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나이팅게일
진짜 나이팅게일은 따로 있었다?
크림전쟁 이후 150년 동안 백의의 천사로 알려진 나이팅게일.
하지만 그 보다 더욱 빛나는 존재가 있었으니 그녀의 이름은 바로 메리 시콜.
하지만 그녀는 흑인이었다. 단지 그 이유로 역사속에 묻히고 말았던 그녀.
그런 그녀가 다시 150년 만에 부활했다.
2000년, 영국의 한 액자가게에서 우연히 발견된 초상화.
거기엔 60대 흑인 여성의 가슴에 영국, 프랑스, 터키에서 수여한 훈장들이 그려져 있었다.
이 여인이 바로 진정한 백의의 천사. 검은 나이팅게일인 것이다.
메리 시콜은 크림전쟁이 끝난 후 영국군으로부터 진정한 어머니로 추앙받았다.
당시 군인들에게는 나이팅게일보다 메리 시콜이 더 유명했고 더 많은 사랑을 받고 있었다.
하지만 당시 영국 정부는 나이팅게일을 띄우기 위해 그녀를 철저히 외면하였고
그 이유로 인해 메리 시콜은 점점 잊혀지고 말았다.
지금으로 보면 김연아를 빼고 아사다 마오를 피겨여왕이라 부르는 꼴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나이팅게일이 거짓으로 미화되었다는 것은 아니다.
다만, 메리 시콜에 비하면 나이팅게일은 한 참 뒤떨어지는 2인자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병사들의 어머니로 불렸던 메리 시콜은 과연 어떤 여성이었는가.
메리 시콜은 1805년 자메이카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영국인이었고 어머니는 자메이카 출신의 흑인이었다.
때문에 흑인에 더 가까웠던 혼혈인(뮬라토)은 모두 노예로 취급되던 시대였다.
당시 그녀의 어머니는 약초에 대한 해박한 지식으로 마을 사람들을 치료해주곤 했는데,
그 모습을 어릴 때부터 지켜보았던 메리 역시 어머니의 성품과 의술을 그대로 물려받았다.
이후 성인이 된 메리는 시콜이라는 백인 남자와 결혼하였지만
남편이 일찍 죽는 바람에 젊은 나이에 미망인이 되고 말았다.
이후 메리는 독신을 고집하며 의학지식을 쌓는데 매진하였다.
그 결과 마을 사람들은 다른 의사들 보다 메리를 더 신뢰하게 되었으며,
이 사실을 알게된 자메이카 당국은 그녀에게 군 병원을 운영해 달라고 요청하였다.
그후 메리는 정부의 요청대로 군 병원에서 활동하게 되었다.
그러던 1853년 크림전쟁이 발발했다. 그녀의 나이 48세였다.
당시 영국은 부상병이 속출하자 세계 각국에 간호사를 모집하는 광고를 냈는데,
이 광고를 본 메리는 전쟁터에서 다친 병사들을 간호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리고 그녀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영국으로 건너갔다.
그러나 정작 간호단에서는 빈자리가 없다는 이유로 그녀를 거절하였다.
"왜 안되는거죠? 이렇게 많은 병사들이 죽어가고 있잖아요!"
사실 자리가 없다는 것은 거짓말이었다. 오히려 일손은 턱없이 부족했다.
그럼에도 영국의 간호단에서 메리 시콜을 받아들이지 않은 이유는 오직 하나.
그녀가 식민지 출신의 흑인이라는데에 있었다.
그래도 메리 시콜은 포기하지 않고 직접 크림반도로 달려갔다.
그리고 후방에 차려진 간호단을 직접 찾아갔으나 또 퇴짜를 맞게 된다.
"이렇게 부상병이 많은 전쟁터에서도 인종차별이 존재하나요?"
메리 시콜은 포기를 모르는 여자였다.
그녀는 얼마 후 다들 가기를 꺼려하는 최전방에 자비를 들여 치료소를 차렸다.
그리고 힘든 기색 하나 없이 부상자를 치료하며 전쟁터를 누볐다.
하지만 열악한 환경속에서 치료약은 턱없이 부족했다.
그러자 그녀는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지식을 동원하여 약초를 구하기 시작했고
결국 자신이 개발한 약초요법으로 부상병과 콜레라를 치료하기에 이르렀다.
이렇게 치료된 병사들은 나이팅게일의 야전병원으로 보내졌다.
그녀의 활약은 이뿐만이 아니었다.
그녀는 사비를 털어 음식을 마련하여 병사들의 건강을 돌보았고
이러한 헌신적인 모습은 많은 병사들에게 감동을 주었다.
그녀의 다정한 보살핌이 전쟁으로 지친 병사들의 마음까지 어루만져 주었던 것.
그리고 그녀는 병사들이 홀로 죽어가는 현장을 돌아다니며
가족 대신 병사들의 마지막 순간을 기도하며 지켜주었다.
이에 당시 병사들은 그녀를 어머니라 불렀다.
그러던 1856년 드디어 전쟁이 끝났다.
그리고 얼마 후 사람들 사이에 떠도는 어느 간호사 이야기.
사람들은 그녀를 추앙하며 백의의 천사라는 칭호를 붙여 주었다.
그 주인공은 바로 메리 시콜이 아닌, 나이팅게일이었다.
나이팅게일은 매일 병사들이 잠든 막사에 등불을 들고 다녔다.
그래서 당시의 병사들은 그녀를 가리켜 '등불을 든 여인'이라 불렀으며,
열악한 야전병원을 개선하기 위해 군과의 마찰도 불사한 '혁명가'라고도 일컫었다.
그리고 당시 나이팅게일이 독보적인 존재로 알려지게 된 이유는 따로 있었다.
크림 전쟁 이전까지 간호사는 불결하고 잔인한 이미지로 인식되고 있었다.
그래서 개혁과 도덕주의를 표방한 영국이 나이팅게일을 통해 간호사의 이미지를 바꾸려고 했던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크림전쟁에 참전한 병사들과의 뜻과는 달리 현실은 메리 시콜을 외면했다.
그러자 병사들이 메리 시콜도 나이팅게일과 함께 인정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럼에도 연일 화제에 오르고 있는 사람은 여전히 나이팅게일이었다.
그래도 전쟁에 참여했던 병사들은 달랐다.
종전 후 그녀의 집을 매일 찾아가 노후를 돌보며 감사의 마음을 전했으며,
그녀의 존재를 알리기 위해 연합국들을 찾아가 전쟁터에서의 업적을 적극적으로 알렸다.
마침내 영국, 프랑스, 터키는 그녀를 초청하여 훈장을 수여하기에 이른다.
그래도 그녀의 삶은 전혀 나아지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그녀는 남는 재산을 팔아 가난한 사람들을 치료해주고 있었다.
그러던 1881년, 극심한 가난 속에서도 타인의 병을 치료해주던 메리 시콜은
정작 자신의 몸은 돌보지 못한 채 병마에 시달리다가 76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