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택동이 탄복한 인물 `증국번`의 지혜
증국번 (曾國藩 ; 1811.11.26~1872.3.12)
청(淸)나라 말기의 정치가 ·학자로서 자는 백함(伯涵)이며 호는 척정(滌正)이다. 그리고 시호는 문정(文正)으로서 태평천국(太平天國)을 진압한 지도자이며 양무운동(洋務運動)의 추진자이다. 또한 성리학자이며, 문장가로도 유명하다. 할아버지 증옥병(曾玉屛)이 일으킨 부농(富農)의 가문에서 태어났다. 1833년 향시(鄕試)에 합격했고 이후 진사(進士) 시험에 급제하여 한림원(翰林院)에 보임되었는데, 한림원은 전국에서 뛰어난 학자들이 모여 있는 기관으로 궁중의 서식(書式) 업무를 담당했다. 그는 수도에서만 13년 이상 근무했다. 이 시기에 정호(程顥)·정이(程)·주희(朱熹) 같은 송대(宋代) 철학자들의 저작을 읽게 되었고 유교경전의 해석에 깊은 관심을 보였다.
그리고 1852년 예부우시랑(禮部右侍郞:文敎次官에 해당)으로 재직하였다. 하지만 1852년 어머니가 죽자, 고향으로 돌아가 3년간의 거상기간(居喪期間)을 보낼 수 있도록 허가해 줄 것을 조정에 건의했다. 이 허가는 곧 내려졌으나 거상기간 중 함풍제(咸豊帝)에 의해 다시 현직에 복귀하게 되었다. 1850년 무장봉기한 태평천국 군대가 1852년에 이르러서는 중국 중남부지방의 비옥한 양쯔 강 유역을 장악하여 청의 안전을 심각하게 위협했기 때문이다.
결국 태평천국군이 진격해오자 황제로부터 후난[湖南]을 방위하라는 명령을 받고, 농민과 병사를 의용군(湘軍)으로 편제하는 한편, 장강수군(長江水軍)도 조직하여 태평천국 진압을 주도하였다. 황제와 만주 귀족은 한인세력의 진출을 두려워하여 그의 활동을 제한하였으나, 청왕조에 대한 충성을 맹세함으로써 점차 신임을 얻었다. 1860년 양강총독(兩江總督)에 임명되어 양쯔강[揚子江] 유역에서의 태평천국 토벌의 전권을 수여받았다. 그는 이홍장(李鴻章)에게 회군(淮軍)을 조직하도록 하고, 영국과 프랑스군의 원조를 받아들여 난징[南京]을 공략, 그 탈환에 성공하였다.
양강총독 또는 일시 직례총독(直隷總督)으로서 구질서의 재흥에 노력하고 정치의 쇄신 ·감세(減稅), 염군(捻軍:폭동을 일으킨 反淸的 무장집단) 등 화북농민폭동의 진압하였다. 이 당시 청이 강남(江南)과 화중 지역에서 발생한 태평천국운동(1850~64)의 진압에 몰두해 있을 때 허난 성[河南省], 산둥 성[山東省], 안후이 성[安徽省] 등의 화북(華北)지방을 중심으로 일어났다. 불교의 영향을 받은 백련교(白蓮敎) 비밀결사의 한 지파인 염당(捻黨)은 19세기초부터 산발적인 폭동을 조장하고 있던 소금 밀매자, 탈주한 군인, 농민 등으로 구성된 집단이었다. 1850년대의 홍수로 빚어진 기근과 더불어 정부가 태평천국운동의 진압에 몰두하고 있는 것에 자극받아, 몇몇 염 집단이 1852~53년 장낙행(張樂行)의 지도 아래 연합을 형성해 급속히 세력을 확대해나가기 시작했다. 3만~5만 명의 병사로 5군(五軍)을 조직한 염군은 화북지방을 중심으로 반란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1863년 그들의 근거지가 점령되고, 장낙행이 체포되어 살해되자 세력이 크게 위축되었다. 그러나 그뒤 염군은 곧 재조직되었고, 태평천국의 수도인 난징[南京]이 함락되던 1864년에 살아남았던 태평군과 결합하여 저항을 계속했다. 이때 그들은 기동력 있는 기마병을 이용해 청군의 약점을 공격하고 근거지로 후퇴하는, 즉 치고 빠지는 게릴라 전술을 폈다. 하지만 청은 태평천국의 문제를 해결한 뒤 염군 반란에 관심을 집중하고 염군 봉쇄정책을 강력하게 시행하고 증국번의 강력한 진압으로 반란군을 점차 쇠퇴시켜 결국 진압했다.
서유럽 제국에 대한 양보 ·타협정책 등에 따른 ‘동치중흥(同治中興)’이라 부르는 구질서의 상대적 안정에 기여하였다. 그 사이에 유럽의 군사기술과 무기 도입으로 군사력 강화를 제창하여 최초로 유학생을 미국에 파견하였으며, 안칭[安慶]에 서양 기술을 도입한 최초의 무기공장을 설립하는 등 ‘양무운동’ 초기의 추진자가 되었다. 한편, 중국 최대의 애국적 사상가로 높이 평가받기도 하며, 혹평을 받기도 한다. 저서로 《증문정공전집(曾文正公全集)》(174권) 《증문정공수서일기(曾文正公手書日記)》(40권) 등이 있다.
변화가 있다면 틀림없이 변하지 않는 것도 있다.
증국번은 처세할 때의 원칙은 언제라도 바뀔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는 이 원칙에는 인생의 근본이 담겨 있어 절대로 잊어서는 안 되고 만일 그 근본을 잊었다면 나머지 변화도 모두 의미를 상실한다고 보았다.
증국번의 변화는 불변을 기초로 한다. 증국번은 언제나 진심으로 사람을 대할 것을 주장했다.
사람에게는 원칙이 잇어야 한다.
그리고 사람을 대할 때는 믿음을 중요시하는 것이 처세의 기본이다.
'믿음'을 대단히 중요시했던 증국번에게 믿음이란 강호에서의 의리보다는 사람을 대할 때의 책략과도 같았다.
성심을 가지면 다른 사람의 신임을 얻을 수 있고 좋은 관계를 유지할 수 있으며 공동으로 더 큰 이익을 추구할 수 있다는 의미였다.
양계초는 증국번의 성공이 마음과 행동을 바르게 하도록 심신을 닦는 修身과 그의 강한 자제력(愼獨)에 있다고 보았다.
'수신'해야 자기의 사상과 언행을 바로 잡을 수 있고, 그를 통해 비로소 남의 잘못을 바로 잡고 천하를 바로잡을 수 있게 된다.
증국번의 일생에서 충성과 겸허, 검약 정신은 절대로 변하지 않았다.
증국번은 불변의 원칙으로 숭고한 인격을 형성했고, 광범위한 계층의 존경을 받았으니 이 점들은 많은 인재를 모으고 대업을
성공할 수 있었던 필수 요소가 되었다.
어리석은 자는 지혜로운 자를 이길 수 없고, 지혜로운 자는 행동하는 자를 이길 수 없고, 행동하는 자는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자를 이길 수 없는 법이다.
작심삼일이라는 말처럼 작심은 쉽지만, 의지가 박약한 사람이 열에 아홉이니 성공이란 역시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그는(증국번;중국의 정치가) 작은 덕이라도 반드시 실천했고, 사소한 원한도 잊지 않고 되갚는 치밀하고 꼼꼼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그러나 이러한 성격이 훗날 태평천국의 난을 진압하는 과정에 투영되어 많은 인명을 살상했다는 오명을 얻기도 했다.
-처세: 중국 최고 전략가 증국번의 세상을 이기는 법 18 중에서..
"근대의 사람 중 오로지 증국번에게만 탄복할 뿐이다. 혼란을 수습함에 하나의 결점도 없이 처리하는 점을 볼 때, 오늘날 누구에게 그 역할을 맡긴다 한들 가능하겠는가?"
중국 혁명의 위대한 지도자로 꼽히는 모택동(毛澤東)은 생전, 청나라 말기의 정치가이자 학자 증국번(曾國藩)을 이같이 칭송했다고 한다.
"정신은 쓰면 쓸수록 더욱 뛰어나게 됨으로 몸이 약하다고 지나치게 아낄 까닭이 없다. 지혜란 고난을 겪을수록 밝아지므로 상황이 나쁘다고 의기소침할 필요가 없다." "마음은 늘 써야 활발해지고 쓰지 않으면 막힌다. 늘 쓰면 세밀해지고 쓰지 않으면 거칠어진다."
모택동이 젊은 시절, 일기 '강당록'에 적은 문구들도 증국번의 격언과 경구를 인용한 것. 그가 증국번의 처세법에 얼마나 매료돼있었는지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정치에 있어선 라이벌이었지만, 마음에 품은 스승은 하나였던 모양이다. 장개석(蔣介石) 역시 증국번의 심신수련법에 큰 관심을 기울였다고 한다. 그의 문집과 유작집에서 마음을 다스리는 내용을 발췌해 만든 책을 황포군관학교의 교재로 썼을 정도.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가 19세기 인물, 증국번의 삶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내일의 근본은 오늘에 있고, 오늘의 근본은 어제에 있을 터. 과거 태평천국의 난을 다스렸던 경륜가 증국번의 삶을 통해, 현재의 우리가 나아갈 길을 모색할 수 있지 않겠는가.
< 인생조종법 > (시아출판사. 2006)은 증국번이 자신의 삶을 어떻게 다루었는지, 그 지혜를 일곱 가지로 정리해 소개하는 책. 서유럽으로부터 근대기술을 도입해, 청의 자강(自强)을 시도한 '양무운동'의 추진자, 주자학 중심의 학문 연구와 도덕적 수양에 정진한 학자, 태평천국을 진압한 지도자 등 증국번의 다양한 면모도 함께 엿볼 수 있다.
증국번이 인생을 조종한 비법 7가지 ▲뜻을 세움 ▲나를 강하게 함 ▲겸손 ▲변화를 꿰뚫어 봄 ▲권력의 운용 ▲기회 포착 ▲임기응변 중, 특히 눈에 띄는 것은 그 누구보다 자신에게 엄격했다는 사실이다.
"자기의 약점을 용서하지 말라. 그것은 잘못이다. 절대로 스스로 물러설 여지를 남기지 말아야 한다. 꿋꿋하게 버틴다는 것, 이것이 증국번의 인생철학이다." (제1장 '뜻을 세움' 중에서)
자기계발을 넘어 자기를 '경영'하는 시대가 도래했다. 약점을 스스로 꾸짖고, 이를 겉으로 드러내지 않음을 신념으로 삼았던 증국번의 삶은 현대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하겠다.
증국번 (曾國藩)은 청(淸)나라 말기의 정치가,학자로서 자는 백함(伯涵)이며 호는 척정(滌正)이다. 시호는 문정(文正)으로서 태평천국(太平天國) 농민봉기를 진압하면서 정치무대에 두각을 나타냈다. 그는 양무운동(洋務運動) 추진자이며 또한 성리학자이고 문장가로도 유명하다. 호남성 상향현의 부유한 농가에서 태어난 그는 1833년 향시(鄕試)에 합격했고 이후 진사(進士) 시험에 급제하여 한림원(翰林院)에 보임되었는데 그는 수도에서만 13년 이상 근무했다. 이 시기에 정호(程顥),정이(程 ),주희(朱熹) 같은 송대(宋代) 철학자들의 저작을 읽게 되었고 유교경전 해석에 깊은 관심을 보였다. 1850년 태평천국 군대가 진격해오자 증국번은 황제로부터 호남을 방위하라는 명령을 받고 장강수군(長江水軍)을 조직하여 태평천국에 대한 진압을 주도했다. 1860년 양강총독(兩江總督)에 임명된 증국번은 장강 유역에서 태평천국 군대 토벌에 주력했다. 증국번은 농민봉기를 진압하면서 두각을 나타낸 후 세력을 확장하는 한편 [양무운동(洋務運動)]을 적극 추진했다. 그는 군수공업인 안경군기소(安慶軍機所) 세웠는데 이는 중국 양무운동의 시작으로 되였다. 그 후로 증국번은 미국의 기계를 사들여 상해에 병기, 선박을 주로 제조하는 강남제조총국, 금릉기기국, 복주선정국을 세웠다. 이 군수공장은 근대 공장이 중국에 설립되는 출발점으로 되였다. 증국번은 서양을 알기 위해서는 언어습득이 중요하다고 인식하여 동문관(同文館)을 설치했고 유학생들을 외국에 파견했다. 증국번 등이 추진한 양무운동은 서방세계로 향하는 창구로 되였으며 서방의 선진적인 문화를 섭취해 자국의 과학기술 발전을 추진한 대담한 탐구로 되였으며 중국 자본주의 산생과 발전을 자극했다. 증국번은 청나라가 성세로부터 몰락하는 과도 시기에 정치, 군사, 문화, 경제 등 여러 분야에서 괄목할만한 영향을 미친 인물로, 또한 후세에 쟁론의 대상으로 된 인물로 되였다. 저서로 <증문정공전집(曾文正公全集)>,<증문정공수서일기(曾文正公手書日記)> 등이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