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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일랜드 삼형제

구름위 2013. 4. 16. 13:13

 

아일랜드의 역사를 대표하는 삼형제가 있었다.

첫째는 가문을 중시하는 합리적인 성격으로 리더쉽이 강했고

둘째는 명분을 중시하는 진보적인 성격에 신념이 강한 편이었다.

그리고 셋째는 다혈질이면서도 둘째 형을 롤모델로 삼고 있었다.

 

이들 삼형제는 12세기부터 700년간 영국의 지배를 받아왔다.

초기 400년 동안은 대체로 무난하게 지내왔지만 16세기부터 강하게 저항하기 시작했다.

그 원인은 영국의 성공회 개혁으로 인한 종교 탄압이었다.

 

당시 영국은 로마 가톨릭과 결별한 뒤 성공회로 탈바꿈하였다.

그리고 이것을 삼형제들에게 강요하면서 탄압과 차별정책을 폈다.

당연히 삼형제는 이에 반발하여 크고 작은 반란으로 대응했다.

 

그러자 영국은 17세기에 얼스터(장로교)라는 못난 신부를 아일랜드 북부에 보냈다.

당시 그곳에선 막내가 농사를 짓고 살고 있었는데 이들은 강제로 혼인을 맺었다.

이때부터 북부는 가톨릭 신자와 장로교 신자의 갈등으로 점철되었다.

 

영국의 종교 탄압은 집요했다.

성공회로 개종하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아예 공직 진출까지 막아버렸다.

그래도 아일랜드의 저항 정신은 강했다. 국민의 85% 이상이 가톨릭을 고수했다.

 

영국은 고민끝에 1801년 영국과 아일랜드의 합병을 선언했다.

이때부터 아일랜드인들은 독립을 위한 격렬한 투쟁에 돌입했다.

당황한 영국은 1914년 자치법을 제시하면서 한 발 물러섰지만 그 열기는 막지 못했다.

 

마침내 1916년 4월, 삼형제는 부활절 봉기를 통해 독립전쟁의 신호탄을 쏘아 올렸다.

이 봉기는 더블린을 중심으로 진행되었으며 영군군에 의해 강경진압되었다.

이 봉기를 주도한 신페인당은 이때부터 대중적인 지지를 받아 아일랜드의 다수당이 되었다. 

 

1918년 총선에서 다수당이 된 신페인은 아일랜드 공화국의 독립을 선포하였다.

이에 영국은 진압군을 투입하여 민간인에게까지 무차별적인 보복을 가했다.

이것은 오히려 아일랜드인의 독립의지를 더욱 높여주었으며 대규모 시위가 잇달았다.

삼형제는 이러한 지지를 바탕으로 전쟁의 파이를 더욱 키워갔다.

 

1921년, 영국은 아일랜드를 더 이상 힘으로 누를 수 없다고 판단하였다.

양측이 휴전에 들어갔고 영국은 '아일랜드 자유국'이라는 떡밥을 던졌다.

이것은 북아일랜드를 제외한 나머지를 자유국으로 인정하고 영연방으로 묶는 전략이었다.

영국으로서는 북아일랜드에 시집보낸 딸의 안전을 확보할 필요가 있었다.

 

영국의 떡밥을 받아든 삼형제는 이 문제로 다투기 시작했다.

큰 형은 이 조약이 만족스럽지는 못하더라도 가문을 위해서는 어쩔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러자 둘째는 어떠한 일이 있어도 막내와 합쳐야 한다며 회의장을 나가버렸다.

결국 영국의 떡밥으로 인해 독립운동 세력은 분열되었다.

 

큰 형은 이 기회가 언제 또 올지 모른다며 국민의 지지를 이끌어냈고

이 과정에서 소수로 전락한 둘째와 셋째는 큰 형에게 총부리를 겨눴다.

이로써 삼형제는 비극적인 내전에 돌입했다.

 

첫째는 이제 완전히 딴 사람이 되어버렸다.

둘째를 아예 빨갱이로 몰아부치며 대대적인 소탕을 벌인 것이다.

이 전략은 그대로 적중하여 둘째는 많은 지지자들을 잃고 처형되었다.

 

1921년, 내전의 결과 아일랜드는 남북으로 분단되었다.

큰 형은 막내를 내버려두고 아일랜드 자유국으로 출범했다.

홀로 방치된 막내는 얼스터와 각방을 쓴 채 영국을 상대로 무장투쟁을 전개했다.

 

이후 1937년 아일랜드는 다시 헌법을 제정하였다.

이 헌법에서 큰 형은 아일랜드 공화국을 선포하며 영연방에서 탈퇴하였다.

그래도 여전히 막내는 영국의 그늘에서 신음하고 있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아일랜드는 중립국을 선언하였다.

그러나 1만여 명의 의용군이 영군군에 지원하였으며

정부 역시 연합군에 대해 비공식적으로 지원하였다.

 

이들 삼형제가 아일랜드 역사에 남긴 교훈은 이랬다.

큰 형은 현실적인 선택을 하였으나 분단을 영원히 고착화시켰고,

둘째는 그래도 아일랜드 통일을 위해 뭔가를 시도했다는 것에 의의를 두며,

셋째는 1990년까지의 저항으로 이 문제를 세계에 알리는데 기여했다고 평하고 싶다.

 

결론은 이 독립요구가 좀 더 늦춰졌더라면 분단까지는 가지 않았을 것이라는 것이다.

2차 대전이후 영국은 여러 사정에 의해 식민통치에 대해 부담을 갖고 있었고

또 이 시기는 자유라는 가치가 기독교적인 이해를 초월하는 시점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것은 가정일 뿐, 당시 상황이 어떻게 변했을지는 아무도 모른다.

 

[출처] http://enc.daum.net/dic100/contents.do?query1=10XX29993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