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세계사/중국 이야기

오삼계(吳三桂)가 청나라에 투항한 경위

구름위 2013. 6. 13. 15:19
728x90

오해1 : 많은 사람들은 오삼계가 청나라에 항복한 표지는 산해관으로 청나라 병사를 불러들인 것으로 알고 있으나, 실제는 오삼계가 청나라에 항복한 것은 산해관때부터가 아니라, 남명정권이 명나라 태자를 죽여버린 때로부터이다.

 

이자성이 오삼계에게 투항하라고 권유했을 때, 오삼계는 이자성에게 투항하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이자성이 먼저 오삼계의 전집안사람을 구속하고 오삼계의 부친을 목베고 오삼계의 처를 강탈해갔다. 오삼계가 어찌 이자성에게 투항할 수 있었겠는가? 오삼계가 산해관을 열고 청나라 병사를 받아들인 것은 큰 잘못이기는 하지만, 세상 사람들이 오삼계가 청나라 병사를 끌어들인 것을 욕하지만, 사람들이 알지 못하고 있는 것은 왜 오삼계가 청나라 병사를 끌어들였느냐는 점이다.

 

당시에 이자성은 오삼계가 투항하지 않는 것을 이유로 친히 백만대군을 이끌고 오삼계를 토벌하러 왔다. 오삼계의 병마는 5만이 안되었다. 더구나 앞에는 이자성의 군대가 몰려오고, 뒤에는 만청 팔기군이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으므로 근본적으로 싸울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군대를 이끌고 이자성과 싸워서 순국한다고 하여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그래서 오삼계는 도르곤에게 병사를 빌려달라고 요구하게 된다. 오삼계가 당사에 요구한 것은 병사를 빌리는 것이었지, 투항하는 것이 아니었다. 오삼계가 도르곤에게 보낸 서신중에서 "이자성이 북경에 진입하여 황제와 황후를 죽음에 몰아 넣었다. 나는 현재 힘이 모자라니 북경을 회복하기 힘들다. 당신이 병사를 보내어 나를 도와달라. 나중에 이자성을 쫓아내고, 대명강산을 회복하면 우리는 땅이나 재물로 당신에게 보답하겠다"

 

청나라 군사의 산해관진입의 조건으로 오삼계는 청나라병사들의 산해관진입후의 첫번째 요구로 이자성에게 붙잡혀있는 명나라 태자를 구해내는 것이고, 태자를 새로운 황제로 세우는 것이었다. 두번째 요구는 청나라 군사가 이자성의 군대를 친 후에 스스로 만주로 물러나는 것이었다. 교환조건으로서, 오삼계는 만주정권의 합법성을 인정하고 산해관이북의 토지를 청나라에 주기로 하였다. 도르곤은 산해관을 순조롭게 진입하기 위하여 거짓으로 오삼계의 요구사항을 응락하였다.

 

결과적으로 산해관에서의 대전에서 이자성의 수십만대군은 수만면의 청나라병사들에게 대패한다. 이자성은 급히 황제를 칭하고, 스스로 북경을 버린다. 오삼계는 원래 군대를 이끌고 북경성에서 물러난다. 오삼계는 군대를 이끌고 북경성을 들어가고자 하나. 도르곤은 약속을 뒤집고, 병사들로 오삼계를 포위하고 북경성에 진입하는 것을 저지한다. 오삼계는 어쩔 수 없이 부하를 북경으로 보내어 순조롭게 명나라태자를 구해낸다. 그리고 태자를 군중에 숨겨두고 시기를 기다린다.

 

그 후에, 청나라 군대는 남진하여 이자성의 잔여세력을 소탕한다. 남쪽에는 남명정권이 들어서는데, 오삼계는 군중에 이목이 많고, 태자가 청나라 조정에 붙잡히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부하를 시켜 태자를 남쪽으로 내려보낸다.

 

태자는 순조롭게 남명정권에 도착한다. 그러나 남명정권의 "황제"는 자기의 황위를 보전하기 위하여 태자를 가짜라고 모함하고 암중에 태자를 살해한다. 가련한 명나라의 태자는 만난을 겪고서도 죽지 않았고, 이자성과 청나라의 마수에서도 살아남았는데, 마지막으로 자기 사람의 손에 죽음을 당한다.

 

태자가 피살된 것은 오삼계의 변절의 직접적인 이유가 된다. 오삼계는 원래 삼국시대의 관우를 본떠 "몸은 조조의 부대에 있으나 마음은 한나라에 있는" 것을 생각하였으나, 태자가 피살되자, 오삼계의 최후 희망은 사라졌다. 오삼계는 남명정권이 자신을 용납하지 못할 것을 알고 있었다. 결국 청나라에 투항하는 길을 선택한다.

 

오삼계가 처음에 청나라에 항복했을 때, 청나라 조정이 여러차례 조선을 공격했으나, 조선은 항복하지 않았다. 이유중 큰 것이 조선의 조정에서는 오삼계가 삼국의 강유와 같다고 생각했고, 명나라 조정이 부흥할 날이 있을 것으로 생각했었다. 심지어 오삼계가 운남에서 반란을 일으키자, 조선의 군신은 명나라 조정이 회복되었다고 좋아하였다. 이로서 볼 때, 오삼계가 진정으로 청나라에 투항한 것은 산해관때부터가 아니라, 남명정권이 명태자를 살해하고 부터이라고 볼 수 있다.

 

오해 2: 산해관에서 청나라 병사를 끌어들인 것은 오삼계가 처를 빼앗긴 것을 복수하기 위해서이다.

 

많은 사람의 눈에 진원원(陳圓圓)은 화를 부른 미인으로 비친다. 명나라 조정은 바로 이 여자의 손에 의하여 멸망되었다고 보는 것이다. 가련하게도 여인으로서 이러한 악명을 얻은 것은 정말 억울하다고 볼 수밖에 없다.

 

전해지는 바로는, 진원원은 원래 강남의 명기(名妓)였다. 인물이 뛰어났을 뿐아니라, 노래와 춤에 능했다. 명나라 숭정제는 조정에 바빠 여색을 가까이 하지 않았으므로, 용체가 상할까 두려워 하여 진원원을 궁으로 보내어 숭정제를 모시게 하였다. 당시 국가는 내우외환으로 숭정제는 나라와 백성을 걱정하며 매일 힘들게 일을 하였으므로, 비록 진원원의 미색을 칭찬하기는 하였으나, 그녀에게 더 이상 마음을 쓰지는 않았다. 그 때 오삼계의 군공이 매우 높았으므로 숭정제는 진원원을 오삼계의 부친에게 주고, 오삼계의 부친은 다시 진원원을 오삼계에게 주었다고 한다.

 

위에서 쓴 바와 같이, 이자성이 북경을 함락시킨 후, 이자성은 오삼계에게 투항을 권유했고, 오삼계는 원래 민족적인 대의에 맞추어 이자성에게 투항하겠다고 응락하였다. 그러나 이자성은 오삼계를 믿지 못하고, 오삼계의 전 집안 사람을 붙잡았다. 오삼계가 북경의 밀정으로부터 이런 말을 보고받자 오삼계는 "이것은 헛소리다. 가볍게 믿어서는 안된다"고 하고는 여전히 친히 북경으로 가서 이자성에게 투항하러 갔다.

 

그러나, 무슨 이유에서인지, 이자성은 오삼계의 부친을 죽인다. 오삼계는 이 때 이미 북경으로 가는 도중이었다. 부친이 피살되었다는 말을 듣고, 오삼계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여전히 북경으로 걸음을 향했다.

 

이 때, 이자성의 수하대장인 유종민(劉宗敏)이 진원원을 차지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오삼계는 크게 내노하여, 바로 군사를 이끌고 산해관으로 돌아갔다.

 

이로써 볼 때, 소위 "충관일노위홍관(沖冠一怒爲紅顔, 오삼계가 화를 낸 것은 미녀 즉 진원원을 위한 것이다라는 유명한 싯구임)"이라는 것은 완전히 오삼계가 이자성으로부터 수차례에 걸쳐 무리한 핍박을 받은 것 때문이었고, 더 이상은 참을 수 없게 된 것때문이었다. 그러므로, 완전히 진원원때문이라고 볼 수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