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한국전

영연방군의 전설, 임진강-가평전투

구름위 2013. 3. 12. 10:33

우리를 돕기 위해서 16개국에서 전투병을 파병하였던 것은
많이 알려진 사실입니다.
그중 영국은 미국 다음으로 많은 병력을 즉시 파병하여 주었던
고마운 나라였는데 우리에게는 조금 낯선 한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비록 나라의 이름을 걸고 따로 참전하였지만 영국을 위시한
영연방(Commonwealth)국가들인 캐나다,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에서
파견된 부대들이 함께 모여서 전투를 벌였다는 점입니다.

2차대전 당시 토브룩전투에서 영국군의 일원으로 싸우는 오스트레일리아군

사실 처음이 아니라 이들에게 오래전부터 있어왔던 참전방식으로
영국이 참여한 전쟁에 영연방국가들이 영국을 도와서 함께 싸우고는 하였습니다.
6ㆍ25전쟁도 마찬가지여서 영국과의 관계가 특히 밀접한 위 국가들은
영국군과 함께 전투를 벌였고 1951년 7월 28일에는 부대를 통합해
영연방 제1사단을 구성하였는데 이는 6.25전쟁에 파병 된 부대 중
미군이외 유일한 사단급 부대였습니다.

그러다보니 참전 영국, 캐나다,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의 부대들은
전공을 함께 공유하는 부분이 많습니다.
특히 1951년 4월에 연이어 벌어진 임진강전투와 가평전투는
이들에게 전설로 남아있습니다.
비록 하나는 격전 끝에 일부가 전멸하는 아픔을 겪었고
다른 하나는 대승이어서 차이가 있었지만
공통점은 중과부적에도 결코 굴하지 않고
투혼을 발휘하였다는 점입니다.
앞으로 소개할 내용은 참전 영연방군에게는 전설로 전해지는 이야기입니다.

영연방군은 6.25전쟁의 주요 고비에서 신화를 썼습니다
(참전용사 방문행사 사진-뉴시스 )

1950년 10월 중공군의 참전이후의 상황은 한마디로 암울 그 자체였습니다.
이듬해 1월 4일 서울을 다시 적에게 내주고 평택~삼척 선까지 후퇴하였을 때는
대한민국이 역사상 가장 위험한 순간이었습니다.
나중에 밝혀졌지만 중공군의 예상 못한 참전에 놀란 미군 정책 당국은
이 상태에서 금강까지 50여km를 더 후퇴한다면 한국을 포기하고
철군하기로 예정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바로 이러한 절체절명의 순간에 중공군의 판단 착오로 반전의 기회가 생겼고
전선은 다시 북으로 올라갈 수 있었습니다.
중공군은 한 번의 공세를 더 가하면 사기가 바닥까지 떨어진 아군을
금강선까지 밀어 붙일 수 있을 가능성이 컸지만 참전이후 3차례의 공세를
연이어 실시하면서 너무 지쳤기 때문에 서울을 점령하고
제풀에 주저앉은 상태였습니다.
따라서 크게 기대도 안한 아군의 소규모 정찰작전에
의외로 쉽게 무너지는 허점을 보였습니다.

1951년 1월 4일 서울에 입성하는 중공군
나중에 밝혀진 사실인데 이때가 대한민국이 가장 위험한 순간이었습니다.

그동안 아군은 낯선 전술을 구사하는 중공군에 속수무책으로 당해 왔지만
보급이 고질적인 문제여서 공세를 일주일 이상 계속할 수 없다는 중공군의
치명적인 약점을 간파하고, 병력에서는 열세지만 화력으로 이를 충분히
만회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서자 반격에 나설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3월이 되었을 때 서울을 다시 탈환하고
전선을 38선 부근까지밀어 올릴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때까지도 전선의 주도권은 중공군이 잡고 있던 상태였습니다.
중공군은 계속하여 전쟁을 자기의도대로 끌고 가서 끝내기를 원했고
아군은 어떻게든 상황을 악화시키고 않고 전선을 고착시키기를 갈망하였습니다.
역시 뒤에 밝혀진 사실이지만 1951년 봄이 되었을 때 유엔군 최고 지휘부는
1950년 가을에 있던 북진을 다시 시도하여 한반도를 통일하려는 생각은
완전히 접은 상태였습니다.

지평리전투는 압도적인 중공군을 물리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게 만든 전환점이었습니다
(지난해 지평리에서 벌어진 재현행사의 모습)

결국 38선 일대를 중심으로 격전은 예상되었는데
곧바로 중공군이 선공을 시작하였습니다.
1951년 2월에 개시된 중공군의 4차 공세였는데
이때 앞으로 국군과 유엔군에게 반면교사가 될 만한 상당히 의미 있는
사건이 벌어집니다.
중공군 주공이 돌파를 시도한 지평리를 미 2사단 23연대가 고립방어에 나서
적을 붕괴시켰던 것입니다.
즉 포위를 당하여도 버티면 이길 수 있다는 확신을 갖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중공군의 4차 공세는 좌절되었지만 이것이 끝이 아니었습니다.
공산군 최고사령관 펑떠화이(彭德懷)는 서울 재점령을 목표로 5차 공세를
즉시 준비하였는데 주공이 파주 일대로
조공이 춘천 일대로 돌파하고자 하였습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파주에는 영국군 29여단이, 춘천 후방에는 영국군을
중심으로 편제된 영연방 27여단이 전선을 담당하고 있었습니다.

 

펑떠화이는 5차 공세에 총 30만 5천명의 대군(중공군 27만과 북한군 3만 5천)을
동원하여 한강이북에 배치된 유엔군의 주력을 일거에 포위 격멸한 후
노동절(May Day)에 맞추어 서울에 재 입성하겠다는 작전을 수립하였습니다.
1951년 4월 22일, 어둠이 깔리자 공산군은 아군의 전 전선에 4시간에 걸친
강력한 포격을 실시하면서 드디어 공세를 개시하였습니다.

1951년 4월 22일, 대대적인 포격 후 중공군의 5차 공세가 시작되었습니다.

포격이 멈추자 엄청난 규모의 중공군이 서부전선에 등장하였습니다.
각각 9개 사(師-아군의 사단 개념)로 구성된
중공군 19병단(兵團-아군의 야전군 개념)이
개성-문산 축선에서 국군 1사단과 영국군 29여단을,
3병단이 연천-동두천 축선에서 미 3사단과 터키여단을 향하여
공세를 시작하면서 서울을 포위하려 하였습니다.

19병단은 임진강 일대를 돌파하여 남하하려 하였는데
이곳은 국군 1사단이 서쪽을, 영국 29여단이 동쪽을
나누어 담당하는 지역이었습니다.
압도적인 병력으로 파상공세에 나선 중공군은
순식간에 임진강을 건너와 아군의 측후방을 공격하여
당시 영국군 29여단의 좌측에 배치되어 적성면 일대를 방어하고 있던
글로스터대대(1st Battalion, Gloucestershire Regiment)를 공격하였고,
글로스터대대는 순식간에 중공군에 의해 포위되었습니다.

<중공군 제5차 공세당시 글로스터대대를 포위한 서부전선의 상세도>

상황을 고심한 미 1군단 지휘부는 글로스터대대에게 중공군 4차 공세시
지평리를 방어해 낸 미 2사단 23연대처럼 고립방어에 나서라고 명령을 하달하였고,
이에따라 글로스터대대는 사방에서 출몰하는 대규모의 중공군을 상대로
혈전을 벌였으나, 추가적인 전투근무지원과 미 3사단의 구원작전이 실패하여
상황은 점점 절망적으로 변해갔습니다.

4월 25일,
적진 한가운데 고립되어 3일 동안 저항을 계속하던 글로스터대대에게
마지막으로 내려진 명령은 자력으로 탈출하거나 아니면 항복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글로스터대대는 스스로 운명을 결정해야만 하는 상황에 직면하게 된 것입니다.
항복보다는 끝까지 싸우기를 선택한 글로스터대대는
부상병들과 이들을 돌볼 일부 요원들만 남기고 중대 단위로 흩어져
탈출을 시도하였습니다.

마지막까지 치열하게 저항하는 글로스터대대의 모습

그러나, 좌측의 국군 1사단에게 극적으로 구출된
D중대 일부 병력을 제외한 나머지 대대원 모두는
중공군에게 포로가 되는 최악의 결과를 가져오면서
탈출은 실패로 막을 내렸습니다.

전투가 끝난 후 글로스터대대는 59명이 전사,
부상병을 포함한 530여명의 장병이 포로가 되었으며
단지 69명만이 탈출에 성공한 것으로 조사되었습니다.
이것은 영국군 29여단의 30퍼센트에 해당되는 커다란 손실이었습니다.

하지만 이와 같은 영국군 29여단의 전술적 패배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3일간이나 현지를 사수한 결과는 실로 놀라운 것이었습니다.
중공군 배후에서 글로스터대대가 격렬하게 저항하자
동두천 지역으로 돌파구를 계속하여 확대하려는
적의 기도가 좌절된 것이었습니다.

지평리전투의 미 2사단 23연대와 달리
영연방군은 구원받지 못한 상황이었지만,
이와같은 글로스터대대의 분전으로 말미암아 중공군은 제5차 공세에서
얻고자 하는 바를 달성하지 못하고 그들의 계획을 변경할 수 밖에 없게되었습니다.

영국군 29여단의 분전으로 중공군의 돌파구 확대가 무산되었습니다
(당시 전투에서 격파된 영국군 크롬웰전차)

설마리에 고립되어 있던 글로스터대대는
중공군에게 한마디로 눈엣 가시 같은 존재였습니다.
글로스터대대가 저항을 계속하고 좌우에 있던 국군 1사단과 미 3사단이
글로스터대대를 지원하기 위해 현 위치를 사수하자
중공군은 당황하였던 것입니다.
따라서 더욱 글로스터대대를 격멸하기 위해 더욱 매달릴 수밖에 없었고
전투가 종결되었을 때 아군 사상자를 몇 배나 되는
엄청난 중공군의 시신이 설마리를 뒤덮었습니다.

일주일 정도만 공세를 지속 할 수 있었던 중공군은
임진강 전투에서 글로스터대대의 분전으로 3일 동안 지체하자
예정했던 대로 남진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르렀고,
이는 중공군 5차 공세를 무너뜨리는 단초가 된 것입니다.

그리고 중공군의 기도를 완전히 좌절시키고
영국군 29여단의 눈물을 닦아준 격전이 거의 동시에 중부전선에서 벌어졌습니다.
그 주인공은 가평의 영연방 27여단이었습니다

 

4월 22일 중공군의 5차 공세가 시작되었을 때,
공산군 조공이 출몰한 곳은 중부전선 춘천북방의 사창리 일대였습니다.

이곳을 담당한 부대는 미 9군단에 배속된 국군 6사단이었는데
중공군은 은밀히 아군의 배후를 파고들어 후방을 차단하였습니다.

중공군은 국군 6사단이 담당 지역 돌파하여 전선에 커다란 구멍을 만들었습니다.

중공군의 공격으로 후퇴하게 된 국군 6사단은 상당한 피해를 받고
4월 25일 가평일대에 겨우 집결하였는데,
정원의 반 정도만 남고 대부분의 중장비는 유기되는 굴욕을 겪었습니다.

국군 6사단의 후퇴는 좌우에 배치되어 있던 아군 부대들의 후퇴로 이어져
전선 전체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게 되었습니다.

서부전선에 출몰한 중공군 주력이
국군 1사단, 미 3사단, 영국 29여단을 비롯한 아군의 강력한 저항에 막혀
더 이상 남하를 하지 못하는 동안
이처럼 조공이었던 중공군 9병단이 전선 중앙에
커다란 구멍을 내어 버렸던 것입니다.

만일 이 상태에서 경춘가도를 따라 중공군이 계속 남하한다면
서울의 안전도 장담할 수 없었습니다.
서부전선에서 막힌 중공군의 5차 공세가
엉뚱한 곳에서 성공할 수도 있는 위기였습니다.

위기를 막기 위해 영연방 27여단이 전선으로 달려 나갑니다

바로 이때 이들을 막기 위해 동원 된 부대가 영연방 27여단이었습니다.
영국 27여단을 근간으로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 군으로 증강된 영연방 27여단은
무려 5배가 넘는 중공군을 막아내어야 했습니다.

후퇴하는 국군 6사단을 구원하기 위해 가평으로 향한 영연방 27여단은
국군을 추격하여 내려오던 중공군 20군과
1951년 4월 23일 가평에서 맞닥뜨리게 되었고,
결국 가평은 6ㆍ25 전쟁사에 길이 남는 거대한 격전의 장으로 변하였습니다.

소수의 영연방 27여단을 중공군 20군(軍-서방의 군단 개념)이
포위하면서 시작된 3일간에 걸친 전투는
매우 치열하게 진행되었습니다.

본진인 영국군과 호주 왕실 3대대는
가평 북방 7km 지점의 죽둔리에서 부대원의 40퍼센트 이상이 사상당하는
엄청난 피해를 입으면서도 경춘가도를 지켜냈고,

캐나다 프린세스 패트리샤 2대대는
가평 남단 667고지를 사수하여 후퇴하는 국군 6사단을 엄호하였으며

뉴질랜드 16포병연대는 막강한 포병화력 지원으로
중공군을 완전히 차단, 격멸시켰습니다.

영연방군은 놀라운 투혼을 발휘하며 적의 기도를 좌절시켰습니다

이처럼 영연방 27여단은 영국을 비롯한 영연방의
호주ㆍ캐나다ㆍ뉴질랜드 군으로 편성된 혼성여단이었지만,
단일부대보다 더한 단결력을 과시하며 일사분란하게 작전을 펼쳤습니다.

5배나 많은 적을 필사의 항전으로 격퇴한 영연방 27여단의
결정적인 전투로 야심만만했던 중공군의 5차 공세는 좌절되었으며,
영연방 27여단은 세계 전쟁사에 길이 빛날 엄청난 대승을 거두었습니다.

서부전선의 영국 29여단이 설마리에서 당한 패배를
영연방 27여단이 가평에서 몇 갑절로 중공군에게 돌려준 것입니다.

이후 가평은 이 전투에 참여하였던 영연방 각국의 부대들에게는
전설의 성지로 자리매김하게 되었고 이 치열했던 전투에서 얻은 승리는
무한한 자부심으로 남았습니다.

영연방군에게 가평은 자부심이자 성지입니다.

반면 가평전투는 우리 땅을 우리 손으로 지키지 못하고
사창리에서 굴욕적인 패배를 당한 국군 6사단을 부끄럽게 만들었습니다.

이름도 들어본 적 없는 낯선 땅까지 와서 자유와 평화를 지키기 위해
고귀한 피를 뿌려가며 치열하게 싸워 결국 승리를 쟁취하는 영연방군의
모습을 가까이서 지켜 본 많은 국군 6사단 장병들은 뼛속 깊게 반성을 하였습니다.

그러한 굴욕을 곱씹으며 와신상담의 자세로 훈련에 매진한
국군 6사단은 그로부터 한 달 뒤에 용문산 전투와 화천호 전투에서
세배나 많은 중공군을 괴멸시키는 6ㆍ25전쟁 역사상 최대의 승전보를 올립니다.

그것은 영연방군이 중공군 5차 공세에서 보여준 용전분투가 씨앗이
되었기 때문에 가능한 전과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