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는 기원전 750년전 로물루스에 의해 건국되었다.
로마라는 이름도 로물루스라는 이름에서 유래되었다.
당시 로마는 겨우 수천명이 모여사는 조그만 부락 수준이었는데
그들은 대부분 주변 부족들에게서 이탈해 온 아웃사이더였다.
당시 이탈리아 반도를 양분한 세력은 북쪽의 에트루리아인과
남부의 그리스인이었으며 로마 주변엔 강대한 부족들이 많았으나
그들은 중소 도시국가로 통일되지 않은 채 발전하고 있었다.
이 때문에 약소국이었던 로마는 그들의 관심밖에 있었다.
1대 왕 로물루스는 라틴족 출신으로 39년간 통치하였는데
건국초기에 서민을 위한 민회와 귀족을 위한 원로원을 만들어
왕에 대한 견제와 권력세습을 막았으며 이는 로마의 공화정 기초가 되었다.
당시 로마는 떠돌이 사내들이 많아 여자들이 거의 없었다.
부족의 권력에서 밀려난 자들과 정치적 추방을 당한 자
그리고 나름의 신념으로 부족을 이탈한 젊은이들로 이뤄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추방자들의 특구였던 작은 로마에 젊은이들이 몰리고
정치적, 군사적으로 안정이 이루어지자 로물루스는 곧
강대한 국가 건설의 꿈을 꾸기 시작한다.
국가가 성장하려면 인구가 늘어야 했다.
하지만 이들에게는 가정이 없었다.그들은 대부분이 아직 젊었고
또한 이 가난한 작은 집단에 시집 오겠다는 다른 부족의 처녀들도 없었다.
그래서 로물루스는 3천명에 이르는 총각들을 위해 특단의 조치를 내린다.
그 대상은 불쌍하게도 바로 인접한 사비니족이었다.
사비니족은 인구가 3만명으로 아주 온순한 부족이었다.
그들은 싸움을 싫어했기에 평소 로마의 청년들과도 우호적으로 지냈다.
또 가끔 서로 축제에 초대하며 우의를 다지기도 했다.
로마는 바로 이러한 점을 노렸다.
그들은 곧바로 화려한 축제 준비를 하고 사비니족을 초청하였는데
젊은이들의 축제라 칭하고 그곳의 많은 젊은이들을 맞이했다.
8천명의 사비니족 젊은이들은 아무 의심없이 그 축제에 참가했고
풍성하게 준비된 술과 음식에 모두가 기쁘게 축제를 즐겼다.
시간이 지나면서 사비니족은 점차 술에 취하게 되었다.
자정이 넘자 축제가 벌어지는 벌판 한가운데 햇불이 크게 타올랐고
그 진풍경에 감탄한 사비니족들이 모두 한가운데로 모였다.
이것을 신호로 거짓으로 취한척했던 로마인들이 주변에 감춰놨던
무기를 들고 이들을 재빨리 에워쌌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라 사비니족들은 많이 놀라고 당황했으나
이미 술에 취한 상태였고 무기도 없는 처지라 공포감에 사로잡혔다.
그중에 몇몇은 햇불을 집어들고 이에 맞섰으나 곧바로 살해됐다.
소란함도 잠시 분위기가 진정되자 로마의 왕 로물루스가 가운데로 나왔다.
“친애하는 사비니족 젊은이들이여, 일이 이렇게까지 된 걸 유감스럽게
생각하오. 우리는 다만 그대들의 여인들과 결혼하고 싶을 뿐이오“
이 말과 함께 사비니족의 남자와 여자들이 강제로 분리되었다.
그들은 서로 떨어지지 않으려고 비명을 지르며 발버둥쳤지만
단호한 로마인들의 창과 칼 앞에 굴복할 수 밖에 없었다.
분리된 그들은 숲속에 마련된 수용소에 각각 격리되었다.
나중에 소식을 들은 사비니족 전사들이 새벽에 달려왔지만
인질들을 죽이겠다는 로마의 협박에 모두 돌아갔다.
다음날 아침 로마와 사비니족 대표단이 벌판에서 다시 만났다.
로마의 왕 로물루스는 3천명의 처녀를 로마에 양보한다면
앞으로 2년 동안 노동력을 제공하겠다는 제의를 했다.
사비니족은 어쩔 수 없이 이를 약속하였고 로마는 남자들을
모두 돌려 보내는 대신 13세 이하의 지도층 자녀 20명을 인질로 요구했다.
이로써 양측의 협상은 이루어졌고 사비니족 젊은이들은 돌아갔다.
로마에 남겨진 사비니족 처녀들은 나이에 맞게 로마인들에게 분배되었고
로마인들은 약속대로 2년 동안 노동력을 제공해 주었을 뿐만 아니라
이웃 부족의 침략에도 병력을 지원해 주기까지 하였다.
약속된 2년의 시간이 흐르자 로마엔 자녀들이 많이 태어났고
가정을 이루고 사는 로마는 아이들의 소란함으로 활기에 넘쳤다.
그리고 사비니족의 지도층 자녀들도 무사히 돌려 보내졌다.
그러나 로마의 행복도 잠시 곧바로 사비니족이 쳐들어왔다.
사비니족은 2년전의 치욕을 결코 잊지 않았고, 인질들이 모두
무사히 돌아오자 곧바로 5천의 군사를 일으킨 것이다.
로마인들은 황급히 일손을 놓고 부랴부랴 무기를 챙겨들었다.
그리고 양측의 접경인 들판에 서서 서로를 노려봤다.
먼저 양측의 선발대 수 백명이 치열한 교전을 벌였다.
이때 저 멀리서 수 천명의 여인들이 아이들을 안고 달려왔다.
그녀들은 친정의 아버지와 오빠, 그리고 자신의 남편이자
아이의 아빠가 서로 칼을 맞대고 싸우는 광경에 경악하여 울부짖었다.
여인들의 완강한 저항에 부딪친 양측의 병사들은 싸움을 멈췄다.
그리고 누구랄 것도 없이 무기를 내려 놓고 힘 없이 되돌아갔다.
그 이후 로물루스는 사비니족 전체를 로마의 시민으로 받아들인다.
이때부터 그의 탁월한 리더십으로 이웃 부족들이 하나씩 편입되었으며
로마는 전쟁에 패한 부족에게도 자신들과 동등한 권리와 자유를 주었다.
이에 대해 어느 로마 역사가는 “패자조차도 자기들에게 동화시키는
이 방식만큼 로마의 강대함에 이바지 한 것은 없다“고 할 정도였다.
[출처 : 로마인 이야기 / 사비니족 여인들의 운명 / 로마의 천년비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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