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세계사/중국 이야기

수(隋)·당(唐)의 통일제국과 동아시아 세계의 성립

구름위 2013. 1. 22. 17:09

가. 고대 동아시아 국가

 

 중국, 한국, 일본을 동아시아 문화권이라 한다. 이 지역이 세계화의 길목에서 문화적으로 혹은 정치적으로 유사성이 많다는 것이다.

 

고대에 이 지역은 중국을 중심으로 활발한 교류와 협력, 혹은 반목과 투쟁을 통하여 문화적으로 전수하고 수정하여 나름대로의 블록을 형성하게 되는데 그 요체는 한자, 유학과 불교, 전제군주의 정치제도 하에서의 율령체제, 농업중심의 경제생활에서 공통점을 찾을 수 있다. 따라서 지역에서의 역사에서도 특이한 점이 나타나는데 위선 용어에서 연호, 성명, 책봉, 조공, 호족, 기미 등이 그런 것들이다.

 

연호(年號)란 중국에서 비롯되어 한자(漢字)를 사용하는 아시아의 군주국가에서 쓰던 기년법(紀年法)으로서, 어디(Where)라고 하는 공간 위의 모든 현상 물에 당연히 이름이 붙어 있어서 상호간의 구분을 가능케 하듯이, 언제(When)라는 눈에 보이지도 저장되지도 않는 시간도 특정한 사실을 기준으로 해(年)를 정해서 이름을 붙인 것이 연호라는 것이다.

 

즉 어떤 민족이나 국가가 건국한 해를 기준으로 하면 건국(建國) 기년(紀年)이 되는데 우리의 단기(檀紀) 4333년 하는 것은 올해가 단군이 나라를 세운해로부터 4333년 째가 된다는 것이다. 중국에서는 본래 건국기년(建國紀年)으로 일관하여 그 왕조의 연도를 기록하지 않고 군주의 재위에 따라서 해를 세었는데, 처음에는 특별한 명칭의 연호는 없이, 군주가 죽고 새로운 군주가 상속하면 새 군주가 즉위한 이듬해를 그 원년(元年)으로 하여 원년, 2년, 3년 하는 식으로 기록하였다.

 

개국 군주의 건원이 최초의 연호가 되는 것이다. 그러다가 秦 漢대에 와서 명칭이 붙게 되는데 왕망은 신을 세우고 연호를 시건국(始建國)이라 했고, 왕망의 신을 멸하고 후 한을 세운 유수는 뤄양에 도읍하고 연호를 광무(光武)라고 한 것 등이 이런 것이다. 역대의 황제들은 연호를 사용하였고, 이름이 마음에 들지 않거나 특별한 일이  있으면 바꾸기도(改元)하였다. 그러다가 명, 청 시대에 와서 1世 1元의 원칙이 정해져, 홍무제, 영락제, 건륭제라고 부르고 홍무 원년, 2년, 3년, 이런 식으로 사용하였다.

 

지방의 제후들도 처음에는 각자의 재위(在位)에 따라 연도를 기록하였으나, 중앙집권화가 이룩된 漢대 이후부터 황제만이 연호를 사용하고, 제후에 해당하는 왕은 연호를 사용할 수 없었다. 그리고 중국에 신속(臣屬)한 외국의 수장들도 중국의 연호를 사용하여야만 되었다. 따라서 독자적으로 연호를 사용하느냐 못하느냐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것이다.

 

“정삭(正朔)을 받는다”고하여 해마다 중국의 황제로부터 연호가 적힌 달력을 하사받아 사용한다는 것은 중국 천자의 제후임을 인정하는 것이 된다. 이것이 책봉(冊封)이라는 것이다. 국사에서 독자적 연호를 사용한 것은 고구려 광개토대왕이 즉위한 391년부터 사용한 영락(永樂)이 문헌상 최초이고, 신라에서 진흥왕·진평왕·선덕여왕·진덕여왕 때까지는 신라의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였다. 그러다가 650년부터는 당나라의 연호 영휘(永徽)의 사용을 시작으로 당의 연호를 사용하였다.

 

이것은 신라가 이때부터 당나라의 제후국임을 인정했다는 것이다. 뒤이어 중국에서는 908년 당이 망하고 5대의 혼란기가 시작되고 동시에 외교적으로 당에 의존했던 통일신라는 쇠약해졌다. 이런 국제적인 변화에 따라 태봉의 왕 궁예는 4번이나 연호를 바꾸었고, 고려를 건국한 태조 왕건도 천수(天授)라는 연호를 사용하였다. 속국이 아니라 독립된 주권국가로서 행세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후 고려는 거란과 여진의 침입을 받고 독자적인 연호는 사용하지 못하였으며, 특히 여진족의 금나라를 천자의 나라로 받들게 되자 묘청 등은 이를 참을 수 없다 하여 황제라고 칭하고(稱帝) 연호를 사용(建元)할 것을 주장하다가 관철되지 못하자, 평양에 대위국을 세우고, 천개(天開)라는 연호를 사용하였다가 관군에 의해서 진압된 것을 묘청의 난이라고 한다.

 

이처럼 연호를 독자적으로 사용하면 황제의 나라와 신속관계가 아니고, 대등한 관계이기 때문에 朝貢이나 사절을 보내지 않아도 되지만, 황제(天子)의 연호를 사용하면 제후국으로서 해야 할 의무, 즉 조공을 보내고 사절을 파견하여 경조사에 임해야 하고, 새로이 왕이 즉위하거나 왕비를 세우면 반드시 황제에게 알려서 승인을 받아야 하는데, 절차만 복잡할 뿐 승인을 해주는 것이 통상적인 예다.

 

이런 것을 고명책인(誥命冊印)이라 하는데, 왕이나 왕비가 된 것을 승인해 달라는 요청에 대해서 이를 승인한다는 문서와 함께 금인(金印)을 내리는 것으로서, 고명이란 임명 사령장이고, 책인은 그 증표인 인장(圖章)을 말한다. 이런 중국의 정책을 기미(羈 미)라고도 한다.

 

羈는 말의 재갈을 의미하고 미는 소의 고삐를 의미하는 것으로 요즘 말로하면 내치(內治)는 자치(自治)에 맡기고 외교나 국방 등의 중요한 일은 황제가 맡는다는 것이다. 천자가 제후국에 대해서 가지는 이러한 권리를 종주권(宗主權)이라고 한다.

 

조공 품으로서는 진귀한 토산품을 비롯하여 소와 말 등의 가축과, 심할 때는 사람을 요구하는 경우도 있었다. 조공의 반대급부(反對給付)로는 침략을 하지 않는다는 것과, 침략을 당했을 때 구원해 주고, 약간의 물품을  회사(回賜)라는 이름으로 보내기도 하는데 이를 두고 하기 좋은 말로 공무역이 행해졌다고 이야기 하기도 한다.

 

사절은 동지사(한해의 마무리), 정조사(새해의 축하), 주청사(제후국으로서 부탁), 진하사(감사의 표시), 성절사(황제의 생일축하), 천추사(황후의 생일축하) 등의 이름으로 정기적으로, 혹은 특별한 일이 생겼을 때 보내게 되는데, 이를 때 마다 조공 품과 함께 황제에게 바치는 글(表文)을 올려야 한다.

 

이 글을 작성할 때 가장 주의해야 할 일은 그 왕조의 어떤 황제의 이름자가 들어가서는 안된다. 이는 중국인들이 이름을 중시하여 신분이 낮은 사람이 신분이 높은 사람의 이름을 부를 수 없는 것이 그들의 제도고 법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절대지위에 있는 황제의 이름은 누구도 부를 수도 쓸 수도 없고, 다만 죽은 사람인 경우, 꼭 써 야할 경우에는 반드시 휘(諱)자를 앞에 붙여야 한다(避諱).

 

이것도 천자의 이름을 쓸때만 허용되고 일반 문서를 작성할 때는 절대로 써서는 안되고, 비슷한 글자로 대신 써야 한다. 예를 들면 일연의 삼국유사에 단군이 아사달에 도읍을 정하고 국호를 단군이라 했는데 요와 같은 시기다(..立都阿斯達 開國號朝鮮 與高同時)에서 "여요동시"로 써야 될것을 堯자 대신에 高자를 쓴 것은 정종의 이름이 요이기 때문에 이를 피한 것이다.

 

그래서 대신부르고 쓸 수 있는 이름으로 연호를 만들었다고 보여지며, 일반인들도 그 신분에 따라 이제도가 적용되는데 죽은 사람의 이름 앞에는 諱자를 붙인다. 살아 있는 사람에게는 따로 자(字), 아호(雅號)등이 있어서 그 용처에 따라 각기 사용하였고, 이러한 제도가 우리나라에도 도입되어 중국보다 더 철저하게 지켜진 것 같다. 그래서 임금의 이름은 외자가 보통이고 그것도 잘 쓰지 않는 글자를 선택하는 것이 통례로 되었다. 일본은 지금도 세계 공통연호인 AD(크리스트의 해)와 함께 헤이세이(平城?)라는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고 있는데 한 번 생각해 볼 문제다.

 

연호, 피휘와 함께 우리들을 또 복잡하게 만드는 것이 시호(諡號)와 묘호(廟號)등의 다른 이다. 시호(諡號)는 황제나 왕을 비롯해서, 벼슬한 사람, 즉 관료가 죽은 뒤에 그 행적에 따라 황제나 왕으로부터 받은 이름을 말하는데, 시기는 확실하지 않으나, 일반적으로 시법(諡法:시호를 의논하여 정하는 방법)이 이루어진 것은 주 나라 주공(周公) 때부터라고 보고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를 살펴보면 신라 법흥왕 1년(514)에 죽은 부왕에게 지증(智證)의 증시를 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조선시대에는 국왕이나 왕비가 죽은 경우에는 시호도감(諡號都監)을 설치하고, 시호를 지어 올리는 것을 신중하게 진행하여 시호가 정해지면, 종묘(宗廟)에 올렸기 때문에 묘호(廟號)라고도 한다.

 

세종이니, 선조니 하는 것이 여기에 해당하는 것이다. 세종의 예를 들어보면 시호가 世宗 莊憲 英文睿武 仁聖明孝大王으로서 세종 뒤에도 긴 글자가 나열되고, 휘는 李도 자를 元正이라고 불렀다. 일반 관리의 경우 봉상시(奉上寺)라는 관청에서 맡아 처리했다.

 

시호에 사용하는 글자 수는 194자로 한정되었다가, 후에 새로 107자를 첨가하여 모두 301자를 쓰게 되었다. 실제로 자주 사용된 글자는 문(文)·정(貞)·공(恭)·양(襄)·정(靖)·양(良)·효(孝)·충(忠)·장(莊)·안(安)·경(景)·장(章)·익(翼)·무(武)·경(敬)·화(和)·순(純)·영(英) 등 120자 정도였고, 착한 행장이 없고 악하고 사나운 일만 있던 사람에게는 양(煬)·황(荒)·혹(惑)·유(幽)·등의 글자를 썼다.(한자 입력이 안된 글자는 어떻게 할 도리가 없어서 한글 그대로 썼다)

 

중국은 인도의 카스트와 같은 절대불변의 신분제도는 없었으나, 유교적인 혹은 중국적인 신분제도는 매우 복잡하고 다양했다. 우선 지배자와 피지배자의 구분이 명확하고 지배계급내에서 다시 수많은 분화가 이루어 지는데 이들 지배계급을 통칭해서 당나라 때 까지는 호족이라 불렀고, 송 대부터는 사대부라 하였으며, 명 청 시대에는 향신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 우리나라에서 신라 말과 고려 때의 호족, 조선시대의 양반과 같은 맥락에서 이해 하면 크게 틀리지 않을 것이다.

 

나. 수(隋 : 581∼618)의 성립과 멸망

 

(1) 유목민이 세운 화북왕조와 도교

 

후한의 멸망 후 370 여 년 간의 분열시기였던 위진 남북조시대를 닫고 다시 중국을 하나의 통치 지배구조로 바꾼 것은 수(隋)의 문제 양견(楊堅:文帝)으로서 명목상으로는 581년 북주(北周)의 정제(靜帝)로부터 선양받아 나라를 개창하고(581), 건업에 도읍하고 있던 남조(南朝)의 마지막 왕조 진(陳)을 멸망시켜 중국의 통일왕조를 이룩하였다.

 

전국시대를 통일하였던 진(秦)이 3대 15년 만에 문을 닫은 것과 같이 혼란 기를 수습한 수나라 역시 문제·양제(煬帝:廣)·공제(恭帝:侑)의 3대 38년이라는 단명 왕조였으며, 천하통일을 이룬 후로 따지면 30년을 넘기지 못했다.

 

그러나 남북으로 갈라져 있던 중국을 오래만에 하나의 판도에 넣어 진(秦)·한(漢)의 고대 통일국가를 재현하였고, 뒤를 이은 당(唐)이 중국의 판도를 더욱 넓혀 대 통일을 이룩하는 데 기반이 되었다는 점에서 존립의의가 크다고 할수 있다.

 

선비(鮮卑)족의 탁발(拓拔)씨가 세운 후위(북위:北魏:386∼534)는 8왕의 난 때 서진(西晉)으로부터 관작을 받고 대왕(代王)으로 봉해졌다가(315), 그 후 전진(前秦)의 부견(符堅)과의 싸움에 패하여 정권이 와해되었지만, 부견이 비수( 水)전투(283)에서 패한 기회를 이용하여 탁발 규(拓跋珪: 道武帝)는 나라를 재건하고 스스로 황제라 칭하고 국호를 위(魏)라고 하였다(386).

 

이어 내몽골 여러 부족을 평정하고 후연(後燕)을 격파, 허베이(河北) 평야에 진출하여 국도를 평성(平城)에 정하고(398). 몽골에서 데려온 여러 유목 부족을 해산시켜 부민(部民)을 군현(郡縣)의 호적에 편입하게 하였다. 그리고 훈공이 있는 부족 중의 유력자에게는 관작을 수여하고 한족(漢族)의 명문(名門)과 똑같이 고급관리로 채용하여 귀족제의 기초를 이룩하였다.

 

그 후 남조(南朝)의 송(宋)을 공략하여 허난(河南)지방의 땅을 빼앗았고, 이어서 하(夏)·북연(北燕)·북량(北凉)을 멸망시킴으로써 5호 16국(五胡十六國)시대를 종식시켜 마침내 양쯔강 이북 지역의 통일을 완성하였다(439)

 

이 시기에 황제(黃帝)와 노자(老子)를 교조로 삼는 중국의 고유종교인 도교(道敎)가 성립하는데 종교로서의 도교를 성립시킨 것은 구겸지(寇謙之)라고 한다. 그는 숭산의 동굴에서 신선의 도를 닦고 천신(天神)의 계시(啓示)를 깨달은 후, 새로이 즉위한 후위 황제를 도와 태평진군(太平眞君)으로 하는 것이 자기의 사명이라 생각하고, 따둥(大同)으로 나와 최호라는 한인(漢人)관료의 주선으로 태무제를 알현하고 그의 국사(國師)가 되어 천사(天師)도로 개칭 혁신하였다.

 

농경에 바탕을 둔 중국인들에게는 잦은 외적의 침입과 전란, 장엄하기 까지 한 황하의 범람, 한발과 재해(災害) 등에 항상 시달려야 하기 때문에 인간의 길흉을 관장하는 절대자인 천제(天帝)에 귀의하여, 현세기복(祈福)을 염원할 뿐 사후의 세계에는 큰 관심이 없었고, 늙지 않고 오래사는 방법을 얻기 위해 웃지 못할 일들도 수없이 벌어졌다.

 

불로장생(不老長生)을 근본으로 하는 도교는 중국의 고유종교로서, 노·장을 중심으로 한 도가(道家)사상과는 구별된다. 그러나 이것이 우리나라에 와서는 두 가지가 혼동되고, 우리의 토착신앙과 밀착되어 어디까지가 노장사상이고 도교이며, 민간신앙인지 구분이 매우 모호하다.

 

현재 우리나라에서 종교로서의 도교의 교단은 없다. 그러면서도 부적(符籍)이나 비방(秘方)의 영험을 믿고 이를 따르거나, 옥황(玉皇)상제를 받드는 천제(天帝) 혹은 상제(上帝)로 모시는 교단은 무수히 많다. 다만 현세적인 삶의 방법에서 도가와 도교는 유사한 점들이 많고, 우리의 신앙 원형(原形)에도 이런 것들이 포함되었다는 것이다.

 

도교는 후한(後漢)시대에 장도릉(張道陵)이 세웠다고 전하며 그의 도를 오두미(五斗米)도라고 했는데, 부적(符籍)과 주술(呪術)로서 병을 치료해 주고 그 대가로 다섯 말(五斗)의 쌀을 받으면, 그 쌀로 다른 병자를 구휼(救恤)해서 병을 고쳐주고 쌀 다섯 말을 받고 이렇게 다단계식으로 되풀이하면서 그 문하생을 늘렸고, 삼국시대의 혼란 기에 교세가 더욱 늘어나 3세기 진(晉)나라에 와서는 교단이 조직되었다.

 

이들이 반란의 선두에 자주 보였기 때문에 미적(米賊)으로 불렸다. 이렇게 초기의 도교는 종교라기 보다도 일종의 교비(敎匪)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다가 일반 민중에서 상류 지식층 사이에 널리 전파되자 체계적인 교리와 합리적인 학설·교양의 뒷받침이 필요하게 되었다.

 

이와 같은 필요에 따라 3∼4세기경 학술적인 기초가 마련되어 하나의 종교로서 이론체계를 갖추기 시작하였고, 5세기에 이르러 구겸지(寇謙之)가 불교의 자극을 받아 그 의례(儀禮)의 측면을 대폭 채택하고 도교를 천사도(天師道)로 개칭함으로써 종교적인 교리와 조직이 비로소 정비되었다.

 

도교에서 받드는 신들은 매우 잡다(雜多)할 뿐 아니라 시대에 따라서 그것은 새로이 생기기도 하고 없어지기도 하여 일관성이 없으나, 일반적으로 가장 널리 제사 지내는 신에는 옥황상제(玉皇上帝)가 있고, 교조인 노자, 곧 노군(老君)과 그 밖에도 북극성(北極星)인 현천상제(玄天上帝)를 비롯하여, 문창제군(文昌帝君)·후토(后土)·서낭신(城隍神)·조군(五祠 중의 한 神)·화합신(和合神)·삼관(三官)·재신(財神)·개격신(開格神)·동악대제(東嶽大帝:泰山神) 등 천상과 지상의 수많은 신들을 제사 지냈다.

 

의식에 사용하는 경전을 통틀어서 도장(道藏)이라고 하고, 그 내용을 분류하면 신부(神符 : 부적)·옥결(玉訣 : 秘試)·영도(靈圖 : 鬼神像)·보록(譜錄 : 敎法의 연혁)·계율(戒律 : 修道의 율법)·위의(威儀 : 齋戒 등의 의식)·방법(方法 : 귀신을 쫓는 術策)·중술(衆術·鍊丹類)·기전(紀傳 : 老子 등의 전기)·찬송(讚頌 : 神典의 偈)·표주(表奏 : 귀신에게 奏上하는 祈願文) 등으로 이루어졌다.

 

도교가 중국의 민족종교로 자리잡는데 기여한 일등공신을 꼽는다면 명경(明鏡)이나 호부(護符)를 차고 다니면 요괴(妖怪)를 피할 수 있다는 방술과, 장생불사(長生不死)에 이를 수 있다는 태식법(胎息法)과 금단법, 방중술(房中術)을 꼽을 수 있다.

 

옥(玉)이나 금속으로된 팔찌, 귀걸이, 목걸이나(명경), 종이에 붉은 물감으로 글씨도 그림도 아닌 것, 또는 형형색색으로 된 실을 엮거나 감아서 만든 것(호부)을, 몸에 지니거나 필요한 곳에 부착함으로서 질병과 재앙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는 방술의 믿음은 아직도 중국, 한국, 일본사람들에게 그 흔적을 쉽게 찾을 수 있고, 불사(不死)는 아니더라도 건강한 장수를 바라는 마음에서 충화기(沖和氣)를 받아들여 호흡으로 단전(丹田)을 조절해서 장생하는 내단(內丹)수련인 태식법 역시 복잡한 삶을 살아야 하는 현세 인에게도 공감을 얻어 여러 형태의 수련원이 있다.

 

그런데 참으로 어이 없는 것은 외단(外丹)이라는 금단(金丹)법과 회춘(回春)의 방도인 방중술로서, 불로장생(不老長生)을 염원했던 진시황제도 방술을 믿어 엉뚱하게도 갱유(坑儒)의 화(禍)를 일으켰다는 것은 전에도 이야기한 바 있었지만 그 후에도 중국 역대 제왕들이나 귀족들은 이 두 가지에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 이를 실천하였다가 낭패를 당한 경우가 부지기수라고 한다.

 

금단을 선단(仙丹)이라고도 하는데 주재료가 황화수은과 황금으로서, 문제는 황화수은인 단사를 아홉 번 질(質)을 바꾸어서 얻는다고 하는데 단(丹)은 태워서 오래가고, 금(金)은 뜨거운 불 속이나 더러운 흙 속에서도 없어지거나 변화되지 않음으로 이 두 가지를 조제하여 금단을 만들어 복용하면 피의 원소를 변화시켜 몸이 쇠퇴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선약(?)을 도술(道術)로서 확립한 것이 진(晉)대의 갈홍(葛洪)이라는 사람으로 그의 저서 포박자(抱朴子)에 제조방법, 종류, 효능 등에 관하여 상세히 기록하였다. 이것이 금단도라는 이름으로 당(唐)대에 이르러서는 이를 믿은 사람들이 많아졌고, 이 선약을 먹었다가 수은에 중독되어 목숨을 잃은 자가 부지기수였으며, 그 가운데는 황제도 6명이나 포함되었다.

 

또 하나는 권력과 부와 명예를 지닌 남성들의 간절한 소망(?)은 미녀를 품에 안는 것인데(당시의 사정을 이야기 한 것입니다) 정력(精力)이 영 말을 듣지 않으니 음기(陰氣)를 취해서 양기(養氣)를 충만하게 하는 방법을 가르친 것을 방중술(房中術) 이라고 한다.

 

(2) 후위(북위)의 분열

 

효문제(孝文帝:471-499)가 즉위하자 국도를 뤄양(洛陽)으로 옮기고(494), 본격적으로 중국화를 추진하여 그들의 복식과 언어(胡服 胡語)를 금하고 통상 2자 이상으로 구성된 그들의 성(胡姓)을 한인(漢人)처럼 단성(單姓)으로 고치게 하고 황족인 탁발씨도 원씨(元氏)로 성(姓)을 고쳤다. 북방의 유목민들이 스스로 중국의 농경민이 되겠다는 것이다.

 

말과 풍속이 없어지면 민족도 사라진다. 이후 세월이 지나 선비족은 중국에 동화되고 말았다. 그러나 효문제 자신은 영명한 군주로서, 태후의 섭정기간을 빼고 친정(親政)시기는 10 여 년에 불과하나 그 짧은 시기에 많은 업적을 남겼다. 즉 호족의 세력을 누르고 농민을 왕실 지배하에 두기 위해서 봉록제(俸祿制)·삼장제(三長制)·균전법(均田法) 등을 창시하여 북위의 국력과 문화를 크게 발전시켰고, 특히 균전제는 수를 지나 당대에 와서 제도화되면서 중국뿐만 아니라 주변국가에도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북방민족 고유의 소박상무(素朴尙武)의 기풍이 쇠퇴하고, 사치스럽고 문약(文弱)한 경향이 일어나, 결국 서위(西魏)와 동위(東魏)로 분열되고, 동위는 550년 고환의 아들 양(洋)에게 빼앗겨 북제(北齊)가 되었으며, 서위는 556년 우문태의 아들 우문각(宇文覺)에게 빼앗겨 북주(北周)가 되었다.

 

북주(北周 : 557∼581)는 서위의 공제(恭帝)를 제위에서 밀어내고 고대의 주(周)를 본받았다 해서 국호를 북주라 하였는데, 북위(北魏)의 효문제(孝文帝) 이래로 한화(漢化)주의·문벌(文閥)주의를 배척하고 질박강건한 유목민의 전통을 부활시켜 그들만으로 8주국(柱國) 12장군(將軍)이라는 신흥 지배 귀족을 만들었다.

 

제3대 무제(武帝) 때는 북제(北齊)를 평정하여 화북(華北) 통일을 실현하고, 불교를 폐하여 왕권을 강화하는 등 국력을 길렀으나, 무제의 아들 선제(宣帝)는 도락(道樂)에 빠져 재위 1년 만에 아들 정제에게 양위하고 상황(上皇)으로 물어 앉게 되자 외척 양견은 전권을 전단하여, 수상인 상국(相國)이 되었다가 다시 수왕(隋王)이 되었다.

 

이에 북주의 일부 무인들 사이에는 반 양견운동도 일어났으나 이를 진압하고, 상황으로 있던 선제가 죽자 아홉 살의 어린 정제로부터 선양의 형식으로 제위를 빼앗아 수(隋)를 세우고, 연호를 개황(開皇)으로 고쳤다(581)

 

이 때 그의 나이 41세, 그 본거가 관중(關中)이 였기 때문에 수·당의 직접적인 모체(母體)가 서위(西魏) 및 북주였다는 점에서 이들 왕조의 의의는 크다고 할 수 있다. 건국 이듬해(582) 북주의 도읍지인 장안한성(長安漢城)의 남동쪽 용수원에 동서 18리, 남북 15리의 계획적인 대흥성을 건립하였다.

 

양견이 북주의 외척이라는 것은  양견의 처가 북주에서 왕실 다음 가는 주국(柱國)의 반열에 있던 선비족 독고 신(獨孤信)의 딸이었고, 그의 처형(妻兄)은 북주 명제(明帝)의 황후였으며, 양견 자신의 딸 여화는 북주 선제(宣帝)의 황후임과 동시에 정제(靜帝)의 어머니였다.

 

양견의 아버지 양충은 북주 무제의 아버지 우문태를 보좌하여 그 공으로 보륙여(普六茹)라는 성을 받았는데 성으로 보아서는 우문태와 같은 선비 족이라고 한다. 양견이 황제가 되고 나서는 한(漢)의 재상 양진의 후손이라고 칭하였으나, 양충이 북주의 12대장군 출신으로서 수국공이되었고, 그의 일족이 선비족의 명문과 혼인하여 북주의 호족이 된 것을 보면 그도 선비족 출신이라 설이 설득력을 가지고 있다.

 

(2) 수의 문제(文帝) 고조(高祖) 양견(楊堅)

 

양견을 수나라의 고조(高祖)라고도 하는데, ‘隋’란, 원래 양견이 수왕(隨王)이 되었던 데서 연유한 것으로서 隨자에 책받침 변(착)이 있으면 뛴다는 뜻으로 왕조가 안정되지 않는다 해서 책받침을 떼고 새로운 글자를 만들어 隋로 하였다.

 

문제는 587년 그의 보호국으로 있던 후베이성의 강릉(江陵)에 도읍을 정하고, 남조(南朝) 양(梁)의 황실 자손이 다스리던 후량(後梁)을 멸망시켰으며, 그의 차남인 진왕(晉王) 광(廣:煬帝)을 행군원수(行軍元帥)로 삼아 남조의 진(陳)을 멸망시켜 통합함으로써, 삼국시대에서 다시 동진(東晉)의 남천(南遷)으로 이어지는 370 여 년에 걸쳤던 분열의 종지부를 찍고 중국을 재통일 하였다(589).

 

이 때가 한반도에서는 삼국의 정립, 항쟁의 시기로 고구려 평원왕 31년, 신라 진평왕 11년, 백제 위덕왕 36년에 해당한다. 문제(文帝)는 내정에 힘을 쏟아 재정적으로는 긴축정책(緊縮政策)을 취하였으며, 오랫동안 남북으로 갈라져 있던 문물의 통일을 추진하였고, 대외적으로는 장성(長城)을 축조하여 터키계(系) 돌궐(突厥)의 침입에 대비하였으며, 598년(고구려 영양왕 9)에는 요서(遼西)를 침범한 고구려를 정벌하려 하였으나 실패하였고, 황실에서는 문제의 장남 용(勇)이 황태자가 되었으나, 남조의 진(陳)을 토벌하는 데 큰 공을 세운, 둘째 아들 광이 형인 용을 대신해 즉위하여 양제(煬帝)가 되었는데, 문제는 아들 양제에 의하여 살해되었다.

 

문제(文帝)는 비록 외손자로부터 제위를 빼앗기는 했으나, 그의 치세는 창업의 군주로서 훌륭한 업적도 많이 남겼다. 먼저 그 자신이 북주의 12 장령(將領) 출신으로 선양(禪讓)의 형식은 취하였으나 북주의 부흥을 두려워한 나머지 황족인 우문씨를 닥치는대로 살해하고, 그 비난을 막고, 강력한 왕권을 뒤 받침할 수 있는 기반을 만들기 위해 군제를 개혁하여 이른바 부병(府兵)제를 채택하였다.

 

그리고 유능한 관리를 채용하여 자기의 수족을 만들어야 하는 필요에서 9품중정법(관인법)을 폐지하고 문벌 보다는 개인의 재능과 실력을 중시한 선거(選擧)제를 채택하여, 시험을 치러 합격자에게 수재(秀才), 명경(明經), 진사(進士) 등의 명칭을 허용하고 고급관리로 임명될 자격을 부여하였다. 이 제도는 당을 거쳐 송대에 이르러 과거(科擧)제도로서 자리를 굳히고, 우리나라에도 많은 영향을 주었다.

 

그러나 이러한 관리임용법은 일반민중과는 거리가 멀었고, 민중과 황제 사이에 있는 권력층들 이를테면, 호족이라고 불리던 귀족층의 지배에 있던 농민을 황제의 직속으로 끌여들이고 세수(稅收)를 늘리기 위해서 북위에서 시작된 균전법(均田法)을 확대하여 관전을 농민에게 할당(割當)하였다.

 

염세와 주세를 폐지하고 화폐제도를 통일하였으며, 각처에 의창(義倉)을 설립하여 재앙과 전쟁으로부터 농민들의 몰락을 방지한 것도 이 때 처음 시작한 것이다.북주의 법률을 참작하여 개황 원년에 개황률을, 다음해(582)에 개황령을 반포하여 전국에 획일적으로 준수토록 하였다.

(3) 수의 양제(煬帝)

 

문제(文帝)는 독고황후와의 사이에 북주의 선제에게 출가한 딸 외에 다섯 아들을 두었다. 장자 용(勇)을 황태자로 책봉하고 차남 광(廣)을 진(秦)왕으로, 그 아래 세 아들도 왕으로 봉하였다. 그런데 진왕 양광은 두뇌가 명석하고, 학문과 재능에도 뛰어 났으며, 풍채 또한 당당하였다.

 

태자 용이 놀기와 여색을 좋아하여 모후로부터 미움을 사고 있는 것을 안 광은 더욱 근신하면서 모후의 신임을 얻고자 노력하였다. 그리고 측근을 동원하여 황태자가 모반을 꾀하고 있다고 거짓 밀고케 하여, 태자 용을 서인으로 강등시켜 쫓겨나게 하고 그 자리에 광이 차지하여 태자가 되었다.

 

형을 모함해서 밀어내고 태자가 된 광 역시 몹시 불안했다. 언제 부황의 마음이 바뀔지도 모르고, 쫓겨난 태자가 다시 부황의 신임을 회복하여 자신을 밀어내지나 않을까 하는 의구심에서 도무지 마음을 놓을 수가 없었다. 인수 4년(604) 문제가 원인 불명으로 갑자기 사망하고 태자 광이 즉위하니 이가 수의 양제 였고, 이 과정에서 형제 4명 모두가 죽거나, 서인으로 강등되었다.

 

그의 시호(諡號) 양제(煬帝)란 음학(淫虐)한 황제라는 뜻이다. 형제를 핍박하고 백성을 혹사하였으며, 사치와 낭비를 좋아했다 해서 이전까지 중국황제로서는 전무했던 이런 시호를 그에게 붙인 것이다.

 

그러나 일을 실행하는데 박력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고, 부황 못지 않게 창의력도 있었으며, 실천가로서의 열의와 힘도 아울러 가졌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대운하(大運河)의 개착은 진시황제의 만리장성과 함께 중국 역사상 가장 규모가 큰 토목공사였다. 중국의 지형은 서고동저의 형으로 강이 서쪽에서 동으로 흘러 예로부터 동서를 연결하는 수운이 발달한 반면, 남북방향으로는 회하(淮河) 수계의 위하(衛河) 등이 국지적으로 남서∼북동 또는 북서∼남동 방향의 수로로 이용되었을 뿐이다.

 

화북이 중국의 정치 중심지라면 강남은 기후가 온난하고 산물이 풍부한 경제의 중심지였는데, 특히 남북조시대 남조의 중심지가 되면서 개발이 촉진되어 생산과 인구가 비약적으로 늘어나 중국의 곡창 구실을 하고 있었다.

 

중국을 재통일한 문제(文帝)로서도 이 강남에 눈을 돌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뤄양을 제2의 국도(陪都)로 삼고 남북을 연결하는 운하 개착에 착수하여 개황4년(584)에 광통거를 만들어 위수에서 산서성의 동부에 있는 동관(潼關)까지 연결하고, 다시 동관에서 황하를 거슬러 올라가 장안까지 연결하도록 하였다.

 

문제의 뒤를 이은 양제는 다시 뤄양의 서원에서 황하로 들어간 다음 회수로 통하는 통제거(通濟渠)를 만들기 위해 즉위 다음해인 대업 원년(605)에 화남과 화북의 백성 백만 명을 동원하여 운하를 파게 하였다. 같은 해에 다시 회남의 백성 십여만 명을 동원하여 산양에서 장수성의 양쯔까지 운하를 팠다. 통제거는 너비 40보 양쪽 언덕에는 어도라 하여 황제의 행차 전용도로를 만들고 언덕을 보호하기 위하여 버들을 심었다.

 

다시 대업 4년(608)에는 하북 지방의 주민 백여만 명을 동원하여 황하에서 북방의 탁군(현 北京)까지 연결하는 영제거(永濟渠)를 파기 위해서 남자만으로는 인력이 부족해서 여자까지 동원시켰다.

 

양제가 여자까지 동원해 가면서 이렇게 영제거를 급하게 판 이유는 고구려를 원정하기 위해서라 하며, 그의 재세기간 3차례나 고구려를 침범했으나 번번히 실패하고 이로 인해서 수가 망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되었다.

그러나 운하의 개통으로 강남의 미곡이 능률적이고도 확실하게 장안과 뤼양까지 운반되었으며, 이를 통하여 남북간에 문물의 교류도 활발하게 이루어져 명실상부한 통일제국의 꿈을 실현시키게 되었다.

 

당(唐)대에 기록된 史書에는 운하의 개착 목적이 양제의 호유(豪遊)를 위한 것이라 비난했지만 중국의 역대 왕조가 이 운하를 통하여 발전하였고, 지금도 베이징[北京]에서 항저우[杭州]에 이르는 허베이[河北]·산둥[山東]·장쑤[江蘇]·저장[浙江] 등 4개 성(省)을 남북으로 연결하는 위용을 자랑한다. 이 운하의 원래의 길이는 1,782 km, 1958년 대규모의 복구·확장 공사가 이루어지는 과정에서 1,515 km로 단축되고, 베이징에서 항저우까지 2,000∼4,000 t급의 선박이 취항할 수 있어서 지금도 내륙수로의 중요한 구실을 하고 있다.

 

양제는 자기의 위용을 과시하기 위해서 진시황처럼 순행을 자주 했다고 하는데 첫 번째 순행은 통제거와 회수에서 장강에 이르는 두 운하가 개통된 605년 가을, 이 운하로 양주까지 갔다. 이 때, 그의 배는 용주(龍舟)라 하여 높이 45척의 4층으로 되었고, 길이가 2천 척에 달하였으며, 황후를 비롯하여 따르는 배가 수천척. 배를 끄는 사람이 8만명, 그 선열(船列)의 길이가 90킬로 미터에 달하였다고 하는데, 과장을 좋아하는 중국인들의 기록이라 어디까지가 진실인지는 알 수 없어도 초 호화판이었던 것만은 사실인 것 같다.

 

다시 대업 3년(607)에는 북변(北邊)을 순행하여 중화 천자의 위세를 과시하였다. 하북의 정남(丁男)을 동원하여 태행산을 뚫어 병주로 가는 치도를 만들고, 그 치도를 따라 위린에 머물면서 탁군(北京)으로 가기 위해서 먼저 돌궐의 추장 계민가한에게 통보하여 위린으로 오게 하였으며, 이들에게 연회를 배풀고 많은 비단을 하사하였다.

 

8월에 위린을 떠나 새외(塞外)로 나갔을 때 따르는 병사가 50 만, 말이 십만 필, 양제가 계민가한의 파오(包)에 이르자, 토곡혼(吐谷渾)을 비롯한 다른 서역 27개국의 왕 또는 사신이 와서 양제에게 절을 올렸다. 양제는 토곡혼 등에 군을 설치하고, 서역을 평정함에 따라 이제는 발길을 동쪽으로 돌려 고구려 원정을 기도하게 되었다.

 

이 때의 사정을 삼국사기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영양왕 18년(607)에 "수양제는 처음으로 계민의 장막에 행차하였다(初煬帝之啓民帳也) (이 때)우리의 사자가 계민의 처소에 있었는데(我使者在啓民所) 계민은 숨기지 못하여(사신을) 양제가 그를 보게 되었다(啓民不敢隱與之見帝),

 

황문시랑 배구는 양제에게 말하기를(黃門侍郞裴矩說帝曰), 고구려는 본래 기자가 봉한 땅으로 (高句麗本箕子所封之地), 한나라와 진나라가 모두 군현으로 삼았습니다(漢晉皆爲郡縣). 오늘에 와서는 신(신하의 나라)이 아니고(今乃不臣), 다른 땅이 되어 떨어졌습니다(別爲異域). 선제(문제)는 이를 정벌코자한지 오래되었고(先帝欲征之久矣), 양양(한왕:문제의 4자)이 군사를 내었으나 못나서 공을 세우지 못했습니다(但揚諒不肖師出無功),

 

페하의 시기를 당하여 어찌 이를 취하여 관대(황제의 상징)의 지경으로 취하여 쓰지 않고(當陛下之時安可不取使 冠帶之境), 만맥(오랑캐)의 향(땅)으로 삼고 따르는 것이 옳겠습니까?(遂爲蠻貊之鄕乎). 지금 그 사자(고구려사자)는 계민이 나라를 들어 (수나라에)따르는 것을 보고(今其使者親見啓民擧國從化), 두려워 하고 있으니(可因其恐懼), 이를 위협하여 입조케 해야합니다. (脅使入朝).

 

제(양제)가 이를 따라(帝從之), 우홍에게 칙(조칙:왕제의 명)을 펴 令을 내려 말하기를 (勅牛弘宣旨曰), 짐은 계민이 성심으로 나라를 받들어(朕以啓民誠心奉國), 그래서 친히 그의 장막에 이르렀다(왔다) (故親至其帳), 명년에는 반드시 (내가)탁군으로 가니(明年當往 郡), 너는(고구려사신) 돌아가서 너의 왕에게 말하여(爾還日語爾王), 마땅히 일찍 (찾아)와서 조알(入朝) 하여 의심이 없도록 하라(宜早來朝勿自疑懼). 존육지례를 계민과 같이 한다(할 것이다) (存育之禮當如啓民).

 

만약 입조치 않으면(苟或不朝), 장차 계민을 거느리고 가서 (너의)국토를 칠 것이다 (將帥啓民往巡彼土). 왕(영양왕)은 번례파궐을 두려워 했다((王懼藩禮頗闕). 제(양제)는 그(고구려)를 토벌하려 하였다.(帝將討之). 계민은 돌궐의 가한(추장)이다(啓民突厥可汗也). 여름 5월에 군사를 백제에 보내어(夏五月遣師百濟...)"

 

이것은 고구려와 수가 전쟁을 하게 된 동기와 원인을 기록한 것으로, 양제가 돌궐추장 계민의 장막에 갔을 때, 거기서 고구려의 사신이 있는 것을 보았고, 양제가 생각하기에는 고구려와 돌궐이 동맹을 하여 수에 대항하면, 통일천자의 위엄은 물론이거니와 수의 존립조차 위험하다고 판단하여 고구려가 스스로 항복해 오도록 협박하였다. 그러나 고구려가 이에 응하지 않자 드디어 대규모 원정을 단행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미 그 전에 양국간의 대립은 피할 수 없는 사실이 되어, 문제 때부터 두 나라는 충돌하고 있었다.

 

다. 수와 고구려 싸움

 

(1) 유목민 돌궐

 

이야기를 거슬러 올라가 보면, 중국을 통일한 양광(문제)에게는 아직도 풀어야 할 두 가지 숙제가 남아 있었다. 그 첫 째는 수 백년간 분열로 이어온 중국을 새로운 통일제국으로서 내치를 다지는 일이고, 둘째는 북변을 튼튼히 하여 유목민의 침입으로부터 중원을 지키는 일이다.

 

내치를 다지기 위해서 건국 초부터 잇달은 개혁을 서둘러, 화폐를 통일하고 균전제와 부병제, 선거제(과거제)를 실시하여 황제권에 도전할 수 있는 유력한 세력인 호족을 압박하여 흩어진 민심을 수습하였고, 북주의 황족이었던 우문씨 일가를 닥치는대로 살육하여 부흥의 씨앗을 송두리째 잘라 버렸다.

 

이런 것들은 그의 통치권 내에 있기 때문에 무소불위의 절대권력을 가진 황제가 의도적으로 추진한다면 일시적으로는 가능하다. 그러나 長城 밖에서 활동하는 유목민에 대해서는 그 명령이 미치지를 못하니 시시로 변화는 상황에 대처하여야 하는 어려움이 있었다.

 

중국의 史書에 등장하는 유목민을 살펴보면, 진 한 시대의 匈奴를 비롯해서, 월지, 선비, 갈, 강, 저, 동호, 숙신, 읍루, 말갈, 물길, 돌궐, 유연, 위구르, 거란, 몽골, 탕구트, 여진(만주) 등 무수히 많다. 이 가운데 월지는 스키타이계로서 아리아족으로 보고 있으며, 강과 저, 탕구트는 티베트계, 숙신, 읍루, 말갈, 물길, 여진은 퉁구스계, 흉노, 갈, 강, 선비, 유연, 거란은 몽골계, 돌궐, 위구르는 투르크계로 보고 있지만 어떤 것도 확실한 것은 없다.

 

다만 이들의 공통점은 유목이 주업이고, 부족단위로 생활하며, 일정한 거처가 없고, 흉급하고 난폭하며, 약탈도 생존의 방법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정착과 농경이 기본인 중국인 들에게는 공포의 대상이 아닐 수 없었다.

 

중국의 역대 왕조는 이들을 다스리기 위해서 항상 화전(和戰) 양면술을 써게 되는데, 회유책으로 생필품을 공급해주고, 귀화를 권유하거나, 책봉(冊封)의 형식을 취하여 동맹을 맺기도 하고, 황녀를 보내어 그들의 추장과 혼인시키고 인척을 만들기도 했다. 전한 원제 때 호한야 선우에게 시집간 왕소군의 이야기가 이런 류에 속한 것이다.

 

강경책으로는 일차적으로 장성을 쌓아 이들의 침입을 막는 한편 군대를 보내어 토벌케 했다. 그러나 주거지가 일정치 않는 유목민을 정복한다는 것 자체가 대단히 어려운 일이었다. 원정군을 보내면 멀리 도망 가고 돌아서면 다시 나타나는 악순환이 되풀이 되었던 것이다.

 

이런 유목민에게도 약점은 있었다. 추장이 죽고 나면 세력이 강한 자가 추장이 되므로 그들간에 끊임없는 투쟁과 분열을 자초했던 것이다. 그래서 세력이 약해지기를 기다렸다가 정복하기도 하는데 유목민이 정복에 의해서 멸망한 예는 거의 없고 자체 분열을 교모히 이용해서 스스로 파멸하도록 유도하는 것이 중국 역대왕조의 중요정책이었다. 이런 정책을 이이제이(以夷制夷)라 한다. 오랑캐로서 오랑캐를 제압한다(막는다)는 뜻이다.

 

수나라 때 북변에서 활약한 것이 투르크계의 돌궐이 였다. 한 때는 그 세력이 매우 강성해서 서로는 카스피해에서 동으로는 만주에 이르기 까지 강대한 세력권을 형성하고 있었다. 그러나 수 문제가 즉위 했을 때는 이들이 4국으로 분열하여 서로 다투고 있었고 이를 이간과 회유로 교묘히 이용하여 중국의 세력권으로 편입한 것이 계민가한이라는 돌궐의 추장이 였다.

 

그 계민가한과 고구려가 연맹한다면 수로서는 큰 위협이다. 여기에서 수는 고구려 원정을 단행하지 않을 수 없는 처지에 놓이게 된다.

 

(2) 살수 대첩

 

살수대첩(薩水大捷)이라고 국사교과서에 기록된 내용은, 당나라 태종 때 장손무기 위징 등에 의해서 편찬된 수서(隋의 歷史)와, 이를 전사(傳寫)한 김부식의 삼국사기에서 자료를 인용한 것인데 그 요지는 대략 다음과 같다.

 

수(隋)나라가 남북조(南北朝) 시대의 혼란을 수습하여 중국을 통일하고 있을 때, 고구려는 만주와 한반도의 북부에 거대한 왕국을 세우고 있었다.

 

수가 중국을 통일하고, 북변을 위협하던 유목민 돌궐이 유목민 특유의 자체 분열하는 기회를 잘 이용하여 힘을 잃자 고구려로서는 중국의 세력이 반드시 동쪽으로 신장(伸長)해 올 것을 예견하여 그에 대비하고 있다가, 영양왕은  말갈족(靺鞨族)을 거느리고 수나라의 요서(遼西)지방을 공격하였는데(598), 이것은 수나라의 침입에 대비하여 전략상의 요지를 선점(先占)하기 위한 작전이었던 것이다.

 

이에 당시 수나라의 문제(文帝)는 아들인 한왕 양(諒)을 행군원수로 삼아 수륙 30만을 보내어 고구려를 치게하였다. 육군은 장성을 넘어 요하까지 왔으나 식량의 보급이 여의치 못하였고, 역병이 속출하여 사기를 잃었으며, 수군은 황해를 건너 평양성에 육박하였으나 폭풍을 만나 배가 부서지고 병사들이 죽어 그 피해가 막대하였다.

 

이 때 고구려에서도 싸움만이 능사가 아니라고 판단하고 화의를 요청하자 겨우 체면을 세우고 군사를 돌렸는데 이것을 임유관의 싸움이라 한다(598) 그 후 문제가 죽고 양제가 즉위하자 앞서 이야기 한데로 돌궐과의 동맹을 두려워하여 대대적인 고구려 원정에 나섰다.

 

수양제는 612년 1월 113만 3800명의 대군을 거느리고 고구려에 침입하였는데, 그 규모에 대해서 사서(史書)에는 이렇게 적고 있다. 황하에서 탁군까지 영제거를 개통하여 보급로를 확보하고, 고구려에게 입공을 요구하였으나 거절하자, 군사를 탁군에 모아 좌우 각각 12군으로 편성하고, 매군에 상장 아장 각 1 명과, 기병을 40대로 하여 하루에 한 대씩 출발시켰는데 40일간이 걸렸고, 그 대열이 9백리에 뻗쳤다.

 

그리고 보급과 잡무를 담당할 강소의 백성이 군대수 만큼 동원되었다고 하니 원정군은 일컬어 250만이나 되었다는 것이다. 한편 내호아가 거느린 수군(水軍)은 바다를 건너 대동강(大同江)으로 쳐들어와 평양성을 공격하였으나 고구려군에게 대패(大敗)하였고,

 

한편 양제가 친히 거느린 육군의 1개 부대는 고구려의 요동성(遼東城)을 포위공격하였으나 성공하지 못하게 되자, 초조한 수군(隋軍)은 별동대(別動隊) 30만 5000명을 압록강 서쪽에 집결시켜 평양성을 공격할 계획을 세웠으나, 그들의 계략을 눈치챈 고구려의 명장 을지문덕(乙支文德)의 유도작전에 걸려 들어 압록강·살수를 건너 평양성 부근까지 깊숙이 쳐들어왔다.

 

고구려의 을지문덕은 수군에게 거짓 항복하여 적진(敵陣)에 들어가 그들의 허실(虛實)을 탐지하고 돌아온 뒤 그의 유도작전에 걸려들어 평양성 부근까지 침입한 수군의 대장인 우중문(于仲文)에게 1편의 5언시(五言詩)를 지어 보내 그의 어리석음을 이렇게 비꼬았다.

 

"그대의 귀신같은 계책은 천문을 다하였고(神策完天文), 기막힌 헤아림은 지리를 통달하였으니(妙算窮地理), 싸움 마다 승리하여 이미 그 공이 높거늘(戰勝攻旣高), 만족함을 알았으면  거치기를 바라노라(知足願云止).

 

이에 수나라 군대는 고구려에게 속은 줄 알고 황급히 다시 북쪽으로 퇴각하기 시작하였으나, 을지문덕은 수군이 살수를 반쯤 건널 때를 기다렸다가 공격 하여 수나라 군대는 크게 패하고, 살수에서 압록강까지 450리를 하루 낮과 밤사이에 도망하였으나 살아 돌아간 자는 2천 수백명에 불과할 정도였다.

 

수양제는 중국의 땅이 넓고 인구가 많아 많은 물자와 인원을 동원할 수 있는 이점만을 믿었으나, 거리가 멀어 군량(軍糧) 공급이 곤란할 것을 미처 생각지 못했으며, 또 고구려의 장병(將兵)이 모두 일기당천(一騎當千)의 강병(强兵)이었을 뿐만 아니라, 고구려의 모든 요새가 험고(險固)하여 쉽사리 공취(攻取)할 수 없음을 생각지 못했던 것이 중요한 패인이라 한다.

 

수양제는 수륙(水陸)양면에서 모두 패전했으므로 부득이 철군했는데, 이듬해에도 다시 대군을 이끌고 고구려에 침입하였다. 그러나 고구려의 저항은 여전히 견고하여 요동성(遼東城) 하나를 함락시키지 못하고 있을 때 본국에서 군량수송의 책임을 맡고 있던 양현감이 반란이 일어 켰다는 급보를 받고 서둘러 철군, 반란을 평정하고 제3차 고구려원정 길에 나섰다가 다시 실패, 수나라는 결국 멸망하였다.

 

라. 수의 멸망

 

611∼614년 돌궐과 손을 잡을 우려가 있었던 고구려에 3차에 걸쳐 대군을 파견하여 원정을 시도하였으나 실패하였고, 중국 통일 후 얼마되지 않았음에도 대운하를 파는 등 너무 서둘러 대대적인 토목공사와 원정을 속행하였기 때문에, 백성들은 모든 면에서 과중한 부담으로 고통을 받았다.

 

특히 영제거와 고구려 원정 기지에 가까웠던 산둥[山東] 지방 백성들은 그 고통이 더욱 심하였고, 게다가 이 지방은 옛 북제(北齊)와 북주(北周)로 이어지는 나라의 영토여서 북주를 멸망케 한 수왕조에 대한 반감도 대단히 높았다. 따라서 반란사건도 이 지역에서 가장 많이 일어났다.

 

613년 제2차 고구려 원정 도중에 일어났던 양현감(楊玄感)의 반란은 2개월 만에 진압되었으나, 이를 계기로 수나라는 본격적인 반란기에 들어가게 되었다.

 

반란의 공포에 싸잡힌 양제는 친위대도 수도 대흥(장안)도 믿을 수가 없어서, 두 손자를 수도 대흥과 뤄양에 남아 있게 하고, 자신은 장손인 연왕 담과 친척 전부를 이끌고 대업 12년(616) 강도(江都 : 揚州)로 들어가 이궁에 자리를 잡았는데 이는 화북지방을 잃더라도 강남을 차지하여 최소한의 영토와 지위를 보존하겠다는 속셈이었고 사실상의 도피었다. 사정이 이렇게 급박한데도 강도에서의 사치스러운 생활은 계속되고, 이 때를 놓칠세라 전국적으로 군웅이 할거하여 그 수가 120명에 달하였다.

 

이 가운데 양현감과 같이 반란을 주도했다가, 반란이 실패하여 달아나 행방을 감추었던 이밀은 낙구창을 점령하고 위공으로 추대되어 이름을 떨치고, 한편에서는 617년 타이위안[太原 : 山西省] 유수(留守) 이연(李淵)은 내란이 격화하여 양제가 있던 강도가 고립되자, 타이위안의 호족들을 모아 군사를 일으켜 장안(長安)을 탈취하고 양제의 손자인 유(侑)를 옹립하였는데 이가 수나라의 마지막 황제인 공제(恭帝)다.

 

618년 양제가 강도에서 우문화급(宇文化及)에 의하여 살해되자, 이연이 공제로부터 양위받아 스스로 즉위, 당조(唐朝)를 창건함으로써 수나라는 멸망하였고, 당나라가 성립하였다(618)

 

그 후에도 양제의 총애를 받던 왕세충(王世充)은 공제의 동생인 월왕(越王)을 옹립하여, 수나라의 대통을 잇게 하였으나, 619년 그를 폐위하고 스스로 즉위, 정국(鄭國)을 세움으로써 수나라의 황실은 그 맥이 3대 38년 만에 완전히 끊겼다.

 

당(唐)의 성립

 

(1) 창업(創業)과 수성(守成)

 

당(唐)을 창건한 이연(李淵)은 북주(北周)의 개국공신, 이호의 손자다. 이호는 북주로부터 건국국의 원훈(元勳)들에게 내린 8주국(柱國) 12장령(將領) 중 8주국의 훈작을 받아 대단한 가문을 형성하였다.

 

주국(柱國)이니 장령(將領)이니 하는 것은, 북주가 무천진(武川鎭) 군벌이 성장하여 독립국가의 형태를 이룩한 나라였기 때문에 건국에 공이 많은 집안에게 일종의 개국공신에 해당하는 훈작(勳爵)을 내렸는데, 주국(柱國)은 무인으로서 최대의 지위라고 할 수 있는 원수(元帥)에 해당하는 것이다.

 

수를 건국했던 양견은 그 보다 한 단계 낮은 12 장령(將領) 중 하나였다. 선비 족의 우문(宇文)씨가 세운 북주로서는 황량한 벌판에서 갖은 고초를 ?으며 생사고락을 같이했던 옛 동료들에게 중국 천자의 영화를 더불어 나누기 위해서 취한 배려였고, 아울러 이들로 하여금 황실의 충실한 울타리를 만들고자 했던 것이다.

 

이런 점에서 당의 고조(高祖)가 되는 이연은 중국화된 선비족 출신이거나, 적어도 그의 어머니가 선비 족의 출신이기 때문에 그의 몸 속에는 선비 족의 피가 흐르고 있었다.(그의 초상화를 자세히 살펴 보면 우리들과 닮은 점이 너무 많다)

 

그러나 이런 북주황실의 배려와는 상관없이 이연보다 한단계 낮은 양견이 북주를 멸하고 수나라를 세웠으며, 이렇게 되자 이연을 비롯한 북주의 귀족들은 이것이 오히려 부담이 되어 여간 조심하지 않으면 살아남기가 힘들었다.

 

그러나 다행이 이연의 어머니가 독고 신의 넷째 딸이었고, 그의 일곱째 딸이 수 문제의 황후로서, 양광의 어머니이기 때문에 이연과 양광(수의 문제)은 이종(姨從) 사촌간이 된다. 이러한 인연으로 문제와 양제의 재위 기간에도 두터운 신임을 얻을 수 있었고, 부친의 뒤를 이어 당국공(唐國公)에 책봉되어 여러 곳의 자사(刺史)를 역임하면서 강호의 호걸들과 사귀는 여유를 가지게 되었다. 이것이 후일 그의  지지기반이 되리라고는 그때 당시에는 그 자신도 몰랐다고 한다.

 

수 말에 각처에서 반란이 일어 났을 때 관중에서 반란을 진압하여 공을 세우기도 하였고, 양제의 고구려 원정시기에는 회원진에서 군량 수송을 감독하다가, 대업 13년(617)에는 타이위안 유수로 임명되어 그 지방의 치안 유지와 동 돌궐의 침입에 대비하는 책임을 맡았다.

 

나라를 세우는 창업(創業)과 세운 나라를 지키는 수성(守成)은 동전의 양면과 같은 것으로, 유교적인 도덕은 이의 조화를 이상으로 생각하지만, 창업이 이루어지고 나면 공이 많았던 사람은 공신으로서 세력을 확장하여 황실의 세력을 배경으로 갖가지 비행을 저질르고, 이런 것을 당연한 보상으로 생각하기에 골치아픈 사건들이 속출하게 된다.

 

따라서 이들을 도태시키거나 동반자로 끌어들여야 하는데, 그 역할(惡役)을 누가 담당하느냐에 따라 수성(守成)의 승패(勝敗)가 판가름 난다. 중국의 단명왕조의 공통점은 외부의 침략보다는 건국초기의 질서 재편과정에서 가깝게는 형제들로부터 친 인척을 비롯한 권력 층의 분열과 부패로 인한 것이 대부분이다.

 

멀리 예를 들것도 없이 북주의 창업을 도왔던 이른바 주국과 장령들도, 황실은 귀족으로 우대했지만 결과는 그들에 의해서 정권을 잃게 되었고, 북주를 이은 수나라 역시 우문씨의 황족은 거의 전멸 시켰지만 이들과 직 간접으로 관계를 맺고 있었던 유력한 지배층을 동반자로 끌어들이거나 도태시키는데 실패하여 3대 30 여 년 간의 단명 왕조에 그치고 말았다.

 

그러나 역사에서 힘이 지배한다는 논리적인 공식은 있을지 몰라도, 원칙이라는 것은 없다고 봐야 옳을 것이다. 특히 고대에서 중세로 이관되는 시기(5세기~7세기)에는 동서양이 같은 맥락에서 권력의 이 합 집산이 되풀이되는데. 법과 제도, 신앙과 도덕의 잣대로 운영되던 사회가 무너지고, 무질서가 새로운 질서가 되는 파란을 겪는 양상을 연출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민중의 고통은 허공의 메아리에 불과하고 권력의 화신이 된 무식한 집단에 의해서 지배체제가 굳어지면 새로운 조치들이 개혁이라는 이름으로 둔갑을 하게 된다. 시행과 착오는 늘 붙어 다니는 동전의 양면과 같아서, 수 많은 시행과 착오가 되풀이되면서 새로운 사회가 건설되고 이것을 역사의 발전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서 로마제국이 망하고 게르만족이 세운 프랑크 왕국의 성립을(5세기 말) 유럽에서는 중세의 시작으로 보고 있다. 귀족이 중심을 이룬 노예제 사회에서, 영주와 농노가 중요 구성원이 되는 가운데 지배층 내부에는 주군과 가신이 계약에 의해서 성립되는 봉건제도가 싹을 틔우기 시작하여, 9세기 경에는 전 시대와는 전혀 다른 봉건사회로 이행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시대구분 잣대로 해석해서 중국에서는 당 말 오 대(五代)를 지나 송(宋) 대의 시작을(10세기 중반) 중세로 보고 있으나, 정착농경이 바탕을 이룬 중국에서는 5세기 중엽 북위시대에 균전제가 나타났고, 수 당대에는 중앙아시아를 포함하여 동남아시아의 이민족과 그 거주지까지 지배하에 넣고 서방의 문화까지도 수용하였으며, 균전제를 축으로 조, 용, 조의 세제, 부병제와 과거(선거)제 등이 제도화되어 이른바 동아시아 문화권이 형성되었다는 점에서 적어도 7세기 경에 이미 중세가 이룩되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2) 당의 성립

 

이연(李淵 ;566-635)이 타이위안(太原)의 유수로서 돌궐 방어의 임무를 수행하고 있을 때, 전국적으로 반란이 일어나 매우 어수선하였다. 한데 정작 수의 양제는 반란의 공포에 시달린 나머지 수도 장안(대흥)과 배도 뤄양을 두 손자에게 맡기고 자신은 양주의 강도로 들어가 안일한 생활을 즐기고 있었기 때문에 군도의 발흥은 더욱 극심하였고,

 

이 가운데 이밀과 두건덕이 뤄양을 중심으로 밀고 당기는 혈전을 벌리고 있을 때, 타이위안의 호족들과 돌궐의 도움을 받고, 군대를 모아 거병(擧兵), 별다른 저항을 받지 않고 장안을 점거하여 양제의 손자 유를 옹립하여 공제(恭帝)로 삼고, 자신은 당왕이 되었다가 이듬해 양제가 강도에서 그의 친위대장 우문화급에게 살해되자 공제로부터 선양받아 연호를 무덕(武德), 도읍을 장안으로 하여 당나라를 세웠다(618)

 

그러나 이 때 까지만 해도 당나라는 장안을 중심으로 한 지방정권에 불과하였고, 뤄양에서는 왕세충이 역시 양제의 손자인 월왕 양동을 황제로 세워, 황태라 개원하고 수 왕조의 명맥을 이었으며, 각처에는 군웅과 군도들이 할거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들을 평정하는 것이 최선의 과제가 되었다.

 

거병에서부터 군웅과 군도의 평정까지 당조(唐朝)의 실질적인 창업의 주역은 이연의 둘 째 아들 이세민(李世民 598-649)으로서, 그의 이름(諱) 세민은 "20세가 되어 제세 안민(濟世 安民)의 사업을 성취할 사람이다"라는 예언에 의하여 명명되었다고도 하는데,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생각이 깊었으며 결단력이 풍부하였다.

 

수의 멸망을 예지하고, 협객·군도(群盜)를 기르다가 부친에게 권하여 거병, 내내 전군을 지휘하면서 관중으로 들어가 장안을 점령하고 당나라를 세우게 되었다. 천자에 오른 고조 이연은 장자 건성을 황태자로, 둘째 세민을 진 왕으로 봉하고, 상서령을 삼아 정무를 맡겼으며, 셋째 아들 원길을 제 왕으로 삼았다.

 

서위에서부터 북주 수로 이어지는 세 왕조의 수도였던 장안을 전쟁의 참상을 입히지 않고 점령하였다는 것은 당으로서는 몇 가지의 큰 이점이 있었다, 아직도 부고에는 재화, 식료, 무기의 저장이 있었고, 조정에는 거의 완전한 관료진과 전투부대가 갖추어져 있었으며, 전국의 호적과 지지(地誌)가 있어서 앉아서 천리를 내다볼 수도 있었다.

 

더구나 외지에 나가 있는 관료의 가족들이 모여 있었으므로 이들을 통해서 적진(敵陣)의 사정을 손쉽게 알 수 있었는데, 가족의 안위가 불안한 관료들이 당으로 쉽게 귀순하거나 협조하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점을 가지고 군웅토벌의 깃발을 올리고 진두에 선 것은 진 왕 세민으로서 여기에서도 그 군사적 천재성을 유감없이 발휘하여 북서 방면을 평정하여 이 방면의 후고(後顧)를 없애고, 뤄양으로 진격해서 왕세충과 두건덕을 사로잡았으며, 세력을 키운 돌궐이 침입하자 이를 몰아내고 강남을 평정하여 명실상부한 통일제국을 이루게 되었다. 그래서 세민은 부친으로부터「천하는 모두 네가 이룩하여 놓은 것이다」라는 말을 들었다고 한다.

 

(3) 창업에서 수성으로

 

이렇게 되자 진 왕부에는 용장(勇壯)과 현사(賢士)들이 구름처럼 모여들고, 그 위세가 점점 높아지자, 이에 불안을 느낀 황태자 건성(建成)은 아우 원길(元吉)과 공모하여 그를 제거하려 하였다.

 

이에 기선을 제압하여 626년 현무문에서 형제를 사살하고(현무의 변) 태자가 되었다가 그 해에 즉위하였으니 이가 곧 당의 태종이다. 연호를 정관(貞觀)으로 개원하고, 국내 통일의 일단락을 짓자, 이민족의 제압에 착수하여, 630년 강적 동 돌궐의 힐리가한을 사로 잡고, 토욕(곡)혼·토번·고창·서돌궐·설연타를 정복하였으므로 북변·서변·서역이 모두 당의 영토가 되었다.

 

다시 남방 제국을 조공시켜 미증유의 판도를 이루었으며, 정복 지에는 이른바 기미 정책을 실행하여, 황제는 여러 수장으로부터 천가한(天可汗 : 하늘의 칸)의 칭호를 받아 번한(蕃漢) 공통의 군주가 되었을 때 태상황으로 있던 이연은 능연각에서 잔치를 베풀고 손수 비파를 뜯으며 노래를 불렀고 태종은 덩실덩실 춤을 추었다고 한다.(그의 초상화를 보면 당 태종은 풍채가 당당한 호걸형 미남?)

 

국내 통치에도 주력하여 부역·형벌의 경감, 사치의 금지, 관제의 정비, 인재의 등용에 힘 썼으며, 수 멸망의 전철을 피하기 위해, 항상 신하들과 정치의 도를 논하고 황태자를 위하여 '제범(帝範)' 4권을 저술하기도 하였으며, 또 진서(晋書), 양서(梁書), 진서(陳書), 주서(周書), 수서(隋書) 등 전대의 역사를 편찬케 하고 자신도 진서(晋書)를 편찬에 참여하였다.

 

한편 수 말의 내란 때 성장한 군웅들을 받아들여 그들을 관료제에 흡수하기 위해서, 문학·유학을 장려하였으며 홍문관을 두고 국자감을 확장하였다. 또 오경정의를 편찬케 하여 경전해석을 통일하였고, 이러 한 외정·내치에 기여한 공신 20여 명의 초상화를 능연각(凌煙閣)에 걸게 했으니, 창업에 따르는 공신들에 대한 배려도 잊지 않았다.

 

이런 그의 치세를 정관(貞觀)의 치(治)라 하여 후대 유교적인 황제의 모범이 되었다. 다만 만년에 손을 댄 고구려 원정은 고구려인의 불굴의 저항으로 실패하였고, 이 전쟁의 피해는 멀리 쓰촨에까지 미치어 각지에서 폭동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태종을 도운 여러 사람들 가운데는 재상으로서 방현령, 두여회와, 무장 이정, 이적, 간관(諫官)으로 왕규와 위징 등이 유명하다.

 

당시의 수도인 장안(長安)은 동서로 10km, 남북으로 9km 정도의 규모였다고 하니, 현재 우리가 보는 시안(西安:zi-an)의 성곽은 원래 장안(長安) 규모의 1/8에 불과한 것이다.

 

아울러 지금도 하기 힘든 도시계획을 철저히 시행하여 건물을 배치했는데, 장안(長安) 전체를 110개 직사각형 구역으로 나누어 바둑판 모양으로 반듯하게 여러 길을 직교상(直交上)으로 연결하고, 궁성 남문에서 남북으로 폭 1.8km에 이르는 주작대로를 건설하여 기마(騎馬)와 수레들이 질주할 수 있게끔 만들었고, 각국에서 온 외국상인과, 조공(朝貢)을 바치고자 모여든 사절단이 길을 메웠는데, 그들의 기이한 복장이 길을 뒤덮어 장관을 이루었다.

 

중서시랑(中書侍郞) 안사고(顔師古)가 정관(貞觀) 3년(629년) 황제의 재가(裁可)를 받아 화가들을 불러 이러한 성황(盛況)을 묘사하여 남긴 것이 왕회도(王會圖)라는 그림이다. 대당제국과 접촉한 나라는 모두 48개국에 이르고, 그중 조공(朝貢)을 바친 나라는 29개국, 국토를 바친 나라는 6개국, 귀속된 나라는 5개국이나 되었다.

사절 가운데는 페르시아 사절단이 10차례나 다녀 갔고,  일본이 보낸 견당사(遣唐使)는 처음에는 한번에 보통 3∼5백명 수준이었으나 그 후 한번에 2천명 규모로 불어났다니, 규모면에서 단연 으뜸이라 할 수 있고, 사절단에는 다수의 유학생들과 유학승(學僧)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일본 인들은 귀국 후 대당제국의 법령제도를 모방하여 쇼토쿠태자(聖德太子)는 다이카(大化)개신을 단행하여 법령을 정비하고, 중앙집권을 강화하였으며, 균전제(均田制)를 모방하여 반전(班田)을 만들었으며, 쿄도(京都)를 장안(長安)의 축소판으로 만들고, 장안(長安)의 주작(朱雀)대로를 모방하여 나라(奈良)와 헤이안(平安)간, 남북 치도(馳道)를 만들고 이름도 주작대로(朱雀大路)라 불렀다. 일본측의 사서에는 이러한 견당사를 6차례 보냈다고 되어있다.

 

이 시기의 우리나라는 통일신라에 해당되는데 물론 신라와 당의 교류도 매우 활발하여, 사절과 유학생 유학 승이 줄을 이었고, 많은 신라 인들이 당나라에 건너가 자치행정을 펴기도 했는데 이러한 신라 인들의 마을을 신라방이라 하였고, 자치행정기구를 신라소, 해상 안전등을 기원하기 위해서 세운 사찰인 신라원도 있었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그리고 당이 외국인에게 실시하였던 빈공과에 합격하여 이름을 남기기도 하였는데 신라의 6두품 출신이었던 최치원, 김가기 등이 이에 속하며, 평민출신으로 여겨지는 장보고와 정년은 당에서 무장으로 활약하다가 귀국하여 청해진을 설치하고 해상왕국을 세웠으며, 의상은 승려로서 당에 건너 갔다가 돌아와 부석사를 중심으로 화엄종을 열었고, 혜초는 바다 길로 다시 인도에 가서 여러 지방을 돌아보고 돌아올 때는 이른바 비단길이라고 하는 중앙아시아를 거쳐 중국에 들어와 그 여행기인 "왕오천국전"을 남겼는데, 1908년 돈황 문서가 발견되어 비로소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나. 동아시아 문화권

 

(1) 당의 이민족 지배

 

한대에 형성되기 시작한 동아시아 문화권은 위·진·남북조의 혼란과 분열 시대를 거쳐 마침내 당에 이르러 완성되었다. 흔히들 동아시아 문화권의 4대 기본 요소라고 하면 유교와 불교, 그리고 율령 체제와 한자의 사용을 의미하는데 이런 것들이 당대에 이르러 거의 완성 단계에 도달하였고, 다시 주변 국가로 파급되었기 때문이다.

 

정치적으로도 6세기말의 수의 중국 통일과 이를 이은 당 제국(618 ~ 907)의 출현은 동아시아의 국제 질서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어, 백제와 고구려가 신라와 동맹한 당의 침략에 의해 멸망하여, 한반도에 통일 국가가 출현했으며(676),

 

일본은 견당사를 파견하여 당의 제도 문물을 열심히 수용하였으며, 만주에는 발해가 건국하여(698) 당과 처음에는 적대관계였으나, 문왕 때(8세기)부터 친선 관계를 유지함에 따라, 당 제국을 중심으로 평화가 유지되었다.

 

이러한 평화는 당 제국이 새외(塞外)에 영토를 확장하고, 6도호부를 설치하여 기미(羈미) 정책과 고명(誥命) 금인(金印)이라는 중화 천자의 위력을 발휘하여, 책봉(冊封)과 조공(朝貢) 관계로 국제질서를 유지시킨 반면, 당의 개방 정책으로 문화의 교류가 더욱 촉진되었기 때문이다.

 

통일 신라의 찬란한 문화나 나라·헤이안 시대의 일본 고대 문화, 그리고 해동성국이라고 불리었던 발해의 문화는 다같이 자국 문화의 기반 위에 당 문화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인 결과라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당 문화의 의존적인 결과는 당 왕조가 멸망하는 10세기 초를 기준으로 중국에서는 5대의 혼란기가, 우리나라에서는 후삼국의 분열기로, 발해는 거란에게 멸망되었고(926), 일본도 헤이안 시대의 평화가 무너지고, 외척이 지배하는 섭관(攝關)에서, 다시 원정(院政)으로 이어지다가, 각지에서 무사들이 난립하여, 막번체제라는 무사(武士)중심의 일본 특유의 봉건제도가 형성되었다(12세기 말).

 

이런 정치적인 변화는 동아시아 문화권에도 영향을 주었고, 문화의 형태도 변형되어, 귀족적 불교적 요소가 퇴색하고, 복고적, 서민적인 문화가 자리잡게 되었다.

 

기미 정책(羈미政策)은 당대 이후 중국 왕조가 이민족을 지배하는 수단과 방법이 였다는 것은 전에도 언급한 바가 있다. 로마제국이 정복한 이민족의 땅에 속주(屬州:Provinkia)를 설치하여 총독을 파견하고, 징세는 요구하였으나 제도와 풍속은 간섭하지 않았던 것과 같이,

 

중국은 주위의 약소 민족에 대하여 정복을 하거나, 위력으로 복속(服屬)시키고, 도호부를 설치하여 그 관할하에 두었으며, 그 곳의 왕을 비롯하여 추장이나 유력자에게 중국의 관작이나 은전을 주어 각기 그 풍습을 좇아 자치케 하였다. 말과 소에게 재갈(羈)과 고삐(미)만 있으면, 주인은 언제나 마음 데로 조종할 수 있다는 뜻에서 기미정책이라 한다. 다시 말하면 배반하지 않으면 그것으로 족하다는 통치 방침이다.

 

이러한 지배 책은 한서(漢書) 사마상여전(司馬相如傳)에 보이는 것으로 보아 한 대부터 있었으나, 이를 교묘한 방법으로 이용한 것은 중국 역사상 최대의 속지(屬地)를 가진 당(唐)나라로서, 서역을 비롯한 복속지엔 도호부를 설치하고 그 밑에 도독부 및 주·현을 설치하여 장관에는 그 고장의 유력자를 배치하고 그들 방식대로 통치하게 하였다.

 

이러한 땅을 기미주(羈靡州)라고 하며, 많을 때는 800개 가까이 되었다. 기미주를 관장하는 도호부로서는 안서(安西), 안남(安南), 안북(安北), 안동(安東)도호부를 비롯해서, 선우(單于), 북정(北征)도호부를 설치하였고, 이 가운데 동 서 남 북은 각각 그 방향을 의미하며, 선우와 북정도호부는 유목민을 다스리기 위한 것이었다.

 

우리들에게 익히 기억되고 있는 안동도호부는 고구려를 멸한 후 평양에 설치했다가(668) 만주지방으로 이주하게 되었는데(676) 이 때부터를 국사에서는 신라의 삼국통일로 보고 있다. 그러나 한 때는 계림도독부를 설치하고 그 도독에 신라왕을 임명하여, 신라자체를 기미주로 만들려고 기도한 적도 있었다.

 

(2) 율령격식(律令格式)

 

우리들의 통상적인 용어에는 格式이라는 말이 자주 등장한다. 격식에 맞추어라, 격식에 어긋난다 등으로부터 규격을 지켜라 규격대로 하라 규칙을 지키자 규칙을 존중하자 등등, 한자는 그 자체가 뜻 글자이기 때문에 사물이나 추상적인 내용도 글자에 함축되어 있어서 자의(字意)를 살펴보는 것도 매우 중요하다.

 

한자의 격(格)은 바로잡다, 바루다, 겨루다 등의 뜻(기준)을 담고 있고, 식(式)은 본받다, 기준으로 삼고 따르다 라는 내용을 담고 있다. 따라서 격식을 붙이면 "바른 기준을 따르다"라고 풀이할 수 있다. 따라서 격(格)은 수시로 내리는 조칙(詔勅 : 율령)을 편집한 것으로 개정과 보충 등 변경된 규정이고, 식(式)은 이에 따르는 실천 세목이다. 현대적인 용어를 빌리면 격은 개정법 내지는 보충법, 식은 시행령이라 할 수 있다.

 

율(律)은 떳떳하다, 저울질하다, 법, 법령, 정도, 자리, 지위의 뜻을 담고 있고, 령(令)은 우두머리라는 뜻이다. 이것을 연결하면 "우두머리의 지위에 있는 자가 내리는 말씀"이라는 것이다. 천자나 군왕이 내리는 조칙(詔勅) 혹은 명령(命令)이라는 뜻이다.

 

이런 것을 전부 포함해서 법(法)이라고 하는데, 法 은 물을 의미하는 水를 변으로 하고, 간다는 의미를 가진 去를 근간으로 하는 회의(會意)문자로서, 그 뜻은 "물이 간다"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물이 가는데는 두 가지의 속성을 지니고 있다. 첫 째는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가고(흐르고) 낮은 곳이 채워지면 더 낯은 곳을 찾아 물을 채운다(수평을 이룬다) 둘 째는 낮은 곳을 가다가 높은 곳을 만나면 돌아서 가거나, 돌아서 갈 길이 막히면 한 곳에 머물면서 더 낮은 곳을 기다릴 뿐, 자신의 힘으로 높은 곳을 넘지는 못하고 정지하고 만다.

 

높은 사람들에게 법은 통용되지 않는다는 이치라고 생각하면 "모든 사람은 법 앞에 평등하다"는 것은 근대 이후에서나 통할 수 있었고 이 당시 중국을 비롯한 동아시아 제 국가에서는 법을 만드는 사람과 지켜야 할 사람이 각각 달랐다는 말이 된다.

 

법은 누가 어떤 목적으로 만들었는가가 매우 중요하다. 그것이 상호간의 약속이라면 반드시 지키는 것이 도리이며 상호간에 이익이 될 것이다. 그러나 어떤 특정 계층을 위한 도구나 수단이라면 그 자체가 악법이 될 것이다.

 

따라서 동아시아에서는 율의 기준을 유교적인 덕치주의에 두고, 령을 시행하여 이러한 법의 모순을 보완한 것이 율령체제라는 것이다. 율은 형벌(형법)에 해당하고, 령은 행정 규칙으로 생각하면 크게 어긋남이 없다. 만든 사람 따로 지키는 사람 따로인 율령의 의미를 강조한 것은 이 시대에 이르러 율령이 전체는 아닐지라도 한 사람의 의견이 아닌 다수의 의견을 종합하였고, 그 기준이 마련되어 수도나 변두리할 것 없이 다 같은 적용을 받았다는데 의의가 크기 때문이다.

 

중국법의 연원은 매우 오래되어 춘추시대의 형정(刑鼎)이 주조된 것을 필두로, 전국시대의 법경(法經), 진대의 진률, 한 대의 한률등 시대마다 률이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 남아 있는 것이 없어서 그 전모가 어떤지는 알 수 없다.

당은 수의 개황

 률과 령을 기초로하여 무덕 원년(618)에 신법(新法) 53조를 제정하였고,  그후 시대 상황의 변천에 따라 율은 7회 정도, 령은 10회 정도 수정 공포되었다고 전하고 있으나 오늘날 까자 남아 있는 것은 개원 25년(737)에 공포된 율의 주석서인 당률소의가 유일한 것이다.

 

그러다가 19세기에 들어와서 툰황과 투르판에서 영국과 프랑스 사람에 의해서 발견된 여러 고문서 중에 영휘 2년(651) 9월에 공포된 영휘 직원령의 단편이 발견되어 당의 율령격식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알려져 주목을 받았다.

 

(3) 당의 중앙관제 3성 6부

 

당대의 중앙 관제는 3성 6부를 골 간으로 하였는데, 3성이란 중서성, 문하성, 상서성으로서, 각각의 임무를 나누어 보면, 중서성은 조칙과 명령의 입안, 문하성은 심의와 동의, 상서성은  행정 집행기관으로서 산하에 이·호·예·병·형·공(吏·戶·禮·兵·刑·工)의 6部를 두고 행정을 분담 집행케 한 제도다.

 

이것은 한대 이후 발달하여 당대에 완비되고, 송대 이후 붕괴되어 한때 없어졌으나 6부 제도만은 다시 부활되어 청대까지 존속하였는데 우리나라에도 많은 영향을 주었다. 이러한 제도는 당대 초기에 종래의 문벌 귀족의 세력이 강하였기 때문에 이를 절충, 천자를 대표하는 중서성과, 귀족을 대표하는 문하성의 합의제 형식으로 나타났다고 보아진다. 3성의 장관은 각각 중서령(中書令)·문하시중(門下侍中)·상서령(尙書令)이라 하였는데, 그들은 재상이 되어 최고 정무를 결재하였다. 차관을 시랑(侍郞)이라 불렀다.

 

그러나 당대에서는 태종의 즉위 후, 태종이 한 때 상서령으로 있었기 때문에 황송하다 하여 상서령을 없애고 차관급인 상서 좌, 우 복야(僕射)를 두고, 좌복야는 이, 호, 예를 맡게 하고, 우복야는 병, 형, 공을 맡게 하여 그들을 재상으로 삼았다.

 

조칙과 명령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면 문하성에서는 거부할 수도 있었는데, 이것은 황제의 결정에 대한 거부로 봉박(封駁)이라 한다. 황실과 귀족의 타협인 동시에 모든 책임이 황제에게 있었던 것을 귀족과 나누어 맡게 되었다는 것이다. 반면에 황제의 독재와 잘못을 견제(牽制)할 수 있는 기능이 첨가되었다고도 볼 수 있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면서 중서성과 문하성의 기능이 비슷해 지고 점차 귀족 세력이 약화되고, 군주 독재 체제가 강화됨에 따라, 현종 때부터는 중서성과 문하성이 통합되어 중서문하(中書門下)성이 되었다. 고려의 관제도 이 제도를 모방하고 있는데 중서성과 문하성을 합쳐서 중서문하성이라고 하였다.

 

당의 관제에는 이외에도 1대(臺), 9시(寺), 5감(監)을 두었는데, 1대는 어사대(御史臺)로서 관리의 감찰을 임무로 하였으며, 장관을 어사대부라 하였고, 9시는 지금의 청(廳)에 해당하는 관서로서 太常시(예악, 제사), 光祿시(식사와 반찬), 위위(衛尉)시(무기와 의장), 宗正시(황족 사무), 太僕시(마소와 수레), 大理시(刑獄), 홍로(鴻 )시(외국사절 접대), 司農시(창고, 회계), 太府시(財貨) 등인데 그 장관을 경(卿)이라 하였다.

 

5감 역시 사무관아로서 국자감(國子監: 교육), 소부감(小府監: 공예), 군기감(軍器監: 병기), 장작감(將作監: 궁전, 능묘, 도로의 영선과 조축), 도수감(都水監 : 運河, 灌漑)을 두고 해당 사무를 관장하였다.

 

지방관제는 태종 때 전국을 10道로 나누었다가, 현종 때에는 15도로 늘렸는데, 처음에는 장관을 두지 않았다가 그 후 순찰사(巡察使)를 두어 지방관을 감찰하다가, 안사의 난을 계기로 관찰사(觀察使)로 이름을 바꾸고 민정(民政)을 관장하게 하였다.

 

도(道) 아래에 주(자사), 주 아래에 현(현령)을 설치하고, 그 장관인 자사와 현령은 물론, 하급관리까지 중앙에서 파견하였으며, 출신지인 고향의 관리로 임명될 수 없는 것은 옛 날의 풍습이 였으나(相避制) 이 시기에 제도로 확립되었다. 그러나 속관(屬官)과 소리(小吏)는 지방민을 등용하여, 언어와 민속을 달리하는 지방민과 상급관료와의 사이에서 의사를 소통시키고, 각종 부정을 방지하는 장치로 활용하였다.

 

(4) 당의 과거제도(科擧制度)

 

천명(天命)과 순리(順理)를 정치의 기본으로 삼았던 중국에서는 관리를 임명하는 것도 신분과 덕망에 따라 적재적소(適材適所)에 관리를 배치하는 것을 원칙으로 삼았다. 이것이 누대(累代)를 거치면서 세습되면 그 자손들은 재능이나 학식에 관계없이 문벌귀족이 되어 주민 위에 군림하면서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하고, 왕권을 위협하는 등 부작용이 나타나게 된다.

 

이들을 호족(豪族)이라고 불렀다. 삼국시대의 위(魏)에서는 이를 바로잡기 위해서, 지방의 유력자를 중정(中正)으로 임명하고, 중정은 관내의 인물을 9 등급으로 나누어(9품) 추천하면 조정에서 전형하여 관리로 임명하였는데, 이것이 9품중정법(제)이라는 것이다. 이 제도는 남북조시대로 이어졌는데, 시행한 목적은 주민을 호족의 지배로부터 분리시켜 왕권을 강화하고, 국가의 기초가 되는 정(丁)을 늘려 세수를 비롯한 군정(軍丁)을 확보하기 위해서 였으나, 결과는 호족의 세력만 더욱 늘어 났다.

 

수나라에서 시작된 선거(選擧)는 "가려서 뽑는다"라는 뜻으로 추천이 아니고, 황제가 시험을 치러 인재를 뽑아 관리로 임명하는 것을 말한다. 이것이 송 대에 이르러 "과목(科目)에 따라서 (시험으로)뽑는다(擧)"하여 과거라고 이름이 바뀌었다.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인사(人事)제도란 임용권자가 누구냐에 따라서 성격이 달라지는데 황제가 임명한 관리라면 당연히 황제에게 충성을 다하게 되고 이렇게 되면 이것은 곧 왕권 강화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당나라에서 과거를 통해서 임용된 것은 소수에 불과하고 여전히 문음(門蔭 : 조상의 음덕)이 주류를 이루었으나, 제도로 확립되었다는 것에 의미가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당대 과거의 시험과목은 수제(秀才), 명경(明經), 명법(明法), 진사(進士), 명자(明字), 명산(明算)科 등이 있었다. 그러나 이런 저런 연유로 해서 당 말이 되면 진사과 하나만이 과거의 구실을 했다.

 

예부에서 관장했던 과거에 합격한다는 것은 무척 어려워 "50에 진사가 되면 빠르다" 고할 정도였다고 하며, 과거에 합격했다고 해서 관리로 임용되는 것은 아니고, 다시 이부에서 채용시험을 거쳐야 하는데, 여기서는 신(身), 언(言), 서(書), 판(判) 중 하나라도 결격사유가 있으면 불합격 시켰다.

 

따라서 신체 결함 자나 말더듬이, 악필(惡筆), 소송에 대비한 판단 능력이 없는 자 등은 관리로 채용하지 않았다. 이 제도가 우리나라에 파급되어 신라의 원성왕은 독서삼품과를 시행한 적이 있고, 고려 때에 이르러 제도화되었다. 그러나 무사가 지배세력으로 있었던 일본은 과거제도가 들어가지 못했다.

 

(5) 당제국의 기초 균전제(均田制)

 

농경(農耕)사회에서 토지란 그들의 생명선으로 그 자체가 신앙이었다. 중국에서는 한(漢)나라 멸망 후 농민의 유리(遊離) 현상이 두드러져 농지의 황폐가 심하여 지자 이런 상황을 이용하여 호족의 대토지 사유(私有)가 대대적으로 이루어졌다.

 

그래서 역대 왕조는 어떤 형태던 토지개혁에 힘쓰게 되었고, 북위에서도 균전 조칙(詔勅)을 발표하고(485), 그 기준을 정하였는데, 그 내용은 15세 이상의 남녀에게 노전(露田:正田)·마전(麻田) 등의 경작지와 택지(宅地)·원지(園地)를 지급하였으며(여자에게는 남자의 절반을 지급), 만 70세에 이르면 국가에 반납하게 하였다.

 

또 남자에게는 반납하지 않아도 되는 영업전(永業田)으로서의 상전(桑田)을 따로 지급하였다. 이는 호족의 과다한 토지의 사유를 통제·제한하여 겸병(兼倂)을 막고, 국가소유의 토지를 분급(分給)하는 형식으로 생산담당자인 농민들의 이탈 방지와 국가의 직접지배라는 두 마리의 토끼를 동시에 잡고자 했던 정책이다. 이것은 유목민인 선비 족의 북위가 농경정착화(農耕定着化)하는 과정에서 생긴 것이다.

 

이것이 당나라 때에 이르러서는 부병제(府兵制)와 조(租), 용(庸), 조(調)의 세제(稅制)와 맞물려 제도화되었다. 당나라에서는 연령과 신체의 양부(良否)에 따라, 정남(丁男:21~59세), 중남(中男:18~20세), 노남(老男:60세 이상), 독질(篤疾:심한불구), 폐질(廢疾:보통불구)로 나누고,

 

정남과 중남에게는 전(田) 1경(頃:100畝)을 지급하여, 그 중 20무(畝)는 영업전으로서 자손에게 상속이 허용되고, 나머지 80무는 구분전(口分田)으로서 본인이 사망하면 국가에 반납하도록 하였고,

 

노남과 독질, 폐질에게는 구분전 40무만 지급되었고, 노남이 되기 전에 죽으면 과부가 된 처첩(妻妾)에게는 구분전 30무를 갖도록 하고, 그가 호주라면 남녀를 가리지 않고 영업전 20무를 더 가지는 것을 허용하였다. 이를 미루어 보면 농가에서는 최소 50무의 토지가 지급되었다고 보여진다.

 

이외에도 관료에게 지급되는 관인 영업전이 있어서 그 등급에 따라 최고 100경(頃)에서 2경까지 지급하였고, 훈작(勳爵)이 있는 자에게는 훈전이 지급되었으며, 상공업에 종사하는 사람에게는 농민의 1/2, 일정한 자격을 갖춘 도사(道士)와 승려(僧侶)에게는 구분전 30무, 여도사와 니승(尼僧)에게는 20무가 지급되었으며, 사노비와 천민에게는 전혀 지급되지 않았다.

 

이런 당의 균전제가 우리나라에는 어떤 영향을 주었으며, 어떻게 실시되었는가에 관해서는 사료의 부족으로 알 길이 없다. 다만 삼국사기 성덕왕 21년(722) 조에 "8월에 처음으로 백성에게 정전(丁田)을 주었다”(秋八月始給百姓丁田)는 짤막한 기록만 남기고 있어서 그 정전을 어떻게 얼마나 주었는지는 알 길이 없다. 이렇게 丁에 대한 기준이나 지급 범위 등에 대해서는 단 한 줄, 한 자도 기록으로 남긴 것이 없으나, 미루어 짐작해 보면 농민들이 보유해 오던 경작지를 법제적인 절차를 거쳐서 반급(班給)해 주고, 이것을 기준으로 수취(收取)체제를 정비하지 않았나 보고 있다.

 

고려시대 역시“고려의 전제(田制)는 대체적으로 당제(唐制)를 모방하였다”는 전제의 서문(序文)을 보면 균전제가 채택되었을 것도 같은데, 전시과(田柴科)를 비롯해서, 공신전, 공음전 등 지배층에 대한 수조지(收租地) 분급을 규정하였을 뿐, 일반농민에게 경작지를 어떻게 분급 한다는 규정은 역시 단 한 줄도 없다. 토지의 단위인 무(畝)는 묘라고도 하는데 1무는 30평 정도로 알려져 있다.

 

당대의 국민 부담

 

(1) 조·용·조(租·庸·調)

 

당대에 제도화되어 중국은 물론 주변국가들에게까지 많은 영향을 주었던 조·용·조(租·庸·調)란 무엇인가? 이해을 돕기 위해 간략히 설명하면 租(조)란 토지에 대한 세금이고 庸(용)은 몸으로 봉사하는 신역으로서 보통 요역과 군역으로 나눈다. 調(조)는 공납이라 하여 국가나 지방관청에서 필요로하는 물자를 제공하는 것이다.

 

당의 균전제도는 연령과 신체와 성별과 직업에 따라 분류된 같은 부류라면 일률적으로 같은 양의 토지를 분급(分給)해 주었다. 그렇다면, 그 반대급부가 되는 조세의 부담 또한 일률적으로 같다는 전제가 성립된다.

 

그러나 납세의 주대상은 정남으로서, 정남(丁男)은 토지 세에 해당하는 조(租)로 매년 속(粟:찧지 않은 곡식) 2석, 조(調:공납)로서 견(絹) 20 자(尺)와 목화 3량, 강남과 같이 마포를 생산하는 지역에서는 견 대신 마포(麻布) 25자와 마(麻) 세 근을 바쳤다.

 

그리고 노동력을 제공하는 신공(身貢)은 연간 20일을 원칙으로 하고, 필요에 따라서 연장할 때는, 연장일 수가 15일을 넘으면 조(調)를 면제 받았으며, 다시 15일을 더 연장하여 30일이 넘으면 조(調)와 조(租) 모두를 면제 받도록 규정하였다. 반대로 정역(丁役)을 부과하지 않을 경우에는, 하루에 견은 석자, 마포는 3.75자의 비율로 계산하여 현물로 내게 하였는데 이것을 용(庸)이라고 한다.

 

이 세가지가 국가 재정의 기초가 되었는데 이것을 과역(課役)이라고도 했다. 그리고 지방관아에서 부과하는 요역(요役)을 잡요라 했고 이에 종사하는 사람을 부(夫)라 하였다. 정남 이외, 중남과 노남, 독질 및 폐질자에도 규정을 상세하게 정하여 차등 시행하였다.

 

(2) 부병제(附兵制)

 

당대의 정남(丁男)은 신공으로서 요역 외에도 병역의 의무인 군역이 있었다. 이것을 부병제라 한다. 이런 제도가 서위에서 시작되어 북주와 수를 거쳐 당대에 완성되었다가 당 중기이후 사라졌다. 부병(府兵)이란 절충부(折衝府)에 소속된 병사(兵士)란 뜻으로, 당의 군제가 중앙에 금군(禁軍)으로서 6군과 16위를 설치하였고, 지방에는 절충부를 설치하여 부병의 징발, 동원, 훈련 등을 관장하게 하였다.

 

21세에서 59세 사이의 장정을 정남이라하고 그 정남 3인 중 1인을 선발하여 부병을 삼았다. 부병의 선발조건은 신체 건강한 사람으로서 재산이 많은 순서로 뽑았다. 따라서 대개의 경우 100무(畝) 이상의 땅을 가진 중산층 이상의 장정이 선발되었다. 이들이 절충부에 배치되어 기간이 30년을 넘겼거나 60 이 되어 노남(老男)이 되면 면제되었다.

 

선발된 자는 해당지역의 절충부(折衝府)에 소속되어 농한기에는 훈련에 임하고 3년에 한번씩 수도에 배치되어 1 ~ 2개월 정도를 복무 하고, 30년 복무기간 중 한번은 3년간 변경수비대에서 복무해야만 되었다. 이 기간 복무에 필요한 무기, 피복, 식량 등을 포함한 모든 비용은 본인이 부담하였고 농사를 비롯한 가사는 남은 장정이 해주기로 되어 있었다.

 

이런 것을 병농일치제라 하여, 국가는 한푼의  경비 지급 없이도 많은 병력을 보유할 수 있어서 이상적인 군사제도였고 복무 중에는 조, 용, 조 모두를 면해 주어 초기에는 부병으로 선발되는 것 자체가 특전이었다. 그러나 점차 부담은 무거웠고 혜택은 줄었다. 문제는 이것 외에 또 있었다.

 

 

절충부란 모든 군현에 설치한 것이 아니라 필요한 곳에만 집중배치했고 설치되어 있는 곳에만 부병제가 적용되고 절충부가 없는 곳은 전혀 상관이 없었다. 이렇게 형평의 원칙에도 어긋났지만 당대이전 수 나라는 이 제도를 통하여 국력을 크게 신장할 수 있었다고 한다.

 

당의 부병제를 좀더 들여다 보면 부의 병력은 상부 1,000 명, 중부 800명, 하부 600명이 표준이고, 상부에서는 화(火) 10명, 대(隊) 50명, 국(國) 200명, 부(府) 1,000명의 인원으로 부대를 구성하였다. 병사는 평시엔 가사에 종사하였고, 농한기에는 절충부(府)에 소집되어 훈련을 받았다가, 3년에 한번씩 1,2개월 동안 교대로 수도의 경비에 임하는데 이를 번상(番上)이라고 했다. 당번이라는 뜻이다.

 

30년간의 병역의무 기간 중 꼭 한번은, 변경의 진(鎭)이나 수(戍)에 나가 경비를 맡아야 했고 기간은 3년이었다. 이러한 체제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균전제라는 토지제도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러다가 당의 균전제가 무너짐과 때를 같이 하여 부병제도 무력해졌다. 한편 중앙 및 변경의 군사력 강화의 필요에 따라 병력의 공급원을 부자는 물론 가난한 백성들까지를 용병으로 뽑았다.

 

이것을 모병제라 한다. 그 결과 병사의 질이 저하되고, 또 안사의 난 이후에는 지방 군벌의 사병으로 화하여 번진 세력 출현의 한 요인이 되었고 이 번진에 의해서 당나라도 무너졌다. 여기서 번진이란 절도사를 말한다.

 

라. 당의 위기

 

(1) 武韋(무위)의 화

 

중국사상 단 한 사람의 여황제인 측천무후(則天武后). 성은 무(武) 이름은 조, 공부상서를 지낸 무사곽의 2녀이며, 어머니 양씨는 수의 황족이 였다. 빼어난 미모를 지닌 그녀는 14살에 궁궐로 들어가, 태종으로부터 무미(武 媚)라는 이름을 받고 후궁이 되었다.

 

사람들은 그녀를 미랑(媚郞)이라고 불렀다. 태종이 죽자(649) 이 젊은 미비(媚妃)는 다른 후궁들과 함께 머리를 깎고, 감업사의 니승(尼僧)이 되어 평생토록 죽은 황제의 명복을 빌어야 하는 신세가 되었다. 태자 치가 제3대 고종황제가 되어 부황의 명복을 빌기 위해 감업사에 왔을 때, 많은 후궁사이에서 미랑은 소리 높여 울면서 애련한 눈빛으로 고종의 마음을 흔들게 하는데 성공하였고, 환궁 후 고종은 이 아름다운 미비를 환속시켰다가 궁중으로 불려 들여 소의(昭義)로 삼았다. 일설에는 고종이 태자 시절부터 미랑과 밀애를 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아버지의 후궁을 그 아들이 다시 후궁으로 맞는다는 것은 한인(漢人)사회에서는 파렴치한 행동이다. 하여 황제가 죽으면 모든 후궁은 감업사로 보내어 머리를 갂고 여승으로 만들어 버린다. 그 이유은 아버지가 품었던 여인을 자식이 품는 파렴치를 없애자는 것이다. 하지만, 북방민족들에게는 일반적인 것으로 널리 통용되고 있었다. 고종의 총애를 받은 그녀는 천부적인 소질을 발휘하여, 자식을 낳지 못한 황후 왕씨와 고종의 총애를 받고 있던 숙비 소씨를 각본에 의해서 제거하고 드디어 황후가 되었다.

 

이 때가 영휘 9년(655)으로서 고종은 28세, 무황후는 33세 였다. 연하의 남편을 가진 여인의 질투는 참으로 무서운 것으로서, 무후에 반대했다가는, 대신도 원로도 추방되었으며, 전 황후 왕씨와 숙비 소씨도 서인으로 강등되어 유폐되었다가 참혹한 죽음을 당했다.

 

고종은 지병인 간질병 때문에 정무를 제대로 볼 수 없어 그녀가 대신하는 경우가 잦았는데, 그때마다 훌륭하게 일 처리를 했기 때문에 고종은 660년 정무를 아예 그녀에게 위임해버렸다. 이 시기에 백제가 멸망되었고(660) 고구려까지 무너뜨려 양제나 태종도 이루지 못한 숙원 사업인 한반도 정복을 달성했다(668)

 

이로써 당의 영토는 건국 이후 최대로 확장되었고, 그녀의 야심은 스스로 황제가 되고자 하여, 황태자 홍(弘)은 그녀가 낳은 첫 번째 아들이었으나 독살하였고 뒤를 이어 둘째 아들 현(賢)이 황태자가 되었으나 그 역시 얼마 가지 않아 모반 혐의를 쓰고 자리에서 쫓겨나 자결하도록 하였다.

 

683년 고종이 죽자 셋째 아들 현(顯)이 즉위하여 중종이 되었으나, 즉위 한지 1년만에 쫓겨나고, 그리하여 690년 측천무후는 마침내 황제로 즉위하고 나라 이름을 주(周), 뤄양을 신도(神都)라 하여 사실상의 수도로 삼았다. 넷째 아들 단(旦)을 황태자로 정하여 성을 무씨로 고쳤고, 또 측천 문자라는 새 문자 20자를 제정했다.

 

무후가 반대세력을 몰아내고 권력을 장악하기 위해서 취한 방법이 밀고(密告)였는데 명목상으로는 민중의 소리를 직접 듣는다 하여, 구리상자를 만들어 궁중의 일정한 장소에 비치하고, 밀고자에게는 응분의 보상을 해주었다. 그 보상으로 관리로 임명되면 이들을 혹리(酷吏)라고 불렀다.

 

이 혹리들을 전국에 배치하여 그의 귀가되고 손발이 되게하어 과감한 정치개혁을 단행할 수 있었다. 과감한 이런 정치개혁을 많은 역사의 기록은 측천무후를 포학한 여군주로 표현하는데 서슴치 않았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권력이동이라는 지배층 내부의 파란일 뿐 일반 민중의 생활에는 피해를 준 것이 없었고, 골치 아픈 훈신(勳臣)들을 제거해 이들이 가졌던 기득권을 박탈하므로써 오히려 이 시대는 평화가 유지되고, 도교를 억압하고 불교를 장려하였으며, 그 흔하던 농민봉기가 그의 치세 50년간 한번도 없었다는 진기록도 세웠다. 목적을 이루고 나면 측근이건 혹리건 과감하게 도태시키는 그녀의 치밀함이 오히려 태평성대를 구가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이런 것들이 비옥한 토양이 되어, 이어 등장하는 개원(開元) 치(治)라고 부르는 성당(盛唐)의 문화가 뿌리를 내릴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되었다. 조선개국 과정에서 태종의 신문고(申聞鼓)가 이를 흉내 낸 밀고 제도는 아닐까? 그 역시 수많은 사람은 죽였지만 유능한 군주로 알려져 있다.

 

권력의 화신이 된 무후가 고종의 총애를 받고 정권을 장악하기 위해서 손에 피를 묻히고 한 이후, 자신이 권력에 포로가 되어 도저히 빠져 나올 수 없게 만들었다. 그것은 권력에서 밀리는 날이 곧 자신의 파멸과 연결되기 때문에 조금만 의심이 가도 밀고를 빌려서 제거하였으며 자신도 언제나 불안한 가운데 하루하루를 보내야만 했다. 고종은 연호를 열 세 번이나 바꾸었고, 자신의 치세 15년간 무려 열 여섯 번이나 연호를 바꾼 것도 이런 것과 무관하지 않다.

 

그러나 예기치 못했던 일들 가운데 하나가 개국공신 집단을 제거하기 위해 유명 무실 하던 과거 제도를 공정하게 실시하여 실력 있는 신인들을 대거 발탁하고, 이들에게만은 일반인들의 출입이 허용되지 않던 장안성 북문의 출입을 허용하는 등 우대를 하여, 이른바 북문지사(北門之士)가 배출되었는데, 이를 두고 후세 사가들은 인재를 알아보는 눈에서만은 무후를 '일급의 감식가'로 평가하였다.

 

705년 측천무후가 병들어 눕자, 80세의 재상 장간지가 쿠데타를 일으켜 쫓겨난 중종을 다시 황제로 추대하고 당 왕조를 재건하였고, 그해 겨울 측천무후는 82세를 일기로 생을 마쳤다. 무후가 죽은 뒤 이번엔 중종 비 위씨(韋氏)가 제2의 측천무후를 꿈꾸며 고기 만두에 독을 넣어 남편 중종을 살해하고 정권을 잡고자 하였다.

 

그러나 위씨의 야심은 불과 며칠 가지 못하고 단(예종)의 셋째 아들 이융기(李隆基)에 의해 무산 되였다. 23세의 이융기는 중종이 죽은 지 18일 만에 쿠데타를 일으켜 위씨 일족을 주살하고 자신의 아버지를 예종으로 옹립하고 자신은 황태자가 되었다가, 712년 예종의 뒤를 이어 황제 자리에 오르니 이가 바로 안록산과 양귀비 등과 함께 인구에 회자(膾炙)되는 현종이다.

 

마. 당의 중흥 - 개원(開元)의 치(治)

 

(1) 백락천의 장한가

 

당(唐)나라 현종(玄宗)이 다스린 개원연간 30년과 천보연간 15년을 합한 45년간의 치세(713∼756) 기간을 그 연호를 따서 개원천보시대(開元天寶時代)라고 한다.

 

그의 아버지 예종은 측천무후(則天武后)의 넷 째 아들 단(旦)으로서, 측천무후가 황제가 되었을 때 황태자가 되어, 성을 武씨로 바꾸기도 하였고, 그의 형인 중종이 복위되자 한가로이 지내다가,중종이 독살되자 그의 셋 째 아들 융기가 쿠데타를 일으켜 황제가 되었다가 곧 융기에게 양위하니. 이 융기가 현종이다.

 

현종은 이후의 여인(女人) 정치를 배격하고 내란을 평정한 다음, 요숭(姚崇)·송경(宋璟)·장설(張說) 등 현명한 재상의 보필을 받아 괄호(括戶)를 실시하여 담세호구(擔稅戶口)를 조사하고, 부병제(府兵制)의 붕괴에 대처하여 중앙군제를 재건하였다.

 

또한 절도사(節度使)에 의한 변방방어체제를 공고히 하였을 뿐만 아니라, 한림원(翰林院)·집현원(集賢院) 등과 같은 학술연구기관을 정비하여 문운(文運)의 발전을 도모하여, 이 시기에 왕유(王維)·이백(李白)·백거이(白居易) 등의 유명한 시인이 배출되었다.

 

따라서 이 시기가 당나라의 최대 번성기인 동시에 중국 고대문화의 전성기였으나, 만년에 정치를 게을리 한 결과, 사회적 모순이 드러나고 마침내 안사(安史)의 난이 일어났다.

 

중국 역사상 가장 전성기였다는 이 시기에 최대의 러브스토리가 등장하게 된 것도 우연의 일치일까? 아니면 백거이(락천:772∼846)의 장한가(長恨歌)가 그렇게 만든 연출일까? 백낙천(白樂天)이 젊은 시절에 지은 이 서사적인 장가(長歌)는, 칠언(七言)이어서 유창하고 아름다운 가락이 감겨 들며, 행마다 리듬이 박동하고 때로는 각운(脚韻)을 바꾸어 가면서 장장 120행에 걸쳐 선율이 흐른다.

 

제재는 현종과 양귀비(楊貴妃)의 비련(悲戀)에 관한 것이며, 제l장은, 권력의 정상에 있는 황제와 절세가인 양귀비의 만남과, 양귀비에게 쏟는 현종의 지극한 애정 등을 노래하였고, 제2장에서는, 안녹산(安祿山)의 난으로 몽진하는 길에, 양귀비를 어쩌다 죽게 한 뉘우침과 외로움으로 가슴이 찢어지는 황제의 모습을 그렸으며,

 

제3장은, 환도 후 양귀비의 생각만으로 지새는 황제를 묘사하고, 제4장에서는, 도사의 환술(幻術)로 양귀비의 영혼을 찾아, 미래에서의 사랑의 맹세를 확인하게 되었으나, 천상(天上)과 인계(人界)의 단절 때문에 살아 있는 한 되씹어야 할 뼈저린 한탄이 길게 여운을 끌고 있다.(위의 그림은 양귀비가 환관 고력사의 부축을 받으며 말에 오르는 모습. 맞은 편 오른쪽 말타고 있는 것이 현종)

 

현종은 그가 사랑하던 무혜비가 사망한 개원 25년(737) 이후, 정사(政事)에 뜻을 잃고 고뇌에 빠져 있을 때, 궁중에서는 황제의 마음에 들기 위해 갖은 교태와 추파를 던진 3천 궁녀도 마다하고, 화조사(花鳥使)를 전국에 파견하여 미인을 물색하게 하였다.

 

그러나 정작 그 넓은 당나라에서 마음에 드는 미인은 바로 코 앞에 있었으니 그가 바로 후일 귀비 양씨로서, 두 사람이 처음 만났을 때, 현종의 나이 57세 귀비(貴妃) 양씨는 22세, 어디로 보나 이상적인 만남이라고는 할 수 없다. 거기에 더해서 옥환(玉環)이라는 이름을 가진 귀비 양씨는 스촨성(四川)의 사호(司戶)를 지낸 양현임의 딸로서, 그 미모가 출중해 17세 때 현종이 가장 사랑했고, 한 때 태자로까지 거론했던 무혜비와의 사이에 난 18황자 수(壽)왕 이모(李瑁)의 비(妃)가 되어 있었다(736).

 

현종이 이를 취한 것은 유부녀를, 그것도 자기가 가장 사랑했던 여인과의 사이에 난 아들의 아내, 즉 며느리를 아내로 맞이했다는 것인데, 아무리 유목민의 피가 흐르고 있다고 해도 이것은 비극이라고 밖에 볼 수 없다. 그의 조부 고종은 5년 연상의 아버지 후궁(측천무후)을 취하여 화를 자초하였고, 그 손자 현종은 35년 연하의 며느리를 후궁으로 마지하여 망국의 길을 재촉하였다면 논리의 비약일까? 이런 것을 일컬어 콩가루 집안이라고 하는데, 콩가루는 접착성이 약해서 반죽이 안되는 특성이 있다. 제가끔 논다는 뜻이다.

 

이에 현종도 일말의 양심은 있었든지 바로 궁궐로 불러 들이지 않고, 두 사람을 강제로 이혼 시켜 양씨는 도관(道觀)에 보내어 여도사가 되게 했고, 아들 수왕에게는 위조훈의 딸을 비(妃)로 삼게 하였다. 그러다가 천보 3년(744)에 양씨를 몰래 궁중에 불러 들여 머물게 하였고, 다음해 7월에 정식으로 그를 귀비로 임명하였다.

 

이 때 현종은 62세, 양귀비는 27세, 그로부터 10년 후, 안사의 난이 일어나자 피난길에 오른 현종과 양귀비는, 병사들이 양국충을 타살하고 양귀비를 내놓으라는 열화 같은 요구를 거절할 수 없어서 마외라는 역에서 환관 고력사가 명주로 목 졸라 양귀비를 죽이니(755), 이 때 그의 나이 38세, 현종이 73세였다.

 

35년 연하의 여인과 대로망을 펼쳤던 현종도 태자에게 양위하고(756) 장안에 머물다가 762년 파란 만장한 생을 마감했다. 구당서에는 양귀비를 자질풍염(資質豊艶)이라고 기술하고 있는데, 풍염이란 넉넉한 몸매에 윤기 흐르는 육체로서, 어린이로부터 어른에 이르기 까지 살찌는 공포(?)에 시달려야 하는, 오늘날의 기준으로 본다면 결코 미인은 아닌 것 같고, 장수(長壽)를 누린 황제가 여색을 탐익한 것은 이상할 것도 없지만, 백낙천이라는 대 시인이 쓴 장한가(長恨歌)가 두 사람을 더욱 유명하게 만들었다고 생각하면 크게 틀리지는 않을 것 같다.

 

(2) 개원의 치

 

현종의 치세 45년간(712~756), 초기 30년은 개원(開元), 후기 15년을 천보(天寶)라는 연호를 사용하였는데, 개원 년 간은 이른바 盛唐의 시기로서 "개원의 치"라 하여 태종의 "정관의 치"에 버금 가는 업적을 남겼다. 이야기를 마무리하기 위해서 개원 초기로 돌아가 보면, 측천무후가 치세한 50년간의 세월은 당 황실에도 많은 변화를 일으켜, 武씨와 당 황실 성인 李씨 간에는 혼인관계로 서로 얽혀 있었고, 노재상 장간지가 쿠데타를 일으켜 중종을 복위 시켰으나, 무씨들의 세력은 여전히 강했다.

 

그러다가 측천무후가 82세로 죽고 나서, 그의 친정 동생들과 중종의 비인 위후와 딸 안락공주는 지아비와 친부가 되는 중종을 독살하고 제 2의 무후를 꿈꾸고 있었다. 이에 무후의 손자가 되는 융기는 군사를 동원해서 궁중에 난입, 이들을 죽이고 그의 아버지를 예종으로 즉위시켰다.

그러자 이번에는 무후의 딸이며, 융기의 고모가 되는 태평공주가 권력을 잡고 사사건건 간섭을 하게 되자 예종은 태자 융기에게 양위함으로써, 그는 28세의 청년황제가 되어 당의 중흥을 담당하게 되었다(712)

 

황제가 된 현종은 태평공주와 무후, 위후의 잔존세력을 일소하고 연호를 開元으로 하여 초기 20년간 괄목할만한 성과를 높였는데, 이 시기에 균전제가 무너지기 시작하니, 균전제를 중심으로 톱니바퀴처럼 돌아 가던, 부병제가 무너지고 조 용 조의 세법도 흔들리게 되었다.

 

이에 현종은 요숭(姚崇)·송경(宋璟)·장설(張說) 등 현명한 재상의 보필을 받아 괄호(括戶)를 실시하여 담세호구(擔稅戶口)를 조사하고, 부병제(府兵制)의 붕괴에 대처하여 중앙군제를 재건하였다. 또한 절도사(節度使)에 의한 변방방어체제를 공고히 하였을 뿐만 아니라, 한림원(翰林院)·집현원(集賢院) 등과 같은 학술연구기관을 정비하여 문운(文運)의 발전시키니, 왕유(王維)·이백(李白)·백거이(白居易) 등 유명한 시인들이 이 시기에 배출되었다는 것은 앞서 이야기 한 것과 같다.

 

그러나 황제라는 자리가 권력이 아니고, 직업적인 측면에서 본다면 매우 고달픈 자리로서, 20년 이상을 지나면, 교만 방자해 지고, 장기집권의 폐단이 나타나게 된다. 여기에서 현종도 예외는 아니 여서 안사의 난(755~763)이 일어 나고, 쇠망의 길을 걷지만, 이 난 이후에도 당나라는 150년이라는 긴 세월을 이어갔다.

 

그것은 이전의 왕조와는 다른 튼튼한 재정의 바탕이 있었고, 종교나 학문에 대하여 가급적 간섭을 하지 않았으며, 시박사를 설치하고 관세만 징수하였을 뿐 외국인의 출입을 통제하지 않았던 일련의 정책들이 뒤를 바쳐주었기 때문이다.습니다. 이런 것을 두고 당의 사회가 국제적이었고 그 문화 역시 국제 문화의 성격을 강하게 드러내고 있다고 말한다.

 

바. 당의 쇠망

 

(1) 안사의난(安史의 亂)

 

안사의 난이란 절도사 안녹산(安祿山)과 그의 부장 사사명(史思明) 등이 일으킨 반란(755∼763)으로서, 난의 원인은 현종대에 이르러, 왕조의 기반이었던 자립 소농민 층이 와해되고 유민화 현상이 나타나는데서 시작되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현종은 토지와 유리된 도호(逃戶)를 조사하고, 전지(田地)와 재산에 대한 과세(課稅), 모병(募兵)의 조직화 등을 통하여 지배체제의 존속을 꾀하려 하였으나 측천무후(則天武后) 시대에 억압되었던 귀족들이 현종대에 들어와 세력을 잡았고, 관료층 중에서도 구래(舊來)의 문벌귀족들은 농업생산력의 발전, 대토지 소유제의 전개, 상업자본의 이용 등으로 새로 진출한 교양인이나 지주·상인층 출신의 능리(能吏)와 대결하여 정치는 복잡하게 만들어 갔다.

 

이러한 과정 중에 세력을 잡은 문벌·귀족 출신의 재상 이임보(李林甫) 등은 가렴주구(苛斂誅求)에 여념이 없었고, 세력 유지를 위해 변방 절도사로 이민족이나 평민 등도 등용시키게 되었다.

 

특히 징병제가 파탄된 후, 절도사들은 대량의 용병을 지휘하는 강력한 존재로 부상하였는데, 이런 과정에서 아버지가 사마르칸드인이고 어머니가 돌궐인 출신으로 알려진 안녹산은 9개국어를 유창하게 하는 실력을 배경으로 황실에 접근하여 군공을 세우고 15세 연하인 양귀비의 양자가 되어, 드디어는 유주(幽州)·평로(平盧)·하동(河東)의 절도사를 겸임할 정도로 세력이 막강하게 되었다.

 

현종 밑에서 재정을 장악한 양귀비의 일족인 재상 양국충(楊國忠)은 동북 국경 방비를 맡아 대병을 장악한 번장(蕃將) 안녹산과 대결하는 실력자로 등장하게 되었고, 양국충은 현종에게 안녹산이 모반하려 하므로 소환하도록 요구하였다.

 

이에 안록산은 양국충을 치라는 현종의 밀지를 받았다고 속이고,  755년(天寶 14) 11월, 거란(契丹)·철륵(鐵勒)등 이민족의 정예(精銳) 8,000여 기(騎)를 중심으로 한병(漢兵)·번병(蕃兵) 20만의 대군을 이끌고 간신 양국충 토벌을 구실로 범양(范陽:北京)에서 거병하여 뤄양으로 진격하였다.

 

이듬해 6월, 퉁관이 함락되고(이 때 고구려 출신 고선지가 패전의 책임을 지고 처형됨), 반군은 수도 장안으로 들어오고, 이에 현종은 서쪽으로 피신하였는데, 기아에 지친 병사들의 압력으로 산시성(陝西省) 마외역(馬嵬驛)에서 양국충은 살해되고, 양귀비가 죽게 되었다. 안녹산은 실명과 등창으로 건강이 악화된 데다 횡포해져 757년(至德 2) l월, 아들 경서(慶緖)에게 암살되고, 경서는 범양의 본거지를 사사명에게 지키도록 하였다.

 

경서가 아버지 안록산을 죽인 것은 첩의 자식을 후계자로 삼으려고 하였고 자신을 죽일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이라고 한다. 현종으로부터 양위받아 황제가 된 숙종은 태자 광평왕(廣平王:훗날의 代宗)을 병마원수(兵馬元帥)로, 곽자의를 부원수(副元帥)에 임명하여 삭방군(朔方軍)과 위구르(回紇) 원군의 도움으로 장안과 뤄양 탈환에 성공하였다.

 

이번에는 안녹산의 부하 사사명이 다시 반란을 일으켜(758) 스스로 제위에 올라, 안경서를 죽이고 다시 뤄양을 점령하였다. 그러나 761년(上元 2) 2월, 사사명도 그 아들 조의(朝義)에게 살해되어 반란군은 그의 지휘하에 들어갔으나, 조의는 당나라를 도운 위구르군의 공격과 범양절도사 이회선(李懷仙)에 의하여 타도되니(763) 9년 여에 걸친 대란은 종결되었다.

 

이민족을 중심으로 한 반란군과, 이를 진압하기 위해서 원병으로 왔던 위구르인 등에 의하여 뤄양과 장안의 두 도시는 황폐되고, 도시 건축물과 문화재는 대부분 회신(灰燼)되어 구문화의 전통과, 문화 담당자였던 귀족들은 괴멸적 타격을 입게 되었다. 난의 평정을 위해 지방에 파견된 절도사가 병권을 장악하자 종래의 중앙집권적 지배체제는 무너져 군사적 지방분권화 현상이 강화되고, 특히 화북지방은 오랫동안 반독립적 상태가 지속되게 되었다.

 

군비조달을 위해 백성에 대한 수탈은 더욱 심해졌고, 민간의 생필품인 소금의 전매(鹽專賣)가 급증되어, 겨우 명맥을 유지하던 당 왕조 전기의 체제가 붕괴되면서, 균전제를 바탕으로 한 조용조 세법은 양세법(兩稅法)으로 전환되었다. 중앙집권체제의 약화로 귀족세력은 타격을 받고 토호(土豪)와 상인들이 번진(藩鎭) 무력세력과 결합하여 정치·경제적 성장을 달성하게 되자 중국 고대의 율령 지배 체제와 이에 수반되는 문화는 근본적으로 변질되지 않을 수 없었다.

 

(2) 당의 변화

 

절도사(節度使)
당, 5대 때의 군직으로 번진이라고도 하며, 8세기 초 부병제가 이완되자 이민족의 침입을 막기 위해 국경의 요지에 배치한 모병 군단의 사령관을 절도사라 했다. 절도사는 민정, 군정, 재정의 3권을 장악하여 강대한 권력을 발휘하였는데, 결국 당나라는 돌궐 사타부 출신의 주전충에게 멸망하였다(908)

 

양세법(兩稅法)
8세기 말 덕종 때 양염의 건의에 따라 시행한 새로운 세법으로 조·용·조 대신에 토지 면적에 따라 지세를, 재산의 다과에 따라 호세를 징수하였는데, 여름과 가을 두 차례에 걸쳐 징수하였으므로 양세법이라 하였다. 그러나 황실과 지방관아에 필요한 경비를 산출해서, 이를 주민들에게 할당(割當)하여 징수하였는데, 이것을 양출계입(量出計入)이라고 했다.

 

주호, 객호 모두 현 거주지에서 호적을 올리고 조세는 정남, 중남의 차 없이 빈부를 기준으로 했으며, 행상인도 주현에서 1/30 세를 받고 정착인과 같게 하여 요행으로 얻는 이익을 없앴고, 이로써 조·용·조와 잡요는 사라지게 되어 명나라 때 일조편법이 나올 때 까지 중국의 세제가 되었다.

 

(3) 황소(黃巢)의 난(875∼884)

 

당 말 황소에 의하여 지도된 농민 반란(875∼884)으로서, 당 왕조 멸망의 직접 원인을 제공하였다.

 

황소는 산동의 상인으로 소금의 밀매에 의하여 큰 재산을 모으고 다수의 무뢰한을 양성하여 도당을 만들었다가,

 

당의 사회가 문란해지고 농촌은 피폐하여 유망민이 늘어나고 군도(群盜)가 활개 치는 세상이 되자, 하북의 왕선지(王仙芝)와 합세하여 난을 일으키고(875)

 

왕선지의 사후 그 잔당을 모아 사천을 제외한 중국 전토를 전전하는 큰 세력이 되었다.

 

드디어 880년 수도 장안에 들어가 스스로 정권을 세우고 국호를 대제(大齊), 연호를 금통(金統)이라 부르고 항복한 관리도 기용하여 통치를 굳히려고 하였다.

 

그러나 관중(關中)의 황소정권은 경제적 기반이 없어서 당나라 왕조를 돕는 투르크계 이극용(李克用) 등 토벌군에게 격파되어 3년 후에는 장안으로부터 동방으로 퇴각하여 이듬해 산둥의 타이산산(泰山) 부근에서 자결하였다.

 

그러나 이 난은 고대적인 당나라를 근본적으로 붕괴시키는 계기가 되었다.(오른 쪽 그림은 황소가 군중들의 환영을 받으며 위풍당당하게 나타내고 있다)

 

황소가 암상(暗商)으로서 거부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안사의 난 이후 당나라에서는 재정을 보충하기 위해서 가장 손쉬운 방법인 소금의 전매제도를 실시 한데서부터 시작하였다.

 

더구나 세율이 높아지면 소금 값이 오르고, 그러면 암상은 더욱 기승을 부리게 되는 악순환이 계속되었고, 이래서 거부가 된 황소는 자신의 비리를 정당화하기 위해서 난을 일으켰다.

 

이 난이 일어나자 13살에 당나라에 건너가 외국인에게 보이는 빈공과에 합격한 신라의 최치원은 여러 관직을 맡았다가, 이 때를 당하여 고변의 종사관으로서 "토황소격문"을 지어 문장가로서도 이름을 중국 땅에 떨쳤다.

 

(4) 절도사 주전충(朱全忠/852~912)과 당의 멸망

 

황소(黃巢)의 난에 참가하여 그 부장(部將)이 되었으나, 882년 형세의 불리함을 간파하고 관군에 항복하여 당의 희종(僖宗)으로부터 전충(全忠)이라는 이름을 하사받았고, 그 뒤 황소의 잔당과 그 밖의 군웅을 평정하여 그 공으로 양왕(梁王)에 봉해지고 각지의 절도사를 겸하는 등 화북 제일의 실력자가 되었다가,

 

당의 소종(昭宗)을 살해한 뒤 애제(哀帝)를 세우고, 다시 907년에 애제로부터 제위를 양수(讓受)받아 양(梁)나라를 세우고 카이펑(開封)을 수도로 정함으로써 당 왕조를 멸망시켰다.

 

그러나 그의 세력범위는 화북 일부에 한정되었고, 이후 50년에 걸친 오대십국(五代十國)의 분쟁이 시작되는 계기가 되었으며, 그도 즉위 후 6년 만에 그의 아들 주우규(朱友珪)에게 살해되었다.

 

당이 망하자 지금 까지 그 영향하에 있었던 동 아시아의 질서가 새로이 개편되면서 한반도에서는 통일신라가 빛을 잃고, 후삼국시대의 혼란 기를 거쳐 고려의 통일왕조가 다시 등장하였다(93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