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무기 이야기

역사속신무기<7>이집트 전차

구름위 2017. 1. 9.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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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속신무기<7>이집트 전차

청동기시대 가장 뛰어난 성능 갖춰



기원전 3500년께 수메르인들에 의해 처음 등장한 이후 전차(War Chariot)는 발전에 발전을 거듭하며 기병이 등장하기 전까지 전장의 승패를 가늠하는 가장 위협적인 존재로 군림했다.

그중에서도 고대 이집트인들이 만든 이집트 전차(사진)는 당대 전차들 중 가장 뛰어난 성능을 갖춰 청동기시대 전차 발전사의 정점에 서 있는 무기로 평가받는다.

이집트 18왕조의 파라오 투트모세 3세는 여기에 만족하지 않고 새로운 전차운용 전술 교리를 확립해 복합궁으로 무장한 전차부대의 위력을 배가시켰다. 이집트의 나폴레옹으로 불리는 투트모세 3세는 전차·보병을 별도의 전력으로 운용하지 않고 하나의 통합된 전력으로 전차와 보병이 조화를 이루는 전차+보병 협동전술을 확립·발전시켰다. 투트모세 3세에 의해 전차와 보병이 하나가 된 이집트군은 조직적이면서도 유기적인 전술 전개를 통해 적군의 전열을 격파하고 전장을 지배했다.

그러나 이집트가 처음부터 압도적인 군사력을 보유한 것은 아니었다. 이집트는 기원전 1600년께 힉소스(Hyksos)인들이 침입해 오기 전까지 동시대 메소포타미아인들처럼 발달된 무기체계를 갖지 못했다. 이 때문에 힉소스인들이 전차를 몰고 침입해 왔을 때 이집트인들은 무기체계 열세로 고대 이집트 중간 왕국이 멸망당하는 시련을 겪어야 했다.

이후 말과 전차를 비롯한 복합궁, 개량된 전투용 도끼, 발달된 요새 축조술 등 힉소스인들의 전쟁 기술을 받아들인 이집트인들은 이후 힉소스인들을 몰아내고 신왕국(기원전 1560~1085년)을 건설했다. 특히 힉소스 침공 당시 전차부대의 위력을 직접 체험했던 이집트인들은 상비군의 주력을 전차부대로 구성할 정도로 강력한 전차 전력 확보에 심혈을 기울였다.

이러한 노력의 결과 이집트는 최소 2000대 이상의 전차를 보유할 수 있었으며 전차를 수리할 수 있는 정비창을 제국 곳곳에 만들어 항시 최상의 전력을 유지할 수 있도록 했다. 투트모세 3세에 의해 전차와 보병의 합동전술이 확립되면서 메소포타미아에서 시작된 청동기 군사혁명은 고대 이집트 신왕국에 이르러 절정에 달한다.

이후 전차와 복합궁이 전장의 왕자가 된 형태의 전투 방식은 기원전 1500년께에는 메소포타미아의 신기술로 무장한 아리아인이 인도 정복을 시작하면서 인도에 전파되고, 기원전 1200년께에는 중국의 은나라에 전파돼 은나라와 주나라가 주위 부족을 제압하고 대제국을 건설하는 원동력이 됐다.

전차와 복합궁으로 대표되는 청동기 군대는 기원전 1200년께 중동에 철기로 무장한 군대가 출현하기 시작하면서 종말을 맞았다. 철기 무기로 무장한 대규모 중장보병은 복합궁과 청동기로 무장한 전차 부대의 몰락을 불러왔다. 그러나 전차는 이후에도 중요한 전력으로 활약했고 그 정점에 서 있는 이집트 전차는 이러한 변화의 과정에서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역사속 신무기<8>코피시

‘만곡도’ 개량… 완벽한 전투용 군도
2007. 03. 05   00:00 입력 | 2013. 01. 05   02:51 수정

고대 이집트인들의 가장 대표적 무기인 ‘코피시’(Khopesh·사진)는 기원전 3500년께 수메르인들에 의해 처음 만들어진 최초의 금속 검 ‘만곡도’(彎曲刀)의 최종 발전형이다.

그 기원과 유래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으나 이집트인 스스로 농기구에서 전투 무기로 개량한 이후 이민족의 침입과 새로운 군사기술이 전래되면서 완전한 형태를 갖춘 것으로 본다.

이 때문에 청동기시대 중기인 기원전 20세기께 처음 등장한 코피시가 농기구에 가깝다면 기원전 17세기께 힉소스인들의 침공 이후 개량된 코피시는 완전한 전투용 군도로 변모하게 된다.흔히 낫칼(Sickle Sword)로 불리는 이 기묘한 형태의 검은 도끼와 낫의 장점을 극대화한 형태로 별도의 훈련 없이 단순히 휘두르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공격 효과를 거둘 수 있었다.

그러나 코피시가 처음부터 고대 이집트의 대표적 무기로 사용된 것은 아니며 힉소스가 이집트에 침공해 올 당시까지도 이집트군의 주 무장은 철퇴(Mace)와 창, 그리고 활이었다.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발달된 군사기술을 보유하고 있던 힉소스인들은 원시적인 무기와 보병을 주축으로 하는 이집트의 군사력을 손쉽게 격파할 수 있었다.

복합궁으로 무장한 힉소스의 궁사들은 훨씬 더 먼 거리에서 더 정확히 화살을 쏠 수 있었고 이집트인들의 철퇴·청동도끼는 청동 갑옷으로 몸을 보호하는 힉소스 병사들에게 무력했다.힉소스인들의 전차부대는 막강한 화력과 기동력으로 이집트 군대를 짓밟았고 힉소스인들의 청동검은 방호구를 착용하지 않았던 이집트 병사들에게 치명적이었다.

이후 이집트인들은 힉소스의 선진 군사기술, 그중에서도 전차·청동검의 제조 기술을 확보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이러한 노력 결과 이집트는 당대 최강으로 평가되는 이집트 전차(Egypt War Chariot)와 가장 진보된 형태의 만곡도 코피시로 군대를 무장시킬 수 있었다. 또 전차·코피시는 아하메스 1세(B.C. 1567∼1547)가 이집트를 재통일하고 제18왕조(B.C. 1567∼1320)의 기틀을 확립하는 밑거름이 됐다.

최종 형태의 코피스는 ‘S’자형 외날 검으로 크기는 50∼80㎝, 무게는 1.5∼2㎏이며 날 부분이 구부러져 적을 찌를 수 없지만 적을 치거나 베는 데 효과적이었다. 날 끝 부분은 알파벳 C자처럼 구부러져 있거나 둥글게 된 것도 있으며 내리쳐서 벨 때의 타격력이 우수했기 때문에 방패를 들고 있는 적과 근접전을 벌일 때 주로 사용됐다. 손잡이는 동시대의 다른 청동검들과 달리 나무로 만들어져 있으며 초기에는 청동으로 제조됐지만 이후 금속 제련·가공 기술 발달과 함께 철로도 만들어졌다.

직선 모양의 검과 활·도끼·철퇴·슬링(sling) 등의 다양한 무기가 존재했지만 상대방과의 근접전에는 방패 넘어로 적을 공격할 수 있는 코피스가 가장 효과적이었기 때문에 널리 사용됐다. 이후 코피스는 아시리아의 사파라(Sapara), 그리스의 코피스(Kopis)와 하르페(Hapre), 로마의 팔카타(Falcata) 등에 영향을 미쳤고 다양한 이름과 형태로 세계에 전파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