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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시대 전쟁영웅

구름위 2013. 3. 26. 15:36

인류는 오랜시간을 거쳐 다양한 전쟁을 치러왔으며, 승자와 패자를 정하기도 하고 그에 따른 전쟁영웅도 많이 배출되었습니다.

이번시간부터는 각 시대의 전쟁영웅에 대한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오늘은 그 첫번째로 로마시대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카이사르(시저)

카이사르는 로마출생으로 시저라고도 불렸습니다. 서양사상 가장 큰 영향을 남긴 정치가이자 군인인 그는 유서 깊은 집안 출신

이었으나, 그 조상에는 유명한 정치가가 없습니다. 기원전 60년에 폼페이우스, 크라수스와 함께 1차 삼두정치를 성립시켰고,

이를 통해 기원전 59년에 집정관에 선출되었죠.

 

집정관이 된 카이사르는 공유지를 분배하기 위한 법안을 비롯하여 여러 법안을 제출하여 민중의 인기를 얻었고, 기원전 58년부터

갈리아 키살피나, 프로빈키아, 일제리아 3개 속주의 총독이 되었습니다. 총독이 된 그는 갈리아 전쟁을 통해 갈리아인과 게르만족

을 굴복시켰으며 바다 건너 브리타니아까지 건너가기도 했죠.

 


▲ 카이사르 동상

▲ 카이사르(오른쪽)에 항복하는 켈트족 수장 베르킨게토릭스

 

 

갈리아 전쟁은 카이사르의 영향력을 크게 증대시켰으나 기원전 53년에 파르티아를 원정하기 위해 동방으로 떠난 크라수스가

전투에서 패하여 죽자 삼두정치가 붕괴되었고 폼페이우스와 카이사르의 관계는 차차 악화되기에 이릅니다.

기원전 52년 베르킨게토릭스가 주도한 갈리아인의 반란을 진압하여 갈리아를 평정한 카이사르는 원로원 보수파의 지지를 등에

업은 폼페이우스와의 대결을 피할 수 없게 되었고, 군대를 해산. 로마로 돌아오라는 원로원의 결의를 거부한 채 기원전 49년 1월

루비콘 강을 건너 로마로 진군하게 되었습니다.

 


▲ 카이사르 광장

▲ 카이사르의 죽음

카이사르는 에스파냐와 시칠리아를 제압하고 아드리아해를 건너 그리스로 건너갔으며 기원전 48년에 파르살로스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폼페이우스에게 승리를 거두고, 클레오파트라 7세와 프톨레마이오스 14세를 왕으로 세웠는 실질적인 권력은

클레오파트라 7세가 쥐게 되었습니다. 이 때 클레오파트라 7세는 카이사르의 애인이 되어 그와의 사이에서 카이사리온을

낳았습니다.

 

이외에도 소아시아에서 반란을 일으킨 폰토스 왕 파르나케스를 격파했고, 아프리카 탑수스에서 폼페이우스의 진당을 토벌했

으며, 에스파냐 문다에서 폼페이우스의 두 아들에게서 승리를 거두어 내전을 승리로 이끌었습니다.

 

로마의 유일한 권력자가 된 카이사르는 종신 독재관에 취임하여 여러 가지 정책을 추진했으나, 브루투스와 카시우스를 비롯한

원로원의 공화정 옹호파에 의해 원로원 회의장에서 칼에찔려 암살을 당하는 것으로 생을 마감하죠.

 

폼페이우스

로마 공화정 말기의 군인이자 정치가로 대대로 군인 출신의 귀족가문에 소속된 엘리트 군인이었던 폼페이우스는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지반을 배경으로 활약하였고, 30대 초반에 스페인에서의 원정 도중 검투사 스파르타쿠스의 반란에 대부호 크라수스와

함께 성공하여 명성을 얻어 36세에 집정관에 출마하지만 너무 젊다는 이유로 귀족계급의 지지를 얻지 못하자 크라수스의 평민파

에 가담하여 평민파들의 대중적인 인기로 명성을 얻고 있는 카이사르와 연합하여 로마의 지배권을 장악합니다.

 


▲ 폼페이우스 동상

▲ 폼페이우스의 군사들

 

 

지중해의 해적들의 약탈이 극심하여 로마군도 어쩌지 못하고 있을 당시 폼페이우스는 로마시민을 설득하여 군자금을 모아 군대

를 양성하고 군함을 건조해 수년간의 치밀한 준비 끝에 해적소탕에 나서게 됩니다. 유능한 전략가로 해적들의 거점을 동시에

습격하는 전술로 해적을 진압하고 이후 예루살렘을 정복하게 되어 엄청난 영토를 차지하게 되죠.

로마사람들은 그에게 패배를 모르는 폼페이우스라며 찬사를 보내게 됩니다.

 

옥타비아누스

카이사르의 조카로 귀족신분인 어머니와 평민신분인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난 가이우스 옥타비우스는 영민하고 총명한 덕에

카이사르에 의해 후계자로 성장하게 됩니다. 카이사르가 암살된 후 그의 양자 및 후계자로 지명되었고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옥타비아누스로 개명하게 되죠.

 

▲ 악티움 해전

 

옥타비아누스는 장군으로서의 역량은 빈약하였으나 아그리파를 비롯하여 여러 부장의 조력과 나아가 전 이탈리아, 전체 속주

로부터 충성의 맹세를 받아내어 신중하게 일을 처리함으로써 100년에 걸친 공화정 말기의 내란을 진정하게 하는 역할을 했죠.

질서회복 후에는 비상대권을 원로원과 민중에게 돌려주었고 아우구스투스라는 칭호를 받았으며 공화정의 명목을 유지하면서

실질적인 재정을 시작하게 됩니다.

 

 

그는 내정의 충실을 기하여 41년간의 통치기간 중 로마의 평화시대가 시작되었고 라틴문학의 황금시대를 탄생시키기도했죠

로마시대를 대표하는 영웅이었던 세명을 소개해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