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서고금의 역사를 통하여 강력한 대제국을 건설하여 위업을 이룬 나라치고 부정과 부패가 만연하지 않은 나라는 없을 것이다. 중국의 역사에서도 보면 진나라,한나라,송,수,당,원,명,청나라도 마찬가지였다. 창업에 이어 수성 황제가 영토를 넓히고 경제적 부흥을 가져와 강건성쇠를 이루면 그 뒤에는 반드시 지도층이 점차 부귀영화에 탐닉하고 도덕적 질서가 허물어지면서 나라 전체가 부정과 부패가 따르기 마련이다. 이로 인하여 나라는 쇠망의 길로 접어들고 그 치세의 힘이 다하는 시기에 나라는 멸망하게 되었다. 청나라도 예외는 아니었다.
부정과 부패
건륭제가 청년, 중년 때에는 부황 옹정제처럼 주필(朱筆)을 하여 관리들을 항상 감찰하는 등 기강을 엄정히 하여 관리들의 횡령이나 탈세같은 일이 거의 일어나지 않았고 일어나더라도 그 금액은 적었다. 그러나 건륭제가 나이가 들면서 중앙과 북경 주변의 정무만 처리하고 주필을 쓰는데 소홀해졌으며 각 성의 탄원이나 정책은 각 성의 총독, 순무가 재량껏 처리하게 내버려 두는 등 느슨하게 대하였다. 이에 따라 건륭제의 감시망에서 벗어난 지방 관리들이 백성들과 상인들을 상대로 착복과 횡령, 탈세를 자주 하였고 그 연관된 금액도 매 건당 수십만 냥을 웃돌았다. 건륭제의 치세 동안 황하에서 7건의 홍수 범람 사태가 발생하여 건륭제가 구호 자금을 보내주었으나 중간에서 관리들이 모두 횡령한 바람에 치수 공사가 진척을 이루지 못한 적도 있었다. 그 이후로는 점점 심해져 중앙에서 처리해줄 강력하고 청렴한 고위 관리들이 나타나지 않아 지방의 말단관리부터 수상급인 수석군기대신(首席軍機大臣)까지 연관되어서 집단 뇌물수수 사건까지 발생하는 등 심각해졌다. 건륭제 치세 중기 때부터 군기대신 우민중은 청렴과는 거리가 멀고 스스로 막대한 사익을 취하며 대신들 사이에서도 뇌물이 오가기 시작하였다. 이에 하급 관리들 역시 서로 뇌물수수를 눈감아주고 과거에서도 일정한 돈을 지불한 응시자에게는 합격시켜 주는 등 그 폐해가 계속되면서 감숙성에서 청나라 최대의 뇌물수수 사건인 감숙모진안(甘肅冒賑案)이 발생하였다.
1774년(건륭 39년) 당시 감숙성은 가난한 지역으로 매년 북경의 군기처나 호부로부터 구호 자금을 받아서 사무를 처리하였다. 그리고 감숙 순무인 왕단망(王亶望)이 매년 그러하듯 건륭제에게 도움을 요청하여 구호 자금을 얻었으나 돈은 정작 구호에 쓰이지 않고 왕단망의 창고로 넘어갔다. 그러나 왕단망은 이러한 사실을 숨기고 구호 내역을 조작하여 건륭제에게 올렸고 이러한 사실을 모르는 건륭제는 왕단망을 절강성 순무로 바꿨으나 후임자에 이르러 뇌물수수 사건이 밝혀졌는데 1774년(건륭 39년)에서 1781년(건륭 46년)까지 7년 동안 왕단망 개인이 착복한 돈은 2백만 냥이 넘었고 감숙성의 전체 관리가 축적한 돈은 1500만 냥이나 되었다. 순무가 자신을 속였다는 것을 안 건륭제는 대노하여 왕단망을 비롯한 2만 냥 이상을 빼돌린 감숙성의 관리들은 모조리 사형에 처하는 등 강수를 두었다. 그 이후 건륭제는 군기처에게 각 성의 총독·순무가 제대로 보고를 올리는지 그 작년의 것과 대조하라 지시하였으나 자신이 직접 진두지휘하지는 않았기에 흐지부지되었다.
그리고 건륭제는 자신의 재위 후반기 내내 큰 영향력을 행사한 화신(和珅)에게 절대적 신임을 보냈다. 화신은 만주족 정홍기 출신으로 특별한 학력은 없었으나 두뇌가 명석하여 임기응변에 능했다. 19세 때 처음 궁중에 들어가 금군의 삼등시위로 시작하여 27세인 1776년(건륭 41년) 호부시랑이 된 이후로 계속 호부를 장악하며 국고를 책임졌고 왕단망의 뇌물수수사건을 철저히 밝혀내어 그 돈을 국고로 환수하는데 일조하였다. 이에 힘입어 1780년(건륭 45년)에는 불과 31세에 호부의 수장인 호부상서가 되면서 각지의 총독·순무에게 일정한 돈을 지불하면 대역죄를 제외한 모든 죄를 사면하는 방식으로 돈을 모아 자신의 창고에다가 쌓아두었으나 호부상서의 직분을 게을리하지는 않아 국고가 비었을 시에는 자신의 창고를 열어 국고에다가 돈을 보내어 메꾸었다. 백성들의 세금을 대폭 올리고 관리들에게 자주 뒷돈을 받고 반대파 신하에게는 중상모략을 일삼는 부정부패의 원상이었으나 중국어, 만주어, 몽골어, 티베트어등 4개 국어에 능통하여 건륭제가 내리는 국서를 직접 번역하여 보내는 등 업무처리능력이 뛰어나 수상급인 영시위내대신, 수석군기대신과 여러 문관과 무관의 관직을 겸직하며 집권 20년 동안 크나큰 영향력을 행사하였고 강희제와 옹정제 내내 크게 위축되어 온 신권을 다시 강화하였다. 또한 화신의 장남인 풍신은덕이 건륭제가 65세에 얻은 가장 총애하던 막내딸인 고륜화효공주와 혼인함으로서 황실의 인척이 되어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렀다.
화신이 조정의 정치를 좌우하는 동안 청나라의 부패는 극에 달하여 뇌물이 공공연히 거래되었다. 화신은 조정의 내금고를 채을 정도로 재산이 막대하였는데 가경제가 즉위 후 그의 가택을 수색한 결과 상상을 초월하는 엄청난 재산이 발견되었다. 중요한 몇 가지만 보면,황금 15만 냥, 구리 580만 냥, 사금 2백만 냥, 은원보 1천 개(1개 1백 냥), 원보은 940만 냥, 단계연 700여 개, 대홍보석 180개, 소홍보석 980개, 남보석 4천여 개 등 일일이 열거할 수 없을 정도로 그의 재산은 그 당시 청나라의 20년치 세수와 맞먹는 액수였다. 우리나라로 치면 년간 재정이 약 300조원이므로 20년치로 환산하면 6000조원이 된다고 보면 될 것이다. 화신을 죽인 가경제도 부러워했다고 한다.
물론 황제도 황제대로 재산을 모았다. 건륭제도 60년 집권 동안 갖가지 명목으로 재산을 모았는데, 건륭제의 탄신일에는 문무백관이 다투어 금은보석을 바쳤는데 그 액수가 대단하였다. 어느해 생일에 받은 금불상만 1만 개였다고 한다. 80세 생일 째 받은 금으로 된 편종은 지금까지 북경의 고궁 박물원 진보원에 전시되어 있다.
건륭제만 재산을 모은데 아니라 화신을 죽인 가경제도 마찬가지였다. 가경제는 몰수한 화신의 재산을 모두 궁중에 운반하여 자신의 소유로 하였다. 아렇듯 건륭제 후기에는 군신 모두가 건국 당시의 청렴했던 기풍을 버리고 재산 모으기에 열중하고 사치풍조에 젖어 들었으며 강희.옹정.건륭의 번영시대에서 점차 쇠퇴의 길을 향해 가고 있었다.
부정부패가 계속되자 반청 세력이 계속 나타났는데 1774년(건륭 39년) 왕륜(王倫)이라는 자가 관리들의 부정부패, 무거운 세금 등으로 사람들을 규합하고 이미 쇠망한 백련교를 다시 일으켰으나 건륭제의 대처로 손쉽게 진압되었다. 그러나 백련교를 비롯한 다른 반청 세력들도 은밀히 세력을 규합하는 등 건륭제 말년까지 계속 지방에서 산발적인 분쟁이 일어났다.
유럽과의 관계와 사절단
건륭제는 부분적으로나마 예수회 선교사들의 선교를 허락하였고 선교사들은 이에 따라 교세를 확장시키고 가톨릭으로 개종한 신자들에겐 조상의 제사 등 본래의 관습을 어느 정도 지킬 수 있도록 배려하였다. 그러나 1742년(건륭 7년) 교황 베네딕토 14세는 〈엑스 쿠오 싱굴라리〉(Ex quo Singulari)라는 칙서를 내려 가톨릭으로 개종한 신자들이 풍습을 유지할 수 있던 관행을 금지시키고 1744년(건륭 9년) 다시 또다른 칙서 〈옴니움 솔리키투디눔〉(Omnium solicitudinum)를 내려 이를 재확인하였다. 교황의 칙령이 내린 후로는 가톨릭 신자의 수가 늘어나지 않았고 예수회 선교사들도 제대로 선교 활동을 펴지 못하였다. 그 후 중국 내의 가톨릭 교세는 조정의 탄압과 유학자들의 공격으로 청나라 멸망 때까지 크게 성장하지 못하였다.
한편으로 유럽 상인들은 1750년대에 이미 광동성에 들어와 거주하며 중국식 길드인 공행(公行)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여서 청나라의 관세도 덜 지불하였고 현지 상인들과의 신뢰도를 쌓았다. 하지만 이러한 과정에서 청나라 상인들도 유럽인들에게 뒷돈을 받는 등 부정한 행위를 하였다. 특히 청나라에 관심을 가지던 영국은 본격적으로 진출하기 위해 1759년(건륭 24년) 영국 동인도 회사는 직원을 북경으로 보내 개항을 요구하였고 건륭제는 이를 허락하였으나 갑자기 이를 거절하고 대외 무역 규제를 대폭 강화하였다. 또한 영국인들이 주로 활동하고 있던 주산(舟山)과 하문(아모이)의 항을 폐항하고 개항을 광주항만 허락하였다. 추가로 건륭제는 유럽 상인들은 반드시 공행과만 매매를 하도록 규정하고 그 시기도 10월부터 이듬해 3월까지로 엄격하게 설정하였다.
이에 유럽 국가, 그 중 영국은 무역을 늘려 자신들의 세력을 강화하고자 여러 번 특사를 파견하여 건륭제에게 진귀한 선물을 주어 이를 타개하려 하였고 또 공사를 상주시켜 청나라의 동정을 항시 살펴보려고 하였다. 1788년(건륭 53년) 영국은 전권 대사로 카스카트(Cathcart)를 파견하였으나 카스카트가 청나라로 가는 도중 병사하여 뱃머리를 돌려야 했다. 1792년(건륭 57년) 9월 26일, 영국 정부는 다시 특별 사절단을 편성, 건륭제의 82번째 생일을 축하한다는 명분으로 특사로 조지 매카트니 백작을, 부사로 조지 스턴튼(George Staunton)을 명하여 파견하였다. 하지만 본래 매카트니는 청나라뿐만 아니라 일본까지 가서 쇼군을 만나 일본이 청나라에게 주로 수출하는 상품인 차를 직접 거래할 수 있도록 요청을 하려 하였다. 사절단은 대서양, 인도양을 거쳐 1793년(건륭 58년) 5월에 오문(마카오)에 도착하고 이를 알리는 서신을 건륭제에게 보내 알현의 허락을 받고 다시 출발하여 그 해 7월에 북경의 항구인 천진에 닻을 내렸다.
당시 건륭제는 막 완공된 여름 별장인 열하 피서산장으로 가서 지내고 있었다. 그렇기에 천진으로 온 다음 북경에서 여독을 풀고 다시 만리장성을 넘어 1793년(건륭 58년) 8월에야 피서산장에 도착해 건륭제를 알현하였다. 건륭제는 화신에게 사절단을 대접하는데 소홀하지 않도록 명을 내렸으나 도중 접견의 예의문제로 난항을 빚게 되었다. 본래 외국의 사신은 황제를 접견할 때 삼궤구고두(三跪九叩頭), 즉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땅에 조아리는 예를 취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매카트니는 자신은 청나라의 속국의 신하가 아니라며 거절하였으나 합의 끝에 건륭제의 정식 만찬에서는 삼궤구고두를, 그 밖의 접견에선 영국식 예를 취하도록 하였다. 매카트니는 건륭제의 탄신 만찬에서 삼궤구고두를 올리며 건륭제에게 당시 영국 국왕 조지 3세의 친서와 영국에서 가져온 여러 진귀한 선물을 받았다. 친서에서는 무역을 늘리고 공사를 상주시켜 줄 것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친서에서는 영국에게 주산 근처의 작은 섬을 할양해 영국인들이 사용하게 해달라는 내용도 쓰여있자 건륭제는 진노하며 이를 단호히 거부하고 영국 사절단의 일체의 행동을 금하였다. 건륭제는 그 다음 달인 9월에 영국 사절단의 귀국을 강제 조처하였다.
2년 뒤인 1795년(건륭 60년) 초에는 네덜란드와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를 대표하는 전권 특사 이삭 티칭(Issac Titsingh)이 건륭제의 재위 60년을 축하하기 위한 사절로 왔다. 광주를 거쳐 북경으로 와서 원명원에서 건륭제를 접견하였는데 노골적으로 청나라의 땅의 할양을 요구한 영국과는 달리 네덜란드 사절단은 그러한 행동을 보이지 않았으며 영국 사절단이 거부하던 삼궤구고두를 바로 올려 건륭제의 호감을 샀다. 건륭제는 네덜란드 사절단을 영국 사절단보다 더 우대하였고 그에 대한 선물도 더 많이 챙겨주어 보내주었다.
퇴위와 반란
1795년(건륭 60년) 말 건륭제는 스스로 황위를 물러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자신이 즉위할 때 한 약속이기도 하였는데 1735년(옹정 13년) 당시 즉위할 때 쓴 칙서에서는 즉위 60년 째에 황위에서 물러나겠다고 하였기 때문이다.
“ | 짐의 할바마마(강희제)께서는 61년간 재위하셨으나 짐은 감히 그 기록을 깰 수 없도다. 짐이 그 정도로 오래 살아있으면 건륭 60년 째 되는 해, 즉 짐의 나이 85세 되는 해에 황자에게 황위를 넘기고 물러나겠다. | ” |
본래 건륭제는 즉위할 때 첫 번째 부인 효현순황후 소생의 차남 영련(永璉)을 후계자로 염두에 두었으나 영련이 1738년(건륭 3년)에 죽은 이후로는 건저(建儲)를 오랫동안 보류하였다. 그 후 건륭제는 한족 출신 후궁인 영의황귀비를 사랑하여 그 아들인 15남 영염(永琰)을 1773년(건륭 38년) 은밀히 후계자로 세우고 영염의 이름이 담긴 함을 건청궁 정대광명 편액 뒤에 넣어놓았다. 1789년(건륭 54년) 건륭제는 영염을 가친왕(嘉親王)에 봉하고 정무와 군무를 처리하도록 하였고 1795년(건륭 60년) 9월 4일 편액에 넣어놓은 유조를 꺼내어 영염을 황태자로 봉하였다. 그리고 1795년(건륭 60년) 음력 12월 30일, 즉 양력으로는 1796년 2월 9일 건륭제는 황위에서 내려왔고 그 다음 날인 1796년 음력 1월 1일(양력 1796년 2월 10일)에 자금성 태화전에서 열린 양위식에서 전위조서를 내리고 황위를 황태자 영염에게 넘겨주니 이가 가경제이다.
“ | 짐은 감히 할바마마의 재위기간을 뛰어넘을 수 없는 바 이에 조칙을 반포하여 병진년(1796년)을 가경 원년으로 정하노라. 황태자 영염을 병진년 정월 초하룻날 황제에 즉위토록 할 것이며 짐이 직접 태화전에 나가 황상에게 옥새를 건네는 그 순간부터 짐을 태상황제로 칭하도록 하라. 그러나 아직 중요한 정무와 군무, 인사권은 짐이 직접 처리할 것이다. | ” |
조서에서도 언급했듯 건륭제는 태상황제로 물러남에도 여전히 군국대사를 처리하는 등 막강한 위세를 자랑하였다. 비록 가경제 역시 친정을 할 수 있었으나 중요한 일은 반드시 태상황제에게 물어보고 실행하였다. 이렇게 건륭제는 중국 역사상 태상황제 중 유일하게 금상(今上) 황제보다 더 많은 실권과 책임을 가졌다. 덕분에 가경제가 증오하던 탐관 화신은 건륭제의 비호로 조정에서도 아직 쫓겨나지 않고 자리를 지켰다. 5일 뒤인 1796년(가경 원년) 정월 6일, 건륭제는 가경제, 친왕·군왕, 그리고 조정의 전·현직 원로대신들을 모두 불러 조부 강희제가 열던 천수연(千叟宴)을 열며 대신들에게 만수무강의 축원을 받았다.
건륭제가 물러나고 가경제가 즉위하자 다시 백련교가 활기를 터서 백련교도의 난이 발발하였다. 이미 20년 전 한 번 일어났으나 건륭제의 빠른 대처와 내분으로 금방 진압되었기에 교도들은 백련교에 나오는 미륵불이 영생을 허락할 것이다라는 교리와 계속 늘어나는 인구와 반비례되는 경기, 그리고 부정부패의 영향으로 일반 백성들에게는 무거웠던 세금 등을 내세워 교도들간의 유대화를 강화하였다. 이때 이들을 이끈 총대장은 제림이었으나 제림은 1796년(가경 원년) 정월 역모 사실이 탄로나 능지처참당하고 그의 아내로 스물의 젊은 여인 왕총아(王聰兒)가 뒤를 이었다. 왕총아의 백련군은 호북성, 사천성 등에서 궐기하여 청군을 상대로 섬서성까지 진군하며 지구전을 펴는 등 오랜 기간 끌었으나 건륭제가 수석군기대신 화신을 호북성 녹영을 이끄는 대장군으로 파견하였고 청나라에 호의적인 호족들을 중심으로 민병대인 향용이 녹영과 협공을 하여 백련군을 대파하였다. 수세에 몰린 왕총아는 1798년(가경 3년) 전투 도중 절벽에서 뛰어내려 자진하였으나 백련교도들은 끊임없이 반란을 일으켰고 6년 뒤인 1804년(가경 9년)에야 전멸하였다.
노황제의 최후
건륭제는 이미 80이 넘은 노구였으나 여전히 정무를 처리하고 조회에도 자주 참가하는 등 왕성히 활동하였다. 그러나 태상황제가 된 후로 점점 기력이 쇠약해져 갔고 여러 번 피접을 갔으나 차도가 그리 있지는 않았다. 1799년(가경 4년) 2월 7일, 음력으로는 1월 4일에 60년간 재위하고 4년간 태상황제로서 황제보다 더 많은 실권을 장악하였던 건륭제는 노환으로 89세를 일기로 자금성 양심전(養心殿)에서 붕어하였다. 건륭제의 붕어를 가장 슬퍼한 것은 바로 건륭제의 비호로 20년 넘게 조정을 장악하던 화신이었다. 건륭제가 죽고 난 다음 비로소 최고권력자가 된 금상황제 가경제는 화신을 장의도감으로 명하여 국상을 처리하게 하였으나 파직하고 곧 권력을 농단하고 부정축재하였다는 등의 20개의 죄목을 발표하고 건륭제 붕어 보름 뒤인 2월 22일에 화신에게 자진 명령을 내렸다. 화신은 비단으로 목을 매고 자살하였고 화신이 평생 모아놓은 재산은 모두 국고로 환수되었다. 이때 처분된 화신의 재산은 모두 9억 냥이 넘어서 12년의 국가 총예산을 훌쩍 뛰어넘는 금액이었다.
건륭제의 묘호로는 오랫동안 재위하여 전성기를 지켜 성조와 세종의 뜻을 계승하였다 하여 ‘고종(高宗)’, 시호로는 ‘법천융운지성선각체원입극수문분무흠명효자신성순황제’(法天隆運至誠先覺體元立極敷文奮武欽明孝慈神聖純皇帝)으로 정하였는데 여기서 ‘융운’(隆運)과 ‘입극’(立極)은 국운을 높게 일으켜 세웠다는 뜻이며 나라를 평온히 다스렸다 하여 ‘순’(純) 자의 시호를 붙였다. 가경제는 아버지의 국상을 성대히 치뤄주고 1799년(가경 4년) 9월에 청동릉 안에 매장하니 능호는 유릉(裕陵)이다.
통치 철학과 사상
건륭제는 생애 전반에 걸쳐서 조부인 강희제를 존경하였다. 강희제의 정책인 자생인정 정책을 확장시키거나 치수에도 노력하는 등 조부의 뜻을 이어받으려 노력하였고 자신의 서재에는 강희제의 어진을 걸어놓고 본보기로 삼았다. 할아버지를 의식하여 재위 60년 만에 내려온 것 역시 건륭제가 강희제를 매우 존경한 대목 중 하나이다. 또한 건륭제는 일생에 걸쳐서 풍류와 독서를 좋아하였다. 그 스스로도 여행을 매우 좋아하여 순행을 자주 다니면서 문인, 예술가들과 담론을 하였다. 건륭제는 문화·예술 분야로는 상당한 지식을 지녔고 서첩, 도자기, 칠기, 그림 등 모든 예술품에 관심을 가지며 예술가들을 크게 독려하였다. 건륭제는 오전에 격무로 쉴틈이 없었으나 오후에는 정무는 일체 보지 않고 독서, 서화 등의 여가 활동에 치중하여 자신의 예술성과 지식을 동시에 늘렸고 정무에 시달리던 머리를 식혀주는 시간이기도 하였다. 건륭제는 음식에도 큰 관심을 가졌는데 중국음식의 집대성이라 불리는 만한전석(滿漢全席)이 완성된 때가 바로 건륭제의 치세 때였으며 차를 애호하여 용정차를 자주 마셨다. 그는 용정의 찻잎을 끓인 약수에 우유를 넣어 마셨으며 자주 대신들을 불러서 차를 대접하기도 하였다.
또 건륭제는 가족을 매우 중히 여겨 자신의 모후인 효성헌황후에게 효도를 다 하였는데 매일 거르지 않고 3번 어머니가 거처하는 자녕궁에 가서 문후드렸고 여러 순행에도 효성헌황후를 모시고 가는 등 어머니를 크게 봉양하였다. 효성헌황후는 1777년(건륭 42년) 86세로 사망할 때까지 내명부를 오랫동안 통솔하며 아들과 며느리, 손자들, 대신들에게까지 큰 존중을 받았으나 정치에는 일체 간섭하지 않았다. 또한 건륭제의 황자들은 선대인 강희제의 황자들이나 옹정제의 황자들과는 달리 황위를 놓고 세력다툼을 벌이지 않아 가경제가 황태자가 되고 황제에 즉위할 때까지 별다른 항의를 하지 않고 가경제의 등극을 받아들였다.
건륭제는 미복을 하고 잠행하는 것을 좋아하였는데 민간의 소문에도 귀를 기울이거나 대신들의 집을 불시에 방문하여 대신들이 눈여겨보는 인재들을 발굴하기도 하였다. 이렇게 하여 건륭제는 대신들이 평소 어떻게 지내는지 또 황제가 불시에 왔을 때 어떻게 대처하는지를 관찰하려 하였다. 건륭제는 세 명의 대신을 가까이 두며 자문을 구하였는데 그들이 바로 유용(劉墉), 기윤(紀昀), 그리고 화신이었다. 유용과 기윤은 건륭제 치세 초·중기에 활약을 하며 조정에 검소한 바람을 불어넣어 주었으나 후기에 화신이 두각을 나타내면서 유용과 기윤은 모두 자청하여 지방의 한직으로 내려가 화신을 견제할 사람이 없어졌다. 위의 예를 볼 수 있듯 화신은 축재를 많이 하는 탐관이었으나 부정부패를 한다 하여도 국고의 돈을 비우게 하지 않았으며 그 능력을 높이 사던 건륭제는 화신의 뒤에서 하는 일은 상관없이 조정의 영수로까지 성장했는데 힘이 되어주는 등 사람을 쓸 때 그 이력에 대해서 편견을 가지지 않았다.
평가
사후의 영향과 업적
건륭제가 죽은 후 청나라는 쇠퇴하기 시작하였다. 그 아들인 가경제는 건륭제와 화신이 죽은 후 부정부패를 일소하려 노력하였으나 여전히 관리들의 부정부패는 횡행하였고 그에 따라 청나라에 반대하는 움직임이 빈번히 일어났다. 1804년(가경 9년) 백련교도의 난은 진정되었으나 1813년(가경 18년) 백련교의 일파인 천교(天敎)도들이 난을 일으키고 황궁인 자금성에까지 난입하는 등 내란이 끊이지 않았다. 특히 이러한 내란을 진압하는데 돈이 많이 들어 군비를 2억 냥 이상 지출하는 등 청나라의 재정은 걷잡을 수 없이 악화되었다. 당시 내란, 재정 악화보다도 더 큰 문제는 외란으로 건륭제 때부터 시작된 청나라와 영국의 복잡하고 미묘한 관계는 후대에서도 지속되었다. 건륭제의 손자인 도광제 때에 영국 상인들은 건륭제가 정한 상업 정책을 무시하고 아편을 유통시켰으나 청나라 정부가 이를 금하고 아편을 폐기하자 함대를 이끌고 청나라로 쳐들어가 남경 조약을 맺고 향항(홍콩)을 가져가는 등 청나라는 계속 열강의 간섭을 받게 되었다.
외란과 더불어 민란의 불씨는 점점 커져서 1851년(함풍 원년) 청나라를 더욱 쇠약하게 만든 태평천국의 난이 발발하여 13년간이나 청나라 조정을 괴롭혔다. 당시 건륭제가 지나치게 원정을 한 이후로 쇠락해진 팔기군은 태평천국군을 진압하는데 공이 없었고 이러한 군대 세력의 약화는 지방에서 조직된 민병대 향용이 큰 세력을 얻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그리하여 향용이 결정적으로 태평천국군을 멸망시키고 태조 때부터 혁혁한 공을 세운 팔기군은 신식 무기의 등장과 향용의 대두로 더욱 쇠락해져 갔다. 또한 건륭제는 할아버지 강희제와 같이 한족의 문화를 흡수하는데 적극적이어서 그 문화를 발전시켰으나 만주족은 동화된 탓인지 자신들의 고유 문화를 잃기 시작하였다. 건륭제 이후 만주어를 사용하는 인구 수는 점점 줄어들었고 청나라 멸망 때까지 계속 하락세를 보였다.
한편으로는 건륭제 사후 많은 전설이 생겼는데 그 중 건륭제의 생모에 관한 설과 향비와의 사랑이야기가 많이 회자되는 전설이다. 정사인 《청사고》〈고종순황제실록〉에서 기록된 건륭제의 모친은 옹정제의 후궁 출신인 효성헌황후라고 나와 있다. 그러나 전설에 따르면 건륭제는 옹정제와 효성헌황후의 아들이 아닌 강남 출신 한족 문인의 아들이며 옹정제가 본래 얻은 아이는 아들이 아닌 딸이었는데 마침 같은 날, 같은 시에 한족 문인의 아들이 태어나 서로 자신의 자식을 맞바꾸었고 이때 맞바꾸어져 옹정제의 아들이 된 남자 아이가 건륭제라는 것이다. 또한 건륭제가 남순을 떠난 목적은 바로 생모를 만나기 위한 목적이라고 하나, 대부분의 남순 때 효성헌황후가 건륭제를 따라 동행하였기 때문에 사실성이 떨어진다. 향비에 대한 전설은 본래 실존하던 위구르족 출신의 건륭제의 비 출신인 용비(容妃)가 모델로 실제로 오랫동안 살다가 자연사한 용비와 달리, 전설 속의 향비는 건륭제의 끊임없는 구애를 받으나 동침을 거부하고 절개를 지켰다. 건륭제가 사냥을 간 사이 황태후인 효성헌황후가 향비를 불러 자진을 권유하자 향비는 이에 자진하고 그녀가 죽은 뒤 그녀의 몸에선 아름다운 향기가 나왔다는 전설이다. 이 두 전설은 건륭제가 강남 순행, 그리고 십전무공 중 하나인 위구르 원정에 끼친 영향에서 비롯된 전설로 당시 민간에서의 건륭제의 인기를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비판
건륭제 자신은 초, 중기 40년간 조부 강희제와 부황 옹정제의 정책을 계승하고 개혁을 단행하며 문화를 부흥시켰으나 후기 20년 동안에는 화신을 지나치게 편애하고 자신의 딸을 화신의 아들에게 시집보내면서 화신의 세력을 너무 방관하였다. 또한 건륭제의 비호로 화신은 자신의 집에 엄청난 양의 돈을 저장하는 등 화신의 전횡을 방치하여 화신을 비롯한 여러 관리들의 부정부패를 내버려두는 실책을 범하였다. 즉위 당시 나쁜 정치 상황과 국고의 돈마저도 넉넉지 않던 강희제, 옹정제와는 달리 건륭제 때에는 국고의 돈이 풍족하였기에 불필요한 사치가 잦았다. 건륭제 역시 연회, 후원 건설 등에 막대한 비용을 쓰고 재위 기간 내내 원정을 단행하는 등 국고의 돈을 크게 낭비하여 청나라의 재정 상황은 악화되어갔다. 그리고 건륭제는 베트남, 네팔 등 정복한 영토에는 무단 통치를 단행하여 현지인들에게 분란의 싹을 틔웠으며 실제로 건륭제가 죽은 뒤, 베트남과 버마는 독립하였다.
건륭제의 또다른 실책으로는 외국에 대한 시각이었는데 영국의 특사 조지 매카트니는 동등한 입장에서 통상을 요구하였으나 건륭제는 영국이 먼 나라에서 조공을 하러 온 것이다 생각하며 영국 사절단이 올 때 전국에 “영국 오랑캐들이 항복하였다”라는 방문을 보냈다. 건륭제는 영국 사절들에게 시종일관 거만한 태도를 보이며 “천자의 나라에는 부족한 것이 없다”라는 말을 하여 영국 사절단을 당황하게 만들었다.
현대의 영향과 평가
현대 이전만 해도 건륭제는 문화를 예술을 사랑하던 풍류군주라고 평가했으나, 근래에 들어서는 건륭제를 기점으로 청나라가 쇠퇴하기 시작하였다는 점을 주로 들며 건륭제에 대해 호의적인 평가를 잘 내리지 않는 편이다. 특히 그의 오만함과 과도한 사치, 낭비를 비판하였고 이러한 재화 유출은 훗날 청나라가 열강을 상대로 고전을 면치 못하여서 멸망 때까지 강건성세의 번영은 다시 오지 않았다. 건륭제를 유명하게 만든 민간의 설화는 후대에 들어서도 드라마·영화화 되었다. 중화인민공화국에서 만든 드라마 시리즈 《황제의 딸》은 건륭 시대를 다룬 작품으로 건륭제가 황자 시절 강남에서 만난 여인과 하룻밤을 지낸 후 떠나자, 수십 년 뒤 그 딸이 나타나 아버지를 찾으려는 내용으로 시작한다. 그 밖에도 중화인민공화국과 중화민국에선 이러한 야사 외에도 건륭제 후반의 이야기, 즉 건륭제와 화신을 다루는 내용의 드라마도 많이 나오는 등 건륭제를 다양한 시각에서 바라본 작품이 많이 나오게 되었다.
책으로도 많은 사랑을 받은 작품이 있는데 《강희대제》, 《옹정황제》를 쓴 작가 어유에허(二月河)는 그 완결판인 《건륭황제》를 써 베스트셀러에 오르는 등 다시 한번 큰 히트를 쳤다. 이 소설을 토대로 2002년 중국중앙방송이 다시 《건륭왕조》(乾隆王朝)라는 드라마를 만들어 건륭제와 화신의 관계를 다루었으나 전작인 《강희왕조》, 《옹정왕조》보다 다소 부진하였다. 한편 야사를 토대로 쓴 책으로는 중국의 무협 작가 김용이 쓴 《서검은구록》(書劍恩仇錄)이 있다. 여기서 건륭제는 강남에서 태어난 한족 출신으로 풍류를 좋아하는 황제로 나왔으며 여러 번 드라마로도 제작되어서 인기를 누렸다.
가족
건륭제는 3명의 황후와 5명의 황귀비, 5명의 귀비 등을 두었고 슬하에 17남 10녀를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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