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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출신의 투르크 왕비

구름위 2013. 3. 29. 1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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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이메 듀브크 만큼 기구한 운명을 산 여성은 별로 없을 것이다.

운명의 장난으로 사촌 언니 조제핀은 프랑스 나폴레옹의 황후가 되고,

자신은 해적에 납치되어 터키의 하렘으로 팔려간 뒤 대황후가 된다.


카리브해에는 아름다운 마르티니크섬이 있다.

프랑스 식민지로 사탕수수, 커피, 코코아등을 재배하는 곳이다.

에이메는 이곳의 농장주의 딸로 태어났으나 어렸을 때 부모님이 사망했기 때문에

삼촌집으로 보내져 거기서 사촌 언니인 조제핀과 친자매처럼 자랐다.


두 소녀가 10세가 되었을 때 유명한 점술가가 찾아와 말하길

“너희들은 세계를 지배하는 황제의 아내가 될 것이다.”라고 예언했는데.

그 둘은 노파가 자기들을 놀리는 것이라고 여기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1776년, 에이메가 13세가 되었을 때 프랑스로 여행을 가게 되었다.

상류층 자녀들만 받아들이는 그곳의 수도원에서 숙녀교육을 받기 위해서였다.

8년 후인 1784년 마침내 교육을 마치고 고향으로 돌아오게 되었을 때 그녀의 나이는 21세,

풍성한 갈색 머리와 빛나는 눈동자를 지닌 그녀는 숙녀로 성장해 있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고향으로 돌아가는 도중에 해적의 습격을 받았다.

당시 바다에서는 해적이 자주 나타나 재물을 빼앗고 승객들을 납치하는 일들이 빈번했다.

사로잡힌 남자들은 몸값을 받고 풀려나거나, 아니면 이슬람쪽에 환관이나 노예등으로 팔렸고,

여자들은 이슬람의 애첩이나 여종으로 팔려나가는 일이 잦았다.


해적선장은 아름다운 에이메를 보는 순간, 이 여자를 터키의 하렘으로 비싸게 팔 결심을 한다.

에이메는 곧바로 이스탄불로 보내졌다. 이스탄불은 5백년 동안 터키의 수도로 번영을 누려왔다.

수백개의 사원과 수천개의 첨탑이 저녁햇살을 받아 아름답게 빛나는 이 도시는

당시의 황제인 압둘 하미드 1세가 군림하고 있었다.


궁전의 하렘에는 수백명의 여인들이 살고 있었다. 모두 외국에서 팔려온 이국의 여성들이었다.

일단 이곳으로 들어오면 병이 들거나 죽을 때까지는 절대 나갈 수 없었다.

하렘은 황제를 신으로 섬기는 신전 같은 곳으로 모든 여성은 오직 한 사람, 황제에게만 봉사를 한다.


그렇기 때문에 모두 단 한 번만이라도 황제의 눈에 띄기만을 손꼽아 기다렸다.

매일 정성스럽게 피부를 가꾸고 마사지나 미용등을 하고 그림처럼 아름다운 거대한 목욕탕에서

꽃잎을 띄우며 목욕을 하는 등  겉으로 보기엔 천국의 요정처럼 눈부시고 화려한 생활이었다.


하지만 그 속내는 고향에 대한 그리움, 사람들로 북적이는 하렘 바깥의 사람냄세를

누구보다도 그리워하는 여인들이었다. 하지만 이곳에서 황제의 눈에 띄지 않으면

평생 바깥 출입도 못하고 아이도 낳지 못한채 늙어 죽어야만 했다.


황제가 새로운 여성과 잠을 자기 위한 순서는 다음과 같다.

환관이 황금종을 울리면 여자들은 일제히 치장을 하고 황제를 만날 준비를 한다.

이윽고 환관을 앞세운 황제가 태후와 시녀들을 이끌고 하렘에 나타나면

태후의 엄격한 검사를 통과한 여자만이 이때 황제 앞에 줄을 서게 된다.


환관이 큰 소리로 페하께서 오신다고 소리치면 모인 여자들은 두 손을 모으고

무릎을 꿇은 채 대기하고, 황제는 그녀들을 한 차례 천천히 둘러본다.

그리고 태후에게 뭔가를 속삭이면, 그녀가 비로소 한 여자를 지목하는 것이다.


이때부터 그녀는 황제의 애첩으로서 밤에는 황금 융단을 따라 황제의 침실로 향한다.

여인이 황제의 침실에 든 날을 환관이 기록한다. 9개월 뒤에 태어날지도 모르는

아기가 틀림없는 황제의 자식이라는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서다.

이때 아이를 낳느냐, 낳지 못하느냐에 따라 여자의 운명이 결정된다.

여기에서 아이를 낳지 못하면 그 여자는 다시 황제에게 불려가는 일은 거의 없다.


에이메는 처음에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며 밤낮으로 울며 지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런 눈물은 아무 의미가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하렘을 벗어날 수 없는 운명이라면 이 보다 더 나은 방법을 찾을 수 밖에 없다.

그녀는 눈물을 거두며 그렇게 결심했다.


당시 터키 왕조에 군림하고 있던 인물은 두명의 환관장으로

흑색각하는 하렘을, 백색각하는 궁정의 정치를 지배하고 있었다.


백색각하와 그 배후에 있는 왕자 무스타파의 생모 시리아 왕비는 완고한 보수주의자였지만

흑색각하와 그 배후에 있는 황태자 세림의 생모 코카서스 왕비는 개혁주의자였다.

코카서스 왕비는 터키의 국력을 회복시키려면 서양 문물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코카서스 왕비는 프랑스 춮신의 에이메에게 눈독을 들였다.

그들의 공작으로 인해 에이메는 황제로부터 간택을 받게 되었고 황제의 사랑을 독차지하게 되었다.

그때까지 황제의 총애를 받았던 시리아 왕비는 당장에 찬밥 신세가 되었다.

그로부터 1년 후 에이메는 왕자를 낳았다.


이제 왕위 계승자는 코카서스 왕비의 아들인 세림, 시리아 왕비의 아들 무스타파,

그리고 에이메가 낳은 젖먹이 아들 마흐무트 등 세명이 되었다.

왕위를 노리는 시리아 왕비는 절대적인 권력을 움켜쥔 친위대와 손 잡고

세림과 마흐무트를 암살하려고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1789년, 황제가 사망하자 27세의 황태자 세림이 즉위했다.

세림은 세련된 용모를 문학청년으로 오래전부터 26세인 에이메에게 눈길을 주고 있었다.

에이메도 그에게 사랑을 느껴 두 사람이 연인이라는 소문이 황궁에 파다할 정도였다.

게다가 마흐무트의 진짜 아버지가 세림이라는 묘한 소문까지 돌고 있었다.


하지만 1805년, 간신히 안정을 찾은 에이메에게 커다란 사건이 찾아왔다.

강력한 후원자였던 코카서스 왕비가 사망한 것이다. 여기서 시리아 왕비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녀는 터키에 야망을 불태우고 있는 러시아와 영국의 원조를 받아 쿠데타 계획을 세웠다.


신변의 위험을 느낀 에이메는 세림황제에게 프랑스의 원조를 구하라고 설득했다.

때마침, 그때는 나폴레옹이 황제로 즉위한지 1년째였고, 그녀의 사촌 언니도 황후가 되어 있었다.

이것은 그녀에게 무엇보다 좋은 소식이었다. 이것을 기회로 에이메는 프랑스 쪽으로 접근하였다.


나폴레옹은 조제핀의 설득으로 세림황제의 뜻을 흔쾌히 받아들여 군대를 파견했다.

기마대를 이끌고 도착한 프랑스의 세바스차니 장군은 즉시 육지와 해상에 대한 군사력 증강에 착수했고,

각료회의를 주재하여 군의 지원태세를 점검하는 등 그의 눈부신 활약으로 터커의 군사력은 강해졌다.

이에 영국과 러시아는 프랑스의 눈치를 보며 군사행동을 포기했다.

 

그러자 시리아 왕비도 꼬리를 내리고 남 몰래 준비시켰던 병사들을 해체시키고

무기들을 모두 숨겨버렸다. 그래도 왕비는 언젠가 기회가 올 것이라 믿고 기다렸다.


세림의 권좌가 튼튼해지자 에이메는 세바스차니 장군의 부인으로부터

파리의 모든 근황을 열심히 듣고 이를 정책 전반에 반영하고자 했다.

그런데 불행한 일이 발생했다. 세바스차니 장군의 부인이 갑자기 병을 얻어 사망한 것이다.

슬픔을 이기지 못한 장군은 그대로 프랑스로 귀국해 버렸다.


그 순간 황제를 중심으로 단결해있던 것처럼 보였던 궁정이 요동쳤고

남 몰래 세력을 확장해온 시리아 왕비쪽으로 급속히 힘이 쏠리기 시작했다.

마침내 친위대가 그 시기를 틈 타 쿠데타를 일으켰고 황궁을 순식간에 장악하였다.

순간 세림황제와 에이메, 그리고 마흐무트는 갇히게 되는 꼴이 되었다.

 

이맇게 해서 황실가족이 갇히게 되자, 개혁파 고관들이 한 명도 남김없이 처형되었다.

그리고 시리아 왕비의 아들 무스타파가 새로운 황제로 즉위했다.

그러나 무스타파의 정치는 오래 가지 않았다.


새로운 황제는 무능하고 술과 여자에 빠져 살았고

이것을 이용한 시리아 태후가 실권을 장악했기 때문에 국내에는 반란의 기운이 가득했다.

이를 보다 못한 터키령 불가리아의 장관 파샤가 의용군을 일으켜 반란을 주도했다.

그는 무능한 무스타파를 폐위시키고 세림을 다시 왕위에 앉히기 위해

찬탈자 타도를 외치며 터키 본토로 밀려들어갔다.


궁지에 몰린 시리아 왕비는 즉시 근위병을 감옥으로 보냈다.

그들에게 감옥에 있는 세림과 마흐무트를 없애버리라고 한 것이다.

습격을 받은 세림은 적의 칼 앞에 덧없이 쓰러졌지만 마흐무트는 간발의 차이로 탈출했다.

그리고 그리고 곧바로 밀어닥친 의용군 덕분에 에이메와 마흐무트는 무사할 수 있었다.

 

이렇게 해서 황궁은 의용군에 의해 해방되었고, 운명은 뒤바뀌었다.

시리아 왕비와 무스타파는 포로가 되었고, 그녀를 따랐던 보수파들이 숙청되었다.

그리고 세림이 이미 죽었기 때문에 다음 황제의 자리는 마흐무트가 오르게 되었다.


생각해 보면 그야말로 기구한 운명이었다.

25년 전 해적에게 납치되어 하렘으로 들어와 절대 권력을 쥐게 되었으니 말이다. 

그 무렵 마흐무트의 나이는 23세, 즉위한 뒤에는 태후의 영향을 받아 개혁에 앞장섰다.

그는 대담하게 프랑스 문화를 수용, 역사가들로부터 표트르 대제가 부활했다는 칭송을 받았다.

그는 조세제도를 개혁하고 파리에서 교관을 초청하여 프랑스식 군사훈련을 도입했다.


생활양식도 서유럽식으로 완전히 바꾸고자 했다.

남자는 터번 대신 터키 모자를 쓰고 여자는 베일을 벗으라는 명령을 받았다.

이 영향으로 오늘날 터키는 다른 이슬람국가들과 문화적으로 확연히 다른 경향을 보인다.

그들은 이때부터 오히려 유럽과 가까운 성향을 보이기 시작했다.


당시 에이메를 배알한 유럽의 관리들은 그 빛나는 미모와 기품에 강한 인상을 받았다.

에이메는 화려한 보석을 지니고 있었지만, 절제된 아름다움으로 품위를 유지했다. 

 

마흐무트가 즉위한 이듬해인 1809년, 터키의 친프랑스 정책에 변화가 일어났다.

원인은 나폴레옹이 조제핀과 이혼하고 오스트리아의 공주와 정략결혼을 한 것 때문이었다.

자신을 도와준 조제핀이 황궁에서 쫒겨나 슬픔속에서 지내는 것을 에이메는 안타까워했다.


에이메는 타향에서 자신과 마찬가지로 기구한 인생을 보내고 있는 사촌 언니를 잊을 수 없었다.

그녀는 조제핀을 친언니처럼 사랑했기 때문에 언니를 버린 나폴레옹이 원망스러웠다.

그 원망은 점점 분노로 바뀌었고 나폴레옹을 적대시하게 되었다.

 

이때부터 프랑스에 대한 터키의 태도가 급변하자 영국이 접근했다.

영국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터키를 나폴레옹으로부터 떼어내려고 했다.

이것은 프랑스와 터키에 큰 불행을 초래했다.


1812년, 나폴레옹은 막강한 군대를 이끌고 러시아 원정길에 올랐다.

그러자 러시아와 교전중이었던 투르크가 갑자기 휴전을 선언해 버렸다.

사실은 이때야말로 프랑스와 협력하여 숙적 러시아를 타도해야 했는데 말이다.

터키는 이때부터 전쟁에서 손을 떼고 러시아와 프랑스의 전쟁을 수수방관하게 되었다.


그해 8월, 나폴레옹은 폐허로 변한 스몰렌스크로 들어왔지만

러시아가 초토화 작전을 취하면서 점점 동쪽으로 퇴각해 갔다.

나폴레옹이 모스크바로 들어갔지만 불에 타버린 텅 빈 도시는 아무 쓸모가 없었다.

그리고 러시아군의 총공격이 시작되었고 프랑스군은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눈보라치는 스몰렌스크로 물러난 나폴레옹은 간신히 목숨만 건진채 프랑스로 돌아왔다.

기세 등등했던 나폴레옹의 50만 대군은 이미 흔적조차 없이 사라져 버렸다.

나폴레옹이 패배했다는 소식을 들은 에이메는 과연 어떤 기분이었을까?

 

이 전쟁이 있은지 5년 후인 1817년, 그녀 자신도 53세의 나이로 운명의 막을 내렸다.

조제핀은 이미 3년전에 폐렴에 걸려 마르메존 궁에서 덧없는 인생을 마쳤다.

아름다운 갈색머리의 에이메가 하렘으로 끌려온 지 33년의 세월이 흐른 후였다.

이스탄불의 왕실 묘지는 지금도 에이메의 묘비가 남아있다.


‘아름다운 여인, 외국 귀족의 피를 물려받은 대비폐하.

동양의 문을 새로운 빛으로 연 여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