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대의 악녀 카트린
16세기 프랑스를 뒤흔들었던 잔혹한 성 바르톨로뮤 대학살 사건은 너무나 유명하다.
이때 살해당한 위그노(신교도)의 수는 프랑스 전역에서 거의 10만 명에 육박했다.
유럽 종교분쟁의 최전선이었던 프랑스는 이때부터 카톨릭으로 굳혀진다.
카트린은 1533년, 이탈리아의 최고 명문인 메디치 가문에서 태어났다.
그녀는 13세 때 정치적인 공작에 의해 프랑스의 앙리 왕자에게 시집을 갔다.
이때부터 그녀와 함께 프랑스는 불행한 운명의 씨앗을 잉태한다.
권위적인 가문에서 숨 한 번 제대로 쉬지 못하고 박해를 받았던 그녀는
언제나 우울하고 비관적인 자아를 가지고 있었다.
그런 그녀의 모습을 보고 프랑스 궁전에서도 평판은 그리 좋지 않았다.
어둡고 음침한 성격에 도대체 무슨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온통 미스테리로 가득찬 여자였다.
앙리 왕자는 물론, 왕실가족과 귀족들도 그녀와 어울리는 것을 꺼렸다.
원래 이 결혼은 양국의 평화를 도모하기 위한 정략결혼에 지나지 않았다.
거듭된 전쟁으로 재정이 궁핍해진 프랑스는 카트린과의 결혼으로 거액의 지참금과 함께
앞으로 얻게 될 이탈리아 영토에 군침을 흘렸다.
하지만 그녀의 삼촌인 교황 클레멘트 7세가 아무 조치도 없이 사망하자,
이탈리아 영토를 둘러싼 메디치 가문의 약속은 물거품이 되어 버렸다.
카트린 드 메디치 교황 클레멘트 7세
이에 카트린을 바라보는 프랑스 상류층의 평판은 더욱 나빠졌다.
더구나 이때 앙리는 20세나 연상인 미녀 푸아티에에게 흠뻑 빠져 있었다.
당대 최고의 피부를 자랑했던 푸아티에는 빗물로만 세안하는 것을 고집하였다.
평범한 얼굴에 성격까지 어두웠던 그녀는 고국에서 겪은 불행이 프랑스에서도 반복되자,
더욱 우울한 나날을 보내게 됐다. 하지만 그녀는 아무도 갖고 있지 못한 무서운 인내를 가지고 있었다.
앙리가 아내에게 눈길도 보내지 않는데다가 아이까지 생기지 않자
카트린은 사람들과 점점 멀어지면서 이상한 공상의 세계의 빠져들었다.
이윽고 궁전에는 카트린이 이상한 마법에 빠져 있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그녀는 이상한 기호가 새겨진 부적을 몸에 지니고 다녔으며
안주머니엔 개구리와 도마뱀의 시체를 말려서 몰래 넣어 가지고 다녔다.
그리고 어떤 날이 닥치면 노새의 오줌을 마시기도 했다.
그것들은 모두 궁전을 드나드는 연금술사와 점성술사들이
카트린의 불임을 치료하는 특효약으로 가르쳐 준 방법들이었다.
1547년, 앙리가 왕위에 으르게 되면서 그때까지 불임이었던 그녀는 잇달아 아이를 낳기 시작했다.
그녀는 마술이 효과를 거두었다고 믿었다. 카트린의 출산은 순조롭게 진행되어 13년 동안 7명의 아이를 낳았다.
여기에 그녀는 더욱 마술에 집착하게 되었고, 궁전에는 마술사,연금술사, 점성술사등이 전국에서 몰려들었다.
남편 앙리 2세 애첩 푸아티에
유명한 예언자 노스트라다무스도 그 중 한 사람이었다.
그가 1559년 앙리 2세의 갑작스런 죽음을 예언한 이야기는 유명하다.
왕은 그 죽음을 막기 위해 예언자를 4년 동안 궁전에 붙잡아 두었는데
그때까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자 왕은 카트린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그를 궁전 밖으로 내쫓았다.
그런데 얼마 후 왕은 여흥으로 즐기던 기마시합에서 상대의 창에 눈이 찔려 사망했다.
카트린은 40세에 미망인이 되었는데, 이때부터 강력한 권력을 휘두르기 시작한다.
왕의 애첩이었던 푸아티에에게 억눌려왔던 지난 기억도 잊지않고 복수를 했다.
왕의 보호막을 잃은 푸아티에는 궁전에서 ?겨나 비참한 죽음을 맞았다.
노스트라다무스는 그녀의 아들이 잇달아 왕위에 오를 것이라고 예언했는데
그가 말한 대로 그녀의 세 아들이 연이어서 왕좌에 오르게 된다.
하지만 세 명 모두 의문의 죽음을 맞이한다.
장남 프랑수아 2세는 15세의 나이에 왕위에 올랐지만, 카트린의 섭정에 반항하다가
1년 만에 의문의 독살을 당한다. 그 뒤를 이어 둘째 샤를 9세가 즉위했다.
겨우 열 살의 나이에 즉위한 둘째는 어머니에게 무조건 복종을 맹세해야 했다.
카트린은 어린 아들을 왕위에 앉혀 놓고 절대적인 여왕의 지위를 누렸다.
장남 프랑수와 2세 둘째 샤를 9세
이때 프랑스는 구교인 카톨릭과 신교인 위그노의 극심한 분열을 겪고 있었다.
카트린은 카톨릭을 신봉했지만, 신흥 위그노의 세력은 놀랄 만큼 커져가고 있었다.
어느 한쪽을 편들게 되면 왕권뿐만 아니라 프랑스 전역이 흔들릴게 뻔했다.
그녀는 현명하게 양측이 공존할 수 있는 방향을 모색했다.
카트린은 평화의 수단으로 셋째 딸 마고를 위그노파의 앙리 왕자와 결혼시켰다.
하지만 그녀의 정책을 방해하는 강력한 경쟁자가 위그노파의 수장으로 등극했다.
바로 프랑스인의 존경을 한 몸에 받고 있던 콜리니 제독이었다.
그는 카톨릭 국가인 스페인과 전쟁을 벌여야 한다며 샤를 9세를 설득하고 있었다.
카트린은 이 소식에 분노의 눈을 이글거리며 경쟁자에게 저주를 퍼부었다.
"그 자가 내게서 국왕을 빼앗고 프랑스를 전정터로 만들려는 것이 분명해!“
마고와 앙리 4세의 결혼식
1572년 8월, 셋째 딸 마고와 브르봉 가문의 앙리 4세의 화려한 결혼식이 거행되었다.
이날 콜리니 제독은 궁전에서 돌아오는 길에 암살자의 총탄을 맞고 쓰러진다.
그러나 기적적으로 목숨을 건진 그는 교외의 자택으로 옮겨졌다.
그의 자택으로 위그노파의 귀족들이 속속 모여들었다.
그들은 이 암살의 배후가 카트린이 분명하다며 복수를 부르짖었다.
하지만 콜리니는 수장답게, 국왕을 먼저 만나봐야 한다며 이들을 말렸다.
그럼에도 위그노파는 이미 모든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카트린과 국왕을 유괴한 뒤, 파리를 점령한다는 계획이었다.
이를 모르는 샤를 9세는 콜리니를 걱정한 나머지 다음날 달려가기로 했다.
카트린은 궁지에 몰렸다.
콜리니와 국왕이 만나게 된다면 그 배후가 밝혀질 테고 그러면 국왕은 어머니를 원망하게 될 것이다.
콜리니는 이를 기회로 삼아 위그노 귀족들과 병사들을 이용해 카트린의 실각을 도모할 것이다.
마침, 파리에는 결혼식을 축하하기 위해 대부분의 위그노파들이 와 있었고
거기에 중무장한 위그노파 병사 8천명까지 콜리니의 명령을 기다리고 있었다.
만약 그들의 증오가 카트린에게 일제히 행해진다면! 생각만 해도 끔찍한 일이었다.
카톨릭세력 경합지역 위그노세력 콜리니 제독
이때 사면초가에 빠진 카트린에게 첩보들이 속속 들어왔다.
위그노파의 모반이 밝혀지자 그녀는 쾌재를 부르며 신속한 반격을 준비했다.
카톨릭파 귀족들과 군부의 실력자들이 그날 밤, 카트린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그녀는 즉시 ‘위그노파 제거’ 계획을 합법화 시키고 국왕을 찾아갔다.
늦은 밤, 카트린은 국왕을 찾아가 위그노파의 음모를 전해준 뒤,
그것을 미리 알았기에 콜리니 암살을 명령했다고 그럴싸하게 말을 꾸몄다.
왕이 이 말을 믿으려하지 않자, 카트린은 시간이 촉박하다며 왕을 다그쳤다.
그러자 왕은 “그렇게 훌륭한 콜리니 제독이 그럴리가 없습니다.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그를 체포하여 재판을 하면 되잖습니까?“
그러자 카트린은 "내일 날이 밝으면 모든 것이 끝장이다"라고 말했다.
그녀는 “지금 파리에 8천명의 위그노 부대가 와 있다는 것을 잊었느냐?
지금 이 순간에도 그의 저택에는 무기와 병사들이 속속 모여들고 있을것이야!“
두 시간 동안 카트린의 끈질긴 설득 끝에 마침내 왕은 자포자기에 빠졌다.
“어머니께서 그렇게 말씀하신다면 어쩔수 없는 일이지요.
다만, 한 명이라도 나중에 저를 비난하는 일이 없도록 그들을 모두 없애주십시오!
모두 죽여 달란 말입니다. 모두!“ 왕은 어머니를 밀치며 밖으로 뛰쳐나갔다.
드디어 모든 주도권은 카트린의 손으로 넘어왔다.
1572년 8월 23일, 새벽 3시를 알리는 종소리를 신호로 드디어 학살이 시작되었다.
이것이 그 유명한 성 발테르미 대학살이었다. 자택을 습격당한 콜리니 제독은
그 자리에서 살해되어 창 밖으로 내던져졌다.
이것을 신호로 궁전에서는 무서운 인간사냥이 시작되었다.
결혼식 하객으로 참석한 위그노파의 귀족들과 그 가족들은 비명을 지르며
궁전안팎에서 살해당하기 시작했다. 곧바로 피비린내가 파리를 진동시켰다.
이성을 잃은 왕도 총을 들고 발코니에 서서 위그노파를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죽여라, 모두 죽여라! 한 명도 남기지 말고 모두 죽여라!”
종교적 원한에 사무친 카톨릭파들이 각자 무기를 손에 들고 이 학살에 동참했다.
파리와 센 강은 이날 밤, 붉은 핏빛으로 물들었고, 거리 곳곳에는 시체들이 나뒹굴었다.
카트린도 이 참혹한 광경을 발코니에서 바라보며 공포로 치를 떨 정도였다.
한편, 학살자에 의해 ?겨 다니던 사람들 중 일부는 마고의 침실로 뛰어들기도 했다.
열렬한 카톨릭 신자였던 마고는 그들을 진정으로 살려주고자 노력했지만
거침없는 그들의 손길에 밀쳐지고 숨은 자들은 밖으로 끌려 나갔다.
성 바르톨로뮤 대학살
이 학살은 쉬지 않고 사흘 밤낮으로 이어졌다.
파리의 모든 문은 폐쇄되었고, 살인과 약탈이 도시를 뒤덮었다.
어떤 소녀는 살해당한 부모 앞에서 울부짖으며 개종을 강요받았고
위그노의 씨를 말리겠다며 임산부의 배를 갈라 태아를 내던지기도 했다.
화려한 드레스를 입은 여자들은 두 손목이 잘리고 드레스까지 빼앗겼다.
이 기회를 노린 약탈자들은 부유한 상점들을 털었고, 채무자는 채권자를 죽였다.
아무 증거도 없이 위그노라는 죄명만 붙이면 뭐든지 허용되었다.
늙고 병든 노인들도 간병에 지친 가족들의 손에 의해 살해되었다.
약삭빠른 사람들은 서둘러 ‘예스, 마리아’라는 메달을 만들어 교회 입구에서 팔았다.
이것을 몸에 지니고 있으면 죽음을 면했는데, 이 메달은 날개돗친 듯 팔려나갔다.
합법화된 학살이 인간의 잔혹성의 한계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었다.
결국에는 위그노파를 살해하는 시간을 줄이기 위해 그들의 목에 밧줄을 감아
산 채로 센 강에 집어넣기 시작했다. 어린 아이들은 그냥 강으로 내던져졌다.
거리에서 죽은 시체들도 수레에 실려 센 강으로 버려졌다.
결국 이 대학살은 위그노파와 위그노파로 몰린 카톨릭 교도들까지 합쳐
무려 10만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살해되었고, 살아남은 위그노파들은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는 나날을 보내게 되었다. 카트린의 완벽한 승리였다.
대학살이 거행되자, 스페인과 로마는 축포를 울리며 신에게 감사를 드렸다.
그 후 카트린의 명성은 가장 잔혹한 학살의 대명사로 역사에 기록된다.
결국 이 대학살은 프랑스 전역을 공황상태로 만들어 버린다.
전국 곳곳에서 두 파의 대립이 더욱 격렬해졌기 때문이다.
샤를 9세는 밤마다 악몽에 시달렸고 이를 잊기 위해 쾌락에 빠져들었다.
마침내 카트린의 눈 밖에 난 그는 24세의 나이로 의문의 독살을 당하고 만다.
아무 감정도 드러내지 않았던 카트린은 셋째 아들 앙리 3세에게 왕권을 물려주었다.
그리고 변함없이 섭정을 휘두르며 아들을 꼼짝 못하게 만들었다.
앙리 3세와 시민들은 잔인한 그녀를 원망하면서도 두려워하고 있었다.
셋째 앙리 3세 마고의 남편 앙리 4세
원래 카트린의 출신지인 피렌체는 독살과 음모의 본거지로 유명했다.
그녀는 독약 전문가들을 몇 명이나 수하에 두고 있었다.
그 중에서도 유명한 인물이 바로 르네 비앙코라는 남자였다.
그는 장갑이나 편지에 독을 묻혀서 상대를 살해하는 뛰어난 기술까지 발휘했다.
그 후 카트린은 1589년에 세상을 뜬다.
하지만 격렬한 종교 전쟁의 불길 속에서 그녀의 유해는 21년 동안 떠돌게 된다.
그리고 루이 13세 시대가 되어서야 겨우 왕가의 묘소에 안치될 수 있었다.
카톨릭과 위그노, 그 양쪽 모두에게 원망과 증오를 받았던 불행한 카트린.
‘두 종교의 공존’이라는 그녀의 이상은 결국 그녀의 생전에는 이루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