 헌덕으로 기어오르며 서로 뒤떨어질까 겁내는 것이었습니다.

 

양지암을 돌아 선봉 · 중군 · 후군으로 진형을 갖추고 속도와 군악을 높이며 왜선단과의 거리를 좁혀 들어가던 조선 함대는 왜선단 전방 300여 미터에 이르자 대포 소리와 함께 두 쪽으로 갈라지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옥포리 포구를 에워싸는 듯한 진형으로 계속 다가갔다.

훗날의 장계 기록을 보면 이와 같은 진법을 이순신은 ‘학익진’ 이라고 했는데 이순신은 학익진을 여러가지 해전 상황을 앞두고 사용했다. 옥포만에서 구사한 학익진은 ‘포위형 학익진’ 이었다. 이렇게 되면 항만에 갇힌 왜선들은 조선 함대의 포위망을 뚫고 달아나기가 어렵다. 학익진을 친 쪽은 마치 체조에서 양팔 간격으로 벌린 상태로 적을 둘러싼 모습이다. 따라서 좌우로 거치적거리는 것 없이 선체를 돌려가면서 ‘좌현대포 쏘아!’, ‘정면대포 쏘아!’, ‘우현대포 쏘아!’ 를 반복할 수가 있다. 또한 뒷줄에 있는 선단과 교대해서 뜨거워진 대포를 식힐 수 있으므로 전 함대와 전 함포가 모두 가동될 수 있었다.

 

학이 날개를 펴고 있는 모습과 닮았다고 해서 이름 붙여진 학익진법은 이순신의 핵심적인 해전법으로 현대 해전사에서나 볼 수 있는 ‘일시집중타’ 의 원조로서 훗날 세계사에 세력 지각변동을 가져오는 시발점이 되었다.

 

반면에 포위된 왜군 함대는 물 위에 떠있는 오리떼처럼 오밀조밀하게 몰려 있는 형국으로 조선 함대처럼 선체를 돌려가면서 사격하기가 어려웠고, 앞줄과 뒷줄 선단 간에 교대사격도 곤란했다. 또 뒷줄에 위치한 선단은 사격을 하려 해도 앞줄의 선단에 사각이 가려져서 팔짱을 끼고 지켜볼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때문에 당시 옥포의 왜군 함대가 조선 함대와 비슷한 수준의 대포로 무장하고 있었다고 해도 학익진을 편 조선 함대에게 화력전에서의 불리함을 결코 면할 길이 없었다. 이렇게 유리한 진형을 갖춘 조선 함대는 대포들을 조준하면서 산과 같은 무게로 왜선단을 압박해 들어갔다.

 

한편, 왜군 측은 포위를 당한 입장이었으므로 해상 탈출은 전혀 시도할 수가 없었다. 다만 포위망이 좁혀지기 전에 탈출을 시도했던 사령관 도도의 배와 몇 척의 호위선들만이 가까스로 위기를 벗어나 있었다. 탈출을 시도한 왜군 대장들은 육지로 상륙한 부대들이 속속 귀대하자 조총수들로 하여금 속히 밀집사격 대형을 갖추게 했다. 왜군 돌격대들도 일본도를 뽑아들고 조선 함대의 접근을 기다리고 있었다.

 

일이 이렇게 된 이상 왜장들에게 전투는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까짓 거, 한번 붙어주지!’ 하는 오기가 발동했고, 그러한 오기 속에는 ‘조총의 뜨거운 맛을 보여 주마!’ 하는 자신감도 배어 있었다. 왜장들은 약탈나간 부대들이 모두 복귀할 때까지 초전의 수적 열세를 극복해 낸다면 승산이 있을 것이라 기대하면서 목청 높여 군사들의 선전을 독려했다. 그런데 학익진을 편 채 포위망을 좁혀오던 조선 함대는 “꽹~!” 하는 징소리와 함께 전방 70미터 지점에서 일제히 멈춰 섰다. 요란하게 울려대던 군악도 그 순간 뚝 멈췄다.

 

조총으로 혼을 뺀 뒤 일본도를 휘두르며 노도처럼 돌격해 들어갈 준비를 하고 있던 왜군들은 조선 함대가 제자리에 멈춰 서자 고개를 갸웃거렸다.

 

‘우리에게 조총이 있다는 것을 알고 더 이상 접근해 오지 못하는구나…’

 

왜군들은 대체로 이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적들이 조총에 맞서 항전하다 패퇴한 자기들 육군의 소식을 들었다면 쉽게 공격해올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러나 바로 그때였다. 하늘과 바다를 뒤흔드는 포성과 함께 수백 수천 발의 소발화, 중발화, 대발화를 매단 불화살형 포탄들이 옥포 하늘을 새까맣게 수놓으며 왜선단을 향해 포물선을 긋기 시작했다. 경천동지의 순간이다.

 

일본도를 뽑아 들고 결전을 준비하고 있던 왜군들은 가공할 대포소리와 화력에 넋을 잃고 말았다. 왜군들로서는 그렇게 크고 많은 대포들이 일시에 사격을 가하는 것은 지금까지 듣지도 보지도 못한 일이었다. 세계 해전사를 통틀어 최초로 선보인 ‘일시집중타’, 즉 백병전이 없는 순수 함포전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정신을 수습하기도 전에 수천 발의 포탄과 화살탄이 왜선단을 향해 빗발치듯 쏟아졌다. 여기저기서 엄청난 폭음과 함께 외마디 비명소리가 왜군 진영을 휘몰아쳤고, 왜선들은 각종 살탄 공격으로 순식간에 고듬도치가 되었다. 연쇄적인 폭음과 함께 많은 수의 왜군들이 발화탄이 터지면서 만들어낸 폭풍에 곤두박질쳤으며 그대로 바다로 떨어져 죽는 자들도 부지기수였다. 층루에 버티고 서서 한껏 기세를 뽐내던 왜장들도 하나 둘 살탄과 화살을 맞고 층각 아래로 떨어졌다.

 

모든 것이 눈 깜짝할 사이에 벌어진 일이다. 이 광경을 이순신은 ‘대포를 놓고 화살과 살탄 쏘기를 바람과 우레같이 했다’ 고 기록해 두었다.

 

몇 차례의 집중타를 얻어맞자 앞줄에 위치한 왜선들은 조선 함대의 공격으로 이미 깨지고 부서진 데다가 크고 작은 화살들이 가시처럼 꽂혀서 불타고 있었다. 휘황찬란하게 나부끼던 깃발과 비단 휘장들은 좋은 불쏘시개가 되었고, 그 불길은 그나마 피해가 가벼웠던 뒤편 병선들로 옮겨가고 있었다.

 

그 상황에서도 미처 배에 오르지 못한 육지 쪽 왜군들과 후미 함대의 왜군들은 사무라이 특유의 강단을 살려 급히 조총부대를 규합해 대대적인 반격을 시도했다. 콩 볶는 듯한 조총사격으로 왜군 측은 잠시 전열을 가다듬은 듯했다. 그러나 거리가 너무 멀었다.

 

그도 그럴 것이, 조선 함대는 조총의 유효 사정거리인 50미터를 벗어나 있었다. 또한빽빽이 둘러쳐진 방패 뒤에 붙어서 쏘고 숨고 또 쏘아대는 조선 함대의 수병들을 자욱한 포연과 무수한 허수아비들 속에서는 분간해 내기 어려웠다. 그리고 조준한 표적은 계속 이동하고 있었다. 때문에 애써 사격을 해보지만 도대체 맞았는지 안 맞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왜군은 믿었던 조총에 대한 심한 좌절감을 느꼈다(이순신은 이 광경을 ‘적들도 탄환과 화살을 쏘다가 기운이 지쳐서…’ 라고 표현했다). 일본도를 들고 돌격전에 나서려던 왜군 돌격대들도 이루 말할 수 없는 좌절감을 맛봐야 했다. 그들은 일생을 통해서 그토록 자랑스럽게 여겨 온 일본도를 버리고 장막과 깃발, 돛, 선체, 갑옷, 그리고 동료들 몸에 붙은 불부터 꺼야 했다. 분신처럼 간직해온 일본도마저 내팽개치고 불끄기에 나섰지만 이미 맹렬한 기세로 타오르는 불길은 잡을 수가 없었다.

 

이때, 왜군 측에는 퇴각령이 내려졌다. 왜장들로서는 당연한 결정이었다. 이렇게 독 안에 든 쥐 모양으로 갇혀 있다가는 불에 타 죽거나 적의 집중 포망에 걸려 떼죽음을 당하기 십상이었기 때문이다.

 

왜장들은 지금껏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무시무시한 해전을 치르고 있었다. 자신들이 알고 있는 한, 해전이란 먼저 총포류로 사격을 가한 후 배를 접근시켜서 창칼로 승부를 내는 것이 당연한 상식이었고, 그것이 자신들의 주특기였다. 그런데 자신들의 주특기는 하나도 통하지 않고 있었다. 창칼로 끝장을 내기 위해서는 바짝 접근해서 적선 위로 타넘어가야 했지만 불타는 배를 이끌고는 나아갈 수가 없었다.

 

뭐가 뭔지 자세히 알 수는 없었지만 적은 강했고, 교묘한 전술로 자신들을 우롱하고 있었다. 생각하면 할수록 분통이 터지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런 감정은 일단 접어두고 살길부터 찾고 볼 일이었다. 왜장들에게 허용된 선택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뭍으로 달아나는 것이고, 또 하나는 해상 포위망을 뚫는 것이었다. 육지로 도망친다면 당장은 목숨을 건질 수 있겠지만 적들은 자신들의 도주를 그냥 가만히 보고만 있지는 않을 것 같았다. 또 육지에는 또다른 조선군이 매복해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이미 많은 수의 병력을 잃었기 때문에 그토록 자신하던 백병전도 무의미했다. 혹 무사히 목숨을 건진다 해도 부산까지 걸어서 간다는 것 역시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아무튼 육지 쪽을 택했다가는 전멸로 이어질 공산이 컸다. 결국 그들이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단 하나, 해상 돌파였다. 하지만 그나마도 성공 가능성은 희박해 보였고 적이 포위망을 더욱 좁혀 오기 전에 시작해야 했다.

 

이순신은 멀리 기함의 함교 위에서 전황을 주시하고 있었다. 전투는 그의 의도대로 무리 없이 진행되고 있었다. 이제는 해전을 마무리해야 할 시점이었다. 이순신은 왜군들이 포위망을 뚫기 위해 최후의 발악을 해 올 것이라고 예상했다. 그렇다고 전 선단을 내세워 왜군의 공세에 맞설 위험을 자초할 필요는 없었다. 승패는 이미 갈려진 상황이었으므로 무리할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순신은 분탕질을 위해 멀리까지 나갔던 일단의 무리들과 불이 붙은 병선을 타고 있던 왜군들이 그나마 피해가 덜한 몇 척의 중 · 소형 병선 위로 분주히 이동하고 있는 것을 보았다. 왜군들이 해상 탈출을 위해 마지막 돌격전을 감행할 것으로 판단한 이순신은 즉각 “특공선단 앞으로!” 를 명령했다.

 

북이 울리자 방패를 빽빽하게 세우고 현자포에 산탄으로 무장한 협선들이 왜선단 가까이 다가갔다. 그리고는 탈출을 시도하는 중 · 소형의 왜선들을 향해 현자포로 산탄 세례를 퍼부었다.

 

왜군들은 고개조차 들지 못했다. 그 틈에 조선의 협선들은 선체에 불화살을 쏘아 맞췄다. 각 전선에서는 “명중률을 높여라!”, “저기 기어나오는 왜선을 쏴라!” 등과 같은 조준사격 지시가 숨가쁘게 내려졌다. 이에 사수들은 대포의 조준사격에 한층 열을 올렸고, 시위를 당기는 궁수들의 모습에도 분연한 각오가 넘쳐흘렀다. 조선 함대의 조준사격은 선체를 표적으로 삼았기 때문에 백발백중으로 왜선들을 타격했다. 이에 돌격전으로 해상 탈출을 꾀하던 왜군들은 전열이 흩어졌고 주력병기였던 조총은 장탄에 1분이나 걸렸기 때문에 반격 한 번 제대로 하지 못했다. 그 배에 타고 있던 왜병들 역시 태반이 즉사 내지는 익사했다.

 

이순신은 사활을 건 왜군들의 마지막 돌격전을 이렇듯 간단하게 봉쇄해 버렸다.

 

왜군들이 마지막으로 해야 할 일은 전우들의 시체와 기밀문서를 수장시킨 뒤 육지로 도망치는 일이었다. 그래서 모두들 이것저것 손에 잡히는 대로 바다로 집어던졌다. 그리고 방패로 몸을 가리면서 화살탄이 날아오지 않는 선단 뒤쪽 바다로 뛰어들었다.

 

특공선단에서는 왜선단 코앞까지 접근해 들어가서 발화탄을 매단 화살을 쉴 새 없이 발사했다. 이렇게 되자 이제 화염에 휩싸이지 앟은 왜선은 없었다. 보기에도 아찔한 검붉은 불길이 바닷바람을 타고 옥포리의 온 바다, 온 하늘을 시뻘겋게 물들이고 있었다. 완벽한 승리였다. 간신히 육지까지 기어 올라간 왜군들은 뒤돌아볼 겨를도 없이 달아나고 있었다. 그 광경을 이순신은 ‘바위 언덕으로 기어오르면서 서로 뒤떨어질까 겁내는 것이었습니다’ 라고 적고 있다.

 

지옥 같은 전장에서 벗어나 산 위로 도망친 왜군들은 비록 목숨은 건졌지만 씻을 길 없는 후유증에 시달려야 했다. 우선 수많은 전장을 다니면서도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벌떼 같은 함포공격을 생각할 때마다 몸서리치지 않을 수 없었다. 또한 바다의 나라라는 일본의 선봉 함대로서 그까짓 조선 수군 따위에게 이렇다 할 응전 한 번 못해보고 도망쳐 왔기 때문에 심한 자기 모멸감에 빠져들었다. 땅을 치고 통곡하다 못해 할복이라도 해야 할 판이었다.

 

배도 잃었고, 늘 자신의 분신처럼 지니고 다녔던 일본도도 어디로 갔는지 알 수가 없었다. 신앙처럼 믿어 왔던 조총도 실전에서는 거추장스럽기만 할 뿐 아무 소용이 없었다. 너무도 분했고, 모든 게 혼란스러웠다. 그 와중에 아직 살아 있다는 것을 증명하듯 심한 허기가 몰려들었다. ‘식량은 또 어디서 구한단 말인가…’ 모두가 그저 망연자실할 뿐이었다.

 

※ 충무공의 장계 (옥포파왜병장) ※
조부장 낙안군수 신호가 왜적의 큰 배 1척을 쳐부수고 머리 하나를 베었는데, 배 안에 있던 칼 · 갑옷 · 의관 등은 모두 왜장의 물건인 듯하며, 우부장 보성군수 김득광은 왜적의 큰 배 1척을 쳐부수고 우리나라 포로 1명을 다시 빼앗고, 전부장 흥양현감 배흥립은 왜의 큰 배 2척, 중부장 광양현감 어영담은 왜의 중간 배 2척, 작은 배 2척, 중위장 방답첨사 이순신은 왜의 큰 배 1척, 우척후장 사도첨사 김완은 왜의 큰 배 1척, 우부기전통장 전 군관 보인 이 춘은 왜의 중간 배 1척, 유군장 발포가장인 신의 군관 훈련봉사 나대용은 왜의 큰 배 2척, 후부장 녹도만호 정운은 왜의 중간 배 2척, 좌척후장 여도권관 김인영은 왜의 중간 배 1척, 좌부기전통장 순천대장 전 봉사 유섭은 적의 큰 배 1척과 우리나라 포로 소녀 3명을 도로 빼앗고, 한후장 신의 군관 급제 최대성은 왜의 큰 배 1척, 참퇴장 신의 군관 급제 배응록은 왜의 큰 배 1척, 돌격장 신의 군관 변존서, 전봉사 김효성 등이 함께 왜의 큰 배 1척, 경상도 여러 장수들이 왜선 5척과 우리나라 포로 3명을 도로 빼앗아 모두 합하여 왜선 26척을 총통으로 쏘아 맞혀 깨뜨리고 불태우니 온 바다에 불꽃과 연기가 하늘을 덮었습니다.

 

옥포해전을 치른 후 그 전과를 보고한 장계다. 이순신 휘하의 10개 수군 기지와 여수 본영의 단위 함대들이 학익진으로 ‘목표 정면의 적’ 을 공격하고 노획단계 때는 각기 왜선에 뛰어올라 포로가 된 조선의 백성들을 구출해 낸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이순신은 이렇게 꼼꼼히 기록해서 각 고을별 공로를 조정에 보고했다.

 

해당 고을 장수들의 이름으로 보고 되는 것은 그 고을 출신 장병과 그 고을을 후원하는 고을들의 공로가 된다. 이순신은 이렇게 세심하게 신경을 쓰고 있었다. 이는 사기를 진작시켜 다음의 출동준비에도 소홀함이 없도록 하는 효과도 가져왔는데, 이같은 세심한 배려가 이순신 군영의 한 단면이기도 하다.

 

전라좌수영  관내 기지 장병들은 모두 16척의 왜선을 깨쳤다. 본영 소속의 장수들인 이춘, 최대성, 배응록, 이언량, 변존서 등이 깨친 왜선은 모두 5척이었다. 이렇게 따져보면 전라좌수영 관내의 기지들과 여수 본영 함대들 중에서 공을 세우지 않은 곳은 없었고, 원균의 경상우수영 측도 5척을 깨쳤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래서 모두 26척이다. 전라좌수영 함대의 판옥선은 24척, 경상우수영 함대의 판옥선은 3~4척으로 약 8:1의 비율이다. 하지만 원균 쪽은 화약무기를 준비하지 못했을 것이므로 전력상으로는 8:1 정도가 아니다.

 

5월 6일, 당포에서 양측 함대가 만났을 때 ‘장수들을 모아 놓고 여러 차례 약속했다’ 고 한 그 ‘약속’ 은 작전회의 및 지시이다. 그때 이순신 쪽에서는 원균 함대에 보통의 화살에 메달아 쏘는 소발화탄과 무게가 가벼운 현자 · 황자포를 빌려주고 포수들까지 이동시켜서 싸웠을 가능성이 높다. 장계에서 왜선의 수를 ‘30여 척’ 이라고 한 것을 보면 달아난 6척을 제외한 모든 왜선들이 격파되거나 불탄 것으로 보인다.

 

옥포해전은 임진왜란사 중에서 아주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해전과 육전을 통해서 조선군이 거둔 첫 승전이었다는 점에서도 그렇지만, 이 해전으로 풍전등화의 위기에 몰렸던 조선의 운명이 실날같은 희망의 불씨를 간직할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이다. 아울러 구국의 신념으로 사생결단의 출동을 감행한 이순신 함대로서도 새로운 전기를 맞는 계기가 되었다.

 

공을 세운 것은 승전을 의미하고, 승전은 자신감과 용맹성을 가져온다. 거기에 준비해둔 무기와 갈고 닦은 해전술로 적을 초전부터 완벽하게 제압한 전투였기 때문에 조선 함대 수병들은 겁쟁이에서 용사의 면모를 갖춰 나가기 시작했다.

 

반면에 왜군들로서는 처음 당한 패배였으며, 이 패배가 알게 모르게 자신들을 용사에서 겁쟁이로 몰아가고 있었다. 당시 왜군의 군대 편성은 각 영지별로 병선을 만들고 병사들을 수송하여 바다를 건너오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따라서 배를 잃게 되면 다시 그 영지에서 배를 건조해야 했다. 때문에 한 번 소멸된 함대가 재건되기 위해서는 적어도 1년 이상의 긴 시간이 필요했다. 북상하고 있던 왜군부대들에게는 증원과 보급이 시급한 상황이었는데, 재건에 1년 이상이나 소요되는 기동 함대 하나가 이렇게 사라져 버렸으므로 임진왜란 때 왜군 측의 파탄은 사실상 여기서부터 시작된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옥폿해전 후, 전리품 노획작업을 끝낸 조선 함대는 다시 돛을 올렸다. 그리고는 바로 옥포만을 빠져 나와 오후 4시경 거제도 북단에 있는 영등포까지 이동해 숙영할 준비를 했다.

 

※ 충무공의 장계 (옥포파왜병장) ※
산으로 올라간 적도들은 숲 속으로 기어 들어가 겁내지 않는 놈이 없으므로 신이 여러 전함에서 용맹한 사부들을 뽑아서 산에 오른 적을 쫓아가 잡도록 하려 했사옵니다. 그러나 거제도는 산세가 험준하고 수목이 무성하여 발붙이기 어려울 뿐더러 당장 적의 소굴 속에 들어 있는데, 배에 사부가 없으면 혹시 뒤로 포위당할 염려도 있고 날도 저물어가므로 뜻대로 못하고 영등포 앞바다로 물러나와 머물며 군사들을 시켜 나무 하고 물을 길어 오게 하여 밤을 지내려고 하는데…

 

옥포 앞바다에서 정오였다고 했고, 옥포해전을 치른 후 영등포까지 왔을 때가 오후 4시경이었다면, 옥포 해전은 초탄 발사에서부터 물러나올 때까지 약 1시간 미만에 끝낸 전투였다. 쌍방 간에 그렇게 큰 규모의 함대가 백병전이나 조총과 화살 등의 무기로 사격전을 벌였다면 하루나 이틀은 걸렸을 법한 전투였다. 그런데 이순신은 그 큰 해전을 단 1시간 만에 끝냈다.

 

그야말로 속공속전이었다. 이러한 이순신 특유의 속공전은 20세기 해전사에서도 그 유래를 찾아보기가 쉽지 않다. 학익진을 통한 ‘일시집중타’ 가 이순신 식 속공전을 가능하게 했던 것인데, 많은 전사 연구가들은 당시 세계 최고의 함대로 일컬어지는 스페인 무적함대 역시 ‘이순신 함대의 적수가 될 수 없었을 것’ 이라는 견해를 피력하고 있다.

 

이순신의 해전에서 또 하나 특징은 휘하 장병들의 생명을 소중히 했다는 것이다. 옥포만을 떠나오기 전, 패주하는 적을 뒤쫓지 않았던 것도 군사들의 희생을 염려했기 때문이다.

 

이순신은 격물 · 치지를 평생의 철학으로 삼아온 무장이었다. 그는 매사를 격물 · 치지적으로 이치를 끝까지 따지고 신중하게 판단해서 처리했다. 나라의 운명과 장병들의 생사가 걸린 전투를 치를 때는 더더욱 그랬다.

 

이순신의 장계에는 ‘거제도는 산세가 험준하고 수목이 무성하다’ 고 기록돼 있다. 당시 거제도에는 원시림이 울창했을 것이다. 또한 거제도는 큰 섬이다. 사수들을 선발해서 적을 뒤쫓는다고 해도 10만의 병사로도 완전히 소탕하려면 최소한 몇 달 이상은 걸림직한 섬이었다. 게다가 조선 함대로서는 주변의 상황을 정확히 알 수 없는 적의 점령지 해역 깊숙이 들어와 있었다. 인근에 큰 적이 있었다면 포성과 하늘 높이 치솟은 연기를 보고 덮쳐올 염려도 있었고, 왜군들이 비록 겁을 먹고 도망치는 입장이었다고는 해도 그들과의 창칼싸움은 절대 피해야 했다. 또 멀리 분탕질을 나갔던 왜군 부대들이 여기저기서 복귀해 오고 있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상황들을 종합해 보면, 어떤 경우든 조선 함대가 옥포만에 머뭇거리고 있는 것은 결코 바람직하지 못한 일이었다. 전략상으로 보아도 적을 좀더 죽이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적의 기동함대들을 하나라도 더 찾아내서 각개 격파하여 왜군들의 발을 묶는 것이 중요했고, 그것이 1차 출동의 목적이기도 했다. 때문에 이순신은 옥포에서 함대를 급히 되돌려 나왔다. ‘치고 빠지기’ 전술이었다.

 

옥포해전 때 올린 장계(옥포파왜병장)에서 조선군의 피해 내용을 보면 전사자는 단 한 명도 없었고, 부상자만 한 명 있었다. 그것도 칼에 의한 것이 아니라 화살에 왼팔을 조금 다쳤을 뿐이었다. 이것을 보면 왜군들이 육지로 쫓겨간 후에도 ‘상당한 시간’ 이 지난 후에야 왜선에 뛰어올라 전리품을 노획케 하고 죽은 자의 목을 베어 오라고 명령한 것으로 보인다. 어쨌거나 왜군 기동함대 하나를 격멸하는 해전을 치르고도 한 명의 부상자만 냈다는 사실은 승리 이상의 성과였으며, ‘환상적인 해전’ 이라는 표현 말고는 달리 설명할 길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