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세계사/중국 이야기

가경제 시대 : 백련교도의 난

구름위 2013. 6. 13. 1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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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경제

 

한 나라의 지도자가 재물에 탐닉하고 부정.부패를 조장하면서 사치를 시작하면 그 파급 효과는 순식간에 전 나라에 퍼지는 것이 고금의 역사를 보면 동일하다. 그래서 지도층의 부정 부패는 모든 관리들의 부정과 부패를 조장하게 만들고 관리들은 그 재원을 마련하기 위해서는 백성들에게 모든 것을 부담시켜 백성들을 토탄에 빠지게 되는 것은 당연하다.

 

관리들의 가렴주구가 심해지면 부의 편중화 현상이 두르러지고 토지의 양극화 현상이 발생하며 농토를 잃은 백성들은 과중한 세금을 피해 유랑민이 되거나 도적떼가 되어 반정부 투쟁을 벌이는 반란군에 휩쓸리게 되는 것은 순리적이다. 그래서 지도층의 청렴도가 나라의 존망을 가름하는 척도가 되는 것이다. 

 

강희.옹정.건륭에 이어지는 청나라의 황금 시대가 1백여 년 동안 계속되자 황제를 비롯한 귀족.관료.지주.호족들은 언청난 축제와 사치를 누리기 시작하였다. 이들의 부와 사치 속에는 농민들의 피와 땀이 얼룩져 있었다. 건륭제 시대의 황제를 능가할 정도로 호사의 극치를 누린 '화신'이 날마다 복용하였다는 영약은 한 알에 백은 1만 냥의 값어치에 해당하였다. 몇몇 지방의 지주와 관리들의 생활도 이에 못지않게 사치와 호화의 극치를 이루었다.

 

하북성 회유 땅의 학씨는 어느날 황제를 집에 초대하여 한끼의 식사를 대접하는데 백은 10만 냥을 썼다고 한다. 청강포 하도 총독이 베푼 연회에는 두부 요리만 20여 종류가 나왔고, 최상질의 돼지고기 요리 한 접시를 만들기 위해 수십 마리의 돼지를 잡을 정도였다고 한다. 또 낙타 요리 한 접시를 만든다고 3~4마리의 낙타를 잡았다는 웃지 못할 이야기도 전해 진다.

 

일부 특권 계급의 사치와 호사스런 생활의 이면에는 수백만 수천만에 달하는 농민들이 토탄에 빠져 허덕이고 유랑 생활을 하는 참혹한 현상이 일어나고 있었다. 관중(섬서성)에서는 무려 1백만 명이 넘는 유랑민이 발생하여 많은 사람들이 유림.영하.감숙.사천.동관 등지로 이동하여 관중에 남은 백성은 10명 중 3명에 불과할 정도였다.

 

산동 지방에서는 탐관오리들의 가렴주구를 견디지 못한 많은 농민이 살길을 찿아 바다를 건너 멀리 요동으로 도망치기도 하였고 하북에서도 해마다 많은 농민이 만리장성을 넘어 고비 사막 등의 변경 지방으로 도망쳤고 산해관 동쪽으로 이동하기도 하였다.

 

강남 지방도 마찬가지로 토지를 잃은 유랑민은 산속 깊숙이 들어가 오두막집을 짓고 황폐한 땅에 씨를 뿌려 연명하는 가 하면 사천.섬서.호북. 경계의 산간 지대와 광동.광서의 남령 일대, 강서 나소산 등지에는 수십만 명의 유렁민이 집결해 모여 들었다.

 

감옥은 세금을 내지 못한 농민들로 꽉 차 있었고 농민들 사이에'한치의 벼는 한 치의 피이다. 피가 마르면 사람은 죽고 벼가 마르면 한 집안이 끊긴다'라는 노래가 유행하였다고 한다.

 

역사적으로 한 왕조의 번영이 한계점에 다다르면 농민들의 토지가 일부 권력자들에게 집중되는 현상이 나타나고 이에 따라 자연히 토지를 잃은 유랑민이 발생하게 마련이다. 유랑민이 나타나는 현상은 번영에서 쇠퇴의 시대로 접어드는 조짐인 동시에 농민 반란의 전조라고도 볼 수 있다. 청나라도 이러한 상황이 나타날 수 밖에 없었다.

 

 

가경제
가경제
청나라의 국기 청나라 제7대 황제
재위 1796년 ~ 1820년
황후 효숙예황후
효화예황후
부황 건륭제
모후 효의순황후
이전 황제 건륭제
다음 황제 도광제

 

 

가경제(嘉慶帝, 1760년 11월 13일 ~ 1820년 9월 2일)는 청 왕조의 제7대 황제(재위 1796년 ~ 1820년)이다. 묘호는 인종(仁宗)이다. 건륭제의 15남이다.

 

즉위 초기 4년은 부황인 태상황 건륭제의 그늘 속에서 허수아비나 다름없는 황제로 있었고 건륭제 붕어 후, 정치를 제대로 하려 하였으나 이미 청나라는 쇠퇴하기 시작하고 있었다. 즉위 초기에 백련(白蓮 : 1796-1804), 천리(天理 : 1813)의 난이 일어났고 한때는 반군이 자금성까지 침입할 정도였다. 재정 개혁을 했으나 큰 성과는 없었다.

 

가족

아들들

  1. 목군왕(穆郡王)
  2. 위열지친왕 면녕(威烈智親王綿寧) - 도광제
  3. 돈각친왕 면개(惇恪親王綿愷)
  4. 서회친왕 면흔(瑞懷親王綿忻)
  5. 혜단친왕 면유(惠端親王綿愉)


 

백련교도의 난

 

백련교 (白蓮敎)는 불교에서 기원한 중국 민간종교이다. 특히 여성과 가난한 이들에게 크게 유행했는데 그 교리는 한 여인이 있어 그녀의 자식을 천년왕국이 도래할때 하나의 가족으로 모은다는 것으로 불교의 미륵사상과 민간신앙이 혼합된 사상이다. 보통 당국으로부터 탄압을 받아서 비밀결사 형태로 존재했다.

 

백련교는 남송때의 승려 모자원(茅子元)이 창건한 정토종의 일종인 '백련종'(白蓮宗)에서 기원한다. 13세기에 이르러 몽골 정권이 중국을 지배할 때 이민족의 지배에 저항하는 사상과 새로운 구세주가 나타날 것이라는 미륵신앙이 합쳐져 그 세력을 키웠는데 원나라 조정은 이들을 탄압하기 시작했으므로 비밀결사 형태로 바뀌었다.

 

이후 백련교는 애국심과 종교가 합쳐진 형태의 비밀결사 조직으로 발전했다.

 

백련교의 교리는 현세의 고난으로부터 구원을 추구하는 일종의 메시아 사상으로 볼 수 있다. 창세주인 '무생노모'(無生老母)가 미륵을 이 세상으로 보내서 자신의 흩어진 자녀들을 거두어들여 '진공가향'(眞空家鄕)이라는 일종의 천국에 귀의시키고 평화로운 천년왕국이 인간세계에 실현될 것이라고 선전했다. 백련교도들은 불교식으로 향을 피우고 불공을 드리는 한편 새로올 왕국을 대비하며 무술 수련도 하였다.

 

백련교는 중국 역사에서 두번 큰 역할을 하는데 첫 번째는 14세기 원나라가 망하고 명나라가 세워질 때 이른바 홍건적의 난의 사상적 기원이 되었다. 명의 태조 주원장도 백련교도로 출발하여 중국을 통일하고 명을 세웠다.

 

두 번째는 18세기 말 청나라에서 일어난 무장반란인데 이 때도 이민족인 만주족의 지배에 대항하여 한족을 중심으로 저항하는 세력으로 청나라의 쇠퇴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이후에도 백련교도는 여러차려 청나라에 반대하는 비밀결사로 조직되었고 나중에 의화단의 모태가 되기도 하였다.

 

백련교도의 난(白蓮敎徒-亂)은 가경기(嘉慶期)에 일어난 대반란(1796 ~ 1805)이다.

 

반란의 주요무대는 후베이 성(湖北)·쓰촨 성(四川)·산시 성(陜西)의 3성(省)이 접경을 이룬 크고 넓은 산악 지대였다. 이 지대는 청초 이래 화난·광둥 등 인구가 조밀한 지방으로부터의 이주자가 많고, 일시적으로는 옥수수를 비롯한 잡곡 생산과 목재·광산업이 성황을 이루었다.

 

그러나 후일 청조의 행정·재정 지배가 시행되고, 시비(施肥) 기술의 미발달에 따른 토지 생산력의 고갈도 현저해졌으므로 궁핍화된 민중 사이에 불온한 움직임이 뚜렷해졌다.

 

이러한 배경에서 백련교가 빈농과 반부랑자적(半浮浪者的) 노동자 사이에 퍼져 1796년 후베이 서북부의 봉기를 발단으로 하여 각지에서 반권력(反權力) 폭동을 일으켰다. 이 반란은 통일적인 조직, 목표, 지도자가 결여되어 있었으나, 교묘한 게릴라전으로 청조를 곤경에 몰아넣었다. 반란 진압의 공로자는 청조의 타락한 정규군이 아니고 오히려 지방의 ‘향용(鄕勇)’이었다.

 

건륭 39년(1774년) 경부터 각지에서 농민 반란이 일기 시작하더니, 가경 원년(1796년)에는 급기야 백련교의 반란이 시작되었다. 이 반란은 호북.사천.하남.섬서.감숙 지방으로 파급되어 9년간 계속되었다. 결국 반란은 평정되었지만, 결국 청조는 반란 진압에 막대한 전비(戰費)와 10년이라는 세월을 소비하고 심각한 재정 위기가 초래되었다.

 

당시 농민 반란의 지도자 가운데는 여성이 적지 않았다. 역사적으로 당나라 시대 절강에서 반란을 일으킨 진석진, 명나라 때 산동의 농민 반란 지도자 당새아 등을 들 수 있는데 이들은 모두 정부군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던 여걸들이었다. 가경 원년에 백련교의 반란 때 그 산하 각군을 총지휘한 왕총아도 젊은 여성이었다. 왕총아는 기생 출신으로 양양 땅의 제림과 결혼하여 제왕씨라고도 불렀다.

 

왕총아의 남편 제림은 백련교 교주로서 양양 지방의 관리로 재직했다. 그무렵 청나라에서는 반란을 일으키려 한다는 이유로 백련교도들을 채포하기 시작하였고 각지의 독직 관리들이 이에 편성하여 무고한 농민을 협박하여 금품을 갈취하는 등 행패가 극심하였다. 이에 제림은 백성들과 힘을 합하여 반란을 일으킬 준비를 하였으나 불행히도 사전에 발각되어 1백여 명의 동지들과 같이 죽임을 당하였다. 이에 분노한 재림의 아내 왕총아는 제림의 뜻을 이어받아 요지부 등과 함께 양양.지강 등지에서 반청 깃발을 높이 들었다. 이 반란은 순식간에 4~5만 명으로 불어나 사천.섬서 지방의 백련교도도 왕총아에 호응하여 봉기하였다.

 

청군의 토벌 작전에 왕총아는 정면 대결을 피하고 신출귀몰하게 유격전을 전개하여 청군을 크게 괴롭혔다. 이에 애가 탄 청군은 전술을 바꾸어 농민들을 한 곳에 집결시켜 반란군과 접촉을 차단하여 고립시켰다. 이에 반란군은 농민들로부터 보급이 차단되자 어려움을 겪기 시작하였다.

 

전투가 3년째로 접어들면서 왕총아는 전세가 불리해져 감에 호북의 운서현 모산에서 청군에 포위되어 험준한 지형을 이용하여 청군을 다수 살상하였으나 청군은 추격전을 포기하고 포위전을 전개하여 지구전을 폈다. 이에 반란군은 군량이 떨어지자 더 이상 버틸 수가 없게 된 왕총아는 항복을 거부하고 절벽에 투신하여 목숨을 끊었다. 그때 왕총아의 나이 22세로 반란을 일으킨지 꼭 3년이 되는 해 아까운 젊음을 불태웠다.

 

왕총아가 죽은 후에도 백련교도의 난은 가경 9년 (1804년) 8월까지 계속되었고 10년 뒤에는 잠잠했던 백련교도가 다시 일어나 북경의 거리를 혼란 속으로 몰아 넣었다. 

 

가경 18년(1813년) 임청과 이문성을 영수로 하는 천리교(백련교의 일파)도들이 하남.하북에서 반란을 일으켜 관청을 습격하였다. 그리고 2백 여 명의 교도들 중심으로 한 반란군이 두 길로 나누어 북경의 자금성을 공격하였다. 황궁을 수비하는 청군과 치열한 공방전을 벌이는 동안 반란군이 쏜 화살이 자금성의 융종문이라 쓴 현판에 꽂혔다. 그때 꽂힌 화살촉은 지금까지 그대로 남아 있어 당시의 격전상을 대변하고 있다.

 

이 싸움의 결과는 반란군의 실패로 끝났다. 임청은 채포되어 능지처참형에 처해지고 이문성은 자결로 일생을 마쳤다. 이문성의 아내 장씨도 청군과 장렬하게 싸우다 스스로 목을 찔러 자결로 생을 마쳤다. 이로써 일단 백련교계 천리교의 반란은 일단 진압되었으나 반란의 근본적인 원인은 개선될 기미를 보이지 않아 청나라의 미래는 암울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