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해군이야기

응급수리 : 유형별 사례

구름위 2012. 12. 24. 0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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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전에서의 응급수리 사례 분석]

글 서두에서도 말했지만 함정이 설계된 만큼의 데미지 컨트롤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지는 전적으로 그 배를 운용하는 승조원이 배 자체가 지닌 능력을 얼마나 끌어내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과거 해전에서 나타나는 여러 사례에서 한 함정이 죽고 사는 것은 물론 그 배 자체의 능력에도 원인이 있지만, 불가항력적이 아닌 상황에서도 배가 살아돌아오지 못했다면 그것은 수리반원의 대처가 미흡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번 장에서는 과거 각 해전에서 나타난 여러 피해 사례들에서 수리반원들의 조치가 함의 생사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방수대책의 실패 : 전함 공고의 최후

1944년 말의 레이테 작전에서 참담한 피해를 겪은 후 구리다 중장의 함대는 브루네이의 정박지로 귀환해있었습니다. 그러나 대다수 함정들의 상태는 좋지 않았고 특히나 야마토, 나가토, 공고 등 3척의 전함은 일본 본국에서 완전 수리를 받아야 할 처지에 놓여있었죠. 1944년 10월 16일에 드디어 야마토와 나가토, 공고의 전함 3척을 포함한 함대의 본토 귀환 명령이 떨어졌습니다. 그러나 이들 전함 3척을 호위하는 것은 겨우 제 2수뢰전대의 경순양함 1척과 구축함 4척, 제 31구축대의 구축함 2척뿐이었습니다.(그나마 제31 구축대는 대만까지만 동행하기로 되어있었죠)

본토 귀환함대는 10월 16일에 브루나이 정박지를 출항하여, 경순양함 야하기, 전함 공고·야마토·나가토의 순서로 단종진을 짜고 양측에 구축함을 배치한 형태로 18노트의 속력으로 북상했습니다. 그 사이 대만에서는 미군 항모 기동부대의 습격이 있었고 이것에 걸리지 않도록 함대를 약간 서쪽으로 향하여 대륙측에 가까운 항로를 선택했습니다. 그후 가장 경계해야할 바시 해협(대만과 필리핀 사이의 해협)을 태풍으로 파도가 거칠어졌을 때 돌파하였고, 이 시점에서 31구축대의 구축함 2척을 대만으로 분리했습니다. 함대는 이미 항해길의 절반을 지났고 가장 위험한 곳도 지나쳤으며, 본토에 도착하는 것도 하루 이틀의 문제인 지점에 도달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방심은 위기를 부른다고 했던지 함대는 바로 이 시점에서 미국 잠수함의 뇌격을 받았던 것입니다.

이때 일본함대의 대형은 경순양함&전함의 단종진 전방에 구축함 하마카제와 유키카제가 위치하고, 단종진 동쪽에는 이소카제와 우라카제가 위치한 형태였죠. 거친 바다 위로 부상한 채 추적을 계속하던 미 잠수함은 원래는 선두의 야하기를 겨누고 있었지만, 도중에 거대한 쪽으로 목표를 바꾸고 오전 2시 56분에 대열의 두번째인 공고에 대해 2,700m의 거리에서 심도 3m로 6발의 어뢰를 발사했습니다. 몇 분 뒤에 나머지 3개의 어뢰를 발사하였고 그것들은 60초 뒤에 명중했습니다.



공고에 명중한 것은 6발 중 2발로써(4발이라는 설도 있음), 1발은 좌현 함수부에 큰 구멍을 냈고 다른 1발은 2번 연돌 부근의 좌현 현측에 명중하여 6번과 8번 보일러실을 침수시켰습니다. 이때 어뢰 2발에 피격당했음에도 보일러는 아직 충분한 증기압을 제공하고 있었고 그녀는 16노트의 순항속도를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만, 함체는 좌현의 침수로 인해 서서히 기울기 시작하고 있었습니다. 함대 수뇌부도 공고에 대해서는 그다지 걱정하지 않았고, 얼마후엔 회피기동을 중지하고 다시 본래의 침로를 유지하였죠. 승조원들도 부포나 기관총으로 함 주변의 해상을 소사하다가 이윽고 활동을 중지하였고, 비번인 사람은 침대로, 당직근무중인 사람은 본래의 위치로 되돌아갔습니다.

그러나 거의 대부분의 승조원이 눈치채지 못했지만, 당시 함의 하부에서는 좌현 함수 부근과 기관실 부근의 침수가 멎지 않고 있었습니다. 게다가 지휘부가 공고의 피해를 대수롭지 않은 것으로 판단하여 16노트의 속도를 유지하라고 지시한 덕분에, 이미 피격으로 인해 약해져있던 함수의 격벽이 전방에서 밀려드는 수압을 견뎌내지 못하고 서서히 붕괴되기 시작한 상태였죠. 공고의 승무원들이 뭔가 이상하다고 느낀 것은 함이 좌현으로 14도까지 기울어진 때였고, 그제서야 함내의 응급 수리반이 침수구역으로 달려가 방수작업을 시작했습니다. 수리반이 보편을 설치하여 구멍을 막으려고 했지만 함수 수선부 하에 생긴 구멍은 수압으로 인해 점점 더 넓어져 있었기 때문에 이미 보편 정도로 막을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습니다. 공고는 일단 지그재그 항해를 멈추고 속도를 12노트까지 떨어뜨려 수압의 압력을 낮췄습니다만, 침수는 멎지 않았고 좌현으로의 경사도 느리지만 서서히 계속되고 있었습니다. 수리반이 정밀 조사를 실시한 결과, 최초 피해조사 때에 함정의 손상을 상당히 낙관했던 것과는 달리 약해진 격벽 틈새나 느슨해진 리벳 및 각종 파이프 연결부 등을 통해 물이 쉴새없이 스며들고 있는 것이 발견되었습니다. 공고가 건조된지도 이미 32년이 지난 시점이었으므로 어느 정도 리벳이 헐거워진다거나 수밀장치가 완벽히 작동하지 않는 부분 등이 있었던 것이죠.

이 시점에서(4시 40분) 공고를 함대로부터 분리시키고 이소카제와 하마카제의 호위하에 대만으로 회항하라는 지시가 내려왔습니다. 그러나 현재 공고의 속도는 간신히 10노트를 넘기는 상황이었고 이 속도로는 항구에 도착하기까지 6시간이나 걸린다는 상황이었죠. 게다가 이때 이미 함체의 경사는 40도를 넘고 있었으며 함수는 물에 잠겨 침로를 유지하기도 어려운 형편이었습니다. 함장 시마자키 제독은 수리반을 제외한 전 승조원을 우현으로 이동시켰고 오전 5시 18분에 공고는 드디어 항행불능 상태에 빠졌습니다. 공고가 너무 많은 침수를 당한데다 해면의 상태까지 거칠었던 이유로 구축함에 의한 예인도 불가능했으며 결국 시마자키 함장은 배를 포기하기로 결심했습니다. 곧바로 "전원 상갑판에 오르라"는 명령이 발령되었고, 경사가 60도에 달한 시점에서 "전원 퇴함"의 명령이 발령됐습니다.

그러나 오전 5시 24분, 승무원들이 한참 퇴함하고 있던 때에 갑자기 함의 앞부분이 붉게 빛나더니 곧바로 천지를 뒤흔드는 폭발과 함께 공고는 산산이 부서져버리고 말았습니다. 원인은 경사가 진행되면서, 1번 포탑의 탄약고에서 주포탄 몇 발이 흐트러지면서 충돌했고 곧 유폭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공고가 침몰한 곳은 대만의 기륭항 북서쪽 60해리의 지점이었고, 생존자는 포술장 이하 겨우 237명뿐이었습니다.

*사례 분석
공고의 사례는 "호미로 막을 것을 가래로 막는다"는 속담을 떠올리게 합니다. 최초 피해조사 단계에서 정확한 피해 정도를 파악했더라면 아마도 보편이나 격실 폐쇄 등의 간단한 방법으로 더 이상의 침수를 억제하거나 최소한 기륭항에 도착할 때까지 배가 버틸 수 있을 정도로 늦춰졌을 것입니다. 공고의 승조원들은 결코 숙련도가 부족한 상태는 아니었고 일단 조치가 결정되면 능숙하게 방수작업을 진행할 수 있었을테지만, 위의 사례에서 보듯 지휘부 이하 전 책임자들이 사태를 너무 낙관적으로 보고 직무를 태만히 한 것이 공고가 침몰한 가장 큰 원인이라고 봅니다. 또한 공고의 함령이 너무 오래되어 리벳, 수밀문, 파이프 연결부 등 각종 수밀장치가 제 기능을 다하지 못했던 것도 침수와 경사를 가속화하는 원인이 되었지요. 한편으로는 저렇게 경사가 심해졌을 때는 역침수를 실시하는게 낫지 않았을까 하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만, 당시 함수로부터의 침수가 멈추지 않았기 때문에 역침수로 인한 부력상실이 오히려 침몰을 더 가속화하기 쉬웠을겁니다. 어쨌거나 공고의 죽음에 대한 책임은 함 자체의 노령화가 30% 정도, 승조원 행동 미스가 70% 정도를 차지하지 않을까요?


2. 항모에서의 화재진압 : USS 프랭클린

1945년 3월경, 미 해군은 오키나와 침공과 동시에 일부 정규항모들을 일본본토 근해에 파견하여 쉴새없이 공습을 실시하고 있었습니다. 당연히 일본측에서도 이 눈엣가시 같은 미국의 항모들을 격침시키기 위해 여러 가지로 애쓰고 있었죠. 3월 19일 오전에 에섹스급 정규항모인 USS 프랭클린은 이러한 항모 기동부대의 전열에서도 가장 최선단에 서서(일본 본토로부터 100km 이내) 예하의 함재기들로 고베항을 두들기고 있었습니다.



오전 10시경, 갑자기 1대의 혜성 급강하 폭격기가 낮게 깔린 구름층을 뚫고는 프랭클린의 대공포가 반격할 여유조차 주지 않은채 접근하여 2발의 250kg 폭탄을 정확히 명중시켰습니다. 1발은 비행갑판 중앙부에 명중하여 그대로 격납고 갑판과 제 2, 제3갑판을 관통한 후 전투지휘소(CIC)와 파일럿 대기실을 날려버렸습니다. 다른 1발은 비행갑판 후부에 명중하였고 격납고 갑판과 제 2갑판을 관통한 후 제 3갑판에 도달하여 폭발, 때마침 출격 대기중인 함재기를 위해 준비중이던 탄약과 폭탄, 로켓 등에 인화하였습니다. 당시 프랭클린은 일본 공습을 마친 함재기들을 막 수용한 직후 재급유를 실시하고 있었기 때문에 떨어진 폭탄은 그대로 가솔린에 옮겨붙어 함내 곳곳에 화염벽을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화재로 인해 배가 기울고 통제불능의 위기에 빠진 상태]



[상갑판에 구멍이 뚫리고 화재가 발생함]


[격납고의 화재가 극심하여 외부로 연기가 새나오고 있음]

게다가 곧이어 제 3갑판의 화재로 인해 그곳에 있던 폭탄 일부가 유폭하였고, 프랭클린은 그 여파로 인해 우현으로 13도 가량 기울고 함내 통신망도 완전히 단절되어 일체의 지휘통제가 불가능해졌으며 주변 갑판은 화재의 열기로 달아올라서 불가마 속처럼 변해버렸습니다. 승조원 대부분은 폭탄이 폭발할 당시의 충격으로 인해 날아가버리거나 화재로 그을려 사망 혹은 부상을 당한 상태였으며 총 사상자는 사망 724명(중상자가 후송중 사망한 경우를 포함), 부상 265명에 달했습니다. 다행히 이런 참사 속에서도 아직 몇 백명 단위의 생존자들이 살아있었고 (후일 조사한 결과 약 700명 정도) 이들은 서둘러서 소화 및 함의 안정화 작업에 들어갔습니다.


[부상자를 돌보고 있는 Callahan 중위]

이러한 생존자들중 Joseph T. Callahan 중위(군종장교)는 주변의 생존자들을 규합하여 소화반을 구성한 후 남아있는 탄약·폭발물들을 즉각 침수시키거나 화재로부터 안전한 장소로 이동시켰습니다. 또 다른 생존자인 Donald Gray 소위(갑판사관)는 300 여명의 생존자가 식당에 고립되어 있는 것을 발견하여 이들을 안전한 장소로 인도한 후 마찬가지로 소화반을 구성하여 격납고 갑판의 불길을 잡아내는데 성공했습니다.

(*주 : 이 2명은 이 공적으로 인해 의회 명예훈장(Medal of Honor)을 받았습니다.)


[프랭클린에 소화수를 뿌리고 있는 경순양함 산타페]

함내의 생존자들이 이러한 응급조치를 취하던 가운데, 함대 전열에서는 경순양함 산타페(CL-60)와 중순양함 피츠버그(CA-37)가 프랭클린의 현측에 접근하여 즉시 소화지원 작업을 개시하였고 이러한 노력에 힘입어 약 18시간 후에는 화재가 어느 정도 진정되었습니다. 곧이어 구조지원 팀이 프랭클린에 투입되었고 이들은 잔여 화재의 소화 및 함의 안정화, 부상자들의 간호 등을 시작했습니다. 그후 프랭클린은 중순양함 피츠버그에 예인되어 피항지인 울리시 환초까지 이동하였고 거기서 임시수리를 받은 다음 자력으로 진주만까지 회항하여 다시 수리를 받았습니다. 어쨌거나 프랭클린은 최종적으로 1945년 4월 28일에 뉴욕항에 입항하여 도크에 들어갔습니다.


[본국으로 회항중인 프랭클린]


[화재로 인해 엉망진창이 된 비행갑판]

후일담이지만, 프랭클린이 피격될 당시 퇴함 명령 없이 함에서 탈출한 승조원들이 몇 명 있었는데 이들은 함정이 본국에 도착하자마자 모조리 군법회의에 회부됐습니다. 또한 프랭클린 자신은 이 이후 한번도 작전에 투입되지 못했고 다른 자매함들보다 몇 년 빨리 퇴역했습니다. 비행갑판 전체를 포함한 상부구조물들을 완전히 다 들어낼 정도의 대수리를 받았기 때문에 아무래도 피해를 받지 않았던 다른 함들보다는 뭔가 문제가 있을거라고 여겨졌던 모양입니다.

*사례 분석
프랭클린의 생환은 살아남은 생존자들이 피해 확산을 방지하기 위해 재빨리 가연물들을 침수/제거한 것을 가장 큰 요인으로 볼 수 있습니다. 모두들 잘 아시다시피 함정이 피격될 경우 가장 무서운 것이 이런 2차폭발(유폭)인데, 천만다행으로 제 3갑판의 폭발물들이 최초 유폭시 일부만이 폭발하였고 나머지에 인화하기 전에 생존자들이 이들을 모두 침수시키거나 안전한 곳으로 이동시켰기 때문에 더 이상 함체에 피해가 가는 것을 막을 수 있었죠. 또한 데미지컨트롤 체계가 잘 잡혀 있었던 것도 프랭클린이 살아남은 한 요인이었습니다. 앞서 말한 수훈자 2명 모두 기존 보직이 수리/소화와는 큰 관련이 없었으나 위기 발생시 임시 편성된 수리반을 조직하여 소화작업에 들어갈 수 있었던 것은 이러한 위기대처에 대해 개개 승조원 단위까지 훈련이 잘 되어있었기 때문이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프랭클린의 사례를 보다 보면 아무래도 산호해 해전이나 미드웨이 해전시의 항모들과 비교하게 되는데 피격당한 폭탄 수가 달라서 단순비교는 어렵지만 아무래도 프랭클린이 미드웨이의 일본 항모들과 달리 통제불능이나 침몰할 위기에 있다가 살아 돌아온 것은 역시 잘 정비된 데미지컨트롤 능력이 때문이 아닌가싶습니다.


3. 전투시 환기장치 가동의 위험성 : 항모 다이호

[마리아나 해전에 참가하고 있는 다이호]

1944년 6월 중순, 괌-사이판 근해에서는 마리아나 해전이 한창이었습니다. 다이호는 정규항모 쇼가쿠 및 즈이가쿠와 행동을 같이 하며 아웃레인지 전법으로 미 항모 기동부대를 공격하고 있었죠. 6월 19일 오전, 다이호가 한창 함재기들을 이함시키던 와중에 그녀의 전방에서 6발의 어뢰 항적이 포착되었습니다. 바로 매복해있던 미국 잠수함 알바코어호가 1,800m 거리에서 쏜 것이었죠. 다이호는 뒤늦게 회피기동에 들어갔으나 미처 다 피하지 못하고 우현 전방 항공연료 탱크 부근에 1발의 어뢰를 피격당합니다. 이 어뢰는 몇 개의 항공기연료 파이프와 함정연료 파이프를 파괴했으며 전방 엘리베이터도 파손됐지만 다행히 화재도 발생하지 않았고 배의 속도가 약간 느려지는 것으로 그쳤습니다.



즉시 응급수리반이 출동하여 통로에 쏟아진 항공기 연료와 함정 연료를 제거하고 손상된 항공기연료 파이프와 함정연료 파이프를 보수했습니다. 그리고 피격된 연료 탱크에 있던 항공기 연료들을 다른 연료 탱크로 완전히 이송시킨 후 피격 지점 부근으로의 항공연료 흐름을 완전히 차단했죠. 다만 함정연료 시스템은 항공기 연료 시스템과 달리 특정부분의 흐름을 차단할 수가 없었습니다. 수리반은 피격지점의 함정연료 시스템에 대하여 꼼꼼하게 피해조사를 실시했지만 파괴된 부위 이외에는 연료가 새어나온 곳은 없었습니다. 문제는 피격시의 충격으로 인하여 눈에 보이지 않는 미세한 균열이 생기거나 이음새가 느슨해져서 그곳으로부터 연료에 포함된 휘발성 가스가 새어나오는 사태였는데 이것만은 수리반도 당장 확인할 방법이 없었습니다.

이때 일본 항모들은 정제를 거치지 않은 원유를 함정용 연료로 사용하고 있었는데, 원유 내에는 휘발성이 강한 성분들이 포함되어 있기 마련이며 이런 휘발성 성분들이 함정의 연료 시스템 내부를 돌아다닌다는 것은 상황에 따라서는 치명적인 결과를 불러올 수도 있는 위험천만한 일이었습니다. 특히 휘발성이 강한 가솔린을 취급하는 항공연료 시스템은 함정의 설계 단계에서부터 휘발성 가스 누출에 대한 대비를 철저히 하게 되어 있었으나, 원래 휘발성이 거의 없는 중유를 사용한다는 전제 하에 설계되어 있던 함정의 연료시스템은 상대적으로 휘발성 가스의 누출 사고에 취약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더 그러했죠. 어쨌거나 수리반은 적어도 당장은 큰 위험이 없다고 판단하고 환기장치를 가동했습니다. 하지만 피격지점 부근의 함정연료 시스템에서는 어디선가 연료에 포함되어 있던 휘발성 가스가 계속 새어나오고 있었고 이 가스는 통풍장치를 통해 함내 구석구석에 뿌려져서 점차 축적되기 시작했습니다.

15시경, 수리반은 함내의 거의 모든 부서에서 휘발유 냄새가 진동한다는 보고가 계속해서 들어오자 당황하기 시작했습니다. 피격지점 부근 어디선가 함정 연료에 포함되어 있던 휘발성 가스가 누출되고 있는 것이 틀림없다고 판단한 보수관은 피격지점 부근의 통로를 차단하고 환기장치의 가동을 중단했으나 이미 환기장치를 통해 함내 구석구석에 축적되어 있던 휘발성 가스를 처리하기엔 너무 늦은 결정이었습니다. 결국 15시 28분에 다이호의 격납고 갑판에서 강력한 폭발이 일어났고 장갑판이 덮인 비행갑판은 마치 엿가락처럼 구불구불하게 휘어졌으며 격납고 바닥에는 거대한 구멍이 뚫렸습니다. 살아남은 승조원들이 소화를 시도했으나 함내에 충만해 있던 휘발성 가스 때문에 화재가 순식간에 번져나가 도저히 소화가 불가능한 상태였습니다. 그리고 18시 30분경에는 남아있던 휘발성 가스에 의해 2번째 폭발이 발생했습니다. 1차 폭발보다도 훨씬 규모가 컸던 이 폭발로 인해 아직 함내에 남아있던 대부분의 장병들이 즉사했으며, 다이호는 폭발 직후 전복되어 최초 피격으로부터 9시간만에 1,650명의 장병들과 함께 침몰했습니다.


[다이호의 최후]

*사례 분석
최신의 정규항모가 어뢰 1발로 인해 침몰했다는 것은 정말 어이없는 일일 것입니다. 그러나 함정 연료 시스템은 상대적으로 휘발성 성분 누출에 대해 취약하므로 사실 다이호의 사례는 굳이 응급수리의 실패로만 보기는 어렵습니다. 다만 전투중에는 함정을 운용하기 위한 최소한도의 설비를 제외하고는 환기 장치를 닫아놓는 것이 원칙이며 전투가 소강상태에 접어들었을 때에만, 그것도 보수관의 허가를 받아야 환기장치를 가동하도록 되어있습니다.

(*주 : 전투중에 열어놓을 수 있는 최소한의 배관 계통은 다음과 같습니다.)
① 함내 핵심설비를 제외한 기타 압축공기 밸브와 조타실
② 주 계통에 해당되지 않는 소화관 밸브
③ 치명적인 기계로 가는 냉각수 계통의 밸브
④ 기관실로 가는 음료수 계통
⑤ 기관실, 발전실, 펌프실의 통풍관
⑥ 주요 전투지휘소로 가는 통풍
⑦ 이상과 같은 역할을 하는 이외의 각종 부속


그만큼 전투중의 환기장치 가동은 함의 생존을 좌우하는 위험한 선택인 것이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이호의 수리반원들이 휘발성 성분의 누출위험을 사전에 알고도 환기장치를 가동시켰다는 것은 조금 무책임한 행동이 아니었나 하고 생각하게 됩니다. 이 경우에도 승조원이 함이 본래 지녔던 데미지 컨트롤 능력을 저해한 인재가 아니었을까요?




p.s. 잘 알려지진 않았지만 초노급전함 어디셔스의 침몰도 데미지 컨트롤의 실패 사례라고 할 수 있겠죠. (자세한 정황은 배진호님의 「메탈플리트」에 가서 보시길.)
http://metalfleet.hihome.com/audacious.htm

[참고문헌 / 자료 출처]
- 모 기관의 교범류 3권
- 김추성님의 글, 「필리핀 해전」
- Naval Historical Center (http://www.history.navy.mil)
- Navsource Naval History (http://www.navsource.or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