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무기 이야기
역사속 신무기<23>스파타
구름위
2017. 1. 9. 20:18
역사속 신무기<23>스파타
- 로마군이 사용한 최초의 기병도
- 2007. 06. 18 00:00 입력 | 2013. 01. 05 03:03 수정
“투석기·노포가
적진을 향해 쉴 새 없이 불화살·소이탄을 날리고 중무장한 보병들은 일사불란하게 적진을 향해 전진해 들어간다. 그리고 결정적 순간에 전선을 우회해
적의 전열 측면으로 파고든 기병들은 검을 휘두르며 적진을 유린한다.”
영화 글래디에이터의 도입부에 묘사된 로마군의 전투장면에서 로마군 기병들이 적진에 난입할 때 휘두르는 검이 바로 스파타(spatha·사진)다. 글라디우스가 로마군 보병의 검이라면 스파타는 로마군 정규 기병이 사용한 길이 70∼75㎝, 무게 1㎏ 내외의 기병도다.
스파타라는 칼 이름은 그리스어로 ‘꽃봉오리’를 뜻한다. 이는 칼자루의 형상이 꽃봉오리를 연상시킨다 해서 붙여진 것이다.당시 보병들이 사용하던 글라디우스에 비해 스파타는 길이는 더 길고 폭은 더 좁았지만 무게는 같거나 약간 더 무거운 정도에 매우 균형 잡힌 검이었다. 검 자체는 날 부분에서부터 연결되는 줄기 부분이 가드와 그립을 통해 폼멜에 고정되는 형태다.
칼날과 가드·칼자루·폼멜은 일체형으로 만들어졌고 손잡이는 나무나 가죽으로 감쌌다. 스파타는 글라디우스를 기병들이 말 위에서 사용하는 데 지장이 없도록 특별히 개량한 검이며 이 때문에 일부에서는 최초의 기병도로 분류하기도 한다.그러나 스파타는 최초의 기병도임에도 불구하고 9세기 중앙아시아에서 등장한 사브르나 16세기 스위스에서 사용된 슈바이체르 샤벨과는 외형이나 크기에서 큰 차이를 보인다.
오히려 스파타는 길이만 제외하면 손잡이·장식 등 전체적인 형상이나 구성 면에서 글라디우스와 매우 유사하다. 이것은 로마의 독특한 기병 운용 전술 때문이었다. 초기 로마 기병은 정찰이나 추적 같은 비 전투임무를 주로 수행했고 실제 전투가 벌어졌을 때는 대부분 말에서 내려 적과 싸웠기 때문에 창이나 활은 물론 심지어 방패도 없었다.
기병의 임무가 매우 제한적이었기 때문에 스파타는 주 무장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다양한 형태로 발견되는 글라디우스와 달리 로마시대를 통틀어 그 외형이나 형식은 거의 변화하지 않았다. 영화 글래디에이터에서 막시무스가 전투 중 스파타를 잃어버리자 글라디우스를 뽑아 싸운 것처럼 대다수 기병들은 스파타를 ‘글라디우스보다 길이가 조금 더 긴 장검’ 정도로 사용했다.
기병의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로마군단의 중추는 여전히 보병이었고 부족한 기병의 수는 언제나 이민족, 혹은 동맹국 지원 병력으로 채워졌다. 이들은 로마군 사령관의 직접 통제를 받기는 했지만 자신들의 무기를 갖고 자신들의 방식으로 싸웠기 때문에 스파타의 입지는 점점 좁아졌다.
후기 로마 기병이 북아프리카나 동부 유럽 초원 지대의 이민족 출신들로 충원되면서 켈트족과 게르만족 등의 철검이 로마에 유입됐지만 정규군의 무기로 채택되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파타가 로마 기병에 의해 사용된 최초의 기병도라는 사실에는 이견의 여지가 없다.
영화 글래디에이터의 도입부에 묘사된 로마군의 전투장면에서 로마군 기병들이 적진에 난입할 때 휘두르는 검이 바로 스파타(spatha·사진)다. 글라디우스가 로마군 보병의 검이라면 스파타는 로마군 정규 기병이 사용한 길이 70∼75㎝, 무게 1㎏ 내외의 기병도다.
스파타라는 칼 이름은 그리스어로 ‘꽃봉오리’를 뜻한다. 이는 칼자루의 형상이 꽃봉오리를 연상시킨다 해서 붙여진 것이다.당시 보병들이 사용하던 글라디우스에 비해 스파타는 길이는 더 길고 폭은 더 좁았지만 무게는 같거나 약간 더 무거운 정도에 매우 균형 잡힌 검이었다. 검 자체는 날 부분에서부터 연결되는 줄기 부분이 가드와 그립을 통해 폼멜에 고정되는 형태다.
칼날과 가드·칼자루·폼멜은 일체형으로 만들어졌고 손잡이는 나무나 가죽으로 감쌌다. 스파타는 글라디우스를 기병들이 말 위에서 사용하는 데 지장이 없도록 특별히 개량한 검이며 이 때문에 일부에서는 최초의 기병도로 분류하기도 한다.그러나 스파타는 최초의 기병도임에도 불구하고 9세기 중앙아시아에서 등장한 사브르나 16세기 스위스에서 사용된 슈바이체르 샤벨과는 외형이나 크기에서 큰 차이를 보인다.
오히려 스파타는 길이만 제외하면 손잡이·장식 등 전체적인 형상이나 구성 면에서 글라디우스와 매우 유사하다. 이것은 로마의 독특한 기병 운용 전술 때문이었다. 초기 로마 기병은 정찰이나 추적 같은 비 전투임무를 주로 수행했고 실제 전투가 벌어졌을 때는 대부분 말에서 내려 적과 싸웠기 때문에 창이나 활은 물론 심지어 방패도 없었다.
기병의 임무가 매우 제한적이었기 때문에 스파타는 주 무장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다양한 형태로 발견되는 글라디우스와 달리 로마시대를 통틀어 그 외형이나 형식은 거의 변화하지 않았다. 영화 글래디에이터에서 막시무스가 전투 중 스파타를 잃어버리자 글라디우스를 뽑아 싸운 것처럼 대다수 기병들은 스파타를 ‘글라디우스보다 길이가 조금 더 긴 장검’ 정도로 사용했다.
기병의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로마군단의 중추는 여전히 보병이었고 부족한 기병의 수는 언제나 이민족, 혹은 동맹국 지원 병력으로 채워졌다. 이들은 로마군 사령관의 직접 통제를 받기는 했지만 자신들의 무기를 갖고 자신들의 방식으로 싸웠기 때문에 스파타의 입지는 점점 좁아졌다.
후기 로마 기병이 북아프리카나 동부 유럽 초원 지대의 이민족 출신들로 충원되면서 켈트족과 게르만족 등의 철검이 로마에 유입됐지만 정규군의 무기로 채택되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파타가 로마 기병에 의해 사용된 최초의 기병도라는 사실에는 이견의 여지가 없다.
역사속 신무기<24>퀸퀴어림
- 로마제국 최초의 5단 노선 군함
- 2007. 06. 25 00:00 입력 | 2013. 01. 05 03:04 수정
그러나 초기 로마는 육군 중심의 보병 왕국이었다. 해군이라는 개념조차 생소했던 로마가 어떻게 대제국을 건설할 수 있었을까. 그 비밀을 풀 수 있는 열쇠가 바로 5단 노선 퀸퀴어림(그림)이다. 퀸퀴어림은 급조된 로마 해군이 제1차 포에니 전쟁(기원전 264∼241년)과 제2차 포에니 전쟁(기원전 218∼202년) 기간 동안 제해권을 완벽히 장악, 로마가 승리할 수 있도록 기여한 일등 공신이다.
포에니 전쟁 이전만 해도 로마는 해군이 없었다. 당시 로마인들이 해군의 필요성을 전혀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카르타고와의 군사적 긴장관계가 조성되면서 상황은 급변했다. 카르타고는 고대 가장 위대한 해양민족 중 하나로 평가받는 페니키아의 식민지였고 당대 최강의 해양 패권국이었다.
카르타고와의 전쟁이 불가피해지자 로마인들은 해군을 급조했다. 그러나 당시 로마에는 군함은 물론 그 군함을 건조할 수 있는 기술도 없었다. 급조된 해군 역시 오합지졸 수준을 벗어나지 못했다. 단시간 내에 카르타고와 맞서 싸울 수 있는 해군력 건설이 시급했던 로마는 기상천외한 해결책을 찾아냈다.
바로 카르타고의 5단 노선을 나포해 철저히 장단점을 분석하고 똑같은 군함을 100척이나 건조한 것. 이렇게 등장한 것이 로마 최초의 군함 퀸퀴어림이다. 물론 카르타고의 5단 노선을 모방해 만든 만큼 초기 퀸퀴어림의 성능은 그리 만족스러운 것이 아니었다. 로마인들 스스로 조선·조함 기술이 부족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카르타고의 5단 노선을 그대로 모방하는 대신 로마 기준에 맞춰 개량했다.
이렇게 등장한 퀸퀴어림은 카르타고 노선보다 더 무겁고 속도와 기동성도 떨어졌다. 대신 퀸퀴어림은 튼튼한 선체를 갖춘 선상백병전에 최적화한 군함으로 재탄생했다. 당시 백병전에서 로마군을 압도할 수 있는 군대는 존재하지 않았다. 기원전 260년 밀래 해전 당시 로마가 145척의 급조된 함대로 카르타고의 정예 130척 함대와 맞싸웠을 때 로마의 승리를 예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로마는 선수에 달린 충돌용 전투장치인 충각을 사용한 당시 해전 방식을 자신들이 절대적으로 유리한 선상 백병전으로 뒤바꿔 버렸다. 당시 카르타고는 선상 백병전은 매우 원시적이며 야만적인 해전 방식이므로 적의 배로 건너갈 수 있는 장치인 코르부스를 사용한 로마의 전투방식은 비겁한 행동이라 비난했다.
하지만 기원전 256년 제2차 에크노무스 해전에서도 패하자 결국 자신들의 전술을 수정할 수밖에 없었고 당시 최신 건조기술이 집약된 신형 전투함을 건조했다. 물론 당대 최강 해양강국으로서의 자존심을 지키기 위한 카르타고의 노력은 신형 전투함을 나포한 로마의 발 빠른 대응으로 모두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비록 전함 자체의 성능은 특별한 것이 없었지만 코르부스와 결합된 퀸퀴어림은 당시 해전에서 절대적인 위력을 발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