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세계사/중국 이야기

당의 멸망과 5대의 혼란

구름위 2013. 1. 22. 17:10

중국대륙 북방의 유목민들

 

(1) 진(秦)·한(漢)에서부터 위진 남북조시대까지의 북방 유목민

 

아시아대륙의 중앙부를 동서로 길게 관통(貫通)하고 있는 건조지대에는 인도양과 태평양에서 불어오는 계절풍이, 높은 산맥을 넘으면서 습기를 모두 빼앗기고, 이곳에 도착하였을 때는 매우 건조하여 사막, 고원, 분지 등을 형성한 곳이 많으나, 한편으로는 일망(一望)천리 끝 없는 지평선(地平線)이 이어지고, 이 지평선에는 강풍과 건조한 기후에 견디기 위해 몸이 작은 일년초들이 땅속 깊이 뿌리를 내리고 짧은 여름동안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기 위해 부지런히 자라는데, 이곳을 초원지대(steppe)라고 한다.

 

이곳에서 선사시대부터 유목생활을 하던 수 많은 종족이 있었지만, 그 흔적만으로는 그들의 계보(系譜)를 밝히기는 어렵고, 기원전 8세기경에 이란계라고 추정되는 스키타이족이 그리스로부터 청동기문화를 받아들여 이를 독자적으로 발전시키고, 많은 유물을 남김으로써 이후부터는 그 계보가 들어 나게 되었다.

 

이들이 중국의 북변에서 중국을 자주 침범했기 때문에 중국 역대왕조는 이들의 침입에 대처해야 했고, 그래서 중국의 사서(史書)에는 이들의 이름이 자주 등장하는데, 그 이름을 따라가 보면, 진 한 시대에 흉노는 중국에게 만리장성을 쌓게 하는 수고를 주었고, 위진남북조시대에는 아예 중국에 들어와 그들의 왕조를 세웠는데, 이때 활약한 것이 흉노계와 티베트계로서 이들이 세운 것을 오호 16국이라 한다.

 

그 후 이들은 선비족이 세운 북위에 의해서 통합되고, 중국왕조를 강남지방으로 몰아 내 남북조시대를 만들었다. 이 시기 몽고족 유연은 큰 세력을 형성하여 5세기에는 그들의 우두머리를 칸(khan :汗)이라고 부르기 시작했고, 북위를 침범하여, 약탈을 일삼자 유목민이 세운 북위가 이들을 막기 위해서 장성을 쌓아야 하는 일이 벌어지게 되었다.

 

그 후 수 당 시대에는 돌궐(투르크)이 우수한 제철기술을 가지고, 주변 유목민을 정복하여, 동서 투르크스탄을 차지하고, 동서교역로(실크로드)를 장악하여 번성하였는데 이들은 유목민으로서는 처음으로 돌궐문자를 만들고 그 문자로 자기들의 역사기록을 남겼다.

 

돌궐의 뒤를 이어, 같은 투르크계인 위구르가 등장하여 돌궐을 복속시키고, 위구르문자를 만들어 문화적으로 자긍심을 높이고, 각지방의 기술인, 상업인, 각종 장인(匠人)들을 받아들여 생산을 높였으며, 안사의 난(755-763) 때에는 군대를 파견하여 이를 진압하는데 공을 세웠으며, 그 대가로 당나라로부터 많은 물자를 받아 생활을 문화적으로 향상시키는데 유용하게 사용하였고, 당의 수도 장안에는 수많은 위구르인들이 살았다.

 

(2) 5대의 혼란과 거란족

 

당이 망하고(907) 오대의 혼란기가 되었을 때, 거란(Kitai)이 나타나 동아시아의 새로운 강자로 등장하였다. 이들은 시라무렌(Siramuren)강 남안(南岸)에 살고 있던 남몽고계의 유목민들이 였는데, 여덟 개의 토탬부족 연합체로 이루어졌으며, 백마를 탄 신인(神人)이 파란 우차를 타고 온  천녀(天女)를 만나 사랑을 맺고, 나라를 세웠다는 설화를 옛날부터 가지고 있었다.

 

이 때 파란 우차(牛車)를 타고 온 천녀 계통은 술율(述律) 혹은 심밀(審蜜)이라는 집단이 되었고, 백마를 타고 온 청년계통은 야뉼(耶律)의 집단이 되었다고 하는데, 심밀은 소(牛), 야뉼은 말(馬)을 가르키는 몽고의 고어(古語)를 음역(音譯)한 것이라고 한다.

 

이 두 개의 집단에서 거란의 8부족이 파생(派生)하였는데, 모든 거란의 부족은 크게 야뉼과 심밀의 두 개의 부계(父系) 집단으로 나누어져, 왕실의 성은 야뉼, 황후의 성은 심밀로 불렀다. 그리고 해마다 백마와 푸른 소를 잡아 천지일월과 종족의 시조에게 제사하고, 8개 부족은 각 부족의 수장(首長)인 대인(大人)들이 모여, 의회를 조직하고 교대로 3년 임기의 칸(가한:可汗)을 뽑아 부족 연합체를 통치하게 하였다.

 

10세기 초엽 칸으로 뽑힌 야뉼아보기(耶律阿保機:옐리아보기)는 칸의 교체기를 세 번이나 묵살하고, 반대파를 암살하는 등으로 세력을 굳히고, 드디어 수도를 임황부에 정하고 대거란국을 건설하고(916) 스스로 제위에 올라 거란의 태조(916-926)가 되었으며, 그는 독자적인 거란문자를 만들어 고유문화 육성에 힘쓰고, 한편으로는 해동성국이라고 불렀던 발해를 멸망시키고(926) 정복왕조로 등장하였다.

 

그 후 거란은 후진을 세운 석경당을 도와준 대가로 화북지방의 연운 16주를 할양받고, 중국의 화북지방 일부를 지배하였으며, 그 후 국호를 요(遼)로(947), 요에서 다시 거란으로 고치는 등, 11세기 동아시아의 최 강자로 군림하다가 여진족이 세운 금(金)나라에게 망할 때(1126) 까지 약 200년간, 송으로부터는 막대한 세폐를 받았고, 고려에도 세 차례나 침입했으며(992-1018), 샤만적인 거란식 불교의 융성에도 힘써 대장경을 간행하고 거대한 사탑을 세우기도 하였다.

 

나. 당의 멸망과 5대 10국의 혼란기(907~979)

 

(1) 5대 10국

 

당(唐)나라가 "개원의 치"라고 일컫는 성당시대를 지나, 9세기 말에서 시작된 황소의 난을 계기로 국력의 쇠약을 가져와 절도사 주전충에게 멸망하였다(907). 당이 지배한 200 여 년 간 이른바 동아시문화권이 형성되어 하나의 큰 획을 긋게 되었는데, 이 시기 한반도는 통일신라시대(676 ~ 935)에 해당한다.

 

국제적이고 귀족적인 당의 문화가 주변 지역에도 영향을 주어, 통일신라에서도 그 문화의 흔적은 여러 곳에서 찾을 수 있다. 그리고 거목이 자리잡았던 곳에 새 싹이 돋기 위해서는 얼마간의 시간이 필요하듯이 당이 망하고 송이 중국을 다시 통일하여 안정을 찾기 까지, 약 70년간 중국의 화북지방에는 무려 다섯 왕조가 교체되었고, 강남 일대에는 10개의 크고 작은 군벌이 난립하고 있었는데 역사에서는 이시기를 5대 10국 시대라고 부른다.

 

5대는 중국 정치의 중심인 화북(華北)지방을 지배했던 단명 왕조들로서, 양(梁:後梁)·당(唐:後唐)·진(晉:後晉)·한(漢:後漢)·주(周:後周)의 다섯 왕조를 말하는데, 후세의 사가(史家)들이 그 이전에 존재하였던 같은 이름의 왕조와 구별하기 위해서 앞에 후(後)자를 붙였다.

 

그리고 10국은 강남을 중심으로, 각 지방에서 흥망한 지방 정권을 말하는데, 오(吳)·남당(南唐:江西·安徽·福建)·오월(吳越:浙江)·민(:福建, 뒤에 南唐에 병합)·형남(荊南, 또는 南平)·초(楚:湖南)·남한(南漢:廣東·廣西)·전촉(前蜀)·후촉(後蜀:四川)·북한(北漢:山西) 등을 말한다. 이 밖에도 단기간 독립을 유지하고 있던 연(燕:河北)·기(岐:鳳州)·주행봉(周行逢:建州) 정권 등이 있었다.

 

이렇게 중국이 다시 분열하게 된 원인은, 당나라 말기에 이르러 외침과 반란이 잇따르자, 지방의 절도사(節度使)들에게 군정뿐만 아니라, 민정, 재정 등 3권을 주었고, 이것이 결과적으로 군벌화(軍閥化)되어 막강한 권한을 행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875년의 왕선지(王仙芝)·황소(黃巢)의 난에 활약한 유적(流賊)이나 이민족 용병(傭兵) 출신자들은 자립해서 절도사를 칭하여 이제는 그들간에 싸움을 한 결과 대체로 11개의 큰 세력으로 갈라져, 후량(後梁)이 당의 제위(帝位)를 탈취한 것을 계기로 해서 각각 왕호(王號) 또는 제위를 칭하게 되었다.

 

이들의 공통점은 군인들의 쿠데타로, 그것도 부하가 상사를 밀어내고 그 자리를 차지하는 하극상(下剋上)의 양상을 띤 것이다.

 

5대 최초로 등장한 후량(後梁 : 907∼923)의 태조 주온은, 황소(黃巢)의 부하로서 각광을 받다가 황소가 쇠잔해 지자 재 바르게 당조(唐朝)에 투항하여 전충(全忠)이라는 이름을 하사받고 선무절도사(宣武節度使)가 되어 대운하와 황하가 만나는 중요한 지점인 변주(開封)에 주둔하게 되었다.

 

절도사가 된 그는 별의 별 수단을 동원하여 변주의 부상(富商)들을 자기 수중에 넣고, 실력이 막강해 지자 다시 최대의 정적이었던 이극용을 물리치고, 후량을 세웠다(907). 난세(亂世)를 틈타 일어난 무식한 도적(盜賊) 떼의 두목출신인 그가 천자가 되었으나, 그 본성(本性)은 버릴 수가 없어서 패륜(悖倫)적인 여성 편력은 골육상잔(骨肉相殘)을 불러왔고 그로 인해서 이 왕조는 단명에 그치고 말았다.

 

주전충의 아들로서 이복 형제간인 주우규와 주우문은 권력 장악을 위해서 다투는 사이였는데, 여기에는 그들 부인들이 한 몫을 더해서 시아버지인 주전충과 불륜(不倫)의 관계를 이루었고, 시아버지를 두고 총애를 다투었다고 한다. 그래서 결국은 주전충도 그의 아들 우규에게 독살되었고, 우규 역시 셋째 아들인 주우징에게 피살되었다.

 

그러나 이 후량은 후당(923∼936)에게 망했는데, 이극용(李克用)의 아들 이존욱(李存勖 / 923∼926)은 후량(後梁 / 907∼923)의 뒤를 이어 국호(國號)를 당(唐)이라 칭하고 뤄양(洛陽)에 도읍하였다. 그러나 이 후당 역시 말제(末帝)에 이르러 거란(契丹)과 결탁한 부장(部將)인 하동(河東) 절도사(節度使) 석경당(892∼942)에게 4대 13년 만에 망하고 석경당은 후진(後晋)을 세워 고조(高祖)가 되었다.

 

후진(後晉 / 936∼946)의 고조가 된 석경당(石敬塘)은 돌궐 사타부(突厥沙陀部) 출신으로, 후당(後唐)을 섬겨 하동절도사(河東節度使)가 되었는데, 화북의 요지인 연운(燕雲) 16주(州)를 할양하는 조건으로 거란(契丹)의 원조를 받아 936년 후당을 멸망시키고 건국하여 변경(변京 / 河南省 開封)에 도읍하여 후진을 세웠다.

 

석경당(고조)시대에는 거란에 신례(臣禮)를 지켰으나, 제2대 출제(出帝) 때에는 국수파(國粹派) 무장(武將)이 대두하여 거란에 등을 돌리자, 이에 거란의 태종이 국력을 기울여 세 차례나 후진을 침략하여, 드디어 변경을 함락하고, 출제가 거란에 붙잡혀 감으로서 2대 10년 만에 멸망하였다(946)

 

이 때 거란군은, 수도에서 낙양에 이르는 수 백리 사이에 있는 촌락민의 재산을 약탈하고, 인명을 살상하였는데, 그 참상이 너무나 기가 막혀 후일 이것을 타초곡(打草穀)이라고 불렀다. 타초곡이란 논에 있는 벼를 낫으로 베듯이, 이 지역 촌락민을 하나도 남기지 않고 살인과 방화로 쓰려버렸다는 것인데 5대 사회 전체가 이런 풍조였다.

 

후진에 비참하게 망하자 그 뒤를 이은 것이 후한(後漢 / 947∼950)으로서, 돌궐(突厥)의 사타족(沙陀族) 출신으로 후진(後晉)의 하동절도사(河東節度使)였던 유지원(劉知遠)이 후진이 거란(契丹)에게 망하자 이 틈을 타서 대량(大梁 / 開封)을 도읍으로 후한(後漢)을 세웠다.

 

유지원의 뒤를 이은 은제(隱帝)는 건국공신인 추밀사(樞密使) 곽위(郭威)와 충돌, 난병들에게 피살되어 2대 4년 만에 망하였다. 그 뒤를 이어 곽위가 후주(後周)를 세웠다.

 

후주(後周 / 951∼960)의 태조 곽위(郭威)는 후한(後漢)의 추밀사(樞密使)였으나, 은제(隱帝)가 그의 세력이 강대함을 두려워하여 제거하려 하자 대량(大梁 / 開封)에서 군사를 일으켜 후한을 멸하고 951년 제위에 올라 국호를 주(周)라고 하였다. 제2대 양자(養子) 세종(世宗:柴榮)은 5대의 난세를 당하여, 담력과 지략으로 역경을 극복하고 후주로 하여금 부국강병을 이룩하게 함으로써, 이 시대의 유일한 명군으로 손 꼽히고 있다.

 

그는 군대를 정병(精兵)화하고 궁성을 지키는 금군(禁軍)을 개편하여, 반란의 소지를 없애고, 군비강화에 소요되는 자금을 조달코자 당시 국내에서 무제한 사용을 공인한 정화(正貨)를 주조하였다.

 

정화(正貨)란 명목가치과 실질가치가 같은 본위화폐의 동전으로서, 이의 원료인 동(銅)의 유출을 엄금하고, 국내에 있는 동을 징발하여 주전(鑄錢)원료로 쓰도록 하는 한편, 불교사원에 있는 동제 불상과 불구를 전부 공출하게 하여 이를 녹여서 동전을 만들었다.

 

당연히 민중들의 비난이 빗발쳤고, 불교계에서도 조직적으로 반항했다. 세종은 오히려 이것이야 말로 부처님의 자비라고 하면서 태연자약 했다고 한다. 이렇게 해서 많은 불교 사찰을 정리하였는데, 이를 두고 불교도들은 중국사상 최후의 법난(法難)이라고 비난하였다.

 

이른바 "3무(武) 1종(宗)의 법난"이라고 불교도 들이 말하는 그 1종이 후주의 세종을 가르키며, 북위의 태무제, 북주의 무제, 당의 무종을 3무(武)라 하여 오늘날까지 비난하고 있다.

 

그러나 명군으로 불린 세종이 죽고 그의 어린 아들 공제(恭帝)가 일곱 살에 즉위하였으나. 거란의 침입이 빈번하는 등 어려운 이 시기를 이겨내기에는 너무나 어렸기 때문에 장군(將軍)들이 근위군 최고사령관인 전전도점검(殿前都點檢) 및 귀덕절도사 조광윤(趙匡胤 / 宋太祖)을 옹립하고, 공제로부터 선양을 받아 즉위케 하였는데 이것을 진교의 무혈혁명이라고 한다.

 

이로써 후주는 3대 9년 만에 멸망하였고 조광윤은 개봉에 도읍을 정하고 송 왕조를 열었다(960). 같은 시기 우리들의 조상이 살고 있었던 한반도에서는 당의 절대적인 힘에 의해서 삼국통일을 이룩하였던 신라가 당의 쇠망과 함께 힘없이 무너지고 후삼국의 혼란기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