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세계사/세계사

이슬람 예술-건축

구름위 2013. 1. 29. 11:24

무함마드가 가브리엘에게 계시를 받고, 메디나로 신도들을 이끌고 도피하고, 결국에는 메카로 입성, 카바사원에서 신상들을 모조리 때려부순 이래로 무슬림들은 이 땅에 많은 건축물을 세웠고, 또 그만큼 때려부수었다.

처음에 이슬람이 아직 햇병아리이던 시절(얼굴에 수염이 잔뜩 난 아저씨들의 공동체를 그렇게 부를수 있다면)에는 건축물이라고 해봤자 모스크나 집, 자그마한 시장이 다였다. 뭐 돈이 넘쳐나는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뭔가 유별난 건축술이 있는것도 아니었으니까.

그러다 아랍인들이 이집트, 시리아, 페르시아 등지로 튀어나가게 됨에 따라 이들은 신세계를 경험하게 된다. 그 지역에 있던 비잔티움이나 페르시아가 어떤 나라인가. 독창적인 문명 하자면 어디에 내놓아도 손색이 없는 나라들이다. 아랍인들은 그런 나라의 땅을 그것도 어디 머나먼 촌구석도 아닌 중심부를 집어먹게 되었다. 페르시아의 경우에는 그 정도가 좀 과해 수도까지 점령해버렸지만.

이들을 정복한 아랍인들은 메카 정복때와는 달리 일단 망치를 들고 성내로 난입하는 짓거리는 하지 않았다. 대신 관광을 했다. 맨날 모래로 된 건물이나 오두막, 천막따위나 보다 페르시아의 화려한 궁전, 비잔티움의 웅장한 교회를 보게 된 이들은 크게 감명깊었고, 너무나 감명깊었던 나머지 일부를 좀 기념품으로 떼어가기도 했다. 결국 이 화려한 두 문화권을 장악한 이슬람 세력과 그 세력의 건축예술은 그 후에도 계속 비잔티움과 페르시아의 영향을 띄게 된다.

초창기 무함마드가 메디나로 도피했을 때, 당시 무슬림들은 가난뱅이였고 건축물이고 뭐고 신경쓸 겨를이 없었다. 그러나 예배는 드려야했기에 이들은 무함마드의 집에서 예배를 드려야만 했다.


<무함마드의 집>

무함마드의 집은 전형적인 아랍식 저택이었다. 긴 회랑과 여자들이 사는 안채, 그리고 넓은 안마당. 이러한 구조는 후대의 모스크의 전형적인 구조가 되었다. 긴 회랑은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 되었고, 여기에 키블라(예배 방향)으로 향한 예배실이 붙었으며, 안마당은 사람들이 모이고 손을 씻는 곳이 되었다.(이슬람교에서는 예배를 하기 전에 항상 손을 씻어야한다. 정 안되면 모래로라도 씻어야 한다)

그림에서도 보이듯이 이 모스크(겸 주택)에는 우리가 모스크에서 흔히 보는 미나렛(첨탑)이 없다. 모스크에 있는 여러 시설물들은 후대에 시간이 지나면서 추가된 것이다. 미나렛이 없던 시기에는 무아진(예배시간을 알리는 사람)이 아잔(예배시간을 알리는 소리)을 무함마드의 맞은 편에 있는 예언자의 친구인 압둘라 이븐 오마르의 집 꼭대기에서 그의 노예인 빌랄 이븐 라바흐가 했다고 전해진다. 참고로, 아잔을 외치는 예식은 유태교나 기독교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모스크에는 또한 민바르(설교대)라고 불리는게 있다. 이는 일종의 층계와 단을 결합한 것인데, 칼랍이라는 친구가 처음 도입했다. 무함마드는 이 층계의 3단까지 올라가서 설교를 했기에 그 후의 이맘(예배인도자)들은 계단의 2단까지만 올라가서 설교를 행했다.

미흐랍(예배 방향을 알리는 표시. 주로 벽에 한다)역시 이 시대에는 별볼일 없었다. 무함마드는 창이나 지팡이를 꽂아서 이것을 표시했다고 한다.

모스크에서는 오조리 신에게만 절해야 하고, 신을 공경해야만 한다. 모스크에 사람을 그린 모자이크나 벽화가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자칫 미흐랍에 사람이라도 그려놓기라도 하면 우상에게 절하는 꼴이 되는게 아닌가? 이를 우려한 무함마드와 초기 무슬림들은 모스크에 사람의 장식을 하는걸 철저히 피했다. 그러나 휑한 벽으로 남겨두었다가는 이슬람이 가난한 종교라는 인식을 불러일으킬 수 있기에, 쿠란의 구절을 이용해서 장식하곤 했다. 우마이야 왕조의 다마스쿠스의 모스크에는 천국을 묘사한 벽화가 남아 있다.



<카바 사원>

초기 모스크중 또한 중요한 것은 카바사원이다. 이 건물 역시 무함마드의 집처럼 넓은 회랑에 둘려쌓여 있다. 그러나 키블라 같은 것은 없는에, 이는 메카의 카바사원에서는 어느쪽으로 절하던간에 신을 느낄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안뜰 가운데에는 손을 씻는 정원이 아닌 흑석(ka b'ah)이 있으며 이를 검은 비단(kiswah)가 감싸고 있다. 그 외 아브라함(이브라힘)이 기도를 드렸다는 장소와 하갈과 그의 아들 이스마일을 위해 나왔다는 잠잠 우물등 무슬림(덤으로 기독교도)들에게 성스러운 장소가 가득하다. 그래서 그런지 이곳 메카는 비무슬림의 출입은 엄격히 제한되는 곳이다. 주위의 미나렛은 총 7개로, 이는 후대에 이곳을 정복한 오스만의 술탄이나 압바스조의 칼리프등에 의해 건설된 것이다.

이슬람 세력이 확장하여 우마이야 왕조가 시리아, 이집트, 페르시아 등지를 장악하자 이들은 곧 모래로 된 조악한 집에는 질려버렸다. 당장 비잔티움의 화려한 부조장식이나 모자이크, 페르시아의 당초문등을 그들의 건축에 도입하기 시작했다. 특히 그들의 마음을 끈건 바로 돔이었고, 그러한 돔을 이용한 우마이야 왕조의 대표적 건축이 바로 예루살렘에 있는 바위의 돔이다.



<바위의 돔>

이 건축물을 때로는 오마르 모스크 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사실 이는 잘못된 이름이다. 이 건물은 우마이야 왕조의 압둘 말리크와 그의 아들 알 왈리드 1세에 의해 지어졌으며, 모스크도 아니다. 무함마드가 메카에서 순식간에 날아온 곳은 이곳이 맞지만, 그것을 기념하는 모스크(알 아크사 모스크)는 다른 곳에 있다. 이슬람 건축=죄다 모스크 라는 식에서 나온 이름이 되겠다.


<바위의 돔은 내부구조>

위의 그림에서 보이듯이, 이 건축물에는 예배방향을 알리는 키블라나 설교대인 민바르, 안마당이든 뭐든 아무것도 없다. 단지 기둥들과 가운데 무함마드가 날아오고 칼리프 우마르가 예배를 올렸다는 돌덩어리만 하나 있다. 그래서 이름이 '바위의 돔' 이다.

이 건축물의 건설 동기는 사실 명확하지가 않다. 무함마드의 승천을 기념하기 위해 지어졌다는 말이 있지만 건물에 복잡하게 쓰여있는 쿠란의 구절들은 그런것과 상관이 없다. 칼리프 압둘 말리크가 메카를 대체하기 위해 지었다는 말도 있다(예루살렘은 원래 기도방향이었다. 후에 메카로 바뀐다) 당시 메카는 우마이야 왕조에 적대적인 메카와 메디나 지역의 유지인 앗 주바이르가 칼리프를 칭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압둘 말리크가 미쳐서 돌지 않은 이상 그런 짓을 할 리는 없다고 생각한다.
가장 설득력 있는 의견은 이곳에 있는 기독교도의 성묘 교회등에 견주에 '우리 무슬림도 한다면 한다' 라는 것을 보여주어 무슬림들의 자긍심을 높히고, 기독교도의 삼위일체설에 일침을 놓기 위해서 지었다는 설이다. 사실 뭐 무슬림이 예루살렘을 정복했다는 것에서 이미 이곳의 기독교도나 유태교도는 한방 먹고 들어가는 셈이지만 말이다.

이처럼 성도 예루살렘에서 기독교도의 성묘 교회를 견제하기 위해 지어놨을 정도이니 무슬림 군주들이 이 건물을 아무렇게나 대할 수 없었다. 오스만의 술레이만 대제는 이곳의 겉표면을 이즈니크에서 구워온 파란색 자기 타일로 장식했다. 돔은 원래 황동으로 되어 있었으나 1448년 납으로 교체했고, 1964년 대대적 개보수를 통해 청동과 알루미늄을 결합한 금속으로 대체했다. 나중에는 한술 더떠 1993년 요르단의 후세인 왕은 이곳의 돔을 감쌀 순금을 지원, 바위의 돔은 진짜 황금의 돔이 되어버렸다.

우마이야 왕조의 '진짜 모스크'는 수도인 다마스쿠스에 있다.



<다마스쿠스 대모스크의 안마당>


<다마스쿠스 모스크 내부>

이 건물은 원래 비잔티움의 바실리카형 교회였는데, 모스크로 바뀌면서 이런저런 건물이 많이 달라붙었다. 전형적인 우마이야 양식의 모스크로, 길다란 회랑이 사방으로 안뜰을 감싸고 있고, 안뜰(사흔이라 불린다)에는 손을 씻는 정원이 있으며, 기둥이 모든 면마다 길게 늘어져 있다. 남쪽이 바로 예배실이다. 지붕에 있는 돔은 나중에 지어졌다.

다마스쿠스 모스크는 최초로 미나렛이란게 붙은 건물이다. 이전에 시리아에 있던 건물 귀퉁이마다 조그마한 탑을 세우는것에 영향을 받은 무슬림은 정복을 통해 얻은 막대한 자금력을 동원, 높다란 탑을 세웠다. 이 탑은 안마당의 바깥쪽, 즉 들어오는 문 옆에 세워졌는데, 이도 우마이야 왕조의 특색이다. 또한 제대로 모양을 갖춘 미흐랍이 최초로 등장하기도 한다. 이 건물은 압둘 말리크의 아들 알 왈리드 1세에 의해 건설되었는데, 당시 메디나 총독이던 우마르 이븐 압둘아지즈에 의해 미흐랍이 도입되었다고 한다.

당시 무슬림 세계는 꼭 막힌 수염달린 꽁생원들만 사는 세계가 아니었다. 메카로 순례를 다니거나 돈을 벌기 위해 장사를 다니거나, 아니면 그냥 할일없이 돌아다니던 사람들로 가득찬 세계였다. 다마스쿠스에 지어진 이런 모스크는 저기 머나먼 북아프리카의 요새도시, 카이라완에까지도 영향을 주었다.



<카이라완 모스크-가운데에 안마당을 끼고, 안마당 바깥쪽에 미나렛이 서 있다>

지금까지는 '신의 집' 모스크에 대한 이야기를 했으니 이제는 '왕의 집' 즉 궁전에 대한 얘기를 해볼까 한다.(서민의 집에 대해서도 쓰고는 싶었으나 능력 밖의 일이었던지라...)

우마이야 왕조의 군주들은 대개 알콜중독자거나 깡패거나 사냥꾼이거나 여하튼 놀기에 환장한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수도에 있다가는 이런것을 마음껏 즐기기는 커녕 독실한 신도나 율법사, 신하들이 달려들것이 뻔한지라 이들은 사막으로 도피해버렸다. 꾸사이드 암라, 키르바트 알마흐자르, 자발 사이스, 까스르 알 하이르 알 가르비, 까스르 알 하이르 알 샤르끼등등의 궁전은 죄다 사막에 있다. 어지간히 신하들이 싫었던 모양이다. 심지어는 나름대로 경건하고 올바르게 살았다는 칼리프 히샴마저 이곳에 머물렀다고 한다. 게다가 원래 사막에서 나고 자란 아랍인이니만큼, 사막에 대한 공포감은 우리보다 훨씬 덜했을 것이다.

우리나라 세계사 교과서에서는 이슬람에서는 사람의 묘사를 금지한다고 가르친다. 좋다. 그러고서는 다음줄에 이슬람 세계의 활달성 어쩌구저쩌구하면서 '사람이 그려져 있는 이슬람 세밀화'(십중팔구는 이야기책 마카마트의 삽화다)를 제시한다. 뭐야, 바로 윗줄에 사람 묘사 금지라고 안했어? 근데 이건 뭐야? 둘다 맞다. 사원이나 쿠란에서는 금지했고, 그 외의 분야에서도 사람에 대한 묘사는 좋지 않게 받아들여졌지만 그려지기는 했다. 이건 다음 글에서 더 자세히 설명하겠다.

이런 궁전에서는 벽화에 사람이 그려져 있는게 자주 보인다. 춤을 추는 페르시아의 무희, 같은 그림말이다. 일상에서의 일탈을 위한 건물이고, 게다가 아직 유목시절의 전통을 가지고 있던 우마이야 왕조의 칼리프들은 종교적 계율에는 크게 신경쓰지 않았다. 나중에 압바스조의 궁전에서도 술을 따르는 여인들의 벽화가 있다. 또한 그 외에도 비잔티움과 페르시아의 영향을 받은 부조 장식이나 당초문 장식이 있으며, 목욕탕은 꼭 달려있다.



<므샤타 궁전의 스투코 장식. 이런 것은 비잔티움의 영향을 받았다>

아랍인 우월주의를 강조한 우마이야조가 무너지고, 압바스조가 들어서게 되었다. 우마이야조의 영역은 넓었지만, 왕조의 통합력이 대한민국 국회의원보다 더 떨어지는지라 우마이야만의 양식은 널리 퍼지지 못했다. 그러한 전파는 뒤를 이은 진정한 이슬람제국, 압바스조에 의해 이루어졌다.
 압바스조 칼리프들은 자신들의 궁전을 가지고 싶어했다. 그들은 일단 우마이야 왕조의 궁전을 눈에 뵈는 대로 몽땅 때려부수었고, 이미 죽어버린 우마이야 칼리프들도 죄다 끌어내서 매질을 해버렸다. 한술더떠 그들은 자신의 전임자의 궁전들도 신나게 때려부수다가 결국에는 몽골군에 의해서 박살이 나고 말았다.

궁전뿐만 아니라 이들은 도시도 자기것만을 가지고 싶어했고, 그렇게 해서 지어진 것이 메디나트 알 살람-평화의 도시(사실은 전혀 그렇지 않지만)-또는 바그다드(하늘이 준 곳)이다. 높이가 무려 '40m'라는 두겹성벽에 네 개의 대문이 감싸던 원형도시로, 원의 중심에는 대모스크가 있었고 모스크의 키블라 방향에 두 개의 돔으로 된 궁전이 있었다. 구조가 이런지라 사람들이 모스크를 가기 위해서는 궁전을 지나야 했는데, 이게 못마땅했던 칼리프들은 궁전을 티그리스 강 연안으로 옮겨버린다. 이렇게 바그다드의 시가지는 둘로 나뉘게 된다. 궁전이 원체 큰지라 4000명의 백인내시, 7000명의 흑인내시, 4000명의 백인노예가 있었다고 전해진다. 수행원만 15000명이다. 물론 현실주의적인 면을 중시하는 이븐 할둔이 이 글을 봤다면 '낚이는 놈이 ㅄ' 이라고 했겠지만 말이다.

칼리프들이 편집증 환자마냥 연신 궁전을 때려부수어도 원체 지은게 많은지라 포화상태에 빠지고는 했다. 11세기 바그다드를 통치한 셀주크의 술탄 투그릴 벡은 자신의 궁전을 짓기 위해 강 연안의 궁전 '170개'를 철거하라고 명했다. 물론 저 170개의 궁전이 자금성이나 경복궁같은 궁전 생각하면 곤란하다. 917년 칼리프 알 무크타디르를 방문한 비잔티움 사절은 칼리프 한 사람 만나자고 궁전을 23개를 통과하고 3만 8천장의 카펫과 2만 2천장의 커튼을 지나쳐야만 했다. 게다가 인공 연못에 기계로 된 새들까지 있었다나. 이런 상황에서 둘의 관계가 좋아질리가 없다. 칼리프는 기다리느라 지치고, 사절단은 걷느라 지치고.

자신들이 끌어온 노예들이 자신에게 칼끝을 돌리자 그제야 자신들의 멍청함을 깨달은 칼리프들은 바그다드를 버리고 근처의 사마라로 도망가버렸다. 거기서도 엄청난 수의 궁전과 도시를 건설했다. 현재 이 도시는 완전히 폐허만 남은 유령의 도시가 되어버렸지만, 30개의 궁전, 6314개의 건물 폐허는 바그다드의 칼리프들이 약해졌다고는 하나 맘먹고 돈을 처들이면 어떤 결과가 나오는지를 보여주었다.


<사마라의 알 무타와킬 모스크>

칼리프들은 사마라에도 모스크를 지었다. 넓이는 무려 3만 8000제곱미터. 건축물 자체는 우마이야 왕조의 양식으로, 회랑이 안뜰을 감싸고 있고 미나렛이 회랑 바깥쪽 입구 가까이 있는 형태이다. 세계제국 압바스조 답게 페르시아의 영향을 받은 내부장식, 중국의 영향을 받아 만들어진 이슬람식 자기, 인도의 영향을 받은 창문 아치등이 남아 있다고 한다.(죄다 박살이 나버려서 비전문가인 나로써는 흙더미밖에 안보인다.)그러나 주목할 만한것은 바로 저 미나렛이다.



<사마라 모스크의 미나렛>

나선형으로 빙빙 올라간 형태가 돋보이는 이 탑은 꽤나 높이가 높다. 거의 높이가 50m 가량 된다. 문제는 이 위에 사람이 올라가야 한다는 것. 걸어서 올라갔다가는 한세월 걸리니 말을 타고 올라갔다고 한다.

미나렛의 원래 목적은 예배 시간을 알리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렇게 미나렛의 높이가 대책없어지면 아름답고 높은 목소리로 예배 시간을 알려야 할 무아진은 아잔이 아니라 공포로 인해 질려버린 목소리로 절규했음에 틀림없다. 결국 나중에 갈수록 미나렛이 대책없어짐에 따라 아잔은 다른 곳에서 하게 이르렀다.

무아진의 공포에 질린 절규마냥 압바스조는 결국 비명을 지르며 무너져내렸다. 몽골군의 채찍이 닥치기 전에 이미 압바스조의 영향력은 무너저버렸고, 지방의 군주들은 각자의 세력을 획득했다.

가장 대표적인 세력은 저 멀리 이베리아 반도의 후우마이야 왕조이다. 우마이야 가문의 생존자 하나가 건너가 세운 이 왕조는 압바스조의 가장 유력한 경쟁자가 되었다. 이 왕조의 수도인 코르도바는 바그다드에 비할 정도로 크고 부유한 도시였고, 건축물 역시 바그다드 못지 않았다.



<코르도바의 대모스크>

후우마이야 왕조의 건국자 아브드 알 라흐만 1세에 의해 최초로 건설된 이 모스크는 왕조가 끝장날때까지 계속 개조, 확장이 이루어졌고, 아예 레콩키스타가 끝난 이후에도 개조(모스크를 교회로 바꾸었다)가 이루어졌다. 이러한 아치를 말굽 양식이라고 부르는데, 무슬림 치하 이베리아 반도의 특색이다. 위쪽의 아치를 이루는 기둥과 아래쪽의 아치를 버티는 기둥의 재질이 서로 다른것은 서고트족과 로마시대의 짧은 기둥을 재활용하기 위한 것이다. 좋게 보면 자원재활용, 나쁘게 보면 문화재 파괴다. 문화재를 파괴해서 문화재를 지었으니 무죄라고도 볼 수 있으려나.



<코르도바의 대모스크. 내부>
현재의 넓이는 23400제곱미터, 기둥들이 19줄 쭉 늘어져있으며, 1523년 카를 5세의 명에 의해 안쪽에 있는 기둥 63개가 치워지고 성당이 들어섰다. 카를 5세는 지어진 성당을 보고 '전에는 특색 있었는데 이제는 그 특색이 사라져버렸다' 라고 한탄했다고 한다. 아브드 알 라흐만 3세는 당시 유행에 따라 모스크 주위에 미나렛을 지었는데 현재는 남아있지 않다. 이 사람은 후우마이야조의 전성기를 이끈 칼리프이고, 화려한 건물도 엄청 지었건만 현재까지 남은게 별로 없다.


<미흐랍>

미흐랍은 그야말로 엄청난 자원을 쏟아부어서 지었다. 칼리프 알 하캄 2세는 비잔티움의 황제에게서 받은 유리와 금 1만 6000kg을 녹여서 높이가 7.85m에 달하는 미흐랍을 지었다. 다만 문제라면 겉모습에 너무 중시한 나머지 미흐랍의 최대 목적-예배 방향을 인도-를 수행하지 못했다. 기술자들이 우마이야 왕조의 수도였던 다마스쿠스의 모스크에 집착한 나머지 키블라를 다마스쿠스와 똑같이 남쪽으로 잡아버린 것이다. 당연히 시리아와 스페인에서의 키블라는 다를 수 밖에 없다.

후우마이야 왕조의 화려한 통치가 끝나고, 한참의 혼란기를 겪은 뒤 이베리아 반도는 베르베르족 출신의 알모라비드나 알모하드 왕조가 들어섰다. 이 왕조들은 혜성같이 등장해서 운석같이 추락하고 말았고, 그 뒤를 마지막 이베리아의 이슬람 왕조인 나스르 왕조가 들어섰다. 이 왕조에 대해서는 아무도 기대하지 않았지만, 그러나 이 친구들은 이베리아에 마지막으로 아름다운 건축물을 하나 남기고 사라진다.


<알함브라 궁전>

나스르 왕조의 창시자 무함마드 1세부터 시작, 후대의 유수프 1세, 무함마드 5세에 들어서야 비로소 완공되는 이 건물은 겉모습은 그냥 그저 그렇다. 그냥 언덕 위의 불그스름한 성채이다. 뭐, 성채 면에서 보자면 충분히 두터운 벽에 22개의 탑들로 튼튼하게 방어가 되어 있으니 훌륭한 성채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알함브라의 진면목은 내부에 있다.

법의 문, 일곱 하늘의 문, 철의 문, 무기의 문 네 개의 정문을 통과해 들어가면 궁전이 나온다. 내부는 왕을 상징하는 황금색, 힘을 상징하는 붉은색, 천국을 상징하는 녹색, 천국에 들어가고픈 마음을 표현한 푸른색으로 채색되었으며, 소위 무카르나스라고 불리는 양식으로 지붕을 장식했다.

 



<아벤세라헤스의 방. 소위 종유석 양식>

무카르나스란 아래쪽으로부터 안쪽으로 파고 들어간 뒤, 위쪽에서 남은 부분을 또 파고 들어간다. 이런 식으로 계속 나아가다 보면 결국 맨 위에서 만나게 된다. 이러한 방식을 통해 원추를 반으로 잘라놓고 안쪽을 기하학적인 모양으로 파낸 것같은 효과를 보게 된다.



<사자의 궁. 정원에 있는 12사자가 새겨진 분수>

알함브라는 안과 밖의 구분이 명확하지 않다. 안뜰에 있는 분수에서 흘러나온 물이 실내로 흐르며, 안뜰에 들어온 햇빛이 실내를 비춘다. 또한 시리아나 북아프리카 등지와는 달리 목재가 풍부했기에, 도자기 타일로 내부를 치장하는 대신 나무 조각으로 내부나 천장등을 장식했으며, 상아를 같이 사용하기도 했다.

이집트에는 파티마 왕조가 들어섰다. 파티마 왕조는 이전의 푸스타트 근처에 새로이 '승리의 도시'-우리는 이를 카이로라고 부른다-를 지었다. 이 카이로에 최초로 지은 건축물이 바로 알 아즈하르 모스크이다.




<알 아즈하르 모스크. 우리가 아는 알 아즈하르 대학과 이어져있다>

이슬람 세계에서 모스크는 단순히 예배만 하는 그런 장소가 아니다. 사람들이 모이기도 하고, 이야기도 하고, 또한 오만가지 출처불명의 소문이 퍼져나가기도 하며, 공부도 하는 곳이다. 다만 싸움질은 금지다. 알 아즈하르 모스크는 그러한 예를 보여준다. 모스크에 대학(옛날에는 마드라사-신학교)가 붙어있는 것이다. 모스크의 양식 자체는 우리가 위에서 보아왔던 형태와 비슷하다.

파티마조의 뒤를 이은 살라딘의 아이유브 왕조는 십자군하고 싸우느라 바뻐서, 나중에는 자기들끼리 싸우느라 바뻐서, 이 모든 문제가 해결된 이후에는 맘루크들한테 학살당하느라 바뻐서 이렇다할 건축물을 세울 여유가 없었다. 눈에 띄는 건물은 이 시대를 건너 뛰어 엄격한 군사문화가 지배한 맘루크조에서 재등장한다.

맘루크조의 술탄은 세습이라기보다는 실력의 의한 선출이었다. 듣기에는 매우 좋아보인다. 실력이 있는 사람이 지배자가 된다. 이 매우 합리적인 방식이다. 근데 누가 실력이 있는 사람인가? 문제는 여기서 생긴다. 칼싸움을 잘하는 사람? 샤리아에 능한 사람? 아니면 그냥 돈많은 사람? 서로가 술탄을 하겠다고 싸움질을 해대는 판이니 술탄의 권위가 약해질 수 밖에 없고, 게다가 죄다 시작은 노예인지라(맘루크조의 지배계층은 주로 노예출신이다. 그래서 나라 이름도 맘루크(노예병사)이고)술탄에 대한 대단한 존경심 따위가 있을리가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술탄은 자신의 권위를 어떻게든 세워야했고, 또한 자신은 끝끝내 인정하려 들지 않았겠지만얼마안가 수의에 싸여 실려나갈 몸이니 무덤이 필요했다. 이런 목적에서 세워진 맘루크조의 건물중 가장 인상 깊은 건축물이 바로 술탄 하산의 모스크이다.



<술탄 하산의 모스크. 사진 중앙에 있는 탑 하나짜리 모스크다>

맘루크조의 수도 카이로는(이전에는 푸스타트) 일찍부터 도시화가 빨리 진행되었고, 인구도 많이 살았다. 이런 도시에 푸른색 타일로 건물을 덮었다가는 확 튀어버릴 수 있었지만 맘루크 건축가들은 확 튀는 대신 주위 건물과 조화를 이루는 방식을 택했다. 그래서 건축가들은 석회암으로 건물의 외벽을 덮었다.


<술탄 하산 모스크의 입구에 있는 무카르나스. 옆에 있는 건 술탄 카이트베이 모스크의 미나렛이다>

우리가 알함브라에서 봤던 무카르나스는 여기에서도 사용되었다. 위에서도 보았듯이 이슬람 세계는 폐쇄적인 세계가 아니었기에, 어느 한쪽에서 훌륭한 건축기법, 화법이 나타나면 바로 우르르 달려가 베껴오거나 모방하거나 심할때는 납치해오는 경우가 많았다. 무카르나스는 스페인, 이집트, 그리고 페르시아등지에서도 나타난다.

알 아즈하르처럼 이 모스크도 모스크 기능만 한게 아니다. 자신을 위한 영묘, 숙박시설, 물배급시설, 병원, 초급학교 등등의 복합건물이 같이 딸려 들어왔다. 이러한 시설의 운영비는 국고에서 대거나, 국가 소유 사업장에서 나오는 수익으로 충당했다. 입구로 들어가면 네 개의 이완이 있는 안마당이 나온다. 키블라가 방을 제외한 다른 방은 수니파의 네 학파 모두에게 제공되었다.

이완이란 전통 페르시아의 양식이다. 문 위에 커다란 아치형이 그려진 공간을 말하는데, 밑에서 자세히 설명하겠다.

마드라사에는 506명의 학생들, 120명의 쿠란 암송자들이 있었다. 다만 이 모스크를 건설하던 중 미나렛 한 개가 완공 직후 무너져 내려 근처 고아원을 덮치는 바람에 300여명이 죽고 말았다. 몇달 뒤 술탄은 폐위당했고, 그의 시체는 정작 이곳에 묻히지 못했다. 그의 어린 자식들만 묻히고 말았다.

맘루크 귀족들도 화려한 저택에서 살았다. 1330년대 술탄 안 나시르 무함마드 밑의 고위 아미르인 바슈타크의 저택은 5층짜리였고, 1층은 상가로 빌려주었다.



<다양한 미나렛>

미나렛도 역시 모양이 변화해왔다. 처음 다마스쿠스나 카이라완에서 보이는 직사각형의 미나렛에서 사마라의 원통형 미나렛으로 변화했다. 가면 갈수록 사람이 올라가는 일이 적어짐에 따라 미나렛은 날렵해졌고, 정작 사람이 올라갈 일이 드물어진 꼭대기의 발코니 장식도 화려해졌다. 오스만의 경우 날렵하게 뻗은 미나렛에 지붕이 없는 발코니가 붙었지만, 페르시아에서는 탑 끝에 지붕이 있는 발코니가 붙었으며 페르시아의 영향을 받은 인도도 그러했다.

압바스조의 힘이 약해지고, 중앙아시아에서는 사만조라는 왕조가 일어났다. 사만조는 투르크의 이슬람화에 크게 공헌한 왕조인데 여기서는 별로 중요한 내용이 아니다.

원래 이슬람교에서는 성자에 대한 숭배, 그 성자의 무덤에 대한 숭배는 금지했다. 인간은 직접 신을 만나야 하므로, 그 중간에 있는 존재에 대해서는 숭배할 필요가 없다. 그렇지만 하지 말라면 더 하고 싶은 법. 정작 그렇게 계시한 무함마드의 무덤도 화려하게 장식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무함마드의 무덤이 이꼴이 났는데, 그렇다면 술탄이나 왕들의 무덤은 오죽할까?


 

<사만조의 영묘. 부하라에 있다>

사만조는 자신들의 가족 영묘를 지었다. 정육면체에 건물에 전 이슬람 세계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는 돔을 얹었고, 벽돌 장식을 교묘하게 새김으로써 그림자가 내는 효과를 강조했다.

그러나 사만조의 정갈한 무덤도 이 무덤 앞에서는 빛을 잃는다.

 



<군바디 카부스. 이거 무덤이다>

지야르 왕조는 이란 지역의 흔해빠진 별볼일 없는 왕조였다. 그 수많은 잡다한 왕조 중 지야르 왕조의 군주 카부스 이븐 우슘기르는 이런 독특한 무덤을 지음으로써 그와 그의 왕조의 이름을 오랫동안 기억하게 만들었다. 무함마드가 성자의 무덤에 대한 숭배를 금지한 이유가 여기에 있으며, 수많은 군주들이 어떻게든 그 계시를 어겨보려고 갖가지 수를 쓴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무덤(이라고 불러야 할지 자꾸 헷갈린다) 자체의 높이는 52m로 꽤 높다. 그러나 우리의 욕심쟁이 아저씨 카부스는 이에 만족하지 않고 언덕을 10m 더 높임으로써 자신의 무덤을 더 높게 보이게 만들었다. 이 놀라운 창의력에는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우마이야 왕조 시절 무슬림은 이미 인도의 신드(파키스탄)지역까지 도달했다. 11세기 이후 투르크인이 이슬람화됨에 따라 가즈나왕조나 구르왕조등 투르크계 이슬람 왕조들이 인도로 몰려들었고, 거기 있는 불교 사원이나 힌두교 사원을 보이는대로 몽땅 때려부수고 있는대로 털어가지고 나왔다. 그 후, 구르왕조의 노예병사였던 쿠트브 앗 딘 아이바크가 인도에서 노예왕조를 세웠다. 이후 이어진 힐지, 투글루크, 사이이드, 로디 등의 왕조를 델리 술탄 왕조라고 부르는데, 이름은 그럴듯해도 별볼일 없는 왕조들이었다.

쿠트브 앗 딘 아이바크는 인도를 정복한 기념으로 쿠와트 알 이슬람(이슬람의 권세)란 모스크를 짓고, 멋진 아치와 돔을 쌓으려 했다. 다만 인도의 기술자들이 아치 쌓는 기술은 없었기에 돔은 짓지 못했고, 흉내만 내는 정도에 그쳤지만 그 흉내가 꽤나 멋드러졌기에 아이바크는 만족했다. 같은 투르크인인 룸셀주크인들이 아나톨리아에서 지은 모스크는 안마당을 모조리 들어내고 안으로 꽁꽁박혔던 반면에,푹푹 찌던 인도에서는 넓고 바람이 잘 통하게 건설했다.



<쿠트브 미나렛>

다만 모스크로는 자신의 권세를 세우기 부족하다고 여겼는지, 쿠트브 앗 딘 아이바크는 엄청난 높이의 미나렛을 건설할것을 지시한다. 이렇게 세워진것이 쿠트브 미나렛. 높이 72.5m의 엄청난 높이다. 물론 이 위로 사람이 올라가서 아잔을 했을리는 없다. 말 그대로 과시용이다. 미나렛의 또 하나의 용도는 '여기 모스크가 있다' 라는 과시용이기도 했다. 물론 '난 이렇게 잘난 놈이다~' 란 과시도 포함된다. 후에 높이 145m 의 진짜 슈퍼 미나렛을 지으려는 시도도 했으나 결국에는 포기하고 말았다.

인도는 부유한 지역이었다. 왕조 자체의 힘은 없어도 원체 땅덩어리가 잘살다 보니 부유하게 되었다. 그러나 하필이면 산맥 건너 있는 놈이 그 망할 절름발이일줄이야. 그 절름발이는 절름발이가 아닌 수만의 군대를 이끌고 와 델리를 박살내버리고 자랑스레 개선한다.

그는 자신의 제국의 수도를 사마르칸트로 정했다. 그리고 명색이 저 '티무르'의 제국의 수도인데, 비실비실한 건물만 있어서는 체면이 서지 않기에 그는 많은 양의 건물을 건설했다.



<비비 카눔 모스크>

급한 성질답게, 그는 이 모스크의 완공을 빨리 보고 싶어했다. 5년간 돈과 고깃덩어리를 들여 일꾼들을 독려하고(채찍질을 하고 손발을 자르지 않은게 다행이랄까) 인도에서 들여온 코끼리를 이용, 빠르게 건물을 완공시키는데 성공했다. 각지에서 끌려온 타일 제조공, 도공, 목공들이 일을 했고, 일꾼들이 원체 많은지라 근처에 일꾼들의 고향에 따른 촌락이 생길 정도였다. (촌락의 이름은 델리, 다마스쿠스, 바그다드였다) 다만 그 대가로 건물의 내구성을 희생, 부실공사가 이루어지고 말았다. 그러나 뭐 우즈베키스탄 정부는 관광수입이 짭짤해서 수리비가 좀 들더라도 이런게 있는게 싫지는 않은 것 같다.



<구르 이 아미르. 왕의 무덤>

티무르의 무덤. 다른 사람도 아니고 티무르이기에 별별 전설이 전한다. 나디르 샤가 1740년에 도굴했으나 불운한 일이 자꾸 일어나자 무덤의 돌을 무덤으로 돌려보냈다는 말도 있다. 가장 유명한 전설이라면야 1941년 미하일 게레시모프의 고고학자들이 티무르 무덤 발굴한 뒤 얼마 안되어서 독일이 러시아 침공을 감행했다는 것이 있겠다. 무덤에는 ‘누구든지 왕의 안식을 방해하는 자는 피할 수 없는 파괴와 절망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라고 쓰여있다고 한다.

그러나 티무르의 제국은 그의 건물이 부실공사로 문제가 터졌듯 그의 사후 이곳저곳에서 문제가 터져나왔고, 결국 갈가리 찢기고 말았다. 그 이후, 이슬람 세계는 세 개의 위대한 제국이 지배하게 된다.


 500여년전만 해도 이들은 칼리프의 노예에 불과했다. 1453년 5월 29일, 그들은 기독교도의 가장 위대한 도시를 정복했다. 오스만 제국이 그 위용을 본격적으로 드러내기 시작했다.

오스만의 술탄들은 자신의 위세에 걸맞는 건축물을 원했다. 세 대륙의 정복자, 지상에 드리운 신의 그림자, 두 성도의 보호자의 직위에 걸맞는 도시를 가지길 원했으며 그런 건물을 가지기를 원했다.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함으로써 도시는 얻었으나, 아직 건물을 가지지는 못했다. 그런 건물을 가지는데 도움이 될만한건 얻었지만.



<하기아 소피아. 성스러운 지혜의 성당>

유스티니아누스 대제가 완공 후 '솔로몬이여, 내가 그대를 이겼다!' 라고 외쳤던만큼, 이 건물은 비잔티움의 최대 자랑거리였다. 오스만 술탄들도 이점을 인정했고, 이 건물에 매료되었다. 그 후 오스만의 주요 모스크는 죄다 하기아 소피아의 영향을 받았고, 죄다 이와 비슷한 모양이었으니까.

일단 메흐메드 2세에게는 건물보다는 도시를 활성화시키는게 필요했다. 1463년 그는 이스탄불 한 구역에 거대한 복합단지 건설을 명령했다. 7년간 건설한 이 복합단지는 12채의 건물로 되었고 280개의 상점과 110개의 마구시장, 마구간, 등자와 편자를 만드는 작업장, 숙박소, 초등학교, 도서관, 병원등이 있었다. 1489~1490년 지출은 150만 악체에 달했고 이 수입은 도시내의 12개의 목욕탕과 지즈야와 트라키아 주변의 50개 마을에서 들어온 소득에서 충당되었다. 직원은 총 383명을 두었는데 모스크에 102명, 마드라사에 168명, 숙박소에 45명, 병원에 30명, 재정담당이 21명, 인부17명이었다.. 가난한 학자와 상이군인에게 재정지원을 해주었고, 1200여명에게 매일 두끼 3300개의 빵을 배급해 주는 곳이었다.

엄청난 규모였다! 메흐메드의 이런 투자로 이스탄불은 활성화되기 시작했고, 이 복합단지는 이스탄불의 한 구역을 당당히 차지하게 되었다. 다만 그 후 오스만이 약화된 후 일어난 폭동, 지진으로 인해 지금은 거의 파괴되었지만.

그 뒤를 이은 화려한 황제 술레이만은 한술 더 떴다. 자신의 선임자의 궁전은 남겨두지 않는다!의 압바스 칼리프는 아니었지만 메흐메드보다 더 큰 복합단지를 건설했다. 이번에는 유능한 건설가도 있었겠다, 제국의 수입은 더 늘었겠다, 한번 해보자는 심정이었을 거다.



<술레이마니예 복합단지>

1550년 착공되어서 역시 7년이 걸렸다. 건축가는 예니체리 출신의 유명한 건축가 시난이 담당했고, 이즈니크 지역의 도자기 타일과 목재, 유리등이 사용되었다. 고용인원은 748명에 달했고, 이들에게 준 봉급만 매년 100만 악체였다. 500만 악체에 달하는 운영자금의 45%는 제국의 유럽 지역 마을에서 거둔 세금을 이용했다. 그리고 사진을 보시면 알겠지만, 하기아 소피아와 굉장히 유사하다. 하기아 소피아는 오스만 건축가들에게 정말이지 엄청난 영향을 주었다. 외관뿐만 아니라 돔의 배치, 유리창을 통한 채광 모두 그렇다.



<터키 지폐에 있는 미마르 시난과 셀리미예>

술레이만 사후 시난은 술레이만의 뒤를 이은 술탄인 셀림 2세의 명을 받아 에디르네에 셀리미예의 건설을 시작한다.

 

 

<셀리미예>

미나렛의 높이가 무려 90m다. 아잔은 꿈도 못꾼다. 돔의 직경은 31.28m로 하기아 소피아의 직경과 일치한다. 시난 스스로가 자신의 최고의 걸작이라고 칭한 이 건물을 완공했을때 그의 나이는 80. 마지막 작품이었다. 탑을 날렵하게 하고 높이고, 적절한 돔의 배치로 인해 이 건물은 하늘로 날아오를것 같은 느낌, 그것까지는 못되도 하늘을 탑으로 푹 찌른뒤 끌어내리고 자신이 하늘에 오를것 같은 인상을 준다.

 



<셀리미예의 내부장식>

오스만 제국의 술탄은 자금성의 태화전같이 화려한 궁에 살지 않았다. 그들이 산 토프카피 궁전은 화려하기보다는 넓고, 비밀스럽다.



<토프카피 궁전의 첫번째 문. 제왕의 문>

이 궁은 1450년부터 건설되었는데 여러 부분으로 나뉘어져 있다. 제왕의 문을 통해 들어가는 첫 번째 궁은 열병식용으로 사용되었고 그곳에 있는 비잔티움 시대의 성 이레네 성당은 무기고로 사용되었다. ‘중간 문‘을 통과하면 회의장, 궁정 병원, 마굿간, 부엌이 나왔다. 세 번째 지복의 문을 통과하면 노예 궁정 학교, 공식 알현실, 술탄의 숙소가 나왔으며 하렘에는 300개의 방에 500여명의 사람들(여성은 300여명쯤)이 거주했다. 네 번째 궁은 술탄 메흐메드 4세가 1639년 바그다드 정복을 축하하기 위해 만든 개인 정원 성격으로 바그다드 쾨스크라는 정자가 있다. 총 넓이는 150 에이커에 달한다.

오스만의 술탄 아흐메드 1세는 딱 한면에서는 유스티니아누스와 같은 인물이었다. 지기 싫어했다. 그는 자신의 제국의 수도의 가장 멋진 건물이 기독교도의 하기아 소피아라는게 맘에 안들었다. 그래서 그는 새로운 건물을 짓기 시작했다. 그것이 바로 술탄 아흐메드 모스크, 또는 블루 모스크이다.



<블루 모스크>

미마르 시난의 제자인 세데프카르 메흐메트 아다에 의해 1609년부터 1617년까지 건설되었다. 21043개의 타일이 내부장식에 사용되었고 260개의 유리창과 4개의 분수대가 갖추어져 있다. 또한 유별난 모스크를 바랬기에 미나렛을 6개나 지었는데, 이때문에 메카의 모스크의 미나렛은 7개로 늘려야만 했다.

그래봤자 생긴건 역시 하기아 소피아와 굉장히 비슷하다. 그러나 그래도 아흐메드 1세는 마음에 들었던 모양이었는지, 이 모스크를 보고서는 자신이 유스티니아누스를 이겼다고 소리쳤다. 뭐, 블루 모스크정도 되는 건물을 짓고 그렇게 외쳤으니 아예 근거가 없는 소리는 아니었다. 한가지 문제라면 자신이 건물이 완공된 해인 1617년에 죽었다는 거겠지만. 저승에서 유스티니아누스와 아흐메드는 만나서 무슨 대화를 나누었을까.


오스만 술탄에게 지는거라면 죽기보다 더 싫어하는 사람이 하나 있었다. 그냥 싫어한다면 별 문제가 없겠지만, 문제는 그가 한 나라의 통치자였으며, 그 나라가 부강했다는데 있다. 바로 페르시아의 사파비 왕조의 샤 였다.

이전의 이스마일 1세나 타흐마스프 1세는 오스만의 범같은 군주들과 싸우느라 뭔가를 지을 시간이 없었지만, 압바스 1세는 오스만을 어느정도 제압하는 데 성공했다. 그는 이스파한을 새로운 수도이자, '세계의 절반'으로 정하고 대대적인 공사를 시작했다.

원래 이스파한의 중심지는 마이단이라는 광장이었으나, 샤는 새로운 마이단을 건설하고 기존의 마이단과 새로운 마이단까지 3km를 지붕있는 시장으로 이었다. 이를 위해 그루지야인 상인들이 이주해왔다.



<이스파한의 마이단>

가운데에 보이는것이 샤 모스크이고, 왼쪽의 둥그런 돔이 안마당이나 미나렛이 없이 예배실만 있는 샤흐 루트필라 모스크이다. 오른쪽의 건물은 숭고한 문(알리 카푸)이고, 그 뒤로 궁전이 연결되어 있다. 광장의 넓이는 8만 제곱미터. 광장의 남쪽은 시장으로, 이곳에 상인을 끌어들여오기 위해 임대료를 대폭 깎았다. 평상시에는 잡상인들, 장인들, 기타 등등 나온 목적이 분명치 않은 사람으로 가득 찼지만 공식 행사가 있을 경우에는 깔끔히 치워졌다. 어떻게 치웠는지는 전해지지 않는다.



<샤 모스크>

이 광장에서 가장 눈에 띄는 건축물은 샤 모스크일것이다. 벽돌만 180만개, 47만 2500개의 타일을 들여서 지었다고 한다. 오스만은 이즈니크 지역의 자기타일을 사용한 반면, 페르시아는 카샨 지역에서 자기 타일을 생산했다. 다만 이렇게 대책없이 양이 많이 들다보니 제작비를 줄이기 위해 색을 희생하고 생산을 간편하게 만드는 쿠에르다 세카란 기술을 이용했다. 건설에만 거의 20년이 걸렸다.



<샤 모스크의 정문>



<샤 모스크의 내부구조>

위 그림을 보면 문은 저기 저 아래 있는데 문 위로 아치가 크게 그려져있고, 그리고 기하학적으로 내부를 파 들어간 무카르나스 장식이 있는 것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문 크기보다 훨씬 크게 아치를 만들고 문을 아치 안쪽에 파들어간 공간에 위치시킨 것을 이완이라고 한다. 소위 이란형 모스크라 불리는 건축물은 이런 이완이 4개씩 있다. 정문에 하나, 예배실의 문 앞에 하나, 그리고 정문과 예배실 양 옆의 회랑에 있는 두 개의 방(주로 신학교등으로 쓰이는)의 문 앞에 하나씩. 그리고 각 이완 옆에는 미나렛을 만든다. 샤 모스크의 예배실은 정문에서 바로 앞에 있지 않다. 키블라 방향을 맞추기 위해 정문에서 약 45도 정도 기울어져 있다. (두번째 그림의 이반이 이 글에서의 이완이다)



<샤 모스크의 정문. 이완 옆에 미나렛이 보인다. 미나렛의 꼭대기에는 발코니가 있다>

마지막으로 이슬람 세계를 나눠먹었던 제국은 인도의 무굴 제국이다. 위에서도 보았듯이, 인도는 엄청나게 부유한 땅이고, 특히 강력한 정부가 들어서고 경제가 안정화되자 번영은 더더욱 가속화되었다. 이에 무굴의 황제들은 어디에 내놓아도 지지 않을 화려한 건축물을 지을 수 있게 되었다. 그런 건물 중 하나가 바로 '승리의 도시' 파테푸르 시크리이다.



<파테푸르 시크리의 정문. 불란드 다르와자>

1568년, 수피교 성자인 살림 치슈티는 악바르에게 곧 아들 셋을 얻을것이고, 그렇게 되면 '파사바드' 페르시아어로 '승리의 도시'라는 도시를 짓게 될 것이라고 예언했다. 악바르가 아들 셋을 얻은 것은 사실이지만, 1571년부터 승리의 도시라는 도시를 짓게 되는건 예언이 아니다. 악바르가 이미 들었는데 무슨 예언이란 말인가? 뭐 아무튼간에 완공은 되었지만, 정작 악바르는 바뻤던 나머지 찾지 않았다. 갖은 수를 써서 맘에 드는 여자와 결혼했더니만 일에 치여서 얼굴 한번 보기 힘든 꼴이다. 나중에 그 여자는 떠나가버린다. 여기서는 악바르가 먼저 선수를 쳤다. 1588년 악바르는 라호르로 수도를 옮겼고, 1619년 페스트가 돈 이후 파테푸르 시크리는 몰락했다.

이 도시는 근처의 붉은 사암을 이용해 지었으며, 황제의 일관된 관심 하에서 꾸준히 지어졌다. 살림 치슈티는 건설 도중 사망, 도시 내에는 그의 무덤이 있는데, 성자의 무덤은 하얀 대리석을 이용해서 지었다. 돌성벽의 둘래는 무려 11km에 달했다.

하지만 역시 무굴 제국 최고이자 최후의 건축은 이게 되야 할 것 같다.



<타지마할>

1631년, 무굴의 황제 샤 자한의 아내 뭄타즈 마할이 세상을 떠나자 황제는 영묘 건설을 지시했다. 공사는 무려 26년이나 계속되었고, 2000명의 일꾼과 1000마리의 코끼리가 동원되었다. 공사자금에 대해서는 2200만 루피와 500만 루피라는 두 가지 정보를 얻었는데 어느쪽이 맞는지는 확신하지 못하겠다.

이슬람 세계에서 가장 부유하다는 평가를 받은 무굴제국의 대 프로젝트인만큼 재료와 재료의 수입처도 화려한데 흰 대리석은 라자스탄에서, 벽옥은 펀잡에서, 옥과 크리스탈은 중국에서, 터키석은 티베트에서, 청금석은 아프가니스탄에서, 홍옥수는 아랍에서 들여왔다. 건설 총 책임자인 우스타드 이사가 맡았으며 델리, 카나우지, 라호르, 물탄, 바그다드, 시라즈,부하라, 오스만 지역의 기술자들이 찾아와서 돔과 조각, 서예등을 담당했다. 유럽의 기술자도 참가한 것으로 보인다. 돔의 직경은 35m. 높이는 7m에 달하고 양 옆의 미나렛은 페르시아의 영향을 받아 끝에 발코니가 있으며 높이는 40m에 달한다. 영묘의 팔각형 모양은 페르시아의 영묘 모양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샤 자한의 슬픔은 이런 화려한 공사로 달래졌으려나. 그러나 정작 그는 호전적인 아들 아우랑제브에 의해 유폐, 타지마할이 보이는 아그라 강가의 요새에서 사망하고 만다. 아우랑제브는 화려한 건축에는 관심이 없는 인물이었고, 결국 무굴 제국의 화려한 건축물들은 그렇게 사라지게 된다.



1842년, 술탄 압둘메지드 1세는 새로운 궁전을 건설할 것을 명령한다. 뭐, 그건 딱히 문제될 게 없었다. 당시 오스만 제국이야 뭐 나락으로 치닫고 있었지만 그래도 오스만제국은 술탄의 제국이었고, 술탄의 말이 곧 법이 될 수 도 있었으니까.

문제는 그 지으라는 궁전이었다. 술탄이 원하는것은 토프카피도, 첨탑도, 이완도, 돔도 아니었다. 유럽식 궁전이었다.



<돌마바흐체>

1853년 보스포루스 해협 인근의 돌마바흐체는 완전한 서구식 궁전이었다. 한때 '기독교도의 적'으로 불리우기도 했으며 '지상에 드리운 신의 그림자' '두 성도의 보호자'가 다스리는 제국의 수도 한복판에 서구식 궁전이 들어서게 되었다는 것은 시대가 바뀌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확실한 증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