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임진왜란

7년전쟁 - 8장 조선군의 붕괴,이순신의 투옥과 수군 전멸

구름위 2013. 5. 1. 10:59

 

1592년 4월 13일 임진왜란이 발발한 후, 일본군 제1번대의 고니시 유키나가는 부산진성과 동래부성을 잇달아 함락시킨 후 포로로 잡힌 울산군수 이언성으로 하여금 조선조정에 그들의 요구조건을 제시한 서신을 전달하도록 하였다. 일본군측은 이 서신에서 그들이 4월 25일까지 상주에 도착할 것이며 그곳에서 이덕형과 강화를 논의하기 바란다고 밝혔다. 그러나 이언성은 일본군에 항복한 자신의 죄상이 드러날 것을 우려한 나머지 일본군측에서 조선 조정에 보내는 서신을 파기하고 잠적해 버렸다. 따라서 일본군측이 제기한 최초의 화의 교섭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 후 일본군은 예정대로 4월 25일 상주에 진출하였고 이곳에서 왜학통사(통역관) 경응순을 통해 두 번째로 화의 교섭을 위한 접촉을 시도하였다.

 

4월 27일 한성에 도착한 경응순이 조정에 일본군측의 요구 서신을 전달하자 조정에서는 일단 그들의 요구에 응하여 북상을 지연시켜 가면서 전열을 정비할 시간을 벌기로 방침을 정했다. 이에 따라 조선측에서는 대사헌 이덕형과 경응순을 화의 교섭 사절로 임명하여 충주의 일본군 제1번대 진영으로 급파하였다.

 

이덕형 일행은 이튿날인 4월 28일에 한성을 떠나 충주로 향하던 중 죽산에서 가토군에 의하여 진로를 차단당하게 되어 고니시와의 충주회담을 포기하고 한성으로 귀환하였다. 이로써 일본군측에서 제의한 두 번째의 화의 교섭도 성과를 보지 못하고 말았다.

 

조, 일 양군이 임진강을 사이로 하여 대치하고 있던 1592년 5월 15일 일본군 제1번대의 고니시는 임진강 북안의 조선군 도원수 김명원 군 진영에 야나가와와 덴케이를 보내어 화친을 요구하는 서신을 전달하였다. 그러나 조선군 진영에서는 일본군의 화친 제의를 거부하였다. 야나가와와 덴케이는 이튿날인 5월 16일에도 전쟁의 확대를 바라지 않는다는 일본군측의 입장을 조선측에 전달하고 이에 대한 수락을 촉구하였다. 이에 조선군측의 도원수 김명원 진영에서는 5월 19일까지 교섭 수락 여부를 회답해 주겠다는 완화된 태도를 보였다.

 

그러나 이튿날인 5월 17일 평양에서 파견된 제도순찰사 한응인이 임진강 조선군 진영에 도착하면서부터 일본군측의 제의를 거부하고 5월 17일 임진강을 도하 하여 일본군에게 공격을 가하였다. 이에 일본군은 반격을 가하여 조선군의 임진강 방어선을 돌파하고 5월 27일에 개성에 입성한 후에 그 여세를 몰아 6월 8일에는 대동강 남안으로 진출하였다.

 

일본군은 대동강 남안에 진출하였을 무렵부터 군량과 전쟁물자의 부족에 허덕이기 시작하였다. 전선이 점차 광범화되고 보급로가 연장됨에 따라 이러한 곤란에 직면하게 되었던 것이다. 더욱이 조선 수군이 제해권을 장악하면서부터 일본군의 해상활동이 거의 불가능해졌으며 조선 의병들의 유격활동에 의하여 병력의 분산을 강요당함으로써 전황은 점차 불투명해지기 시작하였다. 이에 일본군측에서는 6월 8일에 또다시 조선군측에 강화를 요구하는 서신을 보내어 ‘양국 대표가 대동강상에서 강화를 논의할 것’을 제의하였고 조선 조정은 일본군측 제의에 대한 수락 여부를 둘러싸고 격론이 벌어졌다. 그러나 일본군측에서 교섭 상대로 지목한 대사헌 이항복이 회담장에 나갈 것을 지원하고 나섬에 따라 일단 화의 교섭에 응하기로 결정을 보았다. 그리하여 임진왜란이 발발한 지 2개월여 만인 6월 9일 대동강상에서 조선측 대표 이덕형과 일본군측 대표 야나가와 및 겐소왕의 강화회담이 이루어졌다.

 

이덕형은 ‘화의를 원한다면 먼저 철군을 한 연후에 화의를 논의할 것’ 을 주장하는 반면, 일본군측에서는 ‘중국에 조공을 바라도록 길을 열어 달라’ 는 요구를 고집하였다. 결국 양측의 주장이 서로 상충되어 이 대동강회담은 아무런 성과를 얻지 못한 채로 결렬되었다.

 

일본군은 6월 9일 대동강회담이 결렬되자 6월 15일 도원수 김명원군을 격파하고 평양성을 점령하였다. 그 후 일본군은 명나라가 조선에 파병한 요동부총병 조승훈군을 격파하여 이를 요동으로 물리쳤다. 그러나 이때부터 일본군 수뇌부에서는 명군의 본격적인 개입을 우려하는 위기의식이 고조된 결과, 대명 화의에 적극적인 자세를 보이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한편, 명은 임진전쟁 발발 초기에 조승훈군을 조선에 파견하였으나 그들이 평양에서 패전하자 유격장군 심유경으로 하여금 일본군과의 화의 교섭을 진행하도록 하였다. 이는 외교적 교섭을 통하여 일본군의 북진을 지연시키기 위한 명의 책략이기도 하였다.

 

1592년 8월 17일 명의 유격장군 심유경은 의주에 동당하여 조선 국왕 및 대신들과 회담을 가진 뒤 21일에 평양으로 출발하여 순안에 도착하자 평양의 일본군 진영에 사자를 보내어 강화 교섭을 제의하는 서신을 전달하였다. 그러자 일본군 진영에서도 답서를 보내어 명나라측의 제의를 재확인하였다. 그리하여 마침내 8월 30일부터 9월 1일까지 명의 심유경 일행과 일본군측의 고니시, 소오, 야나가와, 겐소 등이 평양 서북쪽 10리의 강복원에서 강화회담을 실행하였다. 이 명·일 간의 강화회담 석상에서 심유경이 ‘일본군이 대동강 이남으로 철수하면, 도요토미를 일본국왕으로 책봉하고 조공을 받아들이도록 하겠다’고 제안하였고 일본군측에서는 이를 수락하였다. 이로써 명일 양군 사이에 10월 20일까지 50일간의 잠장적 휴전이 성립되고 일본군의 대륙진출을 지연시키려던 명의 의도는 일단 성공을 거두었다.

 

평양회담이 끝난 이튿날이 9월 2일 고니시는 심유경에게 ‘일본이 조선을 침공한 것은 조선이 조공로를 차단했기 때문이었으며 명이 약속된 기한인 50일 안에 화의조건을 매듭짓지 않을 경우에는 대륙으로 진군하겠다’ 는 위협적인 서신을 보내어 화의조건의 조속한 이행을 촉구하였다. 이에 심유경은 ‘명나라에 조공을 바치려 하는 일본의 충정과 조선이 이를 방해한 경위 등을 황제께 보고하여 귀국의 소원이 성사되도록 하겠다’는 답서를 보내어 합의된 약속의 이행을 다짐하였다.

 

그 후 심유경은 9월 10일 북경으로 귀환하여 황제에게 ‘일본은 다만 봉공을 바랄 뿐이지, 그밖에 다른 뜻은 없는 것 같다’ 는 요지의 보고를 하였다.

 

심유경의 이와 같은 보고를 접한 명의 조정에서는 설번을 조선에 파견하여 심유경의 복명에 대한 사실 여부를 확인하도록 하였다.

 

10월 16일 설번은 북경에 귀환하여 황제에게 ‘일본이 우호를 내세우는 것은 명군의 출동을 지연시키려는 간계이므로 조속히 정병을 파견하여 이를 소탕해야 한다’ 는 점을 역설하였다. 이에 명은 마침내 전쟁에 적극적으로 개입한다는 방침을 확정하고 조선에 대군을 출병시킬 준비에 들어갔다. 그러나 명은 조선에 파병할 군을 동원할 수 있는 시간을 벌기 위하여 일본군과의 휴전기간 연장 교섭을 필요로 하였다. 이에 명은 심유경, 심가왕, 누국안 등을 조선에 파견하여 일본군측과의 교섭을 진행토록 하였다.

 

11월 17일 의주에 도착한 심유경 일행은 조선 국왕에게 명군이 출병할 시간을 얻기 위해서는 일본과 강화회담을 재개할 수밖에 없다는 명의 입장을 전달하였다. 이에 조선측에서는 조선을 배제한 화의 교섭에 대한 반대의사를 표명하고 이러한 교섭이 강행될 경우에는 조선이 독자적으로 전쟁을 수행하겠다는 결의를 천명하였다.

 

심유경은 조선측의 이와 같은 반대에도 불구하고 11월 26일에 평양의 일본군 진영에서 강화회담을 재개하였다. 심유경은 이 회담 석상에서 일본군측에 ‘조선의 두 왕자를 석방할 것’ 과 ‘일본군의 즉각적인 철수’ 를 요구하면서 만일 이러한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명군의 개입이 불가피하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그러나 일본군측에서는 명국의 ‘봉공의 허락’과 ‘책봉사의 파견’ 을 강력하게 요구하였기 때문에 명·일간의 제2차 화의교섭은 완전한 타결을 보지는 못하였다. 그러나 양측은 ‘봉공의 허락’ 을 조건으로 ‘일본군의 한강 이남으로의 철수’라는 것을 원칙으로 하여 이듬해인 1593년 1월 15일까지 휴전기간을 50일간 연장함으로써 일단 전쟁 확대를 막을 수 있었다.

 

조선측의 주장을 묵살한 채로 제2차 평양회담을 성립시킨 심유경은 교섭의 내용을 은폐한 채 요동으로 돌아가 버렸다. 이로써 조명 관계가 소원해지고 조선측에서는 조정을 전라도로 옮겨서라도 독자적으로 전쟁을 수행해야 한다는 논의가 대두되기까지 하였다.

 

1592년 12월 심유경은 요양에서 경략 송응창 및 제독 이여송의 조선 출병군과 합류하여 다시 조선에 입국하였다. 바로 이 무렵인 12월 13일에 명군 선봉부대가 압록강을 도하하고 있어서 25일에는 명군 주력부대가 조선에 진군하여 이듬해인 1593년 1월 8일에 평양성에 공세를 가하여 이를 함락시킴으로써 명,일 양측간의 교섭은 자동적으로 파기되었다.

 

1593년 1월 8일 평양성을 수복한 명군은 승세를 타고 일본군을 추격하였으나 1월 27일 벽제관 전투에서 일본군의 반격을 받아 그 기세가 꺾이었다. 그러자 명군 진영에서는 ‘일본군과의 화의를 성립시켜 전쟁을 종결짓자’ 는 논의가 대두되었다.

 

한편, 벽제관에서 명군을 격퇴한 일본군도 2월 12일 행주산성 전투에서 참패한 후로 사기가 저하되었다. 이에 일본군도 전황이 더 악화되기 전에 한성에서 철수할 명분을 찾지 않을 수 없었다.

 

3월 3일 우키다 히데이에는 서울에 집결한 17장군들과 회합을 하고 그 결과를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보고하였다.

 

① 서울의 군량은 죽을 먹으면 4월 11일까지 보급이 가능하다.
② 부산에서 군량 수송은 10일이 더 걸리며 육로, 수로 모두가 어렵다.
③ 현재 한양으로 전 병력이 집결 중이기 때문에 수만 명 정도의 조·명 연합군의 공격은 방어가 가능하다.

 

이에 대해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서울의 일본군이 아무 때든 축차적으로 철군해도 좋다는 철수허가를 승인하는 명령서를 보내왔다.

바로 이런 상황 속에서 3월 7일에 명의 부총병 사대수는 일본군 진영에 사자를 보내어 명,일 양측간에 화의 교섭 재개의 원칙이 합의되었다. 고니시는 서울의 일본군의 부산까지의 안전 퇴군을 보장받기 위해 히데요시의 철군 명령을 숨긴 채 명나라 유격장 심유경과 용산에서 강화회담을 벌였다.

 

이때, 심유경은 일본군측에 다음과 같은 3개 항의 강화조건을 제시하였다.

 

① 조선의 영토 반환.
② 조선의 왕자와 대신 송환
③ 도요토미의 사죄를 전제로 한 책봉

 

그러면서 만일 이를 승낙하지 않으면 ‘40만 대군을 동원하여 일본군을 전멸시키겠다’ 고 위협했다.

 

일본군측에서는 1593년 3월 7일에 명군측에서 제시한 강화조건에 대응하여 ‘일단 철군을 하여 화의를 진행한다’ 는 방침을 정하고 다음과 같은 4개 항의 조건을 제시하였다.

 

① 명의 대일강화사 파견
② 명군의 요동 철수
③ 조선의 왕자와 대신 송환
④ 일본군의 한성 철수

 

그러하여 4월 8일 한양의 고니시와 명나라 심유경의 강화회담이 타결되었다. 그러나 명의 경략 송응창은 명나라 조정이 이러한 강화조건들을 쉽사리 수용하지 않으리라는 판단을 내리고 사용재와 서일관을 강화사로 위장하여 심유경과 함께 일본으로 가서 도요토미의 항복문서를 받아오도록 지시하였다.

 

4월 17일, 위장 강화사 일행이 일본군 진영에 당도하자 일본군측에서는 이들을 정식 강화사로 오인하고 이튿날인 18일부터 일본군 53,000명과 심유경과 강화사 일행, 조선의 두 왕자와 대신 일행 및 조선 백성 1,000여 명(부역자)을 데리고 서울에서 철수하여 강상도 해안지역으로 남하하였다.

 

19일 명의 선봉 사대수가 파주로 진주했다. 유성룡이 이여송을 만나 퇴각하는 일본군에 대한 추격전을 주장하였으나 이여송은 두 왕자의 신변 안전을 핑계로 허락하지 않았다. 이에 유성룡은 전라도 순찰사 권율, 순변사 이빈, 경기도 방어사 고언백, 이시언, 정희현 등에게 비밀리에 추격을 지시했다.

 

이들 중 권율의 행동이 가장 빨랐다. 권율은 20일 휘하의 전군을 동원하여 서울로 진입하여 함락 만 11개월 보름 만에 서울을 수복하는 한편 계속해서 일본군을 추격했으나 뒤따라 온 명군 유격장 척금이 이여송의 명령 없이 추격하지 말라며 가로 막았다. 지휘권이 이미 명군으로 넘어 갔기 때문에 권율은 어쩔 수 없이 추격을 단념해야 했다. 이여송 등 명군 주력도 20일 서울에 입성하였다.

 

21일 유성룡이 다시 이여송을 찾아가 추격전을 주장하였으나 이여송은 한강의 부교를 일본군이 불태워 배가 없다는 핑계를 대었다. 이에 유성룡은 충청과 경기 수사들을 동원하여 50여 척의 배를 마련했으나 이여송은 다시 경략 송응창의 추격 금지령을 핑계로 추격전에 나서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추격을 하려고 하는 조선 순변사 이빈군과 방어사 고언백 군사의 도강 역시 사대수의 명군으로 하여금 막게 하였다. 조선군과 명군이 이러고 있을 동안 일본군은 북 치고, 춤추며 유유자적하며 철수하고 있었다.

 

일본군의 선두는 5월 10일에 경상도 상주, 12일 선산과 인동, 15일 대구와 청도를 통과하여 밀양에 도착했다. 일본군이 철수하면서도 끝내 두 왕자를 송환하지 않자 5월 2일에 경략 송응창은 이여송에게 추격을 명령했고 조·명 연합군 선봉이 6일에야 한강을 건너기 시작했다. 이 때는 이미 일본군 선두가 조령을 넘어 경상도로 들어가고 있을 때였다. 이여송도 주력을 이끌고 뒤따라 조령을 넘고 문경에 이르러 영남과 호남의 전략 요충에 명군을 배치하였다.

 

1593년 5월 중순 명의 위장 강화사인 사용재와 서일관 일행은 나고야에 도착하여 도요토미와 회견하였다. 이 회견 석상에서 도요토미는 ‘일본의 침공 목적은 명나라를 치기 위한 것이 아니었고 일본에 항복하는 약속을 지키지 않은 조선을 치기 위한 것’임을 강조하였다.

 

이에 사용재와 서일관은 ‘그 동안의 사정을 명의 조정에 상세히 전달하여 사태가 원만히 수습되도록 주선하겠다’ 고 약속하였다.

 

한편, 도요토미는 이들에게 속아넘어간 나머지 ‘강화사 파견’ 그 자체만으로 명나라가 그들 일본의 국제적 지위를 인정해 준 것으로 여기고 이들 위장 강화사 일행에게 호의적인 자세를 보였다. 일본측은 이 나고야 회담을 통하여 명군 측에 다음과 같은 7개 항의 강화조건을 제시하였다.

 

① 명은 화평의 인질로 명나라 공주를 일본국왕의 후비로 보낼 것
② 명·일 양국은 무역을 재개할 것.
③ 명·일 양국은 통교 서약 문서를 교환할 것.
④ 조선은 8도 중 4도(道)를 일본에 할양할 것.
⑤ 조선은 왕자와 대신 한두 명을 일본에 볼모로 보낼 것.
⑥ 일본은 포로인 조선의 왕자와 대신을 송환한다.
⑦ 조선은 일본에 영원한 항복을 서약할 것.

 

명군측의 위장강화사 사용재, 서일관 일행은 7월 15일에 부산에 도착하여 심유경과 함께 8월 6일에 한성으로 귀환하였다. 그들은 일본군측에서 제시한 조건을 검토한 결과 그 대부분이 명과 조선측에서 수락할 수 없는 무리한 요구들이었으므로 도저히 그 내용을 조선측에 밝힐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

 

그리하여 심유경은 당초에 도요토미가 나고야 회담에서 제시한 강화조건의 내용을 비밀로 한 다음 ‘도요토미는 명나라의 책봉과 조공의 허락을 희망한다’는 뜻으로 문서 내용을 변조하여 본국 조정에 보고하기로 하였다.

 

그 후, 심유경은 일본군측에 ‘도요토미의 항복 문서가 없으면 봉공을 허락받을 수 없다’ 는 뜻을 전달하고 도요토미의 항복 문서를 요구하였다. 이에 일본군측에서도 ‘명나라가 책봉을 해 준다면 일본은 명의 신하로서 영원히 공물을 바치겠다’ 는 항복문서를 위조하여 명군 측에 전달한다는 방안이 마련되었다.

 

이와 같이 일본축의 기만 술책은 당초부터 전쟁의 확대를 바라지 않았던 일본군 장수들의 입장을 대변한 고니시가 조기에 전쟁을 종결짓기 위해서 안출해 낸 임시방편적인 조치였다. 그리하여 1592년 2월에 심유경의 요구에 따라 고니시가 위조한 항복문서가 명군 측에 전달되었다.

 

그러자 조선측은 심유경에게 이 강화 교섭을 반대한다는 입장을 전달하였다. 이에 명군 측에서는 군량 조달 문제로 말미암아 조선에 장기 주둔할 수 없는 그들의 입장을 설명하였다. 아울러 도요토미를 일본 국왕으로 책봉하고 그들의 조공을 허락해 주는 선에서 전쟁을 종결 지을 수밖에 없다는 자국의 처지를 내세워 조선 조정을 설득하고자 하였다.

 

명군측에서 조선을 배제하고 일본과 강화 교섭을 진행하고 있는 상황에서 조선측은 시종 강화 교섭을 반대하는 입장을 고수하여 왔다. 그러나 명, 일 강화 교섭이 구체화되어 감에 따라 조선 조정 내부에서도 독자적인 대일 강화 교섭을 통하여 조선의 입장을 확고히 천명할 필요성을 절감하게 되었다. 이와 같은 주체적 입장에서 강화 교섭이 추진된 결과 서생포 회담과 함안 회담 등 일련의 대일 강화회담이 이루어지기에 이르렀다.

 

1594년 4월 초 조선의 도원수 권율은 조선 승병의 총수인 도총섭 유정을 서생포의 가포군 진영에 보내어 강화 교섭의 추진과 아울러 일본군 진영의 동태를 탐지하도록 지시하였다. 이에 따라 유정은 서생포에서 일본군 제2번대의 대장인 가토와 대좌하였다. 이 회담을 통하여 가토는 도요토미가 지령한 ① 명 · 일 황실의 혼인 ② 조선 4도의 할양 ③ 조 · 일 양국의 교린외교 관계 부활 ④ 조선 왕자 및 대신의 인질 등 강화 조건을 제시하고 그 수락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유정은 가토가 제시한 요구 조건의 부당성을 통렬히 반박하고 절대로 수락할 수 없다는 강경한 입장을 표명하였다. 결국 이 회담은 타결점을 찾지 못한 채로 종결되었다.

 

그 후 7월 12일 유정과 가토는 또다시 서생포에서 회담을 하였다. 이 회담에서 가토는 전번에 제시한 강화조건이 수락되지 않으면 강화가 성립될 수 없음을 강조하였다. 유정은 이에 대하여 일본 측이 제시한 조건 가운데 ‘조 · 일 양국의 교린 외교 부활’ 이라는 조항은 수락할 수 있으나 기타의 사항들은 논의의 대상이 될 수 없다는 강경한 입장을 고수하였다. 따라서 제2차 회담 서생포 회담도 실질적인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말았다.

 

그 후 12월 하순, 유정은 또다시 가토의 일본군 진영에 강화 회담을 재개할 것을 제의하여 12월 21일부터 22일부터 이틀 동안 제 3차 회담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이 회담에서 일본군측의 ‘조선이 왕자와 사신을 일본에 보내야 화의가 이루어질 수 있다’ 는 새로운 요구조건을 제시함으로써 회담이 또다시 결렬되었다.

 

서생포에서 유정과 가토가 회담을 진행하고 있던 1594년 11월 하순, 함안에서는 진주의 경상우병사 김응서가 일본군 제1번대 대장 고니시 사이에 또 하나의 강화회담이 추진되고 있었다.

 

11월 22일 함안의 지곡현에서 김응서와 회동한 고니시는 ‘일본이 명에 대한 봉공을 허락받는데 조선이 협조해 줄 것’ 을 요구하였다. 이에 김응서는 ‘일본군의 무조건 철수’ 를 문제 해결의 전제조건으로 내걸었다. 따라서 이 함안회담도 쌍방간의 강경한 주장이 오고 가는 가운데 성과 없이 결렬되었다. 명군측에서는 조선에 압력을 가하여 조기에 강화를 성립시켜 전쟁을 종결짓기 위하여 ‘조선이 이와 같이 강경한 자세를 고수한다면 명군은 모두 압록강 이북으로 철수할 것’ 이라는 으름장을 놓았다.

 

결국 조선측은 대일본 강경자세의 완화를 촉구하는 명군측의 끈질긴 설득으로 말미암아 마침내 명에 대한 일본의 봉공을 전제조건으로 명·일 간의 강화방침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로써 조선은 일본과의 독자적 강화교섭을 추진하지 못하고 대일 강화 교섭의 주도권을 상실하게 되었다.

 

1953년 5월의 나고야 회담 이후 고니시가 위조해서 명군측에 보낸 항복문서가 명나라 조정에 도달하자 군신들 사이에서는 ‘명나라가 책봉을 해 준다면 일본은 명의 신하로서 영원히 공물을 바치겠다’ 는 내용을 놓고 일본과의 협상 그 자체에 대한 가부를 놓고 찬반 논쟁이 거듭되었다.

 

바로 이 무렵인 1594년 11월 초 일본의 납관사인 고니시 죠안 일행이 북경에 들어와 12월 13일에 정식으로 항복문서를 접수하였다. 이에, 명나라 조정은 일본군의 철수를 전제조건으로 책봉사를 파견한다는 방침을 정하였다.

 

1592년 1월 30일에 정사 이종성과 부사 양방형이 요양으로 출발하였다. 그러나 일본군측에서는 명의 책봉사가 파견되었다는 확증이 있기 전에는 철군할 수 없다는 주장을 내세움으로써 명군측의 ‘선 철수 후 강화’ 주장과 맞물려 양측의 의견이 일치되지 않았다. 이에, 명군측에서 ‘일본군이 철군 준비를 완료하면 책봉사절이 요양에서 한양으로 출발하고 책봉사가 한성에 도착하면 일본군은 즉시 철수한다’ 는 절충안을 내놓자, 일본군측에서 비로써 이 안에 동의하였다.

 

1595년 3월 하순, 명의 책봉사 일행이 요양을 출발하여 4월 28일에 한성에 도착하였다. 그들은 이로부터 2개월 동안 한성에 머무르면서 일본군의 철수를 촉구하였으나 일본군은 철군 약속을 이행하지 않고 시일을 지연시켰다. 이에, 책봉정사 이종성은 부사 양방형을 부산의 일본군 진영에 보내어 철수를 촉구하도록 하고 자신은 9월 4일에 한양을 출발하여 10월 24일 밀양에 도착하였다.

 

이종성은 1개월 동안 이곳에 머무르다가 11월 22일에 부산으로 가서 일본군에게 철수를 독촉하였으나 일본군은 끝내 철군 약속을 이행하지 않았다. 도리어 일본군측에서는 책봉사를 연금상태에 둔 뒤에 조속히 일본으로 건너 갈 것을 촉구하였다. 그리하여 일본군측과 명군측의 책봉사 사이에는 ‘철군’ 과 ‘도일(渡日)’ 두 가지 안건을 사이에 두고 의견 대립이 계속되었다.

 

그러자 연금상태에 있던 정사 이종성은 ‘도요토미가 책봉사를 인질로 삼아 조선에 재침할 것’ 이라는 소문을 듣고 4월 3일 야음을 타고 일본군 진영을 탈출하여 25일 북경으로 달아나 버렸다. 이에 명나라 조정에서는 5월 초에 부사 양방형을 정사로 삼고 심유경을 부사로 임명하여 강화 교섭 임무를 수행하도록 하였다.

 

1595년 6월 15일 명의 책봉사 일행이 부산을 떠나 일본으로 출발하자 일본군도 그 뒤를 이어 소수 병력만을 남해안 거점에 잔류시키고 대부분의 주력부대들은 일본으로 철수하였다. 이에 앞서 명나라 책봉사 일행은 ‘조선의 통신사를 대동하고 도일하여 강화교섭을 하라’ 는 조정의 명령에 따라 조선 조정에 통신사를 동행시켜 줄 것을 요구하였으나 조선 조정이 이를 거부한 바 있었다.

 

그런데 일본군이 철수하자 조선 조정에서도 명의 입장과 양국 관계를 고려하여 황신과 박홍장을 정,부사로 하는 3백여 명의 통신사를 8월 8일에 일본에 파견하였다. 그러나 조선의 통신사가 일본에 도착하자 도요토미는 ‘일본이 조선의 두 왕자를 보내주었는데도 조선이 그에 따라는 적절한 사례를 하지 않았음’ 과 ‘일본에 세공 및 조빙(朝聘)을 하지 않았음’ 을 트집으로 잡아 접견을 거부함으로써 고의적으로 조선의 통신사 일행에게 모욕을 주었다.

 

1595년 9월 2일, 일본의 오사카성에 당도한 명의 책봉사 일행은 도요토미와 회견하고 명나라 황제의 고명과 유서를 전달하였고 도요토미는 도쿠가와 이에야스 등 7명의 원로 장령들과 글을 아는 중(僧) 승태, 영삼, 영철 등 3인을 불러 명나라의 고칙을 들었다.

 

고니시는 사전에 승태에게 히데요시의 뜻과 어긋나는 부분은 적당히 비껴서 읽으라고 비밀리에 손을 써 두었으나 승태는 곧이곧대로 다 읽어 버렸다. 히데요시는 명나라 황제의 유서 가운데에 ‘그대를 봉하여 일본국왕으로 삼는다’ 는 실속 없는 내용이 들어 있는 것을 제외하고는 그들이 나고야 회담에서 내걸었던 요구조건들이 전혀 수용되지 않았음을 알고 크게 노하였다. 이에 도요토미는 즉각 책봉을 거부하고 명의 책봉사와 조선의 통신사 일행에게 퇴거를 요구하였다. 이와 같이 사태가 악화되자 일본군 내부에서 가토를 비롯한 강경론자들이 조선에 재출병을 주장하고 나섰다.

 

도요토미가 명의 책봉을 거부하고 강경론자들이 조선에 대한 재출병을 거론하는 가운데 명의 책봉사와 조선의 통신사 일행은 9월 9일에 귀국길에 올랐다. 조선의 통신사 황신은 수행 군관을 우선 귀국시켜 일본군의 재침이 확실하다는 것을 조정에 보고하도록 하였다.

 

이에 따라 조선 조정에서는 한강 이남지역의 주민과 물자를 각지의 주요 산성으로 옮겨 청야작전(무기나 물자를 모두 불태워 적이 이용하지 못하게 하는 전술)을 통한 장기적인 항전을 게속할 준비에 들어가는 한편, 명나라에 급사를 파견하여 화의가 결렬된 사실을 통보하였다.

 

그러나 명의 책봉사 일행은 10월 25일 쓰시마에서 ‘책봉에 사은한다’ 는 도요토미의 위조표문을 작성하여 조정에 허위 보고를 함으로써 강화 교섭에 실패한 사실 자체를 은폐하려 하였다. 명나라 조정에서는 국가의 위신을 손상시킨 책봉사 일행에 대한 비판이 고조되는 가운데 조선의 통보에 의하여 화의가 결렬된 사실을 알게 되었으며 강화 교섭 실무자였던 심유경의 기만적 술책이 폭로되었다. 이에 명은 대일 강화 교섭에 관여되었던 인물들을 엄중 처단하고 전쟁에 적극 개입한다는 방침을 결정하였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일본은 1597년 7월에 14만 대군을 동원하여 조선에 침입을 재개함으로써 1592년 4월부터 4년여 동안 추진되어 오던 강화 교섭이 수포로 돌아가고 정유재란이 발발하였다.

 

● 조선군의 붕괴

 

명 · 일 양국간의 강화 교섭이 결렬되자 일본군은 1597년 1월부터 조선에 재침을 감행하여 정유전쟁이 시작되었다. 이때 편성된 일본의 조선 침공군은 육군 115,000여 명, 수군 7,200여 명 이외에 조선에 잔류하고 있던 2만여 명을 포함하여 14만여 명에 달했다.

 

1597년 1월 14일 가토 기요마사가 지휘하는 제1군이 부산의 다대포에 상륙한 후 양산을 거쳐 울산 서생포에 집결하였다. 그 뒤를 이어서 고니시 유키나가의 제2군이 웅천으로 상륙하여 북진할 준비를 서둘렀다. 이와 같이 제1군과 제2군이 거점을 확보한 이후 근 반년이 지난 7월 8일에 이르러 일본군의 후속부대가 경상도 남해안 지역 일대로 상륙했다.

 

1596년 11월 명의 책봉사와 동행했던 통신사 황신은 나고야에서 일본군이 재침을 기도하고 있다는 긴급보고를 조정에 올렸다. 이에 조선 조정은 서둘러서 대책 수립에 들어갔다. 조선 조정은 백성들의 가재도구와 곡식 일체를 거주지 인근의 산성으로 옮겨 일본군이 이용하지 못하도록 청야하도록 계획을 세우고 전국 각도의 수령들에게 긴급명령을 하달하여 실행을 독촉하였다. 이어서 11월 12일에는 명에 사신을 보내어 일본군의 재침기도 사실을 통보하고 남병인 절강병과 수군의 파견 및 군량의 지원을 요청하였다. 그리고 비변사는 12월 초순에 일본군이 도성으로 북진하는 것을 차단하기 위하여 좌방어사 변응성으로 하여금 좌영 속오군(3천 명)과 후영 속오군(2천 명)을 지휘하여 여주→양근→광주→한성을 연하는 남한강 일대의 도섭이 가능한 지역을 방어하도록 하였다.

 

한편 일본군이 동해안으로부터 진입할 경우에 대비하여 강원도 순찰사로 하여금 영동지역의 평행 - 울진 지역을 연하는 선을 차단하도록 조치를 하였으며 경상도 순찰사에게도 경상좌도의 영주→영월 지역을 연하는 선을 차단하여 동해안을 통한 일본군의 진입을 막을 것을 명령하였다.

 

일본군의 주력이 부산에 도착할 무렵인 7월 8일 조선에는 2만여 명의 일본군이 잔류하고 있었다. 각 단위 부대별로 5백~1만 명씩 구분하여 서생포성, 부산포성, 죽도성, 안골포성, 가독도성 등 5개 지역에 분산 주둔하고 있던 그들은 재침군과 합류하여 전라도 지역에 진출할 준비를 갖추었다.

 

1593년 8월 3일 일본군의 총대장인 고바야카와는 공격군을 좌·우 2개 군으로 편성하여 우키다와 모리(毛利秀元)에게 이를 지휘하도록 하고, 다음과 같이 전라도의 수부(首府)인 전주로의 진격을 명령하였다.

 

1. 좌군은 남해안을 따라 고성→사천→하동→구례→남원을 연하는 경로를 거쳐 전주로 진군한다.
2. 우군은 낙동강을 건너 거창→안의→진안을 연하는 경로를 거쳐 전주로 향한다.
3. 수군은 하동에서 상륙하여 좌군과 함께 섬진강을 거쳐 구례로 진군한다.
4. 부산포성, 서생포성, 안골포성, 가덕도성, 죽도성 등에는 수성군이 잔류하여 방어를 한다.

 

일본군 우군의 선두부대인 가토군은 7월 25일에 서생포를 출발, 양산→밀양을 거쳐 창녕으로 진출하여 낙동강을 건너 합천으로 진출하였다. 이 때 죽도성의 나베시마 군이 김해→창원→함안→진주→삼가를 경유하여 합천에서 가토군과 합류했다. 이들은 합천에서 거창으로 진출하여 안의를 거쳐 8월 16일에는 황석산성을 점령하고, 육십령을 넘어 진안으로 들어가 전라도를 침입하였다.

 

명군은 1594년 9월까지 전병력을 요동지방으로 철수시켰다. 그러나 명은 조선조정의 출병 요구에 따라 재출병을 결정하고 1597년 3월에 병부좌시랑 형개를 경략어왜겸리양향겸병부상서(經略禦倭兼理糧餉兼兵部尙書), 산동우참정 양호를 경리조선군무(經理朝鮮軍務)로 임명하여 총병력 6만 명 규모의 동정군을 편성했다.

 

이와 같이 정유재란에 대한 명의 개입이 결정되자 1597년 5월 8일에 부총병 양원이 기병 2천여 기를 이끌고 한성을 거쳐 남원으로 진격한 데 이어서 6월 14일에는 부총병 오유충의 남병 4천 명이 한성으로 들어왔다.

 

이에 앞서 5월 18일에 압록강으로 출발한 제독 마귀는 다음과 같은 4개의 선견부대를 조선에 진출시켜 지정된 지역에 주둔하면서 작전에 대비하도록 하였다.

 

그 후 7월 3일에 한성에 도착한 제독 마귀는 이곳에 본영을 설치하고 한성 이남지역의 명군을 총괄 지휘했다. 그 뒤를 이어서 9월 19일에는 명군의 최후미 부대인 부총병 이여매 군 1만 5천 명이 한성에 진입했다.

 

● 이순신의 투옥과 수군 전멸

 

칠천량 해전은 임진왜란 전쟁사를 통틀어서 가장 참혹하고 또 어이없는 패배로 기록될 만큼 그 충격의 여파는 조선 전체를 술렁거리게 만든 해전이다. 이 한 번의 패전으로 인해 나라가 휘청거릴 정도였으니 새삼 이 전투를 묘사한다는 것이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조선 수군을 이끌고 전승의 기록을 이어가면서 일본군의 입장에서는 두려움의 대상으로 떠오른 전라좌수사 이순신은 그 공을 인정받아 전라, 경상, 충청 등의 삼도 수군을 총괄지휘하는 통제사의 직위에 올랐다. 통제사는 임진왜란 기간 중에 새로 신설된 직위로 이른바 수군의 총사령관을 의미한다.

 

개전이후 이순신의 조선수군에게 연패한 일본군은 서해로의 진출이 막힌 것이 전쟁의 가장 큰 패착으로 인식하였다. 해서 일본이 전쟁을 승리로 이끌기 위해서는 최우선으로 이순신을 제거해야 한다는 의견이 모아졌다. 결국 고니시 유키나가의 충복이던 이중간첩 요시라는 일본군의 제2선봉장 가토 기요마사가 대병을 이끌고 조선으로 건너올 것이니 이를 잡으라는 정보를 흘렸고 조선 조정은 이순신에게 바다에서 격파하라는 명을 내렸다. 하지만 삼도수군통제사가 된 이순신은 적에게서 나온 정보를 신뢰할 수 없고, 또한 일본군이 남해안 곳곳에 왜성을 쌓고 주둔해 있는 마당에 섣불리 부산으로 진격하였다가 앞뒤로 협공을 받으면 크게 위태로워진다는 이유를 들어 출진하지 않았다. 이것이 오늘날 우리에게 알려진 정설이다. 하지만 이 부분에 대해서는 지금도 논란이 끊이지 않는다.

 

요시라의 말대로 가등청정이 조선출병을 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러한 정황이 조선에 전달되고 조정에서 이순신에게 명을 내렸을 때에는 이미 가토가 조선 상륙을 마친 이후였다. 또한 이순신이 조정의 출동명령에 응하였지만 이미 가토는 상륙한 이후라 별다른 소득없이 다시 돌아왔다는 기록도 있는 것으로 보아 이때의 정확한 정황은 지금으로선 그저 모든 것이 수수께끼일 따름이다.

 

결국 통제사 이순신은 명을 따르지 않고 임금을 기만했다는 죄명을 받아 도성으로 압송된 후, 투옥되었다. 이것이 바로 그 유명한 이순신 장군의 백의종군 사건이다. 처음 육군이 연패하여 의주까지 쫓겨갔던 선조는 첫 승전보를 올려 조선 전체에 결사항전의 사기를 북돋아준 이순신에게 통제사의 직위까지 내리면서 신뢰를 보내는 듯 하였다. 하지만 민심의 향방이 그에게 쏠리자 선조는 이순신을 자신의 권력을 위협하는 세력으로 인식하기 시작했고 어떻게 해서든 그를 죽일 결심을 하게 된다. 이런 정황은 당시의 실록에 기록된 선조의 언행에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아무튼 이순신이 사라지고 나서 그 자리를 꿰차고 앉은 것은 원균이었다.

 

원균은 스스로 일본의 주둔지인 부산을 공격하여 단숨에 왜적을 섬멸하겠다는 장계를 조정에 올렸고 도원수가 된 권율 역시 이순신이 싸움을 주저하여 나아가지 않는다는 탄핵을 함에 따라 이순신은 통제사 자리에서 쫓겨났다. 결론적으로 이는 조선과 조선 수군에 감당하기 어려운 위기를 초래하게 된다.

 

이순신을 대신하여 삼도수군통제사가 된 원균은 조정으로부터 계속되는 부산 공략에 대한 압박을 받아 출동을 결심하였다.

 

6월 18일경 첫 출동을 하여 19일 안골포와 가덕포에서 소규모 해전을 치르며 작전을 계속 수행하다가 정확한 날짜는 알 수 없지만 잠시 회항하였다. 하지만 다시 선조와 조정으로부터 출동 압력이 떨어지자 7월 5일 경 자신은 남고 일부 함선만을 출동시켰다. 이때에도 일본함선과 접전이 있었지만 일본수군이 적극적인 해전을 회피하여 소규모 전투로 끝이 났다. 이후 풍랑으로 인해 함대의 일부 전선들이 표류하는 사태가 발생하여 5척은 두모포에 다른 7척은 서생포에 표류하였다. 이 중 서생포에 표착한 조선 수군들은 상륙을 시도하다 일본군의 기습을 받아 전멸당하였다.

 

금방이라도 부산을 절단낼 것 같던 원균이 통제사가 된 이후로 이렇다할 전공은커녕 소극적인 자세로 일관하자 도원수 권율은 그래도 명색이 삼도수군의 수장인 원균에게 곤장을 때리기까지 하였다.

 

출전명령의 압박에다가 엉덩이 찜질까지 당한 원균은 결국 7월 14일 전함대를 이끌고 출전하게 되었다. 조선 함대는 부산에 도착한 후 일본 함대와 해전을 시도하였으나 일본수군은 조선 수군의 수가 많은 것을 꺼려하여 해전을 회피하였다. 당시의 일본 수군은 조선 수군과 만나면 일단 도망부터 치고 볼 정도로 조선 수군 공포증에 걸려 있었다. 내노라하는 일본의 수군장수들이 모두 이순신에게 절단난 까닭이다. 하지만 공포의 대상이었던 이순신이 통제사 자리에서 물러나 도성으로 압송되었다는 소식에 따라 일본군은 조선 수군의 힘을 빼놓을 작전을 세웠고 나타났다가 다시 사라지며 조선 수군을 기만하는 전술로 일관한다.

 

연일 강행되는 항해는 조선 수군의 격군들을 급격히 지치게 만들었다. 풍랑에 이리저리 채이고 일본군의 유인술에 예민해져 긴장감이 극도로 쌓인 것이다. 더구나 판옥선의 정원은 원래 164명이었나 이 당시에는 정원에 훨씬 못 미치는 90여 명으로 줄어 있었기 때문에 체력 소모는 더욱 극심했다.

 

원균은 결국 함대를 수습하여 가덕도에 정박, 휴식을 취하도록 하였다. 이때 일부 병사들이 물을 구하기 위해 육지로 올랐으나 숲속에 매복하고 있던 일본군의 습격으로 400여 명의 사상자만 남긴 채 다시 황급히 후퇴하여 칠천량 부근까지 이동한다.

 

칠천량은 임란 초기부터 조선 수군이 자주 정박하던 곳으로 바람과 파도를 피할 수 있는 곳이었다. 하지만 이곳이 바로 조선 수군의 무덤이 될 줄을 누가 알았겠는가. 자고로 군대라는 집단은 최고 지휘관이 바뀌면 분위기가 어수선해진다. 그것이 전시상황이라면 더욱 그렇다. 승리에 대한 확고한 믿음을 주던 지휘관이 잘못된 명으로 물러나면서 조선 수군의 사기는 떨어지고 군기는 해이해졌다.

 

이때 일본의 쾌속선 5, 6척이 기습해와 조선 전함 4척에 불을 지르고 도주하는 일이 발생했다. 일본 수군은 조선 함대의 이동상황이 파악되자 그날 밤으로 대규모 함대를 동원하여 칠천량 주변을 포위했는데 이런 사실을 알 리가 없는 원균은 제대로 된 탐망선 한 척 띄우지 않았다고 하니 죽기로 작정을 하지 않고서야 적진 한복판에 있으면서도 이렇게 무대책으로 일관할 수는 없는 일이다.

 

16일 새벽 4시 경에 조선 수군의 최후가 오고야 말았다. 이미 옥포해전에서 이순신에게 참패했던 도도 다카도라와 한산도에서 역시 얻어터진 와키자카 야스하루, 가토 요시아키 등이 그동안 이순신에게 당한 연패의 치욕을 애꿎은 원균에게 모조리 앙갚음 하고야 만다. 사방으로 포위된 야간 기습의 결과는 세계전쟁사를 살펴보더라도 전멸 밖에는 길이 없다.

 

조선 수군 함대는 두 방향으로 나뉘어져 탈출을 시도하여, 하나는 진해만 쪽으로 향했고 다른 하나는 거제도 해안을 타고 한산도를 향해 나아갔다. 진해만 쪽으로 향한 함대 일부는 일본 수군의 추격을 받아 모두 격침되었고, 일부는 배를 버리고 상륙하여 도주한 것으로 추정된다. 원균은 칠천량을 겨우 빠져 나와 거제도 해안으로 내려갔다. 이곳에서 배설이 지휘하는 전선들은 견내량을 거쳐 한산도로 먼저 탈출에 성공하였는데 이 배들이 훗날 통제사로 복귀한 이순신 장군에게 주어진 명량대첩의 그 유명한 12척 함대로 남아 나라를 구하는 최후의 보루가 된다.

 

임진왜란에서 일본이 패한 결정적인 원인이 이순신에게 서해를 차단당하고 곡창지인 전라도를 차지하지 못해 보급에 어려움을 겪었기 때문이었다. 만약 이때에 조선 함대가 모두 전멸되었다면 서해를 내준 조선의 운명은 그 누구도 장담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그나마 12척이라도 도주에 성공한 것은 참으로 하늘의 보살핌이다.

 

오밤중에 정신차릴 겨를도 없이 처참하게 도륙된 원균의 함대는 고성 적원포까지 물러난 후 배를 육지에 대고 탈출을 시도하였지만 원균과 이하 대부분의 군사들은 결국 매복하고 있던 일본군에 의해 모두 전멸되었다.

 

전투가 벌어지자 지휘관, 병사 가릴 것도 없이 대부분 우왕좌왕하며 제대로 된 대처를 하지 못한 채 도망치기에 급급했고 그로 인해 체계적인 지휘나 반격이 불가능했던 것이 칠천량 해전의 패배 원인이라고 할 수 있다. 칠천량 해전에 참가했던 주요 지휘관들은 대부분 전사한 것으로 알려졌으나 얼마간은 육지로 상륙하여 숨어들었다.

 

이렇게 칠천량 해전은 조선 수군의 존재 자체를 지울 만큼 참혹한 결과를 낳았고 사실상 이순신이 키워놓은 122척의 조선 함대는 달아난 12척을 제외하고는 거북선을 포함하여 모두 수장되었다. 이로서 조선 수군은 사실상 전멸되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