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마용갱은 누가 불태웠는가?
고고여론몰이는 인심을 얻을 수 없고, 부도덕한 짓이다. 문제는 이렇게 발생해서는 안되는 일이 지금 다시 한번 세상 사람들의 앞에서 버젓이 행해지고 있다는 것이다. CCTV와 섬서TV의 현장중계를 통하여, 곧이어 각 매체의 제1면 뉴스를 통하여, 가장 높은 빈도로 계속 전파 확산시키고 있다. 여론몰이의 강도와 물량에서 사상유례가 없는 일이다. 2012년 6월 10일 신화사기자가 서안에서 보낸 소식에 따르면, 진나라 병마용의 제3차고고발굴사업의 성과가 나타났고, 진나라 병마용갱을 불태운 사람은 다른 사람이 아닌, 서초패왕 항우가 최대 혐의자라는 것이다. 특히 놀라운 점은, 이번 발굴에서 발견된 많은 수량의 채색도용중 크기가 가장 큰 것은 키가 2.5미터이다. 이 모든 것들은 진시황릉과 진용의 문화, 예술등을 한단계 더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를 제공한다.
항우가 진병마용갱을 불질렀다는 것과 2.5미터 높이의 도용(陶俑)을 발견했다는 것을 기실 고고학적 여론몰이일 뿐이다. 항우가 진나라 병마용갱을 불질렀다는 것은 1975년 7월 12일 <인민일보>와 1975년 제11기 <문물>잡지에 이미 보도된 바 있다. 위안중이(袁仲一)등의 저서에서, 아주 분명하게 말하고 있다. 이번에 이것을 무슨 중대한 고고학적 발견인 것처럼 대거 선전해대는 것은 전세계의 사람들에게 웃음거리가 될 뿐이다. 항우가 진나라 병마용갱을 불지른 적이 있는가? 그들 자신 조차도 긍정적으로 결론내릴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그저 "항우가 진용갱을 불지른 최대 협의자이다"라고 발표한 것이다. 진용갱은 도대체 누가 불지른 것인가?진용 고고발굴팀의 장잔민(張占民) 팀자은 제6회 진용학술토론회에서, 명확하게 설명했다: 진용갱은 항우가 불태운 것이 아니다. 필자는 <진용진상>이라는 책에서, 진용갱을 불태운 것은 주장(周章)이 이끄는 농민반란군이라고 말한 바 있다.
2.5미터 높이의 도용에 대하여 신화사 기자인 펑궈(馮國)은 이렇게 보도했다. "기자는 9일 진시황병마용박물관으로부터 들어서 알았다. 현재 속칭 백희용갱(百戱俑坑) 내에서 발견된 20여건의 자세가 각각 다르고 파손이 심각한 백희용에서 사람의 주목을 끄는 것은 머리가 없는 도용이 아주 커다랗다는 것이다. 전문가들의 측량에 따르면, 머리가 없는 상태하에서 2.2미터이고, 만일 머리를 덧붙인다면 2.5미터라고 한다. 키가 야오밍(姚明)보다 크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를 '진거인(秦巨人)'이라고 부른다." <삼진도시보>의 기자는 이렇게 말한다: "어제는 일곱번째 문화유산일이다. 진병마용의 제3차고고발굴사업성과가 공표되였다. 진나라 병마용을 불패운 것은 서초패왕 항우가 가장 큰 혐의자이다. 이번 발굴에서 발견된 수량이 많지 않은 채색도용중 가장 큰 것은 키가 2.5미터이다." 원래, 이 도용은 머리가 없는 것이다. 그리고 2.5미터라는 키도 일부 사람들이 추산한 것일 뿐이다.
2009년 6월 13일부터, 진병마용갱은 정식으로 제3차고고발굴을 시작한다. 그래서 그 사업성과에서 2.5미터 도용이 출토한 위치도 국가문물국이 규정한 제3차발굴의 사업범위내에 들어가야 한다. 진용관에서 공포한 여러가지 자료들은 모두 이 2.5미터 높이의 도용은 진용갱에서 그들이 파낸 것이라고 한다. 현재 여러분에게 말씀드리는데, 이것은 사람의 시선을 혼란시키는 것이다. 하나의 끼워팔기식의 방법이다. 원리 이것은 진나라병마용과 아무런 관계가 없는 도용이다. 병마용제3차발굴의 프로젝트에 끼어들어간 것이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이 2.5미터 높이의 도용은 진시황릉 봉토의 동남 내외성의 사이에서 발견한 것이다. 그것은 병마용 제3차발굴지점과 직선거리로 2.0킬로미터 떨어져 있다. 그래서 병마용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별도의 일인 것이다.
그렇다면 이 2.5미터 높이의 도용이 발견된 소위 백희갱은 진시황릉의 배장갱인가 아닌가? 그거은 초기에 출토된 동거(銅車), 동마(銅馬)와 마찬가지로, 원래 진정한 의미에서의 고고학적 논증을 거친 것이 아니다. 모두 일부인들이 아무런 근거없이 결정해서 확정시켜 버린 것이다. 그들의 논리는 이렇다: 이들 물건은 진시황릉 봉토 부근에서 발견되었다. 진시황의 것이 아니라면 누구의 것이란 말인가? 기실 이런 추론은 반박할 가치조차 없다. 많은 사료기록에 따르면, 역대왕조제왕, 후비, 대신, 심지어 환관은 그들이 묘지를 선택할 때, 모두 수천수만의 다른 사람의 묘지를 침범하고 훼손시키고 점유하여 이루어지는 것이다. 진시황릉의 점유부지 56.25평방킬로미터에 전왕조, 전대의 묘장이 하나도 없으리라는 것은 스스로를 속이고 남을 속이는 것이다. 이렇게 중요한 묘지를 서로 쟁탈하려는 현상도 연구하지 않고서, 어떻게 고고발굴업무를 할 수 있단 말인가?
과거, 고고학계에는 하나의 잠규칙이 있었다: 누가 발견한 문화재는 발견한 사람이 성격을 규정짓는다. 그리고 발견한 사람이 공식대변인의 자세로 대외적으로 고고학적 결과물을 발표한다. 그가 어떻게 여론몰이를 하든 간에, 누구든지 이에 반박할 수 없다. 이제는 깨어나야 할 때가 되었다. 학술이 개방되지 않은 시대에 이것은 통할 수 있었다. 그러나 오늘날 인터넷정보시대에는 그렇게 할 수가 없는 일이다. 고고발굴은 전문성이 강하다. 반드시 고고학자가 규정, 규범에 따라 진행해야 한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후속고고학적 논증과 연구업무는 고고학자들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고고발굴자들이 독점할 일이 아니다. 어떤 학술논증과 학술연구도 국경과 지역과 전문가여부, 권위여부를 따지지 말아야 한다. 누구든지 발언권을 차지할 수 있어야 한다. 학술의 논증은 자료로 말을 해야 한다. 학술연구는 글만 보아야지, 사람을 보아서는 안된다. 설마 이런 이치도 그들은 모른단 말인가?
병마용을 불태운 것은 진이세(秦二世)일까?
최근 이틀동안, 이전에 열기를 내뿜었던 진시황 병마용이 다시 뉴스거리로 떠올랐다. 최대의 뉴스는 병마용이 인위적으로 불태워졌다는 것이 추가로 증명되었다는 것이다. 그럼 누가 불태웠을까? 전 병마용관장인 위안중이(袁仲一)는 아마도 항우일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필자의 생각으로 병마용이 불에 탄 원인은 간단하지가 않다. 아마도 진이세가 시킨 것일 것이다.
소위 항우가 병마용을 불태웠다는 설의 '이론'근거는 유방이 항우에게 열거한 10대죄상중 네번째 죄상때문이다. <사기.고조말기>(권8)에 따르면 이렇게 되어 있다: "초회왕은 진나라땅으로 들어가서 폭력을 행사하거나 강탈하지 말도록 약속했다. 그러나, 항우는 진나라 궁실을 불태우고, 시황제의 무덤을 파서, 그 재물을 개인적으로 가졌다."
이것은 항후가 불을 냈다는 가장 직접적인 역사증거이다. 다만, 이 말에는 항우가 진시황의 병마용을 불질렀다는 말이 없다. 그 대상은 단지 '진나라 궁실'일 뿐이다.
<사기>에 이런 기재가 있는 외에, <한서.유향전>(권36)에도 유사한 기록이 있다: "항적(항우)는 그 궁실과 건물을 불태웠고, 그곳에 간 사람들이 모두 발굴을 했다." 아래 윗 글을 연결시켜보면, <한서>이 이 기록은 <사서>의 기록보다 지향성이 더욱 강하다. 불태운 것은 진릉의 지상건축물인 것이다.
그러나, 항우가 불태운 것은 진릉의 지상건축물이지, 항우가 병마용갱을 불태웠다고는 기록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현재 병마용갱에서 불태운 흔적이 나타났다고 하여, 항우의 행위로 추측하는 것은 사료에 근거가 부족한 것이다.
한발 물러서서 보더라도, 항우가 병마용갱을 불태우는 것은 사리에 맞지 않는다: 첫째, 병마용갱은 당시에 묻어두었다. 항우는 사람을 파견하여 아무런 가치도 없는 진흙을 된 진용을 찾으려 했겠는가? 그것이 합리적인가? 둘째, 진용갱은 면적이 너무 넓다. 현대 고고학으로도 일부분만을 발굴했을 뿐이다. 발견면적은 이미 20870평방미터에 달한다. 항우는 그렇게 넓은 면적에 묻어둔 진용갱을 파내서 불태우고 부쉈다? 가능한 일인가? 만일 원한을 풀기 위해서라고 말하낟면, 진시황의 진릉 지하궁전에서 시신을 꺼내서 푸는 것이 더욱 쉽지 않겠는가?
그래서, 항우가 병마용을 불태웠다는 것은 학술적인 추측으로는 가능하지만, 직접적으로 '최대혐의자'라고 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 이전에 누군가가 안양의 서고혈한묘를 조조묘라고 한 것과 마찬가지로, 근거가 없는 것이다. 신중하지 못하고, 웃음거리가 될 뿐이다.
기실, 진릉부근에서 불에 탄 유적지가 발견되는 것을 항우의 행위로 추측하는 것은 병마용이 발굴된 후에 비로소 출현한 것이 아니다. 일찌기 1960년 3월, 국무원은 진시황릉을 전국중점문화보호단위로 지정한다. 다음 해 2월, 섬서성 문물관리위원회는 '진릉조사공작조'를 구성한다. 구성원은 섬서성 문물관리위원회의 왕옥청, 낙충여 그리고 임동현문화관의 팽자건 등 3명이다.
조사조는 진릉의 동, 서, 북 삼면의 내성문을 파서 탐색할 때, 각문의 변에서 기와조각, 붉게 탄 흙 그리고 재등 유물, 유적을 발견한다. 이런 붉게 탄 흙과 재는 당시 사람이 인위적으로 방화한 것으로 추측했다. 1962년 8월 발표된 <진시황릉조사간보>의 결론에서는 이것이 아마도 항우의 소행일 거이라고 하였다. 왜냐하며 이 곳은 지상건축물이고, 간보의 추측은 그래도 어느 정도 이치에 맞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한서. 유향전>의 기록에 부합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재 병마용갱을 불태운 유적도 항우의 소행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견강부회이다.
그렇다면, 진릉의 지하궁전이 불태워졌다는 말은 어떻게 된 것일까? 이 일은 항우와 더욱 관계없다. <한서.유향전>의 기록에 따르면, 이것은 항우가 진릉을 파낸 후에 발생한 일이다: "나중에 목동이 양을 치다가 잃어버렸다. 원래 양은 한 지하동굴로 파고 들어갔던 것이다. 목동은 횃불을 들고 들어가 양을 찾았는데, 잘못하여 불을 내서 진시황이 관을 태워버렸다." 이 기록이 믿을만한지 아닌지, 진짜인지 가짜인지는 별론으로 하고, 진릉의 지궁을 불태운 것도 항우와는 무관하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진시황의 병마용에는 왜 많은 면적에 불탄 흔적이 남아있을까? 항우는 당연히 혐의자중의 한 명이다. 그외에 또 누가 있을까? 먼저 병마용갱이 불타고, 파괴된 원인을 찾아보자, 그러면 최대의 혹은 진정한 혐의자를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필자의 생각으로 병마용갱을 불태운 것은 최소한 이렇게 3가지 가능성이 있다고 본다.
첫째, 기술에 따른 처리수법. 현재 볼 수 있는 병마용은 굽지 않은 것이다. 즉, 완성품이 아니어서 쉽게 손괴된다. 병마용을 완성품으로 만들어 더욱 단단하게 하려면 현장에서 불로 구워서 단단하게 만들어야 보존하기 좋다. 이곳에서 굽는 것은 실로 하나의 기술이다. 고대인들은 묘를 만들 때, 묘의 벽을 더욱 단단하게 하기 위하여, 이런 방식으로 처리한 현상들이 있다. 이것은 현대고고발굴에서도 많이 발견된다. 원시건축에서 일반민간건축에서도 이런 '분소법(焚燒法)'으로벽을 단단하고, 땅을 견고하게 만드는 경우가 있다.
둘째, 장례풍속으로 인한 것. 중국은 지금까지도 명기(冥器, 무덤에 넣는 물건)을 불태우는 풍속이 있다. 병마용은 일종이 명기이다. 대량의 죄수신분의 장인들이 이 기회에 불만을 풀기 위하여 장인들이 미친 듯이 불사르고 파괴했을 수 있다. 어째든 이 때는 감독관이 와서 추궁할 리는 없으니까...이것도 좋은 해석이다. 왜 병마용이 인위적으로 파괴된 현상이 있는지에 대한.
셋째, 의외상황이다. 진릉의 공사는 대규모였다. 완공되지 못했다. 어떤 사람은 '중국최대의 미완공공사'라고 한다. 진시황은 동순 도중에 사망한 후 이어서 즉위한 진이세 호해는 당시 아주 격렬했던 정계와 사회의 모순을 잘 처리하지 못했다. 그리하여 조고정변과 진승오광의 난이 발생한다. 진나라제국이 무너지고, 농민군이 함양으로 다가올 때, 진이세는 할 수 없이 장한의 건의를 받아들여, 진릉을 만들고 있던 많은 범죄자와 노예를 풀어주고, 그들로 임시군대를 만든다. 이렇게 하여 30만 진압대군이 만들어져서 농민군에 대항한다. 이런 배경하에, 대충대충 진용을 땅 속에 묻는 과정에서 의외의 사건이 발생하여 진용이 불타버렸을 수 있다.
당연히 이상이 가능성은 개인적인 추측일 뿐이다. 이런 상황이 나타날 수 있는 것은 오직 한 사람밖에 없다. 바로 진이세이다. 진이세의 동의와 지시가 없으면, 일반인들이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