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대한 명나라의 황족-주씨(朱氏)집안 수십만의 인원은, 상당한 수는 첫번째 난리중에 농민군(이자성, 장헌충등)에 의하여 죽임을 당하였고, 일부 인원은 청나라에 항거하는 중에 순국하였다. 이 두가지 유형에 속하는 이외의 사람들은 이 전무후무한 난리통에 겨우 살아남은 황족구성원들인데, 이들은 또 다시 간난의 세월을 보내게 된다
역사의 기록에 따르면, 명청교체시기에 일부분 황족구성원들 예를 들어, 황태자 주자랑, 주삼태자 주자형, 넷째 아들 영왕 주자소, 진왕 주존추, 진왕 주구계등은 먼저 이자성의 농민군에 포로로 붙잡혀 북경에 있었다. 청나라가 북경을 함락시킨 후에 이 황족포로들은 난리통에 실종되었고, 생사를 알 수 없으며, 행방을 알지 못하게 되어, 역사의 수수께끼로 남게 되었다.
백성들의 전설속의 주삼태자 즉 정왕(定王) 주자형(朱慈炯)은 전란중에 실종되었다. 영왕(英王) 주자소(朱慈炤)는 오랫동안 이름을 감추고, 사숙의 교사로 생활하였는데, 강희47년(1708년)에야 비로소 산동 문산현에서 청나라 조정에 체포되었고, 전가족이 몰살당했다. 그리고, 청나라 조정은 정치적인 필요에 의하여, 영왕 주자소를 억지로 정왕 주자형 즉 전설상의 주삼태자라고 우겨서 말했다.
광동 매현에는 이런 전설이 전해져 온다. 즉, 북경이 함락된 후 행방불명이던 태자 주자랑은 사실 한림원의 편수이던 가응사람 이칠순과 함께 이칠순의 고향인 매현으로 숨는다. 나중에 청나라 조정의 추적을 피하기 위하여 태자는 머리를 깍고 중이 되었다. 그리고 인적이 드문 곳에 절을 지어놓고는 이름을 "자전(紫殿)"이라고 하고, 또한 "성수사(聖壽寺)"라고도 하였다. 나중에 산에서 죽었다. 죽은 후에 그는 현지 사람들에 의하여 "태자보살"로 존경받았다. 이것은 당연히 전설일 뿐이다.
청나라의 박해를 피해서 일부 황족구성원들은 나라가 망한 후에 성을 감추고 이름을 숨기면서 산림에 숨거나 유랑생활을 하게 되며, 힘든 도피생활을 하게 된다. 종실출신인 팔대산인(八大山人)은 명나라가 망한 후, 스스로 주씨 성을 버리고, 아예 출가하여 중이 되었고, 청나라가 멸망한 날을 몰래 자기가 그린 그림속에 남겨두어 자신이 대명의 후손임을 잊지 않고 표시하였다.
주씨 번왕의 가지인 안창군왕 주숙차는 안창이 함락된 후, 절동으로 도망쳤다. 주산에서 실패한 후 전사하였다. 안창군왕의 큰 아들인 주모는 나이가 어려서 모친이 안고 도망쳤는데, 나중에 청나라 조정의 박해를 피해 항주 항정사오 가서 활당화상을 스승으로 모시고 출가하여 중이 되었다. 나중에 송강일대의 황폐한 암자에 머물며 생활하였다. 모친은 죽을 때 왕인(왕의 인감)을 아들에게 주었는데, 암자에 있던 다른 사람이 정보를 누설하여, 안창군왕의 장자도 관청에 붙잡혀 죽임을 당하였고, 암자안의 승려 수백명도 연루되어 죽임을 당하였다.
<<청패류초. 성명류>>를 보면 명나라가 망한 후 "황족들은 전전 유랑하여 성을 고치지 않은 자가 없었다"고 되어 있다. <<죄유록. 초소왕정전>>의 기록에 따르면 초왕의 가지인 기양왕 주모는 명나라 말에 초왕부가 함락된 후 복건으로 도망쳤고, 그는 엄위라고 부르는 서생과 함께 성을 바꾸고 요중에 들어가서 스스로의 몸을 보존하였다. 현재의 요족중에 명나라 황족의 혈통이 남아 있다.
<<죄유록>>에는 또한 어떤 종실출신의 사람은 명나라가 망한 후 절망하여 출가하였는데, 처음에는 무것의 태자암에서 중으로 있다가 나중에 계등사에서 주지를 하였다. 법호는 개납이고 시서화에 능하여 당시에 유명하였다. 그러나 한번도 옛날 일을 다른 사람과 얘기하는 법이 없었다.
그리고 어떤 명나라 종실구성원들은 핍박을 받아 청나라 조정에 투항하였고, 만주족의 통치를 받았으며 이로써 가족의 대가 끊어지는 것은 피했다. 일찌기 청나라 왕조에 투항한 것은 노왕(潞王) 주상방이었는데, 그 후예들이 어떻게 되었는지는 불명확하다. 가장 마지막으로 그리고 가장 많이 청나라에 투항한 것은 대만으로 도망쳐 있던 사람들이었다. 그 때 정성공 부자가 대만을 수복한 후에 종실을 우대하였다. 그래서 1661-1663년 사이에 많은 주씨 종실 사람들은 바다를 건너 대만으로 갔다. 이 종실의 황자왕손들을 정씨 부자에게 대우를 받았고, 대만에서 수십년을 살았다. 그러나, 강희22년(1683년)에 청나라의 시랑이 대만을 함락시키고 정씨 정권이 청나라에 투항하자, 여기로 도망쳐 왔떤 명나라 종실들은 대부분 포로로 잡혀갔고, 핍박에 못이겨 투항했으며, 만주족의 통치를 받았다. 당시 시랑이 대만에 도착했을 때, 바로 이 황족종실의 보첩과 인신을 몰수하였다. 청왕조는 이로서 전국을 통일하였고, 전국을 안정시켰으며, 너그러움과 인자함을 보이기 위하여, 이 명나라 종실의 유민들을 죽이지 않았다. 다만 그들을 내륙으로 옮겨서 산동, 하남등의 여러 군현에 안치시켰다. 이 일부 종실의 후예들은 이로 인하여 지금까지 후손이 전해질 수 있었다.
대만이 함락될 때, 영정왕 주목계는 망국노가 될 수 없다고 하여 목을 매어 자살하였다. 그는 아들이 없어서 그보다 한 배분이 낮은 익왕 주이호의 아들로 후사를 이었으며, 주엄진이라고 하였는데, 그 때 7살이었다. 사료의 기재에 의하면, 이 주엄진은 강제로 대륙으로 이사간 후, 1693년 청왕조에 의하여 하남 개봉부 기현에 안치되었고, 그 후예들도 여기에서 살았다고 한다.
자료에 따르면 영왕부의 또 다른 종실후예들은 명나라가 망한 후 여전히 강서에 남아 있었고, 지금까지 남아 있다고 하며, 강서 주씨의 주요한 부분이 되어 있다. 이 가족은 청말 민국시기에 <<강서팔지주씨종보>>를 만들었는데, 지금까지 강서성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또 다른 호북 개양일대에도 지금까지 명나라 종실후예들이 남아 있다.
매번 황조가 바뀔 때마다, 새로 건립된 황조는 전조의 황족을 없애버렸다. 그러나, 어느 정권도 청나라 황조와 같이 철저하지 않았다. 아마도 스스로 이민족으로서 우려하는 바가 많았기 때문에 명나라 황실에 대하여 심하게 대한 듯하다. 그래서 명황실에 대하여는 피바람을 부르는 도살정책을 썼다. 이것은 주씨들에게 명나라 말기의 농민반란때보다 더욱 참혹하고 더욱 무서운 재난을 몰고 왔다. 강희시기(1662-1722)가 되어서야 상황이 약간 호전되었다.
강희7년(1668년)에 강희황제는 다음과 같은 성지를 내린다. "명나라 종실의 자손이 많은데, 산속에 숨은자는 논밭으로 돌아오도록 하고, 성을 바꾸고 이름을 버린 자는 성씨를 원래대로 회복하도록 하라" 강희 23년(1684년), 38년(1699년)에 강희황제의 남순때에는 두번에 걸쳐 남경에 가서 명나라 개국황제인 주원장의 효능에 제사를 지냈고, 명나라 후예를 찾아서 주씨의 제사를 지내도록 조치하였다. 그러나 찾을 방법이 없어 결과는 없었다. 다시 옹정2년(1724년)에 옹정제는 정식으로 명나라 종실의 후예인 주지련을 찾아서 1등후로 봉하고 정백기에 넣어서 세습시켰고, 명효릉의 봄가을 제사를 담당하게 되었다. 이렇게 하여 명나라 황족의 한 갈래는 만주족에 들어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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