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수중방어, 그리고 그 한계
배를 가라앉히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함체의 수선 아랫부분에 구멍을 내서 배의 예비부력을 초과하는 물을 집어넣는 방법입니다. 수선하부에 피해를 입힐 수 있는 공격의 형태는..
① 함체 측면에서 폭발하는 어뢰의 폭발압력 & 충격파
② 폭발한 어뢰의 탄두나 어뢰에 의해 찢겨진 함체 등의 파편
③ 현측(측면) 장갑대 이하에 명중하는 포탄 (수중탄)
④ 배의 용골 밑부분에서 폭발하는 어뢰나 기뢰, 폭탄 등
[어뢰의 충격에 의해 용골이 꺾인 표적함]
①~③번과 같은 경우는 배 아랫부분에까지 장갑판을 확장하면 해결할 수 있는 문제처럼 보이지만, 배의 무게와 부력제한 등의 이유로 그런 해결책은 불가능하고 방뢰격벽 설치나 구획의 세분화, 벌지 부착, 어뢰방어구획 내부에 액체를 채우는 등의 방법으로 피해를 “최소화” 하는 것 밖에는 방법이 없습니다. ④번과 같은 경우는 문제가 더 심각해서 피해가 단지 침수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배의 구조 및 기관, 탄약고의 기계류 등에도 피해를 입힐 수 있지요.
요약하자면, 두꺼운 장갑을 설치하는 것만으로 피해를 0으로 만들 수 있는 포, 폭탄과는 달리 수중방어는 피해를 줄이고 가능한한 오랫동안 버티게 하는 정도까지 밖에는 발전하지 못했다고 할 수 있겠죠. 하기야 2차대전으로부터 수십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배의 수중방어에 대한 완벽한 해결책은 나와있지 않으며 (SF영화의 우주선처럼 함체에 난 구멍을 자동으로 밀폐하고 침입한 해수를 완벽하게 배수하는 장치가 발명되지 않는 이상), 과거의 전함들이 어뢰에 취약했던 것도 어찌 보면 창의 발달에 비해 방패는 그만큼의 수준을 따라잡지 못했다”고 볼 수도 있을테죠.
2. 수중방어 시스템의 역사 - 이론정립의 시기
위에서 언급한 수단의 일환으로 어뢰, 기뢰, 수중탄 등이 발달해왔고 군함의 수중방어 시스템도 그에 발맞춰 서서히 진보를 이뤄오기 시작했습니다. 전함 설계에 있어서 본격적인 수중방어 시스템이 고려되기 시작한 것은 19세기말에 후기형 전노급전함이 등장한 즈음이며, 이것은 당시 어뢰의 기술수준이 실용화 단계에 도달한 것과 맥락을 같이합니다. 당시 채택된 어뢰방어 시스템은 용골 부근에 설치된 2중저(2중으로 된 배 바닥)를 현측장갑대의 최하부에까지 연장하고 배의 측면부분 가장 바깥쪽에 석탄창고를 배치하는 것이었죠. 만약에 어뢰의 폭발력이 2중저를 관통하더라도 최외곽에 배치된 석탄이 어뢰의 충격을 조금이나마 상쇄시키는 동시에 침수를 석탄창고 내에 한정시킬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던 것입니다.
[(좌) 전노급전함 로드넬슨의 장갑구조 / (우) 군함의 석탄 보일러와 화부]
문제는, 석탄창고 내의 석탄은 항해가 진행됨에 따라 점점 양이 줄어들고 그에 따라 어뢰방어시스템으로서의 효율도 줄어든다는 것이었습니다. 게다가 석탄 창고 안에 가득한 석탄 분진들은 어뢰 피격시 2차 폭발의 원인이 될 수도 있었죠.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결점은 석탄창고와 함 내부 사이에 통로를 배치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석탄은 고체연료입니다. 따라서 보일러에서 소모되는 석탄을 보충하기 위해서는 사람이 일일이 삽으로 퍼나르는 수밖에 없고, 석탄 창고에 사람이 드나들 수 있는 출입문이 반드시 필요하죠. 일단 석탄창고에 어뢰가 명중했을 경우 밀려드는 해수는 강한 수압에 의해 창고의 출입문을 통해 쉽사리 함내에 들어왔고, 일단 한번 침수가 시작된 뒤에는 창고 출입문에 아무리 좋은 수밀장치가 되어 있더라도 문을 폐쇄하는 것은 쉽지 않았습니다. 혹은 창고벽 자체가 어뢰의 폭발력을 견디지 못하고 붕괴하는 경우도 있었죠.
때문에 설계자들은 점차 석탄연료가 수중방어에 장애물이 된다는 사실을 깨닫고 보다 다루기 쉬운 석유연료에 관심을 돌리기 시작했습니다. 또한 수중방어 시스템 설계에 대한 체계도 잡히기 시작하여 ①어뢰의 폭발력, ②어뢰의 탄두나 선체의 파편 등에 의한 피해, ③선체 내부의 침수방지 대책 등을 고려하게 되었습니다. 또 한편으로는 연구가 진전됨에 따라 각각의 피해 형태에 대한 최선의 대책이 어떤 식으로 이뤄져야 할지도 정립되었죠.
① 어뢰의 폭발력에 대한 가장 최선의 대책은 충분한 폭의 공간을 두는 것. (*주 : 다른 3가지 요소보다도 이것이 수중방어에서 가장 중요합니다)
② 충분한 두께의 방뢰격벽을 설치하면 파편으로 인한 피해나 어뢰의 폭발력을 견뎌낼 수 있음.
③ 함체는 수중폭발에 의해 찢기더라도 가급적 파편을 덜 발생시키도록 탄성이 좋은 재질을 사용해야 함.
④ 파편과 어뢰의 폭발력은 액체층을 통과할 경우 운동에너지를 일부 상실함.
이러한 연구의 결과 최선의 수중방어 형태는 a)어뢰방어구획(함체 외판과 방뢰격벽 사이)의 폭을 넓히고 (*주 : 가장 중요함), b)방뢰격벽의 두께를 늘리며, c)어뢰방어구획 내부에 빈 공간과 물, 중유 등의 액체탱크를 겸비한 것이 되었습니다.
이외에도 배 외곽에 설치하는 수중방어 시스템으로써 “어뢰방어망” 이라는 것이 있었지만 이것은 항해중에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항만 내에 정박할 때 사용하는 것이었고 어뢰기술의 발달에 따라 효용성이 떨어져 1차대전 시기에는 거의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전에 쓴 글 「어뢰방어망이란 무엇인가?」를 참조.)
3. 수중방어 시스템의 역사 - 1차대전 이후부터 2차대전 시기까지
1차대전 기간동안 각국의 전함들은 기뢰나 어뢰 등 다양한 형태의 수중 피해를 겪었고 그 과정에서 이제까지 완벽한 것으로 여겨졌던 기존 수중방어 시스템에도 몇 가지 문제점이 발견되었습니다. 이를테면 어뢰의 폭발력을 상쇄하기 위해 최외곽에 빈 공간을 둔 것은, 그 공간에 구멍이 뚫릴 경우 급격한 침수로 이어져 배의 경사가 심해지는 결과를 낳았죠. 혹은 애초에 상정했던 것보다 훨씬 어뢰나 포탄의 폭발력이 강하여 수중방어 시스템이 그것을 다 견뎌내지 못한 경우도 있었던 것입니다.
[벌지 설치의 예 : HMS 레나운]
이에 대해 가장 손쉬운 대책으로서 등장한 것이 “벌지(bulge)"입니다. 벌지란 선체 외부에 증설된 일종의 완충구역으로써 배에 추가적인 예비부력을 제공하고 위의 도면에서 보이듯 어뢰방어구획의 폭을 넓히는 효과가 있습니다. 물론 벌지의 부착은 함폭을 넓게 하여 최대속도를 줄이는 단점이 있으나, 대대적인 재건조를 거치지 않고서도 비교적 간단히 수중방어력을 증가시킬 수 있었으므로 구형함들의 근대화 개장시 널리 이용되었죠. 그 외에 신조함들의 경우, 각국 별로 다양한 형태의 수중방어 시스템을 모색하였는데 이들중 어떤 것은 성공적이었지만 그렇지 못한 것들도 있었습니다.
1915년, 미국은 테네시급 전함에 “5층 방어 구조”라는 것을 도입했습니다. 이것은 어뢰방어구획을 탄성이 높은 격벽에 의해 5개의 구획으로 나눈 후 외곽의 2개는 빈 공간으로 남겨두고 안쪽의 3개에는 액체를 채우는 방식이었죠. 또한 각각의 격벽은 폭발력에 의해 붕괴되어도 배의 구조나 다음 격벽에 영향을 미치지 않도록 설계되어 있었습니다. 선체 외판에 충돌하여 폭발한 어뢰는 가장 안쪽의 방뢰격벽에 도달할 때까지 적어도 4개의 격벽과 3개의 액체층을 통과해야 하며 이 과정에서 파편의 대부분이 운동에너지를 상실하고 어뢰의 폭발력도 어느 정도 감소할 것으로 예상되었죠.
[(좌) BB-49의 5층 방어구조 / (우) 웨스트 버지니아의 진주만 공습 피해상황]
진주만 기습 당시 이러한 방식이 적용돼있던 전함은 테네시급 2척과 콜로라도급 2척이었는데, 이들중 어뢰를 맞은 것은 캘리포니아와 웨스트 버지니아였습니다. 이들 2척은 모두 2~9발까지의 어뢰를 맞고 격침되었으나 이후의 피해조사에 따르면 어뢰들은 수중방어 시스템을 완벽히 관통하지는 못했습니다. 문제는 오히려 예상하지 못했던 곳(어뢰의 폭발에 의해 현측장갑 최하단부에 균열이 생기고 그곳으로 침수가 시작됨)에 있었죠. 9발을 맞은 웨스트 버지니아는 그렇다쳐도 캘리포니아의 경우는 만약 당시 상황이 기습이 아닌 정상적인 전투태세였다면 응급수리반의 조치에 의해 침몰에까지 이르진 않았을 것이라는 평가가 대부분입니다.
영국의 경우 1917년에 건조된 리벤지급에서 수중방어구획 외곽에 펄프 및 각종 방수 재질로 이뤄진 파이프 등을 충진하는 방식을 도입했으나 당초 예비부력을 제공할 것으로 예상됐던 펄프가 곧 습기를 머금고 무거워지거나 썩어버림으로써 이 방식을 포기하고 종래의 방식으로 되돌아 갔습니다. 이후 1922년의 넬슨급에서는 어뢰방어구획 내에 수평으로 나뉜 다층구조를 도입하고 현측장갑을 내부로 밀어넣음으로써 어뢰의 폭발력이 장갑판에 도달하기 이전에 다소 상쇄되도록 하였죠.
[각 전함들의 수중방어 시스템 : (좌) HMS 넬슨 / (우) 리토리오]
가장 참담한 실패 사례는 아마도 이탈리아의 경우일 것입니다. (*주 : 이제까지 이탈리아 식의 수중방어 시스템이 상당히 유효했다고 알고 있었으나 좀더 조사해봤더니 의외로 성능이 좋지 않더군요) 이탈리아는 구형전함들의 재건조 및 신형전함 리토리오급의 설계 시에 내부 벌지를 적용했는데, 이것은 어뢰방어구획 내에 다양한 크기의 수밀 파이프를 설치하여 어뢰가 선체 외판을 관통한 후 파이프에 부딪히면서 차례차례 폭발력이 감소하는 효과를 노린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원통형 구조는 필연적으로 접촉면의 형태가 일정해지지 않는다는 결점이 있었고(오목한 부분과 볼록한 부분이 생김), 어뢰의 폭발압력이 구조적으로 가장 취약한 오목한 부분에 집중되면서 파이프는 힘없이 붕괴되거나 혹은 오히려 폭발압력을 한곳에 더 집중시켜 주는 효과를 낳고 말았던 것이죠.
타란토 공습 당시 콘테 디 카보우르는 어뢰 1발에 격침되었고 카이오 듀일리오는 1발에 피격된 후 간신히 좌초하여 침몰을 면했습니다. 신형함들의 처지도 그다지 다르지 않아서 리토리오나 비토리오 베네토 또한 2~3발에 피격된 후 침몰 위기에 몰리거나 침몰 직전에 얕은 수심 때문에 살아남기도 했죠.
[각 전함들의 수중방어 시스템 : 미국과 일본]
가장 최후에 등장하는 방식은 미국의 사우스다코타, 아이오와 및 일본의 야마토급 등에서 채용된 경사장갑 형태입니다. 이들 세 전함들은 현측장갑이 20도의 경사를 이루고 있고 이것이 점점 두께가 얇아지면서 그대로 함저에까지 이어져서 현측 장갑이 방뢰격벽에 연속적으로 연결되는 방식을 채택하고 있죠. 이것은 어뢰 방어 외에도 수중탄 방어까지 겸하고 있으며 수중방어 시스템의 구조로서는 가장 완성된 형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게다가 야마토의 경우는 물론 탄약고 주변에만 해당하긴 하지만 함저에도 50~80mm의 장갑판을 설치하여 용골 부근에서 폭발하는 어뢰에도 대처하고 있죠.
물론 이들 방식에도 결점이 없진 않았습니다. 야마토급의 경우 현측장갑과 방뢰격벽으로 이어지는 부분의 접합이 부실해서 예정된 성능을 내지 못했다거나, 미국의 경우 격벽의 재질에 탄성이 지나치게 부족했다거나 하는 문제들도 있었죠.
4. 기타 요소들
이상과 같이 수중방어 시스템의 역사에 대해 알아봤습니다만, 사실 수중방어에 있어서 보다 더 중심이 되는 요소는 구획의 폭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시스템이 아무리 완벽하다 하더라도 어뢰방어구획의 폭이 좁으면 기능을 완전히 발휘할 수 없기 때문이죠. 이를테면 사우스다코타급의 경우 고속 발휘를 위해 폭을 충분히 넓힐 수 없어서 수중방어력은 그다지 좋지 않았다는 평가가 많고 반대로 프랑스의 리슐리외 같은 경우는 시스템적으로 별반 나은게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넓은 함폭 때문에 어뢰방어구획의 폭도 넓어서 상당히 양호한 수중방어력을 보여줬다고 하죠.
또한 수밀구획의 세분화 역시 수중방어력에 크게 작용했습니다. 구획을 세분화 할 경우(물론 1개 격실이 지나치게 작아질 정도로 많이 나눠도 역효과가 나긴 하지만) 1발의 어뢰에 피해를 입는 구획이 줄어들죠. 이 경우 기관의 배치가 자유로운 터보-일렉트릭 기관을 채택한 배들이 일반 증기터빈을 채택한 배들보다 훨씬 유리한 면이 있었습니다.
[참고문헌 / 자료 출처]
- T. Prusinowska, 『Pearl Harbor 1941』, Kampanie Lotnicze, 연도 미상
- http://www.navweaps.com/index_tech/tech-047.htm
- http://www.chuckhawks.com/index3.naval_military_history.htm
- http://www.dcfp.navy.mil/mc/museum/War_Damage/A374.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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