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차 대전 때 스위스 국민 단합시킨 ‘치즈 퐁듀’
- 치즈 퐁듀
독일 침공 위협에 군·민이 힘 합쳐 자위 운동
스위스 치즈연맹, 퐁듀를 단결의 상징으로…
제2차 세계대전 때 스위스는 조국이 침략당하면 알프스를 배경으로 게릴라전을 전개할 계획이었다. 사진은 나치 독일의 공격에 대비한 스위스 탱크부대. |
단합의 상징, 스위스 치즈 퐁듀. 2차 대전 전후로 스위스를 지키는 단합의 음식으로 등장했다. |
스위스 육군이 사용해 스위스 칼(army knife)만큼이나 유명해진 퐁듀 세트. |
요즘은 퐁듀에 찍어 먹는 햄버거까지 등장했지만, 퐁듀는 원래 녹인 치즈에 빵을 찍어 먹는 스위스 전통음식이다. 알프스 산간 지역에서
겨울을 나기 위해 발달한 요리로 스위스가 지독하게 가난했던 시절의 생활상이 반영돼 있다.
알프스 산골짜기의 겨울은 춥다.
목동들은 돈이 넉넉하지 않으니 겨울을 보낼 음식을 충분히 장만하지 못했다. 한겨울에 접어들면 집에 남아있는 음식이라고는 가을에 수확한 포도로
담근 와인과 딱딱하게 굳은 치즈, 한입 깨물어 먹다가 자칫 치아가 부러질 정도로 말라버린 빵 덩어리가 전부였다.
알프스의 목동들은
할 수 없이 포도주를 끓이고 여기에 치즈를 녹여 딱딱한 빵 덩어리를 찍어 먹었다. 굳은 빵에 녹인 치즈를 묻히자 빵이 부드러워져 한결 먹기가
편한 데다 알프스의 찬바람에 얼어붙은 몸도 녹일 수 있었다. 눈 덮인 스위스 가정에서는 이렇게 겨울을 보냈고, 목동들은 겨울철 퐁듀를 함께
먹으며 힘을 합쳐 젖소를 돌봤다. 17세기 스위스에서 퐁듀는 어려움을 견딘 음식, 목동이 단합하며 먹는 음식으로 발달했다.
따지고
보면 스위스 퐁듀뿐만이 아니다. 이탈리아의 알프스 산골 마을에서도 이탈리아식 퐁듀가 발달했다. 가축을 돌봤던 스위스 목동과 달리 포도농장에서
일했던 이탈리아 농부는 치즈 퐁듀 대신 야채 퐁듀를 만들었다. 유럽 멸치인 엔초비를 뜨겁게 끓여 만든 생선소스에 야채를 찍어 먹는 것으로 정식
이탈리아 이름은 ‘바냐 카우다’이다. 이 야채 퐁듀는 프란치스코 교황이 좋아하는 음식으로 유명하지만, 이탈리아 알프스 지방의 포도농장 농부들이
겨울철 농장에서 일할 때 함께 먹은 단결의 음식으로도 널리 알려져 있다. 치즈가 됐건 야채가 됐건 퐁듀는 이래저래 단합의
상징이다.
겉으로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스위스 국민 단결의 상징인 퐁듀는 제2차 세계대전 무렵 나치의 침입으로부터 스위스를 지키는
데 한몫을 한다.
스위스는 영세 중립국이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유럽 전체가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렸을 때도 스위스는
중립국으로 전쟁에 휩쓸리지 않았다. 스위스가 단순하게 “우리는 앞으로 중립국”이라고 선언해서 중립이 지켜진 것이 아니다. 스위스는 몇 차례 나치
독일의 공격을 받을 뻔했지만 한 차례도 실제 공격을 당하지는 않았다. 다양한 원인이 지적되지만 그중 하나는 독일이 침략해오면 맞서 싸우겠다는
결연한 의지였다.
“탄약이 떨어질 때까지 싸워라, 총알이 떨어지면 총검으로라도 싸워라. 절대 항복은 없다. 죽을 때까지
싸워라.” 제2차 세계대전이 시작되자 스위스군 사령관 앙리 기장(Henri Guisan) 장군이 독일 침공에 대비해 한 말이다. 전쟁 전까지
제대로 된 정규군조차 없었던 스위스는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직전 국민동원령을 선포했다. 그러자 단 7일 만에 40만 명의 병력이
소집됐다.
스위스는 국경을 침범한 독일 공군기를 수차례에 걸쳐 격추해 버린다. 독일이 이를 빌미로 스위스 침략 계획을 세웠지만
스위스군은 독일이 공격해 오면 알프스 산악 지역으로 후퇴, 알프스 산맥을 중심으로 게릴라전을 펼치며 끝까지 저항한다는 전략을 수립했다. 그리고
후퇴하면서 스위스의 철도와 교량을 스스로 폭파해 독일과 이탈리아에도 절대적으로 필요했던 교통망을 붕괴시키겠다고 선언했다.
독일로서는 스위스 군대와 국민의 대대적인 저항, 그리고 자국도 이용하고 있던 스위스 금융과 교통시스템의 파괴를 감수하면서까지 이
나라를 공격해 점령하기에는 부담이 적지 않았다. 이런 결연한 의지는 스위스가 중립을 유지할 수 있었던 배경 가운데 하나인데 여기에는
1930년대부터 스위스에 퍼졌던 자위 정신(Spiritual Defense)이 바탕이 됐다. 나치와 파시즘에 대응해 스위스의 민주주의를 지키자는
정치운동이었다.
이 과정에서 퐁듀가 스위스의 국민음식으로 자리 잡게 된다. 퐁듀는 앞에서 말한 것처럼 알프스 목동들이 겨울철
유일하게 남아 있는 먹거리인 포도주와 치즈, 굳은 빵을 활용해 추위와 배고픔을 이겨냈던 음식이다.
치즈 생산업자들의 모임인
스위스치즈연맹에서 자위 운동의 일환으로 퐁듀를 이용한 레시피를 만들어 퍼트렸다. 알프스 목동들이 퐁듀를 먹으며 단합한 것처럼 스위스 국민들 역시
퐁듀를 먹으면서 힘을 합쳐 나라를 지키자는 것이다. 그리고 스위스군에 퐁듀를 공급했다. 소집된 병사들은 둥글게 둘러앉아 뜨겁게 끓인 치즈에 빵을
찍어 먹으며 전우애를 다졌다. 퐁듀가 스위스 단합의 상징이 된 것이다.
사소한 음식 하나에 지나지 않지만, 그리고 실제로 퐁듀가
단합의 계기가 됐는지도 증명할 방법은 없지만 스위스치즈연맹까지 동참할 정도로 스위스의 자위 운동은 국민적 지지를 얻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에도 스위스치즈연맹의 퐁듀 보급 운동은 계속됐다. 스위스 군인들이 퐁듀를 쉽게 먹을 수 있도록 스위스 퐁듀 세트를 지원했는데,
지금 아미 나이프(army knife)라고 부르는 스위스 칼과 함께 스위스 퐁듀 세트가 유명해진 배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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