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무기 이야기
역사속 신무기<13>사리사
구름위
2017. 1. 9.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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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속 신무기<13>사리사
- 마케도니아군의 장창… 길이 최대 6.3m
이 창은 당시 사용되던 창들보다 두 배 이상 길었다. 상식 밖으로 창이 길었기 때문에 항상 적들의 조롱을 받았지만 알렉산드로스 대왕(기원전 356~323)이 그리스에서 인도에 걸친 대제국을 건설하는 동안 사리사를 꺾은 적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사리사를 처음 도입한 것은 필리포스 2세(기원전 382∼336)로 새로운 군사제도를 도입하고 기병을 집중 육성해 광범위하게 운용하는 한편 창의 길이를 더욱 길게 만들었다. 히타이트에 의해 창의 길이와 창날의 크기가 규격화된 이후 보병과 기병이 휴대하는 창은 3m를 넘지 않았고 당시 그리스 장갑보병들의 주 무장 역시 3m 미만의 장창이었다.
그러나 필리포스 2세는 보병용 사리사 길이를 최대 6.3m까지 늘리고 밀집대형을 더욱 조밀하게 해 공격력·방어력을 동시에 배가시켰다. 당시 6m 길이의 사리사로 무장한 마케도니아군의 밀집대형, 산티그마에 대적할 수 있는 군대는 존재하지 않았고 인도의 포로스왕이 자랑하던 무적의 코끼리 부대조차 사리사 앞에서는 무력하기만 했다.
층층나무로 만들어진 사리사는 상대를 위협하고 찌르는 용도로 사용됐고 기병용은 길이 2∼3m에 무게 1.5∼2㎏, 보병용은 길이 4∼6m에 무게 4∼5㎏이었다. 사리사를 지녔던 마케도니아군 기병은 엄선된 정예병으로 ‘헤타이로이’(왕의 친구)라고 불렸고 기존의 투창보다 더욱 더 먼 위치에서 적을 공격할 수 있었다.
보병용 사리사는 마케도니아군의 중추적 역할을 수행한 정예 보병인 ‘페제타이로이’의 주요 무장이었고 손잡이 중간을 금속 파이프로 연결해 길이를 두 배로 늘렸다. 사리사는 소켓 모양으로 된 창끝과 날을 가졌는데 기병용의 경우 돌격 도중 창이 부러지더라도 반대쪽으로 공격할 수 있었고 보병용은 돌격해 오는 적의 기병이나 중장보병을 상대할 때 사리사를 지면에 단단히 고정하기 위해 사용됐다.
사리사로 무장한 마케도니아군대는 전진하는 적을 완전히 꼼짝 못하게 만들 수 있었다. 전선 중앙에서 적의 전진을 완전히 봉쇄할 수 있었기 때문에 기병대는 자유롭게 기동할 수 있었고 양쪽 측면을 공격해 적을 포위·섬멸할 수 있었다. 더욱이 기동력을 희생하는 다양한 전술상황에 유기적으로 대응할 수 있었기 때문에 알렉산드로스의 장기인 ‘대단히 합리적이고 용의주도한 방어에 이은 신속하고 대담한 공격’이 위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대왕 사후에 일어난 후계자 계승 전쟁에서는 6m 이상의 사리사가 등장했지만 길이가 너무 길어 다루기 어려웠고 알렉산드로스 대왕 사후 제국의 몰락과 함께 역사에서 사라졌다. 이후 15세기께 스위스에서 보병의 대기병용 무기로 7m 길이의 창인 파이크(pike)를 개발, 당대 최고로 평가받던 밀라노 기병을 격퇴했지만 사리사와 파이크의 직접적인 관련은 없는 무기다.
역사속 신무기<14>아시리아 공성망치
- 성벽·성문 파괴하는 전문 무기
- 2007. 04. 16 00:00 입력 | 2013. 01. 05 02:56 수정
히타이트 제국 몰락과 함께 역사 전면에 등장한 아시리아는 강력한 군사력과 특유의 난폭함, 그리고 무자비한 정복으로 순식간에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패권을 장악했다.
무자비한 아시리아의 침공으로부터 수천 년에 걸쳐 건설된 자신들의 문명을 지키기 위해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목숨을 걸고 죽을 때까지 맞서 싸우거나 성벽을 더 높이 쌓고 성문을 단단히 걸어 잠그는 것이었다.
요새 축성기술의 발전은 어느 정도 효과를 보았는데 항상 적은 수의 전력으로도 야전에서 불패의 신화를 자랑하던 아시리아군대가 단단한 성벽 앞에서는 고전을 면치 못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가공할 군사력을 갖추고 있던 아시리아군대는 단단한 성벽조차 무력하게 만들 수 있는 해결책을 금방 찾아냈는데 바로 공성 망치 발명이었다.
기원전 12세기 아시리아가 만든 최초의 공성 망치는 바퀴가 여섯 개나 달려 있고 길이는 4.5m, 전방에는 5.4m 높이의 작고 둥근 탑이 설치된 움직이는 작은 성채였다. 탑 내부에는 밧줄에 매달린 철추가 45도 각도로 설치돼 있고 이후 등장한 공성 망치가 수평으로 움직이며 성벽을 두드린 것과 달리 도끼질하듯 위에서 아래로 움직이며 성벽을 강타했다.
철추 머리 부분은 도끼처럼 날카로운 칼날이 달려 있고 성벽이나 성문에 단단히 꽂히면 벽을 붕괴시키기 위해 지렛대를 사용해 좌우로 비틀었다. 기본 골격은 나무로 돼 있었지만 나무판으로 지붕·벽을 만들고 그 위에 소가죽과 철판을 덧대 성벽에 바짝 접근할 때까지 적의 불화살·기름 공격으로부터 병사들을 보호했다.
그러나 최초의 공성 망치는 그 거대한 크기와 무게 때문에 배치·운용 지형에 제한이 많았고 아시리아군 자체가 공성전보다 야전 기동전술을 더 선호했기 때문에 새로운 공성 망치로 대체됐다.
기원전 8세기 티글라트 필레세르 3세에 의해 만들어진 새로운 공성 망치는 바퀴 네 개에 전체적인 크기도 작아졌지만 무게가 가벼워졌기 때문에 다양한 환경에서 운용이 가능했고 성능 또한 강력해졌다. 훗날 성벽이 더 두꺼워지고 높이가 더 높아지면서 공성 망치의 용도는 직접 공격보다 성문 파괴와 창병들의 사다리 공격을 지원하는 형태로 전환됐지만 그 위력만큼은 반감되지 않았다.
아시리아 군대가 사용한 공성 망치는 이후 그리스가 만든 43m 높이의 헬레네폴리스와 같은 공성탑 등장에 큰 영향을 미쳤고 개량을 통해 대포가 발명되기 전까지 가장 대표적인 공성무기로 사용됐다. 아시리아의 공성 망치는 아시리아 포위 공격 기술의 정점에 서 있는 무기며 당대 최고로 평가받던 아시리아의 군사기술 수준을 가늠케 하는 중요한 역사적 지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