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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시황 지금의 억만장자보다 부럽다

구름위 2013. 4. 2. 08:21

유럽 대륙의 면적은, 490여만 제곱킬로미터라고 한다.

이 넓이의 땅에, 모두 마흔 개가 넘는 국가가 자리잡고 있다.

 

반면, 그에 비해 중국 대륙의 면적은 960여만 제곱킬로미터다.

유럽 대륙의 두배 가까이 되는 넓이지만, 이 대륙을 차지하고 있는 국가는 중국 단 하나에 불과하다.

 

이렇듯 유럽 대륙의 두배 가까운 넓은 영토를 차지하고 있는 중국은, 세계에서 네 번째로 큰 나라다.

 

하지만 가장 큰 나라와 그 다음으로 큰 나라인 러시아와 캐나다는 사람이 거의 살지 않는 추운 지역까지 포함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런 업적을 이룬, 중국을 이렇게 넓은 면적을 가진 국가로 만든 인물이 누구인가 궁금해진다.

오늘은, 처음으로 중국 대륙을 하나의 깃발 아래 모은 인물인 진시황제의 묘가 발견된 날이다.

 

오늘의 주인공, 진시황제.

유럽의 두배 가까이 되는 넓이의 중국 대륙을, 최초로 하나의 국가로 통일한 인물이다.

 

 

본명이 영정(嬴政)인 진시황제(秦始皇帝, 기원전 259년 ~ 기원전 210년)는 진나라의 제31대 왕이며, 중국 최초의 황제다.

 

분열된 중국을 통일하고 황제 제도와 군현제의 기틀을 마련해 이후 2천년 동안 지속된 중국 제국의 기초를 다졌다.

 

 

영정은 조나라에 인질로 잡혀온 진나라 왕족 영자초와 부인 조희의 아들로 태어났다.

원래 조희는 조나라의 거상 여불위의 애첩이었는데 여불위가 조희를 영자초에게 바쳤고, 장양왕은 그녀를 아내로 삼은 것이다.

 

하지만 원래 조희는 여불위의 아들을 임신하고 있었고, 여불위가 이를 숨긴 채 조희를 영자초에게 바쳤다는 설도 있다.

 

오늘날까지도 진위의 여부는 알 수 없지만 영정은 영자초의 아들로 태어난 것으로 되어 있고, 진 효문왕이 즉위하는 기원전 250년까지 조나라에서 자랐다.

 

효문왕은 조희와 여불위, 영정과 함께 진으로 온 영자초를 태자로 임명했다.

하지만 효문왕은 즉위 1년 만에 서거했고, 영자초가 뒤를 이어 즉위했다.

 

하지만 장양왕이라는 이름으로 역사에 남은 영자초 역시 진을 3년밖에 다스리지 못했고, 그 뒤를 이은 것이 당시 14세였던 영정이었다.

 

 

이렇게 영정은 진나라 왕이 됐지만,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장양왕 때 승상이 된 여불위가 섭정이 되어 정치를 담당했다.

 

영정의 어머니인 조씨와도 친밀한 사이였던 여불위는 사실상의 실권자가 됐고, 자신의 부하인 노애를 조씨에게 보내 아들을 낳게까지 했다.

 

영정이 진나라 왕이 되고 8년 뒤인 기원전 238년, 노애가 반란을 일으킨다.

영정은 노애의 반란을 제압하고 능지처참에 처한 뒤, 어머니 조씨를 감금하고 둘 사이의 아들을 살해했다.

 

여불위 역시 영정의 눈에서 벗어나지 못해 승상의 자리에서 파직되고, 자결을 강요받아 일생을 마쳤다.

 

 

실질적으로도 왕이 된 영정은, 훗날 승상이 되는 이사의 주장을 받아들여 법가 사상을 바탕으로 중앙집권적인 정부와 강력한 군사조직을 발전시켜 간다.

 

이사의 글씨체가 새겨진 비석.

이사는 군현제를 실시할 것을 제안하고 운하 공사에 노력을 쏟는 등

훗날의 시황제의 오른팔로 크게 활약했다.

 

 

다시 8년이 지난 기원전 230년, 영정은 중국 통일에의 걸음을 내딛기 시작한다.

진은 가장 세력이 약했던 한을 시작으로 228년에 조, 225년에 위를 멸망시키고 223년에는 진 다음으로 강력한 국가였던 초를 멸망시켰다.

이듬해에는 연, 그리고 다음 해인 기원전 221년에는 마지막 남은 국가였던 제나라까지 진군 앞에 무너지고 말았다.

 

이것으로 중국은 처음으로 통일제국의 지배 하에 들어가게 됐는데, 이처럼 진이 중국을 통일할 수 있었던 요인으로는 부국강병책 외에도 첩자를 적절히 활용한 점, 재능 있는 장군들을 많이 등용한 점, 지리적으로 서북쪽에 위치해 북방 민족의 기마전법과 철제무기 등을 전수받은 점 등을 들 수 있다.

 

전국시대 초반인 기원전 350년의 중국.

여러 가지 색이 뒤범벅되어 있어, 그만큼 중국 대륙이 혼란스러웠음을 알 수 있다.

중국 서북부를 차지한 진은 분홍색으로 표시되어 있다.

 

 

전 중국 대륙을 통일한 영정은, 왕이라는 칭호가 스스로에게 맞지 않는다고 생각하게 됐다.

이에 중국의 전설적인 제왕들인 삼황과 오제에게서 한 글자씩 따온 ‘황제’ 라는 칭호를 새로 만들고, 스스로 시황제라고 칭했다.

 

또 시황제는 자신의 뒤를 잇는 2대, 3대 황제들이 계속 등장할 것이며, 진 제국은 영원히 지속될 것이라고 장담했다.

 

 

시황제는 진 제국이 영원히 지속될 것이라는 것을 말만으로 끝내지 않기 위해, 여러 개혁들을 추진한다.

 

가장 먼저 강력한 중앙집권정책을 추진하기 위해 승상 이사의 제안을 받아들여 봉건제를 폐지하고, 전국을 지방에서 파견된 관리들이 다스리는 군과 현으로 나누는 군현제를 실시했다.

 

또 진의 수도 함양을 대대적으로 증건해, 전국의 부호들을 강제로 이주시키는 한편 민간의 무기소지를 금지해 반란을 미리 방지했다.

 

그 밖에도 도량형을 비롯해 중국 각지의 화폐와 문자, 법률을 통일했고, 전국적인 도로망과 운하망을 건설했다.

 

진의 화폐인 반량전.

반량(半兩)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시황제는 중국 대륙 전체의 화폐와 도량형을 하나로 통일, 중국 전역에 하나의 경제권이 형성되게 했다.

 

 

모든 결재사항을 시황제 자신이 직접 관리했을 정도의 적극성은, 진의 대외정책에도 반영됐다.

 

전통적으로 중국을 위협해 온 북방의 흉노족을 격파하고, 내몽고 지역의 일부를 비롯해 황하 이남의 영토를 수복한 것이 첫 번째 업적이다.

또 흉노의 침입에 대비해 춘추전국시대에 건축됐던 성벽을 대대적으로 개축, 만리장성을 쌓았다.

 

진군은 남쪽에까지 파견되어 베트남 북부와 하이난 섬까지 정복했고, 이곳에는 네 개의 군이 신설됐다.

 

시황제의 업적 가운데 가장 유명한 것 가운데 하나인 만리장성.

달에서도 보인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큰 건축물이지만, 실제로는 보이지 않는다고는 적지 않겠다.

 

 

하지만 시황제는 만리장성을 쌓는 데 150만 명의 인부를 강제동원했고, 그 가운데 수많은 인부들이 목숨을 잃었다.

 

또 진의 수도 함양 근교에는 거대한 아방궁을 쌓게 했고, 70만 명의 인부를 동원해 함양의 여산 전체에 자신의 묘를 건설하게 했다.

 

이렇게 대규모 토목공사가 연달아 일어나면서, 진의 재정은 서서히 바닥을 드러내게 됐다.

 

한편, 시황제는 법을 몹시 가혹하게 적용하기도 했다.

한 사람이 죄를 지으면 친족 전체를 몰살하고, 한 가구가 법을 어기면 그 마을의 다른 가구 전체에게 같은 형벌을 적용한 것이다.

 

대규모 토목공사와 가혹한 법치로, 국민들의 고통은 클 수밖에 없었다.

 

청나라 때 그려진 아방궁도.

아방궁의 규모에는 여러 설이 있지만, 동서 약 700m, 남북 약 120m에 이르는 2층 건물로

1만 명을 수용할 수 있었다고 한다.

시황제의 생전에는 완성되지 않아, 2대 황제에 의해 완공됐다.

아방궁은 기원전 207년에 항우가 진나라를 멸망시켰을 때 불태워졌는데,

불길이 3개월 동안이나 꺼지지 않고 계속되었다고 한다.

 

 

한편, 시황제는 자신이 중국을 통일했다는 것을 널리 과시하고 지방의 정치조직을 감독하기 위해 다섯 차례에 걸쳐 중국 각지를 순행하며 송덕비를 세웠다.

 

하지만 시황제를 살해하려는 사람들도 많았고, 이에 시황제는 수레를 다섯 대 준비하고 자신은 그 가운데 하나에 탔다고 한다.

 

시황제의 1차 순행 경로.

이 경로가 보여주듯, 시황제는 중국 대륙 각지를 다섯 차례나 순행했다.

 

 

시황제가 전국을 순행한 것은, 마술과 연금술에 대한 관심 때문이기도 했다.

자신을 불로장생하게 해 주리라고 생각했던 마술사와 연금술사를 찾아다닌 것이다.

 

몇 차례의 순행으로도 불로장생약을 찾지 못하자, 시황제는 조정으로 주술사들을 불러들이기도 했다.

 

유학자들은 시황제의 행동에 반발하며 주술사들을 사기꾼이라고 비난했는데, 시황제의 대답은 그들 가운데 460여 명의 처형이었다.

 

봉건 체제로의 복귀를 주장하는 유학자들과 시황제는 이후로도 끊임없는 충돌을 일으켰고, 그 충돌은 기원전 213년에 절정에 달했다.

 

승상 이사의 제안을 받아들인 시황제가 의학, 점술, 농경에 관한 책과 진의 역사책, 황실도서관에 있던 책을 제외한 모든 서적을 불사르고 유학자들을 생매장한 것이다.

 

이것이, 진시황에게 폭군이라는 이름을 가져다 준 분서갱유 사건이다.

 

황태자 부소는 분서갱유에 반대하며 시황제에게 간언했지만, 시황제는 부소를 북쪽 변경으로 보내버리고 말았다.

 

 

기원전 210년, 시황제는 다섯 번째 순행에 나섰다.

이 순행에는 승상 이사, 환관 조고, 막내아들 호해가 동행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 순행은, 시황제의 마지막 순행이 된다.

같은 해에 50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것이다.

 

 

시황제는 자신의 옥새를 북쪽 변경에 가 있는 황태자 부소에게 전하고, 그에게 자신의 장례를 주관하게 하라는 유언을 남겼다.

 

그의 시신은 우주의 상징적인 형태를 본떠 만들어진 거대한 능묘에 묻혔다.

 

 

1974년 3월 29일, 시황제의 능묘는 우물 공사 도중에 우연히 발견됐다.

이것이, 진시황릉이다.

 

진시황릉은 발굴 초기에 진시황을 호위하기 위한 군대라고 추정되는 실물 크기의 흙인형인 병마용이 6000점 이상 발견됐고, 오늘날까지도 발굴이 계속되고 있다.

 

진시황릉 병마용의 일부.

6천 점이 넘는 병마용의 얼굴은, 모두 다르게 생겼다.

병마용이 만들어질 당시에는 모두 채색되어 있었지만,

발굴 과정에서 햇빛에 노출되자 금세 색이 바랬다고 한다.

병마용은 하나하나가 모두 훌륭한 예술품으로 평가되고 있으며,

진의 군사 편제, 갑옷, 무기 등의 연구에도 구체적인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

 

 

시황제의 유언은, 완벽하게 지켜지지 않았다.

시황제와 동행했던 이사와 조고가 시황제의 유서를 조작, 황태자 부소에게 자결을 명한 것이다.

 

시황제가 세상을 떠난 이듬해인 기원전 209년, 시황제의 마지막 순행에 동행했던 황자 호해는 진의 2대 황제로 즉위한다.

 

호해는 이사와 조고에게 정치를 맡긴 채 사치에 빠졌고, 부소 등 대부분의 황족을 몰살한 조고는 이사를 살해하고 승상 자리에 올랐다.

 

하지만 시황제라는 강력한 지배자를 잃은 진은 각지에서 옛 봉건 세력들이 반란을 일으키는 것을 막을 수 없었고, 조고는 반란의 책임을 물어 호해를 살해했지만 호해를 이어 황제가 된 자영에게 처형됐다.

 

 

이후 진승과 오광의 난이 일어나고 유방, 항우 등이 반란을 일으키면서, 진은 멸망했다.

이때가 기원전 206년으로, 일찍이 시황제가 영원히 지속되리라고 선언했던 제국이 20년도 채 버티지 못하고 무너진 것이다.

 

시황제가 세상을 떠난 해인 210년의 진.

시황제는 스스로를 황제라고 부르면서 자신의 후손들이 계속 황제가 되며

진이 천년만년 이어질 것이라고 자신했지만,

건국자를 잃어버린 진은 그후 불과 4년밖에 버티지 못했다.

 

 

시황제에 대해 남아있는 대부분의 기록은, 진을 계승한 한나라 시대의 것이다.

한은 법가가 아닌 유가를 국가의 이념으로 삼았기에 법가를 중시한 진을 비판하려는 경향이 있었고, 그가 장양왕이 아닌 여불위의 아들이라는 이야기도 한 때에 조작된 것으로 보인다.

 

또 그가 지나치게 잔인했다는 평가 역시 한의 역사가들이 내린 평가이며, 이들의 영향을 받은 이후의 대다수의 역사가들도 시황제를 악하고 비도덕적이며 미신적인 인물이라고 평가했다.

 

하지만 근대에 이르러, 시황제는 그가 실시했던 행정구조 덕분에 재평가받고 있다.

비록 한을 비롯한 이후의 국가들은 시황제의 제도를 이어받았다는 것을 공식적으로 부정했지만, 그가 건설한 진 제국은 이후 중국 대륙을 지배한 제국들의 통치 기반이 되었기 때문이다.

 

한의 건국자 유방.

한나라 시대에 시황제는 폭군 그 자체라고 평가받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폭군 그 자체' 가 깔아놓은 길을 그대로 달리게 된다.

시황제가 실시했던 군현제는 한나라 때도 실시됐고, 한나라의 군주도 황제라고 불렸기 때문이다.

또 차마 못할 짓이라고 비난했던 분서갱유는 되풀이하지 않았지만, 한 역시 사상을 통일하기 위해 애썼다.

 

 

바로 위에서 썼듯이, 한은 자신들이 폭군이라고 단죄했던 인물이 깔아놓은 길을 그대로 달려나갔다.

그리고, 그런 국가는 한뿐만이 아니었다.

 

전한과 후한 사이에 잠시 존재했던 신이나 후한 말기에 등장한 위, 촉, 오 등 삼국,

남북조시대를 통일한 수와 당, 그리고 그 뒤를 이은 송, 명, 청 등의 제국들이 모두 시황제가 깔아놓은 길을 그대로 밟았기 때문이다.

 

명나라도 지방통치정책에 군현제의 영향을 받았고, 당의 군주는 황제라고 불렸다.

청은 한족을 다스리기 위해, 금서목록을 지정하는 등 '제 2의 분서갱유' 를 단행해야만 했다.

 

폭군이라는 단어는, 정치를 제대로 하지 못한 군주에게 붙이는 명칭이다.

그리고 정치를 제대로 하지 못한 이상, 그의 정치는 본받아서는 안 되는 것이다.

 

만약 이 말이 옳다면, 한이나 당, 명, 청은 시황제가 폭군이 아니라는 것을 어느새 증명해버린 셈이다.

아니, 폭군은커녕 이후의 중국 제국에게 큰 이정표를 제시해 준 군주였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시황제 동상.

비록 진은 오래 가지 못하고 멸망했지만, 시황제가 추진했던 정책은 이후의 중국 제국에게 그대로 계승되어

청이 멸망하는 1912년까지 2천년이 넘게 지속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