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에서 사무라이가 생겨난 것은 10세기경으로 추정된다. 인민과 토지를 호족이 사유한 고대 씨성제하에서는 호족들간에 서로 더 많은 인민과 토지를 차지하기 위해 싸움이 끊이질 않았다. 이 호족들간에 싸움을 종식시킬 수 있는 방법은 강력한 왕권이 출현하여 호족을 억누르고 인민과 토지를 국가가 통괄하는 '율령제'밖에는 없었다. 당시 율령제는 당나라나 한반도에서 시행되고 있었기 때문에 호족세력을 누르고 율령제로 개혁을 단행할 수 있는 세력은 외국에서 공부한 유학생이나 유학승밖엔 없었다.
이럴때에 당과 한반도에서 돌아온 유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당시 조정의 실권을 장악하고 있던 소가씨를 타도하고 씨성제사회를 율령제사회로 전환시키는 개혁을 단행했다. 이것이 바로 '다이카 개신'(645)이다.
그러나 모든 토지를 국가가 소유하고 관료나 일정 연령에 오른 사람들에게 토지를 균등하게 분배했다가 죽었을때 국가가 그 토지를 환수하는 율령제도 시간이 지남에 따라서 토지를 지급받아야 할 관료나 인민의 수는 늘어나는데 나누어 줄 토지는 부족해 결국 8세기후반에 들어와서는 더 이상 시행할 수 없게 되었다. 지급할 토지가 부족하자 국가가 토지회수나 분배를 포기했기 때문이다.
이에 몰락한 농민들은 토지를 버리고 유랑하게 되고, 힘이 있는 신사(神社)나 사원 그리고 귀족이나 지방 호족들은 유랑농민들을 모아 토지를 개간하거나 방치된 토지를 모아 방대한 장원을 형성하게 되었다. 다시 토지의 사유제가 인정되는 장원제가 나타나게 된 것이다. 장원의 소유자인 영주는 국가 공권력이나 다른 세력으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자기의 장원을 명목상으로는 중앙의 유력 귀족에게 기증하고 자신은 실질적인 재지영주(在地領主)로서 그 토지를 계속해서 소유, 관리해 나갔다. 당시 가장 유력한 귀족인 후지와라씨가 기증 받은 토지가 전국 장원의 1/12이나 되었다고 한다.
율령제하에서는 국가가 인민에게 토지를 분배하는 대신에 인민에게 병역의무를 지웠으나 율령제가 무너지고 장원제가 시행됨으로써 인민에게 병역을 지울 수 없게 되자 조정은 각 지방의 치안을 그 지방 호족들에게 일임했다. 이에 재지영주들은 장원의 치안유지와 외부로부터의 침입, 국가의 간섭을 배제하기 위해 무장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전국적으로 개인적 무력집단, 즉 무사계급이 발생하게 된 것이다. 무사층은 내부적으로 일족이나 추종자, 하인, 예속농민 등을 무장시킨 소집단이었다. 그들은 그 지방에서는 낭도들을 거느린 소집단의 왕이지만 중앙에 올라가면 귀족들을 호위하는 사람에 지나지 않았다. 존귀한 사람을 호위한다는 의미의 사부라우가 명사화되어 사무라이(侍)라는 말이 생기고 한자표현도 侍에서 武士로 바뀌기 시작한 것이다. 따라서 당시에는 사무라이라 하면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것처럼 단순히 칼을 차고 다니는 무사라기보다는 낭도를 거느린 우리나라의 화랑과 같은 존재라고 말 할 수 있겠다.
당시 각지에서 발생한 소(小)무사단의 결합에 중심적 역활을 한 것이 미나모토(源)씨, 다이라(平)씨, 후지와라(藤原)씨 등이었다. 이들은 군사력을 갖지 못한 조정을 대신해 변방의 난을 평정해나가는 동안 그 세력을 확대하면서 일족 내 또는 다른 무사들과의 결속을 다져나갔다. 그 과정에서 자연히 무사단 사이 또는 무사단 내부에 세습적 주종관계가 생겨나게 되었다.
12세기가 되면 이들은 중앙귀족의 요청으로 권력투쟁에 개입하고 마침내 다이라씨와의 싸움에서 승리한 미나모토 요리토모(源賴朝)가 무가의 패권을 장악한 다음에 1185년 도쿄 근처의 가마쿠라(鎌倉)에 독자적으로 막부를 설치하여 쇼군(將軍)의 자리에 올랐다. 이것이 최초의 사무라이 정권인 가마쿠라막부이다.
'역사 ,세계사 > 일본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공 경 (천황을 보좌하는 신하들) (0) | 2012.12.13 |
---|---|
관 령 (0) | 2012.12.13 |
막 부 (0) | 2012.12.13 |
전국 시대 일본 천황 (0) | 2012.12.13 |
일본의 갑옷은 왜 그리도 화려할까? (0) | 2012.12.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