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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위그르족 향비

구름위 2012. 10. 9. 13: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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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속의 향비는 청나라에 속한 위구르족의 여인이었다.

몸에서 고운 향기가 난다고 해서 향비라 불렸으며,

건륭황제의 명으로 고향을 떠나 왕비가 되었지만 곧 죽게 되고

그 시신을 다시 고향으로 옮겨 안장하였다.

 

베이징에는 청의 황제들이 잠들어 있는 동릉이라는곳이 있다.

그곳엔 청조 말기에 권세를 누렸다는 서태후, 즉 자희태후도 이곳에 잠들어 있다.

살아 생전에 그녀가 권력을 다투었던 광서제와 함께 묻혀 있다는 것도 역사의 아이러니다.

또 그곳에서 들은 바로는 마지막 황제 푸이의 무덤도 그곳으로 이장할 것이라 한다.

 

그러나 그곳에서 세인의 관심을 끄는 것은 유릉 속에 잠들어 있는 향비라는 여인이다.

유릉은 건륭제의 무덤이니, 향비는 건륭제의 비인 셈이다.

유릉에는 건륭제의 황후를 비롯한 후궁들 36명이 함께 잠들어 있는데

향비도 그 중의 하나이다. 재미있는 사실은 향비의 무덤이 이 동릉 뿐만 아니라

저 신장 위구르 자치구의 서쪽 끝에 자리잡은 카슈가르에도 있다는 점이다.

 

 

   (위구르족은 러시아인과 비슷한 외모를 가지고 있다) 

 

아마 이 세상에서 무덤 두개를 가지고 있는 여인은 거의 없을 것이다.

물론 위구르에 있는 향비묘는 개인묘가 아니라 가족묘이다.

그러므로 향비묘라기 보다는 종교귀족의 가족묘라고 하는 것이 맞겠지만

이곳 사람들은 향비묘라고 부른다.

 

정설은 없으나 지금까지 밝혀진 바에 따르면 향비는

이 지역 종교귀족 가문의 딸이었는데, 청조가 건륭제 때 군사 침략을 단행한 뒤,

청의 장군이 황제에게 선물로 바치기 위해 그녀를 사로잡아 북경에 보냈다고 한다.

 

그녀는 카슈가르에서 한 족장의 부인이라고도 했고, 또 정혼한 사람이 있다고도 하였다.

그러나, 이 여인은 22살 때 청나라의 자금성에 들어온 뒤, 29세 때 사망하였다.

어떤 이는 25년간 자금성에서 살았다고도 한다. 생활은 무척 힘들었던 듯하다.

 

              (향비가 안장된 위구르의 카슈가르 가족묘) 

 

망향병에 시달렸다는 흔적도 있다. 궁중 음식을 거의 입에 대지 않았기 때문에

건륭제는 이를 위해 그곳에서 나오는 재료로 음식을 만들었을 정도였고,

그녀가 위구르의 전통 복장도 입을 수 있도록 배려하였으며,

특별히 그녀를 위해 위구르의 조복까지 제작하였다고 한다.

 

그럼에도 그녀는 이 궁정에 적응하지 못했던 것이다.

향비의 실존 근거는 청나라에서 벼슬을 지낸 이탈리아 사람이 그린

[향비융장상]에서 그 근거를 찾을 수 밖에 없다.

 

이 그림에는 투구를 쓰고 무장 차림을 한 여인이 있는데

이 그림에 작자미상의 제목으로 다음과 같은 글이 쓰여 있다.

"향비는 위그르족의 왕비로서 자색이 뛰어났다. 태어날 때부터 그녀의 몸에서는

특이한 향기가 있어, 나라 사람들이 이름하여 향비라 불렀다. 청나라 건륭제가 이 소문을 듣고

회부에 출정하는 장군 조혜에게 기필코 향비를 데려오도록 명하였다.

회부를 평정한 조혜는 과연 향비를 데리고 북경에 이르렀다."


         (제일크고 아름다운 다홍색 비단으로 씌워진 향비의 관) 

 

향비를 본 건륭제는 한눈에 매료되고 말았다.

확실히 향비는 건륭제의 마음을 사로잡을 만한 뛰어난 미모와 이국적인 체취를 간직하고 있었다.

그런데 북경에 온 향비는 항시 칼을 빼어들고 죽음으로써 건륭제의 접근을 거부하였다.

그녀가 제 명대로 살지 못하고 죽은 것은 독살하였거나 자살하였기 때문이이라고 한다.

자살설은 그녀 자신이 이미 정혼한 몸이었기 때문에 항상 칼을 가슴에 품고

황제의 접근을 불허하였기 때문에 나온 것이다.

 

황태후가 이 사실을 알고는 그녀를 불러 들여 소원을 묻자,

죽는 것 뿐이라고 말해서 결국 별실에서 자살케 하였다고 한다.

황태후가 환관들을 시켜 목졸라 숨지게 했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어찌 되었든, 향비에 얽힌 이야기는 청의 카슈가르 정복 과정에서 나타난 비극이고,

 

향비는 그에 저항한 여성인 셈이다. 때문에 그녀의 유해는 동릉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무덤은 인간의 산물 중에서 가장 보수적인 산물일 것이다.

카슈가르의 향비 묘에도 그러한 의미가 담겨 있는 듯이 보인다.

아마 위구르인들은 향비를 통해 민족적 자존심을 드러내고 싶었을 것이고,

그 욕망은 아직도 계속되고 있기 때문이다.

                   (향비묘 바깥에 있는 일반 위구르족의 묘) 

 

 

출처 : http://cafe.daum.net/mycap/8UM/122

출처 : BOB&밀리터리 매니아
글쓴이 : 카이사르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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