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 몽골 제국의 성립과 발전(1) - 칭기즈칸의 등장
가. 칭기즈칸과 몽고제국
(1) 몽골 (Mongolia : 蒙古)
13세기 초, 중국은 淮水를 경계로 남송과 금(金)나라가 대립하고 있었고,
고려에서는 최씨무신정권이 수립되어 교정도감을 설치, 반대파를 철저히 숙청하었으며,
일본은 카마쿠라막부(鎌倉幕府 / 겸창막부)가 성립되어 일본 최초의 부케정권(武家政權)이 수립되었고,
비잔틴 제국에서는 십자군원정으로 콘스탄티노플이 점령되어 라틴제국이 성립되었다.
유럽에서는 프랑스의 필리프 2세와 영국의 리처드 3세, 그리고 존 왕이 영지문제로, 독일은 하인리히 4세가 로마교황과 수위권 문제로 다툼이 한창일 때,
바람과 모래먼지, 혹한(酷寒)과 사막(沙漠)으로 대표되는 몽골 고원에서는 세계를 경악과 공포로 몰고 갈 거대한 태풍이 서서히 잉태하고 있었다.
몽골 족(Mongol : 蒙古族/몽고족)은 몽골고원 및 그 주변에 사는 알타이어계(語系)의 몽골어군(語群) 민족으로 현재, 총인구 250∼300만 정도, 전형적인 몽골로이드로서, 비교적 키가 작고 단두(短頭)이며 얼굴 폭이 넓은 것이 신체적 특징이다.
원래 고원 북동부의 초원과 삼림이 상접한 지대에 살면서 반목반렵(半牧半獵)생활을 하였으나, 9세기 중엽이래 점차 남하하여 전형적인 기마유목민(騎馬遊牧民)이 되어 부족국가를 세우기 시작하였고, 13세기 초 칭기즈칸이 모든 부족을 통합하여 몽골제국을 건설하면서 그 이름이 세계에 알려지기 시작하였다.
이 지역의 지형은 평균 해발고도 약 1,400 m 이상의 고원지대로서, 대체로 서쪽이 높고, 동쪽이 낮으며, 서부 알타이산맥 중의 묀흐하이르한 산(4,366 m)이 가장 높고, 동부 도르노드 지구(552 m)가 가장 낮은 곳으로 알려져 있다.
북쪽으로는 시베리아에 접경하고, 남쪽으로는 인산(陰山 : 음산)산맥을 사이에 두고 중국 본토와 접경한 넓이 약 250만 ㎢, 중앙부에서 동부에 걸쳐 목축에 알맞은 대초원이 전개되고, 서쪽으로 갈수록 높고 험준하지만 이 지역도 천혜(天惠)의 고원성 초원지대를 이루어 목축이 가능하고, 북서에서 남동부에 걸쳐 몽골알타이, 고비알타이의 두 산맥이 이어지고, 중앙부에 한가이·헨티이 산맥이 완만한 높이로 이루어지며, 북부에는 탄울 및 사얀산맥이 형성되어 있다.
수계(水系)는 북부지역을 관류하는 셀렝가강(江), 동부지역을 흐르는 오논강, 현재의 몽골 수도 울란바토르 주변을 흐르는 툴강, 중앙지대를 북류하는 오르혼강, 서부지역의 자브한강·테스강·호브드강·이데르강 등이 주요 하천이며,
하천의 유속(流速)은 비교적 빠르고 물은 맑고 차며, 기후는 전형적인 대륙성 기후로, 여름은 덥고 겨울은 혹한이 계속되는데, 여름의 더위는 습도가 적어 견딜 만하고, 겨울의 추위는 -40 ℃로 내려가는 일이 흔하며,
봄이 짧고( 5·6월), 여름이 금방 가지만, 이즈음 몽골 초원의 아름다움은 여행자를 즐겁게도 하고, 기압의 변화가 심하고 때때로 돌풍이 일어 추위를 가져오기도 하다가, 9·10월은 이상하게도 몽골에서 가장 기후가 안정된 시기가 된다고 한다.
(2) 칭기즈 칸(Chingiz Khan : 成吉思汗 / 성길사한 / 1155 ? ~ 1227)
현재도 그렇지만 이 시기 즉 13세기 이전 까지 몽고부족이란 보잘 것 없는 민족으로서 고비사막 동북부지역 일부, 만주 지방에 소속된 흑룡(黑龍)강 발원 지대에 살고 있던 일개의 약소 민족에 불과 하였다.
몽고계에 속한 거란족이 10세기 초, 요하 상류에서 흥기하여 요(遼)를 세워 약 200년간 이 지역을 통합하기도 하였으나, 투르크(돌궐)계 제부족이 건재하고 있었고, 철저한 몽고화가 이룩되지도 못했기 때문에 거란이 망하고 나서는 그 이전과 다른 것이 별로 없이 여전히 투르크계의 제부족에 의해서 점거되어 있었다.
다만 척박한 자연환경에 적응하면서 살아남기 위한 수단으로 남녀 모두 기마(騎馬)술에 능하였고, 메마른 사막과 한서(寒暑)의 차가 심한 고원에서 자랐기 때문에 용맹하고 충실 소박하여, 인내심과 지도자에 대한 충성심이 매우 강했다.
이 때를 전후하여 몽고 초원의 주인공이 될 목고족은 투라이강과 헤이륭 강의 상류에 해당하는 오논(Onon)강의 분수령상에 있는 부르칸산을 근거로, 주로 유목생활을 하는 한편, 수렵도 곁들이면서 일부다처(一夫多妻)의 가족제도 아래 혈연적 유대가 강한 부족사회를 이루고 있었다.
몽고족은 당대 이래 송나라와 거란에 예속되어 오다가 칭기즈칸의 아버지 에스게이 때부터 점차 여러 부족을 통합하여 강대해졌으나 불행하게도 에스게이가 타타르(Tatar : 달단/??)에 의해서 살해되자 일시 통합되었던 부족은 다시 분열되었다. 이 때 칭기즈칸의 나이는 9세였다고 하며, 각 부족들의 시기로 온갖 어려움을 체험하고 여러 번 죽을 고비를 넘기기도 하였다.
칭기즈칸이 태어난 것 자체가 약탈의 상징성을 내포하고 있는데, 어느 날 그의 부친 에스게이가 이웃의 메리키트부족을 방문했을 때, 그 추장은 술대접을 하고, 처가 시중을 들게 되었다. 술이 거나하게 취하자 술김에 "네 마누라가 참 예쁘구나..." 하고 농담(弄談)을 하였으나,... 그것이 강자에게는 농담일지 몰라도 약자에게는 잘못했다가는 일족의 목숨이 달린 문제기 때문에, 추장은 서둘러 이혼하고 그녀를 에스게이에게 보냈고, 이렇게 해서 맞이한 그녀로부터 에스게이는 4형제를 두었는데 그 맏아들이 후일의 칭기즈칸이었다.
원래 몽고는 칭기즈칸이 태어난 한 부족 명에 불과하였으나, 그에 의해서 고비사막 남북에 걸치는 광대한 영역을 석권하게 되고,
이곳을 중심으로 아시아와 유럽 일대를 지배했기 때문에 이 지역과 주민을 총칭하는 명칭으로 확대되어 그렇게 부르게 되었다.
그의 아명은 테무친(鐵木眞 / 철목진), 바이칼호 근처에서 태어나, 아버지가 살해되고 어머니의 손에서 자랐다.
불우했던 어린 시절을 지나 성장하면서 고난과 역경을 굳은 의지와 용맹, 영특한 재략(才略)으로 극복하고 다시 부족을 통합하고 재건하는데 성공하였다.
그가 17세가 되어 성년식을 마치고 결혼하였으나, 얼마 후 메리키트부족의 습격을 받아 아내를 빼앗기고 자신도 겨우 살아남았다가, 그의 부친의 친구였던 케레이트부족의 왕칸과 동맹하여 메르키트부족을 무찌르고 아내를 되찾았다.
이는 20년 전 메르키트족이 그의 부친에게 당한 복수를 한 것이다. 한편 테무친의 명성이 높아지자 그와 오랜 친구였고 수많은 어려움을 같이 한 동족의 유력자 쟈무하가 테무친에게 도전, 테무친이 이들과 싸웠으나 전세가 불리하여 사로잡히고 말았다. 이 때 그의 부하들은 70개의 가마솥에 넣어 무참하게 삶아 죽였다고 한다.
이런 역경에서 왕칸의 도움을 받아 다시 쟈무하를 쳐부수어 숙적을 제거하는데 성공하였으나(1201), 쟈무하가 나이만의 다얀칸에게 망명하여 그를 부추겨 테무친을 괴롭혔으며, 다시 왕칸과 숙명의 대결을 펼치게 되는데, 왕칸이란 명칭은 여진족이 세운 금 나라에서 받은 칭호로서, 중국어의 왕(王)이라는 뜻과 투르크, 몽고어의 칸(Khan)이라는 보통명사가 합해서 하나의 명예와 권위를 상징하는 칭호가 되었다.
이 무렵의 몽고지방은 정세가 매우 불안하여, 동족 형제간에도 적대관계에 서는 수가 많았고, 신분과 위계(位階) 질서도 극히 불안정 한 시기였다. 왕칸도 한 때 동족에게 배반당하여 그 지위를 상실하고, 다른 부족 틈에서 망명생활을 한 적이 있었는데, 테무친의 주선으로 다시 족장(族長)의 지위를 되찾기도 하였다.
테무친이 쟈무하를 격파하고 그 세력이 커지자, 이에 왕칸은 불안과 동요의 빛을 띄고 테무친을 경계하게 되었다. 테무친이 왕칸을 친아버지처럼 섬겼으나, 피차가 통일국가의 야심을 품고 영토적 확대를 기도(企圖)하고 있었기 때문에 언젠가는 충돌은 피할 수 없었고, 당시 사막의 사정이라는 것이 동맹(同盟) 아니면 적대(敵對)라는 양자택일 한 가지 선택밖에 없었다. 때문에 잔적(殘敵)이 사라지면 두 사람의 대결은 숙명적이었다.
왕칸이 세력이 몽고 고원 일대에 떨치고 많은 부족이 그에게 복종하자, 이들과 반목한 테무친은 시베리아까지 도망가기도 했다. 그러다가 왕칸 진영 내부에서 세력 다툼이 일어나서 세력이 약해지자 테무친은 재빨리 이를 기습 공격하였고, 이에 견디지 못한 왕칸은 몽고지방 서반부를 차지하고 있던 나이만부족의 다얀칸에게 도망갔으나, 나이만의 한 군사에게 암살 당하고 말았다(1203)
나이만은 욱일승천(旭日昇天)하는 테무친의 세력을 억제하기 위해 그의 영역에 침입해 오자, 테무친은 이를 물리치고, 다얀칸과 그를 충돌질 했던 쟈무하를 사로잡아 처형하고, 고비사막 주변의 대초원을 통일, 전 몽고민족의 군장이 되었는데(1204), 이때부터 몽고부족의 이름은 몽고 고원 전체의 이름으로 통용하게 되었다.
테무친은 오논강 상류 지역에 개선하여, 몽골인을 비롯하여 북방 유목민 사이에 옛날부터 관행(慣行)으로 내려온 합의제도(合議制度)인 쿠릴타이(Khuriltai)에서 전 몽고의 주권자로서 추대되고 칭기즈칸이라는 칭호를 받았다. 이때 그의 나이 45세, 이것이 몽고제국의 탄생이다(1206)
쿠릴타이(Khuriltai)란 옛 몽골어로 집회(集會)라는 뜻이다. 이동을 특징으로 하는 유목민은 농경정착민들과 같은 큰 수직사회를 만들 수가 없다. 따라서 이들 사회의 기본 구성은 일가친척과 이에 준하는 혈연(血緣)으로 이루어지는 씨쪽들로 이루어지고, 그 위에 약간의 혈연관계가 있는 몇 개의 씨족이 합해지면 부족이 구성된다.
이들 씨족이나 부족에는 각각 내부에서 선출되는 장로가 있어서 그들의 합의에 의해서 최고의 지도자를 선출하고 국사를 결정했다. 이런 집회를 쿠릴타이라 했고 선우(單于) 또는 칸(干,可汗)이라 부르는 최고의 지도자는 반드시 쿠릴타이에서 추대되고 승인되어야 했다.
칭기즈란 첫째 고대 터키어인 텡기스(바다)의 방언, 둘째 강성(强性)을 뜻하는 몽고어, 셋째 1206년 즉위했을 때 5색의 서조(瑞鳥)가 칭기즈, 칭기즈하고 울었다는 데서 유래, 넷째 샤머니즘의 광명의 신 하지르 칭기즈 탱그리(Hajir Chinggis Tengri)의 이름이라는 설 등이 있는데 네 번째의 광명의 신 칭기즈 탱그리의 설이 가장 신빙성이 있다고 한다.
(3) 몽고의 군사력과 정복 사업
1206년 테무친이 오논 강변 평원에서, 몽골제국의 대칸에 오르면서 몽고사회에 뿌리 깊이 남아 있던 혈연적인 씨족적 공동체를 해체, 군사조직에 바탕을 둔 천호(千戶)라고 하는 유목민집단을 95개로 편성하였다.
천호란 보통 천명의 군사를 소집할 수 있는 유목민 집단의 크기를 말하는데, 천호는 10개의 백호(百戶)로 나누고, 다시 백호는 10개의 십호로 나누어 편성된 십진법에 따른 군사 및 행정조직이었다.
95개의 천호에는 88명의 천호장을 임명하여 한 천호장이 한 개 혹은 그 이상의 천호를 지휘케하고, 다시 천호장 위에는 좌, 우, 중의 만호장을 두어 천호장을 지휘케 하였다. 한편 천호장과 만호장의 자제들로 케시크테이라는 친위대를 만들어 특권을 주고 몽골 유목군단의 최정예 부대로 삼았다.
유목민 사회에서는 대략 2~3호가 모여 하나의 마을을 이루기 때문에, 이러한 피라미드구조의 바닥에 있는 십호제에는 서너 개의 마을이 모이고, 십호장의 지도에 따랐는데 평시에는 행정조직으로 전시에는 군사조직으로 활용하여 그 효용성을 높이고 이를 바탕으로 정복의 장도에 오르게 되었다.
즉위한 이듬해 서하(西夏)를 점령하고, 금(金)나라에 침입하여 그 수도인 중도(中都 :현 베이징)에 입성하였으며(1215), 한편 앞서 멸망된 나이만의 왕자 쿠출루크가 서요(西遼)로 망명하여 카라키타이(서요)로부터 상당한 대우를 받고, 그곳의 공주와 결혼하고도 배은망덕(背恩忘德)하여 그 나라를 약탈하였기 때문에, 부장 제베를 파견하여 토벌한 후에 이를 병합하여(1218) 그 영역이 알타이 산맥을 넘어 이슬람세계와 접경하게 되었다.
이때 시루강 이서의 광대한 영토는 투르크·이슬람 계의 호라즘이 흥기하여 이란 이동을 제압하고 있었다. 몽고와 호라즘간에 통상관계가 수립되어 칭기즈칸은 통상 사절과 대상(隊商)을 호라즘 국왕 무하마드에게 보냈으나, 호라즘 국왕이 사절단을 살해하자, 이것을 계기로 속국(屬國)의 군대를 합쳐 60만 병력을 동원, 금나라 정복은 뒤로 미루고 전후 7년간에 걸친 중앙아시아 원정에 나섰다.
20만 병력을 4개 부대로 나누어 제 1대는 차남 차카타이와 3남 오고타이에게 맡겨 오트라르를 공격시키고, 제 2대는 장남 주치에게 맡겨 우익(右翼)을, 제 3대는 세 명의 장군에게 맡겨 좌익(左翼)을 담당하게 하고, 자신은 막내아들 툴루이와 함께 제 4대를 이끌고 중앙으로 진격하였다(1219).
제 1대는 오트라르를 5개월간의 포위 공격 끝에 함락시키고, 앞서 몽고의 대상을 살해한 보복조치로서 그 태수를 잡아 칭기즈칸 면전에서 부글부글 끓는 은액을 눈과 귓구멍에 부어 넣어 죽이고, 부하라 등의 도시를 공략하여, 많은 전리품과 포로를 이끌고 사마르칸드에서 칭기즈칸의 군대와 합류하였다.
이들이 사마르칸드를 포위 공격하자 투르크와 이란 계의 정예군 5만은 이를 지키지 못했고, 성이 함락되자 수십만의 무고한 주민과 함께 전원 살해되었다. 다만 수공업자를 비롯한 특수 기술자 3만 여명만이 간신히 생명을 부지했다. 호라즘의 국왕 무하마드는 바그다드를 향해 탈출하였으나, 제베와 수부타이가 인솔한 별군(別軍)의 추격을 피하지 못하여 결국은 카스피해상의 작은 섬으로 들어갔다가 심신의 피로와 굶주림이 겹쳐 병사하였다. 이로서 서아시아 대부분을 지배하던 대국 호라즘은 멸망하였다(1220)
제베와 수부타이는 다시 카프카스산맥을 넘어 남러시아로 출동, 투르크계의 킵차크인들의 유목민과 키에프 대공을 비롯한 러시아 제공(諸公)의 연합군을 하르하 강변에서 격파하였으며(1223), 크림을 정복한 후 본 군에 합류하였다. 본 군은 그에 앞서 발흐를 점령하고 무하마드의 아들 잘랄웃딘과 인더스 강변에서 싸워 이를 격파하였다(1221).
그러나 뜨거운 열기에 견딜 수 없어 철군하기로 결정하고, 차가타이·오고타이군과 합세하여 귀국하였다(1225). 이때 이슬람교도의 공예가와 장인(匠人)의 기술을 높이 평가하고 그들을 포로로 데리고 왔다. 정복한 땅은 아들, 동생들에게 각각 분할해주어 나중에 한국(汗國)을 이룩하게 하였는데,
장남 주치의 적자(嫡子) 바투에게는 가장 먼 아랄해의 북방 키르키즈초원지대와 남러시아 일대를, 차남 차카타이에게는 알타이 산맥에서 아무강에 이르는 카라키타이와 옛 코라즘의 영토를, 삼남 오고타이에게는 바이칼호에서 텐산지방에 이르는 나이만의 옛 영토를 각각 분봉해 주었고,
막내 툴루이게는 몽고의 말자 상속 유풍에 따라 몽고 본토를 상속해 줄 요량으로 일단 분봉에서 제외 시켰다. 그 외에 몽고의 남동 지방으로부터 만주에 이르는 지역은 아우들에게 분배해 주었고, 화북지방과 아무강 서남지역은 부장들을 지방관으로 임명하여 각기 그 영지를 다스리게 하였다.
이어 1226년 가을 서정(西征) 참가를 거부한 서하를 응징하려고 서하의 수도 닝샤(영하/寧夏)를 포위하였으나 간쑤성 칭수이현(청수현/淸水縣) 시장(西江) 강변에서 66세를 일기로 파란만장했던 그의 생을 마감했다.
그는 샤머니즘 신자였으나 다른 종교에 대해서도 관대하였고 외래문화의 흡수에 노력하였으며, 특히 위구르 문화를 사랑하여 나이만 정벌 당시 포로로 데리고 온 위구르인 타타동가에게 여러 아들들로 하여금 위구르 문자를 배우게 하였고, 그것을 국자(國字)로 채용하기도 하였는데, 이 위구르 문자로부터 몽골문자와 만주문자가 만들어졌으며, 또 요(遼)나라 유신(遺臣) 야율초재(耶律楚材)와 위구르인 진해(鎭海)를 중용하고 그 교양과 정치적 능력을 이용하여 정복지 통치에 힘을 기울였다.
몽고군이 정복지에 주민들을 다음 정복지까지 잡역에 종사시키거나 싸움에서 방패로 사용하였는데 이를 거부하면 독전대가 사정없이 살해하였으며, 성벽도시를 공격할 때는 큰돌을 쏟아 넣는 투석기와 성벽을 무너뜨리는 특수한 수레 등을 제작하여 사용하였다. 금국과의 싸움에서 포로로 데리고 온 화약제조 기술자들에게 그 제조법과 사용법을 배워 이 서역 원정에 효과적으로 이용하였고,
툴루이가 니샤푸르를 공략했을 때는 그의 매부가 유시(流矢)에 맞아 전사했기 때문에 그 보복으로 점령 후에는 나흘동안 수십만을 학살하고 그 머리를 잘라 이것으로 피라미드를 3개나 만들었다. 지금의 아프가니스탄의 바미안전투에서는 주민을 한 사람 빠짐 없이 모두 살해하여 도시는 완전히 파괴당하여 그로부터 수십년 동안은 사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몽고가 정복한 지역은 이른바 초원지대로서 목축을 유일한 생업 수단으로 삼아온 그들에게 초원은 안주할 수 있는 안식처인 동시에 축복 받은 약속의 땅으로 알았기 때문에, 중국을 비롯한 농경사회나 상업지역은 이때 까지만 해도 버려진 땅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면서 이들 지역의 경제적 문화적 가치를 인식하고, 분봉된 소령지에서 영토를 확장하게 되었는데 이것이 골육간에 영토분쟁의 발단이 되었다. 그러나 이것 보다 더 큰 문제는 정복지에 안주하게 되자 초원의 유목생활에서 보여 주었던 굳건한 기상은 사라지고 나약한 생활 방식으로 변화하는 중대한 계기가 되어 몽고인 상호간에 현실적 이해 관계에 금이 가고 제국의 구심력(求心力)이 약화되는 부작용을 일으키게 된 것이다.
몽고 제국의 발전
(1) 오고타이 칸(Ogadai/ 와활태 / 태종/ 1229~1241)
칭기즈칸이 사망하자 몽고 고래의 유풍에 따라 막내인 투루이가 감국(監國)이 되어 몽고제국을 섭정해 왔는데, 케롤렌 강가에서 그의 유언에 따른다고 하여 제 3자 오고타이가 쿠릴타이에서 칸으로 추대(1229). 다시 대칸이 되었다.
이때 그의 나이 40세, 그는 성격이 관대·온후하고 왕자로서의 인품을 갖추었다고 하며 거란인 야율초재(耶律楚材)와 위구르인 전진해(田鎭海) 등을 등용하여 중앙정부의 정치기구를 정비하는 동시에, 속령(屬領)에 대해서는 다루가치(達魯花赤)를 파견하여 통치체제를 확립하는 등 많은 업적을 남겼다.
또한 오르콘강변에 수도 카라코룸성(城)을 건설하고, 그곳을 중심으로 제국 내의 교통망을 완비하였으며, 칸이 된 기념(?)으로 칭기즈칸의 정복사업을 계승, 이란·남러시아, 금(金)나라, 남송, 고려, 유럽 및 인도 방면의 정복계획을 수립하고 그 실천에 착수하였다.
몽골의 1차적인 목표는 그들의 최대의 적인 여진족의 금나라를 정복하는 것이고 금나라를 정복하기 위해서는 금과의 동맹관계 및 배후세력인 고려를 제거할 필요가 있었다. 이에 1231년 몽골의 사신 저고여의 피살(1225년)사건을 빌미로 고려에 침공, 최씨무신정권을 굴복시키고 그들의 배후세력을 제거한 후 1234년에는 고립무원의 금나라에 침공, 그 수도를 함락시키고 채주성(蔡州城 : 河南省 汝南縣)을 격파하여 몽고족의 오랜 꿈이었던 회수 이북의 광대한 중국 영토를 확보하였다.
당시의 고려는 고래싸움에 새우 등 터지는 꼴이 되어 이런 저런 사정으로 이후 30여년간 8차례의 침략을 받았고 그 피해는 상상을 초월했을 정도라고 한다. 그 사정을 다음 장에서 좀더 상세하게 살펴보기로 하자.
동방을 평정한 몽골의 다음 목표는 서아시아. 1236년 오고타이는 큰형 주치의 아들 바투(拔都)를 총사령관으로 수브타이를 부사령관으로 임명, 대규모의 서방원정군을 파견, 바투의 몽골 군대는 동러시아의 패권을 쥐고 있던 블라디미르 대공 유리 2세의 군대를 격파하고 삽시간에 리아잔을 함락시키고, 아직은 지방 소도시에 불과했던 모스크바를 쉽게 점령, 다시 키에프를 공격하여 이를 폐허로 만들었다(1240)
바투는 차카타이의 아들 바이달에게 별군(別軍)을 주어 헝가리에 앞서 폴란드를 침입하게 하였고, 폴란드를 함락한 후에는 당시 독일의 영토였던 실레지엔을 공격, 실레지엔의 왕 하인리히 2세는 몸소 3만의 군대를 이끌고 폴란드 및 독일 제후의 연합군과 함께 이들을 맞아 싸웠으나, 니그니츠교외에서 몽고 군에게 참패하여 비장한 최후를 마쳤다(1241). 이 전투를 "발시타르의 싸움"이라 하고 이 싸움에서 몽고 군은 죽은 적군의 귀를 잘라 9개의 큰 포대를 가득 채웠다고 한다.
한편 헝가리에 진격한 바투의 군대는 폴란드로부터 개선한 바이달의 별군과 합세, 수도 부다페스트를 함락시키고, 오스트리아로 진격을 개시, 이때 본국에서 오고타이 칸이 사망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바투의 군대는 일단 서정(西征)을 멈추고 다음 칸을 뽑는 쿠릴타이에 참석하기 위해 귀환 길에 올랐다. 이래서 천만다행으로 유럽은 몽고의 말발굽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당시의 유럽, 특히 독일은 황제와 교황간의 수위권 다툼으로 틈이 벌어져 전력이 약화되어 있었고 중 무장한 유럽의 기사들이 몽고의 경기병(輕騎兵)을 당할 수는 도저히 없었다. 만약 몽고군이 계속 서진 하여 프랑스까지 갔다면, 노르만족 이상의 약탈과 살육의 큰 잔치(?)가 다시 벌어질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오고타이의 죽음이 이런 환란(患亂)을 막아 주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몽고군의 잔인성이 널리 알려지면서, 유럽인 들은 아시아를 공포의 대상으로 다시 보게 되었다.
귀환 길에 오른 바투는 남 러시아의 평원에 도착했을 때, 투루이의 장남 망구에게 모종의 밀계(密計)를 주어 먼저 본국으로 보내고, 정권 변동에 따른 사태의 추이를 예의(銳意) 주시하던 중, 본국에서 이미 칸이 추대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볼가강 하류에서 가까운 사라이에 자리를 잡아 러시아 제후들을 다스리며 이 지역을 통치하기로 하였다. 이것이 킵차크한국이다.
그 영토는 원래 투르크계의 유목민 킵차크족들의 것이기에 이곳을 킵차크한국(칸국)이라고 부르게 되었으며, 칸은 황금색 천막에 살고 있어서 금장국(金帳國)이라고도 하였다. 이 후 몽고의 러시아 지배는 약 200 여 년 간 계속되었다.
(2) 몽고의 고려 침입
고려가 몽고와 악연(惡緣)을 맺게 된 최초의 동기는 칭기즈칸이 부족을 통합하고, 금 나라의 지배하에 있던 거란족을 토벌 한데서부터 시작한다.
여진족이 세운 금 나라가 내부 분열로 국력이 쇠약해 지자 중국의 동북 지방에 있던 거란족이 다투어 독립 상태를 유지하게 되었고, 칭기즈칸은 그의 조부 때부터 원수가 진 이 거란족을 토벌하고, 가마솥에 삶아 죽이는 등 잔인하게 살륙을 서슴없이 자행했다.
거란족의 한 무리가 이 무서운 몽고족을 피해서 동쪽으로 도망하다가 결국은 한반도의 북부까지 들어 왔고, 1216년 거란유민이 영삭진(寧朔鎭)˙정계진(定戒鎭)에 침입하여 재물을 약탈하고, 황주를 침공하였다.
다시 1217년 고려는 거란 병에게 대패, 그러나 1218년 거란 병이 재침 하자 조충 등이 거란병을 강동성(江東城)으로 패주시켰다.
이듬해 고려는 조충과 김취려를 보내어 이들을 토벌하고 있었는데, 한편 당시 두만강 유역에는 금의 장군 포선만노가 독립정권을 세워 동진이라 부르고 있었다. 이에 몽고는 고려, 동진과 연합하여 강동성에 웅거하고 있던 거란족을 섬멸하고 고려와 외교관계를 수립, 거란을 응징해준 대가로 조공을 요구하였다(1219) 고려는 마지못해 이에 응하고 한편으로는 여러 곳에 성을 쌓아 몽고에 대비하였다.
그 후 몽고 사신 저고여(차고여 / 札古與) 피살사건(著古與被殺事件)이라는게 발생하였는데, 저고여는 1221년과 1224년 두 차례에 걸쳐 몽고의 사신으로 고려에 파견되었고, 한편, 동진의 포선만노는 칭기즈칸이 서역원정으로 정신없는 틈을 이용, 이를 호기로 삼아 몽고와의 국교를 단절하고 고려에 무역을 하자고 요청해 왔다.
이에 난처한 입장에 선 고려는 일단 몽고와 동진 두 나라와 통교를 계속하며 정세를 관망, 1224년 11월 공물을 요구하러 온 저고여가 1225년 정월 함신진(咸新鎭 / 함신진 / 의주)을 거쳐 본국으로 돌아가던 중 압록강가에서 피살된 사건이 일어났다. 그 무렵 금(金)나라와 동진은 고려와 몽고를 이간할 목적으로 고려를 침범할 때 몽고복장을 하여 몽고의 소행으로 가장하고, 몽고 사신이 고려에 들어올 때는 고려의 복장을 하여 습격하기도 했다.
이러한 이유로 고려는 이 사건이 금 나라 도둑의 소행이라고 주장했으나, 몽고는 고려와 국교를 단절하고 이 사건을 고려 침입의 구실로 삼게 되었다. 이로써 동진과의 관계도 악화되어 1228년 동진(東眞)은 정주(定州)와 장주(長州)에 침입하였으나 이를 물리쳤다.
오고타이가 칸이 되고, 1231년(고려 고종 18) 몽장 살리타(Salieta i/ 撒禮塔 / 살례탑 / ? ~ 1232)가 이를 고려인에게 살해된 것으로 의심하고, 함신진(咸新鎭)을 넘어 공격해 왔으나 구주(龜州)에서 박서(朴犀)에게 패하였다가, 다시 군대를 정비하여 개경 성의문(省義門) 밖까지 침공해 왔으므로 고려에서는 살리타가 있는 안북부(安北府:安州郡)까지 사신을 보내어 강화하게 하였다.
이렇게 해서 이듬해에 살리타는 다루가치(darughachi / 達魯花赤 / 달로화적) 72명을 남겨 두고 일단 돌아갔다. 이 때 고려는 무신 정변(1170) 이래 국정이 매우 혼란하였는데, 최충헌이 등장하여 사방에서 일고 있던 반란을 과감히 진압하고, 최씨무신정권을 수립하였으며, 그의 아들 최우가 교정도감이 되어 집권하고 있었다.
최우는 몽고가 다루가치를 파견하자, 정권에 불안을 느꼈고, 몽고의 요구가 지나치게 과다하였으며, 반 최씨 세력을 견제할 목적도 있고 해서 도읍을 강화도(江華島)로 옮기고, 다루가치를 철수시키는 등 반몽 태세를 갖추자 다시 살리타가 고려에 침입하였다(1232) 이 후 몽고의 침입을 연표로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1231년 제1차 몽골군 침입. 살리타[撒禮塔]를 원수로 삼아 평주(平州)를 치고 개경에 육박.
1232년 강화도(江華島) 천도. 다루가치[達魯花赤]를 축출. 몽골군 살리타 2차 침입. 김윤후(金允侯)가 지휘하는 부곡민이 처인성(處仁城)에서 항전. 살리타를 사살.
1235년 몽골군 당올대 3차 침입, 용강(龍岡), 삼등(三登), 용진진(龍津鎭), 동주성(洞州城) 등을 함락, 동경(東京/경주)까지 침입. 야별초군(夜別抄軍)이 지평(砥平)에서 몽골군 격파.
1236년 개천(价川), 죽주(竹州)에서 몽골군을 크게 격파. 강도(江都)에서 대장경의 재조(再雕) 시작(고려대장경/ 8만대장경).
1238년 동경의 황룡사9층목탑, 황룡사장륙상(皇龍寺丈六像)이 불탐. 조현습(趙玄習) 등이 몽골에 투항, 홍복원의 지휘를 받음.
1239년 몽골군 철수. 몽골 사신이 와서 왕의 친조(親朝)를 조유(詔諭).
1241년 족자(族子) 영녕공(永寧公)을 왕자(王子)라 칭하고 몽골에 보내어 볼모[禿魯花]로 삼음.
1247년 아모간(阿母侃)이 지휘, 제4차 몽골군 침입.1249년 몽골, 고려왕의 출륙친조(出陸親朝)를 강요. 별초군, 동계(東界)에 침입한 동진군을 격파. 최우 죽고, 최항(崔沆)이 정권 장악.
1253년 야굴(也窟)의 몽골군이 제5차 침입. 고종 출륙하여 승천(昇天) 신궐(新闕)에서 야굴의 사자와 회견.
1254년 차라대(車羅大) 제6차 몽골군 침입.
1255년 차라대 제7차 몽골군 침입
1256년 수군을 남하시켜 몽골군을 막게 함. 몽골의 차라대(車羅大), 고려왕자의 몽골방문 요청.
차라대 철군.
1257년 최항 죽고, 최의(崔誼) 집권. 차라대의 제8차 몽골군 침입.
1258년 최씨무신정권 붕괴. 충주의 별초군이 박달령서 몽골군 격퇴.
1259년 성주 기알성의 야별초군과 주민 몽골군 대파. 한계성(寒溪城)에서 몽골군 격멸. 고종 죽고(1192~), 태자 전 몽골로 감.
1261년 몽골, 요양(遼陽)의 고성(故城) 수리, 안무고려군민총관부(安撫高麗軍民摠管府)를 둠. 동서학당(東西學堂)교역장 설치.
1269년 임연(林衍)이 원종을 폐하고, 안경공(安慶公) 창을 세웠으나 반년 만에 원종이 복위.
1270년 강화에서 환도. 삼별초군(三別抄軍)의 항몽전(抗蒙戰). 삼별초군의 해산명령에 배중손(裵仲孫) 등이 항쟁 시작.
1271년 삼별초군, 합포(合浦)˙동래(東萊)를 공격, 금주(金州)를 점령. 세자 심(諶)을 몽골에 보냄.
1272년 세자 심이 변발(辨髮)과 호복(胡服)으로 돌아옴.
1273년 김방경(金方慶)이 원군(元軍)과 함께 탐라의 삼별초군을 공략. 탐라에 다루가치총관부(達魯花赤摠管府)를 둠.
1274 세자 심(39세) 쿠빌라이 딸(홀도로게리미실 공주,16세)와 결혼,이후 5명의 왕(충렬왕, 충선왕,충숙왕,충혜왕,공민왕)이 원제실의 부마가 됨.몽고 풍습(호복,변발,융복) 유행함. 설렁탕, 소주, 포도주, 상화 들어옴. 결혼도감제정으로 조혼 풍습 시작됨
1274년 원(元)이 전함 300척을 만들게 함. 제1차 여원연합군(麗元聯合軍) 일본정벌 실패.
1278년 충렬왕, 원의 관리와 원군의 철수 및 고려인 송환을 요구.
1280년 일본 정벌을 위해 정동행성(征東行省)을 둠.
1281년 제2차 여원연합군의 일본정벌 실패.
1291년 원의 군대와 함께 합단군을 연기(燕岐)에서 격파. 상서성(尙書省) 폐지, 다시 중서성(中書省)을 둠.
1292년 개경으로 환도.
1294년 원나라 세조(世祖) 죽고, 동방정벌 중지. 탐라에서 원나라 철수.
1295년 탐라를 제주(濟州)로 고침.
1298년 충렬왕 태상왕(太上王)이 되고, 충선왕(忠宣王) 즉위.
1308년 원이 충선왕을 심양왕(瀋陽王)에 봉함. 충렬왕 죽고(1236~), 충선왕 다시 복위. 서운관(書雲觀) 창설.
1310년 원에서 충선왕을 심왕(瀋王)에 봉함.
1313년 충선왕, 충숙왕에게 전위(傳位), 조카 연안군(延安君) 호를 심양왕(충선왕)의 세자로 함.
1316년 상왕(上王), 심왕의 위(位)를 세자 호에게 전하고 태위왕(太尉王)이라 칭함.
1320년 정방(政房)을 다시 설치, 관리임명을 담당. 원, 상왕 충선왕을 토번(吐蕃)으로 귀양 보냄.
1325년 상왕 충선왕 원에서 죽음(1275~). 예문춘추관(藝文春秋館) 예문관과 춘추관으로 분리.
1332년 상왕 충숙왕 복위하고, 충혜왕은 원나라로 감.
1340년 충혜왕 복위. 원나라의 문제, 고려인 기씨(奇氏)를 제3황후에 봉함.
1343년 원, 충혜왕을 게양(揭陽)에 귀양.
1344년 충혜왕 악양(岳陽)에서 죽고(1315~) ,충목왕(忠穆王) 원나라에서 즉위(~1348). 숭문관(崇文館) 설치.
1352년 충정왕 강화에서 죽음(1337~). 변발(辨髮)을 금지. 안흥˙서산˙강화 등지에 침입한 왜구를 격퇴.
1356년 원나라 연호 사용을 중지. 쌍성총관부 회복.
1359년 홍건적(紅巾賊)의 제1차 침입. 4만여명이 압록강을 건너, 서경 함락.
1360년 각군 홍건적 무찌르고 서경수복. 강화에 왜구 침입.
1361년 홍건적 10만으로 제2차 침입. 개경 함락, 공민왕 복주(福州)로 파천. 이성계(李成桂), 홍건적을 대파.
1363년 문익점(文益漸), 원나라에서 목화씨 가지고 옴.
1366년 전민변정도감(田民辨正都監)을 설치, 신돈(辛旽)을 판사(判事)로 함.
1369년 이성계를 보내 동녕부 공격, 원(元)나라와 절교.
1370년 명나라의 연호 사용.
1374년 공민왕 피살되고(1330~), 우왕(禑王) 즉위(~1389).
1377년 최무선(崔茂宣), 화통도감 설치.
1378년 최영, 이성계, 왜구를 승천부(昇天府)에서 대파.
1387년 왜구를 막기 위해 기선군(騎船軍)을 편성.
1388년 이성계가 위화도(威化島)에서 회군. 이성계, 우왕을 폐하고 창왕(昌王)을 세움.
1389년 박위, 대마도(對馬島) 정벌. 왜선 300여 척 격파. 창왕 폐위되고 공양왕(恭讓王) 즉위.
1391년 이성계, 삼군도총제사(三軍都摠制使)가 되어 군사통수권을 장악.
1392년 정몽주 피살. 이성계 즉위. 문무백관의 제도 제정.
1393년 국호를 조선(朝鮮)으로 결정. 식년문과(式年文科) 실시(33인 급제).
'역사 ,세계사 > 중국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청(淸)의 성립과 발전 (0) | 2013.01.24 |
|---|---|
| 원의 중국지배 (0) | 2013.01.22 |
| 송(宋)대의 중국 (0) | 2013.01.22 |
| 당의 멸망과 5대의 혼란 (0) | 2013.01.22 |
| 수(隋)·당(唐)의 통일제국과 동아시아 세계의 성립 (0) | 2013.01.2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